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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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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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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257308
18892
2025-01-16
완벽한 죄인

 

출애굽기 39장에는 제사장 예복 만들기, 40장에는 성막을 봉헌하는 장면이 기록돼 있다. 눈에 띄는 것은 반복되는 구절이다. ‘주께서 명하신 대로’.

 

주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아론이 입을 거룩한 옷을 만들었다.(39장 1절) 에봇 위에 띨 허리띠는 에봇을 짤 때와 같은 방법으로, 금 실과 청색 실과 자주색 실과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모시 실로 짜서, 에봇과 한데 이어 붙였다. 이것은 모두 주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한 것이다.(5) 이스라엘 지파들을 상징하는 이 기념 보석들을 에봇의 양쪽 멜빵 위에 달았다. 이는 주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한 것이다.(7) 청색 실로 꼰 끈으로 가슴받이 고리를 에봇 고리에 매되, 정교하게 짠 에봇 띠 조금 위에다 매어서, 가슴받이가 에봇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였다. 이는 주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한 것이다.(21) 이렇게, 제사를 드릴 때에 입을 수 있게, 겉옷 자락을 돌아가며, 방울 하나 석류 하나, 또 방울 하나 석류 하나를 달았으니, 이는 주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한 것이다.(26) 가늘게 꼰 모시 실과 청색 실과 자주색 실과 홍색 실로 수를 놓아, 허리띠를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은, 주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한 것이다.(29) 그것을 청색 실로 꼰 끈에 매어서 제사장이 쓰는 관에 달았다. 이것은 주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한 것이다.(31) 이렇게 해서, 성막, 곧 회막의 공사가 완성되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주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그대로 다 하였다.(32) 이스라엘 자손은, 주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그대로 하여, 일을 완수하였다.(42) 모세가 그 모든 일을 점검하여 보니, 그들이, 주께서 명하신 그대로 하였으므로, 그들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43)

모세는, 주께서 그에게 명하신 것을 모두 그대로 하였다.(40장 16절) 또 성막 위에 막을 펴고, 그 위에 덮개를 덮었다. 이는 주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한 것이다.(19) 궤를 성막 안에 들여놓고, 휘장을 쳐서 증거궤를 막았다. 이는 주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한 것이다.(21) 상 위에는 주께 바치는 빵을 차려 놓았다. 이것은 주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한 것이다.(23) 주 앞에 등잔을 올려놓았다. 이것은 주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한 것이다.(25)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피웠다. 이것은 주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한 것이다.(27) 성막, 곧 회막 어귀에 번제단을 놓고, 그 위에 번제물과 곡식제물을 바쳤다. 이것은 주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한 것이다.(29) 회막에 들어갈 때와 단에 가까이 갈 때에 그렇게 씻었다. 이것은 주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한 것이다.(32)

모세가 주께서 명하신 대로 했을 때 “그 때에 구름이 회막을 덮고, 주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찼다(34절)”.

 

차분하게 읽기가 마음에 부담스러울 정도로 성경은 ‘주께서 명하신 대로’를 반복해서 강조했다. 하지만 실제로 모세를 비롯해 어느 누구도 여호와의 율법과 명령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하게 행할 능력이 없었다. 있었다면 애초에 죄인을 대신해 피를 흘리는 희생제사가 필요 없었을 것이다. 성경은 내내 모든 선지자와 등장인물을 통해 인간의 불가능을 증거한다.

출애굽기에 이어진 레위기에서는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이런 제사의 종류는 너무나 촘촘한 그물처럼 짜여 있어 어떤 사람도 죄에서 빠져나갈 여지가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래서 죄는 인간의 어떠한 행함을 뛰어넘어 인간 존재, 그 자체를 가리킨다.

 

“누구든지 증인 선서를 하고 증인이 되어서, 자기가 본 것이나 알고 있는 것을 사실대로 증언하지 않으면 죄가 되고, 그는 거기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 누구든지 부정한 모든 것, 곧 부정한 들짐승의 주검이나, 부정한 집짐승의 주검이나, 부정한 길짐승의 주검에 몸이 닿았을 경우에는 모르고 닿았다고 하더라도, 그는 부정을 탄 사람이므로, 깨닫는 대로 그 죄를 속하여야 한다. 그가 사람 몸에 있는 어떤 부정한 것, 곧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를 부정하게 할 수 있는 것에 몸이 닿을 경우에, 그런 줄을 모르고 닿았다고 하더라도 그는 부정을 탄 사람이므로, 깨닫는 대로 그 죄를 속하여야 한다. 또 누구든지 생각 없이 입을 놀려, 악한 일을 하겠다거나, 착한 일을 하겠다고 맹세할 때에, 비록 그것이 생각 없이 한 맹세일지라도, 그렇게 말한 사실을 잊고 있다가, 뒤늦게 알고서 자기의 죄를 깨달으면, 그 죄를 속하여야 한다. 사람이 위에서 말한 것들 가운데서 어느 하나에라도 잘못이 있으면, 그는 자기가 어떻게 죄를 지었는지를 고백하여야 하고, 자기가 저지른 죄에 대한 보상으로, 주께 속건제물을 바쳐야 한다.”(레위기 5장 1~6절, 표준새번역)

 

죽은 짐승의 사체에 자신도 모르게 몸이 닿았다는 이유로 성경은 그 사람을 죄인으로 부른다. 생각 없이 주절거린 것도 죄다. 율법의 조문 가운데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면 성경은 죄인으로 판정한다.

사실 이 같은 구약의 진술은 예수님의 산상수훈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예수께서는 인간이 행위를 통해 의인으로 판정될 수 있는 여지를 꼼꼼하게 차단하셨다. 스스로도 어떻게 통제할 수 없는 마음까지 죄의 영역에 집어넣으신 것이다. 이제 인간은 ‘주께서 명하신 대로’의 영역 밖으로 추방됐다. ‘완벽한 인간’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죄인만 가득할 뿐이다.

 

“율법을 따르면, 거의 모든 것이 피로 깨끗해집니다. 그리고 피를 흘림이 없이는, 죄를 사함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히브리서 9장22절, 표준새번역)

제사는 그 자체로 피다. 죄인의 죄를, 소나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 등에 덮여 씌워 피를 흘리는 것이다. 죄인을 대신해 희생제물이 죽는 것이다. 피 흘림, 즉 대신 죽음을 통해서만 죄인은 죄의 사슬에서 해방된다.

그러나 동물의 제사는 모형일뿐 실제로 사람을 살릴 수는 없다. 이것이 복음이다. 복음은 “정녕 죽으리라”는 저주에서 건짐을 받는 길을 보여준다.  

 

‘주께서 명하신 대로’와 ‘피’는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연결된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에베소서 1장4~7절)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 하시기 전에 구원 계획을 완성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해 “주께서 명하신 대로” 모든 것을 성취하신 것이다. (사장/편집인)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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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229248
18892
2025-01-09
자유, 민주라는 ‘짝퉁 복음’을 파는 자들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 3개월 만에 시내산에 당도했다. 출애굽기 19장에서 여호와께서는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약속하셨다.

백성들은 “일제히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8절) 하고 맹세했다. 그들은 24장에서 모세가 언약서를 낭독했을 때도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7절) 하고 입을 모았다.

그리고는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이 출애굽기 31장까지 세세하게 주어진다. 31장 마지막에서 여호와께서는 이 율법을 직접 글로 쓰신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셨다.

 

그러나 “명령대로 다 행하겠다”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맹세는 깃털만큼의 무게도 갖지 못했다. 32장에서 그 유명한 금송아지 사건이 벌어진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간 하나님을 대면하는 사이 백성들은 아론을 찾아갔다.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1절). 이 구절은 32장 23절에서도 똑같이 되풀이된다.

 

다시 출애굽기 19장 4절로 돌아가 보면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내가 이집트 사람에게 한 일을 보았고, 또 어미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를 업어 나르듯이,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나에게로 데려온 것도 보았다”고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는 “내가 너희를 데리고 나왔다”고 분명히 말씀하시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 모세”라고 말한다.

그들은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의 생활과 도무지 관련이 없는 것 같은 여호와 하나님께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에게만 관심이 있었다. 초점은 ‘우리’에 맞춰져 있는 것이다.

 

“너희는, 나 밖에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은이나 금으로 신들의 상을 만들지 못한다”(20장 23절)고 앞서서 말씀하셨으나 이스라엘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모세의 형인 아론도 다르지 않았다. 여호와께서는 출애굽기 28장에서 “너는 이스라엘 자손 중 네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 곧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그와 함께 네게로 나아오게 하여 나를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되”(1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제사장이 된 아론 역시 여호와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기는 백성들과 마찬가지였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아론이 보고 그 앞에 제단을 쌓고 이에 아론이 공포하여 이르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32장 4~5절).

 

이 장면이 오늘날 소위 말하는 ‘기독교’와 겹쳐지는 것은 ‘우리’라는 단어 때문이다.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말씀, 복음이 아니라 ‘우리’에 있다.

여기서 ‘우리’는 ‘나’라는 존재의 확장이다. 다른 말로 고쳐 의미를 명확히 하면 “나를 위하여, 나를 인도할 신”이다. 그것은 ‘나 = 신’이다.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 같이 된 인간이 도무지 피할 수 없는 병적 증세다. ‘하나님 놀이’에 푹 빠진 존재들이 모여서 ‘나를 위해’ 성경도 읽고, 찬송도 부르는 곳을 오늘날 사람들은 ‘교회’라고 일컫는다.

그것을 가장 적나라하게 표출하는 자들이 교회라는 이름을 내걸고, ‘자유’와 ‘민주’를 부르짖는 집단이다.

물론 자유와 민주라는 가치는 인간들이 찾아낸 이념 가운데 어쩌면 가장 효율적이다. 내가 가장 편하게 살 수 있는 장치라는 말이다. 이것을 가장 잘 요약한 문장은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이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나라다. 사람이, 백성이 주인 되는 나라를 꿈꾸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에서 비롯되고, ‘내가’ 통치권을 행사하며, ‘나를 위해’ 필요한 세상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잘 사는 나라를 추구하시지 않으셨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진리의 완성을 위해 그저 죄인을 대신해 죽으셨다.

광야에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여호와께서는 진노하셨다.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8~10절)

성경구절을 들먹이며, 복음을 팔아 사기를 치는 자들의 정체를 출애굽기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라고 정의한다. 성질이 나면 머리를 치켜들고 목이 빳빳해지는 짐승이 있다. 뱀이다. 

 

목이 곧은 백성을 대신해 예수께서 놋뱀이 되어 나무에 매달리셨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그 십자가 만을 바라보는 존재들을 성경은 ‘성도’라고 부른다. 그들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가 편하게 잘 사는 자유민주주의’를 쟁취하자고 나대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관심과 시선은 인간들의 자유와 평등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늘 도돌이표처럼 고정된다. 그들의 자아인식은 “내가 뱀 맞습니다, 은혜 베풀어 주세요”라는 고백 속에 들어 있다. (사장/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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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ellu
김용호
213095
18892
2025-01-02
우리를 위한 시험

 


‘시험’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사람들은 ‘합격하고 싶다’거나 ‘시험에 통과하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것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시험에 실패하거나 낙방하는 순간 자존감은 곤두박질친다. 
‘시도하다’, ‘시험하다’라는 의미를 담은 히브리어 ‘나싸’는 구약성경에 36번 등장한다.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때로 시험하시며, 사람들 또한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하는 장면이다. 

 

출애굽기 15장에서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멋지게 찬양한 뒤 수르 광야로 들어갔다. 
문제는 사흘 길을 걸었으나 물이 없었다는 점이다. 겨우 있는 물도 써서 마시지 못할(마라) 지경이었다.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24절).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고, 여호와께서는 한 나무를 보여주셨다. 그 나무를 물에 던졌을 때 물이 달게 되었다.
여기서 시험이 등장한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25~26절).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의를 행함, 계명에 귀를 기울이고 규례를 지키라는 조건이 붙은 시험이다. 

 

16장에 시험이 또 등장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 광야에 도착했는데,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 도다”(3절) 하고 원망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는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4절) 하고 말씀하셨다.

 

이쯤에서 시험에 대한 채점 결과가 발표된다.
여호와께서는 백성들에게 매일 아침마다 만나를 주셨고, 대신 일곱째 날 안식일에는 양식이 없으니 여섯째 날에 이틀 분을 거두라고 명령하셨다.   
“일곱째 날에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이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27~28절).
적어도 백성들 가운데 일부는 법도와 율례를 행하거나,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규례를 지킬 생각이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백성들이 여호와를 향해 시험을 한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17장 1~2절)
이 대목에서 모세는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고 한탄했다.
이에 백성들은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고 원망했다. 심지어 돌을 들어 모세를 찍으려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도 일리가 있다. 태양이 작렬하는 뜨거운 날씨에, 그것도 메마른 광야에서 물은 곧 생명이다. 자녀들과 가축들이 물을 마시지 못해 탈진하고, 쓰러진다면 눈이 뒤집힐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모세는 그런 상황에서 보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을 ‘여호와를 향한 시험’이라고 받아들였다.


아무튼 모세가 부르짖자 여호와께서는 호렙산으로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장로들 앞에서 이집트에서 사용하던 지팡이로 바위를 치라고 명령하신다. 그대로 했더니 물이 터졌다.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7절).
백성들이 물 때문에 불평했던 것을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의심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어쨌든, 위의 세 가지 에피소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 속에 항상 가득 차 있는 것은 원망이다. 갈증 때문에 죽을 것 같은 상황, 배는 고픈데 먹을 것이 없는 현실에 대한 불평이다. 그늘이라고는 없는 광야를 걸었던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을 생각하면 누구라도 원망이 쏟아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를 끊임없이 시험했다. ‘당신 진짜 하나님 맞느냐’는 의문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실제로 존재하는 분이냐는 것이다. 10가지 재앙과 홍해 사건, 구름기둥 불기둥 등 신비한 이적을 매일 체험해도 여호와를 향한 의심의 눈초리는 거둘 수 없었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들 입장에서 당연한 듯 보이는 상황을 여호와께서는 ‘시험’으로 몰고 가신다. 그러면서 내미는 시험은 “내 말을 지키고, 의를 행하고, 계명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라”고 요구하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준비하신 시험은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는 도저히 합격이 불가능한 수준이다. 성경이 해답을 말해주는데, 이스라엘은 광야에서뿐만 아니라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구약 내내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다가 결국 망해버렸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15장 25절에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라고 진술했다. 애초에 시험을 하신 의도가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다는 설명이다. 법도와 율례를 정하신 이유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라고 말씀하신다. 그 시험은 이스라엘이라는 존재, 더 나아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결국 그들에게 구원이 주어지는 것은 이스라엘의 자격이나 조건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시험 과정을 통해 가르치고 계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내게 나와서 마시라고 하셨다. 생명의 물은 예수께서 주시는 것이다.(요한복음 4장) 배고픔을 해결할 떡도 실상 예수다.(요한복음 6장) 모세의 지팡이에 갈라진 반석도 예수셨다.(고린도전서 10장) 세상의 쓴 물이 마실 수 있게 되는 유일한 비책은 저주를 받은 나무에 예수께서 매달리신 것, 곧 십자가가 서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예수가 십자가에서 흘린 피,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모든 원망을 한몸에 지고 죽으신 일로 해결됐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남은 일은 자신의 불가능함을 매일 확인하고 바울처럼 ‘나는 날마다 죽노라' 선포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하시면서 ‘너희를 위하여’라고 전제하셨다.(사장/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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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181928
18892
2024-12-20
질질 끌려간 믿음의 용사

 


출애굽 과정에서 모세와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존재로 부각된다. 바로왕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그런 존재를 여호와의 은혜로, 그분의 언약에 따라 구출해 내는 이야기가 출애굽기다. 때문에 이집트 탈출기는 저주 받아 마땅한 속성을 갖고 태어난 성도들이, 예수의 피, 즉 유월절 사건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이야기로 읽어낼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을 앞두고 모세를 불러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하셨다 하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하라는 내용인데, 바로왕의 억압 아래 고통 받으며 살고 있는 그들에게 진짜 세상의 왕, 통치자가 누구인지 보이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지 않았다는 점에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왕과 큰 차이가 없다.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 (출애굽기 6장)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출애굽기 5장2절)
“모세가 여호와 앞에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도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6장 12절).

 

출애굽기 3장에 여호와께서 광야에서 살던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온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3장 10~11절).
끈질기게 말씀하시는 여호와께 모세는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4장1절) 하고 핑곗거리를 찾는다.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하고, 말 솜씨가 없고 등등.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는 관심이 없고, 애굽의 왕자에서 한순간의 사건 때문에 광야의 양치기로 전락해 살아가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만 매몰돼 있었다. 
모세가 계속 머뭇거리자 여호와께서는 지팡이를 던져 뱀이 되게 하시고, 그것을 잡게 하시며, 또한 손에 나병이 들게 하셨다가, 낫게 하시는 등 여러 이적을 보여주셨다. 그런 기적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지 않으면 나일강 물을 떠서 땅에 부으면 피가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고래심줄 같은 끈질김이라는 측면에서 모세도 여호와께 결코 지지 않는다.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4장10절~).
죽어도 못 간다고 버티는 모세에게 여호와께서 노하셨다. 그리고는 형 아론과 같이 가라고 말씀하신다.

 

아론과 함께 바로를 찾아가서도 모세의 마음을 크게 변하지 않는다. 애굽에게 나가게 해 달라는 요청에 화가 난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더 학대하기 시작하자 모세는 “여호와께 돌아와서 아뢰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내가 바로에게 들어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후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5장22~23절) 하고 불평했다.
출애굽기 6장에서는 “모세가 여호와 앞에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도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라 내가 네게 이르는 바를 너는 애굽 왕 바로에게 다 말하라. 모세가 여호와 앞에서 아뢰되 나는 입이 둔한 자이오니 바로가 어찌 나의 말을 들으리이까” 라는 장면이 반복된다.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는 모세의 전언을 들은 백성들은 출애굽기 4장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했다고 적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일에, 또 그분께서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일을 신뢰하지 않는 데 백성들도 모세 보다 덜하지 않았다.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전하고 그 백성 앞에서 이적을 행하니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피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4장 30~31절).
여호와를 경배했다던 그들은 바로의 학정 때문에 삶이 힘들어지자 곧바로 모세와 아론에게 대들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 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5장 21절).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6장9절).

 

그러나 출애굽 사건이 복음의 핵심인 이유는, 모세와 이스라엘의 불신과 관계없이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 증명, 언약을 신실하게 이끌어 가시는 데는 한 치의 망설임이 없으시다는 점에 있다.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14장 4절)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14장 11~12절).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사람과 짐승까지, 모든 장자들이 죽는 유월절 사건을 경험하고도 홍해가 앞길을 가로막자 원망을 쏟아낸다. 차리리 애굽에서 노예로 살다가 죽도록 내버려뒀으면 더 좋았다는 탄식이다.
끝까지 믿지 못하고 십자가 앞에서 도망간 제자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조롱했던 자들의 모습이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속에 그대로 들어 있다. 

 

그런데 출애굽 당시 모세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히브리서 11장 24~27절에 완전히 다르게 적고 있다.
“믿음으로 모세는, 어른이 되었을 때에, 바로 왕의 공주의 아들이라 불리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오히려 그는 잠시 죄의 향락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학대 받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모욕을, 이집트의 재물보다 더 값진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장차 받을 상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그는, 왕의 분노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집트를 떠났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분을 마치 보는 듯이 바라보면서 견디어 냈습니다.”(새번역)
출애굽기의 기록과는 딴판인 이유는 26절에 나타나 있다.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은 모욕, 수치, 치욕”이란 구절이다. 
그것은 모세가 실제로 걸어갔던 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이 되셔서 죄인들을 위해 당하신 고난이며, 몸소 받으신 모욕에 대한 이야기다. 그 느닷없는 구원의 과정에 모세는 피하고 내빼려 노력했지만 결국 휘말려 들었던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믿음과, 그분의 언약에 질질 끌려간 모세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다 일하신 뒤에 모세를 ‘믿음의 용사’였다고 칭찬하고 있다. (사장/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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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2
그가 완악한 이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빠져 나온 출애굽 사건은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증명’이다. 선악과를 따먹은 왕들이 우글거리는 세상에, 진짜 주권자는 어떤 분인지 드러내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내리라”(출애굽기 6장1절).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매”(7장5절).

 

이처럼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어떤 분임을 보이시기 위해 출애굽 사건을 ‘손수’ 기획하셨고, ‘친히’진행하셨다.
물론 하나님의 ‘자기존재 증명’에 반발하는 세력이 있다. 바로왕이 인간과 세상을 대표해 여호와의 대척점에 섰다. 그것 역시 ‘자기 증명’이었다. 인간의 그런 자세가 자연스러운 것은 선악과를 따먹은 증상, 즉 스스로 하나님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내가 통치하고, 내가 다스리는 세상에 “나 외에 다른 신은 없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래서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5장2절) 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세상의 실권을 쥔 파라오(바로)는 세상의 임금으로서, 자신의 권력을 정확하게 행사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일하심은 세상 왕들의 생각과 고집을 티끌만한 변수로도 여기지 않으신다. 어떤 면에서 그저 작정하신 대로, 폭력적으로 역사 속에 밀고 들어올 뿐이다.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7장4절). 
바로왕이 말을 듣든지 말든지 상관없이 그분의 일을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애굽에 떨어진 10가지 재앙을 마주할 때마다 바로가 했던 이야기를 꼼꼼하게 찾아보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이 역사 가운데 출현한 성도들에게 비춰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이며, 말씀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바로가 내뱉은 말 속에 성도의 모습, 여호와를 대적했던 옛사람의 모습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첫째 나일강이 피로 물들었을 때 애굽의 요술사들도 비슷하게 따라했다.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바로가 돌이켜 궁으로 들어가고 그 일에 관심을 가지지도 아니하였고”(7장22~23절).
둘째 개구리 재앙. “바로가 숨을 쉴 수 있게 됨을 보았을 때에 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더라”.(8장 15절)
셋째 이 재앙.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게 되어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8장19절)
바로는 “내 인생, 내 나라, 내 마음대로 한다”고 생각했으나, 성경은 그런 생각과 자세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고 진술한다. 바로에게 주체적 판단의 자유는 없는 셈이다. 

 

넷째 파리재앙. “바로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제사를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간구하라. 그러나 바로가 이 때에도 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 그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8장29~30절).
다섯째 가축의 죽음. “애굽의 모든 가축은 죽었으나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한지라.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본즉 이스라엘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니라” (9장 6~7절).
여섯째 종기.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9장12절).
일곱번째 우박. “우박이 애굽 온 땅에서 사람과 짐승을 막론하고 밭에 있는 모든 것을 쳤으며 우박이 또 밭의 모든 채소를 치고 들의 모든 나무를 꺾었으되 이스라엘 자손들이 있는 그 곳 고센 땅에는 우박이 없었더라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모세와 아론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번은 내가 범죄하였노라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나의 백성은 악하도다 여호와께 구하여 이 우렛소리와 우박을 그만 그치게 하라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다시는 머물지 아니하리라” (9장 25~28절).

 

바로의 마음은 스스로 완악하게 했고, 또한 여호와께서 의도적으로 완악하게 하셨다. 이런 완악한 마음은 도무지 해결책이 없는 상태다. 왜냐 하면 그 과정 자체가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존재 증명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일곱 번째 재앙에 이르면 바로는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나의 백성은 악하도다”라는 놀라운 고백을 내놓는다. 
마치 교회라는 조직에 몸을 담고, 설교 때마다 눈물을 찔끔거리며 감동을 받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약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을 뒤에서 누르고 조종하는 사단이 쉽게 놓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가 비와 우박과 우렛소리가 그친 것을 보고 다시 범죄하여 마음을 완악하게 하니 그와 그의 신하가 꼭 같더라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내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9장 34~35절).
결국 바로의 마음은 도돌이표처럼 완악한 본성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여덟 번째 메뚜기.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로 들어가라 내가 그의 마음과 그의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하게 함은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 네게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출애굽기 10장.
재앙이 클라이맥스를 향해 갈 즈음, 여호와께서는 다시 한번 자기존재 증명을 상기시키신다. “내가 여호와인줄 알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의 대표, 바로도 만만치 않다. 꼼수와 거래가 난무한다. 여호와 하나님을 상대로 잔머리를 굴리는 행태다. “이 기도만 들어주시면, 이번 한번만 응답해주시면, 이 문제만 해결해 주시면…”
모세가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인즉 우리가 남녀 노소와 양과 소를 데리고 가겠나이다” 하고 말했을 때 바로는 “장정들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그것이 너희들에게 유익”이라고 제안한다.
재앙이 심각해지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급히 불러 이르되 내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와 너희에게 죄를 지었으니 바라건대 이번만 나의 죄를 용서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 죽음만은 내게서 떠나게 하라”(10장 17절)고 드디어 무릎을 꿇는 듯하다.

 

아홉 번째 흑암.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들 보내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바로가 모세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떠나가고 스스로 삼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말라 네가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 (10장 27~28절).
여덟 번째 재앙에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처럼 보이던 바로의 마음을 여호와께서는 오히려 한층 더 완악하게 하셨다. 역시 회개와 용서를 구하는 마음의 출처는 인간이 아니며, 그럴 능력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바로는 모세와 아론에게 “한번만 더 내 앞에 얼굴 보이면 죽이겠다”고 위협한다. 당연한 수순이다. 여호와께서 준비하신 장자의 죽음이라는 열 번째 재앙이 채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열 번째. 장자의 죽음.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부르짖음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죽임을 당하지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 밤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에서 떠나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너희가 말한 대로 너희 양과 너희 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 하며”(12장 30~32절).
바로는 온 이집트가 죽음으로 뒤덮였을 때도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고 말했다. ‘복’을 향한 인간의 집념은 끝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는 절대로, 끝까지 여호와께 굴복하지 않는다.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그 백성이 도망한 사실이 애굽 왕에게 알려지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그 백성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여 이르되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가 하고 바로가 곧 그의 병거를 갖추고 그의 백성을 데리고 갈새”(출애굽기 14장).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출애굽기 7장 5절은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매”라고 기록했다. (사장/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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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05
‘거침없이’ 만사형통

 


이명박 정부 시절에 ‘만사형통’이란 말이 떠돌았다. 이 전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 의원을 통하면 모든 일이 해결된다는 뜻이었다. 요즘 한국 정치판에는 만사건통, 만사명통이란 말이 회자된다. 
정치 이야기를 하자는 게 아니고, 사람 사는 세상에서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술술 잘 풀리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한결같다는 것이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반칙도 정당화하고, 탐욕도 좋게 포장하는 게 인간이다.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종처럼 부리고 싶어한다. “하나님 꼼짝마,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고 목사가 떠들어대기도 한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 하시니 내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나의 갈길 다가도록’이란 찬송가는 시각 장애인이었던 Fanny Crosby 여사가 1875년 ‘All The Way My Saviour Leads Me’라는 제목으로 작사했다. 1절 끝자락에 ‘For I know, whate’er befall me, Jesus doeth all things well’을 한국 찬송가에서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고 번역했다.

 

성경 창세기에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므로 형통한 사람이 있었다. 야곱(이스라엘)이 가장 아끼던 아들, 가장 사랑했던 아내 라헬과 사이에 낳은 아들 요셉이다.
라헬이 막내 베냐민을 낳다 일찍 죽으면서, 야곱의 사랑은 오로지 요셉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요셉은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받았고,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는 신세가 됐다. 집을 떠나 들판에서 양을 치던 형들에게 다녀오라는 아버지의 심부름을 갔다가 졸지에 다른 나라에 종으로 넘어간 것이다. 

그럼에도 성경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창세기 39장 2절)”라고 기록했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삶을 살았던 요셉은 종으로 팔린 이후에도 스스로 정직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결국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39장 20~23절).

짧은 몇 구절 안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거나 ‘형통’이라는 단어가 반복된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에, 요셉이 형제들의 미움을 받는 것조차 형통이었고, 노예로 팔린 것이 만사형통이었으며, 강간 미수범이라는 누명을 쓴 것 또한 형통이었고, 그것 때문에 감옥에 들어간 것이 바로 형통한 일이었다는 의미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성경이 요셉에게 적용한 형통은 ‘모든 일이 언제나 원하는 대로 풀린다’는 인간적 욕심 수준의 만사형통은 확실히 아니다. 

 

고대 근동에 큰 흉년이 들자, 가나안에 살던 야곱의 아들들은 양식을 구하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갔다. 기근에 시달리던 형들이 양식을 사러 왔을 때 그들을 알아본 요셉은 몇 번 시험을 한 뒤 자신을 팔았던 형들에게 아우임을 밝힌다.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하고 정체를 드러낸 것이다. 당시 그 일대의 최강대국 애굽의 총리가 동생이라니, 그때 형들의 표정은 안 봐도 상상할 수 있다. 자신들은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45장5절)”하고 오히려 형들을 위로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7~8절).

 

요셉의 이런 이야기는 창세기 15장과 맞닿아 있고, 출애굽기 7장~12장과도 연결된다.
“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12~14절).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하셨던 약속은 정확하게 역사 속에서 실현됐다.
“이스라엘 자손은 모세의 말대로, 이집트 사람에게 은붙이와 금붙이와 의복을 요구하였고, 주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사람에게 환심을 사도록 하셨으므로, 이집트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의 요구대로 다 내어 주었다. 이렇게 하여서, 그들은 이집트 사람들에게서 물건을 빼앗아 가지고 떠나갔다.(출애굽기 12장 35~36절)”

 

야곱이 아들 요셉을 만나러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 바로왕과 인사를 나누게 됐다.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47장 7~9절).
야곱은 스스로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자신의 인생을 정리했다. 요셉 또한 야곱 못지 않게 평지풍파를 겪는 삶이었다. 그럼에도 성경은 그것을 “형통하다”고 정의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삶, 예수 그리스도의 궤적을 앞서서 잘 그려냈기 때문이다. 야곱이나 요셉이 힘쓰고,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요셉의 고백처럼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는 말 속에 ‘만사형통’의 진짜 의미가 담긴 것이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50장20절).
세상 모든 사람이 합세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았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의 피를 근거로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원하신다. 구원 받은 백성들은 요셉의 형제들처럼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우리는 당신의 종입니다”라는 고백을 한목소리로 내놓게 된다. 그것이 하나님의 애초 계획이었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진 것’이다. (사장/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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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2
밀려난 사람들

 

“에서가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가 빌 복이 이 하나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창세기 27장38절).

아브라함의 손자, 이삭의 장남, 에서의 애처로운 비명이요, 울음이다. 쌍둥이 동생 야곱이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자신이 받을 복을 가로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36절).

 

창세기 27장 첫머리에서 이삭은 장자 에서를 따로 불렀다. 그리고는 “네 기구 곧 화살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와서 먹게 하여 내가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고 말했다.

이것을 엿들은 어머니 리브가는 큰 아들 에서 대신 둘째 야곱이 복을 받도록 하기 위해 계략을 꾸몄다. 그러나 야곱은 나이가 많아 눈까지 먼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싶지 않았다. 또한 자칫 아버지께 들키는 날에는 저주를 받을 수도 있다며 두려워했다. 그러나 리브가는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라고 말했다.

 

리브가가 자신 있게 “저주는 내가 받겠다”고 나선 것은 앞선 창세기 25장 때문이다. 리브가가 쌍둥이를 임신했을 때 여호와께서는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23절)고 하셨다.

 

그러니 에서가 분노한 것은 번짓수를 잘못 짚은 것이었다. 그 ‘장자의 명분’과 ‘이삭의 축복’은 야곱에게 돌아가기로 애초부터 정해져 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에서 입장에서 억울할 수는 있다. 그는 아버지 이삭이 시키는 대로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사냥하여 아버지께서 즐기시는 별미를 만들어 가져갔다. 아버지께 순종하고, 말씀을 열심히 지켰다. 아들의 도리를 다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에서의 착한 행동도 장자의 복을 받는 데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에서의 에피소드는 마치 예수께서 들려주셨던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의 비유’를 떠올리게 한다. 혼인 잔칫날 버림받은 다섯 처녀도 신랑을 기다렸다. 모자란 기름을 사기 위해 한밤중에 헐레벌떡 달려나가는 열심도 있었다. 심지어 ‘주여, 우리에게 문을 열어 주소서’ 하고 신랑에게 간절히 매달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매몰찬 신랑은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거절했다.

 

아버지 이삭은 큰 아들인 에서에게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의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주었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라고 말했다. 기대했던 복은커녕 저주에 가까운 예언을 들은 것이다.

에서와 야곱의 에피소드를 통해 성경은 인간들이 내놓는 행위의 결과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 속에서 성취되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이렇게 억울할 만한 사람은 성경에 또 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이다. 비록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데리고 있던 애굽 출신의 여종 하갈을 통해 태어난 자식이지만, 이스마엘도 엄연히 아브라함의 핏줄을 이어받았다.

창세기 17장에는 할례언약이 등장하는데,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약속하셨다. 그 언약의 증표로 요구하신 것이 할례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10~14절)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할례가 시행되는데, “아브라함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구십구 세였고,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십삼 세였더라. 그 날에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라고 성경은 기록했다.

 

분명 이스마엘도 여호와의 언약에 따라 할례를 시행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동생 이삭이 태어난 이후 어머니 하갈과 함께 집을 떠나야 했다. 할례를 통해 여호와의 언약이 육체에 있게 된다고 말씀하셨으나, 이스마엘은 할례를 받고도 언약 밖으로 밀려난 것이다.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고 요구했다.

 

바울 사도는 이스마엘과 하갈, 사라와 이삭에 대한 이야기를 신약성경 갈라디아서에서 반복해 설명한다. 복음의 본질과 ‘다른 복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라디아서 5장6절)”고 쐐기를 박는다.

 

할례를 받았느냐, 아니냐는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사람들의 종교적 노력과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 기각 당하는 것이다. 유일하게 남는 것은 ‘사랑’이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말라기 1장2~3절).

사랑의 출발점은 사람이 아니다. 에서가 여호와를 사랑했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야곱이 형의 복을 가로챘느냐도 핵심포인트가 아니다. 여호와께서 “내가 야곱을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했다”고 말씀하시는 순간 모든 논란은 종결된다.

 

인격이나 됨됨이 등을 따진다면 이삭과 이스마엘, 야곱과 에서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여호와께서 늘 함께 하셨고, 광야에서 활 쏘는 자가 되었던’(21장20절) 이스마엘이 더 사내답고, 자신을 속였던 동생을 너그럽게 용서하는 에서가 더 통 크고 아량이 넓어 보인다.

 

그러나 이삭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어린양의 대신 죽음으로 살아난, 선택 받은 성도의 예표로 살았다.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가 대신 저주를 받겠다고 나서는 그 사랑 때문에 복을 받았다. 마치 십자가에 달린 예수께서 하나님의 진노를 죄인들을 대신해 받아내셨던 그 이야기다. 야곱은 장자 에서의 옷, 에서의 냄새가 짙게 밴 그 옷을 입고 들어가 아버지의 복을 받았다. 또한 야곱은 아버지 이삭을 위한 별미의 재료로 죽임을 당한 염소새끼의 가죽을 뒤집어 쓴 채 아버지 앞에 나아갔다. 예수께서 내어주신 혼인잔치의 예복, 예수의 피로 씻은 의를 덧입고 성도가 여호와께 나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사장/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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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ellu
김용호
121154
18892
2024-11-14
“나보다 옳다”

 

사람들이 목에 핏대를 세우는 이유는 ‘내가 옳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다. 옮음의 위치를 선점하는 것은 곧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일과 관련된다. 옳고 그르고, 선하고 악함이 엇갈리는 삶의 상황에서 사람들은 착하고, 옳다는 평판을 얻기 위해 평생 애쓴다. 

 

그런 면에서 구약성경 창세기 38장은 인간들의 보편적 생각을 한참 벗어난다.

유다는 아버지 야곱과 어머니 레아 사이에 태어난 넷째 아들이다.

그는 부모와 형제들을 떠나 가나안에서 살았다. 그곳 여자와 동침해 아들 셋을 낳는다. 그리고 큰 아들 ‘엘’을 다말이라는 여자와 결혼 시켰다. 그런데 장자 엘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했으므로, 죽이셨다. 유다는 대를 잇기 위해 둘째 아들 오난을 시켜 형수와 동침하도록 한다.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9절).

이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오난도 죽이신다.

 

아들 둘이 잇따라 죽자, 유다는 셋째 아들 셀라도 같은 일을 당할까 봐 아예 며느리 다말을 친정으로 보내버린다. “셀라가 장성할 때까지 수절하고 기다리라”는 핑계를 댔지만 사실상 내쫓은 것이다.

그리고 유다는 그 무렵 아내 수아가 죽는 슬픔도 경험했다.

아들 셀라가 성인이 되었지만 유다는 며느리 다말을 부르지 않았다. 이미 아들 둘과 아내까지 잃은 마당에 셋째 아들까지 먼저 보내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루는 유다가 친구와 함께 양털을 깎으러 ‘딤나’라는 곳으로 가게 됐다. 이 소식이 며느리 다말에게 전해졌다.

“(다말은) 과부의 옷을 벗고, 너울을 써서 얼굴을 가리고, 딤나로 가는 길에 있는 에나임 어귀에 앉았다. 그것은 막내 아들 셀라가 이미 다 컸는데도, 유다가 자기와 셀라를 짝지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14절)

 

유다는 길가에서 기다리던 며느리 다말을 창녀로 생각하고, "너에게 잠시 들렀다 가마. 자, 들어가자"(16절) 하고 동침했다.

석 달쯤 지난 다음에, 유다는 며느리 다말이 창녀짓을 하여 임신까지 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유다는 “그를 끌어내서 화형에 처하여라”고 분노했다. 다말은 창녀 분장을 하고 유다를 만났을 때 담보로 받았던 ‘도장과 허리끈과 지팡이’를 내밀었다.

그러자 유다는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말했다. 

 

‘옳도다’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올바르다’ ‘의롭다’ ‘정당한 이유를 가지다’ 등의 뜻을 가진 단어다. 헬라어로 번역된 단어 역시 ‘의롭다고 간주되다’는 뜻을 품고 있다. 며느리가 창녀 행세를 하며, 시아버지의 아이를 가진 일을 두고 ‘의롭고, 정당한 이유가 있으며, 올바르다’고 평가를 내린 것이다.

유다는 자신이 당시 관습이나 문화적 전통을 어겼기 때문에 며느리가 더 옳다는 뜻으로 사용했는지 모르지만 성경은 다른 의미도 전달하고 있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족보에 유다가 올라 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마태복음 1장). 

“그 위는 베레스요, 그 위는 유다요, 그 위는 야곱이요, 그 위는 이삭이요, 그 위는 아브라함이요” (누가복음 3장).

예수님의 계보는 마태와 누가가 기록한 족보에서 똑같이 아브라함-이삭-야곱-유다-베레스로 이어진다. 베레스는 유다와 며느리 다말 사이에 태어난 쌍둥이 가운데 둘째 아들이다. 유다가 그토록 지키려 애썼던 셋째 아들 셀라, 그의 죽은 본처 수아가 낳은 아들이 아니라 며느리와 동침해 낳은 베레스를 통해 메시야의 족보가 이어진 것이다.

 

창세기 37장은 2절에서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야곱의 역사는 이러하다)”고 전제한 뒤 요셉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런데 요셉의 생애 가운데 느닷없이 유다의 치부가 끼어들어 흐름이 어색하게 읽힌다. 39장은 애굽에서 요셉이 고난 당하는 장면이 계속된다.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이스라엘 온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 애굽에 미리 보내진 것이 요셉의 이야기였다. 그 에피소드 중간에 구원 받아야 할 죄인의 표본으로 유다가 등장한 것이다.

 

이처럼 창세기 38장은 인간들의 악함으로 뒤범벅이 돼 있다. ‘옳도다’라는 단어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옳다는 표현이 가능한 것은 사람들끼리의 선악판단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이 그 사건들 가운데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의 족보는 역사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이 펼쳐진 것이다.

십자가의 피는 아담 이래로 종말의 날, 인류 맨 마지막에 구원 받은 성도의 허물까지 덮어버렸다. 창세 전에 선택 받은 자의 죄를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짊어지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예수께서 받은 고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그 일 때문에 성도에게 ‘옳다’고 여김을 받는 일이 가능해진 것이다.

따라서 성도는 일상 가운데서 ‘나는 옳다’고 핏대를 세우는 자들이 아니라, 자신의 악함을 끊임없이 발각 당하고, 그것을 덮는 어린양의 피 아래로 늘 침잠하는 자들이다.(사장/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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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ellu
김용호
120968
18892
2024-11-07
‘우리 아버지’와 ‘너희 아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개역한글판은 ‘세계’로 번역). 신약성경을 여는 마태복음 1장1절이다. ‘계보’ ‘세계’ ‘족보’ 등으로 번역된 원문단어 ‘비블로스 게네시스’는 출생과 기원, 본성, 탄생에 관한 책이란 의미다. 마태는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아브라함을 먼저 언급했다. 그 만큼 아브라함은 성경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창세기 11장 후반부터 등장한다. 노아의 맏아들, 셈의 후손을 기록한 족보가 10절부터 기록됐다. 홍수 이후의 사람들은 삼십 세 전후에 자손을 낳기 시작해 200년 넘게 살다 죽었다.
데라의 아들인 아브람(아브라함의 처음 이름)은 아버지가 70세 때에 태어났다. 족보상으로 보면 아버지 데라가 당시 기준으로 꽤 늦은 나이에 아브람을 낳은 것이다. 데라는 아들 아브람과 나홀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했으나 하란에서 205세에 죽었다.
데라가 죽자 가나안을 향해 가던 일가족은 하란에 눌러 앉았다. 그런데 아브람이 75세 되던 해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세기 12장 1~3절).

 

아브람은 그 말씀에 따라 조카 롯을 비롯해 모든 가족과 소유를 이끌고 가나안으로 이동했다.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서는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다.
하지만 복을 받기로 약속됐던 땅에는 기근이 찾아왔고, 아브람은 양식을 찾아 애굽으로 내려갔다. 문제는 ‘이집트 사람들이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보고, 매우 아리따운 여인임을 알았다’(14절)는 데 있었다. 아브람은 애굽의 바로왕에게 아내를 뺏기고, 목숨까지 잃을까 봐 사래를 누이라고 말했다. 여호와께서는 사래를 데려간 바로왕과 그 집안에 큰 재앙을 내렸다. 대신 아브람은 큰 재산을 바로왕으로부터 얻었다.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다”(13장2절). 재산이 불어나고, 집안에 다툼이 일어나자 조카 롯과 따로 떨어져 살기로 했다. 선택권을 쥔 롯은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던” 요단의 들판, 즉 소돔과 고모라 쪽을 냉큼 택했다. 롯이 떠나자 여호와께서는 아브람을 찾아가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고 약속하셨다. 욕심 많은 조카에게 어쩌면 실망했을 아브람을 찾아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올 당시의 약속을 다시 확인시켜 주신 것이다.

 

그리고 15장에서는 쪼갠 고기 사이를 여호와께서 홀로 지나가시며, 아브람에게 주신 언약은 반드시 이뤄질 것임을 보여주신다. 고대 근동의 풍습처럼, 약속의 당사자들이 모두 쪼갠 제물 사이로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는 아브람이 깊이 잠든 가운데, 어둠과 공포가 그를 짓누르는 가운데(12절) 홀로 지나가신 것이다.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잡히시며, 언약 성취를 강조하신 것이다.

 

“그러나 너의 자손을 종살이하게 한 그 나라를, 내가 반드시 벌할 것이며, 그 다음에, 너의 자손이 재물을 많이 가지고 나올 것이다”(14절)라는 대목은 인류의 역사, 창조 이후의 시간을 한 문장으로 압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야곱이 외삼촌의 집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똑같이 그랬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에 내려와 고통 가운데 종살이를 하다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영생을 얻어 떠나온 본향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반복되는 언약은 아브람에게 ‘쇠귀에 경 읽기’였다. 몸은 늙어가는데, 자손이 없다는 초조함이 그를 짓눌렀다. 여호와께서 홀로 언약을 성취하겠다고 말씀하셨지만 걱정에 눌려 산 것은 아브람이었다. 약속된 복을 받는데, 최소한 숟가락이라도 얹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브람과 아내 사래는 창세기 16장부터 ‘자식 타령’을 시작했다. 아브람은 결국 사래의 종이었던 애굽 여인 하갈을 통해 86살에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런데 16장을 읽어보면 여호와의 천사가 하갈에게는 나타났지만 아브람과 말씀하시는 대목은 없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을 다시 찾아오신 것은 창세기 17장의 99세 때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때부터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5절)으로 고치라 명하셨다. ‘큰 아버지’ ‘높으신 아버지’에서 ‘많은 민족의 아버지’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그리고 명령하신 것이 할례다.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17장11~14절).

 

할례를 지시하신 뒤 “내가 그(사라)에게 복을 주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겠다. 내가 너의 아내에게 복을 주어서,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들이 그에게서 나오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지만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웃으면서 혼잣말을 하였다. “나이 백 살 된 남자가 아들을 낳는다고? 또 아흔 살이나 되는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그리고는 “이스마엘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으면서 살기를 바랍니다”(16~18절) 하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호와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러 가시는 길에 아브라함을 또 찾아가신다. “내년 이맘때 아들을 낳을 것”이란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다. 이 말을 엿들은 사라는 “나는 기력이 다 쇠진하였고, 나의 남편도 늙었는데, 어찌 나에게 그런 즐거운 일이 있으랴!” 하고, 속으로 웃으면서 중얼거렸다.(17장12절)

 

아브라함이 생명이 다해 눈을 감던 순간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는 스스로 생각해도 여호와 앞에서 온전하다고 자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고비 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존재하기 힘든 인물이었다. 바로 그 이유로 그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린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것이었다. 
유대인들이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요한복음 8장39절)이라고 우겼을 때, 예수께서는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셨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했던 일을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한 8장56절)에 담겨 있다. 이 구절을 공동번역으로 보면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은 내 날을 보리라는 희망에 차 있었고 과연 그 날을 보고 기뻐하였다"고 번역했다. 
자기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아내마저도 다른 남자에게 서슴없이 보내버리는 불쌍한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의 쉬지 않으시는 열심 때문에 은혜를 입고, 예수 그리스도의 날만 기다리는 그림, 아브라함이 자신의 생애를 통해 증거하는 믿음이다.(사장/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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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120617
18892
2024-10-24
아버지들의 아픔

 

 

살아 숨 쉬던 모든 생명체가 물에 빠져 죽었다. 살아 남은 사람도 단 8명에 불과했다. 노아와 세 아들, 그 아내들이었다.

그렇게 된 원인은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세기 6장5절)에 나타나 있다.

그리고는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표준새번역)고 하셨다.

홍수가 끝난 뒤 “노아는 주 앞에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집짐승과 정결한 새들 가운데서 제물을 골라서, 제단 위에 번제물로 바쳤다.”(8장20절) 그러자 “주께서 그 향기를 맡으시고서, 마음 속으로 다짐하셨다. “다시는, 사람이 악하다고 하여서, 땅을 저주하지는 않겠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마련이다. 다시는 이번에 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없애지는 않겠다.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

 

홍수 전이나 홍수 이후나 여호와께서 사람을 바라보시는, 평가하시는 기준에는 변함이 없다. 창세기 6장에서, 또 8장에서 똑같이 말씀하신다. 인간은 그저 ‘악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함’을 보시고 모든 생명체를 물로 쓸어버리신 여호와께서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한’ 인간을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언약 하신다는 데 있다.

그러자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된 인간들은, 선악을 판단하기 시작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사람처럼 취급한다. 창조를 후회하시고, 한탄하셨다는 성경의 단어들 때문이다.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 여호와께서 그 참상을 보시고는 마음이 너무 아프셔서 다시는 그 같은 심판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신 것으로 받아들인다. 여호와를 생각할 때, 인간들이 벌이는 일이나 상황에 따라 수시로 뭔가 계획과 결심을 바꾸는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한 번 실패하신 하나님과 그것을 만회하려는 분으로 판단해 버린다.

 

그러나 창세 전에 이미 약속된 언약이나, 최소한 창세기 3장의 ‘여자의 후손’ 이야기만 기억해도 이런 해석이 얼마나 큰 착각인지 알 수 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브리서 9장27절)와 같은 구절이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베드로후서 3장7절)는 말씀은 한 번도 취소된 바 없다.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라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가는 과정이다. 세상에 대한 멸망과 심판의 시간표는 십자가를 통해서만 확증된다. 십자가를 빗대서만 설명될 수 있다는 의미다.

노아의 홍수 사건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에피소드다. 창세기 3장에서 희생 당한 짐승이 가죽을 남겼고, 그것으로 반드시 죽어야 하는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가렸던 것처럼, 노아의 방주 구원도 정결한 짐승의 죽음과 연계돼 있다. 노아와 그 가족들이 정결했던 것이 아니며, 단지 “노아 만은 주님께 은혜를 입었다(6장8절)”는 것이다. 그래서 그 패턴을 알고 있는 노아의 가족은 방주에서 나와 정결한 짐승을 제물 삼아 제사를 드렸다. 노아의 가족 8명 모두 홍수에 휩쓸려 죽어야 했으나,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짐승의 대신 죽음으로 살아났다는 설명이다.

이처럼 십자가는 악한 인간, 죄인을 구원하는 방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온 세상과 역사의 주인으로 찬송을 받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다. 홍수 사건 이후에 겨우 8명만 살아 남았으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향하는 길로 나아가야 했다. 그것을 설명하고, 증거하시기 위해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8장21절)”을 아시고도 오로지 예수만 드러나도록 심판까지 참으시는 것이다.

 

홍수 심판은 더 이상 없지만 세상의 끝은 분명 정해져 있다. 그 종말 가운데서 여호와께서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백성만을 구원하겠다는 언약을 성실하게 이행하신다.

그런데 그 과정이 인간들에게 쉽지 않게 다가온다. 때로는 자신의 뼈와 살을 도려내는 아픔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에피소드가 창세기 9장에 그려진다. 노아의 만취 사건이다. 방주에서 나온 뒤 노아는 포도나무를 심었다. 포도주를 만든 노아는 취해 벌거벗은 채 자고 있었다. 둘째 아들 함은 그 모습을 보고, 형제들에게 일렀다. 셈과 야벳은 노아의 하체를 보지 않기 위해 뒷걸음쳐 들어가 옷으로 덮었다. 이를 뒤늦게 알아차린 노아는 “가나안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가장 천한 종이 되어서, 저의 형제들을 섬길 것”이라고 저주를 퍼부었다. 흉을 본 것은 함인데, 함의 아들인 노아의 손자 가나안이 저주를 받은 것이다.

창세기 10장은 “함의 자손은 구스와 이집트와 리비아와 가나안이다”(6절) 한 뒤, 그 자손들의 이름을 열거한다. 여부스, 아모리, 니느웨, 소돔, 고모라, 블레셋 등 성경을 조금이라도 읽은 사람이라면 익숙한 이름이 줄줄이 등장한다. 죄 가운데 심판과 저주를 받았던 족속이며, 이스라엘과 끊임없이 전쟁을 했던 자들이다. 이들이 모두 함과 가나안의 자손들이다.

 

노아가 술에 취해 벌어진 일의 대가 치고는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노아 스스로도 둘째 아들의 후손이 역사에서 이스라엘과 대척점에 선, ‘악의 축’ 같은 역할을 맡을 것이라고 미리 알았다면 마음이 편치는 않았을 것이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다. 함은 가나안의 조상이 되었다. 이 세 사람이 노아의 아들인데, 이들에게서 인류가 나와서, 온 땅 위에 퍼져 나갔다.”(창세기 9장18~19절. 표준새번역)

이 구절은 ‘노아 언약’ 다음에 붙어 있다. 노아의 아들들을 통해 언약이 펼쳐지는 것이다.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은 그 언약 성취를 위해 각자 역할이 주어졌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도 그렇다. 이삭의 아들, 야곱과 에서도 그렇다.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두 아들 가운데 아들을 구할 것인지, 어떠한 선택지나 역할도 주어지지 않았다.

에서가 사냥을 하고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 순간적인 실수 때문에 장자의 축복은 놓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말라기 1장2~3절).

마치 십자가에 예수와 함께 달렸던 두 강도의 모습이다. 그들의 똑같이 마음대로 살았던 강도다. 똑 같은 처벌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혔다. 똑같이 예수를 향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며 욕을 하고 저주를 퍼부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강도는 사랑을 받았고, 또 다른 강도는 미움을 받았다.(사장/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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