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년간 추진되었던 가평전투 기념비를 드디어 브램턴시 메도베일 묘지에 건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평전투가 6.25전쟁사에 어떤 의미이고 캐나다 군이 얼마나 용맹했는지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 가평 전투란?
이 전투는 영연방(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제27여단이 4월19일 사창리 4km 서쪽에서 한국군 제6사단 제19연대에 담당전선을 인계한 다음, 군단 예비대로 가평으로 남하한지 3일 만인 1950년 4월23일부터 4월25일까지 싸운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영연방군이 한국전쟁 중 경험한 가장 큰 규모의 전투이자 가장 큰 영광을 안겨준 전투입니다.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를 막아내는데 성공한 제27여단, 특히 캐나다의 PPCLI대대와 호주대대의 활약상은 6.25전쟁사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영연방 제27여단은 1)영국군Middlesex연대 제1대대, 2)캐나다군 PPCLI 제2대대, 3)호주군 제3대대, 4)뉴질랜드 포병 제16야전연대를 말합니다.
2. 가평전투의 개황
1950년 4월19일 군 예비대가 된 영연방 제27여단은 가평에 CP를 개설하고 각 대대를 부근의 계곡지대에 배치 하였습니다. 이때의 한국전 전선은 동부에서는 제1, 3군단이 북한군 제3, 5군단을 추격하고 있었으며, 중서부는 미 제9, 10군단이 춘천과 가평으로 진출하려 중공군 제39, 40군과 대치하고, 서부에서는 미 제1군단이 북한군 제1군단과 중공군 제26, 27군을 임진강 이북으로 격퇴하고 임진강 연안까지 진출 중이었습니다.
계속 북으로 퇴각만 하던 적은 4월로 접어들자 새로운 전기를 찾은 듯 북한군 제3군단과 중공군 제39, 40, 64군 등 새로운 부대를 전선에 투입하여 춘계공세를 위한 부대의 재편과 공세를 강화하더니, 4월 중순부터는 그 활동이 본격화하면서 침공의 양상이 뚜렷해졌습니다.
이와 같은 적의 침공 기세가 노골화하자 미 제8군은 전 전선의 방어태세를 강화하는 한편 현 전선을 방어보다는 앞으로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군의 공격이 개시되자 적의 저항이 강화되었으며, 23일 마침내 사창리 방향으로 남하하는 중공군 대병력(제20군)과 대치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사단은 사창리 전방에서 적들에게 일대공격을 시도하였으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가평까지 철수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이때에 한국군 제6사단을 위해 가평을 사수하라는 군단의 작전명령이 영연방 제27여단에 하달되었습니다.
3. 캐나다군의 활약상
사창리 북쪽에서는 불리한 전황 속에 휘말려 전열에서 이탈된 일부 한국군 제6사단 장병들이 가평천의 골짜기를 따라 하나 둘씩 영연방 제27여단 지역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23일 정오경이고, 그들의 수는 시간이 경과함으로 증가하여 갔습니다.
이때 제6사단을 지원하던 뉴질랜드 제16포병연대는 여단지역 내로 철수하였습니다. 전방 상황이 급변하자 여단장 Burke준장은 곧 여단으로 들어 닥칠 위기를 직감하였으며, 이때에 군단으로부터 명령을 받게 됩니다. 작전명령은 "뉴질랜드 포병연대를 즉시 한국군 제6사단을 계속 지원케 하는 한편 예하 각 대대를 전방으로 전개하여 제6사단의 철수로를 확보, 그의 철수를 엄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여단장은 뉴질랜드 포병대를 가평 10km북쪽인 794고지(수덕산) 부근으로 급파하는 동시에 영국Middlesex 보병대대도 794고지로 이동시켜 뉴질랜드 포대를 엄호토록 배치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여단은 예비대가 된지 4일 만에 또다시 전투에 휩쓸리게 되었습니다.
Burke준장은 곧이어 잔여 보병대대를 다음과 같이 배치하였습니다. 가평6km북쪽 504고지(죽순리 동쪽) 일대에 호주대대를, 그리고 좌측 가평천 건너 677고지(내촌2km남쪽) 일대에 캐나다의 PPCLI대대를 배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단장은 전방의 상황이 악화하자 794고지에 배치한 영국 Middlesex 대대와 뉴질랜드 포병대를 여단지역으로 철수시킵니다. 이리하여 일선 대대는 우측에 호주대대가 좌측677고지 일대는 캐나다 대대가 담당하여 급히 방공호를 파고 화기를 배치하는 등 방어준비에 만전을 기하였습니다.
이 지역은 방어 지형으로서는 최적지였습니다. 전투는 우측의 호주대대 진지에서부터 일어났습니다. 23일 밤 10시경부터 대대적인 중공군의 공세에 사상자가 속출하고 일대 혼전이 전개되었습니다.
날이 밝자 뉴질랜드 포대와 미 공군 지원에 힘입어 전투가 다소 호전되는 기세를 보였으나 적은 끊임없는 공격으로 대대를 크게 위협하였습니다. Burke 준장은 이 상황 속에서 현 진지를 지탱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결과 오후5시를 기해 호주대대에 철수명령을 내립니다.
한편 가평천 건너 캐나다 진지에서는 호주 대대가 적의 공격을 받아 싸울 때 아무런 징후도 없이 지냈습니다. PPCLI대대장(Stone 중령)은 677고지 정면 일대를 방어하기 위하여 4개 중대(A, B, C, D) 중 B중대를 전면배치 등 만반의 대비책을 마련하였습니다.
캐나다 대대가 처음으로 적들과 접하게 된 것은 24일 아침7시였습니다. 그러나 적의 공세가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이날 야간인 오후8시부터였습니다. 밤11시가 되자 적들은 집중 공세를 시작했고, 수적으로 증강되고 기관총과 박격포의 지원을 받은 적들은 의외로 강하였으며, 이에 맞선 B중대는 결국 최 전면의 일부 진지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B중대는 주진지로 철수하여 부대를 재편성한 다음 격렬한 백병전 끝에 적을 물리치고 잃었던 진지를 다시 되찾았습니다. 적들의 시도를 재빨리 간파한 대대장 Stone 중령은 적들에게 집중 강타를 명령하였습니다. 적들은 중화기의 적시 맹타에 놀랐고 무수한 사상자를 남기고 철수하고 말았습니다.
적은 기동하기 쉬운 가평천 골짜기를 따라 일시에 가평까지 침공하려던 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이번에는 25일을 기하여 산세가 험악한 677고지의 D중대(중대장 Mills대위) 진지로 공격방향을 바꾸어 전면 포위를 시도하였습니다.
이때 중대장 Mills대위는 대대장에게 일단 후퇴하여 재공격 태세로 대처함이 어떠한지 보고하였습니다. 이에 Stone 중령의 답변은 "NO! 절대불가. 한 명도 후퇴불가. 모두 끝까지 항전하라! "였습니다.
25일 날이 밝자마자 중공군은 수적으로 많은 인원으로 2차례나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했습니다. 25일 이후부터는 적은 완전히 공격을 체념한 듯이 움직임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리하여 만3일에 걸쳐 가평일대를 피로 물들인 혈전은 영연방 제27여단의 빛나는 승리로 막을 내렸습니다.
가평전투에서 가평을 침공하고 서울-춘천을 장악하려던 적들은 UN군의 정연한 방어와 막강한 화력의 집중 발휘로 그 공세가 무너지기 시작하여 4월말 경에 완전히 격퇴되어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4. 가평 전투의 의미
캐나다 대대의 전투요원 손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사10명, 부상23명, 계33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가평전투에서 중공군은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영연방 제27여단의 가평전투는 한국전에 참가한 모든UN군 부대에게 가장 모범적인 전투의 하나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미국 정부로부터 최고인 대통령 부대표창을 캐나다 PPCLI 대대와 호주 대대에게 수여되었습니다.
PPCLI 부대는 캐나다군에서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표창을 받은 유일한 부대입니다. 오늘날 가평전투가 있었던 현장에는 양 대대가 각각 세운 기념비가 있으며, 가평에는 영연방 4개국이 한국정부와 공동으로 건립한 종합전적비가 있습니다.
또 PPCLI 제2대대가 싸운 677고지에는 UN한국참전국협회와 가평군민이 세운 기념비가 있어 이 전투를 길이 새기고 있습니다. 가평전투가 끝난 후 영연방 제27여단은 명칭이 영연방 제28여단(여단장G. Taylor 준장)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제27에서 제28로 바뀌었을 뿐 실질적인 변화는 없었습니다. PPCLI 제2대대는 가평전투 한달 후 1951년 5월. 한국에 도착한 캐나다군 제25 보병여단에 배속되었으며, 1952년에는 PPCLI 제1대대, 1953년에는 PPCLI 제3대대로 교대하고, 여단본부는 캐나다에 있었습니다.
금번 대한민국 가평군에서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그리고 대한민국을 위해 희생하신 캐나다 참전용사분들의 높은 뜻을 기리고자 전사자 516명의 위패를 모신 브램턴시 메도베일 묘지에 기념비를 건립하게 되었습니다. 뜻깊고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We will remember them forever” (우리는 그들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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