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토도밍고 데 라 칼사다~토산토스(29 km / 11일차)
찻길과 평행선을 이룬 까미노
이른 새벽, 모처럼 상쾌한 기분으로 기상했다. 아마도 어젯밤 체리나무 아래서의 거사가 주효했던 모양이다. 한고비 무사히 넘긴 뿌듯함으로 북적대는 식당에서 시리얼과 요구르트로 아침을 해결하고 샌드위치를 싸서 다시 새로운 장도에 올랐다.
13세기에 지어진 고딕 양식의 아름다운 건축물, 산토 도밍고 대성당을 지나며 나는 엉뚱하게도 닭 울음 소리가 들릴까 성당 담벼락에 귀를 기울였다. 어느 순례자 가족과 닭에 얽힌 이야기가 전설로 내려오는 대성당엔 오래도록 닭 두 마리를 실내에서 키워오고 있다고 한다. 성당 방문을 하지 못한 아쉬움을 이렇게라도 달래며 어제와 비슷한 길을 찾아나간다.
오늘은 찻길과 평행선을 이룬 까미노를 오랫동안 걸었다. 빠름과 느림의 간극이 극명한 길 위에서 '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정도에 정비례, 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강도에 정비례 한다'는 밀란 쿤데라의 고견을 되새기며 걸었다.
벨로라도에 들어서자 노천 카페마다 일정을 마친 순례객들이 시원한 맥주잔을 기울이며 담소하는 모습이 마치 잔치마당 같았다. 그들 곁으로 끼어들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늘 지향했던 조용한 잠자리를 위해 6km 거리의 토산토스(Tosantos)를 향해 무거운 걸음을 계속했다.
시가지를 벗어나자 한적한 산길이 바로 이어졌다. 오늘따라 이런 길이 얼마나 절실했는지, 빗줄기가 굵어지는데도 마냥 즐겁기만 했다. 한동안 유유자적 걷다 보니 두 여인이 우리 뒤를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
산골 동네의 유일한 숙소엔 침대가 고작 서른 개 밖엔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며 바로 경쟁 모드로 돌입했다. 하지만 휘청거리는 걸음으론 신바람 나게 걷는 여인들을 당할 재간이 없었다.
산 중턱의 숙소가 시야에 들어 올 즈음, 여인들은 성큼성큼 그 곁을 지나고 있었다. 괜한 경쟁심으로 신통찮은 발바닥에 또 불을 일으키고 말았다.
큼직한 텃밭을 앞에 둔 시골집 알베르게에서 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음식을 만들고 한 식탁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었다. 지구 곳곳에서 온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가족 같은 끈끈함으로 서로 격려하며 내일을 기약하는 귀한 시간이 되었다.
아타푸에르카 ~ 브루고스 (21km / 13 일차)
부르고스(Burgos)에 가면.
안개 자욱한 마을 길을 벗어나 산기슭으로 접어들었다. 강렬한 아침 해도 안개에 갇혀서 맥을 못 추고, 기온도 떨어져 두꺼운 자켓을 꺼내 입었다. 거기다가 길 표식마저 흐려서 앞사람 뒤를 열심히 따라 붙었다. 맨 선두주자가 실수하면 줄줄이 길을 잃을 뻔 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간밤 내린 비에 촉촉해진 숲엔 수선화 군락이 사방에서 태동하고 있었다. 노란 수선화가 만개 할 오월 초쯤, 이 길을 지나게 될 사람들이 새삼 부러워졌다.
어제 온종일 끼니를 소홀히 한 탓에 오늘은 초반부터 힘이 들었다.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정자 없다는 옛말처럼, 숲 속의 한적한 숙소는 인근에 마켓이 없어 다음 날은 점심 때문에 고생을 한다. 이런 날은 가끔 있는 카페도 보이지 않아 이중고를 겪기 마련이지만 오늘은 다행히 원하는 지점에 첫 카페가 보여 한시름 놓았다.
커피와 오믈렛을 시켜놓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순간, 길에서 자주 만난 한 커플이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무슨 사연인지 모르지만 원만히 해결하여 사랑스런 모습으로 다시 길 위에서 만나지기를 소망했다
부르고스(Burgos) 가는 길은 자갈길과 아스팔트길이 끝없이 이어져 지루했다. 어제 함께 방을 썼던 프랑스 아주머니가 이 길만은 버스로 건너겠다던 말이 이해가 됐다. 순례자들의 고충을 파악한 지 자체에선 코스 중간 중간에 경찰차를 배치하여 물과 도움 여부를 수시 물어왔다. 그리고 택시도 대기 상태로 편의 제공을 위해 애쓰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부르고스에 가면. ' 으로 시작하는 대화가 앞뒤에서 자주 들렸다. 마치 지루한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꿈꾸듯 대 도시에서의 일탈을 위안 삼아 어려운 고비를 넘어가는 듯 했다. 막상 우리도 그곳에 들어서니 마음이 흔들렸다.
일정의 2/3 지점에서 과감하게 이탈하여 뜻 맞는 이들과 차이니스 레스토랑으로 갔다. 약간 불친절한 서비스와 다소 짠 음식도 감사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아량은 모두 까미노 덕이 아니었을까.
돌아오는 길에 라면 네 개와 케밥 두 개를 샀다. 작은 먹거리를 챙겨 들고 이렇게 행복했던 적이 있었던가, 아마도 순례길에서 철이 드는 모양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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