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년 후, 그들이 돌아왔다

 

56년 전 1968년 4월30일, 미국 뉴욕시의 콜롬비아 대학생들은 베트남전 반대 시위를 위해 대학내의 해밀톤 홀(Hamilton Hall)을 점거했다. 경찰은 강경 진압을 통해 시위 인원 700명을 체포하였고, 이 과정에서 학생은 물론 경찰까지 포함해 총 100명 이상이 다쳤다. 미국 대학생들의 위와 같은 월남전에 반전 시위는 그후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일반 시민들 사이에도 비판의식이 번지게 된다. 이에 당시 미군 파병을 결정했던 린든 존슨 대통령은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하고 반면, 월남전쟁 종결을 공약으로 내세운 공화당 후보 닉슨이 대통령에 선출됐다.

1968년 사회운동은 그 당시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사회분쟁으로 권위주의적 정권에 맞서 일어났다. 이 운동은 인종주의를 비롯한 여러 차별들에 대한 반대 뿐만 아니라 핵이나 환경 오염, 월남 전쟁과 같은 여러 사회적 문제에 대한 반대도 포함하고 있다. 이를 통칭해서 68혁명이라 불렀는데 미국에서는 콜롬비아대학 사태가 이 운동을 크게 확산시켰다.

 

최근 미국 대학가에서 확산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는, 1968년 베트남전 반전 시위와 비슷한 양상을 보이면서 대선을 눈 앞에 두고 있는 바이든 대통령과 민주당의 불안감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한 요소가 되고 있다.(흡사 1968년의 유령이 되살아 온 것처럼 56년 전의 풍경과 너무 닮은 꼴이라 할 수 있다.)

미국 언론에 의하면 30일 밤 뉴욕경찰이 콜롬비아대 해밀톤 홀에 진입해 바리케이트를 치고 농성을 벌이던 학생들을 체포했다고 보도하였다. 앞서 대학당국은 전날 오후 2시까지 천막 농성장을 떠나라고 통첩을 보냈지만 학생들은 투표를 통해 거부를 결의하게 된다. 이어 이튿날 새벽 일부 학생들이 해밀톤 홀에 들어가 바리케이트를 치고 농성에 들어가자 학교 당국은 점거 학생들을 퇴학시키겠다고 위협하며 경찰에 진압 요청을 하게 된다.

 

 

해밀톤홀을 점거한 학생들은 그들이 점거한 이 건물을 ‘힌드의 홀’이라 명칭하는 현수막을 내걸었는데 학생들이 내건 대자보 사연은 이러하다.

‘힌드 라잡’은 팔레스타인 소녀로, 이 세상에서 보낸 햇수는 고작 6년 이었다. 지난 1월29일 힌드는 삼촌가족과 차를 타고 가자시티를 빠져 나오고 있었다. 그 소녀는 이스라엘군의 총탄이 무서워 도망치려 하였으나, 그 총탄 때문에 영영 도망칠 수 없게 된다. 삼촌과 숙모가 먼저 죽임을 당했고 사촌언니도 죽었다. 이 몰살당한 차량에서 아직 죽지 않은 15살 라얀이 외국에 있는 친척에게 구조를 요청하는 전화를 하였다.

“엄마 아빠는 벌써 죽었어요. 언니도 죽었고요. 저랑 힌드만 살아 있어요.” 

“걱정 하지마, 무서워 하지마, 바로 앰뷸런스를 보내줄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

친척은 바로 이슬람권 적십자사에 구조를 요청했다. 라얀의 전화번호를 주고 연락하면 라얀이 받을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라얀이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전화를 받고 있는 사이에 이스라엘군의 탱크는 총격을 가했다. 둔탁한 총격소리와 라얀의 비명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전해졌다. 그렇게 전화는 끊겼다.(2주 뒤 차 안에서 주검으로 발견되며 구조대원 2명도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된다.)

전쟁에 반대하고 이스라엘의 군산 복합체(Military industrial complex)에 대한 투자 철회를 요구하는 학생들에 대한 경찰의 진압은 56년 전 1968년 콜롬비아대 상황과 여러모로 동일하다.

당시 해밀톤 홀을 점거하고 월남전 징집 반대와 이 대학의 군산 복합체(軍産複合體)와의 관계 단절을 주장하던 학생 700여 명을 경찰 1천여 명을 투입해 진압한 날도 또한 4월30일이었다. 시위 학생들이 이날 새벽 해밀톤홀을 점거한 의도의 배경도 4월30일이라는 날짜에 상징성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전날 밤 몇 명의 시위대가 홀에 들어간 뒤 이날 새벽에 문을 열어 많은 학생들이 대거 진입할 수 있게 하였다. NBC 방송은, 1968년 당시 같은 장소에서 데모에 참여했던 마크 나이손 역사학과 교수의 말을 인용하며 56년 전 당시 상황과 현재의 상황이 매우 비슷하다고 전하였다.

 

지난해 10월7일 하마스의 테러 공격으로 시작된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은 캐나다와 미국으로 대학생들이 참여하면서 반유대주의(Anti-semitic)와 반 팔레스타인에 대한 어느 한 쪽의 지지라기 보다는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발생한 집단 살해의 윤리적인 차원에 입각한 인권(Human Right)문제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만여 명의 어린아이들을 포함한 3만5천여 명의 시민이 이미 죽었고, 지금 이 시각에도 가자지역에 남아 있는 생존자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와 더불어 기아 선상에서 고난을 받고 있다.

한편, 몇몇 유대인 학생들은 캠퍼스 분위기가 반 유대주의적인 정치적 동기를 포함하고 있어 신변의 안전 우려를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시위대는 이들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부풀려 있다고 지적하며 유대인 학생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가하는 일은 드물다고 한다. 그들 학생들의 주장은 이스라엘이 가자지역에서 팔레스타인에 대한 집단 학살을 중단하고,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전쟁을 지원하는 무기 제조산업 및 관련 기업들로부터 대규모 기부금 투자를 받지 말라는 것이다. 캐나다나 미국의 학생들의 반전시위와 그때마다 요구하는 사항들은, 1960년대에도 70년, 80년대 그리고 현재, 2024년에도 옳았다. 지금은 학생들을 처벌하기 보다는 그들의 의견을 경청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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