입을 귀에 걸고
다섯 살 손녀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다가 입을 귀에 걸고 라는 글이 나왔다. 대뜸 “할머니, 입을 귀에 건다는 게 뭐예요? 입을 어떻게 귀에 걸어요?” 라고 눈을 동그랗게 뜬다. 순간 나도 잠시 갸우뚱했다.
“그러게 말이다. 아하! 싱글벙글 웃다가 보면 입이 귀밑에 까지 가는 것처럼 보이니까 입이 귀에 걸린다고 하는 거야. 자아, 이렇게 웃으면 입이 양쪽으로 자꾸만 올라가다가 귀에까지 가잖아?” 그 후론 손녀딸은 “입을 귀에 걸어요.” 라는 말을 자주한다.
“흥미진진이 뭐예요, 할머니?” “으음 그건 너무 너무 재미가 있어서 갈수록 더 재미가 있어진다는 말이야.” 흥미진진한 일들이 이 세상엔 너무나 많이 널 기다리고 있단다. 라고 눈으로 말해주고 있다. 손녀 딸애의 앞날이 흥미진진하고 입이 귀에 걸리는 일들만 가득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된다.
하루는 ‘이츠고너비어 해피데이’ 라는 노래를 배워와서는 흥얼거렸다. 어린애라 흡수가 빠르다. 그래서 어린아이는 백지와 같다고 하지 않는가. 나도 덩달아 “이츠고너비어 해피데이” 하고 흥얼거리다 보니 정말 꼭 그렇게 될 것 같았다.
정말 좋은 노래가사이다. 아침에 데이케어로 가는 아이한테 “이츠고너비어 해피데이” 라고 말하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늦잠꾸러기 할머니가 이럴 때만은 손을 흔들어주려고 일부러 일어나 매무새를 가다듬고 나온다. 그 애의 눈에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흥미진진할 것이다.
발레리나가 꿈이라는 다섯 살 손녀에게 발레를 배운다. 몇 달 배운 그 애가 뭘 하겠는가마는 “할머니 학생 이렇게 하세요. 발을 요렇게요. 손을 요렇게요” 하면서 가르쳐준다. 그러다간 “나 무서운 선생님이야, 선생님 화나면 무섭다.” 하면서 엄포를 놓기도 한다.
첫 손주를 보았을 때 할머니 소리가 어설프기만 했다. 손주가 넷 정도 되니까 이젠 정말 내가 진짜 할머니가 되었구나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의 첫 아기가 겨우 말을 배워 처음으로 “엄마” 하고 발음을 했을 때의 가슴 뛰던 그 감격이 아직도 생생한데 할머니라니…
그러다가 점점 자라가며 이런저런 재롱을 떠는 손주들을 보면 할머니라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구나 하고 생각한다. 이 아이들이 커서 남자친구 얘기도 하고 여자친구 얘기도 하겠지? 아름다운 사랑도 느끼고 결혼도 하겠지? 그리고 또 엄마도 아빠도 되겠지? 생각은 꼬리를 문다. 우리 할머니가 날보고 느끼셨을 것 같은 생각들.
할머니의 환갑 되던 해에 내가 태어났고 10살 이후엔 할머니가 서울로 오셔서 함께 사셨다. 그래서 사춘기 시절을 할머니와 보내고 할머니 모시고 살다가 결혼을 했다. 할머니는 다정하신 성격도 아니고 오히려 내게는 엄격하신 편이었다. 그 시절에는 거의 집에 일하는 사람이 있었는데도 늘 손을 쉬지 않고 무언가 하찮아 보이는 것 같은 일을 하고 계셨다.
할머니는 바늘방석이나 골무를 만들어 나누어 주시기도 하고 콩나물 콩을 밥상에 놓고 고르고 계시는 모습도 보았다. 사람들은 그것이 할머니의 건강비결이라고 했다. 그리고 아주 노년에는 안경 쓰시고 커다란 글자의 옛날 글씨로 된 성경책을 읽으시다가 십자가의 슬픈 장면에선 눈물도 짓고 그러다가 낮잠을 주무시기도 했다.
할머니는 늦가을이 되면 솜을 두어 아버지 명주 바지 저고리를 지으셨다. 아버지는 퇴근해오시면 할머니가 손수 지으신 명주 한복으로 갈아입으셨다. 아주 간혹 어떤 때는 그 위에 두터운 모직 오버코트를 입고 외출하시는 때도 있었다. 아버지의 따뜻한 겨울이 할머니의 손끝에서 시작되었다.
초등학생이던 어린 내 동생과는 정월이 아니라도 윷놀이나 반질 반질 길이든 길쭉한 박달나무로 된 주사위 놀이도 하셨는데 늘 할머니 옆에서 사랑을 듬뿍 받으며 맴돌던 동생이 그래서 성격이 느긋하고 낙천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동생은 학교 다녀오면 얼른 할머니가 계시는 안방으로 가서 할머니 방의 장롱을 열고 그 안에 있는 사탕이나 과자나 그런 먹을 것을 꺼내어 먹고는 할머니의 동무가 되어드렸다.
지금 생각하면 할머니는 일부러 손자를 옆에 끌어들이기 위해 항상 먹을 것을 그 속에 감추어 넣어 두셨을지도 모른다. 나는 일부러 먹을 것을 뒤지러 할머니한테 가지는 않았다. 그리고 어느 만치 커있었기에 할머니 드시라고 혹은 동생 주라고 모르는 체 했을 수도 있겠다. 동생과 나는 열 살이나 차이가 났었으니까.
우리 할머니의 곡조 없이 부르시던 찬송가 소리. 언젠가 주일 미사 때 노인 한 분이 내 옆에서 그렇게 부르시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할머니의 찬송가가 생각이 났었다. 아마도 요즈음의 랩의 원조였을까? 그래도 언제나 따뜻한 할머니 방 아랫목과 언제나 아랫목에 깔려있는 부드러운 명주로 된 할머니의 손때 묻은 그 따뜻한 이불. 나는 거기에 두 손 넣고 드러눕기를 좋아했다.
할머니는 “일러라.” (일어나라) “물러라.”(물러나라) “이니라” 라는 옛날 말투를 쓰셨다. “종의 종 노릇 멈의 멈 노릇이니라. 종이나 행랑어멈에게 시키는 것도 다 알고 있어야 시킬 수 있느니라. 어서 밖에 나가 부엌일 좀 거들어라.” 라고 하셨지만 내가 안 나가도 부엌에서 누가 부르지는 않았기에 살살 피해 다녔다. 그래서 결혼 후에 내가 내 살림을 하게 되었을 때 그제서야 할머니 말씀이 절실하게 생각나기도 했다.
어른 앞에서 밖으로 나갈 때는 뒷태를 보이지 말고 뒷걸음으로 물러나야 한다고 하셨다. 그냥 방문을 확 열고 쑥 나가는 게 아니라고 하셨다. 할머니는 안동 권씨는 양반이니라 라고 하시며 긍지를 지키려고 하셨던 것 같다.
할머니는 신식공부는 하지 않으셨지만 한글로 고문과 같은 문장의 편지를 멀리 있는 동생에게나 미국에 있는 손녀딸에게 쓰기도 하셨는데 할머니가 보시던 성경책의 글씨도 역시 그렇게 어려운 아래아가 달려있는 훈민정음 글씨에 가까운 한글로 된 것이었다. 할머니의 성경책을 읽으며 나도 고문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할머니의 틀니는 아드님이 자주 바꾸어드렸다. 엄마는 질색을 했지만 나는 그 틀니를 내 입에도 넣고 보기도 하고 씻어드리기도 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엄마와 할머니, 나와 할머니는 관계가 달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삼 남매를 두셨고 거기서 손자 손녀가 열댓 명이나 되었지만 아마도 내 동생과 내가 가장 많이 할머니의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내 동생은 아버지 쉰에 본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말 그대로 금지옥엽이었다. 내게는 남동생을 보았다고 장하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아마도 아들에게만 쏠리는 시선에 내가 질투할까 봐 그러셨을 것이다.
나와 할머니의 다른 점이라면 나는 손녀딸에게 “아이구 예뻐” 라는 말을 자주 한다는 점이다. 내가 이렇게 할머니를 기억하는 것처럼 나의 작고 귀여운 손녀도 언젠가는 나를 기억하게 될까? 손녀딸을 보며 나의 할머니 생각을 한다. (2012)
2015-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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