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경보가 내렸던 한겨울, 걸어서 30분 거리의 영화관을 찾아 나섰다. 60대 이후의 삶의 모습에 초점을 두고 만들었다는 영화 ‘Another Year’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었다. 지하철 대신 도보를 택한 것은 바람 없이 내리는 소담한 눈에 매료되어서였다. 눈이 발목까지 푹푹 들어가지만 마치 솜털을 밟고 지나가는 느낌이 오히려 포근했다. 겨울에 눈이 없다면 칼바람 혹한이 얼마나 삭막하고 재미없을까. 답답했던 가슴 속이 조금씩 뚫어지기 시작한다.
그 큰 영화관엔 나와 두 노부부만이 관객의 전부다.
강한 영국 발음에 우리의 정서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화적인 갭 때문에 내 실력으론 이 이야기 속에서 가슴을 울리는 감동도 손에 땀을 흘리게 하는 기복의 스릴도 못 느꼈다. 재미로 따지면 별로였다. 그러나 63회 칸느영화제에서도 호평을 받았고 좋은 영화로 추천될만큼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 영화의 진가를 다시 알고 싶었다. 며칠 후 토요일 친구들과 함께 다시 그 영화를 봤다.
관객은 훨씬 많았다. 처음 보았을 때보다 훨씬 이해가 되면서 두 시간이 넘도록 이어지는 영화흐름에 흠뻑 빠지고 말았다.
어둡고 우울한 한 중년 여인이 흑인 간호사의 진료를 받으며 주고받는 대화로 이 영화의 서막은 열리고 있다. 환자는 불면증에 시달림을 호소하고 있다. 병원 카운슬러 상담을 받으라 권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 카운슬러 제리는 이 여인과 상담을 해주고 같은 병원의 리셉셔니스트로 일하고 있는 메리와도 대화를 나눈다. 메리는 주인공 못지않게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은퇴를 눈앞에 둔 행복한 노부부 제리와 톰, 주변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계절 풍경이 채소밭에서 심고 가꾸고 거두는 장면들과 대비되면서 전개되고 있다. 그 속엔 외롭고 소외당하고 사랑받기 원하는 사람, 인생을 잘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보다 잘못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진하게 나온다. 노부부는 이들의 친구가 되어 언제나 그들을 환영하며 차를 나누고 식사도 하며 그들 있는 모습대로 받아들인다.
그 중에서도 예고 없이 찾아오는 알코올 중독자요 몇 번인가 결혼실패자로 자기혐오감에 빠진 64세 난 메리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절박한 하소연에 귀를 기울이는 노부부의 애정 어린 돌봄이 남다르기만 하다.
그러나 잘 생기고 멋진 노부부의 30난 아들을 메리가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되자 노부부는 그녀를 동정은 하면서도 경계하게 된다. 불가능한 메리의 구애 모습은 인간 바닥에 깔린 사랑에 대한 갈구다. 거절당한 메리는 더욱 망가지고 더욱 외로움에 몸조차 가누기 어려운 모습으로 노부부 집을 오랜만에 다시 찾아온다. 거기서 아내를 잃은지 며칠 안 되는 제리의 남편 톰의 형을 만난다. 처음엔 메리에게 냉담했던 톰의 형도 끊임없이 말을 거는 그녀에게 조금씩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노부부는 아들과 그의 애인 네명이 행복하게 웃고 떠들며 즐거운 저녁 식탁에 메리와 톰의 형도 함께 한다. 그들은 말한 마디 없이 다만 그 분위기를 바라만 보고 있다. 그러나 간간히 서로 바라보는 이 두 사람의 시선 속에서 연민의 눈빛 교류가 있음이 감지되었다. 메리의 불행하지도 행복해 보이지도 않은 표정, 그러나 무엇인가 시사하는 의미있는 표정이 클로즈업 되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일상적인 삶의 이야기 가운데 일어나는 비극적인 불행한 삶의 단면들을 탁월하게 그려냈다. 인생의 늦가을을 맞이했거나 겨울 인생을 사는 우리들 삶 속에서 한때 경험할 수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이 영화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해해주고 이해받고 더불어 산다는 것, 작은 친절, 작은 관심, 작은 사랑으로 한사람의 영혼을 터치하여 새 삶의 길을 걸어가도록 도울 수 있다는 메시지를 가슴에 담아왔다.
폭설 속 혼자 영화관을 찾았던 그날 이미 어두워진 눈길을 걸어 귀가하는 호젓함 가운데서 외로움이 몰려왔다. 그 때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 소리가 울렸다.
“당신 지금 어디있어?”
“나 눈길 걷고 있어요. 20분 후면 집에 도착할거야”
남편의 전화다. 아, 나도 혼자가 아니구나. 새삼스런 깨달음이었다.
친구와 더불어 두 번째 영화관 행보도 따지고 보면 영화 자체보다 함께 한다는 즐거움이 더 컸던 게다. 우리도 겨울을 걷고 있는데 산다는 것이 별거 아니라고 그저 사랑하고 아껴주고 염려해주며 같이 한길을 걸어 갈 수 있는 동반자가 있으면 그게 곧 행복이라구 나에게 타이르는 말이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