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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초 이유식의 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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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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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lee
이유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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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33
2015-03-13
러시아 방문기(19)

 

 

러시아 모스코바 1086 한민족학교 교장
엄 넬리 박사 제7회 민초해외문학상 수상

 

 나의 변은 이 문학상을 제정하면서 어느 누구에게 무엇을 바라거나 기대를 하지 않고 있기에 누가 무어라 하던 마음은 항시 편안하다. 나아가 내가 이 세상을 떠난 후 해외동포 1천만명 중 한사람이라도 이유식이라는 사람이 민족의 정체성 확립과 민족문화 고양 승계에 일조를 하려고 노력했다고 기억해 주면 그것으로 나는 만족할 것이다.


 가끔은 조국에서 사업적으로 성공을 한 친구들이 민초의 부담이 너무 크다며 찬조를 제의 하지만 나는 단호히 거절했다. 이는 나의 순수한 뜻이 빛바래기 때문이다.

 


 1086 한민족 학교를 방문하고 엄 교장선생님과 상견례 사진도 찍었다. 엄 교장선생님의 민족 사랑은 어느 누구와 비교를 불허한다. 그간 러시아에서 만난 우리 동포 467명을 수양아들?딸들로 연을 맺고 지금도 그 인연을 지속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동족을 사랑하고 배려함은 우리의 마더 테레사 여사임이 분명하다.


 엄 교장 선생님은 우리 부부 일행이 방문하는 것과 한글날에 맞추어 이 학교 학생들에게 각 나라의 고유 음식을 장만해 오게 하여 52개국의 색다른 음식을 맛보게 해주셨다. 뿐만 아니라 이 학교 학생들이 우리 부부를 위하여 온갖 공연을 준비하고, 열연을 보여줌에 눈물이 핑돌았다. 이렇듯 민족을 사랑하시는 분 이렇게 남을 배려하시는 분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하는 마음의 감사함을 풀길이 없었다.


 공식적인 상견례가 "끝난후 이곳에서 유명한 김치라는 한국식당에서 환영 만찬을 베풀어 주셨다. 김치찌개에 탕수육에 소주까지 질탕히 마시고 먹으며  오후를 보냈다. 여기에 엄 여사님을 그리며 나아가 467명의 수양아들 딸들과 레닌의 명예훈장을 받았을 때 엄 여사님의 선친이 우셨다는 것을 상상하며  러시아에 핀 무궁화 꽃을 재음미 해본다. 이에 467명의 수양아들?딸들을 생각하며 어머니라는 시 한편을 상재해 본다.


 
어머니


못 견디게 어머니가 그리운 날에는

비가 내린답니다

빗물 속으로 흘러만 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어둡고 각박한 세상인심에

어머니의 서광이 비추어 온답니다.

 

갈곳을 몰라

따스한 햇살에 몸을 적시면//

어머니의 환영이 뼛속 깊이 사무쳐와//

불타는 대지에//

보우강의 저녁노을 따라//

연꽃으로 피어난 어머니를 만난답니다.

 

먼곳에 해 넘어가는 소리//

백팔염주 굴리시던 어머니의 모습//

앙상한 가지 끝에 꽃잎 피어나는 냄새//

사랑의 진실을 깨우쳐 주시며//

환청으로 들려오는 불효자를 부르는 옥음//

식아 식아 니 어디에 있노

 

3000년을 기다리면//

우담바라 꽃이 피어나는 지요//

어머니 가신지 25년이 지났어도//

기쁘고 슬픈날에 피어나는 보이지 않는 꽃//

하늘과 땅을 덮고 있답니다//

어머니 어머니 우리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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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lee
이유식
58490
10333
2015-03-06
러시아 방문기(18)

 

(사진) 러시아 1086 한민족학교 현관에서 엄 넬리(오른쪽) 교장과 함께한 필자. 이 학교 학생은 750여 명이며 절반은 한국인의 핏줄이고 나머지는 타민족으로 한국어와 러시아어를 함께 공부하고 있다.

 

 

 일제의 강압과 식민지인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독립운동에 생사를 걸며 북으로 북으로 떠돌았던 독립운동가의 후예였을 것이다. 한글의 모음과 자음으로 첫울음을 터뜨린 엄 넬리는 우리자신을 그대로 닮은 우리 얼굴모습이었다. 그녀가 알지도 알 필요도 없는 이념싸움인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은 기적과, 더욱 기적일 수밖에 없는 학대받던 그 심장에다 한민족 학교를 세워 한글교육을 외치며 보급해온 것은, 기역 니은이라는 한글자음을 본적도, 들은 적도 없는 동포 4세대로서, 이 엄청난 대업을 그것도 맨주먹의 여성으로서 혼자서 다 해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한국의 디아스포라문학 연구에서 주요한 자료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오십을 넘은 늦은 나이에 한글이라는 문자와 언어를 배웠지만 한글로 글을 써 모았다. 한글은 어느 연령의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단기간에 쉽고 재미있게 배워 무슨 생각이든지 글로서 쓸 수 있다는 증거가 되어주었다. 그는 자기가 배웠고, 같은 동포의 후세대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절체절명에 생애를 바쳤다. 이 내린 사명의 실천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가르치기 쉽게 한글교과서를 손수 만들어 사용했다. 두발로 동포들을 찾아다니며 온몸으로 설득하여 어린 세대를 모았고, 국내문제에 골몰하여 동포들은 돌아볼 겨를도 없는 한국정부를 설득했다.


 6.25 전쟁 때의 적성국가 구 소련을 이은 러시아의 카레이스키 후예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며, 한글 교육 기적을 이루어서, 현지의 타민족들에게 한국인과 한글의 우수성을 일상으로 증명해주는 최선 최대 최고의 표본이 되어온 성공을 거두고 있다. 


 3) 더구나 한민족의 여성상을 입증하고 드높였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외국 현지문화에 강요적으로 적응되더라도, 바로 엄 넬리와 같은 기질과 기상과 기백을 보여주는 한민족 여성다움의 기백과 기상을 유감없이 증명해주고 있다.


 4) 한글이 있는 곳은 어디나 한국이고, 한국어로 의사소통되는 곳은 어디나 한국문화의 꽃향기가 드높은 곳이다. 따라서 한글은 문자로서, 소리말로서도 보급되어야 한다는 절체절명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재외동포 한글교육은 한심스런 현실이다. 이는 현지당국의 문제이전에 부모세대인 동포들 자신의 무감각 문제이다. 현재 일천만으로 추산되는 글로벌시대의 우리동포들은 지구 곳곳에서 현지적응에도 힘겨워, 후세의 한글교육은 엄두조차 못 낸다. 


 따라서 한국어로 된 문학작품상 이전에 한글교육은 필수 불가결의 것이다. 대한민국정부는 아직 거기까지 신경쓸 겨를이 없고, 선각적인 동포 몇 분의 피맺힌 몸부림만 신이 내린 사명으로 기대할 뿐인 현실 아닌가. 그런 몸부림 중에도 우리 한민족의 딸 엄 넬리가 온몸 던져 해낸 것이다. 


 개인적 삶이 없었던 엄 넬리 교장의 헌신에 대한 경의치고는 너무 빈약한 박수 쳐주기에 불과하지만, 일천만 해외동포를 가진 이 시대에, 민초 이유식 시인이라는 한 해외동포 시인이 사재를 털어 해마다 실시하는 이 상과, 너무나 닮았고 부응하는 실화적 업적이라는 사실에서 엄넬리의 자서전은 단연 경쟁불허였다.


 더러 정치 경제 등 여러 분야에서 성공한 동포들도 있고 앞으로 더욱 많아져야 한다. 그러나 그런 성공의 결과를 한 뿌리 한민족의식과 피보다 진한 혼백과 정신으로 뭉치게 하는 <한글>이라는 동족언어 조상언어의 절대성에까지 발전되지 못하고 그러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민초 이유식 시인은 칠년 째 사재를 털어 해오고 있고, 이는 엄 넬리 교장의 맨손 맨몸으로 전 생애를 던져 이룩한 이 자서전과 그의 글모음에서 민초문학상의 목적과 의도에 너무나 잘 부응 협연되는 <한글오케스트라>가 아닐 수 없다.


 5) 엄 넬리 교장의 이번 책은 한국민의 핏줄을 이어온 한민족의 쾌거이자 승리가 아닐 수 없다. 무궁대대로 전 세계 곳곳의 우리 동포들은 그들이 한국인의 혼과 정신과 기백을 이어가는 조상의 언어인 한글과 한글교육으로 노벨문학상을 겨냥해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엄 넬리 교장선생님께 축하의 박수를 보내면서, 앞으로 무수한 엄 넬리들이 쏟아져 나와 글로벌 코리언으로 지구 곳곳에서 우뚝 우뚝 빛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언어 한글의 보급과 적극적인 교육으로, 한글이 세계인의 언어가 되고, 모든 소리와 생각을 쉽고도 완전하게 표현해주는 과학적 미학적 속도적 우수성이 제대로 평가받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역사는 연약한 개인의 노력으로 바뀐다는 것을 굳이 유태인의 성공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는 민초문학상과 엄넬리의 자서전에서 찾았다.


 
 심사위원장 : 유안진(시인, 서울대명예교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심사위원 : 이동렬(수필가, 이화여대, 캐나다 웨스턴온타리오대학 명예교수)
            정소성(소설가, 한국 단국대학교 명예교수)
            조성국(시조 시인, 한국 전 관악문협 회장)


 
 제7회 민초해외문학상 수상자 엄넬리 니콜라예브나 박사의 약력: 러시아 모스코바 1086 한민족 학교 교장. 모스코바 레닌 사범대학교 지리 생물학을 전공, 1970년 교육학 박사를 취득했으며 1998년 독토르(최고박사)학위를 재취득하고 교육자로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1958년부터 모스코바에서 유치원과 일반학교 교사를 역임 후 교장으로 취임했으며 한-러 수교후인 1992년 모스코바에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통합된 11년 과정의 러시아내 유일한 1086 한민족 학교를 설립하고 이 학교를 한민족의 얼을 잇고 전파하는 요람 뿐만 아니라 모스코바 제일 명문으로 키워냈다. 지난 18년간 70여 차례 조국을 방문하여 민간외교 사절의 역할을 해오고 있으며 현재 이 학교의 학생 수는 700여명에 달한다.(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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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lee
이유식
58489
10333
2015-02-26
러시아 방문기(17)

 

 

 

(지난 호에 이어)
 지나가는 길이라 잠간 귀를 기울였더니 관광안내원 중 한 여성이 우리 곁에 나타나 왜 남의 관광안내를 듣느냐고 짜증을 낸다. 대꾸할 가치가 없어 가던 길을 계속 가면서 생각했다. 참 우리민족은 얄궂은 민족이라고, 만리타향 타국에서 같은 동족을 만나면 반가웠으리라는 나의 생각과는 너무나 다른 점에 환멸을 느끼며 돌아섰다.


 어디에서나 조그마한 감투를 과시하려는 것은 캐나다 동포사회에나 어디에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하며 내가 참 초라하고 불쌍한 민족의 한사람이라는 상념을 씹어 보았다.


 이 거리에는 옛날 조국의 방산시장에 전시했던 헌책방이 즐비하며 없는 것이 없는 거리와 같다. 상가에는 세계적 유명 브랜드의 점포에서부터 러시아의 토산품 등 무엇이던 살수있는 곳이다. 곳곳에서 바이올린도 켜고, 노래도 하고, 그러면 지나는 행인들이 관람도 하고, 찬조금을 주기도 한다. 


 스타박스 커피점에서 커피도 마셨다. 북미에서 마시는 커피보다 더 맛이 있는 것은 어쩐 일일까. 아마 커피 값이 북미보다 조금 비싼 탓이리라. 이 유명 거리의 길이는 2킬로미터 운동하기에 딱 좋은 거리였다.


 밤에는 이 거리와 가까운 곳에 있는 메트로풀 호텔을 찾아가 식당에서 웨이트레스 야니의 설명을 들으며 맛 나는 보드카를 마시고 일찍 숙박집으로 들어와서 오늘 일정을 마쳤다. 

 

 러시아 여행 15일째

 

(사진) 10월 9일 오늘은 우리의 한글날, 이 학교 교장선생님이신 엄 넬리 박사님과 이곳 학생들이 준비한 52개국의 음식을 시식했다. 엄 교장 선생님의 민족 사랑과 남을 배려하시는 깊은 정에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각국에서 이 학교로 유학을 온 학생들에게 자기 나라의 고유 음식문화를 소개하게 하고 우리에게 시식할 기회를 마련해 주셨다.

 

 아침 일찍 일어나 민박집에서 나와 조국의 명동거리 아바트 길을 산책했다. 맥도날드에 들어가 커피 한잔으로 여기까지 숨가쁘게 달려온 지난 13일간의 즐거웠던 순간들을 상상하며 러시아 여행을 매일매일 작성해서 글로 남기리라는 생각을 한다. 선상에서 만나 즐거움을 같이 나누었던 짧은 기간의 친구들 무사히 집으로 안착하였기를 기원하며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


 오늘은 제7회 민초해외문학상 수상자 엄 넬리 교장 선생님을 상견례 하러 가는 날이다. 내가 감히 엄 박사의 수상 내용을 평할 수 없기에 여기 심사평을 쓰신 심사위원장 서울대 명예교수이며, 예술원 회원이신 유안진 시인님의 심사평을 옮겨본다.


 
 제7회 민초해외문학상 심사평

 


*러시아의 심장부에 한글교육을 꽃 피우다"

 
 깊은 산 속 작은 옹달샘도 대양을 꿈꾸며 흐른다는 말을 이번 민초문학상 심사를 하며 다시 생각하게 된다. 민초문학상과 금년도 수상자 엄 넬리 교장이 바로 너무도 짝이 맞는 옹달샘이고 이 두 분의 꿈이 바로 대양을 향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심사위원 전원의 이런 생각이 금년도 민초문학상을 엄 넬리 니콜라예브나 교장의 자서전 <러시아 심장부에 활짝 핀 무궁화>로 결정하게 했을 것이다.


 엄 넬리 교장은 카레이스키 4세대로서, 21세기에 가장 주목받는 글로벌 코리언이다. 그는 한국문학의 절대기초이자 기본인 한글의 글쓰기와 한글 교육의 성공사를 일궈낸 자서전을 썼다. 현역의 한글문인이자 한글교육자 한민족교육자의 웅대한 목적과 기적적 성과를 이룩하기까지의 피맺힌 실천인 그의 실화에서, 우리는 무수한 의미와 의의와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문학성과 실화성을 가늠하게 된다. 따라서 몽골 인문대학교의 강외산 교수의 훌륭한 수필작품이 다음 기회에서 재고되어야 할 것이라고 유보될 수밖에 없었음을 밝힌다.

따라서 심사평은 저절로 엄 넬리 교장의 자서전에 담긴 동토에서 생존해낸 디아스포라들의 실화성과 엄 교장 개인의 오십 넘은 나이의 한글배움과 그의 한글글쓰기의 문학성과 후세 한글보급교육의 공로 등을 중심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한글>은 한글문학상인 민초문학상의 절대조건이라는 대전제에서 이 자서전은 한글로 된 글모음과 교육적 실화성으로 그 당위성이 부각되었다. 더구나 엄 넬리 교장이 오십 넘은 나이에 몸소 한글을 배워 한글글쓰기로 모은 글모음이 자서전에 상당부분으로 포함되었기로, 그 글모음에서 문학성이 증명되었다는 점이다. 아무리 잘 쓴 작품이라도 한글로 쓰이지 않았으면 민초문학상의 심사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2) 누구도 관심 두지 않은 러시아 현실에서 소수중의 소수민족 언어인 한글의 보급을 위한 제도적 동포학교건립과 성공적인 한글교육의 업적 평가는, 이미 다면적으로 현지와 한국에서 높이 평가되어왔다. 해외동포 2, 3, 4세대에게 한민족의 혼이고 정신인 한글을 제도적으로 교육하여 온 실화를 자술한 이 자서전은, 그의 글모음의 문학성보다 더 뛰어난 실화적 공로로 국내에는 물론 러시아 현지에서도 무수한 상과 훈장을 받았다. 엄 넬리 교장이 세운 한민족학교와 교육프로그램은 물론, 기숙사 등 학교생활에서의 한국어사용과 한글과목 교육은 더욱 미래의 한글보급의 양양한 전망을 약속해 주었다. 가히 러시아동포사회에서 한글로 된 문학작품이 쏟아져 나와 노벨문학상까지 기대될 수가 있다는 희망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번의 수상은 엄 넬리 교장의 글모음에서의 문학성에 주목하였다. 이분의 글모음은 늦은 나이에 새삼스럽게 한글을 배운 피눈물의 과정이자, 그 과정 속에서 통감했던 해외동포의 어린 세대의 한글교육의 필요성과 몸부림자체였다. 구 소련연방에서 극소수 소수민족으로 생존해낸 그 자체만도 기적이었다. 우리는 그 기적에 대해 손바닥이 닳도록 박수갈채를 보내야 하는데, 혹한의 동토 황무지에 너무 밤중 갑자기 짐짝처럼 실려져 짐짝처럼 내팽개쳐진 우리 동포들은 그럼에도 살아남았고, 후세대를 낳았고, 그렇게 태어난 엄 넬리 니콜라예브나는 우리민족의 딸이었다. 


 일제의 강압과 식민지인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독립운동에 생사를 걸며 북으로 북으로 떠돌았던 독립운동가의 후예였을 것이다. 한글의 모음과 자음으로 첫울음을 터뜨린 엄 넬리는 우리자신을 그대로 닮은 우리 얼굴모습이었다. 그녀가 알지도 알 필요도 없는 이념싸움인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은 기적과, 더욱 기적일 수밖에 없는 학대받던 그 심장에다 한민족 학교를 세워 한글교육을 외치며 보급해온 것은, 기역 니은이라는 한글자음을 본적도, 들은 적도 없는 동포4세대로서, 이 엄청난 대업을 그것도 맨주먹의 여성으로서 혼자서 다 해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한국의 디아스포라문학 연구에서 주요한 자료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오십을 넘은 늦은 나이에 한글이라는 문자와 언어를 배웠지만 한글로 글을 써 모았다. 한글은 어느 연령의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단기간에 쉽고 재미있게 배워 무슨 생각이든지 글로서 쓸 수 있다는 증거가 되어주었다. 그는 자기가 배웠고, 같은 동포의 후세대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절체절명에 생애를 바쳤다. 이 내린 사명의 실천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가르치기 쉽게 한글교과서를 손수 만들어 사용했다. 두발로 동포들을 찾아다니며 온몸으로 설득하여 어린 세대를 모았고, 국내문제에 골몰하여 동포들은 돌아볼 겨를도 없는 한국정부를 설득했다.


 6.25 전쟁 때의 적성국가 구 소련을 이은 러시아의 카레이스키 후예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며, 한글 교육 기적을 이루어서, 현지의 타민족들에게 한국인과 한글의 우수성을 일상으로 증명해주는 최선 최대 최고의 표본이 되어온 성공을 거두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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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식
58488
10333
2015-02-19
러시아 방문기(16)

 

 

 
 러시아의 음악과 무용은 러시아 정교회의 성가 그리고 민속음악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한다. 러시아의 황제들에 의해 음악의 문화가 찬란히 그리고 웅장한 발레 오페라로 발전하면서 모스코바와 세인트 피터스버그의 귀족들을 위한 것으로 만들어진다. 이 나라의 오페라는 1836년 처음으로 세인트 피터스버어그에서 시작 되었으며 미카일 제린카의 황제의 일생을 고전 음악으로 예술화 한 것이 처음이었다는 설명이다. 소련 시절 클래식 오페라가 정규적으로 연주되었다. 세계적인 소프라노인 Anna Netrebko는 마린스키 극장의 청소부로 시작해서 현재 뉴욕 등 세계적인 유명 오페라 전당에서 공연을 하는 최고의 마돈나로 활약하고 있다.


 오후에는 크레물린궁 앞 붉은광장을 끼고 잘 단장된 러시아 최고의 백화점 굼에서 커피도 마시고 백화점 내의 점포를 두루 살펴보았다. 새로 단장한 굼 백화점은 벽이나 홀 어디나 예술적인 조각으로 만들고 다듬어져서 하루 종일 이 백화점을 배회해도 피로감이 없을 것 같다. 이곳에도 삼성은 있어서 점포에 들어가 가격을 점검했더니 캐나다와 별 차이가 없음을 알았다.


 또한 붉은 광장에서 가장 유명한 집은 레닌의 무덤으로 미이라가 된 레닌을 보기 위하여 지난 90여 년간 매일 몇 백 명이 방문을 한다는 이야기이다. 레닌은 소련 공산당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스탈린의 미아라가 레닌 옆에 안장되어 있는 것에 대하여서는 국민들이 반대를 하고 있으나 마땅한 곳으로 이장할 곳이 없어 아직 레닌 옆에 스탈린이 안장되어 있다는 설명이다.


 유람선으로 돌아온 일행들은 그 동안 13일간의 여정을 같이한 여행객들과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내일 새벽부터 너나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 생업에 임하리라. 가깝게 대화를 나누었던 미국에서 여행 온 데이비드 부부, 크래크 부부, 밥 부부 등과 호주에서 여행을 온 돈 부부, 캐나다 빅토리아에서 온 베리 부부 등을 찾아가 일일이 악수를 나눈다. 건강히 집으로 잘 돌아가라며 언젠가 인연이 있어 또 어디에선가 여행지에서 서로 만나자고 악수와 포옹으로 작별 인사를 했다. 이별은 언제나 슬픈 것 모두들 건승을 기원한다. 또한 바이킹 리버 유람선의 전 직원들의 친절한 봉사와 안전 여행을 한 것에 감사드리며, 이 유람선의 사업번창을 빌며 잠자리에 누었다.

 

러시아 여행 14일째

 


(사진) 조국의 명동거리 강남의 테해란로라 불리는 모스코바의 유명거리 한 복판 아바트(ARBAT)거리에 헌책을 팔고있는 진열장이다. 이곳에는 세계의 유명 부랜드와 러시아의 수바니어 상가가 즐비하다. 여기에 스타 박스 커피점과 맥도날드 커피점도 있으니 여행객이 한번 가 볼만한 거리이다.

 

 이제 13박 14일의 바이킹 리버 크루스의 러시아 내륙의 여행은 끝이 났다. 네바강에서 시작한 유람선은 모스코바 볼가강에서 닻을 내렸다. 14일 오전 10시까지 모든 여행객은 퇴선을 해야하고, 각자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13일 새벽부터 여행객은 하나하나 자취를 감추었다. 우리는 느긋하게 아침식사를 하고 이제 내가 제정한 제7회 민초해외문학상 시상식에 참석하여 러시아의 우리 동포들과 만나는 일만 남았다. 조금은 가슴이 설레어 온다. 러시아 동포들은 어떻게 살아왔을까하는 호기심이 나의 심장을 파도치게 한다.


 오전 11시경 이번 행사를 총괄해온 러시아 1086학교 한국인 여선생 임미화님이 우리를 찾아왔다. 오랜만에 동족을 만나는 기분은 이상야릇했다. 우리는 처음 만난 사람이지만 서로 포옹을 하며 몇 십 년 지기인양 반갑게 상견례를 했다. 우선 숙소 문제가 제일 궁금했다. 김치와 된장국 생각이 간절하다 했더니 그렇게 생각하고 한인이 경영하는 민박집을 예약해 두었단다. 우리는 임 선생의 안내로 예약된 민박집 전용차에 몸을 싫고 아바트라는 모스코바의 중심지로 향했다.


 민박집의 숙박료는 하루에 두 끼, 두 사람의 숙식의 경우 미화 200불이라 한다. 이 곳 호텔비와 비슷한 요금이지만 우선 두 끼의 식사가 포함되고 한식을 먹는다는 것에 만족했다. 무엇보다 같은 동족의 사업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아무 거부감 없이 여장을 풀었다. 그런데 문제는 밤이었다. 러시아에서는 정부가 무료로 난방을 해주고 아파트 자체에 온도 조절기가 없기에 밤새 히팅이 들어와 더위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잠을 청해야하는 고충이 있었다. 그러나 중국 연변에서 온 주방장의 요리 솜씨는 일품이라 맛나게 한국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집 주인에게 부동산 가격을  물었더니 시내 중심가에 4, 5층의 방이 7개인데 시가는 한국 돈으로 20억 내지 30억원, 한 달 셋돈은 7천불을 낸다하기에 깜짝 놀랐다.


 늦은 점심을 하고 조국의 명동거리와 같다는 아바트 거리를 관광했다. 우리를 안내하는 임 선생에 따르면 엄 교장이 선착장에까지 나와서 우리를 맞이하지 못함을 송구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길이 너무 멀고, 건강이 좋지 않다고 전해왔다. 나로서는 여행에 지친 몸이라 우리끼리 한가한 시간을 갖는 것이 너무나 자유스러웠다.


 아바트 거리에서의 특이한 관광은 푸쉬킨 부부의 동상이 있는데, 이 부부가 손을 잡지 않고 있는 점이었다. 임 선생의 설명은 이 부부가 정답게 손을 깍지를 끼었다면 불행한 일이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러시아인들의 설명이라 한다. 푸쉬킨이 거주하던 집 앞에서는 한 무리의 한국에서 온 관광객이 푸쉬킨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었다. 지나가는 길이라 잠간 귀를 기울였더니 관광안내원 중 한 여성이 우리 곁에 나타나 왜 남의 관광안내를 듣느냐고 짜증을 낸다. 대꾸할 가치가 없어 가던 길을 계속 가면서 생각했다. 참 우리민족은 얄궂은 민족이라고, 만리타향 타국에서 같은 동족을 만나면 반가웠으리라는 나의 생각과는 너무나 다른 점에 환멸을 느끼며 돌아섰다.


 어디에서나 조그마한 감투를 과시하려는 것은 캐나다 동포사회에나 어디에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하며 내가 참 초라하고 불쌍한 민족의 한사람이라는 상념을 씹어 보았다.


 이 거리에는 옛날 조국의 방산시장에 전시했던 헌책방이 즐비하며 없는 것이 없는 거리와 같다. 상가에는 세계적 유명 브랜드의 점포에서부터 러시아의 토산품 등 무엇이던 살수있는 곳이다. 곳곳에서 바이올린도 켜고, 노래도 하고, 그러면 지나는 행인들이 관람도 하고, 찬조금을 주기도 한다. 


 스타박스 커피점에서 커피도 마셨다. 북미에서 마시는 커피보다 더 맛이 있는 것은 어쩐 일일까. 아마 커피 값이 북미보다 조금 비싼 탓이리라. 이 유명 거리의 길이는 2킬로미터 운동하기에 딱 좋은 거리였다.


 밤에는 이 거리와 가까운 곳에 있는 메트로풀 호텔을 찾아가 식당에서 웨이트레스 야니의 설명을 들으며 맛 나는 보드카를 마시고 일찍 숙박집으로 들어와서 오늘 일정을 마쳤다.(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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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2
러시아 방문기(15)

 

 

 
(사진) 붉은광장 앞의 러시아 최대 굼 백화점 내부의 호화찬란한 모습

 

 

 이제 오늘 밤 하루만 더 지나면 13일간의 유람선 여행이 끝이 난다. 오늘은 버스를 타고 이 곳 모스코바 중심가에서 내려 각자의 행동으로 하루를 보내는 일정이다.

쉽지 않은 러시아 관광이기에 할 수 있는 한 모스코바 시내의 많은 것을 보고 싶다.
 모스코바의 중심은 크레물린 궁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다. 궁 앞에서 내린 우리는 우선 몇 불럭을 걸으며 거리 관광에 임했다. 담배꽁초 하나 없고 휴지 한쪽 없는데 물차가 와서 도로를 깨끗하게 씻어 주니 그 청결함은 말할 수 없었다. 공해가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만큼 공기는 청명하나 항상 구름이 낀 상태로 우중충하였다. 거리에 따라 8차선이 10차선이 되었다가 12차선이 되기도 한다.


 상가에는 맥도날드, KFC, 서브웨이, 코카콜라 등 미국 유명회사가 여기저기에서 영업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미국이나 캐나다에서는 러시아의 유명 식품점이나 상호나 러시아어를 볼 수 없는데, 러시아에서 영어로 된 상호를 접하니 이상한 기분이다. 


 행여 한국의 삼성이나 현대, 엘지 등의 상호로 영업을 하는 곳이 없는가 하고 두리번거리며 찾아보았다. 반갑게 우리 조국의 업체들도 여기저기에서 영업을 하고 있음에 기분이 좋았다.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영어로 상호를 표시하지 않고, 우리말로 상호가 표시되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길을 걷다가 지쳐 크레물린 궁 옆에서 한 불럭 떨어진 고풍을 자랑하는 메트로폴이란 호텔에 들어가 라운지를 찾아갔다. 이곳의 호텔도 거의가 북미와 같은 호텔이라는 생각을 하고 위스키 한잔과 아메리카노 커피 한잔을 시켰더니 미화 25불을 달라한다. 호텔의 객실 요금은 예약을 하면 250불에서 400불 사이이며 여행사를 통하거나 다른 통로를 이용하여 잘 찾아 들어가면 훨씬 싸게도 하룻밤을 쉴 수가 있다는 것이 웨이트레스 야니의 말이다.


 이 호텔에서 나와 붉은 광장을 지나 마르크스와 레닌의 동상을 뒤로하고 우리는 볼쉐이 대극장으로 향했다. 이 극장의 건물은 어마어마하다. 차이코프스키의 동상이 있고, 차이코프스키 음악원도 있다. 이 음악원은 뉴욕 맨하탄의 줄리아드 음악학교, 베를린의 음악대학, 이태리의 베르디 음악학원 및 런던 왕립 음악학원과 더불어 세계 5대 음악학교라 불리어진다는 것이다.


 다시 거리를 걸으며 모스코바라는 도시를 음미한다. 지난날 관광 안내원이 설명하듯 모스코바는 어떤 부끄러움도 없고 어디에나 내놓을 만한 문화와 예술을 간직한 아름다운 도시라는 말에 공감을 느껴본다. 


 모스코바의 역사는 붉은 광장을 중심으로 4개의 면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레닌의 무덤을 중심으로 한 면과 그 앞면의 굼 백화점 그리고 뒷면의 동쪽 성곽과 다른 한 면의 돔식 정교회의 성당이 있는데 이는 1552년 이반 4세 황제의 재위 시절에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다.


 그 외 건축물과 예술에 관한 이야기는 언급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의 장엄하고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기에 이 도시 전체가 문화와 예술로 쌓여있다고 말하고 싶다. 


러시아의 음악과 예술에 관한 것에 관하여 설명을 부연한다면 구소련 공산정권하에서도 문화와 예술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을 만큼 러시아인들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대단하다. 특히 볼쇼이 대극장과 키로브 극장은 양대 산맥으로 러시아의 음악과 예술의 전당으로서 공산치하에서도 두 극장은 보호되어왔다. 


 키로브 극장을 지금은 마리린스키 극장이라 하지만 이 두 극장에서 전통적으로 공연되는 발레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실제로 필자의 가족은 10월 11일 이번 제7회 민초문학상 수상을 하신 엄 넬리 박사님의 배려로 공연 표를 예매를 해두었기에 발레를 관람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황홀의 극치를 보여주는 아름다움이었다. 나같이 발레에 대한 문외한도 흠뻑 빠져들어 두 시간이 언제 지나는 줄 모르고 있었다.


 이번 공연을 안내해주고 문학상의 모든 진행과 시상식 행사를 총괄한 한국인 여선생 임미화님의 말에 의하면 러시아 발레단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는데 10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 표가 완전 매진된다. 이 시기에 최고의 예술인들 공연을 볼 수 있으며 러시아인들이 예술에 얼마나 심취해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한다. 그 이외의 기간은 이들이 외국으로 공연을 나간다고 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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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05
러시아 방문기(14)

 


(지난 호에 이어)
 
 모스코바 강은 러시아 연방 모스코바 주 전체와 스몰렌스크 주 일부를 지나는 강으로 볼가 강 유역에 있는 오카 강의 왼쪽 지류이다. 집수면적이 1만 7,600㎢인 이 강은 스몰렌스크-모스코바 고원에서 발원하여 남동쪽으로 502㎞를 흐른다. 모스코바의 주요 상수도원이기도 하다. 이 강 유역에는 모스코바•모자이스크•즈베니고로트•주코프스키•브로니치•보스크레센스크•콜롬나와 같은 주요도시가 있다. 주요 지류로는 쿠자 강, 이스트라 강, 파흐라 강, 세베르카 강이 있다


 모스코바 강은 조국의 한강과 같이 강 뚝이 잘 정비되어 있으며 밤 야경을 보며 유람선을 타는 기분은 러시아 모스코바가 내 품안에 안겨오는 심정이었다. 가을 소슬 바람은 귀 밑 머리카락을 흔들고 이 경이적인 아름다움에 취하지 않을 자가 어디에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러시아 모스코바는 내가 생각하던 것과는 너무나 차이가 많은 문화와 예술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에 러시아의 과거와 현재의 간략한 역사를 알려주는 관광 안내원 빅토리아 여사의 설명에 귀를 기울여 본다. 모스코바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증명은 기원전 5백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1147년경 유리 돌고루키 즉 키에브의 왕이 처음에 네그린나와 모스코바 강이 만나는 지점에 목조 성채 즉 크레물린을 건설하면서 모스코바의 역사는 실제로 시작되었다.


 그 후 1376년 디미트리 돈스코이가 돌로 처음 크레물린 성채벽을 건설했다.이는 성의 안전을 목적으로 했고 모스코바가 점점 큰 도시로 변해감에 따라 성도 더 크게 증축을 해나갔다. 15세기에 러시아의 수도로 정해졌으며 그 후 피터 대왕이 수도를 세인트 피터스버어그로 옮겨 200년간 러시아의 수도가 된다. 그 후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모스코바 성의 일부가 무너지게 된다. 이 때가 1812년의 일이었고 다시 증축하면서 모스코바는 방직과 야금술의 본거지가 되며 또한 사회민주주의와 노동운동의 중심이 되기도 한다.

 


 1918년 모스코바는 새로운 수도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때부터 인구와 경제의 중심이 모스코바로 전환되었다. 구 소련이 붕괴된 1991년에 잠시 모스코바의 성장이 주춤하다가 10년이 채 되기전인 2000년에는 부동산과 경제 활동이 붐을 일으키고 있다


 현재의 모스코바는 2500곳에 역사적이고 건축학적인 기념물 70개의 박물관, 50개의 극장, 4500개의 도서관, 500개의 대학과 연구소가 있다. 현재도 앞으로도 러시아의 중심은 모스코바임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으리라는 것이 빅토리아의 설명이다.


 오늘은 내 자신의 신세 타령이랄까 유람선으로 돌아와 몇 잔의 와인을 걸치고 다음과 같은 시 한편을 남겼다.

 

 

벗어 버리고 싶다

 

 

나 벗어 던지고 싶다
흘러가는 강물에 모든 것 흘려보내고 싶다
내 그리움과 꿈의 향연도
너의 아픔을 위하여 버리고 싶다.
때로는 홀로 떠 있는 서산의 조각달처럼
때로는 엉겅퀴 풀잎이 되어
때로는 그믐밤 가로등 불빛이 되어
때로는 동구 밖을 걸어오는
너의 모습을 보며
때로는 무너져 내리는 가슴 하나 깔아놓고
모든 것 벗어 버리고 싶다. 
까치밥이 된 홍시를 깨물고 싶을 때
너는 저 만큼에서 손을 흔들었다
그 절망의 순간에 허우적 너를 상상하며
바람에게 물었다
벗어 버리고 싶은 이 마음을
언제던가
러시아 중심가 볼쉐이 대극장의
발레리나의 타오르는 욕정으로
남을 간음을 하며
엄동에 피어나는 국화꽃 너를 꺾고 싶었다
욕망이 절망으로 바뀌어 질 때
내 이상은 잊고 싶고 버리고 싶은 너를 만난다
이제 이 허수아비의 생존 앞에
한 줄기 희망과 빛은 조용히 눈을 감고
너를 껴안고 울고 울다가 어디론가 떠나는 허무
그 허무는 천상의 나팔소리로 환원하여
북극의 곰이 되어 동굴로 들어가는 나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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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29
러시아 방문기(13)

 

 


 (지난 호에 이어)
 구글리지나 모스코바나 개인 가정집의 식단은 비슷한 것 같았다. 빵과 수프, 소시지, 햄, 치즈, 계란과 식후 디저트 차 등이었고 가정집에서는 커피를 별로 사용치 않는 것 같았다. 커피 생각이 났으나 내가 방문한 가정집의 아리따운 과수댁에게 부담을 안길 것 같아 부탁하지 않았다. 그런데 커피 대신 이들은 러시아산 보드카를 식후에 코냑 잔 같은 조그마한 잔을 이용 건배를 한다. 


 보드카는 가격이 참 저렴하다는 생각이다. 조국의 막걸리나 캐나다의 맥주 정도로 생각하면 되리라. 분명한 것은 캐나다에서 우리가 마시는 보드카는 러시아산이 아니라는 것이다. 스위스, 노르웨이, 프랑스 등에서 다시 제조하여 캐나다로 수출된다는 이야기이다. 러시아의 진짜 보드카는 뒷맛이 참 깨끗하며 기분좋게 취하고 깨어나게 하는 술이라는 생각이다. 


 가정집 방문은 러시아 서민들의 삶의 현장을 보는 것 같아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러시아인들이 보드카를 냉동고에 오래 보관한 후 마시는 것을 보고 그대로 해 보았더니 정말 맛이 좋았다.


 Subway는 정말 대단한 시설과 안전을 기하여 설계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환승역에서 역내의 각종 기둥과 벽에는 어마어마한 예술품으로 장식한 러시아의 발전사를 알리는 내용을 조각과 동상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 지하철 내부의 예술품만 보아도 러시아 어느 박물관을 보는 것 이상으로 감상할 만하다는 생각이다. 


 특히 제정 러시아부터 현재까지의 생생한 역사의 흐름을 알기 쉽게 예술작품으로 묘사한 은유는 감상에 감상을 거듭하게 하고 이 지하철 환승역 구내를 몇 바퀴 돌아다니면 러시아의 역사를 어느 정도 숙지하리라는 생각이다. 


 유람선으로 돌아와 저녁은 선장과 파티를 하는 시간이다. 샴페인과 와인잔을 들고 건배를 하고, 유람선 전 종업원이 각 파트별로 차례차례 나와 관광객 앞에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며 모스코바의 하루해를 마쳤다. 200명의 관광객을 위한 유람선 승무원이 100명임에 놀라웠다.

 

 
 십이일째(2013년 10월 6일)

 


 

 (사진) 징기스칸의 300년 러시아 통치를 물리친 이반 4세 황제가 1555년에서 1560년 사이에 지어올린 승전 기념 성당이다. 이 성당의 이름은 바실리 주교의 이름을 따 성 바실리성당이라 명명하고 붉은 광장에 서있다.

 

모스코바 대학은 1755년 미하일 바실리예비치 로마노프가 설립한 러시아의 최고 국립대학으로 러시아의 거의 모든 수상과 대통령 등이 이 대학을 거쳤다.


 우선 모스코바 대학의 찬란한 역사와 간단한 개요를 살펴보면 모스코바 대학은 스탈린 양식의 캠퍼스를 가지고 있는 러시아 최고의 학부 요람으로 30층 본관 현관 위에 양팔을 펼쳐 비상하는 ‘쌍두 독수리 동상’과 아래는 ‘별’ 그리고 농민 노동자의 상징인 ‘낫과 망치’가 있다. 본관 건물 양 옆으로 연구동과 기숙사, 잘 정돈 된 캠퍼스 정원이 좌우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 대학을 창설한 ‘미하일 라마노소프’의 동상도 중앙에 서있다.


 18개학부와 아시아 아프리카대학 8개, 학문연구소 산하에 25,000여명의 학생, 5,000여명의 아스피란트, 5,000여명의 연구원 그리고 매년 158개국에서 약 1,500여명의 외국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단다. 대학 뒤편으로 모스코바에서 제일 높다는 해발 200m의 레닌 언덕에서는 모스코바강과 숲 그리고 도심이 한 눈에 보인다.


 이 대학 본관 건물에는 러시아의 상징 왕별이 있는데 이 왕별은 모스코바에서 크레물린 궁을 제외하고는 외무성과 시청의 건물에 똑 같은 왕별이 있다. 대학 캠퍼스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앞에는 모스코바 강이 유유히 흐르고 캠퍼스를 둘러싼 주변 경관의 아름다움에 가을이 익어가는 단풍잎들은 나를 반겨주는 양 조국의 은행나무 잎 같이 노랗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단풍잎이 머리와 어깨를 치고 떨어질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돌았다. 인류의 갈 길은 어디이며 모스코바 대학의 인재들이 인류를 위해 평화와 번영을 위하여 얼마나 기여를 할까. 지구는 변함없고 나라와 나라의 생존 경쟁은 얼마를 더 지속하며 생존에 위협할까 온갖 상념에 잡혀본다. 


 다시 인생을 살아간다면 이런 대학에 와서 공부를 한번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야심도 느껴본다. 돈 200불 들고 공부 좀 더 한다고 멀고먼 캐나다라는 나라로 이민을 와서 학위도 못 받고 장사꾼이 되어 방황하는 나의 생존의 뒤안길이 알량한 감정으로 북받쳐 왔다. 이런 잡생각을 하는 순간 관광객들은 버스에서 승차를 하라고 손짓한다.(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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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22
이유식 러시아 여행기(10)


십일일째(2013년 10월 5일)

 

 


 야로스로브를 출발, 밤새 헐떡이며 항해를 한 유람선은 아침 일찍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조찬 후  5,6,7 삼일간의 모스크바 시내 여행 계획에 대한 유람선 프로젝트 메니저 캐서린의 설명이 있었다. 오늘의 일정은 크레믈린 붉은 광장의 관광과 모스크바 가정집에10인 일조가 되어 가정집에서 중식을 하고 오후에는 모스크바 거리와 상가 등을 관광하는 자유시간을 갖게 된다. 유람선에서 준비한 버스를 이용할 수도 있고 개인적으로 Subway 를 이용할 수도 있다. 우리는 모스크바의 지하철 운영과 그 시설을 알고 싶어 지하철을 타고 붉은 광장까지 가기로 했다. 


 옛날과 달리 붉은 광장은 완전히 오픈되어 있다. 공산치하에서는 나라의 특별한 행사 때만 이 광장을 오픈하고 공산 정권을 지지하는 열혈 당원들만 참석을 했는데 지금은 완전히 개방되어 있어 관광객이 하루 종일 쉴사이 없이 왕래하고 있다. 붉은 광장의 조그마한 침엽수 옆에는 돌로 만든 비석이 서 있고 공산정권에서 수상을 지낸 사람들, 후르시쵸프, 브레즈네프, 안드레포프,  크래친코, 유리 가가린, 최초로 달나라에 착륙한 우주인 등과 공산정권에 국가적으로 공헌한 인사들이 묻혀 있다. 


 그 앞에 새로 지은 사각형의  집은 레닌과 스탈린의 시체가 미이라가 된 상태에서 관 속에 누워 있다. 수년 전 베트남 하노이에서 본 호지명의 묘소와 흡사하다는 생각이다. 북한에는 김일성 김정일이 이렇게 안장되어 있으리라는 상상도 해보며 이 붉은 광장을 온갖 회상 속에 젖어 한바퀴 돌았다. 현재 러시아 국민들은 이 특별묘에서 레닌만 이 자리에 안장을 해두고 스탈린은 다른 곳으로 옮기자는 여론이 한때 들끓었는데 이는 스탈린 정권의 독재정권 하에 죽은 사람이 너무 많다는 이유에서다.


 이 붉은 광장은 역사적으로 모스크바의 심장임을 상징한다. 사람들은 흔히 정치적 파워 하우스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미국의 백악관, 조국의 청와대와 같이 이 나라의 역사적인 피가 흐르는 심장이고 한때는 성벽 속에 있는 중심도시였던 역대 실권자들이 이 크레믈린 궁에서 이 나라를 다스려 왔음에 이의를 제기 할 수는 없으리라. 


 크레믈린에서  이반 트라불 황제가 통치했고, 나폴레옹은  여기에서 모스크바가 전소되는 것을 보았고 레닌의 사회주의 혁명이 여기에서 태동했고, 스탈린은 이곳에서 그의 국민들을 숙청했다. 후르시쵸프의 냉전 시작의 도시, 고르비의 페레스트로이카 혁신과 투명정치 정책이 시작된 곳,   그리고  옐친이 새로운 러시아를 개획했던 곳인 이 곳은 지금까지 변함없이 힘의 상징으로 존재하는 중요한 도시라는 설명이다.


 크레믈린이란 단어는  요새라는 의미이며, 1150년 처음 모스크바 주위에 나무로 건설된 요새였다. 모스크바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크레믈린 또한 중요한 곳으로 되어간다. 세월이 바뀌면서 1320년 목조 요새는 붉은 돌들로 새로 지었으며 이곳은 한때  러시아 정교회의 본부건물이 된다. 이 건물을 돌로 새롭게 단장한 황제는 이반 4세로 이탤리 건축설계사를 불러와  건설하고  많은 부분이 남아  현재에 이른 것이다. 


 이곳에는 1941년 산화한 무명용사들의 무덤이 있어 사시사철 병사들이 가이드를 서고 있으며 엄숙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가정 대성당, 러시아의 보배의 집이라 일컬어지는 Armory 즉 병기고에는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선물 등을 포함한 4000 여 점이 넘는 보배들이 있으며 특히 러시아에서 가장 크고 비싼 다이아몬드, 그리고 가장 유명한 Faberge Egg 가 있다. 천사장 대성당 성모 대축일 성당, 황제의 대포와 종 등 크레믈린은 너무나 거대하기에 한번의 방문으로는 모든 것을 다 소화할 수가 없다. 


 붉은 광장에는 굼(Gum)이란 백화점이라기보다는 궁을 연상할 정도로 아름다운 러시아 최대의 3층 백화점이  있다. 세계의 유명 브랜드 상점과 러시아의 토종상품 등 1천여 개의 점포가 있었다.


 오후에는 모스크바 가정집에서 러시아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현재 모스크바는 세계에서 억만장자가 제일 많은 도시라는 설명이다. 그 원인과 근인은 고르비의 혁신 때 국가가 보유한 많은 종류의 자산을 민간인들에게 넘겨주면서 혼란한 경제를 수습하기 위한 방법으로 무조건 분양을 했는데, 그 때 민간인들이 국가로부터 엄청난 이권을 챙겼다는 이야기이다. 이 때 소왈 러시아의 마피아 갱단이 생겨났고 230%의 인플레이션을 감당치 못한 혼란과 무질서는 빌리어니어를 양산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정부에서 국가에 무엇인가 공헌을 했다고 인정을 하는 개인에게 아파트를 한채씩 무료로 주며 공훈이 있는 자이기에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다. 이에 어떤 공훈자는 정부에서 아파트를 3, 4채를 무료로 포상을 받은 자도 수두룩하다 한다. 예컨데 한국인으로 러시아에 귀화한 빅토르 안(한국명 안현수) 스케이트 선수에게 정부에서 무료로 아파트를 포상한 것과 같은 것이 좋은 예일 수 있다. 이렇게 아파트를 개인 소유화한 사람들은 자자손손 주인이 되고 아파트를 세놓고  편안하게 살아간다 한다. 


 1,200 스퀘어피트의 월셋돈은  미화로 2천불 정도를 받는다 한다. 물가는 비싼 편이며 개인이 자기의 집이나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다면 중산층이라는 생각이다. 그런데 관광안내원 어느 누구도 러시아의 GDP가 얼마냐고 물으면 GDP가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한다. 이에 대한 설명을 부연해도 이 사람들은 러시아에서는 이런 말이나 나라 전체의 개인당 평균 노동생산성, 국민 개개인 평균 소득의 뜻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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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15
러시아 방문기(11)

 

 (사진) 세인트 피터스버그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서... 지하 100미터 이상의 지하철 네바강 속에 쌓인 도시이건만 지하철에 침수는 없다고 자랑하는 러시아인 알렉세이 관광 안내원의 조국애를 알 것 같다.

 

 이번 바이킹 리버 크루즈의 여행 일정은 13박 14일이다. 오늘은 조찬 후에 스카이 덱에서 커피와 차를 마시며 미하일 코르바쵸프의 생애와 그의 업적에 관한 강의로 시작이 되었다. 오전 10시에 스카이 덱에서 관광 안내원 알렉세이의 2시간에 걸친 열강이 있었다. 이제 오늘 저녁을 이곳에서 보내면 유람선은 내일 모스코바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3박 4일이면 바이킹 유람선의 공식 일정은 끝이 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간다. 아니면 개인 일정 계획에 따라 러시아에 잔유를 하며 더 많은 여행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우선 알렉세이의 고르비에 대한 강의를 경청해 본다. 알렉세이는 60이 넘은 러시아 인으로 러시아에 대한 애정이 깊은 것 같았다. 우선 첫말이 자기는 고르비에 대하여 좋지 않게 생각을 하나 내 직업이고 내가 맡은 시간이기에 강의를 한다면서 고르비는 서방을 위해서 일을 한 매국노인데 왜 감옥을 가거나 처형되지 않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일성이다. 즉 고르비는 러시아를 위하여 한 일이 아무 것도 없고, 러시아를 15개국으로 갈기갈기 찢어 놓은 장본인이라며 그의 경력을 장황히 설명한다.


 고르비에 관한 경력을 요약한다면 세계 2차 대전은 러시아인 2천7백만명을 죽게 했다. 그는 모스코바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공산주의 연구 즉 마르크스와 레닌의 연구로 학위를 받았다. 대학 때 남쪽 시베리아 출신 라이사와 2년여의 연애 끝에 결혼을 했고, 1999년에 그녀는 백혈암(루키미아)으로 죽게 된다. 그 후 연방 공산당 리더로 변호사 일을 한다. 이어 1978년 38세의 나이로 그의 지역구에서 공산당 리더로 선출되며, 1980년에 공산당 정식 당원이 된다. 


 전 KGB 리더인 안드로포프가 브레즈네프에 이어 연방 공산당 수상이 됨과 동시에 그 전부터 가까운 친구였던 안드로포프로 부터 농업상으로 발탁돼 재직시 캐나다를 방문했을 때 농가들이 기계화로 농산물을 생산함에 충격을 받는다. 


 이어 1974년 영국을 방문 했을 때 대처 수상으로 부터 자유시장 경제에 대해 큰 영향을 받게된다. 1985년 공산당 서기장으로 임명을 받고 처음에는 자유시장 개방경제를 반대했으나 노동생산성의 저하와 국민들이 보드카에 취해서 알카홀릭이 되는 것을 반대 보드카 금주 운동을 벌였으나 큰 효과를 못 봤고 국민들은 무사안일 무노동으로 임금을 받고 편히 살자는데 치중함으로 1986년 8월 27일 장장 5시간의 연설로 페스크로이카 즉 개혁 프로그램을 발표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86년 4월 26일 체레노바에서 원자로의 사고가 발생 많은 인명 피해는 물론 영국, 스웨덴 등에 방사성 낙진이 떨어지므로 고르비의 정치에 위기가 찾아온다. 이어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89년 2월 15일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패하여 철군을 하게 되며 러시아 군인 2만8천병이 죽게 된다. 이로 인한 냉전의 종식을 미국의 조지 부시 시니어 대통령과 같이 선언을 하게 된다.


 고르비의 개혁은 막대한 재정적자를 기록함과 동시에 230%의 물가급등을 가져오며 소련은 15개국으로 분산됨과 동시에 고르비의 퇴진을 가져온다. 이어 옐친이 등장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근세사의 러시아 역사의 핵심은 고르비는 매국노라는 것이 이 알렉세이의 강의 내용의 골자이다. 이는 현재 국민의 56%가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는 부연 설명이다. 필자의 생각은 고르비가 개혁을 하고 물러날 때에는 다만 1.6%의 지지를 받았으나 현재 44%가 반대하지 않고 있음과 또한 젊은 세대들은 고르비를 지지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첨언을 한다면 다시 러시아가 공산정권을 수립하기 위하여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여야 가능할까 하는 생각을 하며 이제 두 번 다시 러시아가 공산화 되지는 않으리라는 지론을 피력해 본다.


 이어 점심은 러시아 전통 음식으로 푸짐한 식사를 했다. 주요 메뉴는 역시 소시지 치즈 빵, 수프 등으로 차려졌고 양고기가 준비되어 있었다. 러시아 전통적인 빵맛은 일품이라는 생각을 했고, 그 외 치즈와 소시지는 향료가 너무 들어가 짜디 짠 맛이었다. 점심 식사 후에는 관광객들과 식당 종업원 등이 어울려 고고와 큐바 춤 마게하이 등에서 시작 지루박과 부루스 등 한 때 신나게들 즐기는 모습을 보았다. 남이 즐기는 여흥을 보는 것도 관광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오늘은 유람선 밖으로 나가지 않기에 오후 일찍 객실로 들어와 그 저 이 세상 모든 분들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과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나 자신을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이라는 시를 한편 남겨본다.

 

 

감사하는 마음

 

혼자서 왔던 길이라고
내 어이 말할 수 있으리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간 길인데
언제나 가야할 길은 앞에 있기에
어떤 이는 제트 비행기 타고 날고
어떤 이는 벤츠 타고 달리는데
나는 그 어느 것도 잡지 못한 채
부럽지 않는 삶을 살아 왔음을
누군들 알까 후회하지도 않았거늘
그리운 이여
사랑하는 이여
나 이제 말하노라
고난과 숨 막히는 서러웠던 길
서녘하늘과 사람들 틈에서
그렇게 살아온 것도 행운이라고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적요의 달빛으로 내리는 이 밤을
너는 모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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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lee
이유식
58482
10333
2015-01-08
러시아 방문기(10)

 

(지난 호에 이어)

 야로스라브의 일생을 더듬으며 그의 이름으로 붙여진 야로스라브 시를 방문했다. 이날 아침 일찍 유람선에서 버스를 이용하여 한 시간의 거리를 달렸다. 고속도로는 포장되어 있으나 많은 곳이 파손되어 불편함을 느꼈다. 수리를 하지 않은 도로는 상태가 아주 좋지 않았다. 고속도로라 하지만 조국의 산간 국도만큼도 정비가 되어있지 않아 아직 가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도로 양 옆에는 어디에서나 많이 볼 수 있는 자작나무 잎이 노랗게 물들어가고 있어 이 나라의 깊어가는 가을을 알려주고 있었으며 철새 떼들은 계속 북으로 북으로 날아갔다. 아마도 시베리아 추운지역을 찾아가는 철새 떼들이라고 생각했다. 


 차창 밖의 농토는 파종을 하지 않아 수확을 할 수 없는 황무지 같은 유휴 농토가 많은 것 같았다. 고속도로 양옆 길에는 길을 밝혀주는 가로등 역할을 하는 자작나무들이 질서 정연하게 서있음이 인상적이었다.


 이곳 야로스라브를 야로스라발이라고도 하는데 이 시에는 주목할 만한 15개의 돔 교회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볼가강 강변을 끼고 있는 이 아름다운 도시는 유네스코에 등재된 140개의 유명 유적지가 있고, 어마어마한 규모의 침례자 요한의 교회와 엘리자의 교회도 있다.


 특히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오니온식 돔교회이며 그 중에도 엘리자 교회의 내부 장식은 상상을 초월한 아름다움을 과시하고 있고, 여기 저기 박물관의 예술품은 역사적인 성지임을 잘 증명하고 있는 것 같다.


 야로스라브 현인은 1019년에서 1054년까지 살았던 러스 즉 러시아 전신의 왕자로 그는 바래진 즉 바이킹의 후손 발디미어의 아들이었다. 그는 우크라인 키에브에 있었던 수도사인 니스터에 의해 야로스라브 현인으로 명명되었다.


 1010년에 그는 노보고오드라 불리기도 한 큰 도시의 부섭정인이 된다. 그는 그곳에서 사는 동안 야로스라블이라는 도시를 세워 볼가의 야로스라발이라 부르기도 했다. 5년 후 그의 아버지의 죽음으로 맏형 시야토폴크가 정권을 잡으며 아래 3형제를 처형해 시아토폴크는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그는 그의 이름을 딴 러시아 최초의 야로스라브 법정을 선포했으며, 이는 스라빅 땅에 처음으로 세워진 법정이 된다. 그리고 그는 스칸디나비안 나라와 연합을 하며 스위디쉬 왕의 딸과 결혼을 하는데 그녀의 이름을 아린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는 결혼 선물로 라도가 호수와 그 일부의 땅을 그의 부인에게 선물로 주게 된다. 러시아 땅을 선물로 받은 그의 부인은 콘스탄틴 노불과 연합하여 남쪽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해 나가게 된다. 또한 키에브에 성 소피아 교회를 건립, 영광스러운 헤이가 소피아 교회로 명명한다. 


 그리고 그의 아들은 비잔틴 왕의 딸과 결혼을 시킨다. 그의 부인 아린과의 사이에서 출생한 딸 엘리자벳은 노르웨이 왕과 결혼을 시키고 둘째딸 아카타는 영국의 에드와드 왕자와 결혼을 시키며 아들 이자샤라브는 그의 뒤를 이어간다. 그가 죽은 후 키에브에는 다른 자손 이고와 보이얀으로 승계케 한다.


 야스라스라브의 시신은 현재 성 소피아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는 설명이다. 그 후 백년의 역사가 흐른 후 현재 역사가들의 증언은 그의 시신이 네 곳의 다른 나라에 안장이 되어있다는 주장도 한다. 즉 러시아의 야로스라발이 그 한 곳이고, 타아르투의 이스토니아, 우크레인의 터키비아, 폴란드의 야로스라우 등을 말하기도 한다. 2010년의 야로스라브의 밀리온이어 축제라는 영국의 영화에서 야라스라브에 관한 일생을 엿볼 수 있다는 빅토리아 관광안내원  의 설명이다.


 이어 이 곳 야로스토바 시에 도착한 관광객들은 전통 시장에서 음식을 테이블에 전시하고 마음껏 먹고 마시는 시간을 가졌다. 러시아 치즈와 소시지는 기름이 너무 많은 것 같고 짠 맛의 향료가 너무 들어가 있는 것 같아 필자의 입에는 맞지 않았다. 시장내의 각종 점포의 물품은 조국의 재래시장과 비슷한 듯 했으며 관광객을 이용한 시장이라 그런지 물건 값은 고가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러시아 농촌에서 생산되어 직송된 싱싱한 농산물을 접할 수 있었으며 시장 밖으로 나와 좁은 골목을 다녀보니 꼭 조국의 재래시장의 축소판 같았다.


 길거리를 지나다가 점포 쇼윈도에 진열된 양복 색깔이 마음에 들어 안으로 들어갔더니 한가하기 그지없고 주인과 간단한 대화로 가격을 물었더니 캐나다의 3배 정도 비싸 놀랐다. 캘거리의 제일 유명한 신사 양복점인 해리로쟌 점포의 가격은 캐나다화 천불이면 사는 옷을 US달러 4천불을 달라해 깜짝 놀라서 도망을 치다시피 나왔다.


 이어 이 곳 옛 성주의 집을 방문하는 마지막 일정에 임했다. 성주의 따님이 나와서 성주의 집 내부의 모든 장식품과 예술품을 방마다 돌면서 직접 설명을 해주며 친절히 환대를 해주었다. 


 재미있는 것은 마지막 홀에서 5중주의 관현악단이 차이코프스키의 클래식 곡을 연주하며 관광객을 열렬히 환영한다는 인사말을 해주었다. 연주가 끝나자 옆에 있던 남자와 여자들이 관광객을 찾아와 넓은 홀에서 춤을 추자는 것이다. 우리 백여 명의 관광객은 클래식한 음악에 취해 있는데 춤까지 추자니 황홀의 극치이었다. 


 이 어쩐 일인가 경천지동할 일이 발생했으니 즉 이곳 성주의 딸이 나에게 와서 춤을 추자니 이 촌놈 정신이 아찔 다른 사람과 추라며 사양을 했더니 두 번 세 번 춤을 추자한다. 어쩔 수 없이 이 여인의 손에 이끌려 춤을 추었다. 그러고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왔는데 두 번째 곡이 울리며 또 다른 여인, 셋째 딸이 와서 춤을 추자한다. 나 참 여기 백여 명의 관광객이 있고 나는 지금 막 춤을 추었기에 정중히 사양을 한다며 거절을 했다. 그런데 상관없다며 다시 손을 잡고 홀 안으로 끌어들인다. 이어 왈츠 춤을 추었는데 나는 춤이란 것을 배운 적도 없고 또한 춰보지도 않았기에 진땀을 흘리면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유람선으로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마누라 나 인기 좋지, 백여 명의 코 크고 키 큰 서구인들 보다 내가 더 멋있는 남성이 되었으니 러시아 여인들은 사람을 제대로 알아본다”고 약을 올렸더니, 이 무슨 말인가 “나도 러시아 남자가 와서 춤을 추자해서 추었다”며 머쓱하게 했다. 우리는 서로 버스 안에서 깔깔 웃어 보았다. 이렇게 오늘도 하루해가 저물어 갔다. (다음 호에 계속)

 


 

(사진) 야로스라브 시장에서 러시아 전통치즈와 각종 음식물을 맛보며 유람선 주방장 토마스와 유람선 매니져와 환담을 하는 필자(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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