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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동원 단상(斷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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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동원 단상(斷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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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odongwon
여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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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2
‘눈물’의 언어학

 


 
조물주는 왜 웃음과 울음이라는 양면성의 감성을 선물로 주었을까? 그렇다. 선물이다. 웃음이야 반가운 선물이라 쳐도 울음은 천만에 사양하고 싶은데, 슬플 때 눈물로 풀어낼 수 있다는 건 역시 고마운 선물이다. 그렇게 눈물은 말을 숨긴 감성의 폭포수다.


실험실에서 유전인자(DNA)를 아무리 분석해봐도 웃음이 만들어 내는 얼굴근육 주름 한 가닥의 그 물리적 움직임과 눈물 한 방울의 그 화학적 반응을 밝혀낼 수 있는가? 


전자현미경으로 겨우 보인다는 작은 난정자 DNA 속에 웃음과 눈물이라는 감성까지 포함된 신비에 감탄하며 이 글을 쓴다. 


눈이 마음의 창이라면 눈물은 그 창에 비친 마음의 언어이다. 그래서 눈물의 빛깔로 슬픈 눈물인지 기쁜 눈물인지 아니면 거짓 눈물인지를 읽을 수가 있다.


사내가 시도 때도 없이 킬킬대고 질질거린다는 건 아무래도 머시기 하지만, 옛말에도 사내 대장부는 웃음이 헤퍼도 뭐하지만 눈물은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와 나라가 망했을 때면 족하다 했다. 


아이와 여자는 눈물이 많다. 아이의 눈물은 부모관심 끌기 무기이고, 여자의 눈물은 상대 짝 관심 끌기 무기인 듯 남자는 여자의 눈물에 약하여 단번에 안아주고 싶어지니 사랑 끌기 충분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수단임이 분명하다. 


어느 영화를 봐도 눈물 흘리는 쪽은 여자이고 남자는 안절부절 눈물에 굴복 당하고 있다. 


종교집회에 가보면 눈물은 아이와 여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내도 똑같이 줄줄 흘리고 있다. 기도하며 울고, 간증 듣다 울고, 기뻐서 울고, 슬퍼서 울고, 회개하며 울고, 가히 눈물 바다다. 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 성령충만 은총이라며 운다. 


미치고 환장할 지경에 통곡으로 토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시원하겠느냐 만 응어리가 속으로 엉키어 들면 병이 된다. 이 속앓이를 X-ray로 보면 아마 까만 뭉치로 보이지 싶다.


이 속앓이는 요즘 유행어로 스트레스다. 마음을 풀어내지 못한 답답증이다. 살풀이 춤사위로 한바탕 풀어버리면 몽땅 빠져나갈 것만 같은데, 술 담배도 못하고, 남과의 어울림도 서투니 응어리가 가슴앓이로 뭉칠까 겁이 안 나는 건 아니나 숨을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값지다며 살고 있는 터다. 


한데도 그사이 나도 모르게 속앓이가 가슴이 아닌 머리로 뭉쳤는지 40, 50대 10여 년간 두통에 시달려 매일 ‘타이레놀’을 복용할 정도여서 의사를 찾았더니 너무 틀어박혀 있어 그러니 남과 어울려 바깥생활도 좀 즐기며 살라고 충고한다. 


그러던 어느 날 거짓말 같은 한 사건을 만나게 된다. 이유도, 조건도 없이 그냥 분위기에 말려 몸 속의 물기란 물기를 모조리 퍼 올릴 것만 같은, 내 생애에 전무후무한 울음을, 아예 통곡을 한나절, 또 그 다음날 한나절을 펑펑 울었다. 술이 술을 마시듯 통곡이 통곡을 부르고, 눈물이 눈물을 퍼 올려 마구 쏟아냈다. 


그렇게 먹지도 자지도 않고 울고 나니 내 자신이 낯선 듯 멍해져 있었다. 머리가 횅하니 비고 내장이 텅 빈 듯 심신이 그렇게도 맑고 가벼울 수가 없다. 모든 것이 예뻐 보이고 용서되고 지난 잘못들이 부끄러워진다.


그날 이후 30여 년 오늘까지 ‘타이레놀’ 한 알을 거짓말처럼 찾지 않았으니 그 약값만도 얼마겠는가? 주위에선 성령 받았다 종교적 해석을 성급히 내리는 이도 있으나 종교(믿음)가 없는 나는 우선 약을 복용 안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다. 엄청난 눈물을 쏟아내는 동안 스트레스 응어리인들 삭지 않고 견디랴, 라는 것이 나의 진단인데, 나의 주치의도 동의해 주었다. 


머리가 아파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었을 터이고 통곡이라는 수단에 의해 말끔히 풀어낼 수 있었다면 이 또한 이유가 있을 터,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으나 많이 울거나, 많이 웃거나, 많이 땀을 흘리거나, 많이 똥 오줌을 싸면 심신이 후련해지고 기분이 가뿐해지는 이런 경험으로 진단해보면 어떤 이치가 분명 있을 터이다. 넣기(입력)와 내보내기(출력)의 균형질서라는 우주적 자연본질(습성)이 그 해답이 아닌가 짐작을 해본다. 


넘나드는 이치, 차면 넘치는 이치, 먹고 싸는 이치, 피고 지는 이치, 결국엔 낳고 죽는 이치의 경지, 이를 자연 신진대사라 해두자. 그런데, 이 신진대사를 눈 여겨 보면 또 재미있는 형상을 발견하게 된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낳을 때와 죽을 때의 그 시작과 마무리 때의 형상이 달라도 너무 달라 있다는 것이다.


음식과 똥, 아이와 노인, 새싹과 낙엽 등, 먼저 것은 신선하고 나중 것은 추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우주만상에 이유 없이 있는 것이 있는가? 분명 거기엔 까닭이 있을 터이다. 예쁘면 예쁜 이유, 추하면 추한 이유, 조물주(우주본성)의 주도 면밀한 의도가 내 좁은 소견에도 살짝 보인다. 돌고 돈다는 뜻이다. 헌것은 새것을 위해 제물이 되라는 뜻이다. 헌것은 미련 없이 썩어 사라지라는 뜻이다. 썩어 냄새 풍겨 미련 없이 정 떼어 땅에 묻혀 새싹의 밑거름이 되라는 뜻이다. 돌고 돌아 제자리 찾아 원위치 질서라는 새 출발의 밑거름이 되라는 뜻이다. 


이것이 자연의 신진대사다. 그 과정의 한 요소에 눈물의 역할이 담당했을 뿐이다. 해서 웃고 싶을 때 웃고, 울고 싶을 때 실컷 울어라! 내 경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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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odongwon
여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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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3
성지 그리고 우상

 

 

지구상에 성지라는 곳이 있다. 하늘(神)이 임한 성스러운 땅이란 의미를 가진 곳이란다. 그런 곳이 되려 종교의 이름으로 피의 시궁창이 되고 있다면 스스로 비종교적 모순에 빠져있는 꼴이다. 아니 이미 종교임을 포기한 곳이다. 내가 이해하는 하늘 님(절대가치, 궁극실재)은 그런 곳에 머물지 않는다. 진작에 떠나셨다.


광활한 우주천지에 하필이면 지구촌 한곳이 3종교의 성지가 된 것부터가 비극이지만, 종교의 열린 마음들이라면 충분히 함께 가꾸며 공유할 수 있을 텐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는 우상타파라는 이유를 내세워 자신의 역사와 문화를 거부(파괴)하는 덜된 사람들도 있다. 우리의 시조인 단군과 우리 문화 유물인 장승을 자꾸만 한 종교의 대립적 우상으로 보려 할까?


내가 이해하는 종교는 신심(信心)이 깊어질수록 마음은 열리고 시야는 밝아져 편협에서 벗어나 만물만사를 포괄적으로 보는 평정심(平正心)일 텐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어느 목사의 자서전을 읽다가 “부처상을 불태웠다.”라는 대목에서 책을 덮어버린 일이 있다. 그때 나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기독교에 접근하려고 할 때이고, 불교를 믿는 입장도 아니었는데도 그 편협성에 아연했다.


종교마다 사랑을 말한다. 그러나 그 사랑이 자신의 종교 울타리 안에서만 효력을 내는 편협성에 갇혀있다면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다. 아니 그 집착의 포로가 되어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안타깝게 한다. 


나 있으니 너 또한 있는, 모든 것이 더불어 함께 있는 쉬운 이치가 어떤 교리에 빠지면 왜 부정이 되어야 할까? 아니 왜 부정이 돼버릴까? 감람나무뿐이겠는가? 보리수도, 소나무도 있는 것. 백합만이 피는가? 연꽃도, 진달래꽃도 핀다는 사실을.


그리고 꽃이 좋다고 세상 온통 꽃으로만 뒤덮을 수는 없다. 나무도 풀도 자라야 하고, 짐승들도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한다. 예쁜 자식도 자라야 하고, 미운 자식도 자라야 한다.


 나는 조국을 사랑한다. 그렇다고 세상에 한국이란 나라만이 달랑 있다고 치자. 애국할 마음이 나겠는가? 열국이 있기에 상대가치로 내 나라가 귀해보이는 것. 다양함 속의 조화, 이것이 우주의 섭리이고, 질서이며, 아름다움이 아니겠는가.


단군시조는 기독교의 하느님과 맞서는 우상이 아니라 우리역사를 받쳐주는 뿌리이며, 장승은 금송아지 같은 우상이 아니라 우리민족의 삶 속에서 함께한 전통예술문화 유물인 것을.


선민, 이방인, 우상이니 하는 용어들은 일상 우리말에서는 생소한, 여호와라는 입김에서 온 차별화의 중동산(中東産) 용어들인데, 종교의 용어치고는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감을 주긴 해도 종교치고 남의 종교를 곱게 보는 종교가 세상에 있는가?


이런 용어들로 무장된 종교인들이 비종교적 투쟁 일변도로 가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할는지 모른다. 


5천년 문화로 굳어진 우리적일 수밖에 없는 많은 것들이 비기독교적이라 해서 파괴되어야 할 우상이라면 문화 전체가 상처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우리문화가 샤머니즘과 무관하다 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형종교의 교리에 의해 전통문화 전부가 부정(깨부술)되어야 한다면 이보다 더 잔인한 모순은 없다. 


전통문화란 논리를 뛰어넘은, 비합리가 합리가 되는,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이 우리(민족)의 자산이며, 지혜이고,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참 종교인이라면 이건 되고 저건 안 된다는 편가르기 식 옹졸한 속단에 앞서 원수까지도 이해로 보듬는 종교적 고민의 과정이 필수라 여겨져서도 그러하다. 


우주만상은 서로가 배타적 맞섬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개가 제 몫으로 있으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보완적 관계로 얽혀 있는 오케스트라, 모자이크 같은 통일적 개념으로 바라보면 풀 한 포기, 개미 한 마리, 돌멩이 하나가 예사로 보이지 않을 것 같아서 더욱 그러하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데, 혹 비딱한 얄궂은 시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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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odongwon
여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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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1
창조론, 진화론 그 틈새논리

  
 
창조론, 진화론이 논(論)을 달고 있는 걸로 봐 아직은 그 어느 쪽도 절대진리가 아닌 듯하니 그 논(論) 틈새에 끼어 감히 내 생각을 논(論)해보고자 한다.


과학(힘. 시간. 빛. 소리. 냄새. 모양)과 미학(美學)과 정서(情緖)가 생(生)과 사(死) 사이를 간섭하며 더 좋게 되려는 생명체의 모든 과정이 우연한 습성인가? 아니면 창조의지의 결과물인가? 


하긴 솔직히 창조론을 들어봐도 억지 같고 진화론을 들어봐도 역시 모호하긴 마찬가지니 내 틈새논리가 무엄지경은 아닌 듯하다.


 태초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6일에 걸쳐 우주를 창조하실 때 날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만족해 하셨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다윈이라는 학자가 나타나 토를 달기 시작했고, 지금은 그쪽으로 많이 기울고 있는 듯하다.


외적 힘에 의해서건 내적 힘에 의해서건 우주라는 만물 만상이 생겼다는 것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어떤 필연적 자연의 속성이 있었을 텐데 그 속성(? 에너지)이 참으로 궁금하다.


영원히 숨을 쉬는 생명체의 연속성을 가능케 하는 힘의 원천이 과학이 되든 신학이 되든 그 신비엔 변함이 없다. 


내가 엄마 뱃속에서 잉태되면서 시작된 맥박의 박동이 마치 기름의 힘으로 돌리는 자동차 엔진처럼 죽을 때까지 뛴다는 힘의 원천이 신비함이고, 나아가 내 심장의 박동이 내 죽음으로 소멸된다 해도 씨앗이라는 매체의 연속성에 의해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서 대를 이어 조금씩 변화를 하며 계속 뛴다는 사실이 너무도 신기하다.


언제부터인가 시작된 생명체가 멈추지 않고 조금씩 변화를 하며 숨을 쉬며 이어나가는 힘(과정)이 그래서 내 보기로는 진화적 속성으로 창조 되었다는 결론이 된다. 


우주적 시간 속 어느 순간 만물 만상이 등장, 그 중 생명체라는 회한한 물체가 지구라는 땅에 생겨(등장) 삶과 죽음을 반복하며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는, 씨앗(죽지 않는 생명체)이라는 매체에 의해 반복하며 유전적 종족이음을 시간 속에서 역사를 만들며 존재하고 있다는 것, 이를 혹 진화라 하고 혹 창조라며 논란이 일고 있긴 하지만 생명체 그 자체로 보면 기적이고 경이다. 


그리고 그 종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똑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고, 같은 종(種)끼리 만 연속이음이 가능하고, 타종(他種)과는 불연속적 인연관계로만 얽혀 서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자연절대질서에 나는 감동하고 놀란다. 


이 자연절대질서를 주관하는 힘의 근원이 어디로부터 서 인지는 내 좁은 소견으로는 짐작도 못하나 다만 머리 숙여 순종할 수밖에 없다. 해서 종교의 이유들이 이해된다.
종자라고 하는 작은 씨알 속의 유전인자가 갖고 있는 특성들(모양과 성질과 영원성)을 현대과학이 아무리 분석해 본들 내 웃을 때의 근육의 움직임과 슬플 때 나오는 눈물 한 방울의 의미를 알아낼 것 같지 않다.


그 좁쌀 같은 작은 씨알 속에 담겨 있는 모든 속성(사랑, 미움, 슬픔, 질투, 용서, 이해, 욕망, 절망) 등, 그리고 모양, 색깔, 냄새, 소리 등, 그 많은 유전적 내용물들을 내포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암(-), 수(+)가 짝을 만나 잉태라는 사건을 통해 새끼줄 꼬이듯 얽혀 이어나가는 연속적 생(生)의 과정이 우연의 속성(버릇)이라 하기에는 너무도 치밀하고, 연속적 변이에 의한 도태의 과정을 거쳐 진화되는 버릇(성질)이라기에는 역시 너무도 신비하다. 


이 신비함을 종교라는 방정식에 대입해 보면 신의 개입이 상상 되는데, 그래서 나는 모든 생물은 진화 되게끔 창조된 것이 아닌가 상상하고 있다. 


수 억만년 동안 환경에 적응, 더 나은 삶의 조건에의 도전에 의한 변이와 도태를 거치며 오늘에 왔다면 분명 태초와 지금과는 뭐가 달라도 달라졌을 터이니 말이다. 


기독교적으로 보면 성경과 그 영감성, 그리고 무오성이라는 절대성에 진화론은 씨도 먹히지 않을 것은 머리(과학)가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조론과 진화론은 철길같이 끝없이 론(論)으로 대립될 수밖에 없는가 보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창조론과 진화론에서 손잡을 수 있는 한가지 사건(조건)이 내 머리를 스친다. 그것은 미학(美學)이라는 정서다.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니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스스로 창조하시면서 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독백이다,


 더 편리하고 더 보기 좋은 방향으로 변화된다는 진화론 자의 말대로라면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는 비교상대어와 일맥상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절대자 자신의 창조에 굳이 “보기에 좋다”라는 비교상대어를 사용하셨을까? 절대자 스스로의 작품에 좋다 나쁘다라는 비교상대어가 되려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가? 그렇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다. 


바가지 하나를 만들어도 예쁘게 만들고 싶어하는 농부의 마음에서 일곱 색 곡선으로 수놓아 하늘에 예쁘게 걸게 한 절대자의 속 마음을 나는 훔쳐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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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odong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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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31
종교와 전쟁

 
 
인간들은 왜 전쟁을 밥 먹듯 하는가? 더욱이 종교와 전쟁은 너무도 어울리지 앉는 어색한 궁합인데 그 쪽에선 보편적 가치이듯 일상의 뉴스 원이 돼버리듯 하다. 


물론 지구촌 사람 사는 곳 어디에서나 종교가 있고 그리고 전쟁이 있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구약시대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동 하면 종교와 전쟁이 겹으로 연상되니 참으로 희한하고 모를 일이다. 


성경 구약(중동의 역사?)을 읽어보면 중국소설 ‘삼국지’를 닮은 신(종교)이 개입된 선민과 이방인간의 전쟁사(戰爭史)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사랑과 화평을 노래해야 할 “찬송가” 에 십자가 군병, 군기, 행군나팔소리, 마귀와 싸우자 등 군대 군가 같은 노래 소리가 왜 높은지?


내가 아는, 상식적 종교의 대의는 사랑과 평화다. 남을 저주하는 일이 아니라 사랑하는 일이다. 그래서 목적이 제아무리 숭고하다 해도 전쟁(살상)의 수단만은 비종교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내 믿음(생각)이다.


그래서 나는 성경구약을 읽다가 창세기 출애굽기에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스라엘인들이 강을 다 건너자 말자 추격하는 애굽 군(사람)을 수장, 몰살해버리는 장면에서 몸이 떨려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어 덮어버렸다. 


살상의 전쟁사가 어찌 성경(종교)일 수 있는가라는 의문(분함)에서다. 그들 애급병사 하나 하나가 무슨 죄가 있는가? 명령에 죽고 사는 병사들이 무슨 죄인인가?


그래도 내가 기독교에 입문하여 50여 년 겉으로는 신자인척 교회에 다니고 있는 불가사의 한 이유 중 한 가닥은 예수의 산상수훈에 반해서다. 거기에는 미움이 없고, 살상이 없고, 원수(적)가 없고, 사랑과 용서와 긍휼이 있을 뿐이다. 몇 절을 옮겨보자.


“가난한자, 애통한자, 온유한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마음이 청결한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 임이요.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벗어주고, 너와 오리를 가자 하면 10리를 동행해 주고, 네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행위를 왼손이 모르게 하라” 


더 이상 무엇을 보탤 것인가? 여기서만은 종교와 전쟁이 연결이 되어지지 않는다. 끼여들 틈이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촌은 흙과 물과 공기와 생물이 함께 더불어 어울러 살아가는 터전이다. 흙이 없으면, 물이 없으면, 공기가 없으면 생물이 살수 없고, 식물이 없으면, 동물이 없으면 사람 또한 살수 없는, 만물 만상이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인연적 관계로 얽힌 공생의 터전이다. 


한 생각만을 위한, 한 누구만을 위한, 한 나라만을 위한, 한 족속만을 위한, 한 종교만을 위한, 특히 인간만을 위한 터전은 분명히 아닐 터이다. 선민? 웃기지 마라! 내가 아는, 만상만물을 다스리는 하늘은 그런 좀생이는 참말로 아니다,


감정의 동물인 사람 사는 곳에 문제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있다. 그러해도 그 감정을 추스를 수 있는 슬기 또한 충분히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해하고 용서하고 반성하고, 그리고 서로 손 잡고 문제를 풀 수 있는 슬기 말이다. 종교가 있기 때문으로도 더욱 그러하다. 종교=사랑이다


 왜 서로 싸우는가? 왜 서로 죽이는가? 서로가 살기 위해서인가? 서로가 죽기 위해서인가? 아니다. 참으로 아니다. 남을 죽이면 나도 죽는다. 모두가 함께 사는 길은, 한 깃발만을 정의라는 이름으로 고지에 꼽는 제국주의적 만용의 옷을 벗고 만국기가 한 높이로 하늘에 나부끼는 숭고한 UN 이념과 올림픽 정신과 적십자 정신을 닮은 만인 만국이 함께 손에 손잡고 사랑의 노래, 평화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 지구촌 만만세라고---!!!


우리의 남북 통일도 그렇게 곧 오리라 나는 믿는다.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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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5
종교와 과학 그리고 미학

 

 

우주만상의 형상과 운행을 보면 그 신비로움과 그 정교함에 옷깃을 여미게 되고, 그 미학에 나는 취한다. 


그 신비로움이 종교적이라면, 그 정교함이 과학적이고, 그 미학이 너무도 정서적이다. 그 형상과 운행이 신비 아닌 것이 없으며, 그 정교함의 과학적 기능엔 빈틈이 없고, 들꽃 한 송이에도 그 꽃이 감당해야 할 미학적 분위기로 피어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게 바로 만물만상이 영원한 날까지 서로가 인연적 관계로 얽혀 살아갈 끈끈한 힘(眞善美)이 아니겠는가? 성경 창세기에도 하늘 스스로 자기의 창조물을 날마다 보시고 그때마다 “보기에 좋구나!”자찬하고 있다. 


내 눈에도 만물이 빈틈 없는 과학 그 자체로 보이며, 너무도 예술적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셨다고 하시니, 창조주는 슈퍼 과학자이시고 예술가이심이 분명하고, 창조론과 진화론은 과학적으로도 의좋은 형제가 된다. 


우리 집 앞 크레디트강변 따라 길게 펼쳐져 있는 공원길을 매일 아침저녁 우리 집 개(통키)와 함께 걷다 보면 별별 동식물들의 생멸의 과정(過程)과 의지(意志)가 보인다. 그 과정의 뒷받침엔 과학과 예술이 있고, 그 자연의 의지에선 어떤 힘이 느껴진다. 


모든 동물이 입으로 먹고 밑으로 싸는 모양세가 너무도 과학적이고, 들꽃 한 송이에도 그 미학적 구도와 색상이 그것을 볼 상대 이웃들의 마음까지 읽고 있는듯한 자연의 정서적 교감이 너무도 신비롭다.


둥근 해와 달이 하늘에 떠 있고, 일곱 색 곡선으로 무지개가 공중에 수놓아 걸려있으며, 산과 나무들이 완벽한 3각 대칭미학으로 안전 감을 주고 있는 이들 신비로움이 종교적이라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힘의 균형이 과학적이다. 이게 예삿일인가? 


나뭇잎배열이 한 잎만의 입장이 아닌 전체 입장이 고려된 상생의 배려에 감탄하고, 해바라기 씨의 나열이나 벌집의 구조에서 수학적이고 정서적 지혜가 뚜렷이 보이는, 이 순열적 자연배열(황금분활, 피보나치수열)이 너무도 환상적이다.


땅이 있고 물이 있고 태양이 있으니 생물이 살기에 알맞고, 그 물은 밑으로만 흐르는 것이 상식인데도 높은 나무 위 끝 잎에까지 공급되는 자연의 힘이 너무도 신비롭다. 


그 나무 뿌리는 나무가 자랄수록 굵게 뻗어 나무를 지탱하고 물 공급에 대비시킨 완벽함에 당신은 그래 창조론 진화론이다 따질 생각이 나는가? 코끼리 다리는 그 덩치를 지탱하리만큼 굵고, 황새의 다리는 날기에 알맞게 가늘고 길게 계산된 과학적 설계실력에 감탄할 뿐이다.


산과 나무들이 대칭삼각구도로 서 있는 자연의 안정감과 인간의 기계적 설계에 의해 만들어진 자동차와 그 차를 몰고 가는 나라고 하는 인간이 똑 같이 대칭미학으로 되어 있다는 까무러칠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입, 코, 배꼽처럼 하나짜리는 가운데 있고, 눈, 귀, 손발처럼 두 개짜리는 어김없이 대칭미학으로 있는데 반해 내부 내장들은 미학과는 상관 없이 기능적으로 위치해 있다는 사실과 사람이 만든 자동차를 살펴보면 겉은 사람처럼 완전 대칭미학인데 반해 속 엔진 부분 뚜껑을 열면 인간 내장처럼 기능적으로 놓여져 있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하지 않은가? 


이렇게, 자연의 설계와 인간의 설계가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래 창조론이다 진화론이다 다툴 생각이 드는가? 


음(女)과 양(男)이 부딪쳐야 생산이 가능하다는 사실과 ‘+’, ‘-’ 가 부딪쳐야 열(에너지)이 생긴다는 이치와 원심력과 구심력의 균형질서가 우주질서의 원동력이 되어 있다는 과학적 상식만으로도 창조론, 진화론이라는 우론(愚論)이 너무도 유치하지 않은가? 논(論)으로 다툴 여력이 있다면 명품 지구촌을 지키는데다 관심을 돌릴 일이다.


그렇다. 뇌, 눈, 코, 입, 귀, 살갗으로 우주만상(판단, 색깔모양, 냄새, 맛, 소리, 느낌)에 대비시킨 과학적 기능이 완벽한 걸작품들을 인간 스스로가 오염시켜 걸레로 만들고 있는 죄값이 더 두렵고 무섭다.


시작이 있었다면 시작 이전이 있었을 터이고 끝이 있으면 끝 이후가 분명히 있을 터인데, 해서 우주는 애초에 그 시작도 없었고 그 끝도 없는 무한 변화의 연속과정이며 그 과정 속에서의 “나”라는 세포개체는 무한 변화과정에 영원히 꼬여나갈 인생 새끼줄 속의 한 가닥 지푸라기 역할의 존재인 것을.


종교가 과학을 나무라고, 과학이 종교를 나무란다 해서 얻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어차피 우주 그 자체가 과학적이며 신비인 것을.


주위환경 여건의 성숙으로 오는 진화는 그 자체가 일종의 자연질서인데 반해 인위적 변화는 공해적 퇴화로 나타난다. 


같은 이치로 종교가 우주자연질서에 부합 내지 순응할 때는 진리의 길이 되지만 우주적 질서를 무시한 인위적 조작이 되면 인간성 파괴라는 부패의 온상이 될 뿐이라는 내 생각이 유치한가? 당신은 저 사이비 종교들의 시궁창 모습에서 무엇이 보이는가?


해서 내 보기엔 지금 지구상(주로 중동)에서 종교의 이름으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전쟁과 살인은 비 창조(종교)적이고 비 진화(과학)적인 모순의 산물이다.


그래서 탄생과 사망은 자연순환 절대순리이니 여기엔 인간의 어떤 간섭도 범죄적 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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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2
썩어야 산다

 

 

 뒤뜰 거름통에다 쓸모가치가 없는 잡초, 낙엽, 음식찌꺼기들을 담아 일년을 썩혀 거름(퇴비)을 만들어 텃밭농사에 대비한다. 거름을 안준 농사는 지으나마나 헛농사다. 농사엔 흙과 씨와 거름과 그리고 정성(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만상에 이유 없이 존재하는 것이 있는가? 가을에 낙엽이 지는 것은 다음에 올 생명을 위해 썩어주기 위해서이다. 


밀알 하나가 죽어야 몇 배 열매를 맺는다고 성경에도 쓰여있듯, 모든 것은 죽어 썩어주어야 새싹이 산다. 죽되 철저히 썩어야 땅이 살아 다음 생명체에 죽음 값을 다한다. 


죽되 썩지 않으면 그대로 있을 뿐이다. 그냥 그대로 있을 뿐이라는 그것 자체가 토양을 오염시키는 주범이 되어 죽음 값을 다하지 못하니 원죄는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싶다. 


이브가 사과를 따먹은 죄 값으로 죽음이 있게 되었다고 하니 나의 이론대로라면 되려 이브의 행위로 말미아마 원죄가 속죄 되었다는 말이 된다. 괴변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내 눈엔 모든 것은 죽어 썩되 철저히 썩어주어야 하는 이유가 진리로 보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죽음이 없다면? 그리고 썩지 않는다면? 끔찍하다.


금, 은, 동, 다이아몬드는 썩지 않아 우리 인간 쪽 세계에서는 값나가는 귀하신 몸일는지 모르지만 자연 쪽에서 보면 플라스틱이나 핵 찌꺼기처럼 골치 아픈 원수 덩어리가 된다.


썩는다 함은 박테리아가 있기 때문이고 박테리아가 기생한다 함은 물이 있기 때문인데 생물을 살리는 것도 박테리아가 우글거리는 땅과 물이 있기 때문이니 철저히 살리고 철저히 죽이는 요인은 같은 통속이다. 이는 삶과 죽음이 한 통속이요 사는 것은 죽고 죽어야 산다 함의 증명이다.


물이 생물을 낳고 키우고 그리고 죽은 후 철저히 썩혀 본 위치 흙으로 되돌리고 죽지 않는 씨앗이라는 영원성이 그 흙에서 다시 물을 받아 움을 틔운다. 종교에서 말하는 영성은 영원히 대를 이어 죽지 않아야 할 씨앗을 두고 하는 말 같은데, 아닌가? 


햇빛과 땅과 물과 씨앗은 생명체 영원성의 본체이고 힘이다. 그 힘이 과학이고 종교다. 그리고 그 영원성이 창조의 연속이며 진화의 근본이다. 그래서 진화 없는 창조는 영원성으로 보면 쓰레기다.


창조는 더 좋게 되려는 속성에 의해 아름답게 진화된다. 이 창조 미학이 하늘의 근원이라 나는 감히 생각한다.


생명은 죽음을 담보(전제)로 해서 태어난다. 죽기위해 태어난다 함이 그래서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다시 태어나기 위해 죽는다는 것은 아니다. 나 개인은 건강한 자연을 위해 죽어 철저히 썩어줄 뿐이다. 헛되고 헛된 허무라 말하지 않음은 양보(죽음)라는 지극한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죽음까지 받아드리는 맘, 이것이 자기 완성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늙는 과정이라는 세포의 퇴화를 거쳐 병을 얻어 죽음에 임하고 땅에 묻혀 철저히 썩어 땅이라는 원위치 성분으로 완전무결하게 환원되어 다음 생명체의 밑거름이 되는 순환의 분명한 이치는 절대진리다. 


그래서 사랑은 치사랑이 아니라 언제나 내리사랑이다. 이 내리사랑은 그 어떤 이유도 명분도 끼어들지 못하는 본성적 순수함이기에 어떤 계명에서도 내리사랑에 대해서는 언급이 빠져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은 있어도 자식을 사랑하라는 말은 어색하다. 부모공경은 십계명 명령에 들만큼 윤리도덕이라는 군더더기 부담감을 필요로 하고 남녀간의 달콤한 사랑도 이해타산이라는 계산이 끼어들어 늘 티격태격 물배기 마음싸움이 잦지만 자식사랑은 뭍 짐승들도 다하는 본능적 자연의 순리라 말 자체가 군더더기가 된다.


혹 자기종교만이라는 우상적 꾀임에 빠져 제 교주(종교) 섬김이라는 치사랑을 자연만상 사랑이라는 내리사랑으로 착각, 타살이든 자살(순교)이든 죽음을 밥 먹듯이 종교전쟁을 벌이고 있는 분들을 보면 그래서 보기가 참 딱하다.


종교는 억지로 죽이고 죽는 행위에서가 아니라 자연 순환의 순리적 사랑 관계에서 만이 그 존재이유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씨앗이라는 영원성의 존재에 나의 종교성이 함축되어 있다. 새끼줄에서의 한 가닥 지푸라기처럼…


고려대 양형진 물리학 교수의 말씀으로 끝맺음을 해보자 “태어남과 죽음, 생성과 소멸은 오직 인연의 거대한 그물망 안에서 진행되는 영원한 과정일 뿐이다. 영원히 존재할 수 없다는 바로 그 존재방식이 영원한 삶의 진행을 가능하게 하는 역설의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그래서 무상(無常)은 존재자의 있음을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존재자의 아름다움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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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7
“생명체” 그리고 “나”

 
 
다른 별에도 생명체가 존재할까? 이 물음은 천체생물학자들의 최대 관심사다. 그들은 우주 어디에서나 지구상에서처럼 물과 온도 등 유사한 환경만 주어진다면 생명체의 출현이 가능하다는 가정을 설정한다.


2002년 봄 러시아 생물연구소 학자들과 미 우주국 천체생물학 연구소 학자들이 화성 운석에서 발견한 화석화 된 6억년 전의 “나나 박테리아”는 현 지구상의 박테리아와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면서 이는 생명체의 가능성을 입증하는 것이라며 흥분했다고 한다.


이 기사를 읽으며 나는 여기서 앞 과학자들과는 달리 외계생명체의 유무보다 “생명체”라는 단어의 의미에 더 관심을 갖게 된다. 과학자들의 관심사인 생명체라고 하는 존재 안에 있을 “나”라는 독립생명체는 어떤 가치로 존재하고 있는가가 더 궁금해진 것이다. 


과학자들의 현미경 속의 생명체에는 분명 “나”라고 하는 개체생명의 인격은 포함되어 있을 것 같지 않고, 그저 생명체의 연속성을 지탱해 주는 과정에 참여 된 세포적 기능으로서의 역할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드니 좀은 허전하다. 


한 인격체인 나의 탄생과 죽음이라는 엄숙한 과정도 결국 전체 생명체 군의 세포적 생멸에 잠시(시간) 참여된 세포적 역할일 뿐이라는 것은 허무 그 자체다.


그러나 종교라는 눈은 그 허무를 거부한다. 종교적 의미로 보면 인간 개체는 생명체 속의 세포적 기능 이전에 한 개체로서의 존엄성을 지닌 당당한 인격체라 선언한다.


개체의 인격을 내세우는 기독교나 인간뿐만 아니라 어떤 개체의 생명도 존엄성에서 같다는 불교나 한 목소리로 개체의 실존을 우선시 하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만약 다른 별에도 생명체가 존재한다고 가정했을 때 우리 지구촌 생명체와 어떤 상관관계가 있으며 그것들도 지구촌의 종교와 연대적 관계로 설명이 가능할까라는 의문을 하게 된다. 


물론 우리의 종교들이 우주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한 그들도 같은 종교적 설명이 가능해야 한다. 분명 그들은 우리와 사촌지간일 터이니까. 


그렇다 해도 우주 속에서 보면 좁쌀만도 못한 지구촌의 한 마을을 성지라는 이름을 붙여 전쟁으로 지새며 피로 물들이는 등신짓거리에 내 종교 네 종교로 나뉘어 다투는 유치함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라고 하는 존재는 우주 속 시민(생명체)의 일원이고, 생명체 군의 연속성을 지탱케 하는 모든 조건과 속성들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즉 태양, 물, 흙, 공기. 운동법칙(시간, 공간, 에너지) 등이 생명체의 부속물이 아니라 생명체 그 자체이며 주체라는 뜻이다. 그렇게 땅을 보고 하늘 보니 나를 포함한 우주자체가 살아 있는 거대한 생명체 덩어리로 보인다. 


“산은 산이오 물은 물이로다.”라는 선문답이 안개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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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30
신전

 
 
내가 만약 오늘 백 만불 6/49 복권이 당첨되면 내일 당장 세계일주 관광 길에 오를 것이다. 물론 그 첫 목적지로는 이집트가 기다리고 있다.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그리고 그 많은 신전 답사는 나의 지적 호기심을 유혹하기에 충분하리만큼 가슴 설레는 일생의 꿈이었으니까. 그리고 곧바로 그리스로 건너가 돌기둥만 남은 신전들을 구경한 후 로마로 갈 것이다.


거기서 원형극장과 바티칸을 찾을 것이고, 그 다음으로 유럽대륙에 숱하게 산재돼 있는 중세 고성들과 크고 화려한 교회당 건물들을 둘러보고 인도로 넘어가 그 유명한 타지마할 사원을 꼭 보게 될 것이다. 


거기로부터 쭉 동남아를 거치면서 그 많은 불상과 사원을 구경하고 중국으로 직행, 그 스케일에 압도당한다는 웅장한 고궁들을 두루 구경하고 만리장성에 올라본 후 훌쩍 남미로 날아가 신비에 휩싸인 잉카와 마야문명의 유적지를 답사할 것이다. 


이 모든 유적들은 세계 몇 대 불가사의라는 타이틀 소유답게 엄청나게 크고 웅장하고 화려한 위용으로 나를 위압할 것이다. 아니다. 나는 가지 않을 것이다. 갈 가치도 이유도 없다. 안가는 이유는 간단하다. 착취와, 수탈과, 억압과, 힘없는 민초들의 땀과 피와 목숨으로 이룩된 곳이기 때문이다. 


피라미드와 만리장성의 돌 하나하나는 끌려온 힘없는 민초들의 목숨을 뭍은 그분들의 무덤인 것을. 참으로 아이러니는 구경꾼들이 장송곡이 아니라 행복해 하고 있다는데 있다.


만약 이 지구상에 이 같은 신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신전이라는 유물들과 권력이라는 권위로 남겨진 유산들이 없었다면 세계 관광객들의 발길이 얼마나 허전해 할까? 참으로 웃기는 만화다.


한데도, 이 유물들이 인류문화유산으로서의 값어치보다 돈벌이 관광자원으로 활용, 각광받고 있다는 모순에 나는 허탈해 한다. 


아니, 이 허전한 마음은 다른 깊은 이유에 기인하고 있다. 그 유물들에 얽혀있는 만들어진 동기와 과정의 전설 같은 이야기들을 종합해 보면 하나같이 인류의 삶의 가치(행복)를 높이기 위해서라기보다 신의 권위, 혹은 권력의 권위를 위해 힘없는 민초(바닥 백성)들을 동원하여 채찍으로 쥐어짜낸 피와 땀과 눈물과 목숨(죽음)으로 쌓아 올린 한의 구조물들이라고 하는데 이르면 나는 어떤 배신감 같은 분노에 치를 떨게 된다. 비틀린 시각일까? 과연 그를까?


이 유물들이 고대라는 시대에 마련된 흘러간 역사의 가치관으로 간주하여 이제쯤은 위대한 역사물로 봐 넘길 수도 있는 문제라 해두자, 하지만 오늘에도 권력과 신력의 관행적 버릇으로 현재도 진행형으로 복사판 흉내 내어지고 있다면 21세기 문명사회라는 말은 허울에 불과하다. 아니 달라진 것은 한 가지도(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모든 것은 민초로부터 나오는 오늘의 가치관으로 보면 권력의 권위는 물론, 하늘의 권위도 민초의 권위 위에 있지 않으며, 어떤 권력의 이름으로도, 신의 이름으로도, 조직의 이름으로도 개인(민초)의 의사가 침해 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현대라는 오늘 이 시대에 한 권력자의 권위가 신의 자리에까지 끌어올려져 혹은 동상으로 혹은 기념물로 높고 크고 화려하게 만드느라 허기진 민초의 사역이 강요되고 있다면 컴퓨터가 판을 치는 현대문명사회라는 이름이 도둑맞고 있는 꼴이다.


아무리 신의 이름아래 크리스털 유리로, 온갖 사치함의 극치로 크고 웅장하게 지어 꽃 단장으로 치장한들 인간의 욕심에 불과하며 자기자신에게 스스로 상을 내리는 상징물은 될지언정 낮은 데로 임하시는 신의 집은 분명 아닐 터이다.


그러나 이런 비문명적 구조물들도 또 몇 백 년 후에는 좋은 관광상품으로 둔갑, 외화벌이 역군이 되어줄지 모르긴 하다. 마치 신권, 왕권이라는 이름으로 채찍에 몰려 사역 당한 결과물들인 저 무덤 같은 신전이나 만리장성, 피라미드 같은 유물들이 오늘날 경외와 감탄으로 구경 되듯이.


한없이 자애롭고, 한없이 부드러워야 할 어머니 같은 신은, 그리고 백성의 안녕과 행복을 책임질 권력자는 옛날이나 오늘이나, 서양이나 동양이나 왜 이처럼 이기주의적 무자비성에서 한 발짝의 양보 없이 그렇게도 닮았는가?


내가 상상하는 오늘 이 시대의 하늘은, 그리고 바른 지도자는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으로 믿고 싶은데? 그래서 춥고, 배고프고, 고통 받는 편에 서서 그들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짊어지는 하늘 닮은 분이라 여겨, 절대로 그런 요구를 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되려 헐어버릴 것이라 희망하고 싶은데, 우리의 세종대왕처럼.


오늘 이 시대의 신전(교회당)들도 어김없이 왜 그렇게 크고 화려해야만 하는가? 동상이 왜 그렇게도 많아야 하는가? 바벨탑을 아무리 높인들 하늘 아래 탑인 것을…!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나의 애를 끊나니 

 


하늘에 닿을 크신 충무공의 심경은 어느 한 병사의 퉁소소리, 그 민초의 아픔에 잠 못 들어 하셨고, 예수님의 하늘소리는 산상수훈에서 선포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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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9
성지, 그리고 우상

 

지상에 성지라는 곳이 있다. 하늘이 임한 성스러운 땅이란 의미를 가진 곳이란다. 그런 곳이 되려 종교의 이름으로 피의 시궁창이 되고 있다면 스스로 비종교적 모순에 빠져있는 꼴이다. 아니 이미 종교임을 포기한 곳이다. 내가 이해하는 하늘 님(절대가치, 궁극실재)은 그런 곳에 머물지 않는다. 진작에 떠났다.


광활한 우주천지에 하필이면 지구촌 한곳이 3종교의 성지가 된 것부터가 비극이지만, 종교의 열린 마음들이라면 충분히 함께 가꾸며 공유할 수 있을 텐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 주위에는 우상타파라는 이유를 내세워 자신의 역사와 문화를 거부(파괴)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의 시조인 단군과 우리 문화 유물인 장승을 자꾸만 한 종교의 대립적 우상으로 보려 할까?


내가 이해하는 종교는 신심이 깊어질수록 마음은 열리고 시야는 밝아져 편협에서 벗어나 만물만사를 포괄적으로 보는 평정심(平正心)일 텐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어느 목사의 자서전을 읽다가 “부처상을 불태웠다.”라는 대목에서 책을 덮어버린 일이 있다. 그때 나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기독교에 접근하고 있을 때이고, 불교를 믿는 입장도 아니었는데도 그 편협성에 아연했다.


종교마다 사랑을 말한다. 그러나 그 사랑이 자신의 종교 울타리 안에서만 효력을 내는 편협성에 갇혀있다면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다. 아니 그 집착의 포로가 되어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안타깝게 한다. 


나 있으니 너 또한 있는, 모든 것이 더불어 함께 있는 쉬운 이치가 어떤 교리에 빠지면 왜 부정이 되어야 할까? 아니 왜 부정이 돼버릴까? 감람나무뿐이겠는가? 보리수도, 소나무도 있는 것. 백합만이 피는가? 연꽃도, 진달래꽃도 핀다는 사실을.


그리고 꽃이 좋다고 세상 온통 꽃으로만 뒤덮을 수는 없다. 나무도 풀도 자라야 하고, 짐승들도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한다. 예쁜 자식도 자라야 하고, 미운 자식도 자라야 한다.


 나는 조국을 사랑한다. 그렇다고 세상에 한국이란 나라만이 달랑 있다고 치자. 애국할 마음이 나겠는가? 열국이 있기에 상대가치로 내 나라가 귀해 보이는 것. 다양함 속의 조화, 이것이 우주의 섭리이고, 질서이며, 아름다움이 아니겠는가.


단군 시조는 기독교의 하느님과 맞서는 우상이 아니라 우리역사를 받쳐주는 뿌리이며, 장승은 금송아지 같은 우상이 아니라 우리민족의 삶 속에서 함께한 전통예술문화 유물인 것이다.


선민, 이방인, 우상이니 하는 용어들은 일상 우리말에서는 생소한, 여호와라는 하늘의 입김에서 온 차별화의 중동산(中東産) 용어들인데, 종교의 용어치고는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감을 주는 비종교적 냄새를 풍긴다. 


이런 용어로 무장된 종교인들이 비종교적 투쟁 일변도로 가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할는지 모른다. 


5천년 문화로 굳어진 우리적일 수밖에 없는 많은 것들이 비기독교적이라 해서 파괴되어야 할 우상이라면 문화 전체가 상처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우리문화가 샤머니즘과 무관하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신형 종교의 교리에 의해 전통문화 전부가 부정되어야 한다면 이보다 더 잔인한 모순은 없다. 전통문화란 논리를 뛰어넘은, 비합리가 합리가 되는,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이 민족의 자산이며, 지혜이고,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참 종교라면 이건 되고 저건 안 된다는 편가르기 식 옹졸한 속단에 앞서 원수까지도 이해로 보듬는 종교적 고민의 과정이 필수적이다. 


우주만상은 서로가 배타적 맞섬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개가 제 몫으로 있으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보완적 관계로 얽혀 있는 오케스트라, 모자이크 같은 통일적 개념으로 바라보면 풀 한 포기, 개미 한 마리, 돌멩이 하나가 예사로 보이지 않을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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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05
生 卽 苦(생로병사의 비밀)

 
 
불가에선 생로병사(生老病死)를 피할 수 없는 중생의 삶(生)을 고(苦)라 정의 하고 있다. 이 고(苦)를 극복하기 위해선 열반(해탈)의 길이 있다고 가르친다. 


물론 고(苦)라 정의한다면 정답 같긴 한데, 내 경험으로 감히 말하면 생이 몽땅 고(苦)라고 만은 생각돼지 않는다. 물론 피하고 싶긴 해도 오히려 삶이라는 과정에서 함께 걸어가야 할 동무로 여겨지니 그렇게 미워지지가 않는다.


낳음(生)이 내 의지가 아니듯이 늙고 병들고 죽음(死) 또한 내 의지로 피해지지 않는 삶의 과정이지 몽땅 도매금으로 고(苦)라 생각이 아니 든다는 것이다. 


生(생) 즉 낳음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며,
老(노) 즉 늙음은 추함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이며,
病(병) 즉 아픔은 귀신(악마)의 장난이 아니라 삶의 일부이며,
死(사) 즉 죽음은 죄 값이 아니라 엄숙한 우주적 순환 질서라 여겨진다. 


이것들은 어떤 값으로도 결코 내려놓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삶의 과정(짐)인데 고(苦)라 생각 들면 무거워 오리도 못가 쓰러질 것이다.


나는 죽어가는 사람을 대할 때마다 내가 죽음을 맞을 때의 마음은 어떨까? 궁금해 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죽음에 가깝게 가본, 물론 80살 내 나이의 영향도 감안해서, 내 마음은 이랬다.


약간 두렵다는 생각이 들긴 했으나 그렇다 해서 사(死) 곧 고(苦)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제 내 순서가 왔구나. 내가 산 80해에 남을 위해 한 것 없이 많은 죄(세상에서 말하는)만 짓고 가는구나. 그러나 내 딴에는 최선의 길을 갈망하며 살려는 마음도 없지 않았으나 싶은, 좀은 치사한 마음까지 들긴 했다. 


영혼이니, 천당이니, 지옥이니, 심판이니 하는 죽음 문턱 저 넘어 있다는 저 세상이 전혀 실감되지 않았다. 대신 이제 흙으로 돌아가는 구나. 이 얼마나 깨끗하고 분명한가. 그렇게만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못 본다는 생각에 눈물 나도록 슬픈 마음이야 떨칠 수는 없었지만, 순서에 따라 가야 하는 이 길은 내가 살은 삶의 이유만큼이나 분명한 우주적 질서가 아니냐 말이다.


나도 물론 죽어 지옥은 싫다. 그렇지만 상대적 가치를 모르는, 가치가 없는 절대 좋음만 있다는 천당도 그런 이유로 해서 매력을 못 느끼니 다시 태어남도, 그래서 다시 죽음도 없는, 그냥 죽음 이대로 흙이 되는, 아무것도 없음(無)이 되는 것이 너무도 깨끗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건방 떨고 있네 할까?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있어 80해 삶이 살만했던 것처럼 또 태어나 살고 싶기야 마다할 내 아니지만 내 몫을 다 챙겨먹고 가는 복에 다시 태어나 산다는 것은 남의 몫의 복을 뺐어 먹는 날강도 짓이라 여겨진다.


내가 비워준 빈자리가 있어 세대에서 세대로 닮은꼴로 이어지는 생명체군(生命體群)의 질서, 이 우주질서에 기여하는 길도 되고, 뭐 그렇게 거창할 것도 없는 한번 와서 가는 것만으로 깨끗이 모든 상황이 마무리 되었으면 싶은 맘이다. 


내 삶의 드라마가 끝난 막내린 무대에 무슨 미련이 있어 전생, 현생, 내생, 천당, 지옥이 어떻다 매달리는 모습, 아무래도 구차하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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