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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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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여주 출생,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기도 광수중학교 근무, 1992년 캐나다 이민, 캐나다문인협회 수필 부문 입상, 2006년 해외동포문학상, 작품집 <인생에 실패는 없다 다만 또 다른 삶이 있을 뿐이다>, <나이만큼 행복한 여자>, <밀리언 달러 티켓 나도 한장>,<행복이라는 이름의 여행>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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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oon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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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7
인생에 실패는 없다,다만 또 다른 삶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살면서 후회한다. 나는 망했어, 실패 했어 라는 말을 이따금 듣기도 하며 또 하기도 한다. 후회한다는 의미는 상황판단을 빨리, 그리고 정확히 해서 바른 길로 접어들기만 하면 회복하는데 그렇게 오랜 시일이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실패했다 라는 그 의미는 돌이키기엔 너무도 길고 커서 바로 잡아 세우기도 쉽지 않고, 그 상처 또한 상황에 따라 대단할 수 도 있어 영영 재기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기도 한다. 


 실패란 말을 쓸 때의 그 의미를 살펴보면 학교, 결혼, 자식 문제, 사업에 관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더러는 중학교, 고등학교도 떨어져 재수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자기가 지원하는 대학이나 학과를 가지 못해 그 이상도 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 나름대로 목표한 학교나 학과가 있어 그에 미치지 못했을 때엔 늘, 또는 평생을 가슴속에 개운치 않은 구석으로 남아 있게 된다. 


 지금이야 이만큼 살았으니 그렇지 않지만, 나는 대학 4년 동안 배지 몇 번 달아보지 못하고 졸업을 했다. 차라리 배지를 달지 않고 책만 끼고 다니는 것이 그나마 편했지 가슴에 배지를 달고 다니는 것이 오히려 창피했으니 말이다. 내가 당당하게 배지도 달지 못하고 다니는 만큼 가슴팍에 뚜렷이 보이도록 달고 다니는 아이들을 보면 부럽고 부러웠다. 그러하기에 어디 가서 학교 얘기가 나오면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듯 주저주저 기어들어 가는 것이다. 


 언젠가 누구에게 내가 만일 서울에서 태어났더라면 이대쯤은 들어갔을 거라고 큰소리를 쳤지만 아닌 게 아니라 학교 얘기만 나오면 지금도 그만큼은 주눅이 드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좋은 대학 나오고, 소위 출세한 사람들의 인생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누구나 그 나름대로의 삶이 있고, 가치가 있고, 행복이 따로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성공한 사람만이 세상의 온갖 복락을 다 누리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를 소유하면 다른 하나는 잃게 되어 있고, 어느 특정인만이 10가지 100가지 다 누리고 사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자칫 학벌이나 학력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얕잡아 보는 경향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좋은 학교, 일류 학교를 나왔음은 그 자신이 세상을 살아가는 발판으로, 자산으로 삼는 것이지 그것이 남위에 군림하기 위함은 아닌 것이다. 


 지금도 좋은 학교를 나온 사람은 그만큼은 인정을 해주고, 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아울러 상대방이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쉽게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하려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누구에게나 그 나름대로의 삶이 소중하고, 남에게 함부로 취급되어질 만큼 그런 인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나는 끝났어, 내 인생은 실패 했어 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어느 인생도 끝이 난 것도, 실패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세상에서 얘기하는 성공이란 것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성공이란 가치 기준도 다 다르기에 더더욱 그렇다. 


 우리는 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며 그렇게 살려 노력하며 산다. 진정코 고생이 고생으로만 끝나는 삶은 너무 지치고 무력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탄탄대로 순탄한 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남보다 더한 고통과 역경을 딛고 일어 선 경우가 너무나 많다. 나만 어렵고 고생하는 것처럼 생각하지 말자. 


 누구에게나 건강을 잃으면 다시 인생에 도전해 보고 싶어도 그건 불가능일 수 있다. 하지만 건강한 사람에겐 실패란 없다. 다만 입장과 상황이 바뀌인 또 다른 시간들이 있을 뿐이다. 이제 한시름 놓고 이것이, 이 고통이 다 였겠지 싶어도 다시 또 작고 큰 문제가 끝없이 이어 지며 나름대로의 삶의 무게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 삶이 아닐까 싶다. 


 내가 한참 어려울 즈음 명치 끝이 아프고 무거워 음식 맛도 없고 제대로 먹지도 못해 걱정하다가 내 지금 이런 상황에서 건강이라도 좋지 않은 진단을 받게 되면 그때야말로 끝이지 싶어 꽤나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찰 결과 신경성 소화불량일 뿐이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주님! 감사합니다.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돈이야 다시 벌며 일어설 수 있다지만, 건강의 치명타를 입게 되었으면 그때는 이미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즈음 서울엘 한 번 다녀와서 과감하게 남의 집 헬퍼로 뛰게 되었으니, 어떤 이는 내게 고생을 많이 하며 살았다느니, 굳이 헬퍼라는 이름을 붙여줘야 직성이 풀리는 이가 있는가 하면, 남의집 종업원이라고 부르기를 서슴지 않는 이도 있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물질적인 추구만을 하기 쉬워서 내 비즈니스를 하다가 그것이 잘못 되어 직장을 가져야 한다든지, 남의집 종업원을 해야 할 경우, 나는 망했어, 나는 실패 했어 라며 좌절하는 경우를 쉽게 본다. 더더구나 남의 이목을 중시하는 사회에 살다 보니 그 마음고생은 말이 아니다. 


 그렇지만 내 비즈니스를 할 때의 정신적, 시간적으로 끌려 다녀야 하는 것에 비하면, 종업원이라는 자리는 정신적으로 시간적으로 그만큼 편하고 자유스럽기도 하다. 


 이렇듯 겉보기와 달리 그 이면,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 비중을 쉽게 가늠할 수 없다. 그러기에 이런 경우 천석꾼이 천 가지 걱정, 만석꾼이 만 가지 걱정이라는 말이나, 기와집에 사는 사람의 행복과 초가집에 사는 사람들의 행복을 겉에 나타나는 것만으로 얘기하기 어렵듯이 우리네 세상 살아감이 이와 비슷하다고 보고 싶다. 


 우리네는 사람을 보고 대할 때 수평의 관계가 아닌 수직선상에 놓고 상대가 나보다 얼마나 많고 적게 갖고 있는지, 학벌이나 학력, 잘나고 못남, 지위 등등을 저울대에 놓고 자연스럽게 비교를 하며 상대의 자리, 내가 서 있는 자리, 설자리는 어디쯤인지 찾는 듯 그런 의식이 얼마나 익숙하게 차지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가 사람을 보고 대할 때 그런 저런 의식이나 시선에서 어느 만큼만 자유로워진다 해도 지금보다는 한층 더 삶을 마음 편하게, 만끽하며 살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안타까울 때가 참 많다. 


 어찌 사람이 살아가는 것을 물질에 비교해서 겉에 나타나 보이는 것을 가지고 평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네 행, 불행은 마음 먹기에 달려 있으며,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더라도 그 또한 내 인생이기에 포기하지 않고, 이겨내려는 마음과 의지가 필요하다. 


 나는 나의 삶, 나의 인생을 너무 아끼고 사랑한다. 그러기에 쉽사리 실패란 말을 쓰고 싶지 않고, 다만 또 다른 삶, 또 다른 시간들이 있을 뿐이라고 얘기한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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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16
뜻이 있으니 길도 있네요

 

 글이라고 써보기 시작하면서 우선 캐나다 문인협회 회원이라도 되려면 캐나다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쓰고 또 쓰고 하였다. 그와 동시에 문인협회 회원이 되려면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요, 자기 책 몇 권은 되어야 하는 줄 알고 책을 내리라 다듬고 또 다듬고 하였다. 


 신춘문예에 당선도 되기 전 책을 내리라 원고지에 써서 한국을 가겠다며 비행기 표까지 예약해 놓고 있는 상황에서 남편이 어느 날 여권을 감추어 버렸다. 난 펄쩍펄쩍 뛰다시피 대어 들었고 1주일 열흘이 넘도록 분기를 참지 못해 평생 용서할 것 같지 않았다. 


 남편 얘기로는 어차피 글을 쓰려면 컴퓨터를 배워 원고를 워드로 쳐야 하며, 그 정도로 해가지고 서울에 나가 봐야 되지도 않을 터이니, 차제에 눌러 앉아 컴퓨터를 배우라는 것이었다. 


 그 동안 컴퓨터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우선은 글을 쓰고 다듬는 것도 벅차 다른 일을 할 수 없었다. 오로지 책 내는 일에만 몰두를 하였기에 남편 얘기를 이해하고는 있었지만 남편이 여권을 감추어 버린 행위에 대해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난 용서라는 말의 의미나 뜻을 그때처럼 절실하게 깨닫기도 처음이었다. 


 여권이 없으니 한국을 나갈 수도 없어 차츰 마음을 가라앉히고 컴퓨터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난 남편이 내게 배려를 해 준다는 생각보다는, 내게 남편으로서 남자로서 횡포를 부리고 있다는 생각이 미치자 밥을 먹어도 먹는 것이 아니요 잠을 자도 자는 것이 아니었다. 


 거의 2주 정도 지나자 어차피 한국을 나갈 수 도 없으니 하루라도 빨리 마음을 잡고 컴퓨터를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언제나 배울 수 있으려나 두렵기도 하였다. 처음엔 타이프도 한 번 쳐보지 않았던 솜씨여서 언제나, 어떻게 배우려나 깜깜하기까지 했다. 


 그해 여름엔 컴퓨터를 배워 원고 하나하나를 치느라 어떤 날은 7,8시간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 있기도 하였다. 에어컨도 없는 집에 윙윙 돌아가는 선풍기 소리가 신경이 쓰여 선풍기도 켜지 않은 채 컴퓨터에 매달리다 보니 온몸이 땀에 절기도 하였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 목에 좁쌀알 만한 빨간 반점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바로 땀띠라는 거였다. 


 컴퓨터 앞에 앉아 몇 시간씩 시간 가는 줄도, 땀이 나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는 샤워할 기운도 없어 그냥 잠들기도 하였으니 그렇게 해서 땀띠 까지 생긴 거였다. 그 후 여름만 되면 땀띠가 곧잘 나곤 한다. 


두 번째도 가본을 엮어 서울엘 갔다 왔다. 그때도 결실을 보지 못하고 기회를 엿보다가, 그 다음 해 봄 다시 또 세 번째 가본으로 묶어 서울을 가리라 작정하였으나 비용이 보통 걱정이 아니었다. 


 작은 딸이 책 내는 비용을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기에 카드 론을 해서라도 할 것이며, 너한테 부담을 주지 않을 것이니 그런 걱정하지 말라며 단호하고 냉정한 어조로 얘기했다.

 
 작은 딸은 너무 일찍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학을 다닐 때도 빚이 된다면서 학자금 융자도 받지 않고 스스로 학비를 내고 있었으니, 그런 딸 앞에 돈도 없이 책을 내겠다고 하는 엄마가 한심하고 무모하게 보이는 것이야 너무도 당연했는지 모른다. 


 걱정을 하는 딸에게 무슨 일이든 때가 있는 것이고, 또한 모든 여건을 다 갖추어 하려다보면 시기를 놓칠 수도 있으니, 때로는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해야 한다면서 단단히 각오까지 하게 되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생각지도 않던 대한항공에서 마일리지 통보가 왔는데 의외로 많이 적립되어 있었다. 그래서 대한항공에 확인한 결과 가족 합산으로 하면 왕복 항공권 1매는 나올 수 있다기에 떠나기 한 달 전에 항공권을 찾아다 놓고 있었다. 


 그런데 출발 1주일 전에 대한항공에서 전화가 왔다. 행정상 착오가 생겼다고 한다. 이름이 똑 같은 유진이란 이름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서울로 가는 사람의 마일리지가 우리 딸아이 앞으로 적립이 잘못되었다며 마일리지가 모자란다는 것이다. 할 수없이 대한항공에 가서 왕복권을 편도로 바꾸고 편도 한 장만 신용카드로 하게 되었다. 


 아마도 그런 행정상의 착오가 아니었다면 우리 티켓의 마일리지 적립을 모르기도, 생각지도 않고 있었기에 카드로 왕복 항공권을 끊어서 나갔을 것이다. 


 서울엘 나가서 그 동안 신문사에서 근무를 했던 남편 친구에게 연락을 했더니 출판사 사장이며 시인인 그의 친구와 같이 나와서 만나게 되었다. 


 남편의 친구에겐 이미 가본을 보낸 상태여서 남편 친구는 원고를 다 읽어보았노라고 했다. 그러나 출판사 사장이란 그의 친구는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반은 농담하듯 자신도 시집을 몇 권 내긴했지만 요즈음 누가 책을 읽으며, 팔리지도 않을 책이라면 비용도 만만치 않은데 꼭 책을 내야겠느냐고 다시 한 번 재고해 보기를 바라는 말투였다. 


 그래서 난 더 이상 그들과 대화를 할 수 없겠다 싶어 자비를 들여서라도 해 줄 수 있는 출판사를 알면 소개해 달라고 하니 명함 한 장을 건네주기에 받아 들고 그들과는 점심만 같이하고 헤어졌다. 


 책을 내서 누가 읽든, 팔릴지, 아닐지, 또한 비용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긴 하지만, 글을 쓴다는 것, 글을 써 본다는 것은 더더욱 수필형식이라면, 나의 삶을 돌아보며 그동안 느끼고, 하고 싶었던 얘기들을 쓰는 것이어서 내겐 글쓰기란 '숨을 쉴 수 있는 장'이 되는 것이었다. 


 책을 낸다는 문제는 바로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조금은 할 수 있고, 해보고 싶은 일이기에 독자를 만난다는 생각은 별로 해 보지 않았다. 하지만 책을 내는 문제는 꼭, 기필코 해야 하는 것이기에 더 이상 주저할 수가 없었다. 차제에 해내지 않으면 앞에서부터 너무 많이 밀려 있어 그 심적인 체증 때문에도 더 이상 글을 쓸 것 같지 않아 그런 문제까지도 가위가 눌리는 듯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다음날 명함에 적힌 대로 전화를 걸어 찾아갔더니 교정이나 편집도 하지 않고 그대로 찍어 주기만 하는데도 생각 외로 비용이 많이 들어 필요하면 연락을 하겠다고 하고는 그곳을 나와서, 강남의 대형서점엘 들어가서 산문집을 낸 출판사를 꼼꼼하게 뒤져 몇 군데 전화번호를 적어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그 다음 날 한 군데씩 전화를 해서 찾아갔다. 


 한 군데 찾아가서 원고를 주고는 며칠 기다려 전화를 받고 보면 자기네 출판사와는 글의 성격이 달라서 되지 않으며, 작가에게 인세를 지불하고 책을 내지 자비로는 출판을 하지 않는다고 하니 다시 다른 곳을 찾기를 몇 번씩 하였다. 


 두세 번 거절을 당할 때마다 포기할 수도 없고 밀고 나가자니 심신이 지쳐 기력도 차릴 수가 없었다. 


몇 번을 그렇게 하다 보니 너무 힘이 들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기가 죽어 있는 내게, 큰딸아이 하는 얘기가 그럼 그렇게 쉽게 할 줄 알았느냐며 다시 또 알아보라는 아이의 얘기에 용기를 얻어 다른 곳을 찾고 또 찾았다. 


 드디어 네 번째 찾아간 곳에서 출판을 해주겠다는 것과 비용문제도 적절하게 조절이 되어 드디어 결실을 보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2001년 도에 캐나다 신춘문예 수필부문에 입선을 하면서, 2002년 도에 첫 번 째 산문집 ‘인생에 실패는 없다 다만 또 다른 삶이 있을 뿐이다’를 드디어 출간을 하게 되었다. 


 큰딸아이가 나보다 거의 6개월 전에 미리 서울에 나가 있었기에 출판비용도 해결이 되었으며, 내가 힘이 들어 지쳐 있을 때도 아이가 옆에 없었다면 책을 출간하는 시기가 좀 더 늦추어 지지 않았을까 싶다. 


 딸아이가 나보다 먼저 서울에 나가 있었음은 이민을 온 후 서울을 한 번도 나가지 않았음에 직장을 갖기 전에 한 번 나간다고 나간 것이 어찌 보면 그 모두가 나를 위한 준비요, 내게 용기를 넣어주기 위함이 아니었나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다. 


 ‘뜻이 있었으니 길도’ 있었겠으나, 이민 와서 딸들에게 해 준 것도 없으면서 엄마인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느라 딸들에게 미흡한 점도 많았는데, 딸아이의 지원, 식구들의 배려에 그저 고맙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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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14
동거하는 부부

 

 이민을 오기 전이니 몇 십 년은 되는가 보다. 어느 날 엄마들과의 모임에서 남편의 사랑을 많이 받으며 행복해 보이는 엄마의 입에서 “우리는 동거하는 부부야” 하는 소리에 아무도 더 이상의 구체적인 얘기는 물어 보지 않았다. 누구인가가 그게 무슨 얘기냐고 물었다면 어떤 얘기가 나왔으려나 가끔은 궁금해지기도 한다. 


 평소에 남편이 불성실하다든지 다른 문제의 소지가 있게 보였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경제적으로도 여유 있어 보이고 남편사랑이나 딸보다도 아들이 정상적인 모자 관계 이상으로 엄마를 따르고 좋아하는 그런 엄마의 입에서 ‘동거하는 부부’야 하는 얘기는 의외였고 내겐 작은 충격이기도 하였다. 


 그때만 해도 내 나이 사십 전이니 결혼 생활 10년을 조금 넘긴 때였다. 그러니 그 엄마의 얘기가 그때로서는 이해조차도 잘 되지 않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연애결혼을 한 사이였고, 시댁 식구들 때문에 마음고생을 좀 하긴 했어도 우린 행복한 부부, 사랑하는 부부이지 싶었지 다른 생각은 추호도 해 보지 않았었다. 


 그런데 또 어느 날 아파트 엄마가 나이 드신 어느 댁은 결혼할 때부터 이부자리를 따로 펴고 주무신다는 얘기에 그런 부부도 있느냐고 이상하게만 보였다. 또 어떤 부부는 엄마는 따끈따끈한 것을 좋아해 물침대까지 들여 놓았는데 대부분 따끈하게 온도를 맞춰 놓고 보니 여자는 침대에서 자고, 남자는 바닥에서 잠을 잔다고 하는 얘기에도 별난 부부, 이상한 부부로만 들렸다. 


 그도 또한 그럴 것이 그동안 살면서 출장은커녕 한 번도 각방이나 떨어져서 잔 기억이 없으니 남들의 그런 얘기는 이방인들의 삶처럼 들려질 수밖에 없었다. 


 부부는 으레 한 이불, 그것도 부부 베게라 칭하는 긴베게를 써야 하는 것이고, 서로 다리라도 휘감고 자야 사랑하는 것이고, 혹 돌아눕는 자세가 편하겠다 싶을 때엔 서로 등을 맞대고 손을 마주 잡거나 손깍지라도 껴야 편하게 잠을 자곤 했으니, 그런 부부에게 동거하는 부부란 말만으로도 우리에겐 충분히 알 수 없는 부부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민생활 시작해서 처음 하우스에서 살 때부터 아래층은 거실, 2층은 침실로 되어 있어 같이 TV를 보다가 거의 내가 먼저 올라가서 잠자리에 들게 되었는데, 남편이 옆에 없어도 잠도 잘 자고 그렇게 그런 습관이 들었기 때문인지 이민생활 20년이 넘고 보니 이젠 오히려 남편이 옆에 있는 것이 불편하니 환경, 나이가 빗어낸 결과가 아닌가 한다.


 어떤 이들은 군식구가 자주 들어 아예 넓은 데로 이사를 가지 않고 방 1, 아니면 2,3이니 부부 하나, 아들 딸 방 하나씩 주고는 그 이상의 방 여유를 갖지 않는다는 이들도 드물게 만나곤 했었다. 


 방이 여유 있게 되면 시집 식구가 누가 와도 와 있게 되더라며 방이 없다는 구실로 아예 거절을 한다는 얘기를 들으며 그렇게까지 야박하게 살아야 하느냐고 인정머리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데 우리야말로 아이들 방을 따로 주고도 방 하나가 여유가 있을 때에도 각방 한 번 써보지 않았는데, 이민을 와서 지난 번 살던 아파트에서는 그땐 방이 둘 밖에 없어 부부가 한 방을 쓸 수밖에 없음에도, 그때도 남편이 TV를 보다가 소파에서 잠이 들 때도 많았으니 우리야말로 동거 하는 부부네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었다. 


 점점 이혼하는 부부가 급증하면서 황혼이혼도 늘어 가고, 이혼을 하게 되면 재산, 유산 문제가 복잡해지니, 요즈음은 졸혼(결혼을 졸업함-혼인관계는 유지하지만, 부부가 서로의 삶에 간섭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개념)이란 형식을 취하는 부부들도 늘어 가는 추세이긴 해도, 예전과는 달리 이혼을 요구하는 쪽이 남자보다는 여자가 많다는 것은 그동안 살면서 남편한테 무시당했거나, 억압받고 살았다 싶은 여자들이 남은여생은 여한 없이 살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연애할 때는 콩깍지가 씌였다”는 얘기를 한다. 그때는 옆에서, 부모가 아무리 다른 얘기를 해줘도 귀에 들리지 않는다. 또한 이혼을 하고 싶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기 시작하면, 좀 더 생각해 보라고, 헤어지는 일만은 절대 안 된다고 귀 아프게 얘기를 해도 당사자는 그런 얘기를 흘려듣게 되니 결국엔 이혼을 하고 마는 부부도 있게 된다. 


 훗날 세월이 더 흘러 어떤 이들은 그때 이혼하기를 너무 잘 했다는 사람들도, 내 인생에서 이혼한 것은 최대의 실수였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이혼을 하는 사람들은 크게 나누어 두 가지 유형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경제적인 문제, 그 다음은 서로의 성격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난 캐나다에 와서 살며 남편의 못난 모습이 보일 때면 화를 내고 남편을 다그치기 전에, 남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때마다 그 사람도 이 사회에서 적응하느라 힘  들어 할텐데, 이를테면 걸음마도 떼지 못하는 아이에게 빨리 걷기를, 뛰기를 바라는 것 같아 불만을 얘기 할 수 없었고, 또한 여자도 능력 있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나도 잘 하지 못하면서 남편만을 재촉하는 것 같아 좀 더 참으며 기다려 봐야지 싶었다.

 
 또한 성격적인 문제라 싶을 때엔 남편을 탓하기 전에, 우선 나를 돌아보게 되니 그래서도 불평을 토해낼 수 없었다. 그것은 바로 상대를 내 성격에 맞추려 하지 말고, 요구하지 않게 되면, 남편 또한 내게 커다란 요구는 하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서로가 서로에게 맞출 건 맞추되 아닌 것, 고쳐지지 않는 부분은 적당히 양보하며 넘어가면 커다란 마찰 없이 살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50대 60대를 넘어서고 보니 어느덧 70을 바라보고 있다. 부부라는 것이 연륜만큼 사랑이 깊어 가고 쌓여 가는 것이 아니라 깨끗했던 새 옷이 다 낡아버려 다만 버리기엔 거기에 담긴 세월과 추억 때문에 버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입어지지도 않는 헌 옷, 낡은 의복 같다는 생각도 들었으니 동거하는 부부라 해도 크게 거부감이 일지 않았었다.


 “철이 든다. 나잇값을 한다”는 얘기를 한다. 젊었을 때 남편이, 아내가 이만큼 소중하게 생각이 들었다면, 부부싸움은 왜 할 것이며 이혼을 왜 하겠는가. 점점 해를 더할수록 부부가 한 집에 살기만 해도 모두가 정말, ‘행복한 부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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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의 입맞춤

 
 

 꽤 오래 전 남편과 같이 출근을 할 때가 있었다. 출근 시간과 방향이 같아 남편을 먼저 내려 주고 내가 차를 가지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차에서 내리기 전에 하는 얘기가 아침에 담배를 피우기 위해 베란다를 나가면 여자가 먼저 나가면서 둘이서 ‘입맞춤’을 하더라고 얘기하는 것이었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남편을 내려주고 우리 부부는 왜? 어찌해서 출근길에 포옹이나 입맞춤은 고사하고 서로가 잘 다녀오라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 한 마디 할 수가 없는지 이따금 생각에 젖곤 했다. 


 한국에서 우리 세대만 해도 대부분의 여자들이 집에 있어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게 된다. 대부분의 가정은 그 집 가장의 아침 출근하는 모습만 봐도 어느 만큼은 그 집의 살아가는 분위기나 그 집 가장이 식구들에게서 받는 대접이나 능력의 정도를 가늠할 수가 있다. 그것도 시부모와 같이 사는 부부와 핵가족이 사는 부부의 아침 출근하는 모습 또한 다르게 된다. 


 시부모를 모시는 가정 중엔 아내가 먼저 나서 남편 출근길에 배웅하기보다는, 시어머니 쪽에서 먼저 “어멈아, 아범 나간다”라는 소리에 못이기는 척 따라 나가서 다녀오라는 말 한마디 하는 부부도 있고, 이런 경우는 집안의 주도권이나 경제권을 시부모 쪽에서 잡고 있는 가정에서 보게 된다. 


 또는 남편이 출근을 하면서 “어머니, 아범 출근 한대요”하고 여쭙게 되는 가정은 어느 만큼은 주부가 경제권을 가지고 있으면서 시부모도 소홀히 하지 않는 가정에서 볼 수 있었다. 


 가장이 출근을 하면서 부모님께는 아무 말 한마디 않고 나간다든지, 아내에게조차 출근한다는 말도 없이 슬며시 나가 버리는 등의 너무 많은 차이가 있어 출근하는 모습만 봐도 그 집의 분위기가 감지가 된다. 


 결혼해서 한국에서 살았던 15, 6년 동안의 남편이 아침 출근하던 모습과, 캐나다에 와서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을 돌이켜 본다. 


 고맙고 다행스럽게도 부부 싸움을 하고 각 방을 쓰고 난 다음 남편 출근을 시킨 일도 없고, 아침에 나가면서 슬며시 나간 적도 없었다. 


 한국에서 아파트에 살면서 내 심기가 편치 않아 출근길에 배웅을 않을 것 같으면 “나 나간다”를 몇 번 외쳐도 아무 소리가 없으면 “양복저고리 가지고 나와”하며 현관문을 나서니 집에 더 이상 앉아 있을 수도 없어 양복저고리를 들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 출근하는 차가 나갈 때까지 옆에 서 있다가 아파트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남편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고는 들어오곤 하였다. 그런 분위기이다 보니 웬만한 부부 싸움이나 편치 않았던 마음도 오래 가지고 갈 수가 없었다. 


 그 즈음 아파트 우리 층의 세대수가 열여섯 가구였으나 주차장까지 내려와 남편 배웅을 하는 가정은 앞집의 엄마와 우리 밖에 없었다. 앞집의 엄마는 이내 이사를 가고 말아 아침 출근길에 주차장까지 따라서 나오는 여자는 볼 수 없었다. 


 언젠가 204호 엄마와 출근길 얘기를 하다가 아침에 남편이 출근 할 때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남편이 슬며시 나가면 엄마는 주방 창문으로 남편이 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남편도 나가면서 한번 올려다본다고 하는 얘기에, 어떻게 그렇게 멋쩍게 하느냐며 그 집 부부의 출근하는 모습이 왜 그렇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기도 하였다. 


 캐나다에 와서 살면서 가게에 같이 나가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으니 출근이라고 말할 것도 없고,  삶에 짓눌리고 떠밀려 출근을 하는 마음이 더 컷을 것이니 아내에게 다녀오겠다는 말도, 아내의 배웅은 예전의 얘기요, 사치에 지나지 않았으니 집안에서 가장의 무게, 남편의 존재 자체가 가늠이 되고도 남는다. 


 남자가, 남편이 아내를 힘 있게 껴안을 수 있음은 외적, 내적인 가슴속 사랑까지도 충만할 때 가능한 것이다. 밥벌이도 제대로 못한다 싶으면 그런 남자가 어떻게 아내를 힘 있게 껴안을 수 있더란 말인가. 


 남편의 돈벌이, 즉 경제적인 능력, 사회적인 지위, 명예 등이 남자를 남자답게, 남편이 아내를 힘껏 껴안을 수 있는 요인이 된다. 말로는, 마음으로는, 아내를 아무리 사랑 한다 해도, 경제력이 빈약한 남편은 두 팔 벌려 아내를 힘껏 껴안을 수 없음을 안다. 


 아내 역시도 돈벌이가 시원찮은 남편이 측은하고 안 되기도 한 것은 그나마 연민의 정이나마 남아 있을 때 얘기고, 무능하고 무능력해서 한심해지기 시작하면 그런 남편에게 애틋한 감정은 일지 않는다. 


 누구에게 서양 사람들은 허그나 입맞춤을 애정이 없어도 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 본적이 있다. 그랬더니 그들은 습관적으로 하는 것이니 서로 사랑을 하지 않아도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얘기한다. 


 서양 사람들의 그런 문화가 우리 보다 자연스럽긴 해도, 그들도 감정이 우선일 것이니, 애정이 없는, 식어버린 부부에게 가벼운 입맞춤인들 할 수 있을까 싶다. 


 그즈음 공장이나 다니고 있던 남편에게서 더 이상의 희망이나 미래를 기대할 수 없겠네 싶어 마음이 답답할 때가 많았으니, 일터를 향해 가는 남편에게 잘 다녀오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가장으로서의 책무는 다 하리라 애 쓰고 있음도 알 수 있어 그런 남편이 안쓰럽기도 고맙기도 했었다. 그런 그때의 현실,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자신의 모습이 더 이상 아내에게 애정 표현을 할 수 없었을 터이니 돌아보면 나보다 남편이 더 힘든 시간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남편의 출근하는 모습을 더듬다 보니 그 동안 살아 온 삶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민을 결행했을 때는 분명 나름대로 살아보고 싶은 삶도 있었을 터인데, 내 나이 어느덧 70을 목전에 두고 보니, ‘참, 한 세상 산다는 거 별 거 아니네’ 싶은 마음이 들긴 해도, 가게 문을 열려 서둘러 집을 나서는 남편의 뒷모습을 향해 눈길에 운전 조심하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것은 바로 ‘산다는 것은 움직이는 것’임을 깨달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음을 나 또한 그런 남편의 마음을 알기에,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는 입맞춤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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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01
내 인생의 환승행

 

 이 사건은 어쩌면 내 인생을 180도가 아닌 360도 바꿔 놓은 결과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때 그렇게 해서 그 일을 해결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지금쯤 다른 사람을 만나서 남편과 나의 작품인 유진 유미가 아니었을 테니까 말이다. 


 대학교 1학년 때 학점이 세 과목이나 나오지 않았던 결과로 인해 초급대학에서 4년제로 편입을 결심하게 되었으니 어쩌면 신은 늘 내 편에 있다가 내가 잠시 머뭇거리거나, 딴 길로 가는가 싶으면 하나씩 걸림돌을 마련해 놓았다가 더 나은 길로 인도해 주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 될 때가 여러 번 있었다. 물론 그때그때 빨리 깨달아서 고쳐 나가고 용케도 길을 잘 찾을 수 있는 지혜까지도 말이다. 


 몇몇 친구들은 숙명여자대학으로 편입시험을 보러 간다는데 난 가정과에서 국문과로 가기로 결정을 했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들어가서 만난 사람이 지금의 남편이다. 대학 4년 동안 내가 만났고 얻었던 최고의 선물인 셈이었다. 


 편입시험을 쳐 놓고 합격통지서가 오려나 이때나 저때나 기다리다 너무 늦어지는 것 같아 학교에 전화를 했더니 이미 발부했다는 것이었다. 다시 초조하게 며칠을 기다리던 중 어렵사리 합격통지서를 손에 넣게 되었는데 우편물이 잠시 방황을 했었는지 꽤나 더렵혀져 있었다. 그날이 아마 등록금 접수 마감 하루 이틀 전이었다.


 난 이미 언니와 큰 동생과 꽤나 마찰을 빗어 왔던 터여서 많이 지치기도 했었다. 엄마 아버지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는데 언니와 큰 동생은 초급 대학이라도 나왔으면 됐지 너만 생각하느냐며, 동생들이 몇이며, 엄마 아버지 생각은 하지도 않느냐며 반대를 했다. 난 그때 “너희들은 상관할 일이 아니며, 난 시집 갈 때 이불보따리만 가져가도 좋으니 포기할 수 없다”라고 완강했다. 


 드디어 마감 날은 다가 왔고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없이 나가셨다. 난 가게 방에 가서 서랍을 열어보니 돈 다발이 하나 있어 헤아려 볼 틈도 없이 그 돈 뭉치를 내 방으로 가져와서 세어보니 등록금 액수에서 만 4천원이 모자라는 것이었다. 난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망설이다 아랫집 아저씨에게로 뛰어 갔다. 사정 얘기를 하고 아저씨한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었으나 아저씨는 돈이 없다며 거절을 했다. 대충 상황을 아는지라 행여 빌려 줬다가 아버지가 원치 않는 일이면 어쩌나 싶어 그리 하셨을 것이다. 


 난 다시 내 방으로 들어와 어쩌나 어쩌나 그 사이 아버지가 들어오셔 그 돈을 내 놓으라고 하면 옴짝달싹도 못하는데 싶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퍼뜩 금목걸이 다섯 돈짜리가 떠올랐다. 그것은 엄마 것을 평소 내가 하고 다녔기에 내 수중에 있었다. 재고해 볼 여지도 없이 큰길 옆에 전당포 간판을 보았던 기억이 있어 창피한 것도 모르고 불쑥 올라가 그것을 맡기고 만 4천원을 받아 들고 쏜살같이 학교에 가서 등록을 마쳤다. 


 등록을 끝낸 감회나 후련함보다 이제 아버지와 부딪칠 일이 걱정이었다. 난 하루 종일 거리로 다방으로 빙빙 돌다가 해가 질 무렵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집으로 향했다. 등록금은 이미 내 버렸으니 돌아가서 찾아 올 수도 없고, 죽이든 살리든 아버지 처분에 따를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지 싶었다. 반은 풀이 죽고 반은 두려움으로 집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너 아버지한테 혼나면 어쩌려고 그렇게 했느냐며 엄마가 더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꿈같이 무사히 넘어 갔다. 이는 아버지가 평소 아들딸 가리지 않고 누구든 하고자, 능력 있는 놈만 가르치겠다 주장하셨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난 이래저래 평생 아버지한테 고마워하며 사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그런 일이 있고 며칠이 지난 다음 엄마가 돈을 주어 목걸이도 찾고 새 옷도 한 벌 맞춰 주셔서 그때부터 공부보다도 남편과 연애하느라 나머지 2년을 다 써 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3학년에 올라가 장학생 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그 결과 국문과 톱을 하게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늘 과 톱을 하던 조씨와의 점수 차이가 근소했다니 난 그 순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명언을 떠올리고 있었다.


 대학교 1학년 2학기 성적을 세 과목이나 낙제점을 받았다. 대학은 무슨 신천지라도 되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고 보니 고등학교의 연장일 뿐 별천지는 아니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내가 들을 과목을 알아서 수강신청을 해야 한다는 것, 그러니 중고등 학교 때처럼 아침에 등교를 하면 끝날 때까지 같이 공부를 하고 하교를 하는 것이 아니고, 언제든 내 강의가 있는 날 그 시간만 맞춰서 가면 되는 거였다. 


 대학은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것이 아니고, 고등학교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이 너무 실망스러웠고 그 하기 싫은 공부를 또 똑같이 해야 한다는 것도 시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대학을 들어가서 1학기 동안 많은 시간을 공부보다는 수업도 빼 먹고 시내 다방으로 또 영화 보러 다녔다. 어디 그뿐이랴. 모처럼 입고 간 옷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신경이 쓰인다싶으면 강의도 다 듣지 않고 집으로 그냥 오기도 했다. 


 내가 재수까지 해서도 1차 2차 다 떨어지고 나니 더 이상 입학원서를 낼 데가 없었는데 신문에서 3차 모집을 하는 초급대학도 있음을 보게 되었다. 학교에서 보는 시험도 스트레스를 받는 지경인데 입학시험에서 계속 낙방을 하고 보니 시험을 보러 가서도 내가 정답을 제대로 알고 쓰는지 시험을 봐서는 대학이라고 들어 갈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3차 모집을 한다는 건대 초급대학에 입학원서를 냈는데 그곳에서는 입학시험을 별도로 치지 않고 ‘예비고사 합격증’만으로 입학이 가능했기에 비록 2년제 이긴 했으나 그렇게 열망 했던 ‘대학’을 들어가게 되었다.


 건대 캠퍼스는 장안동에 있는 줄 알았는데 초급대학은 낙원동에 있었다. 초급대학이라도 입성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처지이긴 했으나, 조그마한 운동장에 강의실이라고 회색건물에 정감이 가지 않았다.


 지금도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대학을 들어가서 첫 번째 강의가 있는 날이었다. 난 잔뜩 긴장을 하고 강의실로 향했다. 강의실엔 학생들로 가득했다. 교양강좌였는데 임옥인 교수님이 나오셨다. 임옥인 교수님은 여류 시인으로 알고 있어 호기심이 동했다.


 강의 도중 ‘일사불란’이 무엇이냐고 물으셨건만 그 많은 학생 중에 아무도 답변을 하지 못해 두고두고 아쉽기도 그곳에 있는 학생들이 나보다 못하거나 내 정도의 실력밖엔 되지 않으리란 사실이 무척 실망스럽기도 했는데, 그 후 국문과로 편입을 하고 나서 무슨 과목이었는지 이훈종 교수님이 그때 또한 수업 중에 ‘오기’가 무엇이냐고 물으셨건만 그때도 아무도 답변을 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국어 시간엔 선생님이 질문을 하시면 대답은 주로 내가 많이 했다 싶었건만 그러고 보니 어떤 단어에 담긴 의미는 알고 있어도, 그 내용을 알기 쉽게 빨리 말로 풀이는 하지 못하네 싶었다. 두 번 다 답변을 하지 못해 잊혀 지지 않는다. 


 큰 딸이 고등학교, 작은 딸이 초등학교 6학년 올라 갈 때 이민을 왔다. 큰 딸은 학교에서 한국 학생을 소개해 주어 많은 도움이 되는 듯 했다. 하지만 작은 딸은 학교에 다니면서  숙제를 할 때면 몇 번씩 묻곤 했다. 내 나라 말도 단어 풀이도 제대로 못해 주는 실력인데, 게다가 영어로 물어 오니 내가 무슨 답변을 해줄 수 있었겠나. 몇 번 묻더니 엄마의 실력으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내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새삼 돌아보니 작은 딸이 그 시기를 얼마나 힘겹게 넘겼을까 그런 면에서도 특히 작은 딸한테 미안하다.   


 그렇게 열망하며 갈망하던 대학이라고 들어 가긴했는데 대학이란 곳이 너무 시시해서 별다른 흥미도 느끼지 못하고 1년은 그렇게 지나가는가 싶었다.


 그런데 1학기 성적표를 받고 보니 학점이 세 과목이나 나오지 않았다. 그때서야 우습게 볼게 아니었네 긴장이 되었다. 창피해서 누구한테 말도 못하고 건대 호숫가를 거의 2주를 돌며 고민을 했다. 그 결과 깨달아지는 것은 그래 그렇게 힘들게 대학이라고 들어가서 그것도 평생 4년 밖에 되지 않는데 2년으로 끝낼 수는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4년제로 편입을 하기로 결심을 하고는 그때부터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공부도 공부 그 자체를 위한 것이라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것이니 즐거운 마음으로 공부를 하자 싶었고 대학 2학년 때는 시험 기간엔 밤을 새운 적도 많았다. 가정 경제 같은 건 100점도 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전 학기 성적이 평균 80점이 넘으면 장학생 선발시험에 응시 할 수 있었기에 나도 장학생 선발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과 톱이 되어 편입을 하면서 인기도 그래서 좀 더 받았던 것으로 안다. 


 그때 장학 제도는 단과 대학별로, 각 과에서, 학년에서 한 명씩이었고, 장학금은 단과 대 톱이 삼 만원 과 톱이 이만 원 학년 톱이 만원이었다. 그 당시 늘 과 톱을 하던 J씨와 근소한 차이로 내가 되었다고 들었는데 J씨가 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해도 2학년 때 내가 한 공부보다는 그만큼은 아니었겠지 싶었다. 장학생 발표가 나자 J씨가 아니고 편입생인 어떤 여학생이 과 톱을 했다니 관심이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장학생 발표를 보는 순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명언을 또 한 번 떠 올리고 있었다.


 대학교 1학년 때 그럭저럭 학점만 제대로 나왔었다면 난 아마도 4년 제 대학까지는 생각지도 않았을 것 같다. 그것은 2년제에서 4년제의 의미가 아니라, 평생의 ‘반려자’를 지금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을 했을 것이겠기에 그것이야말로 오늘의 내 인생이 있게 된 확실한 ‘갈아타기’였네 싶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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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9
나의 재수하던 시절(3)-깨달음


 “세 살적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데 이는 비단 버릇이나 습관에만 국한된 얘기는 아닐 것 같다. 이미 태교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음은 임산부의 태교에서부터 어느 만큼은 모체의 DNA를 받고 태어났다고 해도, 각자의 성향 노력여하에 따라 삶의 형태 성공여부가 달라지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난 그동안의 학교생활을 되짚어보면 공부가 하기 싫어서 하지 않았다기보다는 특히 외우는 과목은 외워지지 않아 잘 하지 못했다싶기에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하는 방식, 기초가 좀 더 잘 다져 있었다면 내 공부실력이 좀 낫으려나 생각해 볼 때가 가끔 있다. 


 그것은 공부뿐이 아닌 책 읽는 습관이나 음악적인 소양도 다를 것 같지 않다. 중학교 때 유난히 미술에 소질이 있었던 아이들이 있었는가 하면, 풍금을 곧잘 치던 아이도 있었다. 미술을 잘 하던 아이들이나 음악적 소질도 타고난 아이였기에 배우지 않았어도 그렇게 잘 칠 수 있었나 생각해 본다. 


 내가 왜 그때 풍금이라도 배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못내 아쉽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중학교를 다니던 그 시절엔 ‘새마을 문고’라 칭했었는지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가면 소설책 시집 잡지 책등을 구비해 놓고 무료로 빌려 주는 곳이 있었다. 우리 반에 김영순이란 남학생은 그즈음 책을 빌려다보느라 옆구리에 책을 끼고 다니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도 책을 빌려다 보기는 했지만 즐겨 보지는 못했었다. 


돌아보니 그 시기에 공부, 음악, 책 읽는 습관 등등 좀 더 깊이 있게 할 수 있었던 것을 귀찮고 꾀가 나서 피해 버리고 적당히 해 버렸기에, 잘 성장할 수 있는 요인들 즉 배아가 시작되는 시기에 적당한 온도와 수분을 제대로 공급해 주지 못해 좋은 품종, 더 나은 씨앗으로 클 수 있는 적절한 ‘타이밍’을 놓쳐 버렸나 싶은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중학교 때 스케이트를 좀 타 봤던 경험이 있다. 그 후 고등학교 때 친구와 같이 스케이트장을 가서 이내 탈 수가 있었다. 또한 큰 아이 초등학교 자모가 되었을 때 아이들이 학교에서 체육 시간에 스케이트를 타는 시간이 있었다. 학부형으로 따라 간 난 아이들과 같이 스케이트를 타 보았는데 나이가 훨씬 들었음에도 그냥 탈수가 있더라는 것이다. 내가 중학교 때 스케이트를 타 보지 않았다면 고등학교나 그 후에 망설임 없이 탈 수가 있었을까 싶다. 언제든 하고자 하는 의지나 마음만 있다면 하지 못할 것도 없겠지만, 무엇이든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접해 보고 다양하게 경험을 해 본다면 중간에 사정이 여의치 않아 건너뛰다 나중에 다시 하게 된다 해도 습득력도 빨라 두려움 갖지 않고 할 수 있어 경우에 따라서는 크게 성공도 할 수 있겠다 싶기 때문이다. 


결혼을 해서 가정주부로 살다가 내 나이 마흔이 되기 전 문화센터에 다닐 때였다. 그때 수지침을 가르치던 선생님 말씀이 생각난다. 집에서 살림만 하다가 다시 공부라고 하려고보니 마치 머리가 스텐처럼 굳어 있는 것 같지 않느냐고 하던 얘기가 무척 공감이 갔었다. 


굳어진 머리라 해도 학교 때 기초가 잘 다져진 실력이라면 본래의 실력을 끄집어내기가 어렵지 않다. 그러나 학교 때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면 늦게 하는 공부가 얼마나 할 수 있으려나 물어보나마나가 아닐까 싶다. 그래 이따금 듣게 되는 나이 들어 공부하려니 공부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민 와서 몇 년 되지 않았을 때 커피숍에서였다. 어느 날 보니 80은 넘어 보이는 흑인 할머니가 영어 공부를 하고 계셨다. 난 그 얘기를 다른 엄마에게 했더니 우리도 더 늦기 전에 영어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난 그 엄마 생각과는 달랐다. 공부, 그것도 영어를 공부할 시기에도 잘하지 못했던 것을 나이 40넘어 새삼스럽게 한다고 해야 나로서는 실효성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아 난 그런 무모한 각오는 하지 않았다. 난 나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어차피 제한된 시간 속에 영어 공부보다는 난 글쓰기라도 부지런히 해 봐야 되겠다 싶었다. 그즈음 글을 쓰기 시작할 때였다. 그래서 그 후 난 꾸준하게 보고 관찰하고 생각하고 쓰고 또 썼다. 내가 만약 80넘어 보이는 할머니의 영어 공부하시는 모습에 자극받아 그 이후 영어 공부에 매진했다 해도 내 삶에서 과연 무엇이 달라졌을까. 그건 나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렵지 않게 접하게 되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각국의 언어)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한국 말, 우리말이라도 내 생각이나 가슴속의 얘기를 끄집어 표현 해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도의 한숨을, 작은 희열에 충만할 때도 있다. 


다시금 나이 60이 넘어 수필교실에서 공부를 하며 다시 절실하게 느낀다. 문장, 문법, 작품공부를 하면서 공부한 내용을 잊지 않고 다음 작품을 쓸 때는 꼭 써봐야지 하건만 이미 머릿속에서 굳어진, 알고 있는, 인지되어진 단어나 어휘밖에 쓸 수가 없어 답답하고 아쉬워 뒤늦은 반성도 해 본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좀 더 많은 책을 접할 수 있었다면 오늘 날 나의 언어 구사력은 달라져 있었을 것이란 사실을 깨닫게 한다.


아이들이 어릴 때나 내가 대리점 대표로 나가기 전에는 그래도 책은 늘 가까이 있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 묵동 공릉동 살 때에는 구청에서 대여해 주는 이동도서 차가 있어 그곳에서 책을 빌려 봤다. 아파트로 이사를 가서는 그곳에서는 저렴한 가격으로 책을 빌려 주는 차가 일주일에 두 번씩 와서 그곳에서 빌려다 보기도 했지만, 좀 더 어린 나이, 언어 습득을 하는 그 시기에 했던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나마 다행스럽게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거의 10개월을 집에서 쉴 때가 있었다. 그때 이토비콕 도서관엔 한국 책도 많아 빌려다 봤는데 그 시기엔 알게 모르게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모든 생명체는 파종 생성 숙성되어 가는 과정이 있는데 그 적절한 순간, 시기를 놓쳐 버리면 제 구실을 하지 못하거나 기대한 것만큼 수확을 거둘 수 없음을 안다. 


앞으로는 삶이 더 다양해지고 꼭 공부를 하지 않아도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데 별다른 지장이 없을지 모른다. 앞으로는 학벌 위주의 사회에서 능력 위주의 사회로 가는 성향이 늘어 나게 될 것 같다. 이미 인터넷 스마트 폰의 파급으로 세계인이 세계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며 일을 하며 내 삶을 구가하며 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극히 일부분일 것이고 그런 사람들의 능력은 그만큼 탁월하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상적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갖고 평범하게 살아가게 될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바뀐다 해도 학교생활을 해야 함은 단계적으로 하는 학습 내용도 있겠지만 다른 어떤 것보다도 사람 즉, ‘동창관계’를 빼 놓을 수 없고 또한 중요하다. 정상적인 학교 과정을 거치지 않고 능력은 있어 돈은 잘 번다해도 학교 때 만날 수 있는 그 친구관계는 ‘물질 이상의 자산’이기에 가볍게 볼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학연을 너무 따진다 할지도 모르겠으나 학교 다닐 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 시기에 그들과 같이 했던 그 순간 그 시기가 내 생애에 다시 올 수 없는 그런 순간이었음을 새롭게 깨닫는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 친구들을 만날 수 있고 사귈 수 있음에야 말해서 무엇 할까마는 사회에서 만나는 그 친구는 마음속을 차지하는 비중, 느낌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평생 진정으로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친구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성공한 삶이라는 말은, 사람이 주변에 아무리 많아도 진심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기도, 거의 없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이라 생각된다. 


이미 나이 60을 넘어 타국에서 살며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보며 살지만 과연 내가 알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또한 나를 아는 사람들은 누가 있을까 싶으니, 부모형제 동창들도 자주 만나지 못하고 산다 해도 그들이 내 가슴속에 차지하고 있음에 참으로 가볍게 볼 수 없는 관계들이네 싶은 생각이 든다. 


이미 글로벌 시대를 예견하고 소위 앞서 가는 사람들의 삶을 유추해 볼 때가 있다. 그들이 유능해서 업무를 주거지에 구애 받지 않고 보러 다닌다 해도 학창시절에 친구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사람들은 말고, 소위 유학파 부류들은 내가 어렵고 외로울 때 안기듯 편하게 찾을 수 있는 그런 벗들이 있을까 싶다. 학교 때 친구들은 평생 내가 간직하게 될 가슴 속 ‘조약돌’ 같은 그런 존재들이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


살아보니 가족이 소중함은 말할 필요도 없고 친구관계 역시 내 삶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 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평생 동안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 절체절명의 과제는 가족이나 친구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내가 온전하게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이유이다. 공부가 하기 싫다면 최소한 내가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는 확실하게 고민해야 한다. 장차 내가 살아 보고 싶은 삶, 미래의 나의 초상화를 그려보며 그 방향으로 마음 밭에 심어 둔다면 그게 알게 모르게 싹을 틔워 적절한 시기에 발현된다면 나도 모르는 과실을 거두게 될지도 모른다.


인생은 단 한 번뿐이기에 물질을 쫓아 살기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사는 삶이 그나마 아쉬움이나 후회가 덜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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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6
나의 재수하던 시절(2)

 
 
가출팸(가출한 남녀가 만나 서로 의지하고 사는 아이들)

 

 

 나의 재수하던 시절, 이 글을 쓰면서 몇 번 망설였다.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지만 친정의 내 형제들은 물론이요, 지금의 내 남편 두 딸들도 모르는 내 과거사, 엄마조차도 까마득하게 잊고 계실 내 과오를 굳이 써야하나 망설였다. 하지만 그런 가출은 나만의 문제가 아닌 오늘날 가족이 해체되는 사회에선 가출은 청소년뿐이 아닌 기성세대들한테서도 들을 수 있기에 이 기회에 다시 한 번 돌아볼까 싶어 쓰기로 했다. 


 언젠가 마침 SBS스페셜 프로에 ‘가출팸’이란 제목으로 방영되어 보게 되었다. 보통 열다섯에서 스무 살 안팎의 남녀가 집을 나와서 모텔이나 여관 같은 데로 숙소를 정해 놓고 생활을 하며, 아르바이트를 해서 라면이나 김밥으로 끼니를 때워도, 그래도 마음을 받아 주고, 털어 놓을 수 있고, 서로 의지가 되어 집보다 더 편하고 좋다고 한다. 거리로 떠돌다시피 하는 그들, 편히 잠자고 쉴 수 있는 방 한 칸이 절실하다는 애들을 보며, 2000년도에 역이민을 하겠다고 서울을 나갔을 때, 머리 들이 밀고 들어 가 쉴 수 있는 방 한 칸이라도 있어야 살 수 있지 않겠느냐며 너무도 막막했던 그런 때가 있었기에 그들의 심경이 더더욱 가슴에 와 닿았다.


 다시 또 요즈음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묻지 마’ 범죄를 보면서 피해를 당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보호 받을 수 있는 법만 강구가 되네 싶어, 가해자였던 사람들의 입지는 점점 좁아져 설 자리가 없음은 물론이요, 죽음의 길로 내몰리고 있네 싶어 더 답답함을 느낀다. 


 범죄자의 대부분은 가족과 떨어져 살고 있으면서 일자리도 없고, 구할 수도 없어 도저히 살아 갈 수가 없어 말 그대로 이판사판이라는 심정, 더 이상 갈 데가 없어 코너에 몰려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 그들뿐이 아닌 그런 부류, 계층의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데에 심각성이 있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의 범죄 예방책이나 재범 방지법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 못지않게 그들이 출소 후에 먹고 살아 갈 수 있는 사회적 제도도 마련되어 있다면 재범 발생하는 횟수가 그만큼 줄어들지 않겠나 싶은 생각을 해 볼 때가 있다. 범죄를 저질렀기에 벌을 받아야 함은 당연한 일이지만 형무소엘 갔다 와서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잘 살아 보겠다고 다짐을 해도, 사회에서 그들을 보는 편견이나 시각이 냉소적 적대적이기 십상이니 그런 처우를 견디지 못하기도, 그러다 보니 그런 환경에 적응하기도 쉽지 않은데 살길이 더 막막해서 다시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안타까울 때가 많다. 


흔히 동병상련이라는 말로 표현 되곤 하는 같은 처지, 상황, 현재 처해 있는 그 환경이 싫어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나름 혼자 살아 보려 가출을 해 보지만 나와서보니 집에서 겪었던 현실보다는 어떤 면에서는 더 힘이 들겠지만, 그래도 결국엔 아이들이 마음이 더 편하고 견디어 낼만한 곳을 택한다는 것이다. 단순 가출인 경우는 집으로 돌아가 원래대로 잘 살 수도 있지만, 집안에 ‘문제’가 있어 가출을 했던 아이들은 집안에서의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는 한은 집으로 들어 가봐야 개선되지 않고 가출은 다시 또 할 수도 있으리란 것이다.


경험하고 체험한 사람들이 더 잘 이해를 하고 알아주기도 하지만 남이 나를 이해하고 알아준다고 한들 그것이 내 현실을 헤쳐 나가는데 무슨 도움이 되는 것일까 싶다. 내 절박하고 간절한 처지를 알아내게 실질적인 조언을 해 줄 사람이 아니라면, 아니 내 주변에 그럴만한 멘토가 있었다 해도 어차피 내 문제는 내가 시간을 갖고 견뎌 내며 시간이 흘러가야 해결의 실마리라도 보이는 것이 대부분이다.


내가 대학을 떨어져 방황을 하다가 급기야 가출까지 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고는 하나 그런 행위에 대해서 부모님께 죄송하다는 생각을 얼마나 했을까 싶다. 다시 또 똑 같은 현실에서 다시는 집을 나가는 일은 없어야겠지만, 지금 새삼 돌아봐도 부모님 걱정이나 생각보다 공부는 되지 않는데 대학을 가지 않고는 살 수 없으니 공부 열심히 해서 기필코 대학을 들어가야지 다짐 해 보지만 희망도 출구도 보이지 않고 깝깝하기만 했다.


새삼 나의 그때 심경을 돌아보며 오늘날의 그 나이 또래들을 견주어 봐도, 가출을 하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집을 나오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공부가 하기 싫어서 나오는 아이들도 있겠지만 부모의 학대나 부모의 이혼으로 해서 집안의 문제나 갈등을 보아 넘기지 못해 가출을 하기도 할 것이다. 그런 위기의 상황에 처했을 때 그야말로 운 좋게 좋은 친구나 실제적으로 현실적으로도 해결이 되면서 새로운 희망이나 꿈을 가질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만난다면 그건 대단한 행운이라 하겠다. 


가출까지 했다가 이젠 마음 다잡아먹고 공부 열심히 해야지 새롭게 다짐을 하고 동네 독서실에 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이따금씩 독서실 창가에 서면 배지를 달고 책을 끼고 다니는 학생들을 볼 때마다 마음속 깊이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울분을 어찌해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많은 날을 집으로 와서 전축 볼륨을 높여놓고 트위스트를 몇 시간이고 나 스스로 지치고 지칠 때까지 얼마나 흔들어 댔는지 모른다. 아버지나 엄마는 내 고통 울분을 아셨는지 그냥그냥 눈감아 주셨기에 난 이따금씩 그 광란하는 춤으로 어느 정도 삭여 나가고 있었다. 


그 해 처음으로 실시된 예비고사에서 합격되었음을 알고 하느님 감사합니다. 외치고 있었다. 이는 분명 내 집념이 너무 처절해서 붙여 주신 것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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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4
나의 재수하던 시절(1)

 
 

 아버지는 내게 약대 가기를 바라셨다. 약대를 나오면 약방을 하나 차려 주겠다고 했다. 실제로 아버지는 작은 아버지도 약방을 하나 내 주셨기에 딸인 내가 약대를 갈 수만 있다면 하고 간절히 바라기도 하셨을 것 같다. 내 실력으로는 틀린 일이었으나 약대 아니고 다른 과는 안 된다고 할까봐 네 알았어요. 하고는 중대 사회사업과에 지원했다. 이대나 숙대가 아닌 남녀 공학의 원서를 내민 내게 선생님은 별 이의 없이 원서를 써 주셨다. 일차에 보기 좋게 낙방을 하고 2차는 건대 정외과에 원서를 냈다. 무슨 과를 들어가 어떤 공부를 해서 장차 무엇을 해보겠다는 소신이나 계획이 있어서가 아니고 무턱대고 들어가 봐야 하는 것이었다. 정외과 하면 여자 지망생이 많지 않아 행여 붙여 주지 않으려나 하는 한심한 발상도 없지 않았다. 


 두 번째도 고배를 마시고 시골집으로 내려갔다. 난 아버지께 청강생이 30만원이면 들어간다는데 보내 주실 수 있느냐고 졸라대었다. 아버지는 안 된다고 하지 않고 재수를 하라고 타이르셨다. 난 재수를 하기 전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에 고민만 하다가 어이없게도 죽는 것, 아니면 중이 되든가 둘 중에 하나였다. 


 유년시절부터 늘 사모님, 여사장, 국회의원이 되어야겠다고 머릿속 깊이 새기고 있던 내가 고등학교 졸업장만 가지고는 세상을 살아갈 수도, 살고 싶지 않았다. 난 지리부도를 내놓고 전국에 있는 절이란 절은 손가락으로 다 짚어 보며 뭘 어찌해야 할지 너무도 깜깜하고 막막했다. 


 매일매일 숨을 죽이듯 살고 있던 내게 바람이라도 쐴 겸 고모네 집에 며칠 다녀오라고 해서 고모네 집을 향해 떠났다. 그 고모는 세분 고모 중에 살림이 제일 넉넉하였건만 큰딸은 중학교만 보내고 집에서 살림이나 시키니 아침밥까지 지어야하는 나보다 몇 살이 어린 인숙이가 측은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다. 그 정도의 교육열을 가진 고모 내외였기에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 대학을 못 가서 비감한 심정으로 있는 내가 고모 눈에 곱게 보일 리가 없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고모네 아들 남식이 광식이와 2,3주를 보내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런데 서울역에 내리는 순간 다시 또 ‘촌뜨기’네 싶은 것이었다. 내가 몇 달을 시골에 파 묻혀 거의 현실과 동떨어진 사고방식 속에 살다보니 어느 사이 촌닭이 장터에 나온 꼴이었다. 나는 순간 다짐이자 결심을 하게 되었다. 다시는 시골로 가지 않을 것이며 ‘현실’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쳐 내리라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 


 그때의 그 기억이 내가 그토록 정서적으로 풍요롭고 정신적으로 여유 있고 행복한 시절이라 싶었던 유년시절의 정서는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하며, 내 현실은 많은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처지지 않고 사는 것이 좀 더 나은 삶이 될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 후로 난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어렵고 힘이 든다 싶어도 절대 피하려 하지 않고 적당히 덮어 두려 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서 해결하려는 주의였다. 


 그 해 가을 우리들 교육 때문에 식구 모두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가게와 살림집을 겸하고 있어 나는 들어오나 나가나 짜증이 극에 달했던 것 같다. 시골에선 집과 가게가 따로 떨어져 있어 아무런 구애도 받지 않고 내 미래를 펼칠 수가 있었는데 엄마 아버지가 서울로 올라오신 건 다행한 일이었지만, 조용하고 쾌적하게 생활하기란 쉽지 않았다. 


 난 나름대로 참고 참다가 극에 달하면 빗자루를 두드리며 다리를 뻗고 울어대기를 잘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생전 처음 내게 매를 드셨다. 현실도피는 하지 않겠다던 내가 가방 하나 챙겨서 부산행 열차에 오르고 말았다. 어차피 대학을 갈지 어떨지도 모르고 이런 환경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울분이 나를 밖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별다른 생각 없이 주민등록증은 있으니 부산에 내려가 어디 가정부 자리라도 하나 찾으면 숙식은 해결이 될 터이고 그 다음엔 지방신문을 찾아 일자리를 알아보리란 생각이었다. 


 서울역에 가서 기차를 탔다. 이따금 영화나 소설 속에서 볼 수 있듯 내 옆에 어떤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서울에 출장 왔다가 내려가는 길이란다. 난 순진하게 집을 나온 경위와 앞으로의 계획을 얘기를 했지 싶다. 


 부산에 내려서 그 사람은 내게 어떤 여관을 하나 잡아 주었는데 난 가방을 들고 들어가며 “아저씨, 그만 집으로 가셔야지요.” 했더니 그 사람은 내 너무도 순진하다 못해 천진난만한 아가씨를 어찌 해볼 수도 없는 양식 있는 사람이었는지 아무 소리 않고 자기네 집으로 가자고 데리고 나서는 것이었다. 


 그 남자의 집엔 노모 한 분과 두 아이와 아내가 있었다. 난 그 집에서 그 식구들과 일주일을 보내면서 해운대에 한번 놀러 가고는 거의 일주일 만에 집으로 무사히 돌아 올 수 있었다. 그곳에 양산을 두고 왔던 것을 소포로 받고 나서 너무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란 생각만 했지 편지 한 장 띄워주지 않았던 것 같다. 


 아버지와 엄마는 내게 별다른 꾸중은 않고 내가 학원에 나갈 수 있도록 해 주셔서 종로 2가에 있는 상록수 학원에 다니며 동네 독서실을 나가게 되었다.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때의 ‘판단이나 선택’이 나중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지도 예상도 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훗날 돌아보면 내게 최선의 길, 보다 바람직한 길로 인도되었음을 깨닫게 될 때가 여러 번 있었다. 


 그 동안 스무 살 가까이 되도록 의식주 걱정 한 번 하지 않고 부모한테 매 한 번 맞고 자라지도 않았건만, 말 대로 호강에 겨워 아버지가 가게를 하기에 그런 환경에서는 내 꿈을 실현시킬 수 없어 답답했는데, 마침 대학도 떨어 졌으니 별다른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아버지한테 매까지 맞았으니, 다른 길을 찾아 나서겠다고 서울이 아닌 우리나라에서 제 2의 도시 부산을 택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무사히 집으로 돌아 올 수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구나 싶을 때가 있다. 단순하게 저질렀던 ‘가출’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 수도 있었겠다 싶은 생각이 들 때면 내겐 나를 지켜주는 ‘수호천사’가 분명히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나를 바른 길, 다치지 않게 돌봐 주는 천사가 아버지인지 할머니인지 또는 나도 모르는 신인지는 알 수 없어도 그 후 살면서도 문득문득 느끼곤 할 때가 여러 번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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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30
아버지의 마음

  

 우리 아버지는 국민 학교도 나오지 못했다. 호랑이 할아버지 밑에서 학교에 갈 나이에 나무를 하기 위해 지게를 지고 나가야 했기에 빨리도 장사의 길로 들어서신 것 같다. 아버지는 위로 누님 한 분에 아래로는 여동생 둘 막내로 작은 아버지 모두 오남매였다. 차츰 형편이 좀 좋아졌는지 작은 아버지는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아버지가 배우지 못해 불편하심과 한이 많았기 때문이었을까. 언니는 중학교부터 읍내로 다녔다. 하긴 언니가 중학교를 읍내로 진학하게 된 것은 작은 아버지의 설득이 한 몫 했던 것으로 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우리의 교육은 난 고등학교, 언니는 대학을 들어갔으나 남동생은 중학교를 떨어졌기에 초등학교 6학년부터 우리 삼남매는 서울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남동생은 초등학교 6학년 때는 담임선생님이 우리 집에 있으면서 공부를 봐 주셨다. 지금도 눈에 선한 것은 부엌벽면에 작은 화덕을 만들어 놓았기에 엄마가 선생님을 드리려 계란 프라이 할 때나 호박 전 부치는 것 생선 굽는 것은 그 화덕이 몫을 요긴하게 잘 했다.


 선생님이 용산중학교는 무난하게 들어 갈 것이라고 해서 입학시험을 보았으나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일 년을 재수를 하게 되었다. 서울로 올라 온 그때도 초등학교 담임선생님께 한 달에 쌀 한 가마씩 갖다 드리고 공부를 했으나 1차 시험에 떨어져 2차로 성동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난 지금도 이따금씩 생각해본다. 시골에서는 비록 갑부 소리를 듣고 살았다 해도 우리 삼남매 서울로 와서 있으면서 학비와 생활비 대는 것도 쉽지 않았을 터인데, 지금으로 말하면 과외비나 같은 형식인데 일 년 동안 다달이 쌀 한 가마씩 올려 보내고 동생이 중학교에 입학하고서는 한동안 서울대생이 집에 와서 동생을 가르치기도 했었다. 그 과외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고 결국엔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식구 모두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나도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앞두고 아버지 친구 집에 보내져 그 집 아들과 같이 공부하게 되었다. 아버지 친구 분의 아들은 나와 학년이 같기도 했고 그곳에는 가정교사까지 있어 아버지가 그런저런 점 때문에 나를 그곳에 부탁했을 것이다. 


 입학시험을 보러 가는 날 아침에 찰밥을 해주셨던 것과 서울 지리를 잘 모르고 있어 입학시험을 치르게 될 성신여고까지 해분 언니(아버지 친구 분 딸)가 학교까지 데려다 준 것을 잊지 못한다. 동생은 광희 초등학교, 난 성신여고, 언니는 서라벌예대 연극 영화과에 진학하게 되면서 우리의 서울 생활은 시작되었다. 


 우리의 자취생활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 어느 날 밤에 아버지가 호떡을 한 봉지 사 오셨다. 그것은 우리를 객지로 보내놓고 보고싶고 걱정이 되어 우리들을 한 번 보실 겸 오면서 호떡을 사 오셨을 것이다. 우리는 자다 말고 일어나서 실컷 먹고도 남아 그 다음날까지 먹었던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 


 지금도 아릿한 슬픔으로 남아 있는 것은 내가 중학교 졸업식 날 졸업생 대표로 답사를 하게 되었다. 그때 아버지가 맨 뒤 학부형들 틈에 계셨던 것을 잠깐 보았으나 끝나고 나서 아버지는 뵙지 못했다. 아버지라고 당당하고 자신 있게 나서지 않고 그냥 그렇게 그런 모습으로 졸업식장엘 다녀가신 것이다. 그래도 졸업생 대표로 답사까지 하게 된 딸이 기특해서 저녁에는 선생님들 모두를 관에 초청해서 대접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아버지, 그런 나의 멋쟁이 아버지로 인해 이따금 가슴을 적시곤 한다. 대학을 떨어져 시골집에 내려가 있을 때 청강생이라도 보내 달라고 떼를 쓰던 내게 재수하기를 종용하던 아버지, 자식이 일곱이나 되는데 딸자식까지 마다않고 가르쳐주신 아버지께 늘 감사한다. 그즈음에도 딸은 시집이나 가면 된다며 중학교 고등학교도 보내지 않았던 몇몇 친구를 알고 있기에 아버지에 대해 고마운 마음은 더한다. 


 식구 모두 서울로 오고 나서 몇 가지 심부름 가운데 아버지의 의중을 엿볼 수가 있었다. 시골부자라야 서울에 와 봐야 별 볼일 없기도, 딸들의 혼처를 구하기 쉽지 않았음을 아시기도 아버지 나름대로의 자구책이 아니었을까 싶다. 한 번은 한성그룹인가 하는 회사로 무엇을 전해 주고 오라며 나를 보내셨다. 큰 회사로 드나들다 보면 사장님을 뵙기도, 다른 직원들 눈에 띄면 혹시나? 좋은 인연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내게 그런 심부름을 보내신 것으로 그렇게 짐작한다. 


 또 한 번은 성동세무서에 담당 직원을 만나서 주라고 그 당시에 오천 원이 든 돈 봉투를 주셨다. 난 아버지 말씀대로 그런 사람을 찾아가 봉투를 건네주었더니 받지 않는 것이었다. 난 그 봉투에 든 돈을 내가 써야 할지, 아버지께 드려야 할지 고민하다가 내가 쓰기로 작정하고 청계천 헌책방을 들어가 데카메론과 몇 권의 책을 샀다. 집에 와서는 갔다 왔다고만 말씀드렸다. 그런데 며칠 후 아버지가 그 돈 전해 드리지 않았느냐고 물으시기에 내가 썼다고 말씀드렸더니 별 꾸중은 듣지 않았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었는지 나도 여자대학보다는 ‘남녀 공학’을 굳이 고집한 것도 미래의 남편감을 만나려면 남학생들도 같이 다니는 그런 곳에서 배우자를 만나야 가장 낫지 않을까싶었고, 대학을 몇 번씩 떨어지면서도 기필코 대학을 들어가야만 했던 것은 어떤 남자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나의 ‘제 2의’ 인생이 시작 될 것이란 생각도 했었다. 


 난 대학을 들어가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결혼 후 남편이 사업을 하게 되며 담보 물건이 필요해서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자세하게 물어보지도 않고 또한 아무런 조건도 없이 두말없이 시골의 산 문서를 내어 주셨다. 난 그런 아버지를 보며 어쩌면 그토록 자식을 위해 아끼지 않고 내놓을 수가 있는지 늘 고맙고 잔잔한 아픔과 슬픔에 젖 는다. 


 우리가 아버지한테 그런 부탁을 드렸을 때는 이미 그 전에 사이비 교주 때문에 많은 재산을 잃고 천호동에 있는 작은 집을 구입해서 살고 계실 때였다. 그럼에도 아낌없이 내 주실 수 있었음은 대학이라도 나왔으니 잘 알아서 하겠지 하는 믿음과 어려울 때 부모가 되어 도와 줄 수 있다면 망설일 수 없다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다행스럽게 산 문서는 무사히 돌려 들릴 수 있었기에 훗날 큰 동생은 그것을 팔아 집 살 때 큰 보탬이 되었다.


 아버지가 사시던 집은 우리 집 장남인 내 남자동생이 친구가 하던 부동산 사업에 그 문서까지 내어 주어 그 집도 지키지 못하고, 대신 동생 친구가 추진하던 양평에 주말농장이라 칭하던 집을 하나 받아 그곳으로 내려가 살다가 그곳에서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서울로 올라오시게 되었던 것은 우리들 교육문제가 동기가 되기도 했겠지만, 그즈음 작은 아버지로 인해 경제적인 손실을 자주 보게 되면서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고 하셔 우리식구의 서울행은 작은 아버지가 크게 일조를 했다. 


 아버지가 서울로 올라오고도 작은 아버지의 요구에 시골에서 하던 가게터 문서까지 내어주어 작은 아버지가 그곳에서 중국집을 하기도 했다. 작은 아버지로 인해 재산상의 그런저런 문제가 있었음에도 작은 아버지 때문에 속상해 하시는 얘기는 한두 번 듣긴 했어도, 그 다음엔 어처구니없이 잃어버린 재산에 대해서는 한 번도 불편한 얘기조차 듣지 않았음은 그런 면에서도 난 아버지의 성품을 높이 사고 산다.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그토록 아낌없이 다 주시기도, 내 가슴 속에 새겨진 아버지의 모습에서 밀어내고 싶은, 혐오하는 그런 모습이 아닌, 가슴 따스하게 추억할 수 있는 모습이 많아 그런 점도 늘 감사한다. 


 아버지는 우리 큰딸 세 살 때 돌아가셨다. 자식들에게서 아무것도 받으신 것, 나도 아버지한테 내 손으로 진지 한 번 해드리지 못했음에 늘 죄송하고 마음은 아릿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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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6
남자의 매력

 

 나는 이 나이쯤 되어서야 학교 다닐 때 성적만큼이나 행동 발달 상황이 얼마만큼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니 참 늦둥이인가 보다. 내가 학교 다닐 때는 물론이요, 아이들이 통지표를 가져와도 가 나 다에서 나나 다가 없으면 그냥 지나쳐 버렸다. 어쩌다가 나 정도 있어도 내가 보아 큰 문제가 없다 싶으면 그냥 간과하게 되었다. 


 아이들의 통지표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큰 아이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소견 란에 아이가 진취적이라는 얘기와 작은 딸은 책임감과 자존심이 대단한 아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이따금 아이들을 보는 선생님의 눈이 정확했지 싶어 다시 한 번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러기에 언제고 기회를 만들어 나의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교까지 학적부를 열람해 보리라 싶은 마음이 든다. 어쩌면 그때그때 담임선생님이 나를 보셨던 부분이 가장 정확하지 않으려나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한 남자아이를 무척 관심 있게 보고 좋아하기도 하였다. 그 아이는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반장은 물론이요, 전교 회장, 부회장은 맡아서 하였다. 


내가 그 아이를 좋아했던 것은 첫째는 공부를 잘하기 때문이었다. 학생이 공부를 잘 한다함은 성실성, 책임감, 자주성 모두 좋지 않으면 어렵다. 중학교 때도 유심히 보고 남에게서 듣는 얘기로는 시험 때면 밤을 꼬박새우다 시피 해서 코피를 쏟기가 예사였다고 한다. 그만큼 열심히 하는 덕분인지 그 아이는 시험 때면 시험지를 받고 거의 언제나 제일 먼저 쓰고 나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학교 입학 성적이 그 아이가 5등, 내가 6등으로 여자로서는 내가 1등인 셈이었다. 선생님들 모두 그 아이가 5등인 것에 대해 의아해 하실 만큼 뛰어나게 잘하는 아이였다. 내가 보는 그 아이는 승부 근성과 집념 때문에 그만큼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본다. 머리만 믿고 적당히 하는 사람은 길게 놓고 볼 때 꾸준하게 노력하는 사람을 따라갈 수 없다. 그 아이는 머리는 별로 좋은 것 같지는 않은데 꾸준하게 노력하는 그 자세가 너무 좋았었다. 


고등학교를 2차로 가느니 차라리 재수를 하겠다며 서울까지 올라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함과 3년 내내 전교에서 회장 부회장을 하기도 하였다. 


내가 그 아이를 가장 좋아했던 부분은 무엇이든 자기가 해야 할 일, 목표를 세우고 최선을 다하며, 공부를 할 때면 밤도 꼬박꼬박 새우기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였다. 하지만 그 아이는 가정 형편상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직장을 가져야 했다. 그렇게 해서 그 아이는 내게서 더 이상의 매력 있는 아이는 아니었다. 아무리 똑똑하고 노력파일지라도 그에게서는 한계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우등생이 사회에서도 우등생은 아니라는 얘기를 하기도 한다. 학교에서의 우등생은 성적만을 놓고 볼 때 점수를 잘 받았기 때문에 우등생이라는 칭호를 붙여 줄 수가 있다. 그 우등생이라는 칭호에 성격까지도 좋으면 더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그런데 그 성격이란 거의 부모의 유전인자에서 비롯되며 유아기 때 어떤 환경에서 성장 했느냐도 크게 작용한다.


부모가 되어 아이의 성격이야 어찌되든 공부만을 밀어부처 앞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밀고 가다보면 아이가 사회성을 배울 기회가 없어진다. 또한 공부하는 기계로 전락하게 되면 공부로 해서 들어갈 수 있는 직장은 잘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나, 남을 배려 할 줄 모르는 그런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바람직하지도 않으며 학교에서의 우등생이란 칭호에 걸맞게 사회에서도 우등생이란 칭호는 붙여 줄 수가 없게 된다. 


영재 교육이니 천재니 하여 더러는 월반을 하는 아이도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부하는 머리가 우수해서 그야말로 성적 월반인 것이지, 모든 인간관계까지 월반을 하는 것은 아니다. 또 그 아이 또래에 맞게, 또한 그들과 함께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어야 하며 또 그리 할 줄 앎이 바로 사회성에 제대로 적응함이 될 것이다. 


우리가 대학교 다닐 때 무슨 천재라고 이름도 떠들썩했던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잊었지만 언젠가 캠퍼스를 지나는데 몇 명의 학생들과 함께 걸어가고 있는 그 아이를 볼 수 있었다. 그 아이는 다른 학생들보다도 우선 키도 많이 작아 같이 걸어가고 있는 다른 학생들이 그와 어울려 주는 것만도 고맙게 생각해야 되겠네 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공부는 뛰어나게 잘 해서 대학은 일찍 들어가서 잘 한 것인 줄 알았을지 모르지만, 그 또래들과 같이 어울릴 수 없이 몇 살이나 위인 아이들과 어느 만큼 대화가 통할 수 있었으려나 그것이 가장 궁금하다. 월반을 하였음이 결코 좋은 결과를 가져 왔다고 볼 수 없었다. 그때의 느낌은 공부를 뛰어나게 잘 한다고 해서 학년을 껑충 뛰어 넘고 보니 그 아이와 어울릴 수 있는 연령이 아니어서 그 떠들썩했던 화려함보다는, 오히려 안 돼 보이고, 사회 열등생처럼 순간 보여 지고 있어 그 아이를 바라보는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지극히 드문 예이긴 하지만 학교 우등생이 사회에서도 우등생이 아니라는 한 예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반면에 학교 때 공부를 잘하지 못한다함은 어디에든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한다. 그 문제란 공부에 집중을 할 수 없거나 책상에 오래 앉아 있을 수 없다면 그것이 우선 학생으로서의 책임감, 성실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다. 이미 어려서부터 그 나이에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그 자체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함은 조금씩 성장해 가면서도 다른 것도 크게 잘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부모가 아이를 잘 파악해서 그 아이가 성적을 잘 올리지 못하는 요인이 무엇인가 관심 있게 관찰을 해야 한다. 70점 80점 밖에 올릴 수 없는 자식을 그 이상하도록 요구를 함은 아이들에게도 큰 스트레스요, 학교 때부터 너무 질리게 되면 세상을 밝고 건전하게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사회에는, 세상에는, 공부를 잘 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각자 자기의 적성에 맞고, 능력에 맞는, 일을 찾아 세상을 살아감이 가장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어 사람들을 놓고 평가 할 때 성적 위주로, 모두 잘난 사람위주로, 시선이 모아짐이 아니라, 나도 인정받고 살면서 남도 무시하지 않고, 대접해 줄 수 있는 그런 풍토가 조성되어 갈 때 바람직하게 자리 잡아 갈 것이라 보여 진다. 사회에서 보는 ‘시각’이 바뀌지 않는 한 성적위주로의 학생을 평가함은 교육이 제대로 갈 수 없다. 인간은 각기 다른 능력과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어찌 다 일률적으로 살아가기를 바란다는 말인가. 


어쨌든 학교 다닐 때 공부 잘 하는 아이가 돋보이듯 사회에 나와서는 단연 열심히 일하는 모습에서 느낄 수 있다. 자기가 맡은 일에 긍정적으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면 진정 남자의 매력을 그런데서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의 남편을 그런데서 무척 아끼고 좋아한다. 그녀의 남편은 공대를 나와 자신이 전공한 컴퓨터 분야에 몰두해서 일을 하더니 언제부터인지 중국을 왔다 갔다 하며 사업 기반을 다져가더니 이제는 직원이 70, 80명되는 공장을 운영하고 있어 그것은 바로 그의 성실성과 노력의 결과라고 볼 수 있음에 더더욱 그를 높이 평가하게 된다. 자기가 하는 일에 만족하며 즐겁게 그 일에 몰두할 수 있음은 그 자체로서 그는 인생에서 성공을 한 것이라 봐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내가 하고 싶고, 좋아하는 일,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서 함은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 최소한 내가 보기에 우리 친구 남편은 정년퇴직에 연연하지 않아도 좋으며 정신적으로도 늙지 않을 것이며, 사는 날까지 자신이 추구하고 몰두할 수 있는 일이 있음은 충분히 그로서는 행복할 수 있으며 축복된 인생이라 본다. 


남자의 매력은 자기가 맡은 일에 충실할 수 있으며, 최선을 다하는 남자, 그렇게 살다 보면 그는 자연히 처자식을 부양하며 책임질 수 있다. 처자식을 큰 가슴으로 따뜻하게 감쌀 수 있으며, 주변 사람과, 이웃과 더불어함께 잘 살 수 있도록 배려할 수 있는 남자, 사회와 국가를 함께 걱정하고, 껴안을 수 있는 남자, 세계를 향해 가슴이 열려 있는 남자가 진정 매력 있는 남자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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