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지나고 비바람과 눈보라도 그쳤다. “넓은 들에는 꽃이 피고 새들도 노래 하는 푸른 봄에 내게로 오라. 일어나 어서 내게로 오라” 설명이 필요 없는 아름다운 이 가사는 제목이 “나 비록 검으나”로 6월 초에 있을 예멜 합창 공연 곡이다.
결혼 전 이런 마음으로 봄을 기다리던 때가 있었다. 분홍빛 꽃무늬 원피스를 구입해놓고, 진달래꽃 피기만을 기다리던 예쁘고 아기자기했던 시절. 바람 많은 바닷가의 날씨는 심술 궂었지만 오지 않는 봄은 없었다. 따뜻한 토요일 오후, 햇살에 기대어 입고 나갔던 옷과 화사했던 봄.
그때처럼 변덕스런 날씨는 오월을 바라보는 데도 눈치없이 눈까지 데리고 다닌다.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날씨를 불평하며 감기에 대해 말하지만, 새싹들은 보송한 맨얼굴로 아랑곳 없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해마다 교회를 찾아와 둥지를 트는 구스도 보이고, 새들 소리 명랑한 환상적인 봄, 그런 봄이 내게도 온다.
생애 첫 손녀가 태어나고, 보고싶은 친구를 만나게 된다. 서로에게 부담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만나고 편안하게 잠자며 지낼 수 있게 되는 길이 열렸다.
매주 있는 공연 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들뜬 마음으로 전화번호를 폈다. 이번에는 ‘갈 수 있어’ 연락처로 전화하니 전화가 되지 않는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확인 차 이메일로 몇 자 적어 보내니 반송이 된다. 평범한 날도 소식이 끊기니 평범하지가 않다.
그 시절 다니던 교회 인터넷에 들어갔다. 가끔씩 언제 한번 만날까 생각하면서, 커셔를 누른 채 한참을 보던 사진과 이름도 없다. 그렇게 오래 전에 본 것도 아닌데, 교회 연혁에만 흔적이 있었다. 새벽 1시가 넘어 교회사무실에 연락처를 남기고 잠을 자려 해도 눈이 어둠을 누른다.
소식이 없어 몇날을 기다리다 연결이 되었지만 대답은 실망스러웠다. 주일이 두 번 지나가도 연락이 없었다. 교회를 떠났는가? 미국으로 갔나? 포기하며 다른 방법으로 찾을 구상을 했다. 그러던 차 늦은 밤 전화가 왔다. 저어 혹시 눈썹 새까맣고 눈 까만 사람이냐며, 홍콩에서 온 반가운 전화였다. 사람을 기억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인가 보다.
그이는 내가 찾던 그리운 친구의 지인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그리운 친구는 홍콩에 살고 있다. 홍콩은 남편의 직장 관계로 삼 년 간 살았던 곳이다. 삼 년 동안 같은 동네에 살면서 언제나 유쾌했던 한 사람과, 당신 때문에 시계를 십 오분 빠르게 맞추고 산다던 또 한 사람. 둘 다 신앙생활로 친해진 사이이다.
서로가 방해받지 않는 시간을 택하니 내게는 새벽이었다. 전화기 배터리를 확인하고, “여보세요. 어머머 세상에” 우리는 이 한마디로 25년 전의 세월을 끌고왔다. 요즈음 세상에 그 흔한 카톡도 안하고 살았음에도 잊은 적 없다고 말 할 수 있나 하겠지만, 우리는 그랬다.
삶이 때로는 그날이 그날 같아도 그 경계를 벗어나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몇 번 오라 해도 가지 못하고, 나는 캐나다로 이주하고, 그녀도 아이들 때문에 미국으로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 연락을 놓쳤다.
보고 싶다고 다 만나고, 갖고 싶다고 다 가지고, 가고 싶다고 다 가고, 하고 싶은 말 다하고 사나? 그렇게 사는 사람 있을까? 없을 거야. 속으로 되뇌며 카톡에 친구로 등록하니 가족 사진이 떴다. 손주까지 본 그녀의 사진을 보며 세월이 빠르게 지나간 것만 아니구나.
세월 속에 수고의 열매가 아이들에게 보였다. 바르게 키웠구나. 운동도 가지 않고 생각에 잠기는데 TV에 ‘보약같은 내 친구’ 라는 노래가 들려온다.
보약 같은 내 친구. 그렇지 허약한 내 마음에도 푸른 봄이 오고 그 때 그 마음으로 기다리는 내 친구 보약 먹으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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