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계정 찾기 다시 시도 아이디 또는 비밀번호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여동원 단상(斷想)

yeodongwon
E2A24A5D-9779-4F30-A81A-1E49B838929F
71423
Y
메뉴 닫기
오늘 방문자 수: 11
,
전체: 38,814
문협회원
[email protected]
메뉴 열기
yeodongwon
yeodongwon
77810
23140
2017-03-18
버릇으로 본 한국인 모습

 

 습관성 무의식 반복행위를 버릇이라 하고 그 버릇의 모양새가 곧 그 사람의 모습이 된다. 개인에게는 버릇이지만 지역이 되면 기질이 되고, 나라가 되면 민족성이 된다.


 버릇은 그 지역의 지형과 기후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산악형, 해양형, 반도형, 대륙형, 온대형, 열대형 등으로 말투나 동작이 확연히 다르다. 한국인엔 반도기질이, 중국인엔 대륙기질, 일본인엔 섬나라 기질이 드러난다. 그리고 집안의 버릇을 가풍이라 하고, 학교의 버릇은 학풍이 되고, 군대의 버릇은 기질이 된다. 시대의 버릇이 있고, 동 버릇 서 버릇이 다르고, 유아기 청년기 노년기 버릇이 눈에 띄게 다르다.


 문제는 좋은 버릇이냐 나쁜 버릇이냐인데, 남 버릇엔 눈이 밝고 제 버릇엔 장님이 돼버리니 한국인이 한국인 버릇 보기는 안으로 굽는 손처럼 객관성이 모자라지만 한국을 떠나 산 지 50년에 타국인과의 비교로 보게 되는 한국인 버릇보기를 감히 해볼까 하는데 솔직히 손끝이 떨린다.

 

먹는 모습(버릇)


 이곳 캐나다는 이민의 나라답게 인종전시장이라 사람 사는 모양새로 대충 어느쪽 사람인지 짐작이 되는 건 말이나 피부색에서보다는 동작의 버릇에 묻어 보인다. 우선 먹기가 삶의 첫 조건이듯 먹는 버릇 모습에서 단박에 드러난다. 한국에서 살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밖에서 살며 타민족들의 먹는 버릇에 비유로 나(한국인)의 먹는 모습(버릇)이 거울에 비추듯 확연히 드러나 보인다.


 대부분 타민족이 음식을 먹을 때 입술을 붙여서 먹는데 우리 한국인들은 입술을 벌린 채 이를 드러내 보이며 음식을 씹는다. 한국 방송을 보면 숟갈을 입에 넣고 뺄 때의 입술 동작에서 확인될 것이다. 


 한국인 아내와의 사이에 대학생 아들 둘과 20년 넘게 살며 "그런데예" 하고 경상도 사투리 "예" 자를 말끝마다 붙여 쓰는 방송인 미국인 '하일' 씨의 국수 먹을 때의 모습은 입술을 벌려 후루룩 먹는 한국인의 모습이 아니라 입술로 씹어 먹는 한국인이 보기에는 부자연스런 이곳 서양인의 모습 그대로다.


 그리고 우리의 먹는 모습이 너무 요란스럽다. 삼겹살 먹는 모습은 아예 짐승 같다. 입을 있는 대로 벌려 상추쌈을 한입 가득 넣고 쩝쩝거리며 말까지 하면서 먹는 모습은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그 다음 요란스런 술버릇은 이건 아예 삶을 포기한 사람들 같다. 한국방송을 보면 내 말이 과장이 아니라 단박에 보인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서로 따라주며 퍼마신다. 살겠다는 건지 죽겠다는 건지 한계가 없다. 특히 그 주사 주태는 가관이다. 어른도 아녀자도 순경도 법도 없다. 술 먹은 개라며 관대하다. 아무 데서나 소변을 보고, 소리소리 고함치며 난장판이다. 경찰서 유치장 안에서도 주태는 개판이다. 서양생활 50년에 단 한건도 그런 주태를 본 기억이 없다. 


 그리고서는 세계에는 없는 대리운전이라는 차를 타고 집에 가는, 먹고 마시고 타고 가는 비용을 감안하면 부패공화국의 실상이 적나라하다. 이 모든 뒷거래 피아부패는 주안상 문화가 생산해내는 결과물로 보인다. 한국 방송 프로의 반은 먹방(먹기방송)인데 분명 문제가 있다. 당장에 음식쓰레기 세계 1등 국으로 증명해 보여주고 있다.

 

선거하는 모습(버릇)


 선거로 지도자 뽑기는 민주주의 기본 제1조다. 노동자 인민의 왕국 만들기 공산주의가 100년도 못 가 동구 쪽에서 먼저 무너지면서 첫 번째로 한 행사들이 스스로 지도자를 뽑는 선거였다. 홍콩의 대학생들이 데모한 이유는 자신들의 지도자를 자신들이 뽑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거권을 달라는 것이다. 그들은 비록 영국령 식민교육을 받은 아이들이었으나 민주주의 기본이 선거라는 걸 보고 배워 알고 있었다.


 북한 공산주의는 일족 왕국이니 논의의 대상도 되지 못하지만, 남한은 선거로 지도자를 뽑은 70년 민주공화국이다. 이제쯤은 서방민주선거를 닮을만한데 불행하게도 내 눈엔 조선조 당쟁사(黨爭史)를 보듯 패거리 싸움판 분위기를 많이 닮아있다. 4김(북한의 김까지 포함)이 반도정치를 좌지우지 주무를 때의 모습이 어떠했는가? 어김없이 주안상이 거기에 있었다. 기자들이 3김 시대의 자료를 찾을 때 이름난 요정들이 제일 많이 갖고 있더라 했다.


 선거가 없는 듯 조용히 치르는 캐나다에 오래 살아서일까? 한국 선거전은 전투처럼 보인다. 죽기로 덤비는 고지점령 식이다. 속여서 가든 죽어서 가든 수단이 고려되지 않는 승리만이 목적이지만 청와대는 5년 임기 머슴이 머무는 과정의 미학이 되는 민주의 집이다. 깨끗한 후보가, 깨끗한 선거전으로, 깨끗한 승복에서만이 살 수 있는 집이다.


 한 가문의 핏줄에 의해 대물려 권력이 행사되는 왕정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물론 행운이다. 한국 선거는 너무 요란하고 시끄럽다. 그리고 그 선거전을 조용히 살고 있는 이곳 외국까지 끌고 와 지방색 파벌까지 조장하며 후원회다 뭐다 판을 벌여야 하는지? 나는 절대 반대다. 전 세계 구석까지 찾아 뿌려야 할 한 국민의 세금낭비를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선거는 한국사람이 한국에서만 조용히 치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yeodongwon
yeodongwon
77709
23140
2017-03-12
문화 충격(가는 100년 오는 100년)-원주민들의 수난사

 

 눈을 다른 대륙으로 돌려 타민족들은 어떻게 이 문화충격을 수용(하고) 소화해내고 있었는지 여행을 떠나보기로 하자.


 한국 SBS TV 방송국에서 만든 '몽골리언 루트'라는 비디오테이프를 볼 기회가 있었다. 고대 몽골족이 동북 시베리아를 거쳐 베링해협을 건너 알래스카 북미대륙을 거슬러 남미대륙으로 뻗어 내려간 몽골족의 이동 경로를 따라 답사 취재한 기록물이다.


 여기서 나는 아주 흥미있는 현상을 보게 된다. 베링해협을 사이에 두고 아시아 쪽 시베리아에 살고 있는 '축시족'과 북미 쪽 알래스카에 살고 있는 '에스키모족'의 대조적인 생활상이다. 모습이 형제처럼 꼭 닮은 뿌리가 같은 몽골리안인 두 종족이 원래는 혹독한 추위의 자연환경을 극복하면 각기 특유의 문화를 이루어 나름의 가치관으로 살았을 터이다.


 그런데 지금은 시베리아 쪽 '축시족'은 여전히 옛 생활관습 그대로 순록을 방목하며 살고 있는데 반해 알래스카 쪽의 에스키모 인들은 미국정부의 보조금으로 옛 전통생활 관습을 잃고 소위 현대화된 생활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대조되는 이 두 종족의 생활모습에서 주목되는 것은 현대문명의 이기가 행복의 절대적 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타락의 온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축시족의 생활은 개화 이전의 미개한 모습이기는 하나 그 표정에선 불안 원망 같은 일그러진 모습은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온화함이 온몸으로 풍기는 순박한 모습인데 반해 에스키모인들은 현대(서구)식 생활도구를 갖춘 문화시설의 혜택을 받고 있는데도 그들은 생의 의욕을 잃은 무기력하고 음침한 타락의 모습이었다.


 늘 미소를 담고 살고 있는 축시족을 러시아 인근 주민들이 "미소의 사람들"이라 부른다고 한다. 그런데 이 "미소의 사람들"이 얼마나 더 버티어 낼지는? 아마도 얼음집을 짓고 개썰매를 몰며 사냥하고 고기 잡고 살던 옛 삶의 수단을 버리고 도박과 술과 약물에 취하여 빈둥빈둥 초점 잃은 눈으로 서성이는 에스키모인을 닮을 날이 그렇게 멀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다. 시베리아 개발 바람에 그들도 갈대이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외부의 영향은 그것이 아무리 양질의 것일지라도 준비없는 갑작스러운 유입일 때는 자신의 정체성만 잃게 만들 뿐이라는 예를 우리에게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환경을 극복하며 먹이를 구하는 동화의 과정에서만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부양되는 삶은(먹이든 문명의 이기이든) 스스로 설 수 있는 자립성만 잃게 한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얼마 전 내셔널 지오그래픽사가 제작한 다큐멘터리에서 본 것인데 인도네시아 어느 오지 외딴섬 사람들을 취재한 것이다. 그들은 옷도 신발도, 심지어 밥그릇도 없는 원시 자연인 그대로의 생활 모습이었다. 오늘 이 시대에 그런 곳이 있다니 신기했다. 이 시대가 만들어낸 온갖 문명 이기의 오염의 때가 한 점 묻어있지 않는 곳이 지구상에 남아 있다는 것이 거짓말 같았다.


 20세기 문명의 이기를 누리지 못하고 사는 그들이 불행하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초조, 긴장, 가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맑고 밝은 모습이 순진한 아이들 같았다. 내가 이상으로 하는 하늘의 표정을 볼 수 있다면 아마 바로 이런 모습이지 아닐까 하리만큼 평화스러워 보였다.


 어떤 이유로든 병이 골수에 든 타락의 끝자락까지 간 이 시대의 문명 찌꺼기를 접근시킨다는 것이 어쩐지 잔인하게 보였다. 이 문명의 오염은 삽시간에 그들을 또 하나의 에스키모인 되게 할 날이 머지않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우선 선교를 앞세운 종교 쪽에서 가만둘지 의문이다.


 나는 잘은 모른다. 이럴 때 그들을 나 몰라라 내버려 두는 것이 자비인지, 비정인지를. 서구적 문명의 잣대로 그들의 삶을 간섭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인지 나는 아직 정말 모른다. 하지만 나는 보았다. 축시인들이 결코 에스키모인들보다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행,불행은 문명의 잣대로 재단되어질 수 없다는 것을.


 나는 그래서 바란다. 외부문화의 유입은 외부의 침략적(?) 간섭이 아니라 스스로의 능력에 의한 자발적 유입과정을 밟아 문화충격을 최소화하며 자신들에 맞는 문화를 개량, 창조, 변화시키며 살아주길.


 이것은 지난 20세기 100년에 서구문명이 지구촌에 저지른 범죄적 실수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미숙한 나의 좁은 소견일는지는 모르지만...!?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yeodongwon
yeodongwon
77597
23140
2017-03-08
문화 충격(가는 100년 오는 100년)

 

 
 세계화라는 이름의 함정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밀레니엄 문턱에서 이 글을 쓴다.


 우리에게 20세기는 바로 서양화를 지향한 근대화의 과정이었으며 그것은 반만년 우리 문화를 뒤흔든 문화충격이었다. 


 "20세기 이 땅에 살면서 아직도 구시대(舊時代)의 정신과 물질에 집착하는 민족은 실력이 강대하고 사회문명이 발달한 서방열강들에 반드시 소망할지니 대한인들아 20세기 신국민(新國民)이 될지어다." 20세기 초를 청년기로 살았던 단재 신채호 선생의 호소문이다.


 여기서 내 눈길을 끈 것은 '구시대' '신 국민'이라는 두 단어다. 100여 년 전 그 시대의 지식인들은 구(舊) 신(新)이라는 이분법적 이데올로기의 식으로 무장, 개화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그리하여 우리의 20세기 백 년은 봉건 잔재 구시대 청산이라는 싹쓸이식 '개혁', '개화', '근대화' 가 추진된 대변혁으로 굴러온 돌(서양문화)이 박힌 돌(우리 문화)을 밀어내어 우리적인 많은 것들이 퇴출 위기를 맞게 된다.


 이 근대화(혹은 현대화)란 게 실은 서구화를 의미한다. 우리 것을 후진이라는 이름으로 밀어내고 서구문물을 선진이라는 이름으로 게걸스럽게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우리만의 사정이 아니라 탈 후진을 추진하는 제3의 물결로 전 지구촌을 흔들며 그 진행속도에 의해 국가부흥의 측도로 삼게 된다. 그리하여 정치, 경제, 군사, 교육, 종교, 주택, 의복, 예술, 문학, 풍속에 이르는 전 분야에 걸친, 가히 세계를 한 문화권 울타리로 통일시켜놓게 된다.


 서울에서 아침을 먹고, 파리에서 점심을, 뉴욕에서 저녁을 먹으며 하는 대화에 어떤 이질감도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한심한 것은 이 서구 중심적 백인문화에 동화된 세계화라는 구호를 우리 스스로 입에 올리면서 마치 우리적인 것을 세계에 선보이는 것 쯤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은 우리적인 것만 망가지는 서구화의 입성을 위한 자진 성문 열기 식, 스스로 백기 들고 맞아들이는 환영 구호이며 항복문서인데 말이다.


 무역자유화니, 시장경제니, 문화 보편주의니 하는 그럴듯한 말들이 지구촌 모든 것들이 평등하다는 선심 같으나 조금만 깊이 살펴보면 서구열강의 무력식민지배 형태가 경제 식민지배를 거쳐 문화식민지 형태로 위장된 연속적 식민지배를 의미하고 있는 듯 보이는데 말이다.


 우리 동양문화가 심오하다 하면서도 곰팡이 내를 풍기는 골동품 정도로 대접, 아끼고 사랑하는 측 하는 것을 일종의 유식이고, 사치이고 멋으로 여길 뿐 문화 중심 밖으로 빗겨 놓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형상은 모델로 제시된 이 서구문화가 타 지역으로 옮기기만 하면 서구 본바탕에서처럼 가지런히 깔끔하게 자리잡지 못하고 닮으면 닮을수록 자신들의 미풍양식, 의식, 가치관만 병들고 퇴화할 뿐 겉만 서구화된 허수아비가 되어간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형상을 '문화충격'이라 진단한다.


 서구문화가 아편처럼 나빠서가 아니라 갑작스러운 문화 유입으로 온 문화 소화불량 증이라 진단한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음식도 내 체질에 맞게 적응력을 키우며 먹어야 한다는 뜻이다. 우유가 좋다고 해서 서양인들처럼 마시면 설사만 한다. 서구인들이 자신들의 체질에 맞게 오랜 세월 서서히 가꾸고 다듬어진 문화를 우리가 수정 없이 그대로 짧은 백 년에 수용하다 보니 부작용은 불가피하다.


 외래문화 유입은 대개 달콤하고 자극적인 저질의 것부터가 먼저 선호되고,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양질의 것은 늦는 법, 극도의 개인주의적 이기심과 돈, 섹스, 폭력, 거친 언어가 판을 치는 할리우드 저질 양키문화가 먼저 돌림병처럼 우리를 잠식하고, 준법과 질서와 정직과 검소가 든든한 기둥으로 받히고 있는 유럽문화는 외면당하게 되어 겉은 서양화인데 내용은 천박할 수밖에 없다.


 무릇 문화란, 아니 무엇이나 시계의 시침처럼 움직이지 않은 듯 움직이는 변화의 과정을 밟을 때 충격을 최소화, 내 것으로 피가 되고 살이 된다. 


 지난 100년에 잡스러운 것만 무분별하게 수용한 유년기적 모습을 벗고 오는 100년에는 우리적인 것이 남의 것보다 우수하다는 자랑도 그렇다고 부끄러움도 아닌, 있는 그 모습으로 세계 속의 일원임을 자각, 진정한 세계화의 자세로 임하는 성숙한 모습이면 싶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yeodongwon
yeodongwon
77515
23140
2017-02-24
문패(門牌)와 비명(碑銘)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자 시절 TV 화면에 비친 사가(私家) 한옥 대문에 ‘이명박 김윤옥’이라는 문패가 보였다. 그때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시절에도 ‘김대중 이희호’라 쓰여진 문패가 대문에 걸려있는 TV 화면을 본 일이 있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집 대문엔 체를 살려 쓴 호주 이름 석 자가 새겨진 문패가 붙어 있는데 정작 필요한 집 번호는 없거나 있다 해도 이름 옆에 깨알 글씨로 없는 듯 쓰여 있다.


 반대로 이곳 서양의 집엔 이름은 눈을 닦고 봐도 보이지 않고 대신 집 번호판 만이 달랑 붙어 있다.


 어느 쪽이 정답일까? 세살배기 상식으로도 해답은 뻔한 후자 쪽이다. 문패의 사회적 쓸모는 그 집에 누가 사느냐가 아니라 집을 찾는 이를 위해서 달아놓기 때문이다.


 내가 새 집을 사서 이사 들어오던 날 서둘러 설치한 3가지가 있는데, 집 번호판과 전화기와 편지함이다. 공교롭게도 이것들은 홀로 살 수 없다는 남과의 관계를 의미하는 사회기능의 산물임이 증명되고 있다. 그래서 이름보다는 번호가 정답이 된다.


 산자의 집 문패(門牌)는 죽은 자의 집 비명과는 다르다. 무덤엔 이름으로 충분하지만, 문패는 차량의 번호판처럼 번호판이어야 맞다. 박 서방이 사는 집인지, 김 서방이 사는 집인지는 별 중요하지가 않다. 우체부 등 우리 집을 찾는 이의 눈엔 번호만 보이니 사회 기능적으로 이름보다는 번호가 효율적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편지 봉투에 이름과 주소를 쓸 때는 동서양이 뒤바뀌어져 있다. 동양은 주소가 먼저이고 이름이 꽁무니에 붙는데 서양은 이름이 먼저이고 주소가 뒤에 붙는다. 왜 이렇게 동서양이 다른 이유가 무엇일까? 이 글의 목적이 바로 이것이다.


 서양은 그 집에 사는 개인 하나하나의 값어치가 중하고, 동양은 그 집 가장의 대표성만이 중하고 나머지는 곁다리 취급이다.


 우리 딸이 초등 3학년 때인가, 딸 동무에게서 온 편지를 내가 뜯어 봤다가 큰 홍역을 치른 일이 있었다. 사생활 침해란다. 아무리 어린 자식의 편지지만 부모라 해서 뜯어볼 수 없다는 것이 서양식 개인주의이다.


 이 사회에선 그 집 호주의 이름은 별 중요하지가 않다. 외부와의 접촉은 그 집에 사는 각자의 몫이라 해서이다.


 그런데 왜 비석엔 이름만 있을까? 물론 이곳 묘지에도 주소(번호)가 없는 건 아니나 별 쓸모가 없다. 아는 이만이 찾아오는, 우체부가 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랬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데, 그 남길 이름가치가 쓸모로 가늠된다면 비석을 세워 비명으로 남길 내 이름 석 자 쓸모가치는 개 값일 터이니 귀한 돈만 낭비다. 그 값으로 생전에 맛있는 자장면이나 한그릇 더 사 먹는 것이 채산이 맞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yeodongwon
yeodongwon
77406
23140
2017-02-17
처녀성


 

 

안개 피어서 강으로 흐르고
잠꼬대 구구대는 밤비둘기
이런 밤엔 저절로 머언 처녀들...
갑사댕기 남 끝동
삼삼하구나.

 

-갑사댕기(박목월)-

 


 삼삼한 처녀라는 인간의 꽃이 없다면 세상 얼마나 삭막할까? 꽃망울 터질 듯, 부풀어 필 듯 수줍은 처녀라는 나이, 처녀는 순결의 동의어, 때 묻지 않은 깨끗함의 상징이다. 그러길래 인간의 발이 닿지 않은 곳을 일러 '처녀지' 또는 '처녀림'이라 하고 정복되지 않은 산봉우리는 '처녀봉', 처음 발표되는 작품은 '처녀작'이라 부른다.
 '처녀성'하면 함부로 다를 수 없는 고결함이며, 부드러움이며, 신비로움이며, 호기심의 대상이며, 미지의 비밀을 간직한 견고한 관문의 성이다.


 그 성이 여성에게 생명과도 같은 전설적인 시절이 있었다. 목숨 바쳐 사랑하는 이에게만 그 순결의 첫 관문을 열게끔 허락해주는 의식의 절차를 신성시했던 거짓말 같은 시절이 있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 아니라 적어도 내가 젊었을 때만 해도 그랬다. 인류역사를 백만 년으로 치면 60년 전까지의 백만 년 동안 그랬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의 처녀들에게 처녀성 어쩌고 하면 웃기지 말라 비웃는다. 그만큼 지난 60년은 백만 년과 맞먹는 인류 문명의 지각변동을 의미하고 있다. 그래서 요즘 숫처녀는 천연기념물이라 하고 숫총각은 희귀동물이라 한다던가. 이 말을 뒤집으면 '숫처녀', '숫총각' 그런 단어 자체가 폐기처분 된 웃기는 유물이란 뜻이다.


 보고 듣고 접하는 성(性)의 범람으로 5살에 성을 훤히 알아버린 7살 사내아이가 학교에서 한 반 계집아이에게 어른 뺨칠 진한 뽀뽀를 하다 정학처분을 당했는데, 놀랄 일이 아니라 미소 짓게 한 신문기사가 얼마 전에 났었다.


 이제 인당수 용궁 왕자께서 심청이라는 15살 숫처녀를 구하기 위해선 광고비께나 들여야 할 것 같으니, 아니 천신만고 찾는다 해도 콧대 높아진 심청이의 당당함에 질려버릴 것이다.


 해질 줄 몰랐던 나라 황태자의 권위, 그 또한 옛날얘기, 찰스 황태자가 수줍음 잘 타는 숫처녀 다이애나를 태자비로 맞이했지만 찰스의 바람기에 반발, 너도 하는데 나라고 못할소냐, 천방지축 설쳐도 찍소리는커녕 되레 망신만 톡톡히 당하고 엄청난 위자료만 뺏긴 채 이혼장에 도장을 찍어줘야 하는 세상이니, 심청이가 언제 다이애나를 뺨칠 행동을 보일지, 용궁 왕자께서도 골머리 안 앓으시리라는 보장이 없다.


 15살 숫처녀는 인당수 용궁에서만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선녀도 천사도 처녀야만 했고, 예수님의 어머니도 동정녀(숫처녀)여야만 했다. 어찌 예수같이 고귀하신 분이 죄 많은 남자와의 몸 섞임으로 잉태되랴 해서 마구간 같은 가장 낮은 곳에서 태어나게 했으면서도 그 족보의 씨만은 성결한 성령으로 숫처녀의 몸에 잉태케 한 종교의 깊은 뜻이 그래서 이해된다.


 멀리서 이해를 찾을 것도 없다. 우리의 총각들이 숫처녀만을 고집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처녀가 아이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 라는 남녀불평등의 표본 격인 속담을 탄생시킬 정도로 처녀의 혼전 사건은 수치 중의 낭패로 여겨 처녀가 수태하면 자살을 서슴지 않았었다.


 남자나 여자나 본능적 성욕이라는 점에서 다름이 없는데, 처녀가 아이를 배면 불이익을 감수, 자살까지 택하게 한 사회는 분명히 불공평한 잘못된 사회다. 여자에게만 본능을 억제케 하고 남자에게 성폭행을 허락한 남성 위주의 독선은 폭력 중의 폭력으로 규탄받아 마땅하다.


 그뿐만 아니다. 세계 지도를 펴보면 'Virgin Island(처녀섬)' 라는 이름의 섬은 있으나 '총각 섬은 보이지 않는다. 처녀 섬이라는 이름이 뜻하듯 여자에게만 순결을 원한 남성 우위의 횡포는 동,서양이 같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십자군이 원정을 떠나면서 아내들에게 정조대를 채웠다는 사실도 서양에서 여성을 노예취급 했다는 증거가 아니냐?


 처녀성(處女性)이 모래성(城)보다 더 웃기는 성으로 취급되는 이 시대에 과연 '처녀지', '처녀작'이라는 말의 의미를 계속 유지케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여성이 남성과 대등한 인격체로 승격된 오늘의 이 시대를 인정한다면, '총각지' '총각작'이 없는 것처럼 '처녀'로 시작되는 모든 말은 이제 폐기처분 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인당수 용궁 왕자를 위해 15살 숫처녀만을 골라 제사 지내게 한 여성비하 이야기 또한 더 이상 미화되지 못한다. '처녀'라는 더할 수 없이 고운 단어는 남성우위시대의 여성비하로 만들어진 순결을 강요한 아주 비열한 남녀 차등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함에도 나는 이제 별 볼 일 없는 남성이라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외치노니, 처녀여! 꿈 많은 처녀여! 인간의 꽃으로 영원히 남아다오. 그대들은 아름다움의 상징이고, 사랑의 꿈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yeodongwon
yeodongwon
77318
23140
2017-02-17
피는 물보다 진했다

 


 지난 2월은 겨울 올림픽 보는 재미로 보냈고, 여름 한 달은 월드컵 보는 재미로 살았다. 더욱이 성능 좋은 신형 TV에다 중계 또한 잘 해주니 안방에서 현장감으로 볼 수 있어 좋았다.


 세월의 속도감을 실감하고 있는 늙은이에겐 이래저래 올해 한해는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르게 후딱 가버릴 것 같아 아쉽긴 하지만 하루 놀고 하루 쉬는 우리 같은 시니어 백수들에겐 이 이상의 선물이 없다.


 시합 보기엔 그 시합에 사돈의 8촌이라도 걸리면 촌수 따라 혈압 도수가 달라지고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도 마음이 기우는 쪽이 있는데, 거기에다 끌리는 선수가 있으면 보는 재미는 더해진다.


 겨울 올림픽에선 김연아가 있어 흥분했고, 여름 월드컵에선 2박 쌍용이 있어 혈압이 위험수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골목 축구 실력이었으면서 예전엔 제법 공을 찬 것처럼 나의 관전평을 안주 삼아 아내와 둘이서 커피(맥주면 더욱 좋은데)를 마시며 보는 재미, 이게 사는 재미다.


 그런데 문제는 북한의 시합 때다. 아내는 평안도 신의주가 고향이고 나는 경상남도 함양이 고향인 전형적인 남남북녀 가정이라 촌수로 따지면 아내는 당연히 북한을 향해 피가 약동해야 하는데 덤덤해 하는 것으로 봐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김정일이가 미우니 북한 시합까지도 피가 동해지지 않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누군가가 내게 물었다. "북한과 브라질 시합 때 어느 쪽을 응원하겠는가?"고. 물론 나는 스스러움 없이 "북한 쪽이죠"라며 제법 트인 인간인 척 어깨를 펴며 대답했는데, 실상 마음은 아무런 촌수도 없는 브라질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촌수가 가까운 쪽으로 기울었어야 할 당연한 자연스러움이 왜 같은 피, 같은 촌수인 북한에는 통하지 못하는 걸까? 밝은 이성이라 자부하는 내 의지가 북한 문제에 부딪히면 늘 비켜 나버린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영 속상하다. 아니 당연한 것이 당연하게 받아드리지 못하는 내 마음이 밉다. 뒤죽박죽의 북한이라는 정권이 얼마나 미웠으면 순수한 운동시합에까지 내 마음이 비켜 나버린다는 사실에 울고 싶은 심정이 된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이상한 정권이 65년 넘게 대를 이어 다스리며 인민을 굶겨 놓고 하는 짓거리가 원자탄 만들어 서울 불바다 싹쓸이 하겠다 외치고 있으니 그저 오만 정이 떨어질 뿐이다. 참으로 민족의 비극이다.


 재일동포 북한 선수 정대세의 경기 전에 흘린 눈물의 속내를 알 듯 모르듯 내 가슴을 적신다. 그가 북한을 위해 뛰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나 해외동포로 사는 같은 입장에서 왜 조국이 두 쪽으로 갈라져 그가 눈물을 흘리듯 내가 응원문제로까지 고민해야 하는가? 가 분하다는 것이다. 


 분명 피는 물보다 진하다. 같은 형제 북한 팀을 향해서도 피가 동했어야 했다. 그런데 브라질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으니 나의 슬픔을 넘어 민족의 비극이다.


 6.25의 비극, 60년의 세월이면 이제쯤 참회의 눈물을 흘릴만도 한데, 원자탄까지 만들어 동족 남한을 싹쓸이하겠다(고) 외치고 있으니 그런 집단을 위해 뛰어야 하는 선수들에게 박수가 치어지지 않은 것은 당연하지만 다만 연민의 정에 눈물이 난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다. 손기정 씨의 한을 풀어준 황영조 선수가 메인스타디움의 결승점을 1등으로 통과하는 순간이었다. 한국이라면 콧방귀만 날리던 당시 고등학생인 이곳 태생인 딸이 TV를 같이 보다가 갑자기 두 손을 번쩍 들고 소파에서 솟구치듯 yes(해냈다)라며 집안이 떠나갈 듯 소리 지르는 바람에 모두가 놀랐다.


 남의 나라 시민이 되는 이민을 살면서 애국심이니, 민족주의니 가 어울리지 않을 이곳 태생인 아이들의 진한 피의 향방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해서 또 조국에 부탁드리는 나(우리)의 꿈에도 소원은 더 늦기 전에 반도 땅이 하나로 회복되어 올림픽 때나 월드컵 때나 나와 나의 자손들이 헷갈리지 않고 한반도와 한민족을 위해 진한 피가 용솟음치게 해주기를! 간절히 또 간절히 빌고 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yeodongwon
yeodongwon
77238
23140
2017-02-10
서울 김서방 집 찾기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 그대로 서양은 길의 문화다. 


 사람 사는 곳엔 집이 있고 길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집이 먼저냐 길이 먼저냐 인데 로마제국(서양)은 길부터 훤히 뚫어 제국의 야망을 넓혀 나갔다. 


 그 돌판 길을 얼마나 튼튼히 잘 만들었는지 몇 년 전에 가본 로마 길엔 2천 년 전에 깐 돌판 길이 그대로 깔려 있었는데 지금도 자동차가 손색없이 달리고 있었다.


 히틀러 또한 세계 정복이라는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먼저 독일 전국을 세계 최초로 아우토반(고속도로)을 깔아 무장시켰다. 그 아우토반을 얼마나 튼튼히 잘 만들었는지 8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손색없이 자동차가 홍수를 이루며 씽씽 달리고 있다. 


 그렇게 서양은 길부터 만들고 있었다.


 지금도 이곳 서양에 집 짓는 모습을 보면 우리처럼 주춧돌을 먼저 박는 것이 아니라 길부터 먼저 닦고 아스팔트를 깐 다음 집이 들어선다.


 그런데 옛날(1946년) 시골 우리집을 지을 때 논바닥에 주춧돌을 놓고 집을 짓고 담을 쌓은 다음으로 길, 그것도 겨우 지게나 지고 다닐 정도의 좁은 골목길을 만들었다.


 지금은 선진국형으로 많이 달라졌지만 70년대에 가봤을 때도 그 순서는 달라 보이지 않았다. 집부터 짓고 있었다.


 그랬다. 우리는 길을 만들어 걸어다닌 민족은 아니었다. 백여 년 전 우리나라에 온 서양 여자 선교사가 쓴 수기에 ”이상한 것은 바퀴 달린 것이라고는 하나도 볼 수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길 같은 길이 없는, 그냥 걸어 다니면서 생긴 자연발생적 좁은 길을 수레 대신 지게를 지고 다녔다는 뜻이다. 


 사회공동체 개념의 사상이 아니라, 집이 주이고 길은 부라는 내 집 둥지만이 중요한 사상이다. 


 하긴 산이 많은 지형에는 지게가 제격이었겠지만, 길 이름도 집 번호판도 없는 집이 많다 보니 집배원 아저씨 서울 김서방 찾기는 ‘소경 문고리 잡기’ 식이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시절 TV 뉴스 화면에 기자들이 몰려간 한옥 사저 대문에는 ’이명박 김윤옥’이라 쓰인 문패가 걸려 있었다. 이전 대통령 당선인 시절에도 TV 화면에 비친 사가(私家) 대문엔 김대중 이희호라 쓰인 문패만 붙어 있었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집 대문엔 체를 살려 쓴 호주(戶主) 이름이 쓰인 문패가 걸려 있는데 정작 필요한 집 번호(주소)는 없거나, 있다 해도 이름 옆에 깨알 글씨로 없는 듯 쓰여 있다. 


 대신 이곳 서양은 이름은 눈을 닦고 봐도 보이지 않고 집 번호판만 눈에 띄게 붙어 있다. 


 나라 행정에는 효율적 운영 체제가 우선인데 거기엔 숫자가 필수다. 이것을 풍족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컴퓨터다. 컴퓨터 시대에 ‘서울 김서방 찾기’ 식으로는 곤란하다. 


 해서 지금 한국에선 뒤늦게 단안을 내린 것이 전 국토 길에 이름 붙이기고 집 번호 매기기라 한다. 구조상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나 진작 했어야 했다. 그래서 이제는 “김서방 집 찾기는 누워서 떡 먹기” 시대이길 바란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yeodongwon
yeodongwon
77005
23140
2017-01-27
서툰 예약문화

 

 서툰 '예약문화'는 '코리아 타임'과 함께 한국인의 2대 수치로 세계에 소문이 나 있다고 한국인 스스로가 자인, 개탄하고 있는 버릇이다. 이 두 가지는 선진과 후진을 가르는 문화잣대로서 현대를 살아가야 할 문화 민족이라면 분명 부끄러움이다.


 그렇다면 원인 없는 결과는 없을 터이니 우리 민족의 습성 속에 서투를 수밖에 없는 요인이 필시 있다 할 것인데,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 혹시 우리 민족의 특성으로 보이는 '구속을 싫어하는 자유분방함'은 아닐지? 잘못 짚은 진단일까?


 그러나 세상 모든 이치가 그러하듯 단점으로 보이는 이 특성도 실은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장점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우리의 튀는 개인주의적 이기주의가 무질서를 낳는다는 면에서는 분명 단점이지만 강한 개성의 다양성을 얻는다는 면에서 보면 민주성향이라는 장점이 된다.


 툭하면 "한국 사람은..." 하고 나오는 우리의 자조적 탄식은 많은 것들이 단점으로 보이기 때문이고, 우리 것이 최고라는 자만적 민족의식은 어떤 것들이 장점으로 부각되어 보이기 때문이다. 잘남과 못남도, 자랑과 부끄러움도 보는 눈의 차이, 단점인 동시에 장점이 된다는 양면성으로 보면 이해는 넓어진다. 이런 양면성의 눈으로 단점이라고 개탄하고 있는 우리의 서툰 예약문화와 코리아 타임을 살펴보자.


 임진왜란 때 관군은 허수아비였으나 자발적 의병활동은 눈부셨고, 조선의 정치지배세력은 부패되고 무력하여 기어이 나라를 말아먹고 말았으나 끈질긴 백성의 저항은 불길처럼 일어나 목숨을 초개처럼 버렸다.


 동학혁명, 3.1만세, 4.19혁명, 5.18항쟁으로 이어지는 민중궐기는 조직의 힘이 아니라 자연 발생적 봉기였고, 가깝게는 지난 '한.일 월드컵' 때의 "대-한민국!" 그 함성도 조직의 명령에서가 아니라 자의적 참여라는데 더욱 값지고 빛나 보인다.


 구속을 싫어하는 자유분방함에서 분출되는 이런 자발적 참여들이 자칫 콩가루 무질서로 흐르기 쉬운데, 어느 때보다도 더 좋은 질서를 보여주고 있었다는 점이 묘하고 희한하다. 나라가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놀랍게도 시민질서의식이 높아져 범죄율이 도리어 낮았다는 예가 어찌 예삿일이겠는가.


 판소리에는 추임새라는 일종의 장단 같은 "얼씨구 좋다!"하며 흥에 겨워서 내는 소리가 있다. 목사의 설교에 감동하여 연신 "아멘, 할렐루야!"로 화답해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의 교회풍속도도 같은 맥락이다. 원로 코미디언 송해 씨가 이끄는 전국노래자랑을 보면 무대 위의 출연자들보다 흥겨워 어깨춤 추는 관중석이 더 볼만하다. 무대와 관중석이 따로 노는 짜여진 분위기가 아니라 함께 어울리는 잔칫날 같다.


 그랬다. 우리의 옛날(별로 옛날도 아니다.) 혼인 잔치, 회갑잔치, 심지어 초상집은 근방의 거지들까지도 참여하는 한 마당 축제 분위기다. 예약과 초대 그리고 시간 엄수로 진행되는 현대식(서구식) 결혼식, 회갑연, 장례식 그 경축식 같은 딱딱하고 엄숙한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예약과 초대와 시간 엄수라는 지극히 서구적 세련미는 문화인다움을 풍기기는 하지만 자의보다 타의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언제나 자의식의 참여에 익숙하게 버릇들은 우리가 서투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데 어찌 흉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단지 우리 민족성향에 맞지 않아 결함은 예증될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


 가고 싶을 때와 가야 할 곳은 남이 결정할 타의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내가 결정할 자의의 영역인 것이다. 친구 딸 결혼식 참석 여부는 친구 쪽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에 딸린 것이다. 꼭 가야 할 곳이라 마음이 들어가 보니 내 앉을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불청객 신세가 되었을 때의 민망함, 이는 친구 쪽에서 스스로 절교를 선언한 꼴이 돼버린다. 이 어찌 황당하지 않은가.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에 얼른 따르면 그만이지만 그게 쉽지 않으니 탈일 수밖에.


 식당예약도 그렇다. 먹고 싶을 때와 먹고 싶은 메뉴는 나 자신도 예측이 안 되는 그때마다 문제다. 어제는 냉면이, 오늘은 자장면이 먹고 싶은 입맛의 변덕을 무시한 식당예약은 순간순간의 기분에 사는 한국인에게는 신체적 리듬을 무시한 폭력일 수 있다.


 눈으로 먹는 일본인이나, 격식을 중요시하는 서양인은 신체적 리듬의 영향을 덜 받을 터이니 한 달 후, 1년 후의 식당예약이 가능할는지 모르나 맛으로 먹는 기분에 사는 우리에게는 아무래도 거추장스러운 절차임이 분명하다. 한 달 후의 입맛은 그때의 사정이다. 비빔밥이 먹고 싶을지 냉면이 먹고 싶을지는 그때의 일이다.
 

아기자기하게 다듬어진 일본 정원은 눈으로 걷고, 웅장한 중국 정원은 그 스케일로 걷고, 자연 그대로의 우리 정원은 마음으로 걷는 우리에게 계산된 예약문화는 궁합이 엇갈릴 수밖에 없다.


 나는 흥에 취하기 위해 춤 구경을 가는 데 서양사람은 감상하기 위해 발레 구경을 간다. 그래서 우리는 춤 구경하다 신이 나면 함께 어우러져 추기도 하는데 서양인의 발레 구경은 조용함이 생명이다.


 한국 춤은 기분으로 추는 흥(신명)이 생명이고, 일본 춤은 모양으로 추는 인형극 같고, 서양 춤은 이론으로 추는 것 같아 기교적으로 보인다. 나는 긴장을 풀기 위해 춤 구경을 가는데 이네들은 긴장을 얻기 위해 가는 듯 보인다. 발레, 오페라 등의 공연장은 숨소리까지 죽여가며 무덤 속 같은 분위기에서 분침의 시간표에 의해 진행된다.


 사람들은 일상적 일과에서 받는 긴장을 풀기 위해 놀이라는 여유를 즐기는 것인데 그 놀이에서 되레 긴장(스트레스)을 받는다면 난센스다. 더욱이 운동은 심신의 긴장을 풀어주는 최선의 방법이라 알고 있는데, 소위 신사도의 엄한 매너로 진행되는 골프는 되레 스트레스만 잔뜩 받고 온다. 소리도 죽여가며 일거수일투족 남 눈치 보며 하는 운동, 그게 운동인가 고역이지. 그래서 기분에 사는 한국인의 골프 매너가 매끄럽지 못한 것은 당연할는지 모른다.


 구속을 싫어하는 자유분방함의 생활습성에다 기분을 참지 못하고 그때그때 풀어야 직성이 풀리는 한국인의 기질로 봐 아마 세계에서 스트레스를 가장 적게 받는 민족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 우리는 격식을 귀찮아하고, 매듭은 풀어야 하고, 한도 풀고, 해산의 고통도 몸풀기로, 악귀는 살풀이로, 지루함까지도 심심풀이로 풀며 산 풀이의 천재들이다.


 순서도 뒤죽박죽이요, 감정 노출도 제멋대로라 외국인의 눈에는 박살이 날듯 불안하고 위태해 보이는데 어느 시기를 지나고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가지런히 제자리 잡고 있는 모습이 희한하단다. 이를 일러 역동적이라 말하고 있다. 오랜만에 한국엘 갔을 때 엉킨 실타래처럼 어수선하고 허둥대는 듯한 무질서가 불안하게 보이는데 역동적이라는 변명을 들으면 그를 듯 보인다.


 어찌 되었거나 민주자본주의를 택한 남한은 부자로 잘사는데 공산독재를 택한 북한은 거지 나라가 돼버렸는데 이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념의 우열로 따질 성질의 문제가 아니라 풀어주느냐 옭아매느냐로 이미 판가름은 뻔한 결과로 예증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한민족의 성향에는 옥죔보다 풂이 궁합이 맞기 때문이다. 자유분방함의 한민족에게 일사불란한 군대식은 치수 틀린 신발을 신은 격이라 십 리도 못 가 발병이 날 수밖에 없다.


 한민족은 똑같은 봉급(특히 배급제도)보다는 도급이라야 생산성을 높인다는 것을 김일성은 몰랐던 것이다. 조선 500년 가난의 유산도 그 지독한 승유사상(주로 성리학)이라는 이데올로기로 자유분방함의 민족성을 죄어 눌러 민족적 역동성(에너지)을 발산 못 하게 한 결과로 본 것이다.


전체주의적 성향이 강한 일본인 정서에는 오히려 공산주의가 쉽게 먹혀, 혹 선택했었다면 동구 공산 국가들처럼 실패의 쓴 잔이 아니라 공산이념이라는 사회주의적 꿈을 멋지게 이루어 냈을지 혹 모를 일이다.


 전번 ‘한.일 월드컵’ 때 한국과 일본의 분위기 비교에서도 엿볼 수가 있었다. 일본은 질서가 만점으로 났으나 분위기가 냉랭한 경축식 같은 대회였었다고 하는 데 반해 한국은 나라가 요절날 듯 그 열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요란한 잔치 같은 대회를 치렀다는 사실이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다. 


일본은 월드컵대회를 했으나 한국은 월드컵잔치를 벌였던 것이다. 일본이 눈으로 치렀다면 한국은 기분으로 치렀다는 말이 된다.


 이렇게 풀어놓으면 잘해내는 민족적 장점의 최대치의 수확물이 지난 2002년 월드컵이라 하겠는데, 이 우리 민족성향을 잘 파악 활용한 인물이 바로 ‘히딩거 감독’이다.


 위계질서의 화합이 아니라 개성을 발휘시킨 융화의 힘 그 적절한 민족적 에너지의 장점의 활용이라는 점에서 히딩거감독은 거장이 된다.


 어찌 세상 물정을 2분 법적 단순잣대로 재단할 일인가. 이것과 저것의 종합적 관계로 봐야 마땅하다면 우리의 서툰 예약문화나 코리아 타임도 그럴 수밖에 없는 연유가 있다 생각되어 우리의 민족성향을 바탕으로 해서 살펴봤다.


 하지만 21세기 오늘 이 시대는 지금까지 살아온 긴 역사의 시대와는 완연이 다른 격변의 시대다. 시간개념과 예약절차는 필수 생활 기본이다. 내가 먼저라는 이기주의적 서툰 줄서기식 같은 고약한 성질의 고집으로는 부패의 기생충만을 기생시킬 뿐 오늘을 살아가는 세계시민으로서의 덕목에서는 분명히 낙제점이다.


 새 시대 문화민족으로 거듭나는 민족성 탈바꿈이라는 산모의 고통을 견디는 노력 없이는 만년 후진적 떠들썩한 모습으로 세계인들에게 폐를 끼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 21세기를 함께 살아가야 할 세계시민으로서의 책무를 가벼이 여길 수 없지 않나 싶다. 내식대로의 삶에서 자긍심을 갖는다는 오기를 부린다면 더 할 말은 없지만.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yeodongwon
yeodongwon
77111
23140
2017-01-26
서툰 줄서기

 
 줄을 선다 함은 지금 혼자가 아니라 남과 더불어 살겠다는 각오이며 사회공동체의 의무를 다하겠다는 약속이다. 이는 이기심을 줄이는 시민의식으로서의 최소한의 미덕이다.


 우리는 이 줄서기에 매우 서툴고 기다릴 인내심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스스로 많이 개탄하고 있는 의식(버릇)이다. 선진국 시민 자질의 첫 출발이 되는 교통질서 최하위국 불명예는 그래서 어쩌면 당연하다. 


 줄서기 생활화 선진국 30년 생활에서도 아직 나의 줄서기는 유치원생 수준이니 쉬운 듯 어려운 것이 이 줄서기다. 그래서 병원이나 은행에서 나의 줄서기는 이네들처럼 느긋이 기다리지 못하고 늘 부글부글 안절부절 못한다.


 교과서에서 배운 은근과 끈기라는 민족 근성은 순 거짓말인지 빨리빨리 문화는 한국인의 상징으로 자리 잡아 세계인들이 알고 있을 만큼 우리는 불같이 급하고 내가 먼저라야 성이 풀린다. 느긋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순진함은 무능의 표본이 되고, 약고 눈치 빠름이 유능한 처세술로 평가받고 있다.


 이런 약삭빠른 자들은 물론이고 돈 있고 힘 있는 자들도 줄 설 줄을 모른다. 아니 서려고들 하지 않을 뿐더러 안 서는 것을 특권으로 여긴다. 그들만의 출입구와 승강기가 특별히 따로 있고, 밑돈 거래, 지름길 뚫기는 이내들의 특기다. 


 이처럼 권력과 금력이 모든 것에 우선이 되는 사회에서는 권력과 돈이 목적이 되고 우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해서 권력을 잡아라, 돈을 벌어라, 눈에 쌍심지가 선다.


 과거급제가 그러했고, 지금은 고시합격이, 대통령직이, 국회의원직이 돈과 권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움켜지는 하늘만큼의 신분상승이 되는 인생판도의 갈림길이 되니 수단과 방법을 가릴 여유가 없다. 어딜 가나 팽팽한 경쟁의 긴장감으로 온 사회가 칼날처럼 날 서 있다.


 이 권력지향적 풍토는 초등학교 반장 선거에서부터 대학 학생회장 선거에까지의 교육과정에서 이골을 익혔으니 선거철만 되면 메뚜기가 철을 만난 듯 신바람을 내며 요란해진다.


 선거가 무엇인가? 모임의 대표(leader)를 뽑는 절차다. 내 판단으로 좋다고 여기는 사람을 법 절차대로 찍으면 된다. 


 시민단체라는 여론몰이꾼이 설치고 대통령이 창당대회에서 “선거 필승” 구호를 외치면 기름을 부은 듯 선거 열기가 온 나라에 소용돌이친다. 


 나는 시민단체의 역할은 서툰 줄서기를 계몽하고 선거 부조리를 감시 고발하는 등의 사회가 살맛을 내는 소금 소임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 생각하고 있다. 왜그러냐 하면 그들도 줄을 서야 하는 민주시민이지 줄 밖 특권층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민단체의 역할은 사법적 판결권이 아니라 사회정화 역할에 한하며, 양약적 치료효과 쪽보다는 한약적 보약 효과 쪽이기를 바라서다.


 선거에서의 최종적 선택권은 유권자의 몫이다. 이는 선거 존재의 이유이며 시민 개개인의 성스러운 권한이다. 판단의 능력이 서툴거나 모자란다 해서 간섭의 구실일 수는 없다. 모든 판단은 능력과 상관 없이, 아니 그것까지도 포함해서, 개인의 자유이며 선거의 대명분인 것이다. 그래서 부부간에도 무간섭 비밀이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 선거의 상식이며 묘미다. 


 더욱이 줄을 서지 않겠다는 듯한 “구속을 당할지라도” 라는 발언은 전투적 용어 같아 시민사회단체의 용어로는 부적절하고 섬뜩하다.


 선거는 절대로 전투가 아니다. 전투는 과정이라는 절차가 무시된다. 기어서 가든 날아서 가든 고지에 깃발을 꽂는 자만이 말할 자격이 있는 목적 그 자체가 최선이 되지만 선거는 깨끗한 후보, 깨끗한 선거운동, 깨끗한 투표행사, 깨끗한 승복이라는 절차가 빚어내는 과정의 미학이며 줄서기 문화의 꽃이다.


 만약 시민단체가 판단한 명단 공개식 인물 고르기가 정당하다면 복잡한 선거절차를 생략해 버리고 시민단체에 의한 간접선거를 해버리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줄을 선다 함은 차례가 온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줄 서는 자체가 무의미하거나 불이익이 온다면 누가 지루하게 줄을 서겠는가? 줄서기는 민주주의 제1의 덕목이다.


 행정력이 혼란했던 소련 고르바초프 시절 빵 가게 앞에서 길게 줄 서다 지친 한 중년 남자가 “이놈의 고르비 때려죽이고 올 테다”하고 줄을 이탈하고 간 그가 얼마 있다 돌아와서 하는 말이 “크레믈린 정문 앞에 갔더니 나처럼 고르비 죽이러 온 사람의 줄이 여기보다 더 길어, 젠장” 하더란다.


 이쯤이면 줄은 무의미하고 누구든 비상수단을 생각할 것이다.


 쿠데타 같은 정치 새치기도 얌체지만 잘 빠져나가 주지 않는 정치 9단들의 줄도 문제이고 밉상이다. 심판이 끝난 자들이 또 서고 또 와서 서고 3선 4선, 도대체가 물러날 기미가 없다. 사정이 이러하면 러시아의 빵집 앞 줄서기처럼 줄은 무의미해진다.


 줄서기에서 중요한 것은 차례대로 빠져나갔으면 줄이 줄어들어 좋은데 무슨 미련이 남아 줄 쪽을 기웃거리는 추파가 혐오스럽다.


 물레방아 돌린 물은 다시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는 것쯤 아실만한데…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yeodongwon
yeodongwon
76800
23140
2017-01-19
신동, 천재 그리고 노벨상

 

 신동, 천재가 노벨상으로 이어지기를 우리처럼 바라는 국가도 아마 들물게다. 신동,천재가 소문이나 여론의 부추김에 의해 대성하는 것이 아니라면 평범 속에서 스스로 여물도록 내버려 둘 일이다. 일상적 삶 속에서 자기일에 성실히 살아가는 자의 천재성이야말로 사회의 소금이 되는 참 천재성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공명심의 천재성은 사회에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있어 해가 되는 사회악의 씨앗일 수가 더 많다는 것을 나는 세계영웅전을 읽으면서 발견한다. 영웅전을 장식하고 있는 그 많은 전쟁 천재들의 야망의 결과는 무고한 인민들의 피로 지구촌 강산을 물들였을 뿐이다. 때론 신의 욕심까지 가담되면 그 비극은 극에 달한다.


 우리의 성웅’ 이순신’을 내가 존경하는 이유는 개인적 공명심이나 야망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만 그 열악한 조건에서 24전 24승이라는 천재적 전쟁기적을 만들어낸 하늘을 닮은 분이시기 때문이다. 평범 속에서 올곧게 살다 늦은 나이에 쓰인 그분의 천재적 영웅전은 왜란이라는 위란이 탄생시킨 것이지 그분의 야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동서고금 세계 전쟁천재 영웅들은 다만 영웅이 되기 위해 지구촌을 분탕질했지만 충무공은 평범 속에서의 행위셨기에 영웅을 넘어 성웅이라 높임을 받는 것이다.


 신동, 천재가 그 자신은 물론, 사회에 의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더불어 사는 일상적 평범을 먼저 버릇 들게 하는 것이 우선이 되었으면 해서 하는 말이다.


 ‘박주영’ 이라는 축구천재 출현으로 가뭄에 단비 만났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풍선처럼 띄우고 있다. 축구는 11명이 호흡 맞춰 뛰는 운동인데 더불어 함께라는 일원의식을 망각하고 개인 명성에다 욕심까지 목에 차면 헛발질로 될성부른 떡잎이 시들까 걱정된다.


 또 한분있다. 신문마다 방송마다 경쟁하듯 띄우고 있는 이름인데 ‘황우석’교수라는 걸출한 인재 등장으로 온 국민이 노벨상감이라 흥분하고 있다. 실험실을 지켜야 할 학자를 방송국마다 얼굴 내기 경쟁이고 국가적 큰 행사때마다 불러내며 뉴스가치 1호로 띄우고 있다.


 심지어 황교수 노벨상 후원회까지 만든다 하니 그 열기가 짐작이 된다. 하긴 ‘노사모’의 요란에 의해 대통령까지도 만들어 낸 나라이니 ‘황사모’후원회에 의해 노벨상인들 못받을까 싶긴 하지만 좀은 차분해 주었으면 어떨까 싶은 것이다.


 노벨상은 ’구하라 얻을 것이다’라는 기도나 갈망으로 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상이란 타겠다는 목적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일을 성실히 감당하고 있는 과정의 부산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요란한 로비에 의해 욕심으로 얻어진 상보다는 실험실에 묻혀있는 한 무명의 과학도가 어느날 자고 일어나보니 노벨상이 주어지더라 라는 상이 그래서 더 값지고 빛나 보이는 것이다.


 신동, 천재라는 될성부른 유망주의 빛이 발하는 것을 원하다면 평범 속에 둘 일이다. 기대는 부담이 되고, 부담은 집이 될 뿐이다. 최선의 도움은 평상심으로 일하게 놔둘 일이다.


 포항공대 교정에는 갈릴레오, 뉴턴, 아인슈타인의 흉상이 만들어져 있고 그옆에 제 4의 천재 과학도의 탄생을 바라는 뜻으로 빈 받침대만 하나 더 만들어 놓았다는데, 학생들에게 욕심을 돋우는 부담만 줄 뿐이다. 목적 지향적 우리 교육의 치부를 드러내 보인 예라 하겠다.


 목적만을 위해 뛰는 사람들보다 과정에 충실한 사람들이 사는 사회가 얼마나 보기에 아름다운가. 갖겠다는 충혈된 눈빛보다 하나하나 쌓아가는 즐거움 그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눈빛이 얼마나 순수한가. 순수함, 이보다 더 값진 보물은 없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더보기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