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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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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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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ellu
김용호
121419
18892
2024-11-22
밀려난 사람들

 

“에서가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가 빌 복이 이 하나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창세기 27장38절).

아브라함의 손자, 이삭의 장남, 에서의 애처로운 비명이요, 울음이다. 쌍둥이 동생 야곱이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자신이 받을 복을 가로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36절).

 

창세기 27장 첫머리에서 이삭은 장자 에서를 따로 불렀다. 그리고는 “네 기구 곧 화살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와서 먹게 하여 내가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고 말했다.

이것을 엿들은 어머니 리브가는 큰 아들 에서 대신 둘째 야곱이 복을 받도록 하기 위해 계략을 꾸몄다. 그러나 야곱은 나이가 많아 눈까지 먼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싶지 않았다. 또한 자칫 아버지께 들키는 날에는 저주를 받을 수도 있다며 두려워했다. 그러나 리브가는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라고 말했다.

 

리브가가 자신 있게 “저주는 내가 받겠다”고 나선 것은 앞선 창세기 25장 때문이다. 리브가가 쌍둥이를 임신했을 때 여호와께서는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23절)고 하셨다.

 

그러니 에서가 분노한 것은 번짓수를 잘못 짚은 것이었다. 그 ‘장자의 명분’과 ‘이삭의 축복’은 야곱에게 돌아가기로 애초부터 정해져 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에서 입장에서 억울할 수는 있다. 그는 아버지 이삭이 시키는 대로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사냥하여 아버지께서 즐기시는 별미를 만들어 가져갔다. 아버지께 순종하고, 말씀을 열심히 지켰다. 아들의 도리를 다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에서의 착한 행동도 장자의 복을 받는 데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에서의 에피소드는 마치 예수께서 들려주셨던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의 비유’를 떠올리게 한다. 혼인 잔칫날 버림받은 다섯 처녀도 신랑을 기다렸다. 모자란 기름을 사기 위해 한밤중에 헐레벌떡 달려나가는 열심도 있었다. 심지어 ‘주여, 우리에게 문을 열어 주소서’ 하고 신랑에게 간절히 매달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매몰찬 신랑은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거절했다.

 

아버지 이삭은 큰 아들인 에서에게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의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주었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라고 말했다. 기대했던 복은커녕 저주에 가까운 예언을 들은 것이다.

에서와 야곱의 에피소드를 통해 성경은 인간들이 내놓는 행위의 결과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 속에서 성취되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이렇게 억울할 만한 사람은 성경에 또 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이다. 비록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데리고 있던 애굽 출신의 여종 하갈을 통해 태어난 자식이지만, 이스마엘도 엄연히 아브라함의 핏줄을 이어받았다.

창세기 17장에는 할례언약이 등장하는데,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약속하셨다. 그 언약의 증표로 요구하신 것이 할례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10~14절)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할례가 시행되는데, “아브라함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구십구 세였고,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십삼 세였더라. 그 날에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라고 성경은 기록했다.

 

분명 이스마엘도 여호와의 언약에 따라 할례를 시행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동생 이삭이 태어난 이후 어머니 하갈과 함께 집을 떠나야 했다. 할례를 통해 여호와의 언약이 육체에 있게 된다고 말씀하셨으나, 이스마엘은 할례를 받고도 언약 밖으로 밀려난 것이다.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고 요구했다.

 

바울 사도는 이스마엘과 하갈, 사라와 이삭에 대한 이야기를 신약성경 갈라디아서에서 반복해 설명한다. 복음의 본질과 ‘다른 복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라디아서 5장6절)”고 쐐기를 박는다.

 

할례를 받았느냐, 아니냐는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사람들의 종교적 노력과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 기각 당하는 것이다. 유일하게 남는 것은 ‘사랑’이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말라기 1장2~3절).

사랑의 출발점은 사람이 아니다. 에서가 여호와를 사랑했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야곱이 형의 복을 가로챘느냐도 핵심포인트가 아니다. 여호와께서 “내가 야곱을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했다”고 말씀하시는 순간 모든 논란은 종결된다.

 

인격이나 됨됨이 등을 따진다면 이삭과 이스마엘, 야곱과 에서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여호와께서 늘 함께 하셨고, 광야에서 활 쏘는 자가 되었던’(21장20절) 이스마엘이 더 사내답고, 자신을 속였던 동생을 너그럽게 용서하는 에서가 더 통 크고 아량이 넓어 보인다.

 

그러나 이삭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어린양의 대신 죽음으로 살아난, 선택 받은 성도의 예표로 살았다.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가 대신 저주를 받겠다고 나서는 그 사랑 때문에 복을 받았다. 마치 십자가에 달린 예수께서 하나님의 진노를 죄인들을 대신해 받아내셨던 그 이야기다. 야곱은 장자 에서의 옷, 에서의 냄새가 짙게 밴 그 옷을 입고 들어가 아버지의 복을 받았다. 또한 야곱은 아버지 이삭을 위한 별미의 재료로 죽임을 당한 염소새끼의 가죽을 뒤집어 쓴 채 아버지 앞에 나아갔다. 예수께서 내어주신 혼인잔치의 예복, 예수의 피로 씻은 의를 덧입고 성도가 여호와께 나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사장/편집인)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allellu
김용호
121154
18892
2024-11-14
“나보다 옳다”

 

사람들이 목에 핏대를 세우는 이유는 ‘내가 옳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다. 옮음의 위치를 선점하는 것은 곧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일과 관련된다. 옳고 그르고, 선하고 악함이 엇갈리는 삶의 상황에서 사람들은 착하고, 옳다는 평판을 얻기 위해 평생 애쓴다. 

 

그런 면에서 구약성경 창세기 38장은 인간들의 보편적 생각을 한참 벗어난다.

유다는 아버지 야곱과 어머니 레아 사이에 태어난 넷째 아들이다.

그는 부모와 형제들을 떠나 가나안에서 살았다. 그곳 여자와 동침해 아들 셋을 낳는다. 그리고 큰 아들 ‘엘’을 다말이라는 여자와 결혼 시켰다. 그런데 장자 엘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했으므로, 죽이셨다. 유다는 대를 잇기 위해 둘째 아들 오난을 시켜 형수와 동침하도록 한다.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9절).

이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오난도 죽이신다.

 

아들 둘이 잇따라 죽자, 유다는 셋째 아들 셀라도 같은 일을 당할까 봐 아예 며느리 다말을 친정으로 보내버린다. “셀라가 장성할 때까지 수절하고 기다리라”는 핑계를 댔지만 사실상 내쫓은 것이다.

그리고 유다는 그 무렵 아내 수아가 죽는 슬픔도 경험했다.

아들 셀라가 성인이 되었지만 유다는 며느리 다말을 부르지 않았다. 이미 아들 둘과 아내까지 잃은 마당에 셋째 아들까지 먼저 보내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루는 유다가 친구와 함께 양털을 깎으러 ‘딤나’라는 곳으로 가게 됐다. 이 소식이 며느리 다말에게 전해졌다.

“(다말은) 과부의 옷을 벗고, 너울을 써서 얼굴을 가리고, 딤나로 가는 길에 있는 에나임 어귀에 앉았다. 그것은 막내 아들 셀라가 이미 다 컸는데도, 유다가 자기와 셀라를 짝지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14절)

 

유다는 길가에서 기다리던 며느리 다말을 창녀로 생각하고, "너에게 잠시 들렀다 가마. 자, 들어가자"(16절) 하고 동침했다.

석 달쯤 지난 다음에, 유다는 며느리 다말이 창녀짓을 하여 임신까지 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유다는 “그를 끌어내서 화형에 처하여라”고 분노했다. 다말은 창녀 분장을 하고 유다를 만났을 때 담보로 받았던 ‘도장과 허리끈과 지팡이’를 내밀었다.

그러자 유다는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말했다. 

 

‘옳도다’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올바르다’ ‘의롭다’ ‘정당한 이유를 가지다’ 등의 뜻을 가진 단어다. 헬라어로 번역된 단어 역시 ‘의롭다고 간주되다’는 뜻을 품고 있다. 며느리가 창녀 행세를 하며, 시아버지의 아이를 가진 일을 두고 ‘의롭고, 정당한 이유가 있으며, 올바르다’고 평가를 내린 것이다.

유다는 자신이 당시 관습이나 문화적 전통을 어겼기 때문에 며느리가 더 옳다는 뜻으로 사용했는지 모르지만 성경은 다른 의미도 전달하고 있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족보에 유다가 올라 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마태복음 1장). 

“그 위는 베레스요, 그 위는 유다요, 그 위는 야곱이요, 그 위는 이삭이요, 그 위는 아브라함이요” (누가복음 3장).

예수님의 계보는 마태와 누가가 기록한 족보에서 똑같이 아브라함-이삭-야곱-유다-베레스로 이어진다. 베레스는 유다와 며느리 다말 사이에 태어난 쌍둥이 가운데 둘째 아들이다. 유다가 그토록 지키려 애썼던 셋째 아들 셀라, 그의 죽은 본처 수아가 낳은 아들이 아니라 며느리와 동침해 낳은 베레스를 통해 메시야의 족보가 이어진 것이다.

 

창세기 37장은 2절에서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야곱의 역사는 이러하다)”고 전제한 뒤 요셉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런데 요셉의 생애 가운데 느닷없이 유다의 치부가 끼어들어 흐름이 어색하게 읽힌다. 39장은 애굽에서 요셉이 고난 당하는 장면이 계속된다.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이스라엘 온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 애굽에 미리 보내진 것이 요셉의 이야기였다. 그 에피소드 중간에 구원 받아야 할 죄인의 표본으로 유다가 등장한 것이다.

 

이처럼 창세기 38장은 인간들의 악함으로 뒤범벅이 돼 있다. ‘옳도다’라는 단어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옳다는 표현이 가능한 것은 사람들끼리의 선악판단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이 그 사건들 가운데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의 족보는 역사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이 펼쳐진 것이다.

십자가의 피는 아담 이래로 종말의 날, 인류 맨 마지막에 구원 받은 성도의 허물까지 덮어버렸다. 창세 전에 선택 받은 자의 죄를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짊어지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예수께서 받은 고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그 일 때문에 성도에게 ‘옳다’고 여김을 받는 일이 가능해진 것이다.

따라서 성도는 일상 가운데서 ‘나는 옳다’고 핏대를 세우는 자들이 아니라, 자신의 악함을 끊임없이 발각 당하고, 그것을 덮는 어린양의 피 아래로 늘 침잠하는 자들이다.(사장/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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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ellu
김용호
120968
18892
2024-11-07
‘우리 아버지’와 ‘너희 아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개역한글판은 ‘세계’로 번역). 신약성경을 여는 마태복음 1장1절이다. ‘계보’ ‘세계’ ‘족보’ 등으로 번역된 원문단어 ‘비블로스 게네시스’는 출생과 기원, 본성, 탄생에 관한 책이란 의미다. 마태는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아브라함을 먼저 언급했다. 그 만큼 아브라함은 성경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창세기 11장 후반부터 등장한다. 노아의 맏아들, 셈의 후손을 기록한 족보가 10절부터 기록됐다. 홍수 이후의 사람들은 삼십 세 전후에 자손을 낳기 시작해 200년 넘게 살다 죽었다.
데라의 아들인 아브람(아브라함의 처음 이름)은 아버지가 70세 때에 태어났다. 족보상으로 보면 아버지 데라가 당시 기준으로 꽤 늦은 나이에 아브람을 낳은 것이다. 데라는 아들 아브람과 나홀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했으나 하란에서 205세에 죽었다.
데라가 죽자 가나안을 향해 가던 일가족은 하란에 눌러 앉았다. 그런데 아브람이 75세 되던 해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세기 12장 1~3절).

 

아브람은 그 말씀에 따라 조카 롯을 비롯해 모든 가족과 소유를 이끌고 가나안으로 이동했다.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서는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다.
하지만 복을 받기로 약속됐던 땅에는 기근이 찾아왔고, 아브람은 양식을 찾아 애굽으로 내려갔다. 문제는 ‘이집트 사람들이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보고, 매우 아리따운 여인임을 알았다’(14절)는 데 있었다. 아브람은 애굽의 바로왕에게 아내를 뺏기고, 목숨까지 잃을까 봐 사래를 누이라고 말했다. 여호와께서는 사래를 데려간 바로왕과 그 집안에 큰 재앙을 내렸다. 대신 아브람은 큰 재산을 바로왕으로부터 얻었다.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다”(13장2절). 재산이 불어나고, 집안에 다툼이 일어나자 조카 롯과 따로 떨어져 살기로 했다. 선택권을 쥔 롯은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던” 요단의 들판, 즉 소돔과 고모라 쪽을 냉큼 택했다. 롯이 떠나자 여호와께서는 아브람을 찾아가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고 약속하셨다. 욕심 많은 조카에게 어쩌면 실망했을 아브람을 찾아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올 당시의 약속을 다시 확인시켜 주신 것이다.

 

그리고 15장에서는 쪼갠 고기 사이를 여호와께서 홀로 지나가시며, 아브람에게 주신 언약은 반드시 이뤄질 것임을 보여주신다. 고대 근동의 풍습처럼, 약속의 당사자들이 모두 쪼갠 제물 사이로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는 아브람이 깊이 잠든 가운데, 어둠과 공포가 그를 짓누르는 가운데(12절) 홀로 지나가신 것이다.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잡히시며, 언약 성취를 강조하신 것이다.

 

“그러나 너의 자손을 종살이하게 한 그 나라를, 내가 반드시 벌할 것이며, 그 다음에, 너의 자손이 재물을 많이 가지고 나올 것이다”(14절)라는 대목은 인류의 역사, 창조 이후의 시간을 한 문장으로 압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야곱이 외삼촌의 집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똑같이 그랬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에 내려와 고통 가운데 종살이를 하다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영생을 얻어 떠나온 본향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반복되는 언약은 아브람에게 ‘쇠귀에 경 읽기’였다. 몸은 늙어가는데, 자손이 없다는 초조함이 그를 짓눌렀다. 여호와께서 홀로 언약을 성취하겠다고 말씀하셨지만 걱정에 눌려 산 것은 아브람이었다. 약속된 복을 받는데, 최소한 숟가락이라도 얹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브람과 아내 사래는 창세기 16장부터 ‘자식 타령’을 시작했다. 아브람은 결국 사래의 종이었던 애굽 여인 하갈을 통해 86살에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런데 16장을 읽어보면 여호와의 천사가 하갈에게는 나타났지만 아브람과 말씀하시는 대목은 없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을 다시 찾아오신 것은 창세기 17장의 99세 때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때부터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5절)으로 고치라 명하셨다. ‘큰 아버지’ ‘높으신 아버지’에서 ‘많은 민족의 아버지’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그리고 명령하신 것이 할례다.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17장11~14절).

 

할례를 지시하신 뒤 “내가 그(사라)에게 복을 주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겠다. 내가 너의 아내에게 복을 주어서,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들이 그에게서 나오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지만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웃으면서 혼잣말을 하였다. “나이 백 살 된 남자가 아들을 낳는다고? 또 아흔 살이나 되는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그리고는 “이스마엘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으면서 살기를 바랍니다”(16~18절) 하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호와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러 가시는 길에 아브라함을 또 찾아가신다. “내년 이맘때 아들을 낳을 것”이란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다. 이 말을 엿들은 사라는 “나는 기력이 다 쇠진하였고, 나의 남편도 늙었는데, 어찌 나에게 그런 즐거운 일이 있으랴!” 하고, 속으로 웃으면서 중얼거렸다.(17장12절)

 

아브라함이 생명이 다해 눈을 감던 순간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는 스스로 생각해도 여호와 앞에서 온전하다고 자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고비 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존재하기 힘든 인물이었다. 바로 그 이유로 그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린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것이었다. 
유대인들이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요한복음 8장39절)이라고 우겼을 때, 예수께서는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셨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했던 일을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한 8장56절)에 담겨 있다. 이 구절을 공동번역으로 보면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은 내 날을 보리라는 희망에 차 있었고 과연 그 날을 보고 기뻐하였다"고 번역했다. 
자기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아내마저도 다른 남자에게 서슴없이 보내버리는 불쌍한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의 쉬지 않으시는 열심 때문에 은혜를 입고, 예수 그리스도의 날만 기다리는 그림, 아브라함이 자신의 생애를 통해 증거하는 믿음이다.(사장/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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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120617
18892
2024-10-24
아버지들의 아픔

 

 

살아 숨 쉬던 모든 생명체가 물에 빠져 죽었다. 살아 남은 사람도 단 8명에 불과했다. 노아와 세 아들, 그 아내들이었다.

그렇게 된 원인은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세기 6장5절)에 나타나 있다.

그리고는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표준새번역)고 하셨다.

홍수가 끝난 뒤 “노아는 주 앞에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집짐승과 정결한 새들 가운데서 제물을 골라서, 제단 위에 번제물로 바쳤다.”(8장20절) 그러자 “주께서 그 향기를 맡으시고서, 마음 속으로 다짐하셨다. “다시는, 사람이 악하다고 하여서, 땅을 저주하지는 않겠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마련이다. 다시는 이번에 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없애지는 않겠다.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

 

홍수 전이나 홍수 이후나 여호와께서 사람을 바라보시는, 평가하시는 기준에는 변함이 없다. 창세기 6장에서, 또 8장에서 똑같이 말씀하신다. 인간은 그저 ‘악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함’을 보시고 모든 생명체를 물로 쓸어버리신 여호와께서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한’ 인간을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언약 하신다는 데 있다.

그러자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된 인간들은, 선악을 판단하기 시작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사람처럼 취급한다. 창조를 후회하시고, 한탄하셨다는 성경의 단어들 때문이다.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 여호와께서 그 참상을 보시고는 마음이 너무 아프셔서 다시는 그 같은 심판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신 것으로 받아들인다. 여호와를 생각할 때, 인간들이 벌이는 일이나 상황에 따라 수시로 뭔가 계획과 결심을 바꾸는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한 번 실패하신 하나님과 그것을 만회하려는 분으로 판단해 버린다.

 

그러나 창세 전에 이미 약속된 언약이나, 최소한 창세기 3장의 ‘여자의 후손’ 이야기만 기억해도 이런 해석이 얼마나 큰 착각인지 알 수 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브리서 9장27절)와 같은 구절이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베드로후서 3장7절)는 말씀은 한 번도 취소된 바 없다.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라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가는 과정이다. 세상에 대한 멸망과 심판의 시간표는 십자가를 통해서만 확증된다. 십자가를 빗대서만 설명될 수 있다는 의미다.

노아의 홍수 사건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에피소드다. 창세기 3장에서 희생 당한 짐승이 가죽을 남겼고, 그것으로 반드시 죽어야 하는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가렸던 것처럼, 노아의 방주 구원도 정결한 짐승의 죽음과 연계돼 있다. 노아와 그 가족들이 정결했던 것이 아니며, 단지 “노아 만은 주님께 은혜를 입었다(6장8절)”는 것이다. 그래서 그 패턴을 알고 있는 노아의 가족은 방주에서 나와 정결한 짐승을 제물 삼아 제사를 드렸다. 노아의 가족 8명 모두 홍수에 휩쓸려 죽어야 했으나,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짐승의 대신 죽음으로 살아났다는 설명이다.

이처럼 십자가는 악한 인간, 죄인을 구원하는 방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온 세상과 역사의 주인으로 찬송을 받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다. 홍수 사건 이후에 겨우 8명만 살아 남았으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향하는 길로 나아가야 했다. 그것을 설명하고, 증거하시기 위해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8장21절)”을 아시고도 오로지 예수만 드러나도록 심판까지 참으시는 것이다.

 

홍수 심판은 더 이상 없지만 세상의 끝은 분명 정해져 있다. 그 종말 가운데서 여호와께서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백성만을 구원하겠다는 언약을 성실하게 이행하신다.

그런데 그 과정이 인간들에게 쉽지 않게 다가온다. 때로는 자신의 뼈와 살을 도려내는 아픔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에피소드가 창세기 9장에 그려진다. 노아의 만취 사건이다. 방주에서 나온 뒤 노아는 포도나무를 심었다. 포도주를 만든 노아는 취해 벌거벗은 채 자고 있었다. 둘째 아들 함은 그 모습을 보고, 형제들에게 일렀다. 셈과 야벳은 노아의 하체를 보지 않기 위해 뒷걸음쳐 들어가 옷으로 덮었다. 이를 뒤늦게 알아차린 노아는 “가나안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가장 천한 종이 되어서, 저의 형제들을 섬길 것”이라고 저주를 퍼부었다. 흉을 본 것은 함인데, 함의 아들인 노아의 손자 가나안이 저주를 받은 것이다.

창세기 10장은 “함의 자손은 구스와 이집트와 리비아와 가나안이다”(6절) 한 뒤, 그 자손들의 이름을 열거한다. 여부스, 아모리, 니느웨, 소돔, 고모라, 블레셋 등 성경을 조금이라도 읽은 사람이라면 익숙한 이름이 줄줄이 등장한다. 죄 가운데 심판과 저주를 받았던 족속이며, 이스라엘과 끊임없이 전쟁을 했던 자들이다. 이들이 모두 함과 가나안의 자손들이다.

 

노아가 술에 취해 벌어진 일의 대가 치고는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노아 스스로도 둘째 아들의 후손이 역사에서 이스라엘과 대척점에 선, ‘악의 축’ 같은 역할을 맡을 것이라고 미리 알았다면 마음이 편치는 않았을 것이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다. 함은 가나안의 조상이 되었다. 이 세 사람이 노아의 아들인데, 이들에게서 인류가 나와서, 온 땅 위에 퍼져 나갔다.”(창세기 9장18~19절. 표준새번역)

이 구절은 ‘노아 언약’ 다음에 붙어 있다. 노아의 아들들을 통해 언약이 펼쳐지는 것이다.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은 그 언약 성취를 위해 각자 역할이 주어졌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도 그렇다. 이삭의 아들, 야곱과 에서도 그렇다.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두 아들 가운데 아들을 구할 것인지, 어떠한 선택지나 역할도 주어지지 않았다.

에서가 사냥을 하고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 순간적인 실수 때문에 장자의 축복은 놓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말라기 1장2~3절).

마치 십자가에 예수와 함께 달렸던 두 강도의 모습이다. 그들의 똑같이 마음대로 살았던 강도다. 똑 같은 처벌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혔다. 똑같이 예수를 향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며 욕을 하고 저주를 퍼부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강도는 사랑을 받았고, 또 다른 강도는 미움을 받았다.(사장/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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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ell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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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8
세간들의 고군분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창세기 3장22절)

선악을 알고, 하나님처럼 된 인간이 생명나무 열매까지 먹고 영생하도록 내두려 두지 않겠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조치였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24절)

인간 추방의 쐐기를 박는 후속조치도 뒤따르는데, 천사들로 하여금 화염검을 들고 생명나무로 향하는 동쪽문을 지키게 하신 것이다. 이제 인간이 에덴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완전히 막혔다. 유일한 가능성은 불칼을 든 천사들과 싸워 그들을 제압하는 것이다. 불가능한 이야기다.

 

성경은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실체에 대해 로마서 3장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고 설명했다.

더 나아가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고 썼다.

에덴에서 그랬던 것처럼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류하며, 공존할 길이 원천 봉쇄된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실체를 돌아볼 눈이 감겨버린 인간들에게 악마는 집요하게 다가온다.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뱀의 속삭임은 역사 내내 계속돼 왔다. 또 그렇게 되고 싶은 인간들 스스로의 욕망과 노력도 멈추지 않는다. 생명나무 열매를 향한 분투다.

바울은 그들을 향해 갈라디아서 3장에서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라고 지적한다.

또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라고 기록했다.

‘모든’, ‘항상’이라는 조건에 막혀 아무리 고군분투, 분골쇄신 노력해도 불칼을 뚫고 에덴으로 진입할 방법은 애초에 없다는 이야기다.

 

이 대목에서 사람들은 벌컥 화를 낼 수밖에 없다. “그럼 어쩌란 말이냐”는 항변이 터져 나온다.

가인이 그랬다.

아담과 하와과 에덴에서 쫓겨나 “세월이 지난 뒤에, 가인은 땅에서 거둔 곡식을 주께 제물로 바치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서 맏배의 기름기를 바쳤다. 주께서 아벨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셨으나,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지 않으셨다. 그래서 가인은 몹시 화가 나서, 얼굴색이 변하였다. 주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네가 화를 내느냐? 얼굴색이 변하는 까닭이 무엇이냐? 네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 어찌하여 얼굴을 펴지 못하느냐? 그러나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하니,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창세기 4장 3~7절, 새번역)

여호와께서 ‘올바르지 않은 일’이라고 하셨으나. 가인은 자신이 농사 지은 곡식을 바쳤을 뿐이다. 당시에는 양을 잡아 여호와께 제사를 해야 한다는 율법도 없었다. 하지만 ‘가인이 억울했을 수도 있겠다’라는 동정과 관계 없이, 어느 제물을 반갑게 받을 것인지, 어떤 행위를 선하다고 인정해 줄 것인지는 철저히 여호와 하나님께서 결정할 영역임을 성경은 다시 밝히고 있다. 왜냐 하면, 인간의 어떤 행위 자체가 여호와 하나님의 기준을 만족시킬 수 없도록 미리 조치를 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가복음 10장에 등장하는 재물이 많은 청년의 이야기와 상통한다.

그는 예수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물었다. 계명을 지키라는 말씀에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그 청년은 근심하며, 슬픈 얼굴을 하고 돌아갔다.

성경에 없는 이야기지만, ‘만약 그 청년이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부하고 예수께 다시 돌아왔다면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너는 행위로는 나를 존중하는데 여전히 마음은 그렇지 않다”고 지적하셨을 수도 있다.

그런 상상을 해 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을 하여야’라는 부자 청년과의 대화가 끝난 뒤 나온 제자들이 질문 때문이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제자들이 두려워했을 때 예수께서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불구덩이에서 꺼내시는 장면이 창세기 19장에 나온다.

소돔과 고모라는 여호와의 진노로 심판이 예정돼 있었다. 두 천사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죄악으로 가득 찬 소돔 성을 찾아갔다. 천사들은 “여호와께서 이 곳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13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고 재촉했다. 그러나 롯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고, 롯은 시간을 느릿느릿 지체했다. 자신이 평생 일궈놓은 모든 것이 불에 타도록 내버려 두고 선뜻 떠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천사들이 다시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어 내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고 등을 떠밀었다. 그럼에도 롯은 여전히 머뭇거렸다. 그러자 천사들이 할 수 없이 롯과 그 가족들의 손을 잡아 강제로 끄집어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라고 진술한다.

 

“그 때에 여러분은 범죄와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에베소서 2장2절, 새번역)

사람들은 에덴 이후로도 죄 가운데서, 뱀과 악마의 권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라 살고 있는 것이다.

그 악마의 세력을 깨뜨릴 유일한 힘은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서 나온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마태복음 12장29절).

예수께서는 사람을 세간, ‘살림살이에 필요한 집안의 물건’ 쯤으로 비유하셨다. 공중 권세를 잡은 악마의 집에 있는 세간은 악마 마음대로 사용되는 물건이다. 세간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내거나, 주인의 사용의지를 꺾을 힘이나 능력이 없다.

사탄보다 강한 존재, 악마의 머리를 부술 것으로 이미 창세기에서, 아니 창세 전에 예정된, 그리스도의 피 만이 악마의 세력을 결박하고, 자신의 소유를 되찾는 것이다. 역사는 그것을 오늘도 되풀이해 증거하고 있다.(사장/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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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0
나뭇잎 치마와 가죽옷

 

처음으로 눈이 밝아진 사람들이 있었다. 아담과 하와다. 그들이 에덴에서 살고 있을 때, 뱀이 찾아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 물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기서 ‘모든’이란 단어는 선악과 나무에 관한 이야기로 끌고 가기 위한 사탄의 교묘한 ‘빌드업’이었다.

 

하와는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답했다. 구약성경 창세기 3장 초반부의 이야기다.

 

하지만 하와의 대답은 정확하지 않았다. 앞서 2장에서 여호와께서는 분명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마는 여자에게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꼬드겼다.

 

결국 하와와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다. 선악과를 먹었을 때, 악마의 말처럼 효과가 바로 나타났다. 눈이 밝아진 것이다.

 

정리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악마는 “죽지 않는다. 오히려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고, 선악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그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선악을 알게 되는 것은 맞다. 다만 악마는 선악을 아는 것이 반드시 죽음으로 귀결될 것이란 점은 교묘하게 감췄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의 눈이 밝아진 뒤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자신들이 벗었다는 사실이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도 그들은 똑같이 벗고 있었음에도 그것이 수치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나, 먹은 후에는 무화과나뭇잎을 엮어 옷을 만들어 입었다. 눈이 밝아져 자신의 상태를 보고,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해, 수치를 피하려는, 즉 악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중요해지는 문제는 왜 선악을 아는 것이 죽음의 문제와 연결되는가 하는 데 모아진다. 그 이유는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는’이라는 구절에 숨어 있다.

선악 판단의 주체는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영역이다. 그럼에도 하와와 아담은 “선악을 아는”, “하나님처럼 되는” 탐욕적 선택을 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추구한 것이며,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이, 경계를 넘어 창조주의 자리를 탐낸 것이다.

 

타락 이전의 모습을 보면 벗었으나 수치스럽지 않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모양이다. 그러나 스스로 판단을 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하나님처럼 되려는 시도 때문에 나타난 병적 증상이다.

 

아담과 하와 속에는 모든 인류가 담겨 있다.

모든 사람은 언제나 선과 악, 잘잘못을 따지고 평가한다. 하루 종일 입으로 떠들어댄 말이나, 머릿속을 맴돌았던 생각을 가만히 정리해 보면 알 수 있다. 그 평가의 기준은 또 자기 자신이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것이다. 아니, 하나님마저도 인간 자신의 잣대를 들이대 평가하려 한다.

 

예외가 있다. 육신을 입고 태어난 존재 가운데 유일한 분, 자신의 판단과 생각을 내려놓은 유일한 존재는 그리스도 예수뿐이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께서는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30절)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2장49절에서는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라고 하셨다.

 

바울은 이 이야기를 빌립보서에서 다시 설명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장5~8절).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사람으로 태어나셔서 ‘하나님처럼’ 되기를 포기하시고, 죄인의 모습으로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 그것이 십자가다. 성경은 첫 머리부터 십자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아담과 하와의 속성을 그대로 이어받은 인간의 대표로, 유대인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항상 사람들을, 심지어 하나님이신 예수를 저울대에 올렸다.

 

이들에 대해 예수께서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한복음 8장44절) 라고 하셨다. 창세기 3장의 에피소드를 풀어 설명하고 계신 것이다.

 

 

이제 눈이 밝아진 인간, 선악 판단을 내리는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반드시 죽어야 한다.

 

그럼에도 여호와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입고 있던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치마를 벗기시고,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다. 그들이 수치를 가리기 위해 직접 만들어 입었던 나뭇잎 치마 대신 짐승의 가죽 옷을 여호와께서 만들어 입히신 것이다. 인간들이 자신의 선악지식을 동원해 만들어 입은 나뭇잎 치마는 수치를 가리는데 아무런 효용이 없었다. 유일한 해결책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 아담과 하와의 자리에서 어떤 짐승이 대신 죽는 것이다. 짐승의 무고한 죽음이 그들의 수치를 가려줄 가죽을 남겼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짜 놓으신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시간의 역사는 아담과 하와를 시작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만을 증거한다.

선악과 사건 이후 여호와께서 선포하신 뱀을 향한 저주에도 그것이 들어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3장14~15절). (사장/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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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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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4
개들을 향한 편애, 은혜

 

복음서 곳곳에는 예수와 유대교 지도자들 사이의 충돌이 그려진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대제사장 서기관 등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참소하며, 시비를 걸어왔다.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를 오매불망 기다렸던 그들이지만, 변방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목수였던 초라한 예수를 구원자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마태복음 15장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하고 예수께 말했다.
하지만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율법이 아니었다. 그저 유대교 스승인 장로들이 가르친 전통이며, 관습일 뿐이었다. 손을 씻을 때도 손가락, 손바닥뿐만 아니라 손목 위까지 씻으라고 계명처럼 강조했다. 
마가는 이 부분을 보다 자세히 지적했는데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마가복음 7장 3~4절)”고 기록했다. 

 

유대교의 선생이라 하는 자들이 인간들끼리 합의해 만든 규칙과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앞에 겁 없이 들이민 것이다. 그 이유는 사실 그들이 유대교 장로들의 가르침을 세세하게 지키는 행위를 통해 율법을 잘 따르고, 여호와 하나님을 지극 정성 예배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도전에 “그러면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셨다.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누구든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내게서 받으실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되었습니다’ 하고 말만 하면, 그 사람은 제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이렇게 너희는 너희의 전통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폐한다. 위선자들아! 이사야가 너희를 두고 적절히 예언하였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해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훈계를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마태 15장3~9절)”고 공박하셨다.
그리고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너희는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하셨다.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으로 가득 찬 마음, 그것이 너희들의 실체라고 지적하신 것이다. ‘더러운 마음’은 애써 외면한 채 그것을 감추기 위한 술수로, 인간의 행위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갖는 것 자체가 위선이라는 말씀이다.

 

이런 장면을 모두 지켜보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분개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새번역)” 하고 물었다. 분위기가 심히 살벌했던 것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자기가 심지 않으신 식물은 모두 뽑아 버리실 것이다. 그들을 내버려 두어라. 그들은 눈 먼 사람이면서 눈 먼 사람을 인도하는 길잡이들이다. 눈 먼 사람이 눈 먼 사람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이 말씀은 앞서 마태복음 13장에 등장했던 가라지 비유의 현실판이다. 예수께서는 이번에도 ‘가만 두라’고 말씀하신다. 언제가 뽑을 날이 온다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를 그저 2천년 전에 예수를 믿지 않던 유대사회에서 벌어졌던 일이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거룩하고 구원 받은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곳에서 지금도 계속되는 일이다. 다른 예를 찾을 것 없이, 바리새인과 서기관, 대제사장이란 단어 대신 ‘나 자신’, ‘00교회’라는 이름을 넣고 읽으면 정확하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음에도, 나 자신의 유익과 공동체 조직의 유지를 위해 각종 전통과 규칙을 만들어 놓고, 성경구절까지 살짝 섞어 그것을 곡해하는 일들이 수없이 벌어지고 있음을 눈치채야 한다. 

 

마태는 장로들의 전통을 둘러싼 논쟁 뒤에 곧바로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를 붙였다. 
헬라인이며, 수로보니게 족속 이방인이었던 여인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하고 소리를 질렀다. 예수께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셨고, 보기에 딱했던지 제자들이 나서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외치고 있으니, 그를 안심시켜서 떠나 보내 주십시오(새번역)"하고 간청했다. 그럼에도 예수께서는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라고 외면하셨다.
가나안 여인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계속 “도와 달라”고 매달렸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매몰차게 거절하셨다. 이방여인을 아예 개처럼 취급하신 것이다. 개는 고대 유대사회에서 가장 멸시 받는 존재를 지칭했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3장에서 ‘개들을 삼가라’며 할례를 주장하는 악한 일꾼을 향해 ‘개’라는 단어를 동원했다.      
그러나 가나안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고 더욱 매달렸다. 마침내 예수께서는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대답하셨다. 
가장 비천한 존재, 자신이 ‘개’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예수께서는 그 여인에게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셨다. 

 

그렇다면 바리새인, 서기관들과 가나안여인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었나. 십자가를 지고, 죽기 위해 오신 하나님 앞에서 “내 딸 살려달라”고 요구한 것은 면목 없는 일이다. 그 역시 자기 자신의 필요와 욕심, 소원을 이루는 데만 혈안이 돼 있는 모습이다. ‘개’의 역할이다.
시편 22편에서 다윗은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나이까"라고 울부짖었다.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하셨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와 같은 단말마의 비명이다. 다윗은 시편에서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라고 노래했다.  

 

가나안여인은 자신이 ‘개’라는 것을 인정했다. 예수를 둘러싸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던 사람들 중에 자신이 있었고, 망치를 들어 대못을 박고, 창으로 예수를 찔렀던 개들 가운데 자신이 있음을 고백한 것이다. 예수의 생명을 갉아먹은 죄인의 자리로 주저 없이 내려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믿음은 가나안 여인이 생산한 것이 아니었다. 그 이방여인은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였다. 그에게 믿음이 선물로 주어진 것은 순전히 예수의 피에 기반한 은혜 때문이다. 예수께서 ‘개’들은 절대 먹을 수 없는, 오직 자녀들에게만 허락된 빵을 던져주셨기 때문이다. 자신의 살과 피를 발라 ‘먹으라’고 건네주신 것이다. 
여기서 은혜와 편애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율법 외에 세세한 규칙까지 정해 하나님을 예배하겠다고 열심을 부렸던 유대인들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용납 못할 편애다. 그러나 “내가 예수를 물어뜯은 개 맞습니다”라고 고백한 가나안여인 쪽에서 생각하면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다. (사장/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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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4
“어이가 없네”

 

배우 황정민과 정해인이 주연을 맡은 영화 ‘베테랑2’가 개봉 사흘 만에 200만 관객을 돌파하는 등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2015년 개봉했던 ‘베테랑’은 주인공인 형사 서도철(황정민)과 재벌 3세 빌런 조태오(유아인)의 숨막히는 사투를 그렸다. 서도철은 갖은 방해와 난관을 뚫고 결국 살인미수와 마약 등 혐의로 조태오를 체포하는데 성공한다.
1,300만 관객을 동원했던 ‘베테랑’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조태오가 했던 대사 “어이가 없네”다. 
"맷돌 손잡이가 뭔지 알아요? 그걸 어이라고 해요. 맷돌 돌리다가 손잡이가 빠지면… 어이가 없네, 지금 내 기분이 그래." 
물론 ‘맷돌 손잡이’가 ‘어이’는 아니다. 어법에는 맞지 않는다. 감독의 의도는 알 수 없지만 “황당하잖아. 아무것도 아닌 손잡이 때문에 해야 될 일을 못하니까”라는 조태오의 이어지는 대사에는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는 핵심이 들어 있다. 세상의 주인공(신)으로 자신을 추켜 세우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려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소유하고, 쟁취하면서 마음대로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가로막는 것은 모두 ‘아무것도 아닌’, 그저 걸리적거리는 존재로 취급해 버린다. 

 

이런 인간의 본성이 마구 분출됐던 곳이 십자가 아래다.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마태복음 27장1~2절)”.
대제사장과 장로들, 유대인 무리들은 합심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빌라도 총독에게 요구했다. 잠시 고민했던 빌라도 역시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예수를) 넘겨” 주었다.
예수께서 강도 두 명과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많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다. 로마의 군병들뿐만 아니라 대제사장과 서기관, 장로들이 모여 들었다.
그때 지나가던 자들이 예수님을 모욕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27장40절).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예수를 조롱하는 데는 십자가 양쪽에 못 박혀 매달려 있던 강도들도 합세했다.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에워싸고 낄낄거리던 자들의 면면을 보면,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있었다. 자칭 여호와 하나님의 믿는, 택하심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제사장과 유대교 지도자들,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다고 자부하는 자들이 메시야를 죽이는데 앞장 섰다. 심지어 세상으로부터 죄인으로 정죄된 살인강도들도 십자가에 매달려 예수를 욕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십자가 아래서 예수를 죽이는데 동참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동안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 각종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셨다. 십자가 아래 모였던 사람들 중에는 그 장면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한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힘을 모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놓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조롱했다. 

 

모든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향해 “어이가 없네”라고 했던 것은, 또한 예수를 죽이는데 동참했던 것은, 그들 입장에서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제사장과 서기관, 바리새인 등 종교지도자들에게 수시로 욕을 해대던 예수는 당시 죄인으로 취급 받던 세리, 창녀들과는 어울려서 먹고 마셨다. 유대인들 기준으로, 예수는 율법도 모르는 죄인이었다. 심지어 그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신성모독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열심을 다해 내놓은 종교적 행위를 부정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선택 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으로 쌓아놓은 ‘종교적 자산’을 가치 없는 것으로 취급하는 예수, 궁극적으로 그들의 삶을 부정해 버리는 그런 예수를 도저히 메시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마땅히 저주 받은 자만 매달리는 십자가(나무)에 매달아 가장 처참한 모습으로 죽여야 했던 것이다.

 

이들이 했던 말 가운데 주목해야 할 포인트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께서 광야로 나가 40일 금식하고 마귀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 악마는 정확히 같은 말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하고 조롱했다. ‘돌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등 두 차례 시험에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예수가 누구신지 악마가 몰라서 그러지는 않았다. 무덤 사이에 있던 귀신 들린 2명을 고치는 장면에서 마귀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마태복음 8장29절) 하고 말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마귀들을 멸하는 권세를 가진 분이란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거짓말하고, 속이고, 시험하는 것이 마귀들의 본성이다. 그리고는 사람들을 향해 악마는 늘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속삭인다. 
십자가 곁에 섰던 유대인들은 사탄이 하던 이야기,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을 그대로 되풀이 했다. 스스로 ‘우리 아비는 마귀’라고 시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로마군대의 백부장과 예수를 지키던 몇몇 사람들이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한 것이다. 
세상 죄를 대신 담당하신 어린양 예수는 하나님께 버림을 당했고,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 예수의 피, 은혜 때문에 로마 백부장의 눈이 열린 것이다. 그 백부장처럼 예수를 향해 ‘어이없다’고 혀를 차고, 침을 뱉고, 창으로 찔렀던 자들은 평생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다”는 마음을 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자들의 일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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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3
사과나무에서 배 따 먹기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마태복음 13장 44~48절).

 

마태복음 13장에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비롯해 가라지 비유 등 7가지의 이야기가 쉴 새 없이 쏟아진다. 예수께서 마치 작심한 듯 천국에 관한 이야기를 비유로 계속해서 설명하신 것이다. 그 배경은 12장에서 찾을 수 있다. 바리새인 서기관 등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수 차례 격렬한 충돌이 있었다.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었고” 이를 본 바리새인들은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하고 시비를 걸어왔다.
또 회당 안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었는데,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하고 넌지시 물었다. 예수를 고발하고, 죽이기 위한 속셈이었다. 안식일과 관련해 율법을 들먹이며 덫을 놓고 있는 모습이다.
‘그때에’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사람들이 예수께 데려왔다. 그를 고치자 바리새인들은 “이(예수)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 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고 말했다. 아예 예수를 귀신 취급하고 있다.
이처럼 작정하고 덤벼드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예수께서는 구약성경을 인용해 반박하시거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고 그들의 입을 막으셨다. 또 서기관 등이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고 했을 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셨다. 요나처럼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는 십자가의 계획을 넌지시 드러내셨다.

 

애초 성경이 쓰여질 때 장절 구분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바리새인들과의 충돌 연장선에서 많은 무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고, 이때 여러 비유를 잇따라 꺼내신 것이다. 그 목적은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려는”(13장35절) 데 있었다. 그것은 십자가를 통한 구원 계획이며, 그 비밀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13장 44~48절의 세 가지 비유에는 이런 복음에 대한 설명이 압축돼 있다.
감춰진 보화를 얻기 위해 밭을 모두 사버린 사람과 값진 진주를 발견한 장사는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았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소유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던져버린 것이다. 이것은 천지만물의 주인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다. 그분은 창조주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동등한 지위를 버리고, 가장 낮고 비천한 자리로 내려오셔서 죄인을 대표하는 사람이 되셨다. 그리고는 죄인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저주 받은 모습으로 죽었다. 율법을 들먹이며, 여호와께 택함을 받은 백성이라 자부하던 자들 손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아니 유대교 지도자들, 종교를 앞세워 이 땅의 주인행세를 하던 자들을 자극해, 어쩌면 스스로 죽음의 길로 걸어가신 것이다. 이것이 창세 전부터 예정됐지만, 비밀로 감춰졌던 ‘다 팔아’에 들어 있는 의미다.

 

진주와 보화를 얻기 위해 모든 소유를 팔아버린 사람은 마치 바다의 그물처럼 사람들을 끌어 모은다. 그러나 그물에 잡힌 모든 물고기를 진주와 보화처럼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신다. 다른 표현으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지겠다”(49절)는 결말이다. 
‘좋은 것’과 ‘못된 것’의 차이에 대한 논쟁은 기독교 안에서 격렬하다. 그것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따라 성경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교회라는 이름을 내걸어 놓고 “좋은 것이 되자”고 외치고, ‘좋은 것’으로 변하라고 권면도 한다. ’못된 것’에 머물면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겁을 주기도 한다. 또 소유를 다 팔아 바쳐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유혹한다.

 

마태복음 13장 24~30절에 등장하는 이른 바 ‘가라지의 비유’에 주목해 보자. 예수께서는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다”고 하셨다. 그런데 그 밭에는 “밤에 원수가 와서 가라지도 덧뿌리고 갔다”. ‘가라지’는 검은 빛이 나며 독까지 있는 식물로, 처음 자랄 때는 얼핏 좋은 밀처럼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을 ‘미치광이 밀’이라고 부른다. 
예수께서는 친히 이 비유를 제자들에게 설명하시며, 가라지를 뿌린 것은 마귀라고 하셨다. 종들이 밭의 주인에게 가라지를 뽑을 지 물었다. 그러나 주인은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고 답했다. 그리고는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고 하셨다. ‘그물로 잡은 물고기’ 비유와 결말이 똑같다. 
물고기 스스로 자기의 가치를 평가하지 못한다. 마치 가라지가 결코 좋은 씨앗으로 변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전적으로 그물의 주인이 좋은 것, 못된 것을 가른다. 보화를 발견하고, 값진 진주를 얻기 위해 소유를 ‘다 팔았던’ 주인의 선택이 ‘좋은 것, 못된 것’의 가치를 결정한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께 전적으로 속한 권한이다. 

 

여기서 맥락을 놓치면 안 되는 것이, 이 비유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등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의 충돌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제자들이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지 묻자 예수께서는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는 이사야 6장의 말씀을 인용하셨다. 그리고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13장11절)라고 하셨다. ‘너희’와 ‘그들’이 ‘좋은 것, 못된 것’의 다른 표현이다. 
여기서 허락이라는 단어는 역사의 뒤편에서, 눈에 보이지 않게 어떤 존재가 활약하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의 주권적 결정에 따라 허락 여부가 떨어지는 것이다.

 

재미 있는 것은 저자 마태가 7가지 비유가 시작되기 전인 마태복음 12장 끝부분(46~50절)과 비유가 끝난 후인 13장 53~58절에 예수님의 가족과 고향 이야기를 배치했다는 점이다.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왔다는 제자들의 말에 예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하고 물으신 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고 하셨다. 13장 끝에는 고향 사람들이 ‘목수의 아들’ ‘어머니 마리아’를 거론한 뒤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하며 예수를 믿지 않는 장면이 나온다.
인간들이 안다고 하는 것, 심지어 종교적 열심이나 혈통까지도 무가치하게 여기시고, ‘오직 은혜’, ‘오직 십자가’만 반복해서 강조하는 모습이다. (사장 /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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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0
지혜로운 자, 무거운 짐을 진 자

 

마태복음 11장은 예수께서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제자들을 세워 ‘천국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하신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다.
그런데 다소 흐름이 어색해 보이는 세례 요한의 에피소드가 2~19절에 불쑥 끼어든다. 부자연스러워 보인다고 한 것은 11장20절 이후에 회개하지 않은 동네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에 대한 심판, 그리고 12장으로 넘어가 안식일 논쟁 등 가르치시며 전도하는 장면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에피소드는 이 세상의 본질을 드러내고, 십자가의 불가피성을 설명하는 귀한 복음을 담고 있다.
먼저 누가복음 1장을 보면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아이가 태어났을 때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76~77절)”라고 예언했다. 천사 가브리엘이 방문했을 때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15절)”,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17절)”는 통보를 받았다.
요한을 임신하고 있던 어머니 엘리사벳은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를 만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된 일인가(42~43절)” 하고 말했다. 태중에 있던 예수님과 요한이 태어나는 의미와 그들이 할 일까지 모두 부모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요한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며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란 말로 예수님을 소개했었다.
예수께서도 마태복음 11장10절에서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고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고 구약성경 말라기 3장을 인용해 세례 요한의 정체성과 사명을 확인해 주셨다. 덧붙여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고 하셨다.
 

그럼에도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2절)” 제자들을 보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고 예수께 질문했다. 당시 감옥에 갇혀 있던 요한은 예수께서 하신 일을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앞서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고, 혈루병을 앓던 여자를 낫게 하시고, 심지어 죽은 소녀를 살리셨다. 맹인들이 보게 하시는 이적도 행하셨다.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5절)”고 답하셨다.
요한이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이야기를 대답으로 하신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6절)라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결국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에 대해 듣고, 더러는 직접 목격하고, 알고 있어도 실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바리새인들이 그랬다. 그들은 수많은 기적을 직접 보고도 귀신 타령을 하거나, 예수를 죽일 궁리부터 했다.
요한이 어쩌면 우매해 보이는 질문을 했던 것은 인간들의 불가능함 때문이다. 성경에 예언된 선지자로 태어났으나, 그는 구약에 속한 인물이었다. 그의 임무는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고 십자가의 불가피성, 그 누구도 예수의 죽음이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은 예수 때문에 실족할 운명이다. 심지어 선지자 세례 요한조차도 그런 장면을 남기고 있다.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 예수를 보면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인간들은 실족의 길로 빠져든다. 실족의 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장터의 아이들 비유를 통해 추가 설명을 하신다.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16~17절).
인간들의 특징이요, 본질에 대한 설명이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하고 서두를 꺼내신 예수께서 ‘너희들은 절대 복음에 반응할 능력이 없다’고 못을 박으신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직접 말씀하시며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15절)”라고 하신 것은, 이런 취지다.
그것을 더 확실하게 해주는 대목이 연달아 풀이되는데,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18~19절)에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선지자가 오고, 천지의 창조주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아무도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 비유에 결론처럼 붙어 있는 것이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고, 율법을 지킨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했던 유대인들이 소유했던 지혜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자기들이 알고 있는 지혜와 지식을 동원해 요한에 대해서, 예수에 대해서 ‘귀신 들렸다’거나 ‘죄인의 친구’라는 등 품평을 했는데, 실상 그것은 헛다리를 짚는 일이었다. 유대인들의 지혜는 그저 선악과를 따 먹고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악마의 유혹에 빠진 죄인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던 것이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로…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 진저(이사야 5장 20~21절)”라는 구약의 예언이 인간들에게 그대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이 비유는 이제 현실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바로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에 대한 심판의 선언이다. 이들은 유대 북부지역에 있는 도시로, 예수께서 여러 기적과 권능을 베푸셨던 곳이다. 그럼에도 그 도시의 많은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다. 기적 자체가 사람을 바꾸지 못한다는 게 명백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께서 따로 선택해 부르시는 사람들이 있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다.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예수님의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다.
여기에 개입한 것은 ‘아버지의 뜻’이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25절)”.
복음은 위에 언급한 것처럼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착각하는 자들을 외면한다. 여기서 ‘어린 아이’는 ‘말 못하는’ ‘미성숙한’이란 뜻을 담고 있다. 요한과 예수에 대해 일일이 품평을 하던 자들과 반대편에 서 있는 집단이다. 이런 자들에게 복음의 진리가 전해진 것에 대해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하고 예수께서는 설명하신다.
그리고 이 모든 에피소드의 확인 도장을 찍는 것이 27절,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에 집약돼 있다. 
죄인들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알리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사장/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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