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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자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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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자

경기도 여주 출생,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기도 광수중학교 근무, 1992년 캐나다 이민, 캐나다문인협회 수필 부문 입상, 2006년 해외동포문학상, 작품집 <인생에 실패는 없다 다만 또 다른 삶이 있을 뿐이다>, <나이만큼 행복한 여자>, <밀리언 달러 티켓 나도 한장>,<행복이라는 이름의 여행>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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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oonja
한순자
58807
9202
2017-05-25
거리의 남자(5)

 

 (지난 호에 이어)
 공항에 도착해서 출발 한 시간 전쯤이니 이쯤에서는 설령 남편이 내가 공항에 있는 것을 안다 해도 날아오지 않고는 올 수 없겠지 얼마만큼 안심을 하고는 친구들한테 전화를 했다. 


 다른 친구들은 물론이고 며칠 전 레미 엄마한테 전화가 왔을 때도 27일날 캐나다 간다는 얘기를 할 수 없었다. 혹시 남편과 통화를 하다가 멋모르고 얘기가 나오면 큰 낭패이지 싶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친구 두 명과 레미 엄마한테 전화를 했으나 아무와도 통화조차 못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딸애한테 전화를 해야 할 것 같아 전화하니 집에 없어 직접 통화는 못하고 메시지만 남겼다. 왠지 탑승 수속을 하면서 내내 불안했다. 누구에겐가 덜미를 잡힐 것 같고, 비행기를 탈 수 없게 끌어내릴 것만 같아 한시가 급하게 비행기를 타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불안에 조마조마하고 있는데 서울에서 토론토까지 가시는 손님 중에 최순희 씨가 있으면 급히 안내실로 와달라는 방송을 하고 있었다. ‘최순’까지 나오는 순간 내 이름인가 싶어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순희라고 하기에 천만다행이라며 종종걸음으로 앞으로 가서 탑승 수속을 하며 비행기까지 타야만 안심할 수가 있을 것 같은 불안에 휩싸였다. 드디어 탑승을 해서 내 좌석을 찾아 앉고서야 휴우 한숨을 내쉬었다. 


 밥은 밖에서 대충 먹는다 해도 밤이면 찾아 들 수 있는 방 한 칸 없이 어디로 갈까 차를 타고 거리거리 방황하고 있을 남편, 이제는 그 독설도, 푸념도, 갈가리 찢어지는 고통도, 외로움도, 털어놓을 수 있는 아내마저 없다는 사실에 얼마나 허망하고, 죽이고 싶도록 미워 치를 떨고 있을까 생각하니 나 또한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어쩌다 우리 내외가 이리되었는지,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어 이리 되었는지, 어디서부터 무엇을 바로 잡아야 모두 제 자리를 잡고 살아갈 수가 있는지 깜깜하기만 하였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다고 애써 변명을 해 본다. 끝까지 방이 아니라 70평짜리 아파트를 외치다가 둘이 같이 내 방이라고 쉬어 들 수 있는 곳이 없어 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내 쉴 곳, 편히 다리 뻗고 잠 잘수 있는 곳으로 날아가는 것이라고. 애써 변명하며 위로를 해봐도 비록 그토록 내게 퍼부어 대던 남편이건만 불쌍해서 가슴이 미어지고 측은해서 가슴 아파해야 했다. 


 의지할 데 없는 젖먹이, 올 데 갈 데 없는 어린애, 가지 말라고 치맛자락 붙들며 울며불며 매달리는 아이를, 매정하게 칼바람 일으키듯 뿌리치는 비정한 에미 같아 가슴은 절절이 녹아내리는 듯 했다. 그러나 이젠 비행기까지 탔으니 어쩔 수 없다며 마음을 편히 가지려 애써 보았다. 


 드디어 앵커리지 국제공항에 도착해서 탑승권을 받아 들고 화장실을 다녀 온 후 면세점을 한 바퀴 돌아오고 있는데 방송을 통해 내 이름이 들려오고 있었다. 순간 겁이 더럭 나서 가서 물어보니 최순자가 맞느냐며 남편이 서울에서 친구와 같이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지금 병원에 있다며 급하게 연락을 해달란다는 것이다.


 다시 또 머리를 무슨 둔기로 맞은 듯 아찔해지며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무슨 일일까? 남편이 술에 만취해서 운전을 하다가 크게 다쳤는지, 혹은 사경을 헤매고 있는지, 더럭더럭 겁은 났지만, 그렇다고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한다는 말이냐며 서울로 전화를 해야 할지, 서울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잠시 머리를 식히며 진정하고 있는 사이 그대로 토론토로 가야할 것 같았다. 내일 다시 서울행 비행기를 타는 한이 있어도 남편이 찾는 전화도 무섭고, 남편이 있는 서울 하늘이 두려워 몸과 마음만이라도 하루라도 쉬고 싶었다. 승무원이 어떻게 할 것이냐며 묻기에 일단은 토론토로 가야겠다고 얘기하고는 대체 무슨 사고가 어떻게 났다는 것인지 나나 남편이 죽을 운을 넘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토론토 공항에 도착하니 두 딸들이 나와 있었다. 서울에서의 상황은 잘 모르고 3주 만에 돌아 온 엄마가 못마땅하기만 한 모양이었다. 우리 삼 모녀는 차안에서 별 얘기 없이 집까지 와서 자초지종을 알 수 있었다. 


 내가 공항에서 집으로 메시지를 남긴 것을 큰 아이가 듣자마자 아빠한테 전화를 해서 남편은 내가 김포공항을 이륙하기 전에 비행기 탑승을 하지 못하도록 전화를 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순자를 순희로 잘못 방송을 하게 되어 그냥 가게 되었다며 앵커리지 국제공항에서도 남편이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을 터인데 어떻게 전화 한 통 없이 갈 수가 있었느냐며 매정하고 무서운 여자라며 치를 떠는 것이었다. 


 남편은 내일이라도 당장 비행기 표가 예약되는 대로 나오라고 성화였지만 다시 또 개 끌려가듯 나간다 해도 소름끼치는 전화 목소리도 무섭고, 대책도 없고, 끝도 보이지 않고, 편히 쉴 수 있는 방 한 칸 없는 서울엔 당분간이라도 가고 싶지 않았다. 


 며칠을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고 자고 또 자고 했다. 그렇게 편하고 깊은 잠은 난생 처음인 듯 너무도 편하고 깊게 잤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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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자
58367
9202
2017-05-19
거리의 남자(4)

 

 (지난 호에 이어)
 그렇게 해서 통화를 끝내고 나면 왜 아이들한테 그런 식으로 밖에 얘기를 하지 못하느냐며 전보다 더 심하게 차를 몰다가 지나가는 차가 운전을 못되게 한다며 잘하면 차를 들이박을 듯 하니 그럴 때마다 갖가지 상상을 다하며 앞이 캄캄 아찔아찔해서 숨이 턱턱 막히는 듯 했다. 


 어디인지도 모르고 시내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어느 노래방으로 들어갔다. 남편은 이젠 헤어지는 일만 남은 사람처럼 이별의 노래만을 골라 악을 쓰듯 부르는 노래는 천 길 낭떠러지에서 울부짖는 그런 처절한 통곡의 노래처럼 들렸다. 나보고도 무슨 노래든 하라며 다그치듯 하지만 그런 분위기에서 무슨 노래를 할 것이며, 아무 말도,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고 점점 더 멍청이가 되어 가는 듯 머릿속에서는 아무 생각도 없이 윙윙 소리만 나는 듯 했다. 


 피를 토하듯 한 시간 넘게 노래를 부르다가, 멀거니 앉아 있다가 밖으로 나오니 어디로 들어가서 눕고 싶었다. 그러나 그날따라 가지고 있는 돈도 얼마 없어 숙박료도 모자라 차에서 웅크리고 몇 시간을 잤다. 자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진정이 되는가 싶었다. 이젠 어디든 가서 아침 겸 점심을 먹어야 했다.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 볼 수도 없이 가는 대로 따라서 가며 눈여겨보니 예전에 아이들과 같이 갔던 설렁탕집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곳에 가서 설렁탕을 시켜 놓고는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기에 무엇 때문에 지금 전화를 하느냐며 밥이나 먹거든 전화를 하라고 하는 얘기는 아랑 곳 않는다. 남편이 작은 딸과 통화를 하는 것을 듣고 보니 그 날이 작은 딸 생일이었다. 잊지 않고 있다가 아이들 생각, 예전에 아파트 살 때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이곳으로 온 모양이구나 싶으니 마음은 다시 또 착잡하고 서글프기 이를 데 없었다. 


 남편은 아이에게 선물을 사서 보내 주겠다며 무엇이 좋으냐고 물어보는 모양이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엄마 옆에 있다며 바꿔 주는데 아이들에게 이런 상황, 사정 얘기를 어찌 할 것이며 그냥 잘 지내고 있다며 울먹이기만 했다. 


 아마도 내겐 ‘너 때문에’란 말로 힐책하며 원망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너 때문에 캐나다까지 갔기에 오늘에 이르렀으며, 내게, 아이들에게 무엇 하나 떳떳하고, 넉넉하게 해주지 못하는 자신이 죽고 싶을 만큼 비참했을 것이다. 


 남편은 일정하게 숙소가 없으니 어떤 옷은 작은 고모네, 양복과 속옷, 양말, 와이셔츠는 차에 싣고 다녔다. 나와 같이 숙소에 든 날은 양말과 와이셔츠를 자기 전에 빨거나 엄마네 집으러 가져가서 빨아 오기도 하였다. 남편은 다리미를 차에 갖고 다니며 바지며 와이셔츠는 말끔히 다려 입고 다녔으니 그런 남편이 측은하기보다는 점점 더 정나미가 떨어졌다.

 

 걸음아, 날 살려라


 난 더 이상 친정 올케 눈치보고 싶지도 않고, 견딜 수 없어 비행기 표를 6월 19일자로 예약을 해 놓았으나 그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어 다시 공항에 전화를 했다. 마침 5월 27일자에 자리가 하나 있다기에 예약을 해놓고는 남편한테는 일체 비밀에 붙여놓고 있었다. 


 내 그런 상황에서 비행기를 탄다하면 곱게 보내줄 것 같지 않아 몰래 떠나기로 작정을 하였다. 더 있다가는 나까지 머리가 돌아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두렵기도 하고 하루라도 빨리 남편 곁을 떠나고 싶었다.


 떠나기 전날도 남편이 불러내어 밤에 나가 몇 번 갔던 모텔로 가게 되었다. 그 밤을 거기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 그만 집으로 가고 싶다고 하니 집에 가 봐야 할 일도 없을 터인데 뭐 하러 일찍 가느냐며 강남에 설렁탕 잘하는 집이 있다면서 그리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난 내심 초조했으나 늦어도 오후 3시까지만 집에 도착해도 공항 터미널까지 가는 데는 큰 무리가 없을 것이라며 안심하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났는데도 집으로 가라는 소리가 없고 누구를 만난다며 시내 빌딩 주차장으로 가는 것이었다.


 남편이 자리를 비운 사이 나 배도 아프고 변비가 심해져서 집으로 먼저 들어간다는 메모를 차에 남겨 놓고 핸드폰은 차 뒷좌석에 놓고는 꽁지가 빠져라 택시를 잡아타고 엄마네 집에 도착하니 2시가 다 되어 있었다. 급하게 시장에 들러 몇 가지 필요한 것을 사서 짐을 꾸려 도망치듯 공항 터미널로 향하게 되었다. 


 올 데 갈 데 없는 남편, 정서적으로는 물론이요 정신적으로 좀 이상이 있다 싶은 남편을 그 동안 제대로 잠도, 먹지도 못해 10Kg가까이 빠져 있는 남편, 가지고 있는 돈도 얼마 없어 병원비도 내지 못하고 독촉을 받고 있는 남편을 남겨 두고 가야했다. 


 나만 살겠다는 것이었는지, 아이들이라도 내가 살려야겠다는 것이었는지, 남편은 죽든 살든 이젠 내 영역 권에서는 벗어났다는 것인지, 아니, 그런 무능하고, 바보스럽고, 행패나 부리는 남편은 이제 내 남편도 아니요 난 더 이상 그의 곁에 있을 수 없어 떠나는 것이라고 애써 변명을 해 봤다. 


 더 이상 같이 있다가는 나까지 병원으로 실려 가야만 할 것 같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행여 남편이 귀신처럼 낚아채기라도 할까봐 도망치듯 공항까지 갈 수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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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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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02
2017-05-16
거리의 남자(3)

 

 (지난 호에 이어)
 서울에 도착해서 며칠 지나지 않아 방부터 구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지금 방이 문제냐며 사무실부터 구해야 하며,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70평짜리 아파트 사 놓은 데로 들어가면 된다는 것이다. 


 그 70평짜리 아파트라는 것은 계약금 일부 걸어 놓고는 중도금 잔금까지 은행에서 대출 받아 해결하려했던 것이 농협에 있던 친구가 갑자기 죽게 되니 대출 건도 무산되고 말았단다.


 우연찮게 학교 후배를 만났는데 부동산이 묶여 너무 고통 받고 있던 차에 아파트를 분양가보다 1억을 싸게 주는 조건으로 남편이 그것을 은행 대출 받아 해 보려했다가 그것이 여의치 않게 되니 중도금 잔금은 물론이요 계약금으로 들어간 얼마간의 돈도 입을 뗄 수 있는 상황이 아닌 모양이었다. 


 사업을 시작하면 한 달 수입으로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으리라 그리 했던 모양이지만, 빚내어 미리 쓰고, 잔치하는 사람처럼 보였으니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일 처리를 그렇게 해놓고도 잔소리 말라고 언성이나 높이니 산수, 계산을 제대로 하는 사람인지 열 번 스무 번 다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70평은 고사하고 단 7평짜리 아니, 어디 부엌 달린 방 한 칸도 마련하지 못하고 70평짜리 아파트를 들먹이고 있으니 이처럼 우매한 인간이 어디 또 있을까 말이 나오지를 않는다. 


 남편 성격에 어디 허름한 방을 얻으러 다닐 수도, 그렇게는 갈 수 없다는 바보스런 자존심의 결과였으니 처음엔 오갈 데 없는 남편이 측은하고 불쌍했으나 나중에는 그럴만한 가치도 없으며 어차피 자업자득이요, 자승자박이 아니겠느냐며 남편에 대한 동정심마저도 끊어버리기로 했다. 아니 남편을 동정할 만큼 애정도 체력도 남아있는 것 같지 않았다. 


 남편은 병원에서 나온 뒤 툭하면 늦은 밤 친정으로 전화를 해서 나오라고 해놓고는 가까운 호텔이나 모텔로 끌고 가니 이처럼 한심하고 기막힌 일이 어디에 또 있는지 머리가 돌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나날이었다. 


 그것도 말짱한 정신에 숙박업소로 끌고 다녀도 못 견딜 일인데, 술을 잔뜩 먹고는 카세트 테이프를 볼륨을 귀가 멍멍하도록 틀어 놓고, 분을 이기지 못해, 내게 대해, 친정에 대한 갖은 독설을 다하며 운전을 난폭하게 하니, 더는 참을 수 없어 귀를 막기도, 머리와 가슴을 쥐어뜯기도 하였다. 죽을 수 없음에 가혹했고, 더는 들어 줄 가슴이나 여유가 없었기에 미치지 않고 그 곁에 있어주는 것만도 대단한 인내심을 요하는 것이었다. 


 그만큼 취하고 독설을 퍼부어 댈 것이면 어느 조용한 술집이나 숙박업소에 들어가서 퍼부어 댈 것이지 차를 끌고 다니며 광란하듯 하고 다녔으니 순간순간 이러다가 교통사고라도 나면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할 것이며, 차는 친정 동생 명의로 되어 있어 동생에게 어떤 피해를 입히나 생각하면 머리가 핑핑 돌 지경이었다. 


 갖은 독설을 다 퍼부어 대다가 어느 모텔로 들어가는 남편을 줄레줄레 따라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신세가 죽고 싶을 만큼 비참했다. 남의 눈이야 의식할 필요가 없다지만 이건 완전히 바람난 여자가 정부와 놀아나는 것처럼 보였을 터이니 겉치레, 허세 부리기 좋아하는 남편 덕분에 편안한 방은커녕 이 모텔 저 모텔로 끌려 다녀야 했다. 


 이렇게 살아야하는지 숙박업소 특유의 하얀 시트거나 색깔 있는 이불, 빨간 조명등에, 벽에는 이상한 그림까지 어설프고 서러워 죽고만 싶은 심정에 개 끌려가듯 방에 들어서고 나면 가슴은 텅 비어 있고 머릿속은 멍멍하니 백치가 따로 없네, 싶게 사람까지 멍청해져 갔다.


 아침이 되어 다시 눈을 마주치는 순간부터 머리가 깨져라 목이 터져라 목청을 높이다 보면 너무너무 지쳐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하는지 캄캄하기만 했다. 


 강남의 어느 호텔에서 하룻밤 자고 아침 햇살이 그득하게 들어 창문까지 열고 누우니 벽에 조그만 액자가 하나 걸려 있었다. 그 그림은 시골의 풍경을 그린 것이었는데 난 그 그림을 보는 순간 너무나 편안하고 평온한 감정에 젖어들 수 있었다. 


 난생 처음, 그래 그림은 이렇게 감상하는 것이었구나, 싶어 오래도록 잊혀 지지 않고 그 다음부터는 그림을 보면서 감상하고 음미할 수 있었으니 그런 와중에도 하나의 값진 수확이었다. 


 그런 악몽 같은 시간을 일주일 넘게 끌려 다니다 보니 엄마네 집에서 자는 날은 너무도 편안했다. 이대로 아침까지 잘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순간 전화벨 소리가 울리면 가슴은 쿵쿵, 무슨 귀신에게 잡혀가는 듯, 소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으로 다시 또 불려나가기를 몇 차례였다. 


 그 후 어느날 술을 잔뜩 먹고는 나오라고 해서 나가니 정신이 반은 이상한 상태였다. 광폭하게 운전을 하기에 겁이 나서 운전 좀 얌전히 하라고 했더니 있는대로 성질을 내며 더 난폭하게 모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기름을 넣는다며 잠깐 시동을 끈 사이 아이들에게 전화를 해서는 언제 우리가 그런 사이였느냐 싶게 엄마 아빠는 잘 있으니 아무 걱정 말라며 나까지 전화를 바꿔 주지만 난 목이 메어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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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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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02
2017-05-07
거리의 남자(2)

 

거리의 남자(2)

 

(지난 호에 이어)

 그 동안 고초가 얼마나 컸으면 저럴까 싶어 친정 식구들의 태도와 남편의 성격까지를 감안해서 듣자 해도 김포공항에서 잠실까지 가는 30분 이상을 더는 들을 수 없었다. 한 두 마디 거들면 너도 똑 같은 인간이라며 운전을 하다말고 액셀러레이터를 콱콱 밟는 바람에 기겁을 하며 놀래곤 하였다.

 

 도대체 그간의 상황이 어찌 되었기에 이렇게 불구대천지 원수 대하듯, 피를 토하듯, 나까지 포함해서 친정식구들을 난도질하듯 하는지 머릿속은 멍멍 귓속은 먹먹 가슴이 콱콱 막혔다.

 

 친구네 집으로 가 달라는 얘기는 들리지도 않는지 갖은 독설을 다 퍼부어 대더니 약속이 있다며 친정으로 택시 타고 가라면서 중간에 내려놓고 휑하니 가버리는 것이었다.

 

 난 그 무거운 이민 가방 하나, 끄는 가방 하나, 핸드백까지 들고 친정으로 가게 되었다. 친정으로는 도저히 가고 싶지 않았지만 남편의 문제도 그렇고 아무래도 엄마가 계시는 큰 동생 집에 머무르며 상의도 할 겸 올케 눈치가 보인다 해도 그 정도쯤은 감수해야 했다.

 

 친정 올케는 그동안 7남매의 맏며느리로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식구들 있는 대로 치다꺼리하느라 어느 만큼은 그 고초를 알기에 웬만하면 나라도 그런 부담은 주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친정에 가서 대충 얘기를 듣고 보니 남편이 나 없는 동안 주식에서 손해를 보게 되자 알게 모르게 내 형제들에게 돌아가며 부딪치다보니 도움도 받지 못하고 완전히 따돌림을 당한 상태였다.

 

 나 역시 아무리 피붙이라고 한들 이제 참을 수 있는 한계선을 넘어서서 제발 눈에만 띄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정도였으니 말해 무엇할까. 난 남편의 성격이나 친정 식구들 형편을 알고 있어 그간의 상황은 얼마만큼 짐작이 가고도 남는 터였다.

 

 남편은 만나자마자 핸드폰을 하나 주며 충전을 시켜 손에 꼭 들고 다니다가 받으라며 신신 당부를 하는 거였다. 그러면서 나중에 전화 할 테니 그런 줄 알라며 아침에 헤어진 남편한테서는 밤 11시가 넘어서 전화가 왔다. 급하게 전화를 받으니 반은 울음이 섞이고 반은 겁에 질려 지금 앰뷸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가고 있다며 병원에 가서 전화하겠다며 끊는 것이었다.

 

 난 잠자리에 들려다 말고 이게 웬 아닌 밤중에 날벼락인가 싶어 초조하게 기다리니 전화가 다시 왔다. 강남 성모병원이라기에 급히 택시를 타고 가니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은데 목에 붕대를 친친 감고 있었다.

 

 그간의 경위는 이러했다. 남편은 친구와 같이 주식회사를 하나 설립해서 친구를 대표 이사로 하고 나와 큰딸아이가 이사로 들며 사업을 추진하던 중에 이권을 놓고 감정대립이 일기 시작하면서 끝 간 데 없이 상황이 극에 달해 있었다.

 

 남편 얘기로는 그 친구가 배신하는 기미가 보였던 1월 중순부터 전화 요금도 내지 않아 200만원 가까이 연체돼 있었으며, 관리비도 내지 않고 4월을 넘기고 있었단다. 그러니 친구인들, 전화 요금에 관리비까지 내지 않았으니 더는 참을 수가 없어 사무실에 있었던 짐을 내가 서울에 도착하기 전날 내몰다시피 밖으로 다 내어놓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 짐을 우리 동생과 친구인 유 사장이 작은 고모네 집으로 대충 옮겨놓은 상태였다고 한다.

 

 그래도 남편은 그 오피스텔 내에 있는 부동산 사무실을 통해 다른 사무실을 계약하려고 계약금까지 지불해 놓고 있는 상태에서 내가 서울에 도착하는 날 부동산 사무실 사람과 싸움이 붙었다고 한다. 그 사람이 먼저 때려서 자기가 맞았다며 그 와중에 남편이 112에 신고를 하면서 경찰이 오고 남편은 앰뷸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

 

 몇 달 만에 만난 남편, 그것도 너무 말라서 몰라볼 정도의 남편이 이젠 그것도 모자라서 싸움까지 하다가 허리를 다쳐 붕대까지 감고 환자들이 입는 파란 가운을 입고 병실에 누워 있는 것을 보니 기가 막히기도 하거니와 앞이 캄캄했다.

 

 대체 남편이란 사람은 그 동안 무슨 일을 어떻게 하였기에 지금 저런 몰골로 있어야하는지 동정하는 마음은 잠깐이요 너무 한심스러워, 할 수 있다면 도망이라도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몇 달 만에 만난 남편과는 아침부터 핏대를 세워가며 할퀴고 괴롭힐 수 있는 만큼 치고 받고, 회포는커녕 얘기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는데 저렇게 다시 또 병원신세를 져야하는 남편을 멀거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동생이 가져다 준 이불을 덮고 그 밤을 병원에서 잤다. 아침 일찍 가해자와 파출소에서 사람이 올 것이라며 떠밀다시피 해서 난 병원을 나서고 말았다. 남편이 병원에서 2주 가까이 있는 동안 가해자와 합의도 못하고, 치료비도 지불하지 않고, 환자복을 입은 채로 병원을 나오고 말아 병원 원무과장이 친정으로 전화를 했다. 치료비를 계산하지 않으면 수배령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전화를 받고는 기가 차서 나가자빠질 지경이었다.

 

 한두 살 먹은 어린 아이도 아니고 일 처리도 제대로 못하고, 게다가 사무실은커녕 둘이 머리 들이밀고 들어갈 방 한 칸 마련 못하고, 난 친정으로 남편은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곤 하다가 이따금 밤늦게 집 앞에 와있다고 전화를 하곤 했다. 

 

 그때마다 남편이 가엽고 측은해서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다가도 어찌해서 일 처리를 그렇게 밖에 할 수가 없는지 얼굴은커녕 목소리조차도 듣고 싶지 않고 소름이 끼쳤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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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자
56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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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7
거리의 남자

 

 

거리의 남자

 

 이 글은 나와 남편이 서울에 나가서 있었을 때 있었던 일들이다. 딸들은 아빠의 치부까지도 드러내는 것 같아 엄마의 글쓰기를 반기지 않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내가 겪고 살아온 얘기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얘기이기도, 누군가 현재 어려운 현실에 처해 있다면 모쪼록 좌절하지 않고, 용기 잃지 않고 식구가 합심해서 잘 견디며 극복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역이민을 계획하다

 

 2000년도에 남편과 같이 서울을 나갔다가 그곳에서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있어 역이민을 하기로 결심을 하고 나 혼자 캐나다로 들어왔다.

 

 그 후 몇달 동안 전화로 들려줬던 남편의 얘기는 믿을 수도 없고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어느 회사 주식을 사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신문을 펼치면 우선 주식 시세부터 보게 되었다.

 

 그즈음 몇 번은 주가가 오르는가 싶더니 남편이 주식을 샀던 시세에서도 반 이상이 떨어지고 있었다. 전화 통화를 하며 주가가 떨어지고 있는데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으면 걱정하지 말라며 4월 초에 나오라고 하더니 다시 4월 말에 나오라고 하기에 기다렸다.

 

 그러나 5월달에 접어들고 있건만 말이 이랬다 저랬다 종잡을 수가 없어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안되겠다 싶어 비행기 표를 급하게 사서 그 밤으로 짐을 싸기 시작했다.

 

 남편 말로는 아무 것도 갖고 나오지 말고 옷만 갖고 오라고 하였지만 당장 나가서 써야 할 그릇이라도 챙겨야할 것 같아 밤늦게까지 짐을 쌌다. 아이들도 불편 없이 쓸 수 있도록 해놓고 시집보내는 딸의 살림을 챙기듯 숟가락, 티스푼, 밥공기, 국그릇, 냉면그릇, 채칼, 조그만 정수기, 나무 주걱, 행주 등속까지.

 

 그동안 짬짬이 사두었던 커피 몇 병, 꿀, 참깨, 참기름, 비누, 샴푸, 치약 등 내 옷가지 좀 대충 챙겨도 이민가방으로 60Kg이 넘었다.

 

 그 밤은 자는 둥 마는 둥하고 마침 다음날이 내 생일이고 5월 중순이 작은 딸 생일이어서 같이 한다며 미역국을 끓여 아이들과 같이 아침을 먹었다. 큰딸한테는 생일선물이라며 티셔츠와 카디건을, 작은 딸에게서는 화장품까지 받고는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서 가방을 두 개로 하든지, 짐 무게가 넘는다며 난처해하는 것을 부칠 짐은 그것이 하나라며 떼를 쓰듯 부치게 되었다.

 

 두 딸들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엄마가 나가는 대로 연락을 할 것이니 아르바이트 자리를 소홀히 하지 말고 알아보라며 당부하듯 하고 나갔다.

 

 김포공항에 도착해서 입국 수속을 마치고 짐을 찾아 나오며 많은 인파 속에 남편을 찾을 수 없어 공중전화를 하려고 서있는데 남편이 알아보고 걸어오고 있었다.

 

 순간 난 가슴이 쿵하며 내려앉는 듯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화상으로 8, 9Kg이나 빠졌다고 얘기는 듣고 있었지만, 몇달 사이 그렇게 살이 빠져 초로의 할아버지나 다름없었다. 어쩌다 벌써 저렇게 늙어 흉한 몰골이 되다니 싶어 연민의 정보다는 전혀 남남이 만난 것처럼 생경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남편은 내 짐보따리를 보자마자 언성을 높이며 너는 언제나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제 멋대로 한다며 정나미 떨어져 말하는 것조차 귀찮고 짜증이 난다는 투로 정색을 표하는 것이었다. 난 이 짐도 줄이느라 줄여온 것이니 남편이 화를 내도 할 수 없다며 모른 척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번 남편과 같이 있었던 오피스텔엔 이번엔 갈 수가 없을 것 같아 몇 년 전 남편을 먼저 보내고 주유소를 하고 있는 친구한테 전화를 해놨었다.

 

 남편 친구 오피스텔은 샤워시설도 없을뿐더러 그동안 남편과 일 관계, 돈 문제로 해서 감정이 상할대로 상한 상태여서 이 큰 가방을 들고 친정으로는 갈 수 없어 당분간 친구네로 가서 있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남편은 내 얘기를 듣자마자 자기 체면도 있지 친정을 놓아두고 웬 친구네 집이냐고 더더욱 못마땅해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친정보다는 그쪽이 더 나을 것이니 우선 친구네 집으로 가자고 했다.

 

 남편이 세워 둔 차 있는 곳까지 힘들게 가방을 끌고 가서보니 그랜저 중고 차였다. 그나마 새차보다 중고차로 구입한 것까지는 좋은데 대체 이만한 차를 타고 다닐 수 있는 능력이 되느냐고 묻고 싶은 것을 꾹꾹 눌러 참았다.

 

 남편이 생각하기엔 그만한 차는 타야 한다고 결정을 했겠지만 예전과 지금과는 상황이 다르건만 어찌 저리도 허세가 심할까 싶어 가슴속까지 묵직묵직하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차를 타자마자 옷가방만 달랑 들고 나오라고 그렇게 당부를 했는데 왜? 무엇 때문에? 남편 얘기는 무시하고 멋대로 이렇게 큰 가방을 들고 나왔느냐 에서부터 너희 친정식구들이 그동안 나한테 어떻게 했는지 아느냐며 친정 엄마에서부터 동생들까지 싸잡아 그동안 있었던 일이며 과거 얘기까지 들춰내는 것이었다.

 

 더 이상 분통이 터져 어찌할 수도 없다는 듯 소리소리 지르며 악을 써 대어 난 귀를 막고 마음 느긋하게 먹고 웬만한 얘기는 흘려들으리라 이를 악물고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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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oon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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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7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사람들은 모두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꿈꾸며, 어떤 마음으로 사는 것일까? 흔히 사십 넘어서는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지라고 하는 얘기는 그동안 어떠한 마음으로 어떠한 환경에서 살아 왔는지 대강 그 사람의 얼굴을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한국 사람도 많고 여기저기 한국 식품점도 많아 때때로 여기가 한국인가 외국인가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하지만 이민 초기에는 한국 사람만 봐도 반갑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라든지 도움이 필요할 때면 서로 나서서 도와주곤 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 사람이 차츰 많아지면서 오히려 같은 한국인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이 앞서기보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나도 서로 얼굴을 외면해 버린다는 얘기도 듣곤 했다. 그러는 그들이 늘 가슴속엔 고향, 고국을 잊지 못하고 가슴에 안고 있다고 한다. 이런 곳에서 만나는 사람이 고향 사람, 한국 사람이 아니고 누구란 말인가. 아무리 같은 동족끼리도 모르고 지나면 외국인이나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외국인이라 해도 늘 대하고 마음을 주고받으면 그들이 곧 내 동족이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친구가 다시 한국에 가서 살면 지방에 내려가서 살겠다고 한다. 지금껏 서울에 살던 사람이 타지방에 가서 살면 말이 통한다는 것 이외엔 그들과 사귀고 익히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타지에 가서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이민 생활 10년 20년 30년 하던 사람이 가슴에서 못 잊어 연연하던 조국엘 가면, 모두 아는 사람이고, 모두가 말이 통하는지 생각해 보면 알 일이다.

 

 몇 십 년 만에 나간다 해도 내 부모 내 형제, 친척이나 그때 알던 친구 몇 명일뿐이지 아무도 알아보는 이 없고, 알아주는 이 없이, 단지 모국 방문, 관광에 그치고 말게 된다. 나야말로 우리의 아이들이 작은 딸 같은 경우는 그곳에서 초등학교 6학년 올라 갈 때 왔으니 너무 어려 친구 관계가 거의 형성되지도 않았기도, 그나마 친구들 소식이 모두 끊겨 한국엘 나가면 누구를 만나게 될지 걱정스럽고 안됐다고 했더니, 인터넷을 통해 그때 친구들 몇 명을 거론하면서 근황까지 얘기를 하기에 한국엘 가면 그나마 몇 명은 확실하게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있겠구나 조금은 안심이 되기도 한다.

 

 그러기에 가까운 친척이 이웃만 못하다는 얘기가 열 번 나옴직한 것이다. 아무리 가까웠던 사이일지라도 자주 보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며, 옆에서 늘 보는 사람과 가까이 지내게 되는 것이다. 아들 딸을 어린 나이에 외국으로 유학 보내 놓고 음식을 앞에 놓고도 아이들 생각이 나서 울고, 아이들을 멀리 보내 놓고 옷은 입어서 무엇 하겠느냐며 허름한 옷만 입고 산다는 이도 있었다. 이는 비단 그녀뿐이 아닌 오늘의 많은 엄마들이 자식과 떨어져 있어야 하며 부부지간에도 떨어져 지내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세상에 태어나 부모 자식지간, 부부지간이 가장 가깝고 사랑하는 사이임에도 이처럼 같이 생활 할 수 없는 것이 요즈음의 실태다. 마음 속 가슴속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차지하고 있음으로 해서 자칫 아니, 정작 눈앞에 있는 사람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아끼고 사랑하지도 못한 채 시간, 세월이 흘러가 버리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무리 부모 자식 부부지간이라도 보고 싶을 때 보지도 못하고, 먹는 음식, 맛있는 음식도 함께 하지 못하며 많은 세월 놓쳐버린다면 안타까워 어찌하려나.

 

 내가 도넛 가게에서 일을 할 때 이따금 음식을 만들어 가게에 가지고 갈 때가 있었다. 그것은 어차피 엄마나 친구들은 볼 수 없어 내가 매일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사람들과 마음 적이나마 같이 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단골들의 적지 않은 이들이 나의 그런 점을 알기에 그들 역시도 음식을 가져 와서 내게 권할 때가 있다. 그런 이들 중에 에티오피아에서 왔으며 38살이라는 어떤 남자는 집에서 요리할 시간도 없지만 하지도 않기에 대부분 밖에서 사 먹는다고 한다.

 

 그가 그즈음 오후 여섯시 좀 넘어서 밥에 닭고기 몇 점 넣어서 볶은 밥이 저녁이라면서 먹으며 나보고 한두 번 먹어 보라고 하여 먹어 보았다. 그가 집에 가져가지 않고 그곳에 앉아 먹게 됨은 집에 가서 혼자 먹는 것보다는 덜 외롭기 때문일 것이며, 내게도 조금 주고 싶은 마음도 있는가 보다. 그것은 언젠가 내가 수박을 가져가서 손님 몇 명에게 줄 때 그도 있었고 또 팝콘을 한 봉지 튀겨 내어갔을 때도 그가 있었기에 그도 내게 무엇인가 주고 싶어 그리하지 않나 싶다.

 

 또 어떤 단골은 내 시간대에 올 수가 없기에 때로는 우정 시간을 내어 커피 한 잔 사며 팁을 주고 가거나 어느 날은 초콜릿을 사다가는 건네주고 가는 그에게서도 별다른 애정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나는 요즈음 내가 매일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을 마음에 두고 사랑하려 애써 본다. 많은 아는 사람 친구가 가슴에 남아 있다 해도 매일 같이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이들에게서 더한 애정을 느끼기도 한다. 이 나이에 캐나다까지 와서 이 순간, 나의 삶 속에, 나의 시간 속에, 같이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지 않으면 누구를 사랑한다는 말인가.

 

 사람은 자칫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에겐 그 얽힌 만큼 멈추어 있거나, 얽힌 만큼 이상은 마음이 가지 않을 때가 많다. 하지만 아무런 감정도, 사심도 없는 사람에겐 내 마음을 열기만 하면 그 이상의 애정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매일 볼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은 가슴에 담고 사랑함도 있어야겠지만, 매일 볼 수 있고 만나는 사람들을 진정 마음에서 사랑을 느끼고, 사랑을 하려는 마음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내 삶 속에서 하루하루를 같이하는 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야말로 나의 삶, 나의 인생을 풍요하게 함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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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oonja
한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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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7
가련한 사람들

 

 

가련한 사람들

 

 사람을 만나고 돌아설 때면 인상이 오랫동안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 중엔 만날수록 좋아지는 사람, 두 번도 보고 싶지 않은 사람, 불쌍한 사람, 가련한 사람, 한심한 사람, 얄미운 사람 등으로 가슴에 남아 있을 때가 있다.

 

 가게에 오는 손님 중에 아무리 생각해도 가련하다 싶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몽골 남자로서 이라크 여자와 결혼을 해서 아들까지 하나 낳고는 이혼을 했다고 한다. 여자는 이라크로 다시 돌아갔다가 돌아와서 다른 남자와 재혼해서 살고 있으며, 그 아들아이가 주말과 주일엔 엄마 집으로 간다고 한다.

 

 언젠가 그는 아들아이가 엄마 집으로 가고, 혼자 집에 있기 싫어서, 그것도 그 여자가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올 시간이어서 밖으로 나왔다고 하는 것이었다. 평소에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아들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도서관으로 데리고 가서 책도 읽고 하다가 밖에서 대충 사먹고 들어간다고 한다.

 

 애인이 한국 여자가 있었다는 그 남자는, 한국말도 어느 만큼은 하는 편이어서 다시 결혼을 하지 그러느냐고 했더니 지금은 애인이 없으며 서양 여자는 싫고, 한국 여자, 몽골 여자, 티베트 여자가 좋다고 한다.

 

 하긴 그 남자뿐이 아닌 가끔은 동양 여자, 그것도 한국 여자를 소개시켜 달라는 얘기를 듣곤 하는데, 오늘날 서양 여자보다도 동양 여자를 더 찾는 듯한 인상은 어쩌면 당연한 얘기인지 모른다. 그것은 여자들이 잘해주고 위하는 남자를 좋아하듯, 남자들도 여자에게 받고 싶은 심리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남편을 섬기고 위함은 서양 여자들보다는 동양 여자들이 더 낫다고 알고 있기에 동양 여자, 그 중에도 한국 여자를 소개시켜 달라는 얘기는 그냥 하는 그런 얘기가 아님도 느끼게 된다.

 

 그 남자는 청소도 요리도 할 줄 모르며 그야말로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언젠가는 내가 약식을 해서 조금 가지고 간 날 마침 그가 왔기에 조금 먹어 보라고 주었더니 맛이 있다면서 어떻게 만드는지 묻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밖에 나가서 돈은 벌어야하니 다시 나가곤 하지만,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오면 다시 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치울 줄도 모르고 요리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니 다시 또 밖으로 나와서 무엇인가 사먹고 배회하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늘 그렇지는 않겠지만 우선 정서적으로 안정을 하지 못하니 집에 느긋하게 있지를 못하고 집에서는 잠만 자고 나온다는 얘기를 서슴없이 하는 것이다.

 

 아들아이는 아빠가 좋은 여자 만나서 재혼하기를 바라지만 마음이 가는 사람도 없고 13살이나 되는 아들도 있어 그 아이 또한 걸림돌이라고 얘기한다.

강아지라도 한 마리 키워 보지 그러느냐고 했더니 매일 집에 혼자 있어야 하는데 누가 돌볼 수 있어 기르겠느냐며 그것도 못하겠다고 한다.

 

 점점 독신주의가 늘어 감은 누구의 눈치나 간섭받지 않고 나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하며 내 삶을 아낌없이 살고자 하는데서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늘어나기도 하고, 진정 독신주의를 즐기고 원하는 사람도 있지만, 삶을 같이 할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 혼자 사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본다.

 

 가정에서 식구와 같이 음식을 만들며 함께 즐길 줄 모르니, 배가 고프면 적당히 먹고, 또 밖에 나가서 해결하면 된다는 식이니 정서적으로나 가정적으로 안정을 찾기 쉽지 않다.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팽배해지다 보니 설령 좋은 사람을 만난다 해도 같이 화합하고 어울릴 줄 아는 습성이나 마음이 없어, 같이 살며 부딪치느니 혼자 살려는 마음으로 기울 것이다.

 

 집은 있으되 가정 즉, 식구가 함께 마음을 주고받으며 그곳에서 화락함을 얻고 누릴 수 있는 가정이 없어 밖으로만 떠돌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야말로 참으로 가련하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의 간섭이나 눈치 보지 않고 혼자 내 삶을 살겠다고 택했지만, 결국은 그런 사람들끼리 다시 만나게 되니,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며, 그 안에서 함께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찾기보다 귀찮고 성가시다며 온전한 가정생활, 결혼 생활도 누려보지 못하고 서로 갈라서서 혼자 살게 된다.

 

 아내가 해주는 따뜻한 밥상과 보살핌, 남편이 있어 든든하게 의지가 되는 안정감을 찾지 못하고, ‘삶의 진수’라 할 수 있는 ‘가정 내에서의 자식 낳아 기르며 사는 그런 맛'도 느끼지도 못하며 다른 즐거움을 찾겠다고 허우적대는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그냥 가련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 시신을 누가 거두어 줄 것인가? 결혼은 해도 후회, 하지 않아도 후회한다는 얘기가 있다. 그렇다면 하지 않고 후회하느니 해보고 난 다음에 후회하는 편이 백 번 나은 것임을 말해 무엇 할 것인가.

 

 또한 요즘은 부모들조차도 참고 살지 말고, ‘애’ 생기기 전에 헤어지라고 종용한다고 하니, 밀알이 되어 썩지는 못할지언정, 참지도 않고 어찌 ‘삶의 진수’를 맛보며 살수가 있더란 말인가.

 

 내가 자식이나 남편을 위해, 아니 아내를 위해, 참고 인내하는 희생까지야 바라지 않는다 해도 봉사하는 수고로움도 하지 않고 무슨 결실을 기대한다는 말인가.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하나를 참지 못하면, 둘도 참지 못할 것이요, 한 사람과 맞지 않는다고 두 번 세 번 결혼한대야 그런 번거로움이 어디 있을 것이며, 그래 가지고야 자식인들 온전하게 낳아보겠나 싶다.

 

 난 가끔은 ‘내가 죽은 다음 내 시신을 누가 거두어 줄 것인가’ 생각을 해 볼 때가 있다. 그때쯤이면 우리 엄마도 이미 돌아가신 다음일 것이며, 형제들이 있다고 하나 그때까지 몇이나 남아 있을지 알 수 없으며, 남아있다 해도 연락이 되어 내 시신까지 처리해 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나의 두 딸들과 사위들은 내 근황이나 거처를 알고 있음은 물론이요, 내 죽은 다음에도 슬퍼하고 애도함도 또한 물론이요, 당연히 내 시신을 거두어 줄 것임을 알기에 난 그 생각만으로도 참으로 마음이 편안해지고, 언제, 어느 때, 숨을 거둔다 해도 편안하게 죽음을 맞을 수 있으리라 싶으니 그것만으로도 세상에 왔다가면서 그 이상의 보람도, 아쉬움도, 여한도 없이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결혼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 수 있을 것이며, 자식을 위해 참고 수고도 하지 않은 사람들이, 어찌 죽은 다음에 내 시신을 거두어 주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세상엔 내가 수고하지 않고 얻어지는 것은 없다. 설령 얻어진다 해도 내가 수고하고, 땀 흘리지 않고, 손에 넣는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꼭 명심해야 할 것은, 내가 세상에 태어났음은 내가 원해서 이 땅에 온 것이 아니지만 태어나 살았던 생명은 죽게 되어 있으니, 내 시신을 온전하게 거두어 줄 수 있는 자식은 낳아야 하며, 또한 부모의 시신을 외면하지 않는 삶을 살도록 참고, 수고해야 함이다.

 

 온전한 가정도 꾸려보지 못하는 가련한 사람들로 남지 않음이, 죽은 다음 내 시신을 주변 사람들이 아니고, 내 자식들이 거두어 줄 수 있도록 함이 마지막까지 가련한 사람으로 남지 않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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