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8년을 지나 한국을 방문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고 한강의 기적이 보여주는 결과를 보면서도, 내가 캐나다 이민을 선호한 까닭은 경제적 풍요함 때문이 아니었다. 아래에서 기술하겠지만 이민생활은 결코 평탄한 것도, 만만한 과제도 아니다. 내가 캐나다를 사랑하게 된 이유는 사회정의와 도덕적 성숙과 개인의 삶의 질 때문이었다
토론토에서 우리를 환영해 준 것은 도시를 온통 감싸고 있는 여름철 숲의 기운만이 아니었다. 집집마다 앞마당에 정돈되어 있는 정원들이 너무 좋았다. 햇살이 좋은 오후면 비키니를 입은 여성들이 정원에 누워서 일광욕을 즐기는 그 평화로운 광경을 훔쳐보며 산책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농담 아니다. 그땐 정말 그랬다. 때론 8등신의 비키니 금발 여인들이 맨발로 걸으며 hello! 하면서 한쪽 눈을 찡긋하고 지나치기도 했다. 처음에는 너무 놀랐다.
어쩌다 만나는 이웃들은 newcomer라는 말에 반기며 인사하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부탁하라고 한다. 뿐만아니라 백화점은 물론 동네 편의점에서도 개인 수표를 써주고 물건을 구입할 수 있었다. 필요하면 물건 값보다 더 큰 액수의 수표를 써주고 현금으로 잔돈을 돌려받기도 했다. 그 후 이런 모습의 community trust가 오랫동안 유지되지 못했지만 당시 나는 그렇게 아름답고 탄탄한 social capital이 너무 좋았다.
모든 일이 서두르는 일 없이 순서와 예정에 따라 이루어지는 평상의 여유가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 주었다. 이유없이 긴장하고 염려하거나 책망 받을까 서두르지 않아도 좋은 삶의 페이스와 서로간의 신뢰와 배려가 지나칠 정도로 좋았다. 부럽고 자랑스러웠고 캐나다 이민은 좋은 선택이었다고 일단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경제적 정착과정은 또 다른 현실이었다. 실제 한국인 이민자들을 포함한 많은 newcomer들은 취업과 경제적 삶을 시작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언어가 가장 큰 장애가 된다.
다음은 경험이다. 많은 사람들이 Canadian experience가 있느냐는 물음에 가슴이 막혀 버린다. 지금 캐나다에서 막 시작하는 사람에게 경험이 있을 수 없었고, 그걸 묻는 사람의 얼굴이 답답하게 보이곤 했다. 한국인들의 경우 많은 사람들이 사무직이나 영업부 경력을 갖고 이민했는데, 자신의 경력에 적합한 분야에는 이미 언어 능력에서 점수가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은 기술이 필요하지 않은 노동직을 찾게 된다. 지금 2023년에라도 엔지니어링 취업에서 캐나다 경험 조건을 제거한 것은 잘한 것이라 생각한다.
나의 첫 취업은 그야말로 rocky road 였다. 시간당 $1.78의 캐나다 최저임금을 받으며 처음 얻은 일은 먼지가 가득하고 소음이 심한 실내에서 8시간 동안 마스크를 쓴 채 쉬지 않고 돌아가는 기계에 재료를 끊이지 않게 공급해야 한다. 8시간 근무 중 30분 점심시간과 그 전후로 15분씩 화장실 사용 시간 외에는 기계 주위를 떠나면 안된다. 변소로 달려가야 되는 상황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때론 연장 근무 혹은 주말 추가 근무를 강요 받기도 했다. 그리고 매주 근무시간(shift)이 바뀐다. 오전(7am-3pm), 오후 (3-11pm), 밤 (11pm-7am) 이렇게. 그렇다 보니 주말에는 잠 시간 조정에 들어간다. 미리 자두던지 늦추던지 하면서.
회사에서는 최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조합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회유했다. 그리고 휴가비나 의료보험 역시 부실했다. 공장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의 회사 정문 이용을 금했다. 트럭들이 물건을 내리고 싣고 하는 곳으로 들어가 화장실 안에서 출퇴근 카드를 찍으며 드나든다.
수백 명 노동자들이 동시에 좁은 공간을 이용할 수 없어서 부서별로 나누어 점심 (혹은 저녁이나 새벽 참) 시간이 배정되었다. 후에 나는 조합형성의 대화 기회를 미리 막으려는 정책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직을 원했지만 어떤 이들은 공장에서 필요한 기술(기술이란 것도 못 되는 숙련)을 익혀서 조금씩 인상되는 임금에 기대어 여러 해 혹은 수십 년이 넘도록 다니고 있었다.
정착과정의 어려움은 다른 곳에도 도사리고 있었다. 노동 환경이 이러니 노동자들 사이에는 캐나다 태생 백인들이 많지 않았다. 내가 일하는 동안에 근무기간이 얼마 되지 않은 David이라는 20대 친구가 내가 속한 팀의 supervisor로 승진하여 어느 날부터 넥타이 맨 차림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작업 보고서를 읽고 작성할 능력을 갖춘 9학년 중졸 노동자는 그가 유일했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공장에는 대졸의 학력을 지닌 한국인들이 여럿 있었다. 평가에서 중졸 백인 청년에게 밀린 것이다. 언어와 소통의 문제라고는 말했지만 나는 내심 엄연한 인종주의적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하기야 내가 알기로는 공장장 역시 능력은 인정 받았지만 국졸이라고 평이 나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후 나는 일이 끝나면서 작성하는 데일리 보고서에 그날에 있었던 사소한 일들까지 가능한 상세히 기입하기 시작했다. 집에서 작성을 위한 연습도 했다. 이처럼 신규 이민자들은 첫 취업 과정에서 언어와 인종차별의 피해를 피해가기 어려웠다.
나의 관심은 여전히 경제적 안정보다는 학업에 치우쳐 있었다. 그런데 무엇을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지 뚜렷하지 않았다. 우선 캐나다를 선택한 이상 평생을 일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무리가 되더라도 학부 1년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지혜로운 투자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보다 솔직히 나는 한국에서 모범생이 아니었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내가 좋아했던 영어 수학 기하 같은 과목만 공부했고, 한문 독일어 자연과학 같이 부지런히 외우고 노력해야 하는 과목들은 철저히 피했다. 과락을 받기도 했고. 말하자면 spoiled 철부지였다. 대학시절에는 아내와의 연애에 빠져 있어서 공부를 소홀했었다.
결국 과거의 죗값을 치르는 마음으로 학부 1년에 입학하기로 정했다. 마침 아내가 한 대학에 취업하게 되었고 우리의 계획은 한걸음 더 나갈 수 있었다.
공장생활에 지쳐있던 나는 곧 사직(?)를 작심하고, 다음 날 아침에 전화로 사의를 전했다. 조금 당황하는 듯한 그는 "다음 주 너를 supervisor로 임명할 텐데…" 내가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 물어도 되겠냐고 물었고. 나는 대학공부를 다시 시작할 계획이라고 답했다. 그렇다면 말리고 싶은 생각이 없다며 축하해 주고 행운을 빌어 주었다.
경제적 정착과정이 어려웠던 것처럼 학업의 시작 역시 쉽지 않았다. 같은 대학에 계시던 한국인 M교수는 나에게 호통쳤다. 내가 영어를 얼마나 잘 하길래 건방지게 공학이나 자연과학도 아니고, 문과 공부를 그것도 학부 과정을 시작하냐고 야단이셨다.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든 줄 아냐고?
차라리 한 학기 2과목 수강하면 되는 대학원을 할 것이지 5과목씩이나 해야 하는 학부 문과공부는 유학생들에는 지옥같은 길이라고 했다. 아내와 아이들 고생시키고 결국 실패할 확률이 높다고 장담했다.
L교수는 내가 문과(사회학) 공부를 한다니 양손을 잡고 흔들었다. 당시 몹시 불쾌했었는데, 학부과정을 시작하고 난 후에야 나는 M교수 L교수의 염려가 무리가 아니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렇듯 나의 정착과정은 길고 험하게 이어져 갔다. 훗날의 동료 Beiser 교수가 말 한대로 많은 비유럽계 non-European immigrants and refugees 들은 열린 캐나다의 문턱에서 outsiders or strangers at the gate로 서성이고 있다. 훌쩍 들어서지도 못하고 뒤돌아 떠나지도 못한 채.
어느덧 8년이 지나고 두 개의 학위를 손에 쥐고 첫 한국방문 길에 올랐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몇 사람을 만났다. 대학의 연구소를 방문할 기회도 있었고, 한국에 들어와서 보좌관으로 정치에 입문하자는 제의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캐나다를 선택했다.
Stranger로서가 아니라 family member로 환영 받으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불안감을 떨어내지 못한 채, 선택의 여유 없이 내리는 선택이다. 이것은 소수민족 이민자들이 오랫동안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는 문제다.
그리고 이런 삶의 context는 이민자들에게 묵상reflection을 위한 휴식기간 retreat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마지막 빨간등이 켜지고 난 후에야 결과를 알게 되고, 그러면 돌이킬 수 없을 수도 있는데.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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