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기념일

 

 


 며칠 전부터 어떻게 보낼까 요모조모로 생각하고 있었다. 남편에게 어떻게 보낼까 하고 묻기도 하였다. 이름 붙일만한 특별한 해는 아니지만  39년이라면 어찌 보면 긴 세월이다. 내년 40주년에는 좀 더 멋지게 여럿이들 모여서 근사하게 보내자고 이야기 했다. 그리고 돌아올 50주년 금혼식 때는 더 멋지게 보내자고 야무진 꿈을 이야기 해왔다. 허락해 주신다면 말이다. 더 더욱 욕심을 내어 회혼례까지 할 수 있게 된다면 그 때 둘 다 건강하게 치매에 걸리지 않고 해로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행복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회혼례를 지내고 부활절 지나서 어느 화창한 봄날, 앞서거니 뒷서거니 둘이 손잡고 함께 하늘나라로 간다면 아이들도 기쁘게 손 흔들어 환송해 줄 호상이고 즐거운 이 세상 나들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념일인데 무슨 선물을 해줄 거예요?” 39년 전의 젊은 신부가 먼저 묻는다. 


 “근사한 레스토랑에 갈까나?” 역시 39년 전의 젊은 신랑이 대답한다.


 9년 전 30주년 때는 아이들이 그 해의 토론토 베스트 레스토랑에 예약을 해주어서  함께 다같이 가자고 하니까 결혼은 두 분이 하셨지 우리들 모두 함께 했어요?  하는 핀잔을 들으며 호젓이 둘만의 데이트를 즐겼던 기억이 있다. 샴페인도 잊지 마세요, 라는 큰딸의 충고까지 있었다.  


 이번 주는 유난히 외식이 잦아서 이러저러 세 번이나 밖에서 먹었더니 별로 속이 편하지 않다. 몇 군데 알고 있는 분위기 있는 근사한 레스토랑을 생각해 보다가 그냥 속 편하게 집에서 내 입맛에 맞는 것 먹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선물 받고 싶어? 라고 좀 물어봐 주세요.”


 “뭐 갖고 싶은데?”


  “글쎄... ” 

 

 보석 목걸이? 반지? 핸드백? 옷? 뭐 그런 것들이 다 시큰둥하게 생각된다. 내게 보석이나 옷이 많아서가 아니다. 한참 생각 후에 나온 말에 그이의 가슴이 조금은 뛰었을 것이다. 아니면 야 이거 지갑 굳었네, 했을까? . 


 “여보, 오늘 하루 종일 내 볼에 열 번의 뽀뽀, 설거지 세 번, 그리고 장미꽃 한 다발을 받고 싶어요. 그런데 당신이 받고 싶은 건 뭐지요? ”  어이 없다는 듯 그러나 내 말에 보조를 맞추려는 듯 


  “응, 당신 사랑이지.” 


  “사랑은 이미 주고 있는데요. 뭘. 내가 전부터 생각하던 것이 있는데... ”  


  “음, 아로마 마사지?”


  “어떻게 알았죠?”


  “전에 당신이 말했었잖아?”   


 아침 설거지 꺼리는 찻잔 두 개와 접시 네 개가 다였다. 점심엔 냉면을 만들어 먹었으니 씻을 그릇이 대접 두 개에 냄비가 두 개였다 저녁은 보통의 한식 저녁 식사였으니 밥 공기 국 대접 하여 그릇이 열 개정도 되었다.

남편 혼자서 안 사던 꽃을 고를 수 있을까 하여 따라갔다. 맘먹고 꽃을 사러 가다가 왜 오래 가는 화분을 사지 꺾은 꽃을 사느냐고 하던 이웃집 아저씨 생각이 나서 화분으로 할까 하다가 1년 중 여러 번 있지도 않는 날인데 이럴 때 한번 써보는 거야 하면서 한 더즌의 커다란 붉은 장미꽃 다발을 그냥 사기로 했다. 마침 싱싱한 것이 있었다. 


 커다란 크리스탈 화병에 꽂아 식탁에 올려놓는 아내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는 순간 남편은 그간의 모든 피로가 다 없어지는 것 같았으리라. 거실 파이어 플레이스 위에 있는 결혼사진을 다시 들여다 보며 그날 모인 친구들 숫자를 세어보다가  다들 뭐하고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다가 신혼여행 떠난다고 제주도행 비행기를 타러 김포공항에 갔다가  거기서 처음으로 싸우던 일도 떠올려 본다. 그 때 왜 내가 그렇게 가방 가득 짐을 꼭 채워서 가지고 갔을까? 자기가 가져온 카메라의 삼각대를 넣을 수가 없어서 화가 난 신랑이었어. 그때 벌컥 화를 내었지. 내 친구들이 옆에 있는데 난 좀 창피했었어. 아, 그 때 나도 따라서 화를 내고 신혼여행을 안 갔더라면?  


 별로 말도 없이 둘이 앉아 차 마시고 TV 보고 집안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 하루가 다 지나갔다. 밤이 되어 자러 2층 침실로 갔다. 침대에 전기담요 스위치를 켰으나 빨리 더워지지 않는다. 옆에서 수도쿠에 다시 빠져드는 남편에게


  “전기담요 스위치 켰어요?”


  “다시 한 번만 확인해 봐요.” 


  “여보, 스위치 온도 좀 높게 올려봐 주세요.” 


 그 순간이었다. “뭐라고? 아까 켰는데 왜 날 못 믿는 거야?” 버럭 큰 소리가 난다. 하루 종일 조심스레 화평무드로 지내온 것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에라. 내 체온에 의지하려는 차가운 이부자리 속에서 그냥 잠들자. 이대로 설마 얼어 죽지야 않겠지. 


 아침이 되어 눈을 떴다. 새로운 아침에 감사하고 옆에 누가 있어서 감사하다. 그 때 남편이 “이거 어디서 산 거지? 전기 담요 고장인가 봐.” 라고 말한다. 계산해 보니 설거지 두 번과 뽀뽀 다섯 번과 아로마 마사지는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꼭 다시 오리라고 믿는 다음 번 결혼 기념일을 기약하며.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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