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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동원 단상(斷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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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7
처녀성


 

 

안개 피어서 강으로 흐르고
잠꼬대 구구대는 밤비둘기
이런 밤엔 저절로 머언 처녀들...
갑사댕기 남 끝동
삼삼하구나.

 

-갑사댕기(박목월)-

 


 삼삼한 처녀라는 인간의 꽃이 없다면 세상 얼마나 삭막할까? 꽃망울 터질 듯, 부풀어 필 듯 수줍은 처녀라는 나이, 처녀는 순결의 동의어, 때 묻지 않은 깨끗함의 상징이다. 그러길래 인간의 발이 닿지 않은 곳을 일러 '처녀지' 또는 '처녀림'이라 하고 정복되지 않은 산봉우리는 '처녀봉', 처음 발표되는 작품은 '처녀작'이라 부른다.
 '처녀성'하면 함부로 다를 수 없는 고결함이며, 부드러움이며, 신비로움이며, 호기심의 대상이며, 미지의 비밀을 간직한 견고한 관문의 성이다.


 그 성이 여성에게 생명과도 같은 전설적인 시절이 있었다. 목숨 바쳐 사랑하는 이에게만 그 순결의 첫 관문을 열게끔 허락해주는 의식의 절차를 신성시했던 거짓말 같은 시절이 있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 아니라 적어도 내가 젊었을 때만 해도 그랬다. 인류역사를 백만 년으로 치면 60년 전까지의 백만 년 동안 그랬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의 처녀들에게 처녀성 어쩌고 하면 웃기지 말라 비웃는다. 그만큼 지난 60년은 백만 년과 맞먹는 인류 문명의 지각변동을 의미하고 있다. 그래서 요즘 숫처녀는 천연기념물이라 하고 숫총각은 희귀동물이라 한다던가. 이 말을 뒤집으면 '숫처녀', '숫총각' 그런 단어 자체가 폐기처분 된 웃기는 유물이란 뜻이다.


 보고 듣고 접하는 성(性)의 범람으로 5살에 성을 훤히 알아버린 7살 사내아이가 학교에서 한 반 계집아이에게 어른 뺨칠 진한 뽀뽀를 하다 정학처분을 당했는데, 놀랄 일이 아니라 미소 짓게 한 신문기사가 얼마 전에 났었다.


 이제 인당수 용궁 왕자께서 심청이라는 15살 숫처녀를 구하기 위해선 광고비께나 들여야 할 것 같으니, 아니 천신만고 찾는다 해도 콧대 높아진 심청이의 당당함에 질려버릴 것이다.


 해질 줄 몰랐던 나라 황태자의 권위, 그 또한 옛날얘기, 찰스 황태자가 수줍음 잘 타는 숫처녀 다이애나를 태자비로 맞이했지만 찰스의 바람기에 반발, 너도 하는데 나라고 못할소냐, 천방지축 설쳐도 찍소리는커녕 되레 망신만 톡톡히 당하고 엄청난 위자료만 뺏긴 채 이혼장에 도장을 찍어줘야 하는 세상이니, 심청이가 언제 다이애나를 뺨칠 행동을 보일지, 용궁 왕자께서도 골머리 안 앓으시리라는 보장이 없다.


 15살 숫처녀는 인당수 용궁에서만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선녀도 천사도 처녀야만 했고, 예수님의 어머니도 동정녀(숫처녀)여야만 했다. 어찌 예수같이 고귀하신 분이 죄 많은 남자와의 몸 섞임으로 잉태되랴 해서 마구간 같은 가장 낮은 곳에서 태어나게 했으면서도 그 족보의 씨만은 성결한 성령으로 숫처녀의 몸에 잉태케 한 종교의 깊은 뜻이 그래서 이해된다.


 멀리서 이해를 찾을 것도 없다. 우리의 총각들이 숫처녀만을 고집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처녀가 아이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 라는 남녀불평등의 표본 격인 속담을 탄생시킬 정도로 처녀의 혼전 사건은 수치 중의 낭패로 여겨 처녀가 수태하면 자살을 서슴지 않았었다.


 남자나 여자나 본능적 성욕이라는 점에서 다름이 없는데, 처녀가 아이를 배면 불이익을 감수, 자살까지 택하게 한 사회는 분명히 불공평한 잘못된 사회다. 여자에게만 본능을 억제케 하고 남자에게 성폭행을 허락한 남성 위주의 독선은 폭력 중의 폭력으로 규탄받아 마땅하다.


 그뿐만 아니다. 세계 지도를 펴보면 'Virgin Island(처녀섬)' 라는 이름의 섬은 있으나 '총각 섬은 보이지 않는다. 처녀 섬이라는 이름이 뜻하듯 여자에게만 순결을 원한 남성 우위의 횡포는 동,서양이 같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십자군이 원정을 떠나면서 아내들에게 정조대를 채웠다는 사실도 서양에서 여성을 노예취급 했다는 증거가 아니냐?


 처녀성(處女性)이 모래성(城)보다 더 웃기는 성으로 취급되는 이 시대에 과연 '처녀지', '처녀작'이라는 말의 의미를 계속 유지케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여성이 남성과 대등한 인격체로 승격된 오늘의 이 시대를 인정한다면, '총각지' '총각작'이 없는 것처럼 '처녀'로 시작되는 모든 말은 이제 폐기처분 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인당수 용궁 왕자를 위해 15살 숫처녀만을 골라 제사 지내게 한 여성비하 이야기 또한 더 이상 미화되지 못한다. '처녀'라는 더할 수 없이 고운 단어는 남성우위시대의 여성비하로 만들어진 순결을 강요한 아주 비열한 남녀 차등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함에도 나는 이제 별 볼 일 없는 남성이라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외치노니, 처녀여! 꿈 많은 처녀여! 인간의 꽃으로 영원히 남아다오. 그대들은 아름다움의 상징이고, 사랑의 꿈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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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7
피는 물보다 진했다

 


 지난 2월은 겨울 올림픽 보는 재미로 보냈고, 여름 한 달은 월드컵 보는 재미로 살았다. 더욱이 성능 좋은 신형 TV에다 중계 또한 잘 해주니 안방에서 현장감으로 볼 수 있어 좋았다.


 세월의 속도감을 실감하고 있는 늙은이에겐 이래저래 올해 한해는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르게 후딱 가버릴 것 같아 아쉽긴 하지만 하루 놀고 하루 쉬는 우리 같은 시니어 백수들에겐 이 이상의 선물이 없다.


 시합 보기엔 그 시합에 사돈의 8촌이라도 걸리면 촌수 따라 혈압 도수가 달라지고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도 마음이 기우는 쪽이 있는데, 거기에다 끌리는 선수가 있으면 보는 재미는 더해진다.


 겨울 올림픽에선 김연아가 있어 흥분했고, 여름 월드컵에선 2박 쌍용이 있어 혈압이 위험수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골목 축구 실력이었으면서 예전엔 제법 공을 찬 것처럼 나의 관전평을 안주 삼아 아내와 둘이서 커피(맥주면 더욱 좋은데)를 마시며 보는 재미, 이게 사는 재미다.


 그런데 문제는 북한의 시합 때다. 아내는 평안도 신의주가 고향이고 나는 경상남도 함양이 고향인 전형적인 남남북녀 가정이라 촌수로 따지면 아내는 당연히 북한을 향해 피가 약동해야 하는데 덤덤해 하는 것으로 봐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김정일이가 미우니 북한 시합까지도 피가 동해지지 않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누군가가 내게 물었다. "북한과 브라질 시합 때 어느 쪽을 응원하겠는가?"고. 물론 나는 스스러움 없이 "북한 쪽이죠"라며 제법 트인 인간인 척 어깨를 펴며 대답했는데, 실상 마음은 아무런 촌수도 없는 브라질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촌수가 가까운 쪽으로 기울었어야 할 당연한 자연스러움이 왜 같은 피, 같은 촌수인 북한에는 통하지 못하는 걸까? 밝은 이성이라 자부하는 내 의지가 북한 문제에 부딪히면 늘 비켜 나버린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영 속상하다. 아니 당연한 것이 당연하게 받아드리지 못하는 내 마음이 밉다. 뒤죽박죽의 북한이라는 정권이 얼마나 미웠으면 순수한 운동시합에까지 내 마음이 비켜 나버린다는 사실에 울고 싶은 심정이 된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이상한 정권이 65년 넘게 대를 이어 다스리며 인민을 굶겨 놓고 하는 짓거리가 원자탄 만들어 서울 불바다 싹쓸이 하겠다 외치고 있으니 그저 오만 정이 떨어질 뿐이다. 참으로 민족의 비극이다.


 재일동포 북한 선수 정대세의 경기 전에 흘린 눈물의 속내를 알 듯 모르듯 내 가슴을 적신다. 그가 북한을 위해 뛰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나 해외동포로 사는 같은 입장에서 왜 조국이 두 쪽으로 갈라져 그가 눈물을 흘리듯 내가 응원문제로까지 고민해야 하는가? 가 분하다는 것이다. 


 분명 피는 물보다 진하다. 같은 형제 북한 팀을 향해서도 피가 동했어야 했다. 그런데 브라질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으니 나의 슬픔을 넘어 민족의 비극이다.


 6.25의 비극, 60년의 세월이면 이제쯤 참회의 눈물을 흘릴만도 한데, 원자탄까지 만들어 동족 남한을 싹쓸이하겠다(고) 외치고 있으니 그런 집단을 위해 뛰어야 하는 선수들에게 박수가 치어지지 않은 것은 당연하지만 다만 연민의 정에 눈물이 난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다. 손기정 씨의 한을 풀어준 황영조 선수가 메인스타디움의 결승점을 1등으로 통과하는 순간이었다. 한국이라면 콧방귀만 날리던 당시 고등학생인 이곳 태생인 딸이 TV를 같이 보다가 갑자기 두 손을 번쩍 들고 소파에서 솟구치듯 yes(해냈다)라며 집안이 떠나갈 듯 소리 지르는 바람에 모두가 놀랐다.


 남의 나라 시민이 되는 이민을 살면서 애국심이니, 민족주의니 가 어울리지 않을 이곳 태생인 아이들의 진한 피의 향방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해서 또 조국에 부탁드리는 나(우리)의 꿈에도 소원은 더 늦기 전에 반도 땅이 하나로 회복되어 올림픽 때나 월드컵 때나 나와 나의 자손들이 헷갈리지 않고 한반도와 한민족을 위해 진한 피가 용솟음치게 해주기를! 간절히 또 간절히 빌고 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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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0
서울 김서방 집 찾기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 그대로 서양은 길의 문화다. 


 사람 사는 곳엔 집이 있고 길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집이 먼저냐 길이 먼저냐 인데 로마제국(서양)은 길부터 훤히 뚫어 제국의 야망을 넓혀 나갔다. 


 그 돌판 길을 얼마나 튼튼히 잘 만들었는지 몇 년 전에 가본 로마 길엔 2천 년 전에 깐 돌판 길이 그대로 깔려 있었는데 지금도 자동차가 손색없이 달리고 있었다.


 히틀러 또한 세계 정복이라는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먼저 독일 전국을 세계 최초로 아우토반(고속도로)을 깔아 무장시켰다. 그 아우토반을 얼마나 튼튼히 잘 만들었는지 8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손색없이 자동차가 홍수를 이루며 씽씽 달리고 있다. 


 그렇게 서양은 길부터 만들고 있었다.


 지금도 이곳 서양에 집 짓는 모습을 보면 우리처럼 주춧돌을 먼저 박는 것이 아니라 길부터 먼저 닦고 아스팔트를 깐 다음 집이 들어선다.


 그런데 옛날(1946년) 시골 우리집을 지을 때 논바닥에 주춧돌을 놓고 집을 짓고 담을 쌓은 다음으로 길, 그것도 겨우 지게나 지고 다닐 정도의 좁은 골목길을 만들었다.


 지금은 선진국형으로 많이 달라졌지만 70년대에 가봤을 때도 그 순서는 달라 보이지 않았다. 집부터 짓고 있었다.


 그랬다. 우리는 길을 만들어 걸어다닌 민족은 아니었다. 백여 년 전 우리나라에 온 서양 여자 선교사가 쓴 수기에 ”이상한 것은 바퀴 달린 것이라고는 하나도 볼 수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길 같은 길이 없는, 그냥 걸어 다니면서 생긴 자연발생적 좁은 길을 수레 대신 지게를 지고 다녔다는 뜻이다. 


 사회공동체 개념의 사상이 아니라, 집이 주이고 길은 부라는 내 집 둥지만이 중요한 사상이다. 


 하긴 산이 많은 지형에는 지게가 제격이었겠지만, 길 이름도 집 번호판도 없는 집이 많다 보니 집배원 아저씨 서울 김서방 찾기는 ‘소경 문고리 잡기’ 식이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시절 TV 뉴스 화면에 기자들이 몰려간 한옥 사저 대문에는 ’이명박 김윤옥’이라 쓰인 문패가 걸려 있었다. 이전 대통령 당선인 시절에도 TV 화면에 비친 사가(私家) 대문엔 김대중 이희호라 쓰인 문패만 붙어 있었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집 대문엔 체를 살려 쓴 호주(戶主) 이름이 쓰인 문패가 걸려 있는데 정작 필요한 집 번호(주소)는 없거나, 있다 해도 이름 옆에 깨알 글씨로 없는 듯 쓰여 있다. 


 대신 이곳 서양은 이름은 눈을 닦고 봐도 보이지 않고 집 번호판만 눈에 띄게 붙어 있다. 


 나라 행정에는 효율적 운영 체제가 우선인데 거기엔 숫자가 필수다. 이것을 풍족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컴퓨터다. 컴퓨터 시대에 ‘서울 김서방 찾기’ 식으로는 곤란하다. 


 해서 지금 한국에선 뒤늦게 단안을 내린 것이 전 국토 길에 이름 붙이기고 집 번호 매기기라 한다. 구조상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나 진작 했어야 했다. 그래서 이제는 “김서방 집 찾기는 누워서 떡 먹기” 시대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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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7
서툰 예약문화

 

 서툰 '예약문화'는 '코리아 타임'과 함께 한국인의 2대 수치로 세계에 소문이 나 있다고 한국인 스스로가 자인, 개탄하고 있는 버릇이다. 이 두 가지는 선진과 후진을 가르는 문화잣대로서 현대를 살아가야 할 문화 민족이라면 분명 부끄러움이다.


 그렇다면 원인 없는 결과는 없을 터이니 우리 민족의 습성 속에 서투를 수밖에 없는 요인이 필시 있다 할 것인데,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 혹시 우리 민족의 특성으로 보이는 '구속을 싫어하는 자유분방함'은 아닐지? 잘못 짚은 진단일까?


 그러나 세상 모든 이치가 그러하듯 단점으로 보이는 이 특성도 실은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장점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우리의 튀는 개인주의적 이기주의가 무질서를 낳는다는 면에서는 분명 단점이지만 강한 개성의 다양성을 얻는다는 면에서 보면 민주성향이라는 장점이 된다.


 툭하면 "한국 사람은..." 하고 나오는 우리의 자조적 탄식은 많은 것들이 단점으로 보이기 때문이고, 우리 것이 최고라는 자만적 민족의식은 어떤 것들이 장점으로 부각되어 보이기 때문이다. 잘남과 못남도, 자랑과 부끄러움도 보는 눈의 차이, 단점인 동시에 장점이 된다는 양면성으로 보면 이해는 넓어진다. 이런 양면성의 눈으로 단점이라고 개탄하고 있는 우리의 서툰 예약문화와 코리아 타임을 살펴보자.


 임진왜란 때 관군은 허수아비였으나 자발적 의병활동은 눈부셨고, 조선의 정치지배세력은 부패되고 무력하여 기어이 나라를 말아먹고 말았으나 끈질긴 백성의 저항은 불길처럼 일어나 목숨을 초개처럼 버렸다.


 동학혁명, 3.1만세, 4.19혁명, 5.18항쟁으로 이어지는 민중궐기는 조직의 힘이 아니라 자연 발생적 봉기였고, 가깝게는 지난 '한.일 월드컵' 때의 "대-한민국!" 그 함성도 조직의 명령에서가 아니라 자의적 참여라는데 더욱 값지고 빛나 보인다.


 구속을 싫어하는 자유분방함에서 분출되는 이런 자발적 참여들이 자칫 콩가루 무질서로 흐르기 쉬운데, 어느 때보다도 더 좋은 질서를 보여주고 있었다는 점이 묘하고 희한하다. 나라가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놀랍게도 시민질서의식이 높아져 범죄율이 도리어 낮았다는 예가 어찌 예삿일이겠는가.


 판소리에는 추임새라는 일종의 장단 같은 "얼씨구 좋다!"하며 흥에 겨워서 내는 소리가 있다. 목사의 설교에 감동하여 연신 "아멘, 할렐루야!"로 화답해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의 교회풍속도도 같은 맥락이다. 원로 코미디언 송해 씨가 이끄는 전국노래자랑을 보면 무대 위의 출연자들보다 흥겨워 어깨춤 추는 관중석이 더 볼만하다. 무대와 관중석이 따로 노는 짜여진 분위기가 아니라 함께 어울리는 잔칫날 같다.


 그랬다. 우리의 옛날(별로 옛날도 아니다.) 혼인 잔치, 회갑잔치, 심지어 초상집은 근방의 거지들까지도 참여하는 한 마당 축제 분위기다. 예약과 초대 그리고 시간 엄수로 진행되는 현대식(서구식) 결혼식, 회갑연, 장례식 그 경축식 같은 딱딱하고 엄숙한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예약과 초대와 시간 엄수라는 지극히 서구적 세련미는 문화인다움을 풍기기는 하지만 자의보다 타의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언제나 자의식의 참여에 익숙하게 버릇들은 우리가 서투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데 어찌 흉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단지 우리 민족성향에 맞지 않아 결함은 예증될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


 가고 싶을 때와 가야 할 곳은 남이 결정할 타의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내가 결정할 자의의 영역인 것이다. 친구 딸 결혼식 참석 여부는 친구 쪽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에 딸린 것이다. 꼭 가야 할 곳이라 마음이 들어가 보니 내 앉을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불청객 신세가 되었을 때의 민망함, 이는 친구 쪽에서 스스로 절교를 선언한 꼴이 돼버린다. 이 어찌 황당하지 않은가.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에 얼른 따르면 그만이지만 그게 쉽지 않으니 탈일 수밖에.


 식당예약도 그렇다. 먹고 싶을 때와 먹고 싶은 메뉴는 나 자신도 예측이 안 되는 그때마다 문제다. 어제는 냉면이, 오늘은 자장면이 먹고 싶은 입맛의 변덕을 무시한 식당예약은 순간순간의 기분에 사는 한국인에게는 신체적 리듬을 무시한 폭력일 수 있다.


 눈으로 먹는 일본인이나, 격식을 중요시하는 서양인은 신체적 리듬의 영향을 덜 받을 터이니 한 달 후, 1년 후의 식당예약이 가능할는지 모르나 맛으로 먹는 기분에 사는 우리에게는 아무래도 거추장스러운 절차임이 분명하다. 한 달 후의 입맛은 그때의 사정이다. 비빔밥이 먹고 싶을지 냉면이 먹고 싶을지는 그때의 일이다.
 

아기자기하게 다듬어진 일본 정원은 눈으로 걷고, 웅장한 중국 정원은 그 스케일로 걷고, 자연 그대로의 우리 정원은 마음으로 걷는 우리에게 계산된 예약문화는 궁합이 엇갈릴 수밖에 없다.


 나는 흥에 취하기 위해 춤 구경을 가는 데 서양사람은 감상하기 위해 발레 구경을 간다. 그래서 우리는 춤 구경하다 신이 나면 함께 어우러져 추기도 하는데 서양인의 발레 구경은 조용함이 생명이다.


 한국 춤은 기분으로 추는 흥(신명)이 생명이고, 일본 춤은 모양으로 추는 인형극 같고, 서양 춤은 이론으로 추는 것 같아 기교적으로 보인다. 나는 긴장을 풀기 위해 춤 구경을 가는데 이네들은 긴장을 얻기 위해 가는 듯 보인다. 발레, 오페라 등의 공연장은 숨소리까지 죽여가며 무덤 속 같은 분위기에서 분침의 시간표에 의해 진행된다.


 사람들은 일상적 일과에서 받는 긴장을 풀기 위해 놀이라는 여유를 즐기는 것인데 그 놀이에서 되레 긴장(스트레스)을 받는다면 난센스다. 더욱이 운동은 심신의 긴장을 풀어주는 최선의 방법이라 알고 있는데, 소위 신사도의 엄한 매너로 진행되는 골프는 되레 스트레스만 잔뜩 받고 온다. 소리도 죽여가며 일거수일투족 남 눈치 보며 하는 운동, 그게 운동인가 고역이지. 그래서 기분에 사는 한국인의 골프 매너가 매끄럽지 못한 것은 당연할는지 모른다.


 구속을 싫어하는 자유분방함의 생활습성에다 기분을 참지 못하고 그때그때 풀어야 직성이 풀리는 한국인의 기질로 봐 아마 세계에서 스트레스를 가장 적게 받는 민족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 우리는 격식을 귀찮아하고, 매듭은 풀어야 하고, 한도 풀고, 해산의 고통도 몸풀기로, 악귀는 살풀이로, 지루함까지도 심심풀이로 풀며 산 풀이의 천재들이다.


 순서도 뒤죽박죽이요, 감정 노출도 제멋대로라 외국인의 눈에는 박살이 날듯 불안하고 위태해 보이는데 어느 시기를 지나고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가지런히 제자리 잡고 있는 모습이 희한하단다. 이를 일러 역동적이라 말하고 있다. 오랜만에 한국엘 갔을 때 엉킨 실타래처럼 어수선하고 허둥대는 듯한 무질서가 불안하게 보이는데 역동적이라는 변명을 들으면 그를 듯 보인다.


 어찌 되었거나 민주자본주의를 택한 남한은 부자로 잘사는데 공산독재를 택한 북한은 거지 나라가 돼버렸는데 이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념의 우열로 따질 성질의 문제가 아니라 풀어주느냐 옭아매느냐로 이미 판가름은 뻔한 결과로 예증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한민족의 성향에는 옥죔보다 풂이 궁합이 맞기 때문이다. 자유분방함의 한민족에게 일사불란한 군대식은 치수 틀린 신발을 신은 격이라 십 리도 못 가 발병이 날 수밖에 없다.


 한민족은 똑같은 봉급(특히 배급제도)보다는 도급이라야 생산성을 높인다는 것을 김일성은 몰랐던 것이다. 조선 500년 가난의 유산도 그 지독한 승유사상(주로 성리학)이라는 이데올로기로 자유분방함의 민족성을 죄어 눌러 민족적 역동성(에너지)을 발산 못 하게 한 결과로 본 것이다.


전체주의적 성향이 강한 일본인 정서에는 오히려 공산주의가 쉽게 먹혀, 혹 선택했었다면 동구 공산 국가들처럼 실패의 쓴 잔이 아니라 공산이념이라는 사회주의적 꿈을 멋지게 이루어 냈을지 혹 모를 일이다.


 전번 ‘한.일 월드컵’ 때 한국과 일본의 분위기 비교에서도 엿볼 수가 있었다. 일본은 질서가 만점으로 났으나 분위기가 냉랭한 경축식 같은 대회였었다고 하는 데 반해 한국은 나라가 요절날 듯 그 열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요란한 잔치 같은 대회를 치렀다는 사실이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다. 


일본은 월드컵대회를 했으나 한국은 월드컵잔치를 벌였던 것이다. 일본이 눈으로 치렀다면 한국은 기분으로 치렀다는 말이 된다.


 이렇게 풀어놓으면 잘해내는 민족적 장점의 최대치의 수확물이 지난 2002년 월드컵이라 하겠는데, 이 우리 민족성향을 잘 파악 활용한 인물이 바로 ‘히딩거 감독’이다.


 위계질서의 화합이 아니라 개성을 발휘시킨 융화의 힘 그 적절한 민족적 에너지의 장점의 활용이라는 점에서 히딩거감독은 거장이 된다.


 어찌 세상 물정을 2분 법적 단순잣대로 재단할 일인가. 이것과 저것의 종합적 관계로 봐야 마땅하다면 우리의 서툰 예약문화나 코리아 타임도 그럴 수밖에 없는 연유가 있다 생각되어 우리의 민족성향을 바탕으로 해서 살펴봤다.


 하지만 21세기 오늘 이 시대는 지금까지 살아온 긴 역사의 시대와는 완연이 다른 격변의 시대다. 시간개념과 예약절차는 필수 생활 기본이다. 내가 먼저라는 이기주의적 서툰 줄서기식 같은 고약한 성질의 고집으로는 부패의 기생충만을 기생시킬 뿐 오늘을 살아가는 세계시민으로서의 덕목에서는 분명히 낙제점이다.


 새 시대 문화민족으로 거듭나는 민족성 탈바꿈이라는 산모의 고통을 견디는 노력 없이는 만년 후진적 떠들썩한 모습으로 세계인들에게 폐를 끼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 21세기를 함께 살아가야 할 세계시민으로서의 책무를 가벼이 여길 수 없지 않나 싶다. 내식대로의 삶에서 자긍심을 갖는다는 오기를 부린다면 더 할 말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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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6
서툰 줄서기

 
 줄을 선다 함은 지금 혼자가 아니라 남과 더불어 살겠다는 각오이며 사회공동체의 의무를 다하겠다는 약속이다. 이는 이기심을 줄이는 시민의식으로서의 최소한의 미덕이다.


 우리는 이 줄서기에 매우 서툴고 기다릴 인내심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스스로 많이 개탄하고 있는 의식(버릇)이다. 선진국 시민 자질의 첫 출발이 되는 교통질서 최하위국 불명예는 그래서 어쩌면 당연하다. 


 줄서기 생활화 선진국 30년 생활에서도 아직 나의 줄서기는 유치원생 수준이니 쉬운 듯 어려운 것이 이 줄서기다. 그래서 병원이나 은행에서 나의 줄서기는 이네들처럼 느긋이 기다리지 못하고 늘 부글부글 안절부절 못한다.


 교과서에서 배운 은근과 끈기라는 민족 근성은 순 거짓말인지 빨리빨리 문화는 한국인의 상징으로 자리 잡아 세계인들이 알고 있을 만큼 우리는 불같이 급하고 내가 먼저라야 성이 풀린다. 느긋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순진함은 무능의 표본이 되고, 약고 눈치 빠름이 유능한 처세술로 평가받고 있다.


 이런 약삭빠른 자들은 물론이고 돈 있고 힘 있는 자들도 줄 설 줄을 모른다. 아니 서려고들 하지 않을 뿐더러 안 서는 것을 특권으로 여긴다. 그들만의 출입구와 승강기가 특별히 따로 있고, 밑돈 거래, 지름길 뚫기는 이내들의 특기다. 


 이처럼 권력과 금력이 모든 것에 우선이 되는 사회에서는 권력과 돈이 목적이 되고 우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해서 권력을 잡아라, 돈을 벌어라, 눈에 쌍심지가 선다.


 과거급제가 그러했고, 지금은 고시합격이, 대통령직이, 국회의원직이 돈과 권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움켜지는 하늘만큼의 신분상승이 되는 인생판도의 갈림길이 되니 수단과 방법을 가릴 여유가 없다. 어딜 가나 팽팽한 경쟁의 긴장감으로 온 사회가 칼날처럼 날 서 있다.


 이 권력지향적 풍토는 초등학교 반장 선거에서부터 대학 학생회장 선거에까지의 교육과정에서 이골을 익혔으니 선거철만 되면 메뚜기가 철을 만난 듯 신바람을 내며 요란해진다.


 선거가 무엇인가? 모임의 대표(leader)를 뽑는 절차다. 내 판단으로 좋다고 여기는 사람을 법 절차대로 찍으면 된다. 


 시민단체라는 여론몰이꾼이 설치고 대통령이 창당대회에서 “선거 필승” 구호를 외치면 기름을 부은 듯 선거 열기가 온 나라에 소용돌이친다. 


 나는 시민단체의 역할은 서툰 줄서기를 계몽하고 선거 부조리를 감시 고발하는 등의 사회가 살맛을 내는 소금 소임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 생각하고 있다. 왜그러냐 하면 그들도 줄을 서야 하는 민주시민이지 줄 밖 특권층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민단체의 역할은 사법적 판결권이 아니라 사회정화 역할에 한하며, 양약적 치료효과 쪽보다는 한약적 보약 효과 쪽이기를 바라서다.


 선거에서의 최종적 선택권은 유권자의 몫이다. 이는 선거 존재의 이유이며 시민 개개인의 성스러운 권한이다. 판단의 능력이 서툴거나 모자란다 해서 간섭의 구실일 수는 없다. 모든 판단은 능력과 상관 없이, 아니 그것까지도 포함해서, 개인의 자유이며 선거의 대명분인 것이다. 그래서 부부간에도 무간섭 비밀이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 선거의 상식이며 묘미다. 


 더욱이 줄을 서지 않겠다는 듯한 “구속을 당할지라도” 라는 발언은 전투적 용어 같아 시민사회단체의 용어로는 부적절하고 섬뜩하다.


 선거는 절대로 전투가 아니다. 전투는 과정이라는 절차가 무시된다. 기어서 가든 날아서 가든 고지에 깃발을 꽂는 자만이 말할 자격이 있는 목적 그 자체가 최선이 되지만 선거는 깨끗한 후보, 깨끗한 선거운동, 깨끗한 투표행사, 깨끗한 승복이라는 절차가 빚어내는 과정의 미학이며 줄서기 문화의 꽃이다.


 만약 시민단체가 판단한 명단 공개식 인물 고르기가 정당하다면 복잡한 선거절차를 생략해 버리고 시민단체에 의한 간접선거를 해버리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줄을 선다 함은 차례가 온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줄 서는 자체가 무의미하거나 불이익이 온다면 누가 지루하게 줄을 서겠는가? 줄서기는 민주주의 제1의 덕목이다.


 행정력이 혼란했던 소련 고르바초프 시절 빵 가게 앞에서 길게 줄 서다 지친 한 중년 남자가 “이놈의 고르비 때려죽이고 올 테다”하고 줄을 이탈하고 간 그가 얼마 있다 돌아와서 하는 말이 “크레믈린 정문 앞에 갔더니 나처럼 고르비 죽이러 온 사람의 줄이 여기보다 더 길어, 젠장” 하더란다.


 이쯤이면 줄은 무의미하고 누구든 비상수단을 생각할 것이다.


 쿠데타 같은 정치 새치기도 얌체지만 잘 빠져나가 주지 않는 정치 9단들의 줄도 문제이고 밉상이다. 심판이 끝난 자들이 또 서고 또 와서 서고 3선 4선, 도대체가 물러날 기미가 없다. 사정이 이러하면 러시아의 빵집 앞 줄서기처럼 줄은 무의미해진다.


 줄서기에서 중요한 것은 차례대로 빠져나갔으면 줄이 줄어들어 좋은데 무슨 미련이 남아 줄 쪽을 기웃거리는 추파가 혐오스럽다.


 물레방아 돌린 물은 다시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는 것쯤 아실만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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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9
신동, 천재 그리고 노벨상

 

 신동, 천재가 노벨상으로 이어지기를 우리처럼 바라는 국가도 아마 들물게다. 신동,천재가 소문이나 여론의 부추김에 의해 대성하는 것이 아니라면 평범 속에서 스스로 여물도록 내버려 둘 일이다. 일상적 삶 속에서 자기일에 성실히 살아가는 자의 천재성이야말로 사회의 소금이 되는 참 천재성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공명심의 천재성은 사회에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있어 해가 되는 사회악의 씨앗일 수가 더 많다는 것을 나는 세계영웅전을 읽으면서 발견한다. 영웅전을 장식하고 있는 그 많은 전쟁 천재들의 야망의 결과는 무고한 인민들의 피로 지구촌 강산을 물들였을 뿐이다. 때론 신의 욕심까지 가담되면 그 비극은 극에 달한다.


 우리의 성웅’ 이순신’을 내가 존경하는 이유는 개인적 공명심이나 야망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만 그 열악한 조건에서 24전 24승이라는 천재적 전쟁기적을 만들어낸 하늘을 닮은 분이시기 때문이다. 평범 속에서 올곧게 살다 늦은 나이에 쓰인 그분의 천재적 영웅전은 왜란이라는 위란이 탄생시킨 것이지 그분의 야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동서고금 세계 전쟁천재 영웅들은 다만 영웅이 되기 위해 지구촌을 분탕질했지만 충무공은 평범 속에서의 행위셨기에 영웅을 넘어 성웅이라 높임을 받는 것이다.


 신동, 천재가 그 자신은 물론, 사회에 의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더불어 사는 일상적 평범을 먼저 버릇 들게 하는 것이 우선이 되었으면 해서 하는 말이다.


 ‘박주영’ 이라는 축구천재 출현으로 가뭄에 단비 만났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풍선처럼 띄우고 있다. 축구는 11명이 호흡 맞춰 뛰는 운동인데 더불어 함께라는 일원의식을 망각하고 개인 명성에다 욕심까지 목에 차면 헛발질로 될성부른 떡잎이 시들까 걱정된다.


 또 한분있다. 신문마다 방송마다 경쟁하듯 띄우고 있는 이름인데 ‘황우석’교수라는 걸출한 인재 등장으로 온 국민이 노벨상감이라 흥분하고 있다. 실험실을 지켜야 할 학자를 방송국마다 얼굴 내기 경쟁이고 국가적 큰 행사때마다 불러내며 뉴스가치 1호로 띄우고 있다.


 심지어 황교수 노벨상 후원회까지 만든다 하니 그 열기가 짐작이 된다. 하긴 ‘노사모’의 요란에 의해 대통령까지도 만들어 낸 나라이니 ‘황사모’후원회에 의해 노벨상인들 못받을까 싶긴 하지만 좀은 차분해 주었으면 어떨까 싶은 것이다.


 노벨상은 ’구하라 얻을 것이다’라는 기도나 갈망으로 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상이란 타겠다는 목적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일을 성실히 감당하고 있는 과정의 부산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요란한 로비에 의해 욕심으로 얻어진 상보다는 실험실에 묻혀있는 한 무명의 과학도가 어느날 자고 일어나보니 노벨상이 주어지더라 라는 상이 그래서 더 값지고 빛나 보이는 것이다.


 신동, 천재라는 될성부른 유망주의 빛이 발하는 것을 원하다면 평범 속에 둘 일이다. 기대는 부담이 되고, 부담은 집이 될 뿐이다. 최선의 도움은 평상심으로 일하게 놔둘 일이다.


 포항공대 교정에는 갈릴레오, 뉴턴, 아인슈타인의 흉상이 만들어져 있고 그옆에 제 4의 천재 과학도의 탄생을 바라는 뜻으로 빈 받침대만 하나 더 만들어 놓았다는데, 학생들에게 욕심을 돋우는 부담만 줄 뿐이다. 목적 지향적 우리 교육의 치부를 드러내 보인 예라 하겠다.


 목적만을 위해 뛰는 사람들보다 과정에 충실한 사람들이 사는 사회가 얼마나 보기에 아름다운가. 갖겠다는 충혈된 눈빛보다 하나하나 쌓아가는 즐거움 그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눈빛이 얼마나 순수한가. 순수함, 이보다 더 값진 보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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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2
쌀의 형이상학

 

 쌀에다 어려운 철학적 용어를 붙인 것은 멋 부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우리 민족에게 쌀은 먹거리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뜻에서다.


 김일성 주석이 입버릇처럼 북한 인민에게 약속한 과업의 목표가 쌀밥과 고깃국에 기와집을 올리고 비단옷을 입히는 것이라 말했다는 데서도 잘 표출되어 있다. 


 이 꿈은 북한의 통치이념이기 전에 5천 년 우리 역사에서 한 번도 실현해보지 못한 나라 다스림의 숙원이기도 했다. 다행히 남한은 한 군사독재자에 의해 벌써 지난 세기 70년대 중반에 깔끔히 달성했지만, 불행하게도 북한은 김일성 생전에도 이루지 못했고 그의 아들 대로 넘어온 오늘까지도 진행형 유업으로 남아 있는데 상황은 더 악화하여 인민이 기아선상에서 허덕이고 있다는 소문이다.


 "밥을 먹었느냐?"가 아침 인사말이 되리만큼 먹는 문제가 절박한 백성에겐 그래서 쌀밥이 정치의 목표가 되는 것은 당연했다.


 인간 기본 삶의 형태가 '의식주(衣食住)'라 하는데 우리 민족에게는 그중 식(食)이 이처럼 시급한 문제가 되어 있었다. 특히 쌀은 그 중심에 있었고, 우리 문화를 이끄는 상기둥 역할을 담당하게 되어 논과 밭은 곧 생명줄이라는 신앙적 대우로 토지라는 의미가 신성시되고 쌀은 하늘이 준 은총이었다.


 쌀이 재산의 기준이 되고, 돈이 되고, 세금이 되고, 품삯이 되고, 물건 값이 되는 쌀이 문화를 주도하는 쌀 문화 사회였다.


 이렇게 쌀은 우리의 생명줄이었고 근본이었다. 금본위가치가 아니라 쌀 본위가치 사회였다. 인부의 노임도 쌀이었고, 보부상의 물물교환 시의 기준도 쌀이었고, 거지 동냥도 쌀이나 밥이었고, 승려들도 집집을 돌며 동냥하듯 시주 쌀을 보시하러 다녔다.


 천석꾼, 만석꾼 볏섬 지기로 부를 가늠하는 농경사회의 자본개념으로서의 쌀은 절대적 기준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사고판다는 통상의 우리말로는 쌀 거래에서만은 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정반대의 의미로 거래된다.


 쌀을 팔 때는 "쌀을 낸다"하고 쌀을 살 때는 "쌀을 산다"가 아니라 "쌀을 판다"고 말한다. 이때만은 화폐(돈)가 기준이 아니라 쌀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라는 의미를 알면 쌀에 대한 우리의 경외심을 읽을 수가 있다.


 시장에 가서 쌀 한 말을 분명히 샀는데 "쌀 한 말을 팔았다"니 희한한 어법이다. 그러나 간단하다. 쌀이 당당하게 화폐가치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쌀을 산 것이 아니라 돈이 쌀에 팔리고 쌀을 가지고 온 것이다. 쌀의 주인의식(자존심)을 지켜 주려는 마음씀이 어떤가를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그리고 우리가 통산 "너 밥 먹었느냐?"고 할 때의 밥은 한 그릇의 밥만이 아니라 부식까지 포함된 한 끼를 의미한다. 밥 한 그릇을 먹기 위해서는 분명히 김치, 국 같은 부식을 곁들여 먹었는데도 부식은 완전히 엑스트라로 취급당하고 만다. 말 그대로 찬밥 신세다. 그래서 우리식으로 부식이나 간식이 되는 빵 샌드위치 같은 것으로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 끼니를 때운 기분이 안 든다고 하는 분들이 많다.


 해방 후 쌀 파동이 나자 하지 군정장관이 "왜 한국인은 쌀만 먹느냐? 고기도 먹고 국수도 먹고 하면 좀 좋으냐?"고 말했다는 웃기는 일화도 그래서 생길 만도 하다.


 서양의 식탁을 보면 모든 음식 하나하나가 독립된 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데 반해 우리의 식탁에서는 밥만이 주인 역할이 되고 있으므로 식탁이 아니라 밥상이고, 그냥 숟갈이라 하지 않고 밥숟갈이라 하고, 그릇이면 될 것을 밥그릇이라 굳이 밥을 앞세운다. 서양 사람인 하지 중장의 말이 그래서 이해가 된다. 단 그 귀하고 비싼 고기를 예로 든 것이 바보스럽기는 하지만.


 이런 의미에서 "떡(빵)으로 살 것이 아니오"라는 성경 구절의 우리말 번역은 "밥으로만 살 것이 아니오"라 고쳐져야 맞다.


 그런데 큰 문제가 났다. 그것도 심각하다. 자유무역을 내세워 5천 년 의식을 바꾸라는 외부 압력에 속수무책이라는 것이다. 이제 겨우 쌀밥과 고깃국 소원을 푼 지가 얼마인데 쌀농사를 한국 땅에서 안 해도 된다니 이 어인 일인가.


 하루에 쌀로 지은 세끼 밥을 꼬박꼬박 챙겨 먹어야 사는 쌀 식성이 유별난 민족의 식탁을 남의 나라 땅에 의존하여 팔아(사)먹어야 하다니 아무래도 불안하고 기이하다.


 공산품 만들어 수출해서 먹고 살려니 어쩔 수 없긴 하지만 수지타산 때문에 농부도 농부지만 말짱한 농토를 그냥 생으로 묵힌다는 것은 미래국토균형발전을 생각하면 아찔하기만 하다.


 "엄마 Korean은 왜, rice만 먹어야 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둘째가 밥을 먹다 말고 제 엄마에게 따지듯 묻는다. 
 옆에서 내가 "왜 밥이 맛이 없니?" 하고 묻자, 


 "그게 아니고 캐네디언들은 햄버거, 프렌치프라이, 고기, 사라다, something 다른 것 change 해서 먹는데 우리는 어제도 오늘도, 아침 점심 저녁, 밥 김치 국, 밥 김치 국, 그래! 아빠는 좋아?"


 작년에도 금년에도 어제도 오늘도 아침, 점심, 저녁, 변할 줄 모르는 단조로운 식탁메뉴가 어쩔 수 없이 길들어 먹으면서도 이곳 서양 친구 집의 다양한 메뉴가 부러운 반서양 아이인 딸에게 나는 엉뚱한 설명(변명)을 할 뻔했다.


 "이렇게 먹는 것도 큰 복이란다. 매일 흰 쌀밥을 그것도 하루 세끼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부자이면 행복인 줄 아니? 아버지가 너만 할 때는 아침은 순 꽁보리밥에 점심으로 보리죽, 저녁은 운 좋으면 수제비. 그리고 그다음 날에도 그렇게 먹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단다. 때로는 그마저 없어 나무껍질을 벗겨 먹었고, 쑥을 뜯어 밀가루 묻혀 버무려 끼니를 때운, 단지 살기 위해 연명해야 하는 먹음만이 있었단다. 너희들은 고기 없는 밥상을 상상해본 일이 있느냐? 오늘은 무엇으로 허기진 배를 채울까가 아니라 어떤 맛있는 것으로 먹을 까가 너희들의 관심이지 않으냐?"고.


 그러나 나는 알아들을 수도 자랑일 수도 없는 과거 가난의 유산을 무슨 큰 훈장처럼 떠벌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과거(가난)와 오늘(풍요)과의 비유에서만 이해가 되는 상대적인 잣대인 것을 과거(가난)가 없는 아이들에게 이해시킨다는 것은 내가 희극배우가 되기(에) 십상이다.


 그렇다. 배고픔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고 자란 우리의 과거가 무슨 자랑이라고, 춘궁기니, 보릿고개니 하는 비참한 언어의 의미를 우리에게 물려 가르쳐준 것은 순전히 조상의 허물이라 탓할 진데, 우리가 우리의 2세들에게 탓함을 받지 않기 위해서도 열심히 그리고 성실히 1세의 도리를 다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또 하게 된다.


 남 잘 때 같이 자고, 남 놀 때 같이 놀 수는 없다. 남의 손이 깨끗할 때 내 손은 기름때가 묻어 있어야 하고, 남이 싫어 버린 일을 주어서 일을 해야 하는 이 처신이 결코 즐겁고 좋아서가 아니라 과거의 가난이 뼈저렸기에 감기는 눈을 비비며 새벽 일찍 가게 문을 열게 된다.


 "그러하오나 하늘이시여! 결코, 돈만 아는 돈벌레가 되지 않게 도와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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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8
샌드위치 예찬

 

 50년 서양에 살며 느낀 이곳 문물 중에서 딱 하나를 고르라면 두 말 하지 않고 샌드위치를 꼽을 만큼 나는 샌드위치를 좋아한다. 순종 동양인이면서도 순종 서양 음식인 샌드위치를 즐겨 먹는다는 것, 참으로 희한한 먹성이다. 서양에 이민 와 살고 있는 처지에서 보면 이 얼마나 다행한 축복인지 모른다. 


 상상을 해보라. 서양에 와 살면서 샌드위치를 모래알 씹듯이 목청 너머로 넘기기를 힘들어 한다면 얼마나 이민생활이 불편하고 고달플까? 내 경험으로 미루어 동정이 가는데, 그런 분들이 내 주위엔 뜻밖에 많다.


 나는 오랜 이곳 생활에서 적어도 하루에 한끼는 샌드위치를, 그것도 즐겨 먹고 사니 이민살이를 그만큼 쉽게 해준 고마움으로 오늘은 샌드위치 예찬을 아낌없이 쏟아내 볼까 한다.


 십여 년 전 모국방문 때의 일이다. 비행기 옆 좌석에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국인 부부가 함께 가고 있었다.

팝콘 먹는 재미로 영화관에 간다는 어느 어린이 만화 주인공처럼 나는 기내음식 먹는 재미로 비행기를 탄다고 하리만큼 항공사에서 정성으로 제공해주는 별미를 주는 족족 싹싹 핥아먹는데 내 옆좌석의 젊은 부부는 둘 다 이 세계적인 별미를 안 먹고(못 먹고) 봇짐에서 싸 온 김밥을 꺼내먹는다. 이런 고급 서양음식도 못 먹는다면 샌드위치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더욱 희한한 것은 부부가 약속이나 한 듯 못 먹는다니 이런 천생연분이 또 있나. 로마에 갔으면 스파게티쯤 맛있게 먹으면 얼마나 좋겠나만 생리적 형상이라 강제로 먹일 수도 없는 처지고 보니 그저 딱할 뿐이다.


 나는 이민 초기 공장에 다닐 때 이곳 공사판의 노동자들처럼 플라스틱 런치박스를 들고 다녔는데, 그 안에는 샌드위치 두 개, 바나나 하나, 사과 하나, 오렌지 하나에 보온병이 들어있고, 그리고 작은 문고판 책 한 권이 한쪽 공간을 차지한다.


 이런 런치박스 속의 메뉴는 가난했던 초등학교 시절 푸짐하게(?) 차려진 소풍 점심 도시락의 메뉴와 많이 닮아 있었다. 흰 쌀밥이 샌드위치로 고구마가 바나나로 바뀐 것이 다를 뿐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매일 소풍 가는 기분으로 런치박스를 들고 다닌 셈이 되고 소풍 때의 점심처럼 매일 푸짐한 점심을 먹은 셈이 된다.


 그 후 20여 년 넘게 편의점을 운영했는데, 가게에서의 샌드위치의 역할 또한 지대했다. 캐나다의 편의점 6~7할은 한인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데 이곳 가게의 생리는 장시간 서서 손님을 쉼없이 상대해야 한다. 한국 음식은 개성이 강한 한국인을 닮아서인지 세계 어느 나라 음식보다 냄새가 독특하다. 상점에서 한국 음식 냄새를 풍기는 것은 들어오는 손님을 "나가시오" 하는 신호와 같다. 파산하겠다는 각오가 아니라면 한국 음식 먹는 것을 삼가야 한다. 그래서 샌드위치를 죽어도 못 먹겠다는 분들은 배고픔을 오래 참았다가 집에 들어가 배불리 먹곤 해서 위장병을 얻은 분들이 많다.


 나는 샌드위치를 아침에 많이 만들어 계산대 서랍에 넣어놓고 손님이 있거나 없거나 심지어 손님을 받으면서도 먹는다. 그러니 샌드위치는 나같이 가게 하는 사람들을 위해 특별히 고안된 음식이 아닌가 여겨질 만큼 고마운 음식이다.


 샌드위치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으며, 옆 사람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만들기 쉽고, 변질이 잘 안 되며, 종류 또한 다양해서 좋다. 전문가적 요리 솜씨가 없어도 누구나 쉬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인의 음식으로는 안성맞춤이다. 초등학생이면 자기 샌드위치 쯤은 스스로 만들어 먹는 것이 이곳 가정이다.


 만드는 시간도 짧을 뿐 아니라 재료 또한 간단하다. 버터, 햄, 쨈, 피넛버터 같은 것을 종류도 다양한 빵에다 구미에 맞게 바르고 얹어 먹으면 된다. 버스나 지하철에서도, 도서관에서도, 병원 대기실에서도, 공원에서도, 심지어 걸어가면서도 먹을 수 있어 좋다.


 무엇보다 샌드위치는 변질이 잘 안 되고, 보관과 지참이 편리해서 좋다. 왁스 종이로 싸거나 비닐봉지에 넣고 다니다 먹은 후 버리면 된다.


 더욱 샌드위치가 내 맘에 쏙 드는 기막힌 이유는 값이 엄청(나게) 싸게 먹힌다는 데 있다. 아니 더 큰 이유가 있다. 샌드위치는 소화가 잘된다는 장점이 있는데, 어릴 때부터 위장병에 시달리고 있는 내겐 참으로 구세주와도 같다.


 아니 진짜로 샌드위치의 효용적 가치에 감사해야 할 일이 따로 있다. 곤히 잠들어 있는 아내의 새벽잠을 방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 기막힌 이유를 어찌 빼놓을 수 있단 말인가. 시어머니보다, 아이들보다, 남편보다 새벽 일찍 먼저 일어나 밥을 지어야 하는, 고추보다 더 맵다는 시집살이에서의 해방, 가히 혁명적이다. 이 혁명을 가능케 한 것은 순전히 이 샌드위치의 위력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아버지는 물론 아이들도 제각기 조용히 일어나 제 샌드위치를 제 스스로 만들어 먹고 싸 가지고 출근을 하고, 학교에 간다.


 그러고 보니 오래된 신문기사 한 토막이 생각난다. 미국의 포드 부통령이 닉슨 대통령의 탄핵 하야로 대통령이 되어 아직 백악관으로 이사도 못하고 자택에서 첫 대통령직을 수행하러 가는 날 새벽 혼자 조용히 일어나 스스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고 출근했다는, 우리 동양인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 따지고 보면 샌드위치이기에 가능한 이야기다.


 가히 샌드위치 당신은 여성해방을 가능케 한 1등 공신으로서, 특히 이곳 우리 한국의 여성으로부터 감사와 찬사를 받아 마땅한 충분한 자격과 이유가 있다.


 나는 지금 내가 만든 남 보기에는 별로 맛있어 보일 것 같지 않은 샌드위치 한쪽을 맛있게 먹으면서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식성을 주신 하늘에 감사하는 맘으로 이 글을 쓴다.


 "샌드위치 만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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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0
비빔밥

 

 냉장고 문 열어 먹다 남은 것들 이것저것 넣고 고추장 한 숟갈 참기름 몇 방울 떨어뜨려 비비면 한 끼 훌륭한 비빔밥이 된다. 계란프라이 해서 얹으면 더 좋고.


 이곳 토론토는 이민 도시답게 각 민족고유 음식점 UN본부라 해도 가히 손색이 없다. 그런데 여러 가지를 섞어 볶거나 끓여 먹는 음식은 있으나 우리처럼 갖가지 무친 나물들을 섞어 비벼먹는 비빔밥은 아직 보지를 못했다. 


 우리나라 항공사들이 기내식 비빔밥을 개발해 내놓았는데 기대 이상으로 인기라 한다. 하긴 이곳 태생인 우리 아이들도 한식 중 불갈비와 비빔밥을 최고로 친다.


 세계여행을 하다 보면 국경선을 넘을 때마다 말이 달라지고 음식이 달라진다. 그러면서도 음식은 이웃사촌답게 비슷하게 닮아 있는 것이 보통인데 한국 음식은 이웃 일본과도, 중국과도 확연히 다르다. 맛과 냄새와 색깔의 강렬함이 타민족들이 쉽게 접근이 안 된다. 쉽게 접근되는 일식, 중화식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음식과 민족성이 어떤 상관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색깔과 맛에 쉽게 접근이 되는 일식처럼 그들은 상냥하게 보여 쉽게 호감이 가는데 반해 우리음식은 인상부터 강렬한 김치 고추장처럼 튀는 개성으로 호감은 들 갈는지 모르나 일단 그 맛에 절여들면 또 찾게 만드는 그 뭔가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강한 개성들의 돌출로 배가 산으로 가는가 싶다가도 어느 시기를 지나고 보면 가지런히 모양새를 내고 있는 것이 마치 비빔밥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 먹거리 재료들을 섞어 볶거나 끓여 먹는 찌개류 음식은 각개 재료들이 다른 재료들과 섞이면서 자신의 고유 맛들이 서로 간에 스며들어 새로운 맛을 내는데 반해 비빔밥은 각개 나물들이 자기고유의 맛(개성)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다른 맛(개성)과 어우러져 내는 조화의 맛이 생명이다.


 찌개류가 유화라면 비빔밥은 모자이크화라 할까? 아니다 그보다는 오케스트라가 더 적절하다. 각 악기들의 독립적 고유 소리들이 서로간에 방해 받지 않으면서 내는 여러 악기소리의 조화, 너무도 비빔밥에 닮아 있지 않은가.


 나는 여러 민족들과 오래 더불어 살아본 결론은 우리민족성이 개성이 강하다는 것이다. 그 개성들이 내는 강한 목소리들로 해서 때론 사회가 혼란스럽게 보여 우려되긴 해도 목적이 한 방향으로 같아지면 엄청난 힘으로 나타남을 보게 된다.


 일본의 정원엘 들어가 보면 나무 한그루, 돌멩이 하나도 우연히 거기에 있거나 자라고 있는 것이 없고 정원이라는 전체적조화(和)를 위해 인공적으로 옮겨지고 다듬어진, 전체를 위해 개성이 무시되고 있는데 반해 우리의 정통 정원인 비원에 들어가 보면 돌멩이 하나 나무 한그루도 사람의 손이 간 흔적이 보이지 않고 제멋대로 놓이고 자라고 있는 듯 한데도 전체적 어울림에는 아무런 흠이 없다. 되레 각 개성의 강렬함이 전체를 압도 하듯 하면서도 묘하게 전체와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 지극히 비빔밥 적이다.


 일본 음식엔 비빔밥 비슷한 것도 없다고 하는데, 그 민족성으로 봐 당연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집단을 위해 자기 개성을 죽이고 동화 되는 것을 화(和) 정신이라 해서 으뜸의식으로 치는데 반해 우리는 참을지언정 자기를 포기하려 들지 않는 개성을 중시한다. 전체보다 내가 중요한 콩가루 같아 불안하나 일부만을 보지 말고 비빔밥처럼 버물려 씹어봐야 한국 진 맛을 안다.


 임란 때 관군은 미약했으나 의병은 눈부셨고, 부패한 관리들에 의해 나라는 망했으나 독립투사들은 용감했다. 나라 다스림을 잘못하여 IMF를 당했으나 장롱 속의 금은붙이를 꺼내 구한 것은 소외되고 짓밟힌 민초들이었다. 월드컵 때의 그 함성도 만들어진 조직의 목소리가 아니라 자생적 함성이었다. 일본은 월드컵 대회를 했다면 우리는 월드컵 잔치를 했다.


 물론 이제쯤은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부족한 성숙된 줄서기 문화, 그 질서의식까지 곁들여진다면 금상첨화겠지만, 비빔밥문화 그 개성들의 조화에 의해 늘 밝은 쪽을 향해 정리되리라 나는 굳게 믿는다. 


 우리의 통일도 전쟁이라는 강압적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손에 손잡고 어울려내는 비빔밥 같은 평화의 모습으로 그렇게 오리라 희망하고 있다.


 이번의 광화문 백만 시민의 질서가 없는 듯 질서를 내는 함성의 힘도 같은 맥락의 코리언만이 해낼 수 있는 보기좋은 모습이다. 코리언 만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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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odong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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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14
먹기 타령

 

 살고 있다 해서 생물이고 생물이기에 먹는다. 그리고 생물이기를 포기 당하는 날 먹기를 멈추고 어떤 형태로든 다른 생물의 먹이가 된다. 이는 한치 어긋남이 없는 자연의 순환질서인 운명적 과정이다. 


 생물이기에 먹어야 하는 이 삶의 과정은 기본적으로 성장(자람)과 번식(섹스)에 관여되어 있으며, 무의식 의지라는 끈질긴 본능적 활동 기간이다. 이 못 말리는 먹기와 성장과 번식활동이 이성적 의지가 아니라 본능적 의지라는 데서 문제는 간단치가 않다.


 다행스럽게도 인간을 제외한 모든 동식물에서는 이 못 말리는 본능이 무한 자유의지가 아니라 자연질서에 엄격히 통제된 데 반해, 인간이라는 생물만은 자연법 질서의 통제를 거부하는 몸짓을 보이면서 탈은 끝 간 데를 보인다는 것이 문제다.


 인간 스스로의 윤리라는 자제력 장치가 작동은 하고 있긴 하지만 너무도 미약하여 고삐 풀린 망아지 꼴이다. 때와 장소를 분간 못 한 욕망은 한계가 없다.


 동물은 발정기 때만이 교합이 가능하지만, 인간은 연중무휴 밥 먹듯이 한다. 동물은 배가 부르면 먹음직한 먹이가 있어도 잡아먹지도 저장하지도 않는데, 인간은 먹고 또 먹고, 훔쳐 먹고, 사기 처먹고, 곳간에 쌓고 또 쌓는다.


 가난할 때야 살기 위해 먹는 연명이었지만 살만해지자 골라 잡아 즐기는 먹기 행각 사치가 하늘 끝 간 데를 모른다. 시장이 반찬인데, 진수성찬에 길들면서 고깃국도 투정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엇을 먹을까 보다 먹을 수 있다는 자체가 행복이었는데 말이다.


 먹거리가 있고 그것을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건강을 가진 것,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트림하고 팔을 베고 누운 팔자, 무엇을 더 바랄 행복이냐 했는데.


 나는 어릴 적부터 식탐이 많아 "먹돌이"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먹이에 대한 집착이 남달라 내게 주어진 하루 3끼는 하늘이 준 특권이라 여겨 끈질기게 챙겨 먹었었다. 어쩌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한 끼를 건너 뛰어야 했을 때는 그것이 타의든 자의든 슬퍼했었다. 


 놓친 한 끼는 내 생에서 다시는 찾아 먹을 수 없는 손해라는 생각이 들어서고, 건강이 나빠 못 먹으면 그래서 슬프고, 가난 때문이면 그 더욱 슬펐다. 만약 강제에 의해서라면 아마 나는 목숨 걸고 저항했을 것이다. 아니 저항할 것이다. 인권적 문제의식 이전에 생존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살겠다는 동물적 방어 의식이라 깔봐도 좋다. 이보다 더 절실한 저항의식이 어디 또 있겠는가. 그래서 감히 말한다. 어떤 물리력도, 그것이 인력이든 자연의 힘이든, 생물의 먹을 권리를 박탈할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고. 그것은 죄악 중의 죄악이요 폭력 중의 폭력이다. "먹을 때는 개도 안 때린다."는 우리 속담은 절대 진리다.
 정치의 기본 틀은 백성을 굶지 않게 하는 것이다. 3끼를 못 먹이는 정권이 있다면 그 정권은 다스리기를 실패한, 아니 포기한 정권이다.


 과거 우리에겐 쌀밥과 고깃국은 특식 중의 특식이었고, 가락국수 한 그릇, 만두 한 접시는 별미 중의 별미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아무리 고급음식도 그저 일상적 한끼 수준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별미다운 별미의 맛을 잃었다는 건 풍요가 준 불행이라 해도 된다.


 아니다. 바른대로 말하자. 이보다 더 한 행복이 어디 있는가? 행복에 취한, 행복의 극치인지 모른다. 이때가 가장 위험한 때이지 싶다. 건강할 때 건강을 낭비하기 쉬운 것처럼 풍요의 낭비, 이것이 바로 타락의 초대장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배부를 때 배고픔을, 건강할 때 아픔을, 행복을 통해 불행을 알기는 바늘구멍에 낙타 지나기만큼 어려운 경지라는 것을. 이 어려운 경지를 터득하는 일이야말로 참 종교의 심성에 접근했다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나는 요즘 새삼 느끼고 있는 행복이 있다. 집에서 두세 가지 반찬으로 밥을 먹을 때인데, 입안에서 밥 특유의 달짝 고소한 맛을 느끼며 먹을 때의 그 감칠맛, 나는 이 맛을 지상 최상의 맛이라 명명(命名)하고 있다. 밥과 국 그리고 두세 가지 반찬이 어울려 만들어내는 맛의 오케스트라 향연(饗宴), 가히 맛의 예술이다. 이는 대장금의 왕의 진수성찬 수라상에서는 결단코 맛볼 수 없는 맛이다.


 이 단출한, 그러나 환상적인 밥상을 매끼 먹을 수 있다는 풍요와 더욱이 건강을 허락받았다는 사실에 눈물겹도록 행복해한다. 아마 나는 죽는 그 날 마지막 아침 밥상도 맛있게 먹고 갈 것이다. 그리고 눈을 감으며 내일 아침 밥상을 더는 대할 수 없음을 많이 또 많이 서운해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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