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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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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여주 출생,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기도 광수중학교 근무, 1992년 캐나다 이민, 캐나다문인협회 수필 부문 입상, 2006년 해외동포문학상, 작품집 <인생에 실패는 없다 다만 또 다른 삶이 있을 뿐이다>, <나이만큼 행복한 여자>, <밀리언 달러 티켓 나도 한장>,<행복이라는 이름의 여행>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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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3
내 인생의 환승행

 

 이 사건은 어쩌면 내 인생을 180도가 아닌 360도 바꿔 놓은 결과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때 그렇게 해서 그 일을 해결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지금쯤 다른 사람을 만나서 남편과 나의 작품인 유진 유미가 아니었을 테니까 말이다. 


 대학교 1학년 때 학점이 세 과목이나 나오지 않았던 결과로 인해 초급대학에서 4년제로 편입을 결심하게 되었으니 어쩌면 신은 늘 내 편에 있다가 내가 잠시 머뭇거리거나, 딴 길로 가는가 싶으면 하나씩 걸림돌을 마련해 놓았다가 더 나은 길로 인도해 주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 될 때가 여러 번 있었다. 물론 그때그때 빨리 깨달아서 고쳐 나가고 용케도 길을 잘 찾을 수 있는 지혜까지도 말이다. 


 몇몇 친구들은 숙명여자대학으로 편입시험을 보러 간다는데 난 가정과에서 국문과로 가기로 결정을 했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들어가서 만난 사람이 지금의 남편이다. 대학 4년 동안 내가 만났고 얻었던 최고의 선물인 셈이었다. 


 편입시험을 쳐 놓고 합격통지서가 오려나 이때나 저때나 기다리다 너무 늦어지는 것 같아 학교에 전화를 했더니 이미 발부했다는 것이었다. 다시 초조하게 며칠을 기다리던 중 어렵사리 합격통지서를 손에 넣게 되었는데 우편물이 잠시 방황을 했었는지 꽤나 더렵혀져 있었다. 그날이 아마 등록금 접수 마감 하루 이틀 전이었다.


 난 이미 언니와 큰 동생과 꽤나 마찰을 빗어 왔던 터여서 많이 지치기도 했었다. 엄마 아버지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는데 언니와 큰 동생은 초급 대학이라도 나왔으면 됐지 너만 생각하느냐며, 동생들이 몇이며, 엄마 아버지 생각은 하지도 않느냐며 반대를 했다. 난 그때 “너희들은 상관할 일이 아니며, 난 시집 갈 때 이불보따리만 가져가도 좋으니 포기할 수 없다”라고 완강했다. 


 드디어 마감 날은 다가 왔고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없이 나가셨다. 난 가게 방에 가서 서랍을 열어보니 돈 다발이 하나 있어 헤아려 볼 틈도 없이 그 돈 뭉치를 내 방으로 가져와서 세어보니 등록금 액수에서 만 4천원이 모자라는 것이었다. 난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망설이다 아랫집 아저씨에게로 뛰어 갔다. 사정 얘기를 하고 아저씨한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었으나 아저씨는 돈이 없다며 거절을 했다. 대충 상황을 아는지라 행여 빌려 줬다가 아버지가 원치 않는 일이면 어쩌나 싶어 그리 하셨을 것이다. 


 난 다시 내 방으로 들어와 어쩌나 어쩌나 그 사이 아버지가 들어오셔 그 돈을 내 놓으라고 하면 옴짝달싹도 못하는데 싶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퍼뜩 금목걸이 다섯 돈짜리가 떠올랐다. 그것은 엄마 것을 평소 내가 하고 다녔기에 내 수중에 있었다. 재고해 볼 여지도 없이 큰길 옆에 전당포 간판을 보았던 기억이 있어 창피한 것도 모르고 불쑥 올라가 그것을 맡기고 만 4천원을 받아 들고 쏜살같이 학교에 가서 등록을 마쳤다. 


 등록을 끝낸 감회나 후련함보다 이제 아버지와 부딪칠 일이 걱정이었다. 난 하루 종일 거리로 다방으로 빙빙 돌다가 해가 질 무렵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집으로 향했다. 등록금은 이미 내 버렸으니 돌아가서 찾아 올 수도 없고, 죽이든 살리든 아버지 처분에 따를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지 싶었다. 반은 풀이 죽고 반은 두려움으로 집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너 아버지한테 혼나면 어쩌려고 그렇게 했느냐며 엄마가 더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꿈같이 무사히 넘어 갔다. 이는 아버지가 평소 아들딸 가리지 않고 누구든 하고자, 능력 있는 놈만 가르치겠다 주장하셨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난 이래저래 평생 아버지한테 고마워하며 사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그런 일이 있고 며칠이 지난 다음 엄마가 돈을 주어 목걸이도 찾고 새 옷도 한 벌 맞춰 주셔서 그때부터 공부보다도 남편과 연애하느라 나머지 2년을 다 써 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3학년에 올라가 장학생 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그 결과 국문과 톱을 하게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늘 과 톱을 하던 조씨와의 점수 차이가 근소했다니 난 그 순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명언을 떠올리고 있었다.


 대학교 1학년 2학기 성적을 세 과목이나 낙제점을 받았다. 대학은 무슨 신천지라도 되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고 보니 고등학교의 연장일 뿐 별천지는 아니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내가 들을 과목을 알아서 수강신청을 해야 한다는 것, 그러니 중고등 학교 때처럼 아침에 등교를 하면 끝날 때까지 같이 공부를 하고 하교를 하는 것이 아니고, 언제든 내 강의가 있는 날 그 시간만 맞춰서 가면 되는 거였다. 


 대학은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것이 아니고, 고등학교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이 너무 실망스러웠고 그 하기 싫은 공부를 또 똑같이 해야 한다는 것도 시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대학을 들어가서 1학기 동안 많은 시간을 공부보다는 수업도 빼 먹고 시내 다방으로 또 영화 보러 다녔다. 어디 그뿐이랴. 모처럼 입고 간 옷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신경이 쓰인다싶으면 강의도 다 듣지 않고 집으로 그냥 오기도 했다. 


 내가 재수까지 해서도 1차 2차 다 떨어지고 나니 더 이상 입학원서를 낼 데가 없었는데 신문에서 3차 모집을 하는 초급대학도 있음을 보게 되었다. 학교에서 보는 시험도 스트레스를 받는 지경인데 입학시험에서 계속 낙방을 하고 보니 시험을 보러 가서도 내가 정답을 제대로 알고 쓰는지 시험을 봐서는 대학이라고 들어 갈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3차 모집을 한다는 건대 초급대학에 입학원서를 냈는데 그곳에서는 입학시험을 별도로 치지 않고 ‘예비고사 합격증’만으로 입학이 가능했기에 비록 2년제 이긴 했으나 그렇게 열망 했던 ‘대학’을 들어가게 되었다.


 건대 캠퍼스는 장안동에 있는 줄 알았는데 초급대학은 낙원동에 있었다. 초급대학이라도 입성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처지이긴 했으나, 조그마한 운동장에 강의실이라고 회색건물에 정감이 가지 않았다.


 지금도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대학을 들어가서 첫 번째 강의가 있는 날이었다. 난 잔뜩 긴장을 하고 강의실로 향했다. 강의실엔 학생들로 가득했다. 교양강좌였는데 임옥인 교수님이 나오셨다. 임옥인 교수님은 여류 시인으로 알고 있어 호기심이 동했다.


 강의 도중 ‘일사불란’이 무엇이냐고 물으셨건만 그 많은 학생 중에 아무도 답변을 하지 못해 두고두고 아쉽기도 그곳에 있는 학생들이 나보다 못하거나 내 정도의 실력밖엔 되지 않으리란 사실이 무척 실망스럽기도 했는데, 그 후 국문과로 편입을 하고 나서 무슨 과목이었는지 이훈종 교수님이 그때 또한 수업 중에 ‘오기’가 무엇이냐고 물으셨건만 그때도 아무도 답변을 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국어 시간엔 선생님이 질문을 하시면 대답은 주로 내가 많이 했다 싶었건만 그러고 보니 어떤 단어에 담긴 의미는 알고 있어도, 그 내용을 알기 쉽게 빨리 말로 풀이는 하지 못하네 싶었다. 두 번 다 답변을 하지 못해 잊혀 지지 않는다. 


 큰 딸이 고등학교, 작은 딸이 초등학교 6학년 올라 갈 때 이민을 왔다. 큰 딸은 학교에서 한국 학생을 소개해 주어 많은 도움이 되는 듯 했다. 하지만 작은 딸은 학교에 다니면서  숙제를 할 때면 몇 번씩 묻곤 했다. 내 나라 말도 단어 풀이도 제대로 못해 주는 실력인데, 게다가 영어로 물어 오니 내가 무슨 답변을 해줄 수 있었겠나. 몇 번 묻더니 엄마의 실력으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내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새삼 돌아보니 작은 딸이 그 시기를 얼마나 힘겹게 넘겼을까 그런 면에서도 특히 작은 딸한테 미안하다.   


 그렇게 열망하며 갈망하던 대학이라고 들어 가긴했는데 대학이란 곳이 너무 시시해서 별다른 흥미도 느끼지 못하고 1년은 그렇게 지나가는가 싶었다.


 그런데 1학기 성적표를 받고 보니 학점이 세 과목이나 나오지 않았다. 그때서야 우습게 볼게 아니었네 긴장이 되었다. 창피해서 누구한테 말도 못하고 건대 호숫가를 거의 2주를 돌며 고민을 했다. 그 결과 깨달아지는 것은 그래 그렇게 힘들게 대학이라고 들어가서 그것도 평생 4년 밖에 되지 않는데 2년으로 끝낼 수는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4년제로 편입을 하기로 결심을 하고는 그때부터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공부도 공부 그 자체를 위한 것이라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것이니 즐거운 마음으로 공부를 하자 싶었고 대학 2학년 때는 시험 기간엔 밤을 새운 적도 많았다. 가정 경제 같은 건 100점도 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전 학기 성적이 평균 80점이 넘으면 장학생 선발시험에 응시 할 수 있었기에 나도 장학생 선발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과 톱이 되어 편입을 하면서 인기도 그래서 좀 더 받았던 것으로 안다. 


 그때 장학 제도는 단과 대학별로, 각 과에서, 학년에서 한 명씩이었고, 장학금은 단과 대 톱이 삼 만원 과 톱이 이만 원 학년 톱이 만원이었다. 그 당시 늘 과 톱을 하던 J씨와 근소한 차이로 내가 되었다고 들었는데 J씨가 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해도 2학년 때 내가 한 공부보다는 그만큼은 아니었겠지 싶었다. 장학생 발표가 나자 J씨가 아니고 편입생인 어떤 여학생이 과 톱을 했다니 관심이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장학생 발표를 보는 순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명언을 또 한 번 떠 올리고 있었다.


 대학교 1학년 때 그럭저럭 학점만 제대로 나왔었다면 난 아마도 4년 제 대학까지는 생각지도 않았을 것 같다. 그것은 2년제에서 4년제의 의미가 아니라, 평생의 ‘반려자’를 지금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을 했을 것이겠기에 그것이야말로 오늘의 내 인생이 있게 된 확실한 ‘갈아타기’였네 싶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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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9
나의 재수하던 시절(3)-깨달음


 “세 살적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데 이는 비단 버릇이나 습관에만 국한된 얘기는 아닐 것 같다. 이미 태교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음은 임산부의 태교에서부터 어느 만큼은 모체의 DNA를 받고 태어났다고 해도, 각자의 성향 노력여하에 따라 삶의 형태 성공여부가 달라지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난 그동안의 학교생활을 되짚어보면 공부가 하기 싫어서 하지 않았다기보다는 특히 외우는 과목은 외워지지 않아 잘 하지 못했다싶기에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하는 방식, 기초가 좀 더 잘 다져 있었다면 내 공부실력이 좀 낫으려나 생각해 볼 때가 가끔 있다. 


 그것은 공부뿐이 아닌 책 읽는 습관이나 음악적인 소양도 다를 것 같지 않다. 중학교 때 유난히 미술에 소질이 있었던 아이들이 있었는가 하면, 풍금을 곧잘 치던 아이도 있었다. 미술을 잘 하던 아이들이나 음악적 소질도 타고난 아이였기에 배우지 않았어도 그렇게 잘 칠 수 있었나 생각해 본다. 


 내가 왜 그때 풍금이라도 배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못내 아쉽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중학교를 다니던 그 시절엔 ‘새마을 문고’라 칭했었는지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가면 소설책 시집 잡지 책등을 구비해 놓고 무료로 빌려 주는 곳이 있었다. 우리 반에 김영순이란 남학생은 그즈음 책을 빌려다보느라 옆구리에 책을 끼고 다니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도 책을 빌려다 보기는 했지만 즐겨 보지는 못했었다. 


돌아보니 그 시기에 공부, 음악, 책 읽는 습관 등등 좀 더 깊이 있게 할 수 있었던 것을 귀찮고 꾀가 나서 피해 버리고 적당히 해 버렸기에, 잘 성장할 수 있는 요인들 즉 배아가 시작되는 시기에 적당한 온도와 수분을 제대로 공급해 주지 못해 좋은 품종, 더 나은 씨앗으로 클 수 있는 적절한 ‘타이밍’을 놓쳐 버렸나 싶은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중학교 때 스케이트를 좀 타 봤던 경험이 있다. 그 후 고등학교 때 친구와 같이 스케이트장을 가서 이내 탈 수가 있었다. 또한 큰 아이 초등학교 자모가 되었을 때 아이들이 학교에서 체육 시간에 스케이트를 타는 시간이 있었다. 학부형으로 따라 간 난 아이들과 같이 스케이트를 타 보았는데 나이가 훨씬 들었음에도 그냥 탈수가 있더라는 것이다. 내가 중학교 때 스케이트를 타 보지 않았다면 고등학교나 그 후에 망설임 없이 탈 수가 있었을까 싶다. 언제든 하고자 하는 의지나 마음만 있다면 하지 못할 것도 없겠지만, 무엇이든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접해 보고 다양하게 경험을 해 본다면 중간에 사정이 여의치 않아 건너뛰다 나중에 다시 하게 된다 해도 습득력도 빨라 두려움 갖지 않고 할 수 있어 경우에 따라서는 크게 성공도 할 수 있겠다 싶기 때문이다. 


결혼을 해서 가정주부로 살다가 내 나이 마흔이 되기 전 문화센터에 다닐 때였다. 그때 수지침을 가르치던 선생님 말씀이 생각난다. 집에서 살림만 하다가 다시 공부라고 하려고보니 마치 머리가 스텐처럼 굳어 있는 것 같지 않느냐고 하던 얘기가 무척 공감이 갔었다. 


굳어진 머리라 해도 학교 때 기초가 잘 다져진 실력이라면 본래의 실력을 끄집어내기가 어렵지 않다. 그러나 학교 때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면 늦게 하는 공부가 얼마나 할 수 있으려나 물어보나마나가 아닐까 싶다. 그래 이따금 듣게 되는 나이 들어 공부하려니 공부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민 와서 몇 년 되지 않았을 때 커피숍에서였다. 어느 날 보니 80은 넘어 보이는 흑인 할머니가 영어 공부를 하고 계셨다. 난 그 얘기를 다른 엄마에게 했더니 우리도 더 늦기 전에 영어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난 그 엄마 생각과는 달랐다. 공부, 그것도 영어를 공부할 시기에도 잘하지 못했던 것을 나이 40넘어 새삼스럽게 한다고 해야 나로서는 실효성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아 난 그런 무모한 각오는 하지 않았다. 난 나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어차피 제한된 시간 속에 영어 공부보다는 난 글쓰기라도 부지런히 해 봐야 되겠다 싶었다. 그즈음 글을 쓰기 시작할 때였다. 그래서 그 후 난 꾸준하게 보고 관찰하고 생각하고 쓰고 또 썼다. 내가 만약 80넘어 보이는 할머니의 영어 공부하시는 모습에 자극받아 그 이후 영어 공부에 매진했다 해도 내 삶에서 과연 무엇이 달라졌을까. 그건 나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렵지 않게 접하게 되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각국의 언어)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한국 말, 우리말이라도 내 생각이나 가슴속의 얘기를 끄집어 표현 해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도의 한숨을, 작은 희열에 충만할 때도 있다. 


다시금 나이 60이 넘어 수필교실에서 공부를 하며 다시 절실하게 느낀다. 문장, 문법, 작품공부를 하면서 공부한 내용을 잊지 않고 다음 작품을 쓸 때는 꼭 써봐야지 하건만 이미 머릿속에서 굳어진, 알고 있는, 인지되어진 단어나 어휘밖에 쓸 수가 없어 답답하고 아쉬워 뒤늦은 반성도 해 본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좀 더 많은 책을 접할 수 있었다면 오늘 날 나의 언어 구사력은 달라져 있었을 것이란 사실을 깨닫게 한다.


아이들이 어릴 때나 내가 대리점 대표로 나가기 전에는 그래도 책은 늘 가까이 있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 묵동 공릉동 살 때에는 구청에서 대여해 주는 이동도서 차가 있어 그곳에서 책을 빌려 봤다. 아파트로 이사를 가서는 그곳에서는 저렴한 가격으로 책을 빌려 주는 차가 일주일에 두 번씩 와서 그곳에서 빌려다 보기도 했지만, 좀 더 어린 나이, 언어 습득을 하는 그 시기에 했던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나마 다행스럽게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거의 10개월을 집에서 쉴 때가 있었다. 그때 이토비콕 도서관엔 한국 책도 많아 빌려다 봤는데 그 시기엔 알게 모르게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모든 생명체는 파종 생성 숙성되어 가는 과정이 있는데 그 적절한 순간, 시기를 놓쳐 버리면 제 구실을 하지 못하거나 기대한 것만큼 수확을 거둘 수 없음을 안다. 


앞으로는 삶이 더 다양해지고 꼭 공부를 하지 않아도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데 별다른 지장이 없을지 모른다. 앞으로는 학벌 위주의 사회에서 능력 위주의 사회로 가는 성향이 늘어 나게 될 것 같다. 이미 인터넷 스마트 폰의 파급으로 세계인이 세계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며 일을 하며 내 삶을 구가하며 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극히 일부분일 것이고 그런 사람들의 능력은 그만큼 탁월하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상적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갖고 평범하게 살아가게 될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바뀐다 해도 학교생활을 해야 함은 단계적으로 하는 학습 내용도 있겠지만 다른 어떤 것보다도 사람 즉, ‘동창관계’를 빼 놓을 수 없고 또한 중요하다. 정상적인 학교 과정을 거치지 않고 능력은 있어 돈은 잘 번다해도 학교 때 만날 수 있는 그 친구관계는 ‘물질 이상의 자산’이기에 가볍게 볼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학연을 너무 따진다 할지도 모르겠으나 학교 다닐 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 시기에 그들과 같이 했던 그 순간 그 시기가 내 생애에 다시 올 수 없는 그런 순간이었음을 새롭게 깨닫는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 친구들을 만날 수 있고 사귈 수 있음에야 말해서 무엇 할까마는 사회에서 만나는 그 친구는 마음속을 차지하는 비중, 느낌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평생 진정으로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친구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성공한 삶이라는 말은, 사람이 주변에 아무리 많아도 진심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기도, 거의 없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이라 생각된다. 


이미 나이 60을 넘어 타국에서 살며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보며 살지만 과연 내가 알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또한 나를 아는 사람들은 누가 있을까 싶으니, 부모형제 동창들도 자주 만나지 못하고 산다 해도 그들이 내 가슴속에 차지하고 있음에 참으로 가볍게 볼 수 없는 관계들이네 싶은 생각이 든다. 


이미 글로벌 시대를 예견하고 소위 앞서 가는 사람들의 삶을 유추해 볼 때가 있다. 그들이 유능해서 업무를 주거지에 구애 받지 않고 보러 다닌다 해도 학창시절에 친구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사람들은 말고, 소위 유학파 부류들은 내가 어렵고 외로울 때 안기듯 편하게 찾을 수 있는 그런 벗들이 있을까 싶다. 학교 때 친구들은 평생 내가 간직하게 될 가슴 속 ‘조약돌’ 같은 그런 존재들이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


살아보니 가족이 소중함은 말할 필요도 없고 친구관계 역시 내 삶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 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평생 동안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 절체절명의 과제는 가족이나 친구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내가 온전하게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이유이다. 공부가 하기 싫다면 최소한 내가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는 확실하게 고민해야 한다. 장차 내가 살아 보고 싶은 삶, 미래의 나의 초상화를 그려보며 그 방향으로 마음 밭에 심어 둔다면 그게 알게 모르게 싹을 틔워 적절한 시기에 발현된다면 나도 모르는 과실을 거두게 될지도 모른다.


인생은 단 한 번뿐이기에 물질을 쫓아 살기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사는 삶이 그나마 아쉬움이나 후회가 덜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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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6
나의 재수하던 시절(2)

 
 
가출팸(가출한 남녀가 만나 서로 의지하고 사는 아이들)

 

 

 나의 재수하던 시절, 이 글을 쓰면서 몇 번 망설였다.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지만 친정의 내 형제들은 물론이요, 지금의 내 남편 두 딸들도 모르는 내 과거사, 엄마조차도 까마득하게 잊고 계실 내 과오를 굳이 써야하나 망설였다. 하지만 그런 가출은 나만의 문제가 아닌 오늘날 가족이 해체되는 사회에선 가출은 청소년뿐이 아닌 기성세대들한테서도 들을 수 있기에 이 기회에 다시 한 번 돌아볼까 싶어 쓰기로 했다. 


 언젠가 마침 SBS스페셜 프로에 ‘가출팸’이란 제목으로 방영되어 보게 되었다. 보통 열다섯에서 스무 살 안팎의 남녀가 집을 나와서 모텔이나 여관 같은 데로 숙소를 정해 놓고 생활을 하며, 아르바이트를 해서 라면이나 김밥으로 끼니를 때워도, 그래도 마음을 받아 주고, 털어 놓을 수 있고, 서로 의지가 되어 집보다 더 편하고 좋다고 한다. 거리로 떠돌다시피 하는 그들, 편히 잠자고 쉴 수 있는 방 한 칸이 절실하다는 애들을 보며, 2000년도에 역이민을 하겠다고 서울을 나갔을 때, 머리 들이 밀고 들어 가 쉴 수 있는 방 한 칸이라도 있어야 살 수 있지 않겠느냐며 너무도 막막했던 그런 때가 있었기에 그들의 심경이 더더욱 가슴에 와 닿았다.


 다시 또 요즈음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묻지 마’ 범죄를 보면서 피해를 당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보호 받을 수 있는 법만 강구가 되네 싶어, 가해자였던 사람들의 입지는 점점 좁아져 설 자리가 없음은 물론이요, 죽음의 길로 내몰리고 있네 싶어 더 답답함을 느낀다. 


 범죄자의 대부분은 가족과 떨어져 살고 있으면서 일자리도 없고, 구할 수도 없어 도저히 살아 갈 수가 없어 말 그대로 이판사판이라는 심정, 더 이상 갈 데가 없어 코너에 몰려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 그들뿐이 아닌 그런 부류, 계층의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데에 심각성이 있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의 범죄 예방책이나 재범 방지법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 못지않게 그들이 출소 후에 먹고 살아 갈 수 있는 사회적 제도도 마련되어 있다면 재범 발생하는 횟수가 그만큼 줄어들지 않겠나 싶은 생각을 해 볼 때가 있다. 범죄를 저질렀기에 벌을 받아야 함은 당연한 일이지만 형무소엘 갔다 와서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잘 살아 보겠다고 다짐을 해도, 사회에서 그들을 보는 편견이나 시각이 냉소적 적대적이기 십상이니 그런 처우를 견디지 못하기도, 그러다 보니 그런 환경에 적응하기도 쉽지 않은데 살길이 더 막막해서 다시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안타까울 때가 많다. 


흔히 동병상련이라는 말로 표현 되곤 하는 같은 처지, 상황, 현재 처해 있는 그 환경이 싫어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나름 혼자 살아 보려 가출을 해 보지만 나와서보니 집에서 겪었던 현실보다는 어떤 면에서는 더 힘이 들겠지만, 그래도 결국엔 아이들이 마음이 더 편하고 견디어 낼만한 곳을 택한다는 것이다. 단순 가출인 경우는 집으로 돌아가 원래대로 잘 살 수도 있지만, 집안에 ‘문제’가 있어 가출을 했던 아이들은 집안에서의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는 한은 집으로 들어 가봐야 개선되지 않고 가출은 다시 또 할 수도 있으리란 것이다.


경험하고 체험한 사람들이 더 잘 이해를 하고 알아주기도 하지만 남이 나를 이해하고 알아준다고 한들 그것이 내 현실을 헤쳐 나가는데 무슨 도움이 되는 것일까 싶다. 내 절박하고 간절한 처지를 알아내게 실질적인 조언을 해 줄 사람이 아니라면, 아니 내 주변에 그럴만한 멘토가 있었다 해도 어차피 내 문제는 내가 시간을 갖고 견뎌 내며 시간이 흘러가야 해결의 실마리라도 보이는 것이 대부분이다.


내가 대학을 떨어져 방황을 하다가 급기야 가출까지 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고는 하나 그런 행위에 대해서 부모님께 죄송하다는 생각을 얼마나 했을까 싶다. 다시 또 똑 같은 현실에서 다시는 집을 나가는 일은 없어야겠지만, 지금 새삼 돌아봐도 부모님 걱정이나 생각보다 공부는 되지 않는데 대학을 가지 않고는 살 수 없으니 공부 열심히 해서 기필코 대학을 들어가야지 다짐 해 보지만 희망도 출구도 보이지 않고 깝깝하기만 했다.


새삼 나의 그때 심경을 돌아보며 오늘날의 그 나이 또래들을 견주어 봐도, 가출을 하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집을 나오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공부가 하기 싫어서 나오는 아이들도 있겠지만 부모의 학대나 부모의 이혼으로 해서 집안의 문제나 갈등을 보아 넘기지 못해 가출을 하기도 할 것이다. 그런 위기의 상황에 처했을 때 그야말로 운 좋게 좋은 친구나 실제적으로 현실적으로도 해결이 되면서 새로운 희망이나 꿈을 가질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만난다면 그건 대단한 행운이라 하겠다. 


가출까지 했다가 이젠 마음 다잡아먹고 공부 열심히 해야지 새롭게 다짐을 하고 동네 독서실에 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이따금씩 독서실 창가에 서면 배지를 달고 책을 끼고 다니는 학생들을 볼 때마다 마음속 깊이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울분을 어찌해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많은 날을 집으로 와서 전축 볼륨을 높여놓고 트위스트를 몇 시간이고 나 스스로 지치고 지칠 때까지 얼마나 흔들어 댔는지 모른다. 아버지나 엄마는 내 고통 울분을 아셨는지 그냥그냥 눈감아 주셨기에 난 이따금씩 그 광란하는 춤으로 어느 정도 삭여 나가고 있었다. 


그 해 처음으로 실시된 예비고사에서 합격되었음을 알고 하느님 감사합니다. 외치고 있었다. 이는 분명 내 집념이 너무 처절해서 붙여 주신 것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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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4
나의 재수하던 시절(1)

 
 

 아버지는 내게 약대 가기를 바라셨다. 약대를 나오면 약방을 하나 차려 주겠다고 했다. 실제로 아버지는 작은 아버지도 약방을 하나 내 주셨기에 딸인 내가 약대를 갈 수만 있다면 하고 간절히 바라기도 하셨을 것 같다. 내 실력으로는 틀린 일이었으나 약대 아니고 다른 과는 안 된다고 할까봐 네 알았어요. 하고는 중대 사회사업과에 지원했다. 이대나 숙대가 아닌 남녀 공학의 원서를 내민 내게 선생님은 별 이의 없이 원서를 써 주셨다. 일차에 보기 좋게 낙방을 하고 2차는 건대 정외과에 원서를 냈다. 무슨 과를 들어가 어떤 공부를 해서 장차 무엇을 해보겠다는 소신이나 계획이 있어서가 아니고 무턱대고 들어가 봐야 하는 것이었다. 정외과 하면 여자 지망생이 많지 않아 행여 붙여 주지 않으려나 하는 한심한 발상도 없지 않았다. 


 두 번째도 고배를 마시고 시골집으로 내려갔다. 난 아버지께 청강생이 30만원이면 들어간다는데 보내 주실 수 있느냐고 졸라대었다. 아버지는 안 된다고 하지 않고 재수를 하라고 타이르셨다. 난 재수를 하기 전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에 고민만 하다가 어이없게도 죽는 것, 아니면 중이 되든가 둘 중에 하나였다. 


 유년시절부터 늘 사모님, 여사장, 국회의원이 되어야겠다고 머릿속 깊이 새기고 있던 내가 고등학교 졸업장만 가지고는 세상을 살아갈 수도, 살고 싶지 않았다. 난 지리부도를 내놓고 전국에 있는 절이란 절은 손가락으로 다 짚어 보며 뭘 어찌해야 할지 너무도 깜깜하고 막막했다. 


 매일매일 숨을 죽이듯 살고 있던 내게 바람이라도 쐴 겸 고모네 집에 며칠 다녀오라고 해서 고모네 집을 향해 떠났다. 그 고모는 세분 고모 중에 살림이 제일 넉넉하였건만 큰딸은 중학교만 보내고 집에서 살림이나 시키니 아침밥까지 지어야하는 나보다 몇 살이 어린 인숙이가 측은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다. 그 정도의 교육열을 가진 고모 내외였기에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 대학을 못 가서 비감한 심정으로 있는 내가 고모 눈에 곱게 보일 리가 없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고모네 아들 남식이 광식이와 2,3주를 보내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런데 서울역에 내리는 순간 다시 또 ‘촌뜨기’네 싶은 것이었다. 내가 몇 달을 시골에 파 묻혀 거의 현실과 동떨어진 사고방식 속에 살다보니 어느 사이 촌닭이 장터에 나온 꼴이었다. 나는 순간 다짐이자 결심을 하게 되었다. 다시는 시골로 가지 않을 것이며 ‘현실’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쳐 내리라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 


 그때의 그 기억이 내가 그토록 정서적으로 풍요롭고 정신적으로 여유 있고 행복한 시절이라 싶었던 유년시절의 정서는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하며, 내 현실은 많은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처지지 않고 사는 것이 좀 더 나은 삶이 될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 후로 난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어렵고 힘이 든다 싶어도 절대 피하려 하지 않고 적당히 덮어 두려 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서 해결하려는 주의였다. 


 그 해 가을 우리들 교육 때문에 식구 모두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가게와 살림집을 겸하고 있어 나는 들어오나 나가나 짜증이 극에 달했던 것 같다. 시골에선 집과 가게가 따로 떨어져 있어 아무런 구애도 받지 않고 내 미래를 펼칠 수가 있었는데 엄마 아버지가 서울로 올라오신 건 다행한 일이었지만, 조용하고 쾌적하게 생활하기란 쉽지 않았다. 


 난 나름대로 참고 참다가 극에 달하면 빗자루를 두드리며 다리를 뻗고 울어대기를 잘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생전 처음 내게 매를 드셨다. 현실도피는 하지 않겠다던 내가 가방 하나 챙겨서 부산행 열차에 오르고 말았다. 어차피 대학을 갈지 어떨지도 모르고 이런 환경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울분이 나를 밖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별다른 생각 없이 주민등록증은 있으니 부산에 내려가 어디 가정부 자리라도 하나 찾으면 숙식은 해결이 될 터이고 그 다음엔 지방신문을 찾아 일자리를 알아보리란 생각이었다. 


 서울역에 가서 기차를 탔다. 이따금 영화나 소설 속에서 볼 수 있듯 내 옆에 어떤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서울에 출장 왔다가 내려가는 길이란다. 난 순진하게 집을 나온 경위와 앞으로의 계획을 얘기를 했지 싶다. 


 부산에 내려서 그 사람은 내게 어떤 여관을 하나 잡아 주었는데 난 가방을 들고 들어가며 “아저씨, 그만 집으로 가셔야지요.” 했더니 그 사람은 내 너무도 순진하다 못해 천진난만한 아가씨를 어찌 해볼 수도 없는 양식 있는 사람이었는지 아무 소리 않고 자기네 집으로 가자고 데리고 나서는 것이었다. 


 그 남자의 집엔 노모 한 분과 두 아이와 아내가 있었다. 난 그 집에서 그 식구들과 일주일을 보내면서 해운대에 한번 놀러 가고는 거의 일주일 만에 집으로 무사히 돌아 올 수 있었다. 그곳에 양산을 두고 왔던 것을 소포로 받고 나서 너무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란 생각만 했지 편지 한 장 띄워주지 않았던 것 같다. 


 아버지와 엄마는 내게 별다른 꾸중은 않고 내가 학원에 나갈 수 있도록 해 주셔서 종로 2가에 있는 상록수 학원에 다니며 동네 독서실을 나가게 되었다.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때의 ‘판단이나 선택’이 나중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지도 예상도 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훗날 돌아보면 내게 최선의 길, 보다 바람직한 길로 인도되었음을 깨닫게 될 때가 여러 번 있었다. 


 그 동안 스무 살 가까이 되도록 의식주 걱정 한 번 하지 않고 부모한테 매 한 번 맞고 자라지도 않았건만, 말 대로 호강에 겨워 아버지가 가게를 하기에 그런 환경에서는 내 꿈을 실현시킬 수 없어 답답했는데, 마침 대학도 떨어 졌으니 별다른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아버지한테 매까지 맞았으니, 다른 길을 찾아 나서겠다고 서울이 아닌 우리나라에서 제 2의 도시 부산을 택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무사히 집으로 돌아 올 수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구나 싶을 때가 있다. 단순하게 저질렀던 ‘가출’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 수도 있었겠다 싶은 생각이 들 때면 내겐 나를 지켜주는 ‘수호천사’가 분명히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나를 바른 길, 다치지 않게 돌봐 주는 천사가 아버지인지 할머니인지 또는 나도 모르는 신인지는 알 수 없어도 그 후 살면서도 문득문득 느끼곤 할 때가 여러 번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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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30
아버지의 마음

  

 우리 아버지는 국민 학교도 나오지 못했다. 호랑이 할아버지 밑에서 학교에 갈 나이에 나무를 하기 위해 지게를 지고 나가야 했기에 빨리도 장사의 길로 들어서신 것 같다. 아버지는 위로 누님 한 분에 아래로는 여동생 둘 막내로 작은 아버지 모두 오남매였다. 차츰 형편이 좀 좋아졌는지 작은 아버지는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아버지가 배우지 못해 불편하심과 한이 많았기 때문이었을까. 언니는 중학교부터 읍내로 다녔다. 하긴 언니가 중학교를 읍내로 진학하게 된 것은 작은 아버지의 설득이 한 몫 했던 것으로 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우리의 교육은 난 고등학교, 언니는 대학을 들어갔으나 남동생은 중학교를 떨어졌기에 초등학교 6학년부터 우리 삼남매는 서울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남동생은 초등학교 6학년 때는 담임선생님이 우리 집에 있으면서 공부를 봐 주셨다. 지금도 눈에 선한 것은 부엌벽면에 작은 화덕을 만들어 놓았기에 엄마가 선생님을 드리려 계란 프라이 할 때나 호박 전 부치는 것 생선 굽는 것은 그 화덕이 몫을 요긴하게 잘 했다.


 선생님이 용산중학교는 무난하게 들어 갈 것이라고 해서 입학시험을 보았으나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일 년을 재수를 하게 되었다. 서울로 올라 온 그때도 초등학교 담임선생님께 한 달에 쌀 한 가마씩 갖다 드리고 공부를 했으나 1차 시험에 떨어져 2차로 성동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난 지금도 이따금씩 생각해본다. 시골에서는 비록 갑부 소리를 듣고 살았다 해도 우리 삼남매 서울로 와서 있으면서 학비와 생활비 대는 것도 쉽지 않았을 터인데, 지금으로 말하면 과외비나 같은 형식인데 일 년 동안 다달이 쌀 한 가마씩 올려 보내고 동생이 중학교에 입학하고서는 한동안 서울대생이 집에 와서 동생을 가르치기도 했었다. 그 과외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고 결국엔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식구 모두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나도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앞두고 아버지 친구 집에 보내져 그 집 아들과 같이 공부하게 되었다. 아버지 친구 분의 아들은 나와 학년이 같기도 했고 그곳에는 가정교사까지 있어 아버지가 그런저런 점 때문에 나를 그곳에 부탁했을 것이다. 


 입학시험을 보러 가는 날 아침에 찰밥을 해주셨던 것과 서울 지리를 잘 모르고 있어 입학시험을 치르게 될 성신여고까지 해분 언니(아버지 친구 분 딸)가 학교까지 데려다 준 것을 잊지 못한다. 동생은 광희 초등학교, 난 성신여고, 언니는 서라벌예대 연극 영화과에 진학하게 되면서 우리의 서울 생활은 시작되었다. 


 우리의 자취생활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 어느 날 밤에 아버지가 호떡을 한 봉지 사 오셨다. 그것은 우리를 객지로 보내놓고 보고싶고 걱정이 되어 우리들을 한 번 보실 겸 오면서 호떡을 사 오셨을 것이다. 우리는 자다 말고 일어나서 실컷 먹고도 남아 그 다음날까지 먹었던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 


 지금도 아릿한 슬픔으로 남아 있는 것은 내가 중학교 졸업식 날 졸업생 대표로 답사를 하게 되었다. 그때 아버지가 맨 뒤 학부형들 틈에 계셨던 것을 잠깐 보았으나 끝나고 나서 아버지는 뵙지 못했다. 아버지라고 당당하고 자신 있게 나서지 않고 그냥 그렇게 그런 모습으로 졸업식장엘 다녀가신 것이다. 그래도 졸업생 대표로 답사까지 하게 된 딸이 기특해서 저녁에는 선생님들 모두를 관에 초청해서 대접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아버지, 그런 나의 멋쟁이 아버지로 인해 이따금 가슴을 적시곤 한다. 대학을 떨어져 시골집에 내려가 있을 때 청강생이라도 보내 달라고 떼를 쓰던 내게 재수하기를 종용하던 아버지, 자식이 일곱이나 되는데 딸자식까지 마다않고 가르쳐주신 아버지께 늘 감사한다. 그즈음에도 딸은 시집이나 가면 된다며 중학교 고등학교도 보내지 않았던 몇몇 친구를 알고 있기에 아버지에 대해 고마운 마음은 더한다. 


 식구 모두 서울로 오고 나서 몇 가지 심부름 가운데 아버지의 의중을 엿볼 수가 있었다. 시골부자라야 서울에 와 봐야 별 볼일 없기도, 딸들의 혼처를 구하기 쉽지 않았음을 아시기도 아버지 나름대로의 자구책이 아니었을까 싶다. 한 번은 한성그룹인가 하는 회사로 무엇을 전해 주고 오라며 나를 보내셨다. 큰 회사로 드나들다 보면 사장님을 뵙기도, 다른 직원들 눈에 띄면 혹시나? 좋은 인연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내게 그런 심부름을 보내신 것으로 그렇게 짐작한다. 


 또 한 번은 성동세무서에 담당 직원을 만나서 주라고 그 당시에 오천 원이 든 돈 봉투를 주셨다. 난 아버지 말씀대로 그런 사람을 찾아가 봉투를 건네주었더니 받지 않는 것이었다. 난 그 봉투에 든 돈을 내가 써야 할지, 아버지께 드려야 할지 고민하다가 내가 쓰기로 작정하고 청계천 헌책방을 들어가 데카메론과 몇 권의 책을 샀다. 집에 와서는 갔다 왔다고만 말씀드렸다. 그런데 며칠 후 아버지가 그 돈 전해 드리지 않았느냐고 물으시기에 내가 썼다고 말씀드렸더니 별 꾸중은 듣지 않았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었는지 나도 여자대학보다는 ‘남녀 공학’을 굳이 고집한 것도 미래의 남편감을 만나려면 남학생들도 같이 다니는 그런 곳에서 배우자를 만나야 가장 낫지 않을까싶었고, 대학을 몇 번씩 떨어지면서도 기필코 대학을 들어가야만 했던 것은 어떤 남자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나의 ‘제 2의’ 인생이 시작 될 것이란 생각도 했었다. 


 난 대학을 들어가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결혼 후 남편이 사업을 하게 되며 담보 물건이 필요해서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자세하게 물어보지도 않고 또한 아무런 조건도 없이 두말없이 시골의 산 문서를 내어 주셨다. 난 그런 아버지를 보며 어쩌면 그토록 자식을 위해 아끼지 않고 내놓을 수가 있는지 늘 고맙고 잔잔한 아픔과 슬픔에 젖 는다. 


 우리가 아버지한테 그런 부탁을 드렸을 때는 이미 그 전에 사이비 교주 때문에 많은 재산을 잃고 천호동에 있는 작은 집을 구입해서 살고 계실 때였다. 그럼에도 아낌없이 내 주실 수 있었음은 대학이라도 나왔으니 잘 알아서 하겠지 하는 믿음과 어려울 때 부모가 되어 도와 줄 수 있다면 망설일 수 없다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다행스럽게 산 문서는 무사히 돌려 들릴 수 있었기에 훗날 큰 동생은 그것을 팔아 집 살 때 큰 보탬이 되었다.


 아버지가 사시던 집은 우리 집 장남인 내 남자동생이 친구가 하던 부동산 사업에 그 문서까지 내어 주어 그 집도 지키지 못하고, 대신 동생 친구가 추진하던 양평에 주말농장이라 칭하던 집을 하나 받아 그곳으로 내려가 살다가 그곳에서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서울로 올라오시게 되었던 것은 우리들 교육문제가 동기가 되기도 했겠지만, 그즈음 작은 아버지로 인해 경제적인 손실을 자주 보게 되면서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고 하셔 우리식구의 서울행은 작은 아버지가 크게 일조를 했다. 


 아버지가 서울로 올라오고도 작은 아버지의 요구에 시골에서 하던 가게터 문서까지 내어주어 작은 아버지가 그곳에서 중국집을 하기도 했다. 작은 아버지로 인해 재산상의 그런저런 문제가 있었음에도 작은 아버지 때문에 속상해 하시는 얘기는 한두 번 듣긴 했어도, 그 다음엔 어처구니없이 잃어버린 재산에 대해서는 한 번도 불편한 얘기조차 듣지 않았음은 그런 면에서도 난 아버지의 성품을 높이 사고 산다.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그토록 아낌없이 다 주시기도, 내 가슴 속에 새겨진 아버지의 모습에서 밀어내고 싶은, 혐오하는 그런 모습이 아닌, 가슴 따스하게 추억할 수 있는 모습이 많아 그런 점도 늘 감사한다. 


 아버지는 우리 큰딸 세 살 때 돌아가셨다. 자식들에게서 아무것도 받으신 것, 나도 아버지한테 내 손으로 진지 한 번 해드리지 못했음에 늘 죄송하고 마음은 아릿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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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6
남자의 매력

 

 나는 이 나이쯤 되어서야 학교 다닐 때 성적만큼이나 행동 발달 상황이 얼마만큼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니 참 늦둥이인가 보다. 내가 학교 다닐 때는 물론이요, 아이들이 통지표를 가져와도 가 나 다에서 나나 다가 없으면 그냥 지나쳐 버렸다. 어쩌다가 나 정도 있어도 내가 보아 큰 문제가 없다 싶으면 그냥 간과하게 되었다. 


 아이들의 통지표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큰 아이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소견 란에 아이가 진취적이라는 얘기와 작은 딸은 책임감과 자존심이 대단한 아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이따금 아이들을 보는 선생님의 눈이 정확했지 싶어 다시 한 번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러기에 언제고 기회를 만들어 나의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교까지 학적부를 열람해 보리라 싶은 마음이 든다. 어쩌면 그때그때 담임선생님이 나를 보셨던 부분이 가장 정확하지 않으려나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한 남자아이를 무척 관심 있게 보고 좋아하기도 하였다. 그 아이는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반장은 물론이요, 전교 회장, 부회장은 맡아서 하였다. 


내가 그 아이를 좋아했던 것은 첫째는 공부를 잘하기 때문이었다. 학생이 공부를 잘 한다함은 성실성, 책임감, 자주성 모두 좋지 않으면 어렵다. 중학교 때도 유심히 보고 남에게서 듣는 얘기로는 시험 때면 밤을 꼬박새우다 시피 해서 코피를 쏟기가 예사였다고 한다. 그만큼 열심히 하는 덕분인지 그 아이는 시험 때면 시험지를 받고 거의 언제나 제일 먼저 쓰고 나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학교 입학 성적이 그 아이가 5등, 내가 6등으로 여자로서는 내가 1등인 셈이었다. 선생님들 모두 그 아이가 5등인 것에 대해 의아해 하실 만큼 뛰어나게 잘하는 아이였다. 내가 보는 그 아이는 승부 근성과 집념 때문에 그만큼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본다. 머리만 믿고 적당히 하는 사람은 길게 놓고 볼 때 꾸준하게 노력하는 사람을 따라갈 수 없다. 그 아이는 머리는 별로 좋은 것 같지는 않은데 꾸준하게 노력하는 그 자세가 너무 좋았었다. 


고등학교를 2차로 가느니 차라리 재수를 하겠다며 서울까지 올라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함과 3년 내내 전교에서 회장 부회장을 하기도 하였다. 


내가 그 아이를 가장 좋아했던 부분은 무엇이든 자기가 해야 할 일, 목표를 세우고 최선을 다하며, 공부를 할 때면 밤도 꼬박꼬박 새우기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였다. 하지만 그 아이는 가정 형편상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직장을 가져야 했다. 그렇게 해서 그 아이는 내게서 더 이상의 매력 있는 아이는 아니었다. 아무리 똑똑하고 노력파일지라도 그에게서는 한계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우등생이 사회에서도 우등생은 아니라는 얘기를 하기도 한다. 학교에서의 우등생은 성적만을 놓고 볼 때 점수를 잘 받았기 때문에 우등생이라는 칭호를 붙여 줄 수가 있다. 그 우등생이라는 칭호에 성격까지도 좋으면 더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그런데 그 성격이란 거의 부모의 유전인자에서 비롯되며 유아기 때 어떤 환경에서 성장 했느냐도 크게 작용한다.


부모가 되어 아이의 성격이야 어찌되든 공부만을 밀어부처 앞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밀고 가다보면 아이가 사회성을 배울 기회가 없어진다. 또한 공부하는 기계로 전락하게 되면 공부로 해서 들어갈 수 있는 직장은 잘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나, 남을 배려 할 줄 모르는 그런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바람직하지도 않으며 학교에서의 우등생이란 칭호에 걸맞게 사회에서도 우등생이란 칭호는 붙여 줄 수가 없게 된다. 


영재 교육이니 천재니 하여 더러는 월반을 하는 아이도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부하는 머리가 우수해서 그야말로 성적 월반인 것이지, 모든 인간관계까지 월반을 하는 것은 아니다. 또 그 아이 또래에 맞게, 또한 그들과 함께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어야 하며 또 그리 할 줄 앎이 바로 사회성에 제대로 적응함이 될 것이다. 


우리가 대학교 다닐 때 무슨 천재라고 이름도 떠들썩했던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잊었지만 언젠가 캠퍼스를 지나는데 몇 명의 학생들과 함께 걸어가고 있는 그 아이를 볼 수 있었다. 그 아이는 다른 학생들보다도 우선 키도 많이 작아 같이 걸어가고 있는 다른 학생들이 그와 어울려 주는 것만도 고맙게 생각해야 되겠네 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공부는 뛰어나게 잘 해서 대학은 일찍 들어가서 잘 한 것인 줄 알았을지 모르지만, 그 또래들과 같이 어울릴 수 없이 몇 살이나 위인 아이들과 어느 만큼 대화가 통할 수 있었으려나 그것이 가장 궁금하다. 월반을 하였음이 결코 좋은 결과를 가져 왔다고 볼 수 없었다. 그때의 느낌은 공부를 뛰어나게 잘 한다고 해서 학년을 껑충 뛰어 넘고 보니 그 아이와 어울릴 수 있는 연령이 아니어서 그 떠들썩했던 화려함보다는, 오히려 안 돼 보이고, 사회 열등생처럼 순간 보여 지고 있어 그 아이를 바라보는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지극히 드문 예이긴 하지만 학교 우등생이 사회에서도 우등생이 아니라는 한 예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반면에 학교 때 공부를 잘하지 못한다함은 어디에든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한다. 그 문제란 공부에 집중을 할 수 없거나 책상에 오래 앉아 있을 수 없다면 그것이 우선 학생으로서의 책임감, 성실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다. 이미 어려서부터 그 나이에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그 자체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함은 조금씩 성장해 가면서도 다른 것도 크게 잘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부모가 아이를 잘 파악해서 그 아이가 성적을 잘 올리지 못하는 요인이 무엇인가 관심 있게 관찰을 해야 한다. 70점 80점 밖에 올릴 수 없는 자식을 그 이상하도록 요구를 함은 아이들에게도 큰 스트레스요, 학교 때부터 너무 질리게 되면 세상을 밝고 건전하게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사회에는, 세상에는, 공부를 잘 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각자 자기의 적성에 맞고, 능력에 맞는, 일을 찾아 세상을 살아감이 가장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어 사람들을 놓고 평가 할 때 성적 위주로, 모두 잘난 사람위주로, 시선이 모아짐이 아니라, 나도 인정받고 살면서 남도 무시하지 않고, 대접해 줄 수 있는 그런 풍토가 조성되어 갈 때 바람직하게 자리 잡아 갈 것이라 보여 진다. 사회에서 보는 ‘시각’이 바뀌지 않는 한 성적위주로의 학생을 평가함은 교육이 제대로 갈 수 없다. 인간은 각기 다른 능력과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어찌 다 일률적으로 살아가기를 바란다는 말인가. 


어쨌든 학교 다닐 때 공부 잘 하는 아이가 돋보이듯 사회에 나와서는 단연 열심히 일하는 모습에서 느낄 수 있다. 자기가 맡은 일에 긍정적으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면 진정 남자의 매력을 그런데서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의 남편을 그런데서 무척 아끼고 좋아한다. 그녀의 남편은 공대를 나와 자신이 전공한 컴퓨터 분야에 몰두해서 일을 하더니 언제부터인지 중국을 왔다 갔다 하며 사업 기반을 다져가더니 이제는 직원이 70, 80명되는 공장을 운영하고 있어 그것은 바로 그의 성실성과 노력의 결과라고 볼 수 있음에 더더욱 그를 높이 평가하게 된다. 자기가 하는 일에 만족하며 즐겁게 그 일에 몰두할 수 있음은 그 자체로서 그는 인생에서 성공을 한 것이라 봐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내가 하고 싶고, 좋아하는 일,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서 함은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 최소한 내가 보기에 우리 친구 남편은 정년퇴직에 연연하지 않아도 좋으며 정신적으로도 늙지 않을 것이며, 사는 날까지 자신이 추구하고 몰두할 수 있는 일이 있음은 충분히 그로서는 행복할 수 있으며 축복된 인생이라 본다. 


남자의 매력은 자기가 맡은 일에 충실할 수 있으며, 최선을 다하는 남자, 그렇게 살다 보면 그는 자연히 처자식을 부양하며 책임질 수 있다. 처자식을 큰 가슴으로 따뜻하게 감쌀 수 있으며, 주변 사람과, 이웃과 더불어함께 잘 살 수 있도록 배려할 수 있는 남자, 사회와 국가를 함께 걱정하고, 껴안을 수 있는 남자, 세계를 향해 가슴이 열려 있는 남자가 진정 매력 있는 남자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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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3
“내 생일이야요”

  

 생일이라 함은 각자가 세상에 태어난 날을 이름이다. 지금이야 인위적으로 좋다는 날짜에 맞추어 제왕절개 수술을 해서까지도 출산일을 맞춘다고 하지만, 이미 한 생명체가 모태에 잉태되는 그 순간에 운명은 결정되어 지는 것일 터인데 출산일을 조종한다 함은 그렇게 해서 운명, 팔자가 바뀌는 것인지는 그 누가 알 수 있더란 말인가. 


 어떤 생명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축복이기도, 어떤 생명은 태어나는 그 순간이 저주요 버림받아야 하는 생명체로 태어나가도 한다. 


 우리 엄마는 딸만 여섯인 전주 이 씨 가문의 다섯째 딸로 태어났으니 외할머니가 겪으셨을 심적인 고초가 충분히 이해가 가기도 하지만 그 아픔, 고초는 본인만이 알 수 있다고 봐야 한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다섯째 딸로 태어났으니, 외할아버지가 외할머니께 어떻게 하셨는지, 엄마 형제들끼리 어떻게 컸는지 사연이 없지도 않을 터인데 엄마의 어린 시절이나 외갓집에 대해서는 생각나는 것이 많지 않다. 


 다시 나의 출생을 떠올려 보면 언니는 맏이로 태어났으니 식구들의 귀여움 특히 할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고 유아기를 보냈음을 안다. 언니가 첫 번째 손녀이기도 했거니와 할머니가 언니를 바닥에 내려놓지도 않을 만큼 귀여워 하셨다고 한다. 게다가 밤을 삶거나 구워 많이도 먹이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 같은 경우는 둘째로 태어났으니 호랑이 할아버지 밑에서 엄마 젖도 마음 놓고 얻어먹을 수 있었겠나 싶다. 엄마 얘기를 빌면 그나마 미움을 덜 받으려고 했는지 젖만 먹여 놓으면 자고 또 자고 했다고 한다. 엄마에게도 내게도 다행스럽게 내 밑으로 남자 동생이 태어났으니 터를 그나마 잘 판 덕분에 나도 미움은 덜 받았을 것이요, 엄마도 한시름 놓으셨을 게다. 


 어린 시절이나 자라면서 내 생일을 어떻게 보냈었는지는 별 기억이 없지만, 애들은 10살 까지는 수수로 만든 팥떡은 먹어야 넘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백설기와 수수팥떡을, 2월 초 하루는 나이 떡을 먹는 날이라고 송편을 만들어 다락에 넣어 두었던 것을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식구들이 다 서울로 이사를 하고 나서 내 생일이라고 친구들 몇 명이 와서 밥을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시골 사람들은 어른도 아니고 아이들 생일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으나, 이를테면 서울 사람들은 그때도 아이들 생일이라도 친구 몇 명쯤은 집에 초대를 했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즈음 고등학교 친구 몇 명이 서로 돌아가며 친구의 생일을 축하해주곤 했었다. 


 그 후 결혼을 해서 친구들 생일은 친구가 챙겨 주어야 한다며 가급적이면 친구의 생일날 만나 점심을 같이 먹고, 선물대신 회비에서 5만원씩 주기도 하였으나 내가 이민을 오고 나서는 다달이 만나오던 모임도 자주 만나지도 못한다고 한다. 


 딸들 생일은 친구들이 미리 알고 있어 선물 준비까지 하며 기다리고들 있어 아이들이 먹을 만한 음식 몇 가지와 케이크를 준비해서 잊지 않고 보내곤 했다. 내 생일 역시 결혼을 해서는 친정 엄마가 챙겨줘야 한다고 내 생일이면 주로 친정 식구들이 잊지 않고 와 주어 함께 하기도 했었다. 


 이민을 떠나오기 전 내 생일엔 친정 엄마와 언니, 남자 동생 내외가 같이 와서 생일을 보내기도 했지만 남편이 직접 고기 굽는 것과 몇 가지 생일 상 차리는 것을 도와주어 잊혀 지지 않는다. 


 캐나다에 와서는 어머님이 내 생일이면 고기와 미역을 미리 준비해서 보내 주셨다. 어느 해인가는 작은 시누이가 캐나다에 왔을 때 내 생일날 어머니, 시누이와 같이 음식점엘 갔다. 그런데 장미꽃 한 다발과 돈 봉투를 건네주시어 내가 드리는 것보다 난 늘 더 많이 받기만 했네 잊히지 않는다. 


 어떤 친구는 여자 생일, 그것도 본인이 직접 국을 끓이며 번거롭게 하느니 그냥 지나친다는 사람도, 어떤 이는 달력에다 ‘엄마 생일’이라고 빨간색으로 동그라미를 크게 그려 놓아 식구 모두 그냥 지나 칠 수 없도록 한다는 이도 있었다. 


 남편이나 아이들 생일은 엄마가 챙겨 주게 되어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되지만, 아닌 게 아니라 주부의 생일은 본인이 찾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도 십상인데 오히려 자식들이 다 출가를 한 다음 그때쯤이면 자식들이 다시 엄마의 생일을 챙기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 부모 세대만 해도 여자 생일, 아녀자 생일이 뭐 그리 대수라고 크게 떠벌리느냐고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사실은 나 자신이 세상에 태어났고, 태어난 날이기에 내가 기억하고,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그 뉘라서 나 이상으로 내 존재 자체에 대해 의미 부여를 할 것이며, 그 이상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겠는가.

 
 난 남편이나 아이들 생일에 크게 차리는 것은 없지만 미역국이나 고기 전유어 나물 김 등 몇 가지 평소 먹는 음식을 장만해서 그 날을 잊지 않고 지낸다. 더불어 내 생일 역시 내 생일 날 내가 먹자고 미역국을 끓이느냐가 아니라, 어차피 국이든 찌개든 끓여야 하는 것이고 보면 미역국으로 끓임이 마땅하고도 당연하기에 내 생일 역시 식구들 생일과 똑같이 준비를 한다. 


 생일, 하니 기억나는 몇 사람이 있다. 도넛 가게에서 일 할 때였다. 생일하면 우리네야 가족이나 친구가 축하해 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싶은데, 자기의 생일이 언제라고 광고하듯 하는 사람이 몇 있었다. 대부분 단골들 있는데서 그렇게 떠벌리고 다니니 그런 날은 노인 분들이 차를 한 잔씩 사주시기도 했다. 


 가게에 오는 젊은이 또한 자기 생일이 언제라며 신분증까지 내어 보이며 확인까지 시켜 주는 데야 도무지 알 수 없는 마음이었다. 그 젊은이야말로 사는 것이 너무 곤곤해 보여 보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은데, 그 날이 자기 생일이라며 재차 강조를 하는 데야 그냥 있을 수도 없어 커피와 머핀을 주며 축하한다고 했더니, ‘초’는 없느냐고 농담 삼아 하는 말끝에, 식구들조차도 생일도 잊고 지낸다며 허전한 듯 말을 되뇌고 있었다. 


 ‘생일’, 자신이 세상에 태어났음을 감사하며 살아 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이며, 누가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했느냐며 원망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무심히, 얼결에 생일이라고 지나치며 살았는데 어느 사이 자식들이 생일을 챙겨 줄 나이쯤 되면 자식들이 모르고 지나쳐도 섭섭하다 하기도, 또 어떤 이는 자식들에게 부담주지 않겠다며 그 날 하루 잠적을 하여 자식들 애를 태우기도, 어떤 이들은 생일 날 식구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분란이 일어난다고 염증을 내는 이들도 있다.


 그런 저런 상황을 알고 경험한 우리 세대에선, 이젠 자식 눈치 보지 않고 미리 자식들한테 알리기도, 그 날을 기해 여행을 하는 사람들도 늘어가는 추세이니, 더 늦기 전에 나름 자신들의 인생도 챙기는 것 같아 보기에도 좋아 보인다. 


 생일, 생일, 생일이야말로 내가 세상에 태어난 날이기에 내가 나를 소중히 알고 축하해야 할 일이면서도, 식구들, 남들에게서도 기억되고 높임을 받고 싶음이 인지상정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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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1
바구니 안의 아밀리아


 

 큰딸아이가 출산을 앞두고 있어 우리 내외가 딸네 집으로 가서 모여 앉았다. 딸아이 부른 배를 보며, 내가 보기엔 나 큰 아이 임신 했을 때보다 배가 더 부른 것 같지는 않게 보였는데 남편 눈엔 나 보다 더 부르다고 얘기하는 것은, ‘순산’해야 할 텐데 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음으로 보였다. 


 예정일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대화가 딸아이들을 낳아 키우면 서의 얘기를 하다가 남편이 딸에게 아기 이름을 지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동안 수 백 개의 이름을 보고 골라 보았건만 그 중에도 ‘아밀리아’란 이름이 제일 마음에 들어 그 이름으로 결정할까 보다고 했다. 우린 예정일이 좀 남았으니 그 사이 다른 이름으로 물색해 보자고 하였으나 더 좋은 이름도 찾아 내지 못하고 결국 아밀리아로 출생신고를 해야 했다. 


 예정일이 크리스마스 날이니 예정일 전후로 해서 진통의 기미가 보이면 바로 병원으로 갈 수 있도록 아밀리아 맞을 만반의 준비를 해 놓았다고 한다. 예정일이 특별하다보니 24, 25일 일까 은근히 긴장이 되었다. 


 드디어 예정일을 지나해를 넘기고 있어 혹시 ‘뉴 이어 베이비’가 될지도 모른다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래도 1월 1일을 넘기고 아침결에 전화가 왔다. 진통이 시작되긴 했어도 병원에서 기다리는 시간을 줄여 보려 집에서 지체하다 병원에 가기를 새벽 2시라고 했다. 


 수화기를 놓고 보니 내가 딸들을 낳던 순간이 어제인 양 다가 왔다. 우리 때만해도 임부복이 있어 펑퍼짐한 옷으로 불러 온 배를 적당히 가리듯 하고 다녔다. 그러나 요즈음은 출산율이 떨어지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임신한 것이 무슨 벼슬이라도 되는 듯 배를 가리기는커녕 일부러 몸에 착 붙는 옷을 입고는 나 ‘임신’했다고 자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배는 내 밀고 양 어깨는 뒤로 넘기며 거만한 모양새로 보이기도 하니, 안면이 있는 사람에겐 축하한다고 말을 건네기도 하지만 불룩 나온 배가 쳐다보기도 민망할 때가 많다. 


 첫애나 둘째 아이 때도 폭이 넓은 홈드레스 덕분이었는지 나 자신도 배가 그렇게 부른 것 같지 않다 싶었는데 딸들을 순산했다. 큰아이 때는 집에서의 진통은 모르겠고 남편과 같이 병원엘 갔다. 분만실인 온돌방으로 안내가 되었다. 진통이 시작되는지 배가 싸르르르 아프다가 멎고, 또 그렇게 싸르르르 아파오기를 잦아지니 너무 아프기도 이러다가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는 게 아닐까 두려워 옆에 앉아 있던 남편의 손을 꼭 잡든지, 팔을 뒤틀든지 해야 했다. 


 그렇게 진통하던 순간은 기억이 나는데 정작 애를 낳던 그 ‘극적인 순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중에 아기를 낳고 시간 계산을 해 보니 거의 12시간 가깝게 진통을 한 거였다. 첫째 아이 때 그랬기에 둘째 아이도 그 시간 정도는 지나야 하리라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둘째 아이 때는 마침 캐나다에 계셨던 큰아주버님이 나와 계시기도 했고 첫아이를 딸을 낳고 보니 조금 불안하기도 해서 예정일이 가까워 오면서는 매일같이 목욕을 하고 진통이 오나 기다리게 되었다. 진통이 시작되는 것 같다 싶으면 나 혼자 슬그머니 병원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것은 으레 아들이려니 하다가 딸을 낳았기에 은근히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밤 10시가 넘어서 진통이 슬슬 오는 것 같았다. 첫아이 경험으로 봐서 10시간 정도로 보면 한참을 더 있어도 될 것 같았다. 배가 아프기 시작하고 아직도 몇 시간은 더 있어야 되겠다 싶기도 했지만, 그 정도쯤에서는 병원으로 가야 할 것 같았다. 아주버님이나 남편 몰래 가서 낳아야지 벼르고 있었는데 그 시각엔 남편이 집에 같이 있어 남편과 병원으로 가게 되었다. 


 병원에 들어서며 진통이 시작된 지 몇 시간이 되었다고 하니 의사가 좀 보자고 하더니, 금방 나오게 생겼다며 급하게 분만실로 옮겼다. 분만대에 올라가 몇 번 힘을 준 것 같은데 “딸입니다” 하는 간호사의 음성이 들렸다. 난 순간 쪼금 서운하고 허전한 것 같긴 했는데 이렇게 아파서 낳은 딸이 참 소중하다 싶었다. 


 작은 딸을 낳고 회복실에 누워 있는데 아주버님이 큰딸아이를 데리고 왔다. 엄마가 집에 없는 사이 아이는 울기도 했는지 얼굴은 땀이 배어 얼룩져 있었고 옷도 더렵혀져 있었다. 엄마한테 오면서 들고 온 책을 내게 내밀며 읽어 달라고 보채듯 했다. 그랬던 큰딸이 배가 나보다 더 부른 것 같더니 진통이 시작되어 병원에 있다고 전화가 온 것이다. 그 후 두 딸들을 어떻게 키웠는지 생각나는 것도 별로 없는데 할머니가 되겠네 싶은데도 덤덤했다.


 병원엔 열일 제쳐놓고 가야하니 오늘 스케줄을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릿속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난 분만실엔 들어가지 못하는 줄 알고 아기를 낳거든 가야지 하다가 전화를 걸어 물어 보았더니 분만실에 들어 갈 수가 있다고 하니 아기를 낳기 전에 ‘장미꽃’이라도 사 들고 가야 할 것 같아 서둘렀다. 


 60평생을 살면서 누구에겐가 주려 장미꽃을 사 본 기억은 없는 것 같다. 꽃이 비싸기도, 그럴만한 일이 없기도 했나보다. 그런데 첫 번째 맞는 ‘손녀’한테는 화사한 꽃다발이라도 안고 가서 맞이하고 싶었다. 이미 딸임을 알고 있는 상황이어서 딸일까 아들일까 설레며 기다리는 마음은 없었다.


 작은 딸과 집에서 가까운 슈퍼마켓엘 들르니 살만한 꽃이 없어 일단은 그냥 가기로 했다. 병원에 당도해서 난 예전의 나를 상기하며 딸아이는 잔뜩 아프다고 고통을 호소하며 세환이(사위)의 손과 팔을 힘차게 쥐고 있겠지 상상하며 분만실에 들어서니, 아이의 심장박동 소리는 힘차게 들리는데 딸아이는 ‘무통분만’ 주사를 맞았다는데 별다른 진통도 없이 일반 환자처럼 편하게 누워 있었다.


 무통분만, 우리 때는 들어 보지도 못했던 말인 것 같다. 예전엔 자연분만을 하는 여자들은 극히 정상이고 제왕절개 수술을 하는 여자들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 딸아이를 보니 통증도 없이 이렇게 아기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하고, 그래도 세상에 새 생명이 탄생 하는 것인데 진통은 겪으면서 아이를 낳는 게 더 나은 것 아냐 하다가도, 아프지 않고도 아기를 낳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굳이 고생을 하면서 아기를 낳겠다 할 여자가 있을까 잡다한 생각들이 오갔다. 


 우리가 그곳에 당도하고 나서도 간호사 의사가 번갈아 드나들며 두 시간이 되어 오는데 바로 낳을 기미가 없어 우린 나중에 다시 오기로 하고 그곳을 나왔다. 난 우선 꽃이든 꽃 화분이라도 사야 할 것 같아 다시 다른 슈퍼마켓엘 들렀다. 마침 마음에 드는 화분이 있어 똑 같은 것으로 두 개를 샀다. 


 꽃 이름이 ‘azalea’는 한국말로 진달래였다. 꽃빛깔이 영락없는 진달래로 이곳에서는 산에서는 볼 수 없으나 꽃집에서도 드물게 만날 수 있는 이 꽃은 어릴 적 소풍 길에 보았던 그 꽃을 만난 듯 반갑기 이를 데 없었다. 


 아기는 오후 다섯 시에 낳았다고 한다. 일을 끝내고 남편과 같이 꽃 화분을 들고 아밀리아와의 첫상봉을 하기 위해 회복실로 들어섰다. 난 아기와 같이 꽃 화분을 놓고 기념사진이라도 찍고 싶었다. 그래서 아이가 커가며 그 순간을 상기하며 아이와 많은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남편은 꽃가루 때문에 아이에게 좋지 않을 수도 있다며 그냥 지켜 보기만하라고 애한테 당부하듯 해서 설레고 부풀었던 마음을 접어야 했다. 


 딸아이가 안고 있는 아기는 마치도 ‘예쁜 인형’처럼 그렇게 보였다. 딸들을 낳았을 때의 모습은 기억도 희미하니 손녀의 모습만큼은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작은 인형은 얼굴을 찡그리기도 미소 짓기도 입을 삐죽이며 우는 시늉을 하기도 꿈을 꾸는 듯 얼굴표정이 바뀐다. 


 얼굴도 자그마한 아기, 예쁘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아기, 점차 커가면서 모녀의 재잘거림이, 개 세 마리까지 데리고 아밀리아가 환하게 웃으며 그들의 즐거운 나들이가 눈에 보이는 듯하다. 


 딸아이가 퇴원을 하면서 병원에서 찍은 사진을 갖고 왔다. 그 사진들을 보는 동안 ‘바구니 안에 담긴’ 살아 있는 인형을 보며 감탄이 절로 나왔다. 우리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 그런 사진이 나올 리 없었다. 평생 간직하게 될 소중하고 값진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딸아이들을 키울 때는 직장생활도 하지 않았건만 살림하며 아이들 키우는 것이 너무 힘이 들었다. 그랬기에 예쁜지도 모르고 키운 것 같다. 게다가 난 아이와 ‘같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해 본 것이 거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딸아이는 가급적이면 모녀가 함께 할 수 있는 것을 고려한다.


 나를 실현해 보고 싶은 욕구가 많은 것보다는, 너무 욕심내지 않고 즐겁게, 또 즐기며 사는 딸이 키워 낼 손녀는, 앞으로 아밀리아가 결혼을 할 때쯤이면 어떤 모습으로 성장해 있을까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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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7
심통이와 화돌이 부부의 애정표현

 

 때로는 부부 사이에 평소에 하지 않던 지나친 ‘애정표현’을 할 것 같으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보다는 TV를 많이 본 모양이라든지, 닭살 돋는다, 불편하니 평소에 하던 대로 하라고 한다. 그렇다. 예전에 우리 부모 세대만해도 애정표현은 물론이요, 남들은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사는지 궁금하다고도 했다. 남들은 어떻게 사는지, 애정표현을 어떻게 하는지 흉내도 내 볼 수 없었다면, 오늘날은 대중매체를 통해 남들은 어떻게 하고 사는지 너무도 잘 알고 남음에도 어디까지나 그건 남들이고 나, 우린 흉내조차도 내 보기 쑥스러우니 말해 무엇 할까. 


 언젠가 TV를 보다보니 첫 키스를 언제, 어디서 했느냐, 프러포즈는 누가 먼저, 어디에서 했느냐, 남편은 무슨 색깔을, 어떤 꽃을 좋아 하느냐는 등의 남들 살아가는 모습의 일부분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 부부는 어떻게 사랑을 하며 애정표현은 어떻게 하며 살아 왔나 더듬어 본다. 그러고 보니 난 애교는 고사하고 남편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게다가 남편이 무슨 색깔, 어떤 꽃을 좋아 하는지도 모르고 살아 왔는가 보다. 


 지난번 대선 후보 부인들 인터뷰 중에서 남편에게 하는 나만의 애정표현이 있다, 없다, 하는 질문 중에 있다고 하는 후보 부인을 보며 나 나름대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난 나만의 애정표현을 남편에게 해봤나, 내가 남편에게 사랑한다, 사랑하자고 할 때는 어떻게 했었나 등등을 곰곰 되짚어 봐도 없네, 하지 못하고 살아 왔네 싶은 생각이 먼저 들었다. 


 참 무미건조하게 살았나? 만약 내가 다른 남자를 만났다면 좀 더 재미있고 진하게 애정표현도 해 보며 살았을까 생각도 해 보지만 역시 그런 면에서는 별로 다르지 않겠나 싶은 생각이 든다. 프러포즈를 받은 장소는 기억이 나는데 뭐라고 했는지도 모르겠고 첫 키스는 어디서 했는지 어떤 감정이었는지도 희미하다. 


 결혼 전에 볼 수 있었던 사랑하는 눈빛 질투하는 듯한 표정은 생각나는 것이 있다. 6년 연애하고 결혼생활 40년이 되고 보니 세월만큼 애정은 깊어지는가 싶은데, 연륜만큼 애정표현은 엷어지기만 하는 것 같다. 대학교 3학년인지 4학년 때였는지 둘이 만나기로 했는데 그날은 내가 약속 시간보다 더 늦게 나갔던가 보다. 그즈음 약속을 하면 주로 남편이 늦곤 했는데 그 날은 내가 더 늦었기에 그런 일이 있었지 않았나 싶다.


 그즈음 우리 과원 중에 강의시간에 제대로 나올 수 없어 친구가 대신 나오는 남학생이 있었다. 그런데 그가 오면 주로 내 뒤에 앉아 있다가 내게 시나 편지를 써서 주기도 했는데 그날도 그 남자로 인해 남편과의 약속시간에 늦어 진 것 같았다. 남편은 내게서 자초지종을 다 듣기도 전에 구둣발로 내 정강이를 차는 바람에 아파서 한참을 절절 맸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마주 바라보고 앉는 것이 아니고 옆에 나란히 같이 앉는다고 하더니 우리도 언제 그렇게 다정하게 앉아 본 적이 있는가 싶은데 얼핏 데이트 하던 순간이 떠오른다. 그날은 약간 궂은 날씨였는데 핑크색 원피스를 입고 만나기로 한 낙원상가의 맥주 집으로 갔다. 그날은 내 모습이 예쁘게 보이기도 했는지 뒤미처 들어 온 남편의 호기심에 찬 즐거움이 가득했던 그 눈빛이 잊혀 지지 않는다.


 그래도 이민을 오기 전엔 우리는 다정한 부부, 사랑하는 부부, 행복한 부부, 애정표현도 제법 할 줄 안다 싶었건만 이민 생활의 해를 더할수록 새삼 돌아보니 우리도 언제 그렇게 살았던 적이 있었는가 싶다.


 이민을 오기 전엔 휴일이나 주말 쉬는 날이면 식구들이 늦게까지 뒹굴며 TV를 보다가 다시 먹을 거라도 준비하려 일어서면 그냥 옆에 있으라며 붙잡아 앉히기도, 밥을 먹을 때는 음식을 먹여 달라고 어린애 보채듯 하기도, 소파에 앉으면 으레 두 다리를 내 무릎에 올려 놓기가 예사요, 내 무릎을 베고 누워 머리를 안마하듯 긁어 달라고 하기도 했다. 그런 모두가 애정표현의 일환이요, 또 그런 식으로라도 애정을 확인하며 또 유지시켜 나가고 싶기도 했나보다. 


 그런데 내게 더 잘해 주고 싶어 이민을 왔다던 남자가 우리가 언제 그렇게도 살아 본적이 있었느냐 싶게 멀게만 느껴 질 때가 많다. 둘이 같이 잠자리에 들 때엔 팔베개를 하고 있다가 잠이 들면서 편한 자세로 잠들기도 하였다. 자면서 팔베개는 하지 않아도 밤새 뒤척이며 다리를 올려놓거나 다리로 허리를 휘감듯 해도 편하게 잠만 잘 잤다. 그런데 이젠 나이 탓인가 잠결에 다리를 잠시만 올려놔도 무거워서 그 상태로는 잘 수 없어 치우라고 하면 예전엔 다리를 올려놔도 잠만 잘 자더니 이젠 애정이 식어 버린 것 아니냐며 허전한 모양이다.


 ‘심통이’는 교제하던 시절 남편이 내게 붙여준 애칭이다. 대학교 3학 년 때 만나서 결혼까지 하기엔 6년이란 시간이 소요되었다. 대학을 졸업 하고 보니 나는 결혼할 나이가 되었으나 남편은 군대도 갔다 와야 하고 직장 문제도 해결해야했으니, 난 프러포즈도 받지 못하고 있다 보니 그 사이 맞선을 열 한 번이나 보기도 했다. 그래도 우린 연분이었는지 결혼을 했다. 


 6년 교제하는 사이, 내가 변덕이 심해서 그랬을까, 아니면 남편이 나 외에 다른 여자들한테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아 그랬을까, 과원들이 과 단합대회나 답사를 간다든지 하면 다른 남학생들은 가만히 있는데, 이 남자만 여학생들 앞에 나서서 분위기를 잡아 가려는 그런 태도가 제일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우리 3학년 때는 신입생으로 들어 온 어떤 여학생이 남편을 노골적으로 따라 다니기도 했지만 난 그런저런 문제로 한 번도 다툰 것 같지 않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는 내게 그 여학생을 만나서 따끔하게 충고라도 한 마디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나를 부추기기도 했다. 하지만 난 그런 문제로 질투 한 번 하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은 여자가 나설 문제가 아니고, 남자가 그녀든 나든 선택할 문제라 싶었고, 내가 매달리는 그런 교제는 하고 싶지 않았기에 후배 여학생 만나는 문제는 생각해 본 바도 없다.


 그렇긴 했어도 쓸데없이 여자들 앞에 나서는 것이 못마땅하다 싶으면 그런데서 내 마음이 불편해지니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래도 견딜 수 없다 싶으면 온다간다 말 할 필요도 없이 뽀로통해서 집으로 와 버리곤 했다. 그런 상황이 몇 번 반복되다보니 심통이란 별명도 그래서 붙여 진 것이 아닐까 싶다. 


 열렬하게 사랑하던 부부들도 세월 따라 변하기도 사랑이 퇴색되어 가기도 하지만 젊은이들의 애정표현방식이 있듯 나이든 우리세대야 애정표현을 굳이 하지 않아도, 연륜만큼 서로를 ‘소중한 존재’로 알기에 부디 아프지만 말고 살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더 크게 자리 잡는다. 잘 모르긴 해도 교제하던 시절엔 심통이가 불편했던 마음보다는, 화돌이(남편 별명) 마음고생이 더 컸을 텐데, 살면서도 내게 크게 잘못하지도 않았건만 심통으로 평생 굳어졌는지, 사랑한다 말도 못하면서 쑥스러워 ‘여보’라고 다정다감하게 불러 보지도 못함은 못내 아쉬움으로 남을 것 같다. 


 화돌이는 대학 4학년 때 과원들끼리 답사를 갔을 때 식사 당번은 나와 현숙이가, 불은 남편이 봐 주었기에 그때 붙여진 별명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심통이와 화돌이는 천생연분이기도 했나보다. 결혼 전에 나를 심통나게 했던 부분들이나, 결혼 후에 작은 시누이로 인해 살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하는 심적인 갈등을 겪기도 할 때 문득 깨달아 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 남편의 자식인 딸을 둘씩이나 낳고 살다가 헤어진다면, 그 후 어떤 삶이 살아질지 알 수 없기도 하지만, 딸들을 위해서나 나 자신을 위해서도 자식까지 낳고 사는 사람과 ‘평생’ 사는 길이 그래도 최선의 삶을 사는 것이리라 싶었다. 그랬기에 그 후론 살면서 불만이 좀 있긴 했어도 별다른 갈등 없이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 


 심통이는 애정표현은 잘 하지 못해도 아내의 자리는 확실하게 지켰기에 오늘 우리 가족이 있네 싶어 바른 판단해 준 나 자신에게 칭찬이라도 해 주고 싶다. 그리고 지금껏 남편, 아빠의 자리 지켜줘서 고맙고 ‘화부의 책무’를 다 하리라 성의를 다 했음을 알기에 새삼 고마운 마음 잔잔하게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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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oon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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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1
돌아보는 여고시절 3년

 

친구는 끼리끼리


 고등학교를 서울로 진학을 하고 보니 공부도 그렇지만 학교생활도 긴장이 되었는데 게다가 친구 문제도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나 같이 지방에서 올라 온 아이들이나 타교에서 온 아이들도 별로 없었고, 같은 중학교에서 ‘그대로’ 올라 온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친구관계도 이미 거의 형성이 되어 있어 서울도 아닌 지방에서 진학한 나 같은 아이는 ‘외톨이’가 되기 십상이었다. 


 처음 얼마동안은 촌뜨기인 내가 서울생활에 적응하는 것도 두려운데 친구관계도 낯설어 그것도 내심으론 작은 불안이었다. 그런 와중에 내게 관심을 가져 주는 몇몇의 아이들이 있긴 했지만, 나 역시 사귀고 싶은 친구가 있었다. 그녀도 내게 관심이 있어 우린 서로 친해 보고 싶었으나, 그녀의 다른 두 친구는 은근히 나와 친해지는 것을 경계하는 눈치까지 보였다. 그들은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지간으로 지내왔으니 새삼 이방인인 내가 달가울 리 없었을 것이다. 


 분위기가 그렇다보니 내가 정작 친해 보고 싶은 친구는 단짝으로 사귈 수 도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 넷이서 친구하기를 원치 않는 눈치였다. 나도 다른 두 아이들과는 성격이 맞지 않아 별로 사귀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니 그녀와의 친구관계도 적극적으로 만들어 가려 애쓰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내가 사귀고 싶어 했던 친구는 결혼을 일찍 하기도 해서 난 그녀의 신혼집까지 가보기도 했는데 더 긴밀한 사이로 만날 수 없었기에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그 친구는 늘 아쉬운 부분으로 남는다. 


 친한 친구사이는 반이 서로 바뀌어도 쉬는 시간이나 하교 길에는 잠깐씩이라도 보려 친구가 있는 반을 찾아다니기도 한다. 고 2때는 병란이가 옆 반이기도, 쉬는 시간이면 찾아와 주어 지금 생각해도 고맙다. 그 친구와는 우연히 대학을 들어가서도 만날 수 있어 병란이가 결혼을 한 후에도 내가 몇 번 찾아 가기도 했었는데 어떻게 연락이 두절되었는지 그 후 소식조차 듣지 못하고 있다.


 하교 시간이 되면 친한 친구끼리 둘이서, 아니면 삼삼오오 재잘거리며 교실을 나서니 그 순간이 난 거의 언제나 어설프고 신경이 쓰이는 시간이었다. 이제 학교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갈 시간이 되었다고 버스 정류장까지도 누구와 같이 갈까 찾아다닐 친구도 별로 없었다. 확실하게 친한 친구도 만들어 놓지 못하고 고 3을 맞게 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반에서 가깝게 지낼 수 있는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점심을 가져 오면 으레 반은 김까지 싸서 내 몫이라고 내놓던 친구가 언제부터인지 태도가 싹 바뀌어 찬바람이 휙휙 도는 것이었다. 그런 것을 참아내며 한 달 내내 얼굴을 대하기란 쉽지도 않고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때도 고 3은 학교에서 과외공부를 했었는데 난 그 친구를 보는 것이 심적으로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담임선생님께 학교에 나오지 않고 시골집에 내려가서 절에 가서 공부해도 좋다는 허락을 얻어 시골집으로 내려갔다.

 

왕따는 예전에도 있었네.


 돌아보면 ‘왕따’는 오늘날에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그만큼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대부분 친구도 끼리끼리 만나기도 하지만, 그 끼리끼리의 부류에 들면 그나마 학교생활도 덜 외롭고 학교생활을 하기가 수월해진다. 그러나 같은 반에서 누구와도 가깝게 지낼 수 없다면 누가 따 돌려서가 아니고, 스스로 ‘소외’되어 학교생활하기가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우리 세대만해도 같이 놀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났지만, 오늘날은 나와 우리가 아닌 타인과는 친하게 지내는 것은 말고라도 ‘괴롭힘’을 주니 그것이 학교 문제를 넘어서서 점차 사회문제로까지 퍼져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내가 고 3때 그 친구와도 잘 지내고 다른 친구들과도 잘 어울릴 수 있었다면 아마 난 서울에 남아 과외공부를 하며 학교에 다녔을 것이다. 어쨌든 난 친구와의 불편한 관계가 싫어 방학을 하면서 이내 시골로 내려갔다.

 

그 여름의 추억


 집에서 8킬로미터나 떨어진 엄마가 다니던 쇳두리 절에 가서 공부하기로 했다. 다행히 한동네 사는 후배가 있어 무사히 절까지 갈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저녁나절에 누구인가 자전거에 웬 자루 하나를 싣고 올라오는 것이었다. 가까이 왔을 때 보니 중학교 한해 선배 되는 남학생이었다. 그 선배도 그곳에 있으려고 왔다는 것이었다. 공부를 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요양을 하기 위해 왔었는지는 지금 생각해도 알 수 없다.


 어느 날 마루에 앉아 점심을 먹는데 그 선배는 스님과 나는 보살과 겸상을 해서 먹는다. 그런데 밥을 먹는 동안 냉수를 수도 없이 들이켜는 것이었다. 어떻게 밥을 먹는 도중에 냉수를 아마도 5,6내지는 6,7대접을 마시는가 싶었다.


 샘물은 마루에서 일어 나 댓돌을 내려서서 바로 눈에 보이는 곳에 있었다. 하지만 밥을 먹기 전에 미리 물까지 떠다 놓건만, 그 선배의 ‘또 물’ 주문에 보살님은 몇 번씩 일어나야 했는데도 갈증이 채워지지 않는지 선배는 미안하고 머쓱해서 물 대접을 내어 미는 손길이 마치도 자라 목 움츠러드는 그런 모습이었다.


 난난 너무 우스워 도대체 웃음이 멈추지를 않아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난 지금껏 딸꾹질 때문에 애를 먹는 경우는 봤어도 웃음이 멈추지 않아 어찌되었다는 얘기는 들어 본 기억도 없는 것 같은데, 배를 쥐고 데굴데굴 구르듯 웃어 보기는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왜 그렇게 냉수를 많이 들이켰을까.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기만 하다. 바람 한 점 없는 더운 날씨에 매미 풀벌레 소리만이 정적을 울리는데, 공부하다가 잠이 오든지 아니면 좀 쉬려 절 뒤로 조금 올라가면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에 넓은 바위가 있어 이따금씩 올라가 발도 씻고 쉬다가 오곤 하였다. 


 어느 날인가 난 양산을 받치고 발은 물에 담그고 앉아 있었는데 그 선배는 옆에서 애꿎은 검정 고무신만 빡빡 닦고 있었다. 아마도 내게 좋아 한다는 말을 꺼내기 어려워 그리 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난 남녀 공학을 다닌 덕분인지 누구를 만나든 선이 분명하게 그어진다. 


 나는 그에게 선배 이상의 감정은 느낄 수 없었다. 새삼 남자가 검정 고무신을 신었던 시절이면 분명 여자들도 검정 고무신 아니면 흰 고무신을 신었을 터인데 난 무엇을 신었었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여름의 보름을 그렇게 보내고 서울에 와서 몇 번 만난 기억은 있는데 지금은 까마득한 옛날 얘기이건만 바람에 실려 오나 여름만 되면 생각이 난다.


 아침에 일어나 댓돌을 내려서면 상큼한 풀냄새와 싱그러운 공기 하루 종일 고요로움 속에 아침저녁 예불 드리는 소리와, 밤새도록 울어대던 소쩍새의 울음소리는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는 듯하다.


 흔히들 꿈 많던 ‘여고시절’이라고들 하는데 난 사실 고등학교 3년을 돌아보면 꿈은커녕 추억도 많지 않고 참 밋밋하게 보냈네 싶긴 해도, 고등학교 때 만난 몇몇의 친구들은 지금껏 연락이 되는 친구가 있어 그나마 참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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