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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초 이유식의 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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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식

부동산캐나다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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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0
고 김창영 박사님의 영전(靈前)에

 

▲고 김창영 박사

 

 


절명가(성삼문)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what I become after I died
I will become a tall and exuberant pine tree on the top of mountain Bongrae
I will become a man of integrity even though the heaven and the earth are covered with snow

 

----------------------------------------------

 

길 하나(이유식 추모 헌시) 

 

 

왔던 길 하나 있습니다 
가야할 길도 하나 있습니다
태양빛에 꽃을 피우는 길도 있고
님을 보내고 목 놓아 울고 있습니다.
사랑도 하나의 길이련만
항시 가변하는 길 하나 있습니다
찾아도 영원히 찾지못할 길 하나 있고
저를 두고 떠나가신 님도 있습니다
그리움이 손짓하는 길 하나도 있고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진 길도 있습니다
님이 간직한 길 제가 알길 없고
제가 드리는 사랑의 눈길 님은 알지 못합니다
억만겹으로 코팅된 심장에
빨간 장미꽃이 피어날 때
제가 님에게 드리는 길 하나는
천상에서 피어난 눈물입니다

 

 

 상기의 절명(節命) 시조는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죽은 사육신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절신(節臣)으로 꼽히는 성삼문의 시조입니다. 성삼문 등 사육신의 처형 후 그들의 의기와 순절에 깊이 감복한 한 의사(義士)가 시신을 거두어 한강 기슭 노량진에 묻었다 하고 현재 노량진의 사육신 묘역으로 우리의 곁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성삼문의 약력을 보면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에 식년시에 응시하여 뒷날 생사를 같이 한 하위지와 함께 급제를 했습니다. 집현전 학사로 뽑힌 뒤 수찬, 직집현전을 지냈으며 세종이 정음청(正音廳)을 설치하고 훈민정음을 만들 때 정인지, 신숙주, 최항, 박팽년, 이개(李塏) 등과 더불어 이를 도왔습니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단종복위운동을 계획했던 성삼문은 대역죄인으로 박팽년, 유응부, 유성원, 이개, 하위지와 함께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 찬탈을 한 세조로부터 역적이란 죄명하에 삼족이 멸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고인이 된 저의 동서 형님의 고매한 인격을 흠모하며 평소에 고인이 위의 시를 좋아하셔서 낭송을 하며 명상에 잠기셨던 모습을 되새김하며 지난 2월 4일 장례식장에서 이 성삼문의 절명시조를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낭송하며 곁들여 제가 좋아는 생존의 길을 음미한 저의 추모헌시도 한편을 낭송했습니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이란 숙명을 생자인 우리가 어찌할 수 있을까마는 우리들의 인생길을 공자는 일찍이 3단계로 논하며 젊음과 장년 노년을 심도 깊게 논했고, 영국의 철학자 라스릿은 이보다 한 단계 늘여 4단계의 길을 피력한 바가 있습니다. 


 즉 젊었을 때에는 주색을 멀리하고 학문에 정진하라 했고, 장년이 된 때에는 무엇이던지 다 할 수 있다는 용기가 오만해지면 인생길을 망치니 분수를 지키라는 교훈을, 노년이 되었을 때에 지금까지 살아온 생존을 음미하며 정진을 하라 했습니다. 이에 라스릿은 인생의 길을 4단계로 분류하며 계절로 따지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고 피력한 바가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고인이 된 동서 형님이 4단계의 생존을 영위하면서 왜 하필이면 이 성삼문의 절명가를 즐겨 음미하셨을까를 다시 한번 반추해 봅니다. 이는 고인은 일찌감치 우리 인생의 갈 길을 냉정히 각인하고 있었기에 그 많은 시조 중에서도 이 절명시를 좋아하셨으리라 생각을 해봅니다. 


 이는 생을 달관한 지혜에서 샘솟는 식견에서 그 참뜻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다시 말해 모든 면에서 초연한 해탈의 경지를 가슴 속에 간직하고 살아온 형이상학적 수양의 결론이라는 생각입니다. 


 높고 낮음과 부와 빈의 경지, 인간이 향유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나의 것으로 만든 초연하고 의연한 삶의 자세로 이는 우리 같은 평범한 범인으로서는 가늠키 어려운 일면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누구나 즐겨 쓰는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는 말과 세월이 약이라는 자위적인 말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희로애락의 극치에 달한 자위적 말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이 절명시에는 죽음 앞에서도 초연할 수 있는 정신 자세를 후학에게 가르치고자하는 고인의 학덕에서 얻어진 결론이라 생각을 한답니다. 


 동포사회를 위하여 수많은 희생과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시면서도 고인은 한 번도 자기 자신을 나타내지 않았으며, 언제나 무색무취의 변함없은 자태로 동포사회에 헌신과 봉사를 해오시며 한생을 마쳤음에 인척인 제가 고인을 칭송함에 동포제위님께 양해를 구하며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에 저의 시 길하나는 제가 7권의 시집을 출간하면서 그 중에서 저 나름대로 우리의 생존을 음미하는 4연의 시로 구성을 한 인간이 가야할 숙명적인 길, 죽음이란 명제 앞에 썼던 작품입니다. 즉 일연에서 우리의 길은 부모님으로부터 탯줄을 끊고 이 세상에 태어나 가야할 길을 음미해 본 내용입니다. 


 왔기에 가야하고 가는 길에 부귀영화의 길도 있지만 결국 가야할 길 종착역은 누구나 공수래공수거로 떠나야함을 각인코자하며 이연에서 인생길은 천갈래 만갈래 길 즉 성공을 하며 모든 것을 향유하며 살아가는 길도 있지만 아무리 노력하고 올바른 삶과 성공적인 생존을 영위코자 노력을 해도 사주팔자가 나쁘거나 조상을 잘못 만났다던가 능력이 없어서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함과 동시에 원하는 바를 찾아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시궁창으로만 빠져드는 인생길을 음미코자 했습니다.


 삼연에서는 남녀의 애정도 한 가정을 지탱하는 길도 가화만사성 속에 꿈꾸는 노스탤지어에 지나지 않음을 개탄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순결한 사랑도 상대가 나몰라라 하는 무관심은 대상없는 사랑이기에 짝사랑으로 끝이 남을 어이 한답니까. 이에 저는 사랑이란 관심을 얼마만큼 가져주느냐 하는 점에 우리의 생존의 즐거움이 표출될 수 있다는 생각을 피력해 보는 것입니다. 


 종연에서 그 토록 고진감래의 생존을 거처 인생의 종말을 고하는 곳에서 뒤돌아보면 회자정리란 말의 뜻도 모든 것이 헛것임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살아있으면 반드시 만날 수 있다는 회자정리도 우리가 그토록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하고 사랑을 주고받고 싶어도 살아있을 수 없는 이생과 전생의 갈림에서는 모든 것이 헛거품이 되겠기에 살아있는 자는 죽음이란 명제 앞에 서로의 연을 다시해야 함은 피할 수 없기에 우리는 죽은 후의 삶 즉 전생에서 다시 만나 못 나누었던 이생의 삶을 가져보자는 절규를 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저의 시 ‘길 하나’는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 인생의 비극을 논함에 있습니다. 즉 생존의 슬픔이란 소외되고 상실되는 현실 즉 관심밖의 생존을 말합니다. 소외와 상실을 극복하기 위하여는 인간성의 회복을 강조해 봅니다. 인간 생존의 밖의 길에서 길 하나를 찾아서 인생은 오늘의 생존을 영위하고 있음을 잊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제 저의 동서 형님은 이생에서는 영원히 만날 수 없기에 남은 사람은 언젠가 천상에서 만나 이생에서 못 나눈 정한의 기쁨을 맛 볼 수 있기를 기대하며 신에 대한 이방인이 되어야하고 자연에 대한 타인이 되어야하는 모든 슬픔을 인연이란 두 글자 위에 아로새기며 조용히 눈물을 거두려 합니다. 형님 부디 편안히 영면하소서. (막내동서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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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9
내 삶의 빛을 찾아서

 

 

<즐기며 살아가자> <사랑하며 살아가자> <참으며 살아가자>. 언제부터인가 이 세 줄의 시어가 저의 힘이 되었습니다. 읽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이 세 줄의 시어의 메타포(metaphor)에 나의 힘과 생존 사랑의 철학이 숨쉬고 있는 것입니다. 나뿐이 아니고 독자 개개인도 이 세 줄의 시어를 통해 사상의 적립과 생존의 철학을 음미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기실 저 자신의 생을 그렇게 즐기면서 살지도 못하고 또한 신앙이 없는 저 같은 사람이 남을 사랑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위선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참으면서 살아간다는 말도 저 같이 수양이 부족한 사람으로 어떤 일이나 사건에 관하여 참지 못하고 울컥 치미는 성격의 소유자라면 실천하기 힘든 말입니다 위 세줄의 시어에 대한 저대로의 관념적 생각을 음미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즐기며 살아가자.


 우리 인생이 길고 긴 듯도 하지만 짧디 짧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1분 1초가 헛되이 지나가는 듯할 때는 안타깝고 아쉬움에 초조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에 즐기며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하루 하루의 현실을 즐기며 살아감이 얼마나 보람찬 일인가를 곱씹어 보곤 합니다. 


 즐기며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우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갈 수 있는 길이고, 생존의 철학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컨대 빅토르 위고의 원작 "노트르담의 꼽추"에서 영화속의 주인공 꼽추역의 안소니 퀸이 집시인 지나 노노부리지다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감격적인 이야기입니까.  


 또한 20세기가 낳은 세계적인 혁명가 체 게바라의 삶은 어떠합니까. 그는 아르젠틴의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나 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였지만 그의 본업인 의사를 포기하고 보다 넓은 세상을 알고자 라틴아메리카를 여행하며 나환자들의 삶과 궁핍한 농민들의 현실을 목격하고 고난 받고 가난에 허덕이는 민중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자 약한 자의 입장에서 그의 생존의 투쟁은 시작 됩니다. 


 즉 그가 좋아하는 혁명가로 변신 20세기가 낳은 위대한 혁명가로 추앙을 받으며 39세의 나이로 중남미 볼리비아 정글에서 생을 마감했다 합니다. 그의 죽음 앞에 실존주의 철학의 선구자 장 폴 사르트르는 20세기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란 평을 했고, 시인 엘뤼 아르는 별이 없는 꿈은 잊혀진 꿈이고 별이 있는 꿈은 깨어있는 꿈이라 했습니다.


 이는 그가 누릴수 있는 부와 명예를 버리고 쿠바의 민중 혁명에 가담, 카스트로와 같이 공산혁명을 성공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는 민초들의 고난의 삶을 해방코자 다시 총을 잡고 민중 해방을 위한 투쟁을 하다가 생을 마쳤습니다. 아 얼마나 자기가 원하고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다가 생존을 마쳤습니까. 


 또한 순애보의 표상 노트르담 꼽추의 일생은 어떠합니까. 꼽추의 몸이지만 세상 모든 사람의 질시와 업신여김을 받으면서도 세상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없이 사랑을 위하여 그의 모든 것을 바친 순결의 사랑, 남을 의식치 않고 자기가 즐겨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저의 심금을 울려주고 있습니다.


 혁명가 체게바라는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는 것이 생의 최고의 즐거움 이었기에 그 즐거움을 찾아서 일생을 바쳤습니다. 저 이유식도 이렇듯 제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다가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다면 이 세상 소풍이 끝나는 날 즐기며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즐기는 일 하나도 제대로 못하며 생업에 허덕이다가 고희를 훌쩍 넘기고 나니 남아있는 것은 좌절감과 허무만 도사리고 있은 것 같습니다.


 집 친구 이 글 읽으면 입이 뾰족이 나올 일이지만 살아있는 동안 안소니 퀸 같은 멋진 연애도 한번 해보고 세상을 바꾸어 놓은 혁명가의 삶 또한 온 세계 인류가 즐겨 읽을 수 있는 글 한편 써 놓고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리요만 이상의 파도가 노아의 홍수모양 출렁이고 있으니 이 어이 서글프지 않으리오.


 둘째, 사랑하며 살아가자.


 우리네 삶이 남을 위하여 끊임없는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생존을 영위한다면 이 얼마나 아름다울까하는 생각을 수 없이 하지만 사랑을 실천치 못하니 공염불이 되고 있으며, 오늘도 석양은 오고 있습니다. 주어진 여건에 따라 남을 사랑한다면 이 얼마나 보람찬 생존이 될까를 생각해 봅니다.


 저는 맹자의 성선설이나 순자의 성악설도 잘 인지 못하면서도 사랑이란 말의 원천은 마음의 근본이 착해야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종종해본 답니다. 주기만 하고 받을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랑 예컨대 마더 테레샤 같은 희생적 사랑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여건에 따라 주위의 모든 일에 대하여 베풀며 살아감도 행복의 조건이란 생각을 할 때가 수 없이 많지만 아직 저 자신을 희생하며 남을 위하여 크게 희생을 했거나 사랑을 베풀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음에 항시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 저 이유식이란 사람도 남을 위하여 희생을 하고 사랑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하는 상념을 씹지만 아직 아무 것도 못하고 흘러가는 구름만 보며 무능한 저 자신을 한탄해 본답니다.


 누가 무어라 하던 가지고 있는 현실에 따라 서로 배려하고 도와주며 베풂의 정 속에 사회는 밝고 명랑해지리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음은 저의 양심에서 우러나는 독백이라는 말씀을 하고 싶습니다. 


 양보하고 이해하는 속에 나눔의 정은 싹트고 그 속에 베풂의 즐거움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꼭 금전으로만 환산할 수 없는 사람 냄새나는 사랑의 정을 생각해 보곤 한답니다.. 조그마한 나의 희생과 사랑이 다른 사람들을 얼마나 기쁘게 할까를 생각하며 하루를 넘기는 이 허수아비 같은 생존은 오늘도 로키산에서 뛰노는 엘크사슴과 눈 쌓인 겨울산을 보며 한숨을 토해 본답니다.


 셋째, 참으며 살아가자.


 모든 일, 사건에 대하여 어떠한 난관과 슬픔에 처하더라도 남을 원망치 않고 참고 참으며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음미코자 합니다. 참는 자에게 복이있다는 말, 좋은 소식도 삼일, 나쁜 소식도 삼일이라는 말을 다시 곱씹으면 어떤 순간적 수모와 모욕도 참고 참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다 지나가는 것인데 모든 것이 세월이 약인데 조금만 참으면 모든 것이 편한데 그 참는다는 것을 이겨내지 못하기에 인류는 항시 전쟁의 참화 속에 슬픔을 안고 살아간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에 저는 참으며 살아 갈 수 있는 수양을 어떻게 쌓아야 할까. 위선의 파도에서 말의 유희에서 벗어나 진솔한 인간관계 속에 쌓아온 정이 아무렇게나 이용당하고 조소의 대상이 된다해도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수양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인격적 모욕 억울한 모함과 매도 이 모든 것도 순간으로 지나기에 참을 수 있는 수양이 얼마나 나의 생존에 중요한 자리매김을 하는가를 생각할 때가 있음은 나뿐이 아니고 누구나 느끼고 겪으면서 한 세상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종종하게 됩니다. 


 나이를 먹고 온갖 연륜의 채색된 빛깔은 우리의 생존을 슬프게만 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가변의 진리의 파도가 출렁이고 백팔번뇌가 펄떡 펄떡 춤을 추는 저 아득한 흙먼지 속을 어떻게 피해갈 수 있을까 피할 수 없는 흙먼지라면 마음껏 마실 수 있는, 참고 또 참으며 살아가야하는 무지갯빛 수양이 항시 저와 같이 공존하고 있음을 각인하며 참자 참자 참자를 반복해 본답니다.


 이렇듯 위의 세 가지 시어 아닌 시어를 생존의 철학으로 각인해 봄도 뜻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의 졸고를 읽으시는 독자님들 우리 다같이 오늘의 복된 삶을 위하여 한번쯤 생존의 방향을 음미해 보자는 제언을 해봅니다. 저는 이 세 가지 시어 속에서 오늘도 내일도 부끄럼 없는 삶이 되고자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반성의 눈물을 흘릴 때가 있답니다. 산은 푸르고 강물도 흘러가고 새들의 울음소리도 들려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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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6
노추(老醜)를 염려하며

 

 노추(老醜)라는 말이 있다. ‘나이를 먹어 모습이 꾀죄죄하고, 행동이 추하다’는 뜻이다. 인생의 하반기에 들어선 나는 어떻게 하면 노추를 피하고 아름답게 세상을 마감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곤 한다. 하지만 허장성세의 세월은 화살처럼 날아가고 있다.


 공자님은 군자로서 경계해야 할 점으로 인생의 성장 과정에 따라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 나이 15∼20세 정도의 청년기에는 ‘색욕’을 경계해야 한다고 하셨다. 특히 여색과 주색은 함께 오는 것이니 더욱 주의하라 하셨다. 


 둘째, 나이 20∼40세까지의 장년기가 되면 자신감에 찬 나머지 안하무인으로 흐르거나 걸핏하면 남과 겨뤄 이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쉽다. 장년기에는 이런 ‘다툼’을 경계해야 한다고 하셨다. 다툼의 결과로 적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셋째, 그 이후의 시기인 노년기에는 ‘탐욕’을 경계해야 한다고 하셨다. 누구나 인생의 황혼기에 느끼는 회한이 많을 것이다. 천하를 품을 듯한 포부는 사라지고 스스로 초라함을 느낀다. 그래서 이제는 여생을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하게 된다.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명예도 아니고, 의리도 아니고, 오로지 물질적인 욕구뿐이다. 이것이 지나칠 경우 노추를 보인다고 하셨다.


 상기 공자님의 말씀과 비슷한 이론(理論)을 편 영국의 철학자 '라스렛‘은 인생을 4기로 분류했는데 3기까지는 공자님과 같은 이론인 것 같다. 그러나 이분은 4기의 인생을 가미한 것이 특징이다. 즉 인생4기의 생존은 죽음으로 가는 자연의 이법에 따른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4기 인생은 일년 중 4계절인 겨울에 속하는 나의 인생의 길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노추를 염려하는 하루의 생존이라는 역설을 말해본다.


 나는 여기에 덧붙여 개인의 능력껏 ‘베풂’을 더욱 적극적으로 하기를 권장해 본다. 살아오면서 배운 것, 느낀 것, 맨몸으로 부딪쳐 알게 된 것, 알고는 있었으나 실천하지 못한 것 등등 적지 않게 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을 인생 후배에게 또는 후학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는 것이 좋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나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들도 후배들에게는 아주 귀한 지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인생이 끝나는 날 그동안 쌓아 놓았던 것들 짊어지고 갈 수 없기에 베풀 수 있는 한 베풀고 떠난다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지만 이 역시 뜻과 같지 못함이 우리네 인생살이니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아침저녁 거울을 보면 내 얼굴의 주름살은 하루하루 깊고 두터워지는 것만 같으니 이 역시 슬픔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자연 현상임을 알면서도 내가 벌써 이렇게 되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노년기에 들어서면 얼굴에 주름이 생기는 것이 자연스런 현상이다. 요즈음은 주름을 인공적으로 없애기도 한다지만 사람마다 지문이 다르듯 주름은 사람마다 모양이 다르다.


 주름은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역정을 어느 정도 보여준다. 어떤 사람은 그 주름 때문에 더욱 인자하게 보이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그 주름으로 인하여 인상이 험악해 보이기도 한다. 이런 사람의 경우 양쪽 볼에 욕심주머니를 차고 있는 경우도 있다. 꾀죄죄한 모습은 아니지만 이러한 모습도 노추라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의 됨됨이는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가 물러난 후에라야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다. 높은 자리에서 물러난 다음에 찾아오는 친구들이 하나 둘 늘어나는 사람을 우리는 진정 훌륭한 사람이라고 인정해 준다. 권력의 속성 때문이다. 그런 사람의 경우 무언가 얼굴에서 다른 모습이 느껴진다. 대부분 인상이 좋고 인자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 사람 아마 청빈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자기 권세를 내세우지 않고, 자기의 권한을 꼭 필요한 곳에 사용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동포사회의 높은 자리라는 것이 무엇일까 독자 한 사람 한 사람 이 글을 읽으면서 음미하시라는 주석을 달아본다. 나 이유식은 동포사회의 높은 자리는 자기 일에 성실한 삶을 살아가며 겸양과 희생 속에 동포사회를 위해 진실한 봉사와 희생을 하는 사람이다. 


 제 잘났다고 분수 모르고 날뛰는 사람, 감투 같지 않는 감투를 쓰고 그 감투가 인생의 전부인양 으스대며 위선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높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다. 나는 이 점에서 항시 겸양 속에 옷깃을 여며보지만 내가 얼마나 익은 벼이삭이 되었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많음을 밝히고 싶다.


 여기에서 나의 노추를 보이기 싫어서 시라는 것을 쓰면서 좋은 시 한편 남기는 것이 노년을 보람있게 살아갈 수 있는 덕목으로 생각했지만 그것 또한 노추를 벗어나는 길이 되지 못했기에 내 자신이 바보같은 시인이라는 것을 절감하며 하기와 같은 나는 바보 시인이라는 시 한 수로 나의 노추의 생존을 경계코자 한다. 나의 졸시에 대한 독자님의 댓글 시 한편도 여기에 상재해 본다.

 

 ‘바보 시인’


 내일이 오기에 오늘이 무섭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어제를 오늘로 회귀시킬 수 없기에 나는 오늘이 무섭고//

내일이 더 더욱 무섭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삼라만상이 저렇듯 말없는 속에 풍요와 자유로 유람하는데//

반성 없는 하루, 남길 일 하나 없는 하루하루가//

나를 슬프게 합니다//

오늘 내가 무엇을 했나//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나 보다 못한 사람 없기에 무생물인 돌이 되어 굴러가는 나를 봅니다//

질곡의 파노라마에 나 자신을 잊고 하루를 넘기는 나는//

나 자신이 바보임을 알고 있습니다//

저 만큼에서 오는 석양 노을은//

내 사랑 저주하며 떠난 사람들을 알지 못하며//

내 사랑 그립다 찾아오는 마른 꽃송이들//

벙어리 시인의 눈물을 모른답니다//

나는 오늘도 내일을 맞이해야 하는 돌덩이로 굴러가고 있습니다//

나는 바보입니다//

나의 눈물이 당신의 가슴을 적실 수 없는 바보 시인입니다.

 

 

 

 바보가 바보 시인에게 (독자님의 댓글 시)

 


 항상 손해만 보고 살아가는 너//

남의 가슴에 못을 박느니//

차라리 자신의 가슴에 못질을 하는 너//

그것이 차가운 머리보다 뜨거운 가슴으로,//

세상을 안으려 한 대가인 줄 알면서도//

고요한 그리움만이 말없는 벗이고//

고단한 삶의 안식처라고 되뇌는 너//

그리움조차 널 외면해도//

애꿎은 자신의 마음만 곤두박질치는 너//

따뜻한 말 한 마디에 눈물을 글썽이던//

천진함의 대가인 줄 알면서도//

행복은 다른 사람들에게 골고루 다 나누어 주고//

정작 자기 자신은 그렇지 못한 너//

단 하나 남은, 외로움만 부둥켜안는 너//

내 앞에 있어도 보고플 것 같은 너에게//

나 또한 아름다운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그 말조차 망설이는 내가 정말 바보인 줄 알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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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08
100년 후의 한-중-일 정치 경제 예측(2) & (3)

 

 2009년 중국을 방문했던 저의 여행기를 소개해 봅니다. 저는 중국을 이곳저곳 7번 갔었는데 그 중에도 연길에 2번을 방문했고, 두 번째는 제가 제정 운영하고 있는 민초해외문학상 2회 수상자가 연길의 조룡남 시인이었기에 시상식 차 방문했습니다. 


 이번 길에는 백두산에 올랐고 두만강 기슭을 따라 백두산에 오르며 <백두산에 올라>라는 시제로 다음과 같은 시도 한편 상재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사량했고 그리웠고 보고 싶었던 너 였던가/다아스포라의 눈물이 천지연 폭포수로 떨어지고/7천만 한민족의 통한/자작나무 사이 사이/숨어 울고 있는 바람소리로/남북을 오고 가누나/보아라/너와 나의 헤어져 있슴은/억새풀들의 흔들림으로/서녘 하늘에서 해 돋아 날을 기다리며/환희 속에 울고 있는 미소 일진데/억겁의 많은 별들 어디에서 반짝이리/산아/산아/백두산아/내 불타는 심장/여기에 두고 마른 풀잎 되어 나는 간다/사랑과 기쁨/희망과 절망을 감추고/민족의 업보/신 앞에 두 무릎 꿇고 앉아/통일 통일을 달라며 목놓아 울어본다//


 백두산 관광을 마치고 도문이란 곳에서 차를 한잔 나누면서 북한 땅과 도문을 연결하는, 차 두 대가 겨우 교차할 수 있는 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가 1950년 한국전쟁 때 중공군이 밤을 이용, 북한으로 잠입하는 중요 도로의 역할을 했다는 설명도 들었습니다. 도문 다리를 지나면 북한땅인데 산이 너무 경사져 있어 당시 중공군이 잠입하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 군이 폭격을 할 수 없었다는 안타까운 내용도 알았습니다.


 귀갓길에는 연길 현지 한국인 유 변호사라는 분이 우리 일행을 평양 장수관이라는 북한이 경영하는 식당에 초대해 정갈한 북한음식 맛을 보았습니다. 7층 건물을 전부 사용하고 있는 장수관은 손님은 없는듯 썰렁했고, 우리 일행이 6층 전체를 차지하고 북한술과 요리를 즐겼습니다.


 한 테이블에 4명이 앉고 북한 여종업원 4명이 한사람 한사람을 친절히 봉사해주었습니다. 소위 손님을 대접하는 기쁨조라는 브라스 밴드 5인조가 흥을 돋워 주었으며 노래방시설이 있어 눈물 젖은 두만강, 울고 넘는 박달재, 찔레꽃 등 남한 노래방에서 흔히 부르는 노래도 있었지만 대부분 북한식 노래로 혁명피 등의 가사가 섬뜩하게 들렸습니다. 


 주연을 마치고 나오니 엘리베이터 앞까지 나와 환송하는 북한 종업원의 아름다움과 친절에 저는 우리를 주빈으로 모시는 J회장에게 우리식 봉사료를 주고 싶다하니 한사코 말렸습니다. 이유인 즉, 팁을 주어도 그 봉사료는 다 빼앗기고 또한 불순하게 생각되면 그 여종업원이 곤욕을 치른다고 해서 쓸쓸히 돌아서야 했습니다. 하지만 20세 전후의 봉사원 눈에서 글썽이던 눈물방울을 저는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답니다. 같은 민족이 어이 이렇게 되었을까 하는 상념으로 그날 저녁은 통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제가 젊어서 정치 철학을 공부한다면 아니 세계에서 훌륭한 정치철학자가 나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와 유교사상을 합한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이 구축된다면 우리 인류의 삶이 좀더 윤택하리라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이제 프리드먼 교수의 100년 후의 중국의 정치 경제를 예측한 논문을 요약해 봅니다. 한마디 첨언한다면 이번 여행에서 잊을 수 없는 추억은 용정에 들러 용두레 우물가에서 목이 터져라 선구자 노래를 불렀던 기억, 윤동주님의 생가를 방문하고 민족 혼을 되새겼다는 것입니다.


 2000년대 중반, 신흥강국으로 부상해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심지어 G2로 불리게 된 중국의 앞날을 프리드먼 박사는 이렇게 예견했습니다.


 “중국의 미래는 이전처럼 부상이 아닌 붕괴를 생각해야 한다. 중국은 최근 잘해 왔지만 동시에 많은 문제를 떠안게 됐다. 핵심은 가난이다. 6억 명이 가구당 하루 3달러 미만의 벌이로 산다. 4억4,000만 명은 6달러 미만으로 산다. 13억명 중 10억 명 이상이 아프리카처럼 가난 속에서 살고있는 것이다. 물론 6,000만 명의 다른 중국이 있다. 연간 2만 달러를 버는, 하지만 이것은 중국의 5% 미만이다. 진정한 중국이 아니다. 


 중국은 ‘내부경제(internal economy)’가 없는 나라다. 유럽과 미국이 제품을 사주지 않으면 존립하지 못한다. 그래서 중국은 인질이나 마찬가지다. 계층 사이에는 상당한 긴장이 조성되고 있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을 때는 이 문제를 다루기 쉽다. 그러나 더 이상 그렇게는 못한다. 임금이 전처럼 싸지 않기 때문에 수익성을 받쳐주지도 못한다.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이동하려고 하지만 미국, 독일, 일본, 한국과 같은 쟁쟁한 나라가 버티고 있다.


 지금 중국의 위치는 1989년의 일본과 같다. 일본은 눈부신 성장 뒤에서 금융시스템이 붕괴하고 있었다. 지금 중국처럼 일본은 외국 자산을 사들였다. 중국의 성장 사이클이 막바지에 달했다는 신호다. 이럴 때 국가마다 제각기 다른 해법을 찾는다. 일본은 성장률을 낮췄다. 그러나 중국은 실업을 인내할 여력이 없다.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이동한 농민들이 일자리를 잃으면 사회를 불안정하게 한다. 이들의 원망을 가라앉히기 위해 중국은 6,000만 명에게 세금을 거둬 분배해야 할 것이다. 거둬들인 돈으로 군대의 충성은 유지할 수 있겠지만 중국의 해법은 국민들을 억압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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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후의 한-중-일 정치 경제 예측(3)

 

 1987년 10월 말경 일본 동경 신죽구 미야꼬 호텔에 세계 한민족대표자 700여명이 모였습니다. 이 모임을 창립코자 애를 태웠던 일본 거류민단 단장 박병헌씨, 미주 총연합회 회장 조도식씨, 그리고 제5대 캐나다 한인총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던 저는 처음 워커힐 쉐라톤 호텔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 후 초여름 서울 소공동 롯데 호텔에서 두 번째 모임을 가졌습니다. 모임의 목적은 사방으로 흩어져 살고 있는 우리 700만 동포들의 한 울타리를 만들어 해외에서 조직적인 한 목소리로 동포들의 상부상조와 조국에 대하여는 정치 경제 문화의 현실과 통일을 달성하는데 일조한다는 꿈이었습니다. 


 창립을 하는 모임이라 세계 각 나라에 흩어져 있는 동포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난제 중에 난제였음을 알면서 우리는 꾸준히 세계 각국 동포들의 현실 파악을 위하여 온갖 노력을 했으며,  특히 박병헌 일본 거류민단장의 헌신적인 노력과 희생으로 그해 10월 드디어 첫 모임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캐나다 대표단은 총연 회장 이유식(캘거리)을 비롯, 동부 오타와 이태은 부회장, 중부 위니펙 김봉환 부회장, 서부 리자이나 한광수 부회장, 이사장 박동렬(몬트리얼), 부이사장 김원겸(위니펙), 사무총장 한성택, 전 7대 총연회장이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일본을 방문하는 저는 일본이란 나라가 우리를 침략한 나라로 각인하고 있었기에 배타적인 심정과 적개심으로 쌓여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호텔에 여장을 풀고 첫날밤을 피로에 지쳐 자고 일어나니 방안에는 김일성 및 북한 찬양 전단지가 있어 소름이 끼치도록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조찬을 위해 식당에 내려갔더니 해외 각국에서 온 대표들 방 전부에 이런 김일성 찬양 전단지가 살포되었음을 알았고, 일본의 조총련 소행이라는 것을 민단으로부터 설명듣고 일본에서는 민단과 조총련의 대립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튿날 창립총회에서 박병헌 민단장을 회장으로 조도식 미주총연회장과 같이 부회장으로 선임이 되었습니다. 이로서 700만 한민족을 하나로 묶는 해외 한민족대표자회 협의회가 창립되었습니다. 대표자협의회에서 줄기차게 모국 정부에 건의한 사항은 교민청을 신설해 달라고 강력히 건의를 했으며 그 결과가 1992년경에 우리가 건의한 교민청 대신 재외동포재단이 생기게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87년 창립한 한민족대표자협의회는 그 후 독일 베를린, 미국 워싱턴, 프랑스 파리, 미국 하와이, 캐나다 밴쿠버 등에서 상임운영위원회를 개최하였으며, 그 후 동포재단에 우리의 행사를 넘기게 되었고 재단은 세계한인회장회의라는 명칭하에 지금까지 동포재단 주최의 행사를 매년 서울에서 개최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한민족 대표자 협의회의 역사를 상세히 설명함은 우리 700만 동포의 역사를 후손들이 정확히 알아두어야 되겠다는 일념도 있습니다. 한민족 협의회를 창립한 박병헌 회장도 고인이 되었고, 미주 총연의 조도식 전 회장은 종교에 심취 지금은 신앙인이 되어 있습니다. 부족한 면이 있지만 한민족 대표자 협의회가 창립된 내면의 과정을 설명할 사람은 저 하나 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캐나다한인동포님들이 알아야 할 것은 대한항공의 캐나다 취항문제 입니다. 캐나다에 대한항공 취항이 그저 이루어진 것으로 많은 동포들이 인식하고 있겠지만 그 배후에는 총연합에서 취항을 위하여 일조의 노력을 경주했다는 것을 밝히고 싶습니다.


 즉 대한항공 취항을 위하여 그때 주 오타와 한국대사관의 허방빈 참사관의 노고에 감사를 이 자리를 통해 밝혀 둡니다. 첨언을 한다면 일본에서 회의를 마친 우리 회장단과 이사장단은 오타와 대사관의 허 참사관과 긴밀한 협의를 하며 대한항공 취항을 위하여 돈 메리진스키 연방교통장관을 만나 우리의 뜻을 간곡히 전했으며, 또한 대한항공 조중훈 회장을 예방해 대한항공 취항이 캐나다 한인동포들이 살 길이라고 간청했습니다. 


 한국정부와 오타와 연방정부의 합의에 의한 결정이었으리라는 생각도 하지만 우리 총연합회도 대한항공 취항을 위하여 물심으로 노력을 했음을 밝혀둡니다. 


 그 후 1988년 대한항공이 캐나다에 취항하면서 조중훈 회장께서는 그 때 총연합회 사무총장이던 한성택씨를 통해 저에게 감사장을 보내왔던 점 등을 한인동포들에게 인지시키고 싶은 마음입니다. 


 오늘은 프리드먼 박사의 일본에 관한 정치경제 예측에 관한 이야기이니 총연과 일본 방문 등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생략하며 지난 11월 조국을 방문했을 때 제가 존경하는 한국 문단의 거목이신 K교수님과의 대화 한 토막을 소개코자 합니다.


 K교수님은 한국문학평론가협회장을 역임하셨고, 진주가 나은 3대 천재로서 k대학 문과대학장을 하신 분입니다. K교수님은 저에게 물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장점은 수없이 많은데 장점이 아닌 단점 3가지만 지적을 하라 했습니다. 저는 장점은 생각해 보았지만 단점은 별로 생각을 한 적이 없다 했더니 교수님은 저에게 명쾌한 답을 주셨습니다. 


 첫째 단점은 우리 남한사람들은 얼마나 잘먹고 잘살고 잘입고 자유를 구가하면서도 권리는 주장하나 의무 수행은 하지 않는 민족이라는 점, 둘째는 북한정권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학살하고 못살며 배고픔과 동시에 자유라는 것이 말살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모른다는 것, 셋째 일본을 우리 민족은 왜놈들이라 비하하지만 일본사람들이 얼마나 높은 문화민족이며 법을 잘 지키고 정직하며 애국애족 하는지 우리 국민들은 모른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 시인의 생각은 어떠냐고 물으셨습니다. 


 독자 여러분 우리 한번 생각을 해보자는 제언을 하며 이번 글이 일본의 정치 경제에 관한 프리드먼 교수의 예측이기에 여기에 한번 써보았음으로 양찰하시기를 바랍니다. 민초의 잡설산책은 한 중 일의 프리드먼 교수의 논문 요약을 이번 회로 끝을 맺으며 그 간 이 글이 발표되면서 캐나다 동포님들과 모국의 인터넷 카페 등에서 즐감하며 읽어주신 독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경제대국 일본을 프리드먼 박사는 일본의 무서운 단결력이 아시아 최강으로 복귀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그가 일본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경제 볼륨에서 중국과 동등하다. 일본은 국방력이 강하고 빈곤층이 적다.

일본은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 있고 해결할 능력이 있다. 일본은 단일국이다. 최근 쓰나미 대지진에 나타났듯 일본은 놀라운 단결력과 유대감을 갖고 있다. 일본에는 외부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강한 비공식적 사회통제가 존재하는 고도의 응집사회다. 경제가 크고, 교육 수준이 높고, 정부를 따르는 국민이 있는 나라가 왜 쇠퇴하겠는가?


 외부에선 저성장, 고령화 등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고 말하면서 일본 경제가 정체된 20년을 ‘잃어버린 20년’ 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일본의 목표에 대한 오해다. 일본적 가치에 서양적 관점을 적용한 것이다. 일본은 기업의 이윤을 희생하면서 사회적 핵심가치인 고용을 유지했다. 20년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가치를 보전한 것이다.


 일본도 더 이상 빚을 쌓아가며 가치를 보호할 수 없다. 일본 역시 경제와 사회 구조를 바꿔야 한다. 하지만 일본엔 압도적으로 유리한 조건이 있다. 중국처럼 빈곤 속에서 살고 있는 10억 인구가 없다는 것이다. 사회불안 없이 긴축을 견딜 수 있는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대지진 수습 과정에서 리더십의 문제가 노출됐는데, 2차 대전 때에 일본의 리더들은 ‘어떤 전략으로든 반드시 승리하겠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리더가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기간에도 혁명을 일으키지 않은 유일한 국민이다. 리더십이 형성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나라다.


 하지만 프리드먼 박사는 일본의 위험성도 지적했다. 일본의 근본적인 약점은 천연자원이 없다는 것이다. 일본은 해상교통에 접근하지 못하면 모든 것을 잃는다. 호루무스 해협, 말래카 해협, 남중국해 모두가 일본의 생명선이다. 그래서 일본은 늘 걱정을 안고 있다.


 이 생명선에서 위기가 발생했을 때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다시 공격적으로 변할 여지가 있다. 일본은 힘을 회복하면 필연적으로 해군력을 증강시킬 것이다. 공격적인 일본에 대처할 전략을 개발해야 한다.


 지금까지 3회에 걸쳐 프리드먼 교수의 세계정세 예측을 예의 주시함에 큰 뜻이 있으리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즉 조국의 외환위기를 비롯한 세계정세를 정확하게 예측한 바 있는 미국 코넬대학 조지 프리드먼 교수는 코소보 전쟁과 1998년 아시아 외환위기를 정확하게 예견하여 ‘21세기의 노스트라다무스’라 불리니 그의 저서 《100년 후, Next 100 years》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주: 노스트라다무스(중세의 프랑스가 낳은 세계적인 예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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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04
100년 후의 한-중-일 정치 경제 예측

 

 50여 년 전의 옛 밥줄 길을 찾아 갔었습니다. 지난 11월의 일입니다. 첫 직장에서 밥줄을 달고 있던 소공동 111번지, 그 때의 밥솥에서 밥이 익어가는 소리를 듣고자 명동 한쪽에 호텔을 잡고 명동과 소공동 옛 골목길을 헤매어 보았습니다. 


 <길재>가 500년 도읍지 개성을 찾아서 노래한 옛 시조 ‘500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하는 시조를 저는 50여년이 지나서 다시 찾았는데 땅은 그 땅 그대로인데 정말 인걸은 간데도 온데도 없었습니다. 퇴근 후에 정종 한 잔 하던 일식집 미조리 거구장도 중국집 빼갈도 오향장육 안주도 가화 다방과 티파니 다방도 소리없이 사라졌고, 그 많던 양주코너도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조선 호텔 100여 미터 돌담장 길을 끼고 걸으면 명동이 나왔고, 사보이 호텔 지하 구디구디 양주집도 사라졌고, 코스모스백화점 뒤편 한구석에 <도금봉> 배우가 화사하게 웃으며 팔던 양주집도 없어졌습니다. 명동 길 골목골목에는 노점상이 거리를 매웠고, 중국사람 일본사람들의 황홀한 웃음 속에 저 이유식이란 사람은 없었습니다. 


 잘 가던 부산집 삼겹살집은 오겹살집으로 변해서 오겹살이 소주 맛을 풍요롭게 했습니다. 소공동 111번지의 건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남대문로로 자리를 옮겼음을 인식하고 옛 친정집을 찾았더니 옛 상사도 동료도 후배도 하나 없는 나그네의 발길을 서럽게 했습니다.


 그 인걸들 지금은 다 어디로 갔을까를 더듬으니 아련한 서글픔만 남았습니다. 나 자신을 간단히 소개하고 노벨상 수상자 코넬대학 교수 <조지 프리드만> 박사의 한 중 일의 100년 후를 예측한 자료를 한 부 얻어 쓸쓸히 등을 돌려야 했습니다. 


 소공동 111번지의 추억은 38대의 1의 경쟁을 물리치고 입사한 곳 그 곳에서 입사 동기들은 대한민국에서 제일 비싼 땅, 한 평에 3천만원의 땅에서 밥줄을 달고있다는 엘리트 의식이 높았던 곳. 그 곳의 마지막 추억을 프리드만 교수의 한 중 일의 100년 후를 예측한 논문을 3회에 걸쳐 남기며 두 번 다시 찾지 않을 그 밥솥의 밥을 그리며 이방인의 허허로운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이유식의 독백>

 


 1. 첫 번째로 한반도는 중국ㆍ일본ㆍ러시아에 둘러싸인 폭탄 같은 존재다. 쇠퇴하는 중국이 과연 5년 후에도 북한을 지지할 수 있을까? 통일은 10~20년 안에 될 것이다.


 한국인들이 원하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은 북한 문제를 다룰 때 미국의 도움을 필요할 것이다. 통일 후 금융문제가 닥칠 때 더욱 그럴 것이다. 통일 한국을 바라보는 주변국 중 미국은 다른 대안이 없으니 환영할 것이다. 일본은 반대하지 않겠지만 기뻐하지도 않을 것이다.


 중국은 북한에 대한 통제력을 잃은 상태에서 반대할 이유를 찾기 어렵다. 한국엔 북한의 붕괴가 그동안 이룬 경제성과를 무너뜨릴 것이란 공포가 있다. 하지만 한국은 역동적인 국력을 보유하고 있다. 북쪽에 무슨 일이 발생하든 국력은 유지될 것이다.


 통일 후 10년은 고통스럽겠지만 길게 보라! 북한의 땅과 자원, 값싼 노동력에 남한의 기술ㆍ자본ㆍ리더십이 합쳐지면 엄청난 시너지가 발생한다. 나는 늘 한국이 통일됐을 때 만주가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중국은 내부를 통제하기에 급급할 것이다. 러시아도 극동아시아에서 영향력이 약화되고 있다. 일본은 거리가 너무 멀다. 한국이 통일되면 만주지역에서 큰 기회가 열릴 것이다.


 통일이 되면 한국은 강대국이 될 것이고, 일본에 가시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죽일 정도는 아니지만, 충분한 위협이 된다는 뜻이다. 향후 10년간 서태평양 지역에서 한국은 미국의 가장 강력한 협력국이 될 것이다.


 역사적 배경 때문에 한국은 일본을 경시하며 중국을 불신한다. 그렇다고 미국과 편안한 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일본이 강해지고 중국이 약해질 때 한국은 미국을 필요로 할 것이다. 미국도 일본과 중국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한국에 의존할 것이다. 한국은 상당한 규모의 기술 중심지가 됐다.


 중국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한국의 기술을 갈망할 것이다. 미국은 기술 이전에 대한 부분적 통제권을 확보함으로써 중국에 대한 영향력을 증가시키려 할 것이다.


 
 (조지 프리드먼 박사는 미국 코넬대 정치학 박사 출신으로 그가 1996년 설립한 싱크탱크 '스트랫포(Stratfor)'는 미 국방부를 포함해 각국 정부와 포춘 500대 기업이 주 고객이다. 그가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정보는 220만 여명의 유료회원이 접속해 보고 있다. 20세기 말에 일어난 코소보전쟁을 정확하게 예측했다. 
 이후 미국방부는 ‘얼리 버드(early bird)’라 불리는 조간 브리핑에 그가 제공하는 정보를 매일 포함시키고 있다. 그는 또 아시아 외환위기를 정확하게 예측했고, 세계경제포럼은 연례행사에서 스트랫포의 보고서를 공식 배포하기도 했다. 


 <100년 후(Next 100 years)>는 출간되자마자 미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에서 동시에 선풍적 인기를 몰고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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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1
그리움 하나

 
그리움 하나

 

 

지나온 것은 다 아름다웠으리 
슬펐든 기뻤든 그렇게 살아왔던 것을
보내기 싫어도 만나기 싫어도
해와 달을 보며
너와 나도 만나면서
청잣빛 노을에 지울 수 없는 상처와 향내

 

바람은 오늘의 안주에 웃고
찾아오는 저 강 넘어 새들의 지저귐
눈쌓인 겨울산을 보노라면 
아직은 주고픈 욕망과 비워 내어야 하는 눈물들

 

내 심장을 도려내는 칼바람의 탄식
<아도니스>의 첫 사랑의 울음소리여
그 사랑 나의 조국 나의 동포 

 


*주)아도니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소년으로 아프로디테 여신의 애인. 전설에 따르면 시리아의 왕 테이아스와 그의 딸 스미르나(미르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그의 아름다움에 반한 아프로디테는 젖먹이 아도니스를 상자 속에 넣어 지하세계 왕비 페르세포네에게 보살펴 주도록 부탁했다. 그런데 페르세포네 역시 이 미소년에게 반해 그를 돌려주지 않으려 하자, 결국 주신 제우스는 아도니스에게 페르세포네와 3년, 아프로디테와 3년을 보내고 나머지 3년은 아도니스 스스로가 결정하도록 했다.


 이 전설은 여러 가지 이형으로 남아 있다. 아도니스라는 이름은 페니키아어 아돈('군주')에서 유래한 듯하며, 바빌로니아 신 탐무즈와 같은 신으로 추정된다. 현대 학자들은 아도니스를 해마다 죽었다가 부활하는 자연의 순환을 나타내는 초목의 정령이라 보고 있다.


 아도니스의 죽음과 부활을 기리기 위해 아도니아라는 축제가 비블로스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해마다 열렸는데, 이때 그의 초상화나 다른 물건들을 물에 던지면 비가 내린다고 믿었다. 


 아테네에서 행해지는 아도니스 축제 중 특이한 것으로 '아도니스의 정원'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조그만 화분에서 빨리 자라고 빨리 시드는 식물을 재배하는 것을 말한다. 이 풍습은 키프로스의 그리스도교도들 사이에서 아직까지도 행해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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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3
지도자가 지녀야 할 덕목

 

500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위의 시조는 고려가 망한 후 길재가 옛 고려의 수도 개성을 방문하며 남긴 시조입니다. 제가 옛적 시조 한 수를 음미하려 함은 지금 세계동포사회나 조국의 현실을 보면서 그저 나름대로 옛적에 읽은 지도자가 지녀야 할 덕목을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에서입니다.


 며칠 전 캐나다 총연합회 임원이신 어떤 분이 전화를 했습니다. 총연합회를 재건하고 싶은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으며 총연합회의 나아갈 길에 대한 고견을 듣고 싶다 했습니다. 이에 저의 뇌리에 번갯불같이 떠오르는 것이 이 길재의 시조였습니다. 


 1979년 오타와에서 창립된 총연합회의 역사가 흑백필름으로 저의 기억을 더듬게 했는데 그때 나름대로 캐나다 전 동포를 대표한다는 명분하에 사명감에 불타는 동지들 한분 한분이 저의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지금부터 37년 전의 일을 뒤돌아 보니 그 많은 인걸들 총연합 창립의 선구자 역할을 하신 유태호 박사는 프랑스로 국적이 바뀌었고, 3대 회장 윤여화님은 작고, 4대 회장 오기송 박사도 작고, 그 외 머리를 맞대고 회칙 초안을 작성하며 우리 동포들의 나아갈 길을 모색했던 인걸들… 몬트리올의 박동렬 장군, 이희재 문사, 위니펙의 김원겸 박사, 6대 회장 조정원 박사, 7대 회장 한성택님, 8대 회장 장인영님 등의 인걸들은 건강상 뒷방노인이 된 듯하고 많은 분들이 고인이 되었습니다. 


 작고하신 분들의 학덕과 조국사랑 민족사랑을 부르짖으며 티없이 맑은 희생을 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아직 살아서 총연합회의 앞날과 이 나라에서 우리민족의 뿌리를 내리고 정체성 고양과 위상을 향상코자 물심으로 정성을 쏟고 있는 분은 2대 회장을 역임했던 강신봉님이 있습니다. 


 이에 저에게 자문을 받고자 하는 총연합회, 이하 총연이라 칭합니다. 총연의 임원께 제가 강신봉 2대 회장께 전화를 해서 총연의 나아갈 길에 대한 자문을 받으라 주문을 한 바가 있습니다. 


 제가 5대 회장을 역임, 8대 회장까지는 총연회장의 성함이라도 기억하지만 그 후의 총연회장들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며 총연의 사업이나 업적에 대하여는 어떤 의견도 피력하고 싶은 마음이 없기에 여기에서 생략코자 합니다.


 잡설이 길어지기에 이제 새해가 오는 과정에서 동포사회 어디에서나 새로운 리더를 선출하게 됩니다. 행여 제가 읽은 지도자의 덕목이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하여 빛과 소금이 되기를 기대하며 리더의 덕목 10가지를 여기에 나열해 봅니다. 


 지도자가 되고자 하시는 분들 한번쯤 읽으시고 음미하시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리더(지도자)의 10가지 덕목


1) 경청하는 것이다(Listening)


 리더는 귀를 열어놓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야 한다. 이것이 리더의 첫 번째 덕목이다.


2) 존중해야 한다(Esteem)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것은 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그에게 나를 맞추는 것이다.


3) 적응능력을 배양해야 한다(Adaptability)


 "로마에 가면 로마사람과 같이 행동하라"는 격언이 있듯이, 리더는 시대상황에 맞추어 적응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실력은 어떤 환경에서든 잘 적응하여 자신의 일에 최선을 발휘하는 능력이다.


4) 근면해야 한다(Diligence)


 끊임없이 떨어지는 낙숫물이 커다란 바위를 뚫듯이, 보람되고 어려운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함이라는 주춧돌을 몸에 배이도록 해야 한다.


5) 인내심을 배양해야 한다(Endurance)


 리더는 투박한 돌을 자르고 문지르고 쪼고 갈아 옥돌로 만드는 '절차탁마'의 정신이 필요하다. 


6)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Responsibility)


 리더는 자기에게 불리한 일이 일어날지라도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지고 반드시 약속을 지켜야 한다. 잘못된 것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지고, 잘된 것에 대한 공은 부하에게 돌려야 한다.


7) 봉사정신을 가져야 한다(Service)


 리더는 자기가 가진 것을 상대방에게 나눠주고 보살펴 주어야 한다. 상대방에게 기쁨과 웃음을 더하고, 슬픔과 눈물을 빼줄 수 있어야 한다. 


8) 정직해야 한다(Honesty)


 정직은 동기가 바르고 방법이 올바른 것이다. 있는 대로 보고, 본 대로 생각하고, 생각한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하고 이들이 일관성을 가질 때 정직한 것이다.


9) 공정해야 한다(Impartiality)


 리더는 일을 처리할 때 당사자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명정대해야 한다. 


10) 준비를 해야 한다(Preparation)


 리더는 앞날의 어려움이나 힘든 상황을 미리 내다보고, 그에 따른 대비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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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6
고 이재락 박사님을 추모하며

 

 또 11월이 왔다가 떠나갑니다. 다시 못올 그 해 4년 전 캐나다에서 캐나다 문협회원 중 제가 존경했던 그 분 이재락 박사님이 멀고 먼길 다시 못오실 길을 떠나셨던 달입니다. 전 프랑스 대통령 "미테랑"이 "볼리비아 밀림에서 인간혁명, 생존을 위한 인간성의 회복과 민초들의 고난을 타계코자 한평생을 혁명아로 살다가 떠난 "체케바라'를 애도하며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즉 인류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인간성의 소유자를 잃어버렸음을 애도한다는 말이었습니다. 이에 저 이유식은 엄숙히 경건한 마음으로 말을 합니다. 우리 캐나다 동포 중 가장 훌륭했던 삶을 사셨던 인간성의 소유자 이재락 박사님을 잃어버린 달을 기억코자 합니다.


 이제 이 박사님을 추모하며 이 알량한 후학의 마음을 적시고 있습니다. 항시 잔잔한 미소로 남을 배려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저의 뇌리를 엄습하고 있습니다.

 

 

고 이재락 박사

 


 담낭암이란 병마와 싸우시면서도 하시던 말씀 “민초 내가 이 세상을 떠나면 문상 같은 것 필요치 않아요. 내 이 세상 떠나기 전 평소에 가까이 교류하던 분들과 만남과 이별의 파티를 갖고 싶으니, 먼 길이지만 꼭 나의 파티에 참석하여 시 한편 낭송해주오”라던 말씀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의 시, 아니 별볼일 없는 이 변방의 나그네를 아끼고 배려하시는 마음을 잊을 길이 없어 그 파티에 참석한 날은 지금으로부터 5년전 7월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하며 하기와 같은 시를 낭송했던 것입니다. 


 저의 시 ‘길 하나’는 그 후 D대학 국문과를 졸업한 양주동 교수의 수제자 소설가 S씨가 충남 육필 시공원 이사장 정곡 이양우님께 추천하여 오석(烏石)돌에 시비로 세워져 있습니다. 이달 초 몽골과 조국을 방문할 일이 있어 육필시공원을 찾아 오석돌에 새겨진 저의 시 길하나를 음미하며 다시 한 번 이 박사님을 그리며 생의 무상함을 곱씹어 보게 했습니다.


 지면상 하고 싶은 말을 어이다 표현하리요만 분명한 것은 우리 캐나다 동포사회에서 나아가 우리 문인들의 가슴 속에 이 박사님의 나보다 남을 배려하며 한생을 사셨고 항시 겸허한 마음으로 후학을 양성코자 온갖 정열을 쏟으셨던 모습을 영원히 간직하고 살아가는 후학들이 있음을 잊지 마시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즉 다시 못 만날 멀고먼 길에 계셔도 살아있는 후학들은 이 박사님을 영원히 상기하고 있기에 몸은 이생을 떠났어도 영혼은 우리에게 남아계심을 잊지 마시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다시 한 번 이재락 박사님의 고매한 인품을 회상하며 ‘만남과 이별의 파티에서' 제가 낭송했던 시 ’길하나‘를 상재하며 4주기의 추모의 마음을 놓습니다. (토론토와 캘거리에 발표)

 

 

<길 하나>

 


왔던 길 하나 있습니다
가야할 길도 하나 있습니다
태양빛에 꽃을 피우는 길도 있고
님과 제가 울고 떠난 길도 있습니다
사랑도 하나의 길이련만
항시 가변하는 길 하나 있습니다
찾아도 영원히 찾지못할 길 하나 있고
저를 두고 떠나가신 님도 있습니다
그리움이 손짓하는 길 하나도 있고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진 길도 있습니다
님이 간직한 길 제가 알길 없고
제가 드리는 사랑의 눈길 님은 알지 못합니다
억만겹으로 코팅된 심장에
빨간 장미꽃이 피어날때
제가 님에게 드리는 길 하나는
천상에서 피어난 그리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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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5
하이델베르그와 괴테의 연가

 

 괴테의 사랑이야기를 하기 전 우선 하이델베르그라는 도시를 간단히 기억해 본다. 하이델베르그는 16, 17세기를 거쳐 독일의 문화 예술 철학 종교혁명의 중심지로서 인구 13만 명이 살고 있다. 4년 전 두 번째 찾았던 도시로 이곳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는 쾨테 헤겔 막스 베버 칼야스퍼스 등등 세계적인 석학이 공부를 했으며 31,000여명의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학생은 지금도 세계적인 석학 밑에서 공부하고 있다.


 이곳 성은 불란서와의 30년 전쟁에서 한 번도 정복당하지 않은 유일한 성이라 한다. 밤과 낮을 구별치 않고 싸움을 하다가도 와인을 마시는 낭만을 간직한 성으로 유명하다.


 괴테의 본명은 "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the)이며, 1749년 프랑크푸르트의 부유한 가정에서 출생했다. 


 그가 처음 만난 연인은 1775년 "릴리 쇠네망"이었다. 하지만 괴테는 평범한 시민으로 가정생활에 얽매여 그의 일생을 마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방랑의 길을 떠나게 된다. 법학이 전공이면서도 그는 법학보다 정치학 의학을 좋아했고 나아가 역사 철학 신학 자연과학 등에 큰 관심을 갖고 많은 책을 읽게 된다. 그의 스승 "헤르더"는 그에게 예언적인 상상세계와 쉐익스피 문학의 무한성 등을 탐구하고 자연과 인간의 감성에 바탕을 둔 민족문학에 눈을 뜨게 한다. 그 후 그는 이태리로 여행길에 오르게 된다.


 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와 학문보다 변호사로 10여년의 세월을 보내다가 연하의 "쉴러"와 아름다운 연정관계를 맺게 된다. 괴테가 직관적이고 현실주의적이라면 쉴러는 사변적이고 이상주의적이다. 기질과 성장과정이 판이하게 다른 두 사람은 처음에는 소원한 관계였다. 그런데 1790년대 초부터 쉴러는 칸트를 연구하면서 지대한 내적 변화를 경험한다. 이는 괴테가 이탈리아 여행에서 겪은 내면의 변화와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두 작가가 각각 독자적으로 정립하려 했던 규범적인 예술관은 서로의 이해를 가능케 하고 또 증진시켰다.

이리하여 세계 문학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두 천재의 협업이 시작된다. 괴테는 쉴러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당신은 나에게 제2의 청춘을 안겨다 주고 나를 또다시 작가로 만들어 주었소. 나는 작가를 그만두었으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1798).이 한 줄의 사연은 그들의 깊은 연정의 세계를 설명해준다.

그러나 1805년 쉴러의 죽음으로 그들의 사랑은 막을 내리고 괴테는 공허함에 빠진다.


 여기에 괴테가 연하의 연인들을 만나 열애를 하면서 발표되었던 시의 한연을 소개해 본다. 끊어지지 않을/마법의 실로/귀엽고 유쾌한 소녀는/나를 여지없이 묶고 만다/소녀의 마법 가락지에 붙들려/나의 생명은 소녀의 것/얼마나 커다란 변화인가/사랑이여 사랑이여/나를 놓아주소서/


 지면상 괴테의 일생과 그의 사랑을 어이 다 쓸 수 있으랴. 이 또한 나의 무지의 잡설이 되기에 여기에서 생략하고 내가 읽은 글 중에서 괴테 사랑의 일화 한토막을 소개해 본다. 즉 하이델베르그에는 괴테의 거리가 있고 괴테와 54세 연하의 소녀(18세)였던 "마리안나 본 빌레미아"가 열애를 하며 거닐 던 거리가 역사적으로 전해오고 있었다. 


 이 거리 저 거리를 쏘다니다가 비스마르크 광장에서 유명한 도르뜨문뜨 맥주를 두 자그를 마시고 하이델베르그의 도심을 끼고도는 네카르강가를 걸어보고 하이텔베르그 성곽에 올라 중세의 역사를 더듬어 보았다. 나아가 괴테의 사랑이 참 낭만적이고 멋이 있었다는 생각도 했다. 


 괴테와 마리안나가 열애를 할 때 마리안나의 양친은 마리안나와 괴테의 만남을 만류했지만 마리안나는 그의 양친부모에게 말하기를 아버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인류는 어느 누구도 기억을 못하지만 저 마리안나는 인류역사에 영원히 이름이 남으리라며 부모님들의 만류를 뿌리쳤다는 일화가 전해오고있다. 하이델베르그를 관광을 했기에 그냥 관광으로 끝을 내고 싶지않아 하기와 같은 나의 시 한편을 남겨본다.

 

 하이델베르그의 연가


 72세의 괴테가/18세 소녀 마리안나 본 빌레미야와/열애를 하며 걸었던 길을 걸었네/

네카르 강 강물은 이들의 열애로 흘러/지금쯤 오대양 육대주에/

파도를 일으켰다가 폭풍우로 쏟아지기도 하네/

 


 어느 누가 본능에서 우러나는/진솔한 사랑의 샘물을 탓하랴만/그 사랑 나도 한 모금 마시고 싶어/

하이텔베르그 성에 올라/내 사랑 나의 조국 나의 동포를 찾으며/고함을 질러 보았네/

 


 슈만과 브람스가 나와 피아노곡 빠삐용을 두둘기니/쇼팡이 밤의 야상곡으로 나의 심금을 울려주고/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 배출한 54명/노벨상 수상자가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빌며 하품을 하네/

 


 하이델베르그 대학이 나를 보더니/이 불쌍한 나그네야/너는 어디로 가느냐며 힐책을 한다네/

성안 깊이 고이 감추어 두었던/221,726 리터의 와인을 혼자 다 마시니/

물들어가는 단풍잎/산 정상 비스마르크 동상의 어깨 위에 떨어지네/

 


 내 마음은/네카르 강물 따라/외롭고 서러운 낙엽으로 굴러 밟히어 가며/언제나 푸르고 푸른/

그 눈부시도록 푸르고 맑은 하늘/종달새 되어 날아가고자 울고 있네/아 아/

내 님 앞에 타오를 기다림의 향연이여/ 혹한의 북국에 피어나는 아지랑이 꽃이여/

 


(주: 이 잡설은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읽었던 책과 여기저기 방랑의 길에서 얻은 내용과 저의 양식에서 쓰인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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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13
[잡설산책] 록펠러(Rockefeller)의 생애

 

 기록에 의하면 록펠러는 선천적인 사업자질이 있어 20대에 사업을 시작한 후 33세에 미국 제일 부자가 되었고, 43세에 세계의 일등 부자가 되었다 합니다. 그가 53세가 되었을 때에는 세계의 제일부자의 위치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답니다.


 즉 백약이 무효인 불치병에 걸려 하루에 우유 한 잔 비스켓 하나로 연명을 하게 되었답니다. 거기에 탈모증이 발생하여 머리털이 다 빠져나가 문어 머리 같은 꼴불견의 해골 같은 몰골이 되었답니다. 


 하루는 불면증과 소화불량의 질병 속에 응접실을 오고 가던 늦은 밤 책상 위에 놓인 성경책을 잡고 무작정 아무런 뜻이 없이 열어젖힌 성경구절을 발견케 됩니다. 그 성경 구절은 그의 심금을 울렸다 합니다. 즉 누가복음 6장 38절이었습니다. 


 <계속 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에게 줄 것입니다. 그들은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여러분의 앞자락에 부어 줄 것입니다. 여러분이 헤아려 주는 대로 그들도 여러분에게 도로 헤아려 줄 것입니다>


 신앙이 없는 저에게는 그저 선을 베푸니 선이 나에게로 회귀하리라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읽은 성경 구절일 따름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신앙이 없는 삶의 변을 이야기 해 봅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참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 것도 우리네 인간사의 이야기 입니다. 저의 변은 신앙인이라면서 신앙인이 아닌 위선적인 생존을 영위하기 싫음이 있고 저의 양심에 어긋나는 생존을 영위하지 않겠다는 저 대로의 양심이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양심이란 무엇입니까 양심이란 말을 저는 남을 대변해주는 숭고한 존엄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 말은 남을 대변해주는 존엄을 어긴다는 것은 저 생애에 보람이 되지 못하다는 뜻으로 생각을 합니다. 이는 저 자신이 위선의 신앙인이 되지 않으려하는 허황된 독백일 것입니다. 


 어쨌든 이 성경 구절은 그를 눈뜨게 했다 합니다. 한평생 재화 획득에만 온갖 정력을 쏟았지 남을 위한 진정한 봉사와 희생을 주는 것에는 인색했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에 새날이 밝아 그는 록펠러 재단(Rockefeller Foundation)을 설립하고 거액의 기부금을 희사 시키코 대학을 설립하게 된답니다. 


 그 후 그의 지병은 차츰 회복하여 건강하고 보람찬 생애를 영위하다가 9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합니다. 저는 록펠러의 생애를 더듬으며 저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생존을 반추해 봅니다.


 이에 이방인의 긴 고난의 나날을 겪었던 지난날을 회상해 보며 오늘보다 내일이 더 보람차고 값진 생존을 찾아 방랑의 길을 헤메돌고 있는 자신을 뒤돌아보게 됩니다. 지금까지 온갖 역경 속에서 생을 영위하면서도 한 가지 분명한 마음은 항시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알차게 살아왔음은 저 자신의 자랑이기도 하답니다.


 나아가 저를 알고 계시는 분 어느 누구에게나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왔음을 부인치 않습니다. 또한 남을 위하여 항시 도움은 못 드려도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의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며 살아왔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는 것을 말씀드리며 여기에 저의 졸시 감사한 마음을 남겨 봅니다. 

 

 

 감사하는 마음

 


 혼자서 왔던 길이라고 / 내 어이 말할 수 있으리 / 수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던 길인데 / 언제나 가야할 길은 앞에 있기에 / 어떤이는 자가용 비행기 타고 날고 /어떤 이는 요트를 타고 대양을 건너는데 /

나는 그 어느 것도 잡지 못한 채 /부럽지 않는 삶을 살아 왔음을 / 누군들 알까 후회하지도 않았거늘 /
 그리운 이여 /사랑하는 이여 / 나 이제 말 하노라 / 고난과 숨 막히는 서러웠던 길 /서녘 하늘과 사람들 틈에서 / 그렇게 살아온 것도 행운이라고 /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 적요의 달빛으로 내리는 이 밤을/

너는 모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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