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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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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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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85
2018-10-06
9월의 비

 
9월의 비

 

 

 

4월에 비를 맞으며
이 하이웨이를 지날 때
나는 길가의 집들을 알지 못했다
이 아침 햇빛은 온 세상을 발가벗기고
연둣빛 유니폼을 입고 행진하는 나무들
민들레꽃은 밤새 황금 카펫을 깔아놓아
나는 달려서 세상에 들어서는 것 같았다
그러나 같은 길 따라
오늘 내가 집을 향할 때
9월 하순의 어스름 길에 깔리고
문득 불을 켜는 길가의 아파트들
거긴 들어갈 일 없는 
아무리 오가도 스쳐만 가야 하는 성벽
낯선 길 이대로 달려  
하늘과 땅이 맞붙은 저 끝 어디
불 끄지 않은 마을에 닿을 수 있을까 
표지판 없어도 환한 거리
비 그친 골목에 들어설 수 있을까.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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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묵
71088
9185
2018-10-04
백두산의 추억

 

 

백두산 1

 


백두산처럼 어수룩한 산
처음 보았네
어떤 산은 낮으면서 높고
일만 이천의 봉우리들
밧줄과 피켈 없이는
봉우리 하나도 내놓지 않는데

 

단 하나뿐인
반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수천수만의 발자국이 몰려와도
눈썹 하나 꿈틀하지 않고
일제히 토해놓는 그들의 함성
잠자코 귀담아 듣네

 

그들이 비탈을 내려갈 때
어린 아이 올라탄 소
잔등처럼 부드러운 능선
마을의 등불이 보일 때까지
더 낮게 등마루를 엎드리는
높으면서도
한없이 낮기만 한 산
백두산처럼 어수룩한 산
처음 보았네.

 


- 1995년 8월 15일 백두산 등정을 하고 와서 -

 

 

 

시작(詩作) 노트 -- 백두산을 오르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중국사람들이 오르는 길과 한국 사람들이 오르는 길이다. 지난 20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은 백두산 꼭대기에 올랐다. 전에 중국사람들이 오르는 길을 통해 몇번 오를 수 있었으나 문대통령은 사양했다고 한다. 어떤 기업체에서 겨우 계장이나 지내다가 캐나다로 이민 온 나이지만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백두산이 지니고 있는 주체성의 암반이 그만큼 우리들 가슴 속에 뿌리가 깊지 않았나 싶다.
아래는 고은의 유명한 시 ‘그 꽃’이다.

 

 

그 꽃/ 고은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물론 이 시는 ‘백두산’과 관계가 없지만 ‘백두산’의 모습을 어쩌면 그렇게 간략하게 잘 연상시켜주는지 모른다. 멀리서 바라보는 정상은 웅장하다거나 신비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내려오면서 발견하게 되는 백두산의 아름다움이란 인간의 작은 가슴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가 어렵다.
정상에서 내려다 보는 한반도는 백두산이 그 한복판에 있고 우리가 한민족의 주체로서 수천년을 그 영토 안에서 살아왔음을 저절로 느끼게 한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이라는 애국가의 가사가 빈말이 아님을 실감하게 한다. 
앞으로 남북관계가 더 개선됨으로써 더 많은 동포들이 한국사람들이 오르는 코스를 따라 백두산 등정이 이뤼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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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묵
70907
9185
2018-09-25
평양의 추억

 


 

▲평양 대동강변의 스카이라인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다. 덩달아 오늘의 평양을 호출해 본다. 23년 전 광복50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북한을 처음 방문했을 때 시선을 놀라게 한 것은 생소한 건축양식들이었다. 건물들만 봐도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차이를 느낄 정도였다. 
북한 쪽 건물들은 소련과 중국의 영향권을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건물들이 필요 이상의 재료를 쓴 것처럼 무겁고 투박했다. 어떤 것들은 북경에서 보던 건물들을 그대로 옮겨 놓지 않았나 의심이 들기도 했다. 
자연히 남한의 건물들은 일본이나 미국의 건물들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남북은 그러니까 건축에서도 서로 다른 진영에 소속돼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번에 평양의 스카이라인을 호출해 보니 그림이 바뀌어 있었다. 건물들이 더 이상 진영논리에 묶여 있지 않음이 실감된다. 중국이나 러시아의 투박한 혹은 너무 장중한 건축 스타일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대신 서방세계의 산뜻한 디자인과 색상들로 탈바꿈한 것이다.
대동강변의 여명거리에 새로 건설된 건물들은 먼저 밑그림을 그린 다음 개별 건물들이 전체 그림의 조화를 완성시키는 단계를 밟은 것처럼 보인다. 그림 전체가 주는 미적 효과의 조화 때문에 시선이 다채로워진다. 그간 북한은 고난의 행군이니 북한붕괴론 이니 하는 악재를 견뎌내야 했다. 그런데도 부분적으로나마 발전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으니 경이로운 일이다.


23년 전 만났던 안내원의 얼굴이 떠 오른다. 이름도 잊었지만 그의 친절은 잊히지 않는다. 그때 나는 토론토 사는 지인의 부탁으로 미화 수백 불을 그의 형에게 전달해야 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그의 형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전쟁 중 북한편에 서게 된 사람이었다. 돈을 전달할 경우 당사자를 직접 만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자세히는 몰라도 일부만 본인에게 전달되고 일정기간 돈이 은행에 예치된다는 얘기가 있었던 것도 같다. 그런데 그 안내원의 친절은 달랐다. 얘기를 듣더니 다음 날인가 본인이 직접 호텔로 나와 돈을 전액 받을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지 않는가. 그는 금강산 그림 한 점도 선물했다. 화선지에 먹물로 그린 소품이었다. 대가성을 염려하지 않아도 될 만큼 그의 미소는 부드럽기만 했다. 


모처럼 조국을 방문한 해외동포에게 조용히 인심을 베푸는 그런 배려였다. 그런 사람들의 인정이 살아있기 때문에 아무리 남북의 대결이 공고하다 하더라도 같은 민족끼리는 어느 때고 손을 잡을 수 있다는 믿음이 움터 올랐다.

대통령이 방문을 하고 정상회담을 하는 것은 사진이나 같이 찍자고 하는 건 아닐 게다. 금강산관광이나 개성공단건설은 이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한 다음 열린 과실들이었다.

전쟁의 방법이 아니라 평화의 방법으로 민족 상생의 가능성을 열어 보인 성취였다. 그러나 당장 전쟁이라도 날 것처럼 두 사업들을 폐쇄시킨 게 지난 정권들이다.

이제 과수원의 문이 다시 열렸으면 한다. 당장은 제재에 묶여 불가능한 현실이지만 이번 정상회담이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낼 수 있기를 간곡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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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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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3
온타리오 주의 성교육

 

 

 

외모가 직업을 받쳐주는 사람이 있다. 고등학교 때 음악선생은 슈벨트를 판박이 한 외모였다. 그 슈벨트가 불멸의 어록을 남겼다. 


“이때까지 음악점수를 매기는데 낙제점을 준 학생이 딱 하나 있다. 그건 ‘낮에 낮에 우는 새는 배가 고파 울고요, 밤에 밤에 우는 새는 님이 그리워 운다.’를 부른 학생이었다.”


일반고등학교에 음악시간은 있으나 마나 할 때였다. 한 반에 70명 되는 학생들이 줄줄이 나와 자유곡을 부르면 슈벨트는 한 소절이 미처 끝나기 전에 점수를 매기는 것이었다.


요즘이야 초등학생들에게도 콘돔이라는 단어가 보편화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약 70년 전 ‘밤에 밤에 우는 새는 님이 그리워 운다’라는 민요가 슈벨트에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야한 노래였나 보다.

이곳에 온 후 여기에도 그 비슷한 노래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Birds do it, bees do it/ Even educated fleas do it/ Let’s do it, let’s fall in love’ (새도 하고 벌도 하지/ 배우지 않은 벼룩도하지/ 우리도 하자꾸나, 사랑을 하자꾸나)
역시 성의 선진국에서 만들어진 노래다 보니 가사도 더 적나라하다. 1928년 프랑스 작곡가에 의해 발표됐는데 같은 해 브로드웨이에서 상영된 뮤지컬 ‘빠리(Paris)’에 소개됐다고 한다. 


금년 여름 온타리오 주의 정권이 자유당에서 보수당으로 바뀐 뒤 지각변동이 몇 가지 일어났다. 그 중 하나가 초등학교 학생들의 성교육이다.
2015년 자유당 정권 시절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칠 성교육 방침이 새로 정해졌다. 사회 현실에 맞기 때문에 교사들은 물론 보건계통 종사자들도 반대가 없는 무난한 내용이어서 금년 가을부터 실시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새로 집권한 보수당이 제동을 건 것이다. 심지어는 그 이전 방침대로 가르치지 않는 교사가 있으면 ‘신고’하라는 장치도 마련했다.
이전의 자유당 정권의 주수상 캐슬린 윈은 동성애자였다. 그녀는 남편이었고 다른 여성이 아내로서 퍼스트레이디 노릇을 하는 커플이었다.
보수당 정권의 이번 반발은 그녀에게 결코 유쾌한 대접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동성애가 커밍아웃한 게 언제인가. 그건 이제 세계적인 현상이 아닌가. 


온타리오 주의 수 만 명 교사들도 2015년 이전의 성교육 방침을 따르라는 것은 시대를 역행하는 것이라고 반대하고 있다. 무엇보다 성은 이제 사이버 세계에서 무한대의 확장을 멈추지 않고 있다. 동성애자 가정, 성 정체성, 성적 동의의 문제는 이미 노출된 지 오래된 영역으로 전염성은 이제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온라인 상의 성적교신(Sexting)은 국경을 넘어 가히 우주 공간을 넘나들면서 퍼지고 있다. 그에 대한 안전을 강구하거나 상응하는 대책도 새로운 도전이다.
그걸 염두에 둔다면 2015년 이전의 성교육으로 돌아가자는 보수당 정권의 정책은 확실히 문제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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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묵
70436
9185
2018-09-06
소창길 목사님을 기리며

 

 

소창길 목사님이 지난 수요일(29일) 밤 별세하셨다고 한다. 내가 보낸 카드가 화요일쯤 도착했을 텐데 아마 읽어 보시지도 못하신 거 같아 애석하다. 소 목사님을 마지막으로 뵌 것은 지난 7월 어느 날이었다. 병원 엘리베이터 앞에서 한 사람은 올라가고 한 사람은 내려가는 순간이어서 충분히 인사를 할 수 없었다.


오자마자 대학교 동창 주소록을 찾아 전화도 해 봤고 이메일도 보내 봤으나 소용 없었다. 그러던 중 지난 8월 중순 경 쓰신 카드가 도착했다. 그 동안 제가 받은 사랑과 은혜에 새삼 감사 드린다는 목사님의 카드였다. 그 말이야 말로 바로 내가 하기 위해 병원에서 오자마자 동창주소록을 뒤적이지 않았던가

.
소 목사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신 건 1996년 여름의 일이다. 그 전 해인 1995년은 조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50년이 되는 해여서 남북이 경축행사를 크게 벌였다.


북한도 없는 살림에 해외동포 500여 명을 초청해서 행사를 치렀는데 조국의 분단을 고민하는 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참가하게 됐다. 열악한 생활수준이야 이미 잘 알려졌기 때문에 예민한 시선은 가질 필요가 없었다. 불행히도 그 해 여름 북한은 유래 없는 물난리를 겪고 있었다.


원산시 중심가에는 도로에 물이 무릎까지 올라와서 침수된 트럭들이 여기저기 방치돼 있었다. 그 트럭들은 남한에선 오래 전에 사라진 일제시대의 유물인 구형 트럭들.
그 이듬해 나는 북한방문 기행시집 ‘백두산 들쭉밭에서’를 한국에서 출판했는데 같은 시기 북한은 전 해의 홍수(북한식 용어는 큰물) 피해를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시작했다.
몇 백만이 굶어 죽었다는 소문이 날 정도의 대재난이었으니 자존심을 지킨다고 해결될 사안이 아니었다. 남한의 어느 목사는 옥수수를 몇 포대 등에 지고 두만강 가에서 북한동포들에게 직접 전하는 동포애를 발휘하기도 했다.


토론토에서도 의식 있는 젊은이들이 주동이 돼 북한에 쌀 보내기 운동을 시작하고 블루어 거리에서 모금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북한 동포는 같은 민족으로서는 구제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또한 적국의 국민이기 때문에 타도의 대상이라는 게 더 굳어있던 시기여서 쌀보내기 운동도 한계가 있었다.


그때 기획했던 게 기행시집의 출판기념회였다. 수익금은 큰물 피해 구제금으로 기부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장소를 구하는 난관에 봉착했다. 출석 교회 강당에서 하면 되는 건데 이미 예약이 돼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때 구원투수가 돼 주신 분이 소창길 목사님이시다.
강당을 외부에 빌려 줄 때 목사님 단독으로 결정했다가는 어떤 욕을 먹을 지 모르는 게 교회다. 게다가 보수성이 강한 토론토에서 맹목적인 사람들이 종북좌파라고 딱지를 붙일 수도 있는 사람에게 빌려줬다간 두고두고 흠집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소 목사님은 그 주 주말에 행사를 할 수 있도록 신속한 결정을 내려 주셨다. 덕분에 3천백불을 모금해서 북한에 송금할 수 있었다. 그 후 한국적십자사가 주관했던 북한결핵아동돕기운동도 소 목사님이 추진했으나 이명박, 박근혜 정권 때문에 중단된 일도 있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장 9절)’ 소 목사님이 카드에 적어 놓으신 말씀이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은 게 분명한데 홀연 천국으로 떠나신 소 목사님,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는 말씀의 인용을 겸허히 받으며 당신이 걸어간 발자취를 다시 한 번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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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묵
68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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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03
마거릿 애트우드

 

 

 

 

한국의 인터넷 일간지를 보는데 커서가 쏜살같이 날아가 기사 한 꼭지를 명중한다. 마거릿 애트우드(Margaret Atwood)가 누구인가. 매년 노벨 문학상 후보에 이름이 빠지지 않고 오르는 슈퍼급 작가가 아닌가. 헌데 그녀의 소설이 한국에서 번역돼 출간됐단다.


나이가 나하고 비슷한 그녀는 1939년 오타와에서 태어났다. 시와 소설은 기본이고 평론, 극본, 동화는 물론 전천후 작가이니 캐나다 문학을 얘기하자면 그녀의 이름부터 들먹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추억의 파일을 들춰 보니 1990년 대 초 한국의 시 잡지 ‘현대시’에 ‘박물관에서 길을 잃다’(100% 정확하진 않은 제목이지만) 라는 그녀의 시를 내가 소개하기도 했다.


출간되자 마자 홍보가 되는 애트우드의 기사를 보는 순간 한심한 내 처지가 떠올랐다. 그저께 저녁인가 미국에 있는 아내의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올해 5월 초 발간된 내 장편소설 ‘칼의 길’을 읽고 서울의 친구들과 50권을 교보문고에 주문을 하고 전자결제까지 했는데 품절이라고 환금이 됐다는 것이다.


그건 액수를 굳이 밝힐 필요가 없는 자비출판이었다. 주인공인 미주 3대 독립운동가 중 한 사람인 박용만 선생을 존경한 나머지 그에게 헌정하기 위해 출판한 것이다.
헌데 배분이 좀 희한한 출판이었다. 5백권을 찍어 3백권은 출판사가 갖고 2백권만 저자에게 준다는 거였다. 2백권만 주면서 출판사는 이미 적지 않은 출판비를 받았으니 거기서 인쇄비며 인건비는 건지고도 남았을 게 아닌가. 남은 3백권은 파는 대로 출판사의 추가 이익이 될 거로 여겨진다.


책이 출판되자 마자 한국과 미국에 있는 지인들이 책을 구입해줬다. 어떤 사람은 최고 1백권까지 다량 구입을 해 동창들이나 주위에 나눠줬다. 심지어 미국 사는 아내의 친구도 책을 받아 읽어 본 다음 50권을 구입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허나 문제는 그럼에도 출판사가 재판을 못하겠다고 알려왔다는 사실이다. 이유인즉슨 50권 보고 재판을 했다가 나머지가 안 팔리면 재고로 쌓이고 손해가 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150권 이상 주문을 해야 찍겠다는 것이다. 출판사로는 손 하나 깜짝 않고 손익계산부터 하는 것이다. 캐나다에 50년 가까이 산 사람으로 한국의 출판 사정을 모르니 뭐라고 신소리를 할 수 있겠는가.


이쯤이면 쑥스러운 한마디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친구가 좋다 해도 그렇지. 어느 누가 50년을 외국에 나가 사는 사람을 무슨 이유로 이 친구 저 친구 다량 구입을 하겠다고 나섰겠는가 말이다.
먼저 받아보고 읽어 보니 책을 사서 친구들에게 돌려도 괜찮을 정도니까 그랬을지 모르는 개연성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아내의 친구가 50권을 추가 주문했을 때 출판사는 품절됐다고 거절할 게 아니라 접근이 가능한 매체를 통해 책을 좀 홍보하려는 노력부터 보이는 게 순서가 아닐까. 하지만 쓸데 없는 얘기다. 나야 무명작가이니 더 이상 처지를 한탄하고 싶지도 않다. 


캐나다의 작가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굳힌 마거릿 애트우드의 이번 신작소설 ‘The Heart Goes Last(심장은 마지막 순간에)’이 한국에서 좋은 반응을 받았으면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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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묵
68309
9185
2018-08-24
황금 버거

 

 
 
 토론토의 여름은 박람회(The Exhibition)의 고개를 넘어간다. 이미 140년 전부터다. 고개를 넘으면 그 동안 부산했던 여름은 차분한 가을로 들어간다. 여기 저기 흩어져 떠돌던 삶들은 학교로 직장으로 군소리 없이 복귀한다. 애들이 어릴 때 몇 번 찾았던 박람회장에 가면 저절로 발길이 급해졌다. 유령의 집(Ghost House)도 기웃거리고 굴렁쇠를 던져 곰 인형을 타겠다고 동전을 아끼지 않았다. 


지난 금요일(8월 17일) 박람회가 문을 열었다. 주 수상과 토론토 시장이 행사장 무대에 보였고 영국 의장병을 본 딴 행렬도 보였다. 박람회는 돈 놓고 돈 먹기의 사행심을 노리는 게임들이 대부분이지만 핫독이며 햄버거도 불티나듯 팔린다.


금년엔 100불짜리 햄버거가 등장했다. 황제나 돼야 먹을 수 있는 초호화판 특식이다. 이 황금버거는 24캐럿 금가루를 빵에다 입힌 것이다. 버거에는 5온스의 메이플 베이컨, 완두콩 베이컨, 치즈, 양파, 상추, 토메이토 등이 들어간다. 이 빵을 주문한 사람에게는 황금의자에 앉히는 게 최고의 예우를 하는 거 아닐까.


금을 먹어 본 것은 근래의 일이다. 작년 한국에서 방문 온 지인이 금가루가 들어 있는 술을 갖다 줘서 신기했다. 그 후 누가 공진단이라는 비싼 한약재를 선물했다. 면역력을 올리는데 좋은 약재라면서 옛날엔 임금님한테만 바쳤다고 한다.


공진단은 우황청심환 크기인데 금가루로 덮여 있다. 왕이 먹던 약재인데다 값이 비싸 금이 건강에 아주 특효인 줄 알았다. 그러나 검색을 해봤더니 일장일단이 있다는 것이다. 금이 들어가 혈액순환을 돕는다는 얘기도 있고, 금은 중금속이니 몸에 쌓이면 나쁘다는 설명도 있다. 


돈을 없애가면서까지 결사적으로 섭취할 영양소는 아니라는 느낌이다. 꽤 오래 된 얘기인데 한국에선 황금굴비가 등장해서 화제가 됐다. 영광에서 잡은 굴비를 소금에 절인 다음 몸 전체를 금가루로 입힌 것인데 10마리 한 셋에 2백만 원이었다.


굴비 한 마리가 20만원이었으니 이번 토론토 박람회에서 선보이고 있는 황금버거보다 2배 이상의 값이 아닌가. 한국의 식약청은 술과 과자류에만 금박 사용을 허용하고 있는 규정을 들어 황금굴비의 제조와 판매를 금지시켰다고 한다. 


혈액순환과 피부미용에 좋다는 소문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이른바 금가루 식품. 그러나 지나치게 섭취하면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조심해야 할거 같다.


지긋지긋하게 찌던 더위도 이제 한 풀 꺾인 모양새다. 박람회장의 하늘 위로 에어 쇼의 폭음이 지나가면 여름은 고별 인사를 한다. 노동절 연휴도 끝나고 박람회도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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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묵
67198
9185
2018-08-23
죽음의 축제

 

 

 

 

 무법자들이 거리에 출몰한다. 토론토를 두고 하는 말이다. 마치 서부활극 시대로 돌아간 듯하다. 우리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가 언제였나. 그땐 영화가 문화였다. 특히 서부활극은 짜릿했다. 
영화의 제목들은 지워졌지만 얼굴에 색칠한 인디언들을 장총으로 명중시키거나 무법자들이 나타나면 권총으로 한 놈 한 놈 쓰러뜨릴 때마다 극장 안은 박수가 터지곤 했다.


‘하이눈’은 1952년 작 흑백영화로 서부영화의 고전이다. 보안관 게리 쿠퍼는 임기가 끝나 신혼의 아내 그레이스 켈리를 데리고 마을을 떠날 참이었다. 그런데 5년 전 체포하여 사형판결을 받게 했던 살인범 프랭크 밀러가 사면으로 주립 교도소에서 풀려나 세 명의 부하들과 함께 자신에게 복수하러 온다고 하지 않는가. 주민들은 신부를 생각해서 얼른 떠나라고 한다.
그러나 도망치더라도 4명의 악당들은 복수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게리 쿠퍼는 현장에서 대결을 결심한다. 주민들 중 그의 편에 서서 싸울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혼자서 악당들을 상대할 때 아내인 그레이스 켈리만이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마침내 악당들을 처치한 게리 쿠퍼는 보안관 배지를 땅에 던지고 아내와 함께 마을을 떠난다.
근래 토론토에 총성이 요란하다. 지난달 22일(일) 저녁 그릭 타운으로 알려진 댄포스(Danforth Ave.)에서 한 무법자가 총기를 휘두르는 바람에 대형 살상이 벌어졌다. 16명이 총격을 받았고 애꿎은 여자 둘이 사망했다. 10살밖에 안 되는 소녀와 18살 된 처녀가 날벼락을 맞고 목숨을 잃은 것이다.


“내 앞에서 모두들 꺼지란 말이야.” 29세의 후세인이라는 자는 그렇게 외치며 체스터 지하철역에서부터 약 400미터를 달리며 무차별 난사를 했다고 한다.
지난 11일 오후 5시경 핀치/레슬리에 있는 아파트단지 놀이터에서도 또 총격사건이 벌어졌다. 지하차고에서 빠져 나오던 벤츠 차량이 선루프를 열고 근처에 있던 사람들에게 총을 발사했다. 그러자 그쪽에서도 응사가 있었고 서로 간에 총격전이 벌어져 20발 이상이 발사됐다고 한다.
이제 총기사고는 토론토가 서부활극의 무대가 됐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미국의 도처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발등에 불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캐나다에서 총기를 보유하고 있는 사람의 수는 약 350만 명이 될 것으로 추정되며, 총기의 수는 1,200만~1,500만 정에 달한다고 한다. 총기사고가 다반사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미국의 경우는 10명 중 약 9명이 총기를 소지하고 있으며 작년 사망자 수는 1만4천 명이었다고 한다.
캐나다는 미국처럼 쉽게 총기를 구입할 수 없지만 경찰에 의한 신원조회를 거치면 가능하며 장총(long gun)과 라이플용 숏핸드 및 숏건(shorthand for rifle and shotgun)이 주를 이룬다.


‘하이눈’에서는 보안관이 4명의 악당을 한 놈씩 죽일 때마다 관객은 환호성을 질렀다. 정의가 승리할 때마다 일종의 ‘죽음의 축제’가 벌어진 셈이다. 그러나 지난달 그릭 타운에서 벌어진 총기사고는 어떻게 설명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루가 멀게 개죽음이 벌어질 수 있다는 ‘죽음의 재앙’일 뿐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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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sangmook
이상묵
67124
9185
2018-08-15
고은의 반격

  

 


 
칼럼은 왜 쓰는가. 건방질지 모르지만 누가 쓸 수 있는가. 요즘은 검증되지 않은 글쓰기가 무제한 허용되다 보니 정제되지 않은 글들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아무나 글을 쓸 수는 있지만 아무나 함부로 글을 써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 때문에 실제 능력은 충분하지만 스스로 발표를 자제하는 강호의 실력자는 부지기수다.


따라서 공공매체에 글을 올리려는 사람은 최소한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 먼저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문학단체나 문학매체가 넘쳐나는 세상이니 그런 데서 모집한 작품 심사를 통과하는 검증단계를 거치는 노력도 유념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꼭 그런 통과의례를 거치지 않더라도 매체에 인쇄된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일정 수준 이상이 되도록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또한 인정을 받건 받지 않건 칼럼을 쓰려면 이슈에 대해 어느 정도 깊이 알고 있는 건지 먼저 점검해야 할 것이다. 그 이슈에 대해 자기만의 차별화된 소수의견을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도 묵과해선 안 될 것이다.


아무리 열심히 써봐야 사람들이 읽지 않는 것은 차별화된 글이 아니라 구태의연하고 뻔한 시류에 묻혀가는 글이기 때문이다.


지난 3월 12일자 칼럼에서 나는 ‘괴물’이라는 제목의 글을 써서 올린 적이 있다. 당시 최영미라는 시인이 노시인 고은을 ‘괴물’이라고 지칭하며 성추행을 일삼았다는 사실을 폭로한 데 대해 반론을 제기한 글이었다.


그 사려 깊지 않은 폭로 때문에 고은은 한국 사회 전체의 지탄을 받고 그의 시는 교과서에서 삭제되리라는 등 사면초가에 빠지게 됐다.


나의 반론은 설사 그가 파티에서 여성들이 보는 앞에서 아랫도리를 내놓는 ‘변태’를 벌여서 성추행의 혐의가 있다고 해도 독재자 전두환을 찬양한 서정주처럼 ‘변절’을 한 것과 같은 수준은 아니니 그렇게 흥분할 사안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 최영미는 제주도의 어느 카페에 고용돼 차를 팔고 있던 중 주인이 없을 때 금전출납기를 털어 서울로 도망친 전력이 있으니 털어서 먼지가 나고도 남을 사람이다.


근래 한국에서 성범죄로 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안희정 전 충남지사와 이윤택 연극감독이다. 두 사람은 실제 성관계를 가졌던 상대방으로부터 고소를 당해 재판이 진행 중이다.


성폭력으로 입건되지 않은 고은은 지난 7월 25일 최영미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고소를 제기했다. 그녀에게 1천만 원, 또 다른 성추행 의혹을 폭로한 박진성 시인에 대해 1천만 원, 그리고 해당 내용을 보도한 신문사에 20억 원을 배상하라는 소송을 지난 17일 서울중앙 지법에 낸 것이다. 


회식 자리에서 자기의 아랫도리를 보이는 것은 분명 성추행이다. 하지만 최영미의 섣부른 단죄 역시 신중한 짓은 아니다. 이것이 내가 이슈를 분석해서 내놓은 3월 12일자 칼럼의 결론이다.


남들이 이구동성으로 그를 질타할 때 “진실이 밝혀지고 논란이 정리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겠지만 나 자신과 아내에게 부끄러울 일은 하지 않았다.”고 한 고은의 말을 나는 믿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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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sangmook
이상묵
67011
9185
2018-07-31
‘자전거의 길’

 

 

자전거의 길

 

 

 

 

고향으로 돌아온 대통령은
밀짚모자를 쓰고 손녀를 뒤에 태운 채
논두렁길을 달린다
들판과 하늘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그 속에 자전거는 하나의 정물(靜物)이 된다.

 

다운타운 바쁜 교차로 한 귀퉁이에
자전거 한 대 서 있다
특별히 흰 페인트로 칠해 놓았고
앞에 명패를 보니 타던 사람의
탄생과 사망의 날짜가 인각돼 있다
그날 큰 트럭이 와서 그를 덮치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디를 달리고 있을까.

 

사람이 다니는 인도(人道)에서 밀려나고
차가 다니는 차도(車道)에서도 밀려나면
자전거는 하늘길을 달려야 한다는 말인가.

 

사람 다니는 인도(人道)에서도 밀려나고
차 다니는 차도(車道)에서도 밀려나면
자전거가 가야 할 길은
하늘길밖에 없단 말인가.

 

 
 


한달 정도 사이에 2대의 ‘Ghost Bicycle’을 보았다. Ghost Bicycle은 혼령자전거라고 해야 될 거 같은데 사고로 숨진 자전거 타는 사람을 기념하기 보다 그것을 어떻게 막을 것인지를 세상에 알리기 위함이다. ‘소녀상’을 세우는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닌가 한다.
이전 칼럼에서도 이미 다룬바 있지만 토론토에서 보행자나 자전거 타는 사람들의 1년 사망자 수가 캐나다 전체 총격 사망자수와 맞먹고 있다. 자전거는 자동차가 홍수를 이루기 전엔 별 문제가 없었다.
내가 대학교 1학년 때만해도 남대문 근처만 복잡할 뿐이었다. 친구와 나는 자전거를 빌려 경인가도를 달렸다. 몇 군데를 빼놓고는 길가에 집이 보이지 않았다. 
겨울방학에 귀향하면 그 친구의 자전거를 끌고 눈에 덮인 시골 신작로를 무한정 달렸다. 뒷좌석이 없으니 한 사람이 달릴 때 다른 사람은 그 뒤를 쫓아 달리는 식이다. 더 이상 엔진의 과열을 피하기 위해 우린 초가집 주막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20년 전엔가 갔더니 경인가도 양쪽으로 논들이 보이지 않았다. 풍경화는 사라지고 하늘길 마저 끊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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