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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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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여주 출생,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기도 광수중학교 근무, 1992년 캐나다 이민, 캐나다문인협회 수필 부문 입상, 2006년 해외동포문학상, 작품집 <인생에 실패는 없다 다만 또 다른 삶이 있을 뿐이다>, <나이만큼 행복한 여자>, <밀리언 달러 티켓 나도 한장>,<행복이라는 이름의 여행>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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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0
남자의 매력

 

 나는 이 나이쯤 되어서야 학교 다닐 때 성적만큼이나 행동 발달 상황이 얼마만큼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니 참 늦둥이인가 보다. 내가 학교 다닐 때는 물론이요, 아이들이 통지표를 가져와도 가 나 다에서 나나 다가 없으면 그냥 지나쳐 버렸다. 어쩌다가 나 정도 있어도 내가 보아 큰 문제가 없다 싶으면 그냥 간과하게 되었다. 


 아이들의 통지표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큰 아이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소견 란에 아이가 진취적이라는 얘기와 작은 딸은 책임감과 자존심이 대단한 아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이따금 아이들을 보는 선생님의 눈이 정확했지 싶어 다시 한 번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러기에 언제고 기회를 만들어 나의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교까지 학적부를 열람해 보리라 싶은 마음이 든다. 어쩌면 그때그때 담임선생님이 나를 보셨던 부분이 가장 정확하지 않으려나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한 남자아이를 무척 관심 있게 보고 좋아하기도 하였다. 그 아이는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반장은 물론이요, 전교 회장, 부회장은 맡아서 하였다. 


내가 그 아이를 좋아했던 것은 첫째는 공부를 잘하기 때문이었다. 학생이 공부를 잘 한다함은 성실성, 책임감, 자주성 모두 좋지 않으면 어렵다. 중학교 때도 유심히 보고 남에게서 듣는 얘기로는 시험 때면 밤을 꼬박새우다 시피 해서 코피를 쏟기가 예사였다고 한다. 그만큼 열심히 하는 덕분인지 그 아이는 시험 때면 시험지를 받고 거의 언제나 제일 먼저 쓰고 나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학교 입학 성적이 그 아이가 5등, 내가 6등으로 여자로서는 내가 1등인 셈이었다. 선생님들 모두 그 아이가 5등인 것에 대해 의아해 하실 만큼 뛰어나게 잘하는 아이였다. 내가 보는 그 아이는 승부 근성과 집념 때문에 그만큼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본다. 머리만 믿고 적당히 하는 사람은 길게 놓고 볼 때 꾸준하게 노력하는 사람을 따라갈 수 없다. 그 아이는 머리는 별로 좋은 것 같지는 않은데 꾸준하게 노력하는 그 자세가 너무 좋았었다. 


고등학교를 2차로 가느니 차라리 재수를 하겠다며 서울까지 올라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함과 3년 내내 전교에서 회장 부회장을 하기도 하였다. 


내가 그 아이를 가장 좋아했던 부분은 무엇이든 자기가 해야 할 일, 목표를 세우고 최선을 다하며, 공부를 할 때면 밤도 꼬박꼬박 새우기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였다. 하지만 그 아이는 가정 형편상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직장을 가져야 했다. 그렇게 해서 그 아이는 내게서 더 이상의 매력 있는 아이는 아니었다. 아무리 똑똑하고 노력파일지라도 그에게서는 한계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우등생이 사회에서도 우등생은 아니라는 얘기를 하기도 한다. 학교에서의 우등생은 성적만을 놓고 볼 때 점수를 잘 받았기 때문에 우등생이라는 칭호를 붙여 줄 수가 있다. 그 우등생이라는 칭호에 성격까지도 좋으면 더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그런데 그 성격이란 거의 부모의 유전인자에서 비롯되며 유아기 때 어떤 환경에서 성장 했느냐도 크게 작용한다.


부모가 되어 아이의 성격이야 어찌되든 공부만을 밀어부처 앞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밀고 가다보면 아이가 사회성을 배울 기회가 없어진다. 또한 공부하는 기계로 전락하게 되면 공부로 해서 들어갈 수 있는 직장은 잘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나, 남을 배려 할 줄 모르는 그런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바람직하지도 않으며 학교에서의 우등생이란 칭호에 걸맞게 사회에서도 우등생이란 칭호는 붙여 줄 수가 없게 된다. 


영재 교육이니 천재니 하여 더러는 월반을 하는 아이도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부하는 머리가 우수해서 그야말로 성적 월반인 것이지, 모든 인간관계까지 월반을 하는 것은 아니다. 또 그 아이 또래에 맞게, 또한 그들과 함께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어야 하며 또 그리 할 줄 앎이 바로 사회성에 제대로 적응함이 될 것이다. 


우리가 대학교 다닐 때 무슨 천재라고 이름도 떠들썩했던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잊었지만 언젠가 캠퍼스를 지나는데 몇 명의 학생들과 함께 걸어가고 있는 그 아이를 볼 수 있었다. 그 아이는 다른 학생들보다도 우선 키도 많이 작아 같이 걸어가고 있는 다른 학생들이 그와 어울려 주는 것만도 고맙게 생각해야 되겠네 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공부는 뛰어나게 잘 해서 대학은 일찍 들어가서 잘 한 것인 줄 알았을지 모르지만, 그 또래들과 같이 어울릴 수 없이 몇 살이나 위인 아이들과 어느 만큼 대화가 통할 수 있었으려나 그것이 가장 궁금하다. 월반을 하였음이 결코 좋은 결과를 가져 왔다고 볼 수 없었다. 그때의 느낌은 공부를 뛰어나게 잘 한다고 해서 학년을 껑충 뛰어 넘고 보니 그 아이와 어울릴 수 있는 연령이 아니어서 그 떠들썩했던 화려함보다는, 오히려 안 돼 보이고, 사회 열등생처럼 순간 보여 지고 있어 그 아이를 바라보는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지극히 드문 예이긴 하지만 학교 우등생이 사회에서도 우등생이 아니라는 한 예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반면에 학교 때 공부를 잘하지 못한다함은 어디에든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한다. 그 문제란 공부에 집중을 할 수 없거나 책상에 오래 앉아 있을 수 없다면 그것이 우선 학생으로서의 책임감, 성실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다. 이미 어려서부터 그 나이에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그 자체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함은 조금씩 성장해 가면서도 다른 것도 크게 잘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부모가 아이를 잘 파악해서 그 아이가 성적을 잘 올리지 못하는 요인이 무엇인가 관심 있게 관찰을 해야 한다. 70점 80점 밖에 올릴 수 없는 자식을 그 이상하도록 요구를 함은 아이들에게도 큰 스트레스요, 학교 때부터 너무 질리게 되면 세상을 밝고 건전하게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사회에는, 세상에는, 공부를 잘 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각자 자기의 적성에 맞고, 능력에 맞는, 일을 찾아 세상을 살아감이 가장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어 사람들을 놓고 평가 할 때 성적 위주로, 모두 잘난 사람위주로, 시선이 모아짐이 아니라, 나도 인정받고 살면서 남도 무시하지 않고, 대접해 줄 수 있는 그런 풍토가 조성되어 갈 때 바람직하게 자리 잡아 갈 것이라 보여 진다. 사회에서 보는 ‘시각’이 바뀌지 않는 한 성적위주로의 학생을 평가함은 교육이 제대로 갈 수 없다. 인간은 각기 다른 능력과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어찌 다 일률적으로 살아가기를 바란다는 말인가. 


어쨌든 학교 다닐 때 공부 잘 하는 아이가 돋보이듯 사회에 나와서는 단연 열심히 일하는 모습에서 느낄 수 있다. 자기가 맡은 일에 긍정적으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면 진정 남자의 매력을 그런데서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의 남편을 그런데서 무척 아끼고 좋아한다. 그녀의 남편은 공대를 나와 자신이 전공한 컴퓨터 분야에 몰두해서 일을 하더니 언제부터인지 중국을 왔다 갔다 하며 사업 기반을 다져가더니 이제는 직원이 70, 80명되는 공장을 운영하고 있어 그것은 바로 그의 성실성과 노력의 결과라고 볼 수 있음에 더더욱 그를 높이 평가하게 된다. 자기가 하는 일에 만족하며 즐겁게 그 일에 몰두할 수 있음은 그 자체로서 그는 인생에서 성공을 한 것이라 봐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내가 하고 싶고, 좋아하는 일,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서 함은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 최소한 내가 보기에 우리 친구 남편은 정년퇴직에 연연하지 않아도 좋으며 정신적으로도 늙지 않을 것이며, 사는 날까지 자신이 추구하고 몰두할 수 있는 일이 있음은 충분히 그로서는 행복할 수 있으며 축복된 인생이라 본다. 


남자의 매력은 자기가 맡은 일에 충실할 수 있으며, 최선을 다하는 남자, 그렇게 살다 보면 그는 자연히 처자식을 부양하며 책임질 수 있다. 처자식을 큰 가슴으로 따뜻하게 감쌀 수 있으며, 주변 사람과, 이웃과 더불어함께 잘 살 수 있도록 배려할 수 있는 남자, 사회와 국가를 함께 걱정하고, 껴안을 수 있는 남자, 세계를 향해 가슴이 열려 있는 남자가 진정 매력 있는 남자일 수 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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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3
“내 생일이야요”

  

 생일이라 함은 각자가 세상에 태어난 날을 이름이다. 지금이야 인위적으로 좋다는 날짜에 맞추어 제왕절개 수술을 해서까지도 출산일을 맞춘다고 하지만, 이미 한 생명체가 모태에 잉태되는 그 순간에 운명은 결정되어 지는 것일 터인데 출산일을 조종한다 함은 그렇게 해서 운명, 팔자가 바뀌는 것인지는 그 누가 알 수 있더란 말인가. 


 어떤 생명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축복이기도, 어떤 생명은 태어나는 그 순간이 저주요 버림받아야 하는 생명체로 태어나가도 한다. 


 우리 엄마는 딸만 여섯인 전주 이 씨 가문의 다섯째 딸로 태어났으니 외할머니가 겪으셨을 심적인 고초가 충분히 이해가 가기도 하지만 그 아픔, 고초는 본인만이 알 수 있다고 봐야 한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다섯째 딸로 태어났으니, 외할아버지가 외할머니께 어떻게 하셨는지, 엄마 형제들끼리 어떻게 컸는지 사연이 없지도 않을 터인데 엄마의 어린 시절이나 외갓집에 대해서는 생각나는 것이 많지 않다. 


 다시 나의 출생을 떠올려 보면 언니는 맏이로 태어났으니 식구들의 귀여움 특히 할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고 유아기를 보냈음을 안다. 언니가 첫 번째 손녀이기도 했거니와 할머니가 언니를 바닥에 내려놓지도 않을 만큼 귀여워 하셨다고 한다. 게다가 밤을 삶거나 구워 많이도 먹이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 같은 경우는 둘째로 태어났으니 호랑이 할아버지 밑에서 엄마 젖도 마음 놓고 얻어먹을 수 있었겠나 싶다. 엄마 얘기를 빌면 그나마 미움을 덜 받으려고 했는지 젖만 먹여 놓으면 자고 또 자고 했다고 한다. 엄마에게도 내게도 다행스럽게 내 밑으로 남자 동생이 태어났으니 터를 그나마 잘 판 덕분에 나도 미움은 덜 받았을 것이요, 엄마도 한시름 놓으셨을 게다. 


 어린 시절이나 자라면서 내 생일을 어떻게 보냈었는지는 별 기억이 없지만, 애들은 10살 까지는 수수로 만든 팥떡은 먹어야 넘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백설기와 수수팥떡을, 2월 초 하루는 나이 떡을 먹는 날이라고 송편을 만들어 다락에 넣어 두었던 것을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식구들이 다 서울로 이사를 하고 나서 내 생일이라고 친구들 몇 명이 와서 밥을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시골 사람들은 어른도 아니고 아이들 생일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으나, 이를테면 서울 사람들은 그때도 아이들 생일이라도 친구 몇 명쯤은 집에 초대를 했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즈음 고등학교 친구 몇 명이 서로 돌아가며 친구의 생일을 축하해주곤 했었다. 


 그 후 결혼을 해서 친구들 생일은 친구가 챙겨 주어야 한다며 가급적이면 친구의 생일날 만나 점심을 같이 먹고, 선물대신 회비에서 5만원씩 주기도 하였으나 내가 이민을 오고 나서는 다달이 만나오던 모임도 자주 만나지도 못한다고 한다. 


 딸들 생일은 친구들이 미리 알고 있어 선물 준비까지 하며 기다리고들 있어 아이들이 먹을 만한 음식 몇 가지와 케이크를 준비해서 잊지 않고 보내곤 했다. 내 생일 역시 결혼을 해서는 친정 엄마가 챙겨줘야 한다고 내 생일이면 주로 친정 식구들이 잊지 않고 와 주어 함께 하기도 했었다. 


 이민을 떠나오기 전 내 생일엔 친정 엄마와 언니, 남자 동생 내외가 같이 와서 생일을 보내기도 했지만 남편이 직접 고기 굽는 것과 몇 가지 생일 상 차리는 것을 도와주어 잊혀 지지 않는다. 


 캐나다에 와서는 어머님이 내 생일이면 고기와 미역을 미리 준비해서 보내 주셨다. 어느 해인가는 작은 시누이가 캐나다에 왔을 때 내 생일날 어머니, 시누이와 같이 음식점엘 갔다. 그런데 장미꽃 한 다발과 돈 봉투를 건네주시어 내가 드리는 것보다 난 늘 더 많이 받기만 했네 잊히지 않는다. 


 어떤 친구는 여자 생일, 그것도 본인이 직접 국을 끓이며 번거롭게 하느니 그냥 지나친다는 사람도, 어떤 이는 달력에다 ‘엄마 생일’이라고 빨간색으로 동그라미를 크게 그려 놓아 식구 모두 그냥 지나 칠 수 없도록 한다는 이도 있었다. 


 남편이나 아이들 생일은 엄마가 챙겨 주게 되어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되지만, 아닌 게 아니라 주부의 생일은 본인이 찾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도 십상인데 오히려 자식들이 다 출가를 한 다음 그때쯤이면 자식들이 다시 엄마의 생일을 챙기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 부모 세대만 해도 여자 생일, 아녀자 생일이 뭐 그리 대수라고 크게 떠벌리느냐고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사실은 나 자신이 세상에 태어났고, 태어난 날이기에 내가 기억하고,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그 뉘라서 나 이상으로 내 존재 자체에 대해 의미 부여를 할 것이며, 그 이상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겠는가.

 
 난 남편이나 아이들 생일에 크게 차리는 것은 없지만 미역국이나 고기 전유어 나물 김 등 몇 가지 평소 먹는 음식을 장만해서 그 날을 잊지 않고 지낸다. 더불어 내 생일 역시 내 생일 날 내가 먹자고 미역국을 끓이느냐가 아니라, 어차피 국이든 찌개든 끓여야 하는 것이고 보면 미역국으로 끓임이 마땅하고도 당연하기에 내 생일 역시 식구들 생일과 똑같이 준비를 한다. 


 생일, 하니 기억나는 몇 사람이 있다. 도넛 가게에서 일 할 때였다. 생일하면 우리네야 가족이나 친구가 축하해 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싶은데, 자기의 생일이 언제라고 광고하듯 하는 사람이 몇 있었다. 대부분 단골들 있는데서 그렇게 떠벌리고 다니니 그런 날은 노인 분들이 차를 한 잔씩 사주시기도 했다. 


 가게에 오는 젊은이 또한 자기 생일이 언제라며 신분증까지 내어 보이며 확인까지 시켜 주는 데야 도무지 알 수 없는 마음이었다. 그 젊은이야말로 사는 것이 너무 곤곤해 보여 보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은데, 그 날이 자기 생일이라며 재차 강조를 하는 데야 그냥 있을 수도 없어 커피와 머핀을 주며 축하한다고 했더니, ‘초’는 없느냐고 농담 삼아 하는 말끝에, 식구들조차도 생일도 잊고 지낸다며 허전한 듯 말을 되뇌고 있었다. 


 ‘생일’, 자신이 세상에 태어났음을 감사하며 살아 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이며, 누가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했느냐며 원망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무심히, 얼결에 생일이라고 지나치며 살았는데 어느 사이 자식들이 생일을 챙겨 줄 나이쯤 되면 자식들이 모르고 지나쳐도 섭섭하다 하기도, 또 어떤 이는 자식들에게 부담주지 않겠다며 그 날 하루 잠적을 하여 자식들 애를 태우기도, 어떤 이들은 생일 날 식구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분란이 일어난다고 염증을 내는 이들도 있다.


 그런 저런 상황을 알고 경험한 우리 세대에선, 이젠 자식 눈치 보지 않고 미리 자식들한테 알리기도, 그 날을 기해 여행을 하는 사람들도 늘어가는 추세이니, 더 늦기 전에 나름 자신들의 인생도 챙기는 것 같아 보기에도 좋아 보인다. 


 생일, 생일, 생일이야말로 내가 세상에 태어난 날이기에 내가 나를 소중히 알고 축하해야 할 일이면서도, 식구들, 남들에게서도 기억되고 높임을 받고 싶음이 인지상정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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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1
바구니 안의 아밀리아


 

 큰딸아이가 출산을 앞두고 있어 우리 내외가 딸네 집으로 가서 모여 앉았다. 딸아이 부른 배를 보며, 내가 보기엔 나 큰 아이 임신 했을 때보다 배가 더 부른 것 같지는 않게 보였는데 남편 눈엔 나 보다 더 부르다고 얘기하는 것은, ‘순산’해야 할 텐데 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음으로 보였다. 


 예정일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대화가 딸아이들을 낳아 키우면 서의 얘기를 하다가 남편이 딸에게 아기 이름을 지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동안 수 백 개의 이름을 보고 골라 보았건만 그 중에도 ‘아밀리아’란 이름이 제일 마음에 들어 그 이름으로 결정할까 보다고 했다. 우린 예정일이 좀 남았으니 그 사이 다른 이름으로 물색해 보자고 하였으나 더 좋은 이름도 찾아 내지 못하고 결국 아밀리아로 출생신고를 해야 했다. 


 예정일이 크리스마스 날이니 예정일 전후로 해서 진통의 기미가 보이면 바로 병원으로 갈 수 있도록 아밀리아 맞을 만반의 준비를 해 놓았다고 한다. 예정일이 특별하다보니 24, 25일 일까 은근히 긴장이 되었다. 


 드디어 예정일을 지나해를 넘기고 있어 혹시 ‘뉴 이어 베이비’가 될지도 모른다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래도 1월 1일을 넘기고 아침결에 전화가 왔다. 진통이 시작되긴 했어도 병원에서 기다리는 시간을 줄여 보려 집에서 지체하다 병원에 가기를 새벽 2시라고 했다. 


 수화기를 놓고 보니 내가 딸들을 낳던 순간이 어제인 양 다가 왔다. 우리 때만해도 임부복이 있어 펑퍼짐한 옷으로 불러 온 배를 적당히 가리듯 하고 다녔다. 그러나 요즈음은 출산율이 떨어지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임신한 것이 무슨 벼슬이라도 되는 듯 배를 가리기는커녕 일부러 몸에 착 붙는 옷을 입고는 나 ‘임신’했다고 자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배는 내 밀고 양 어깨는 뒤로 넘기며 거만한 모양새로 보이기도 하니, 안면이 있는 사람에겐 축하한다고 말을 건네기도 하지만 불룩 나온 배가 쳐다보기도 민망할 때가 많다. 


 첫애나 둘째 아이 때도 폭이 넓은 홈드레스 덕분이었는지 나 자신도 배가 그렇게 부른 것 같지 않다 싶었는데 딸들을 순산했다. 큰아이 때는 집에서의 진통은 모르겠고 남편과 같이 병원엘 갔다. 분만실인 온돌방으로 안내가 되었다. 진통이 시작되는지 배가 싸르르르 아프다가 멎고, 또 그렇게 싸르르르 아파오기를 잦아지니 너무 아프기도 이러다가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는 게 아닐까 두려워 옆에 앉아 있던 남편의 손을 꼭 잡든지, 팔을 뒤틀든지 해야 했다. 


 그렇게 진통하던 순간은 기억이 나는데 정작 애를 낳던 그 ‘극적인 순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중에 아기를 낳고 시간 계산을 해 보니 거의 12시간 가깝게 진통을 한 거였다. 첫째 아이 때 그랬기에 둘째 아이도 그 시간 정도는 지나야 하리라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둘째 아이 때는 마침 캐나다에 계셨던 큰아주버님이 나와 계시기도 했고 첫아이를 딸을 낳고 보니 조금 불안하기도 해서 예정일이 가까워 오면서는 매일같이 목욕을 하고 진통이 오나 기다리게 되었다. 진통이 시작되는 것 같다 싶으면 나 혼자 슬그머니 병원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것은 으레 아들이려니 하다가 딸을 낳았기에 은근히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밤 10시가 넘어서 진통이 슬슬 오는 것 같았다. 첫아이 경험으로 봐서 10시간 정도로 보면 한참을 더 있어도 될 것 같았다. 배가 아프기 시작하고 아직도 몇 시간은 더 있어야 되겠다 싶기도 했지만, 그 정도쯤에서는 병원으로 가야 할 것 같았다. 아주버님이나 남편 몰래 가서 낳아야지 벼르고 있었는데 그 시각엔 남편이 집에 같이 있어 남편과 병원으로 가게 되었다. 


 병원에 들어서며 진통이 시작된 지 몇 시간이 되었다고 하니 의사가 좀 보자고 하더니, 금방 나오게 생겼다며 급하게 분만실로 옮겼다. 분만대에 올라가 몇 번 힘을 준 것 같은데 “딸입니다” 하는 간호사의 음성이 들렸다. 난 순간 쪼금 서운하고 허전한 것 같긴 했는데 이렇게 아파서 낳은 딸이 참 소중하다 싶었다. 


 작은 딸을 낳고 회복실에 누워 있는데 아주버님이 큰딸아이를 데리고 왔다. 엄마가 집에 없는 사이 아이는 울기도 했는지 얼굴은 땀이 배어 얼룩져 있었고 옷도 더렵혀져 있었다. 엄마한테 오면서 들고 온 책을 내게 내밀며 읽어 달라고 보채듯 했다. 그랬던 큰딸이 배가 나보다 더 부른 것 같더니 진통이 시작되어 병원에 있다고 전화가 온 것이다. 그 후 두 딸들을 어떻게 키웠는지 생각나는 것도 별로 없는데 할머니가 되겠네 싶은데도 덤덤했다.


 병원엔 열일 제쳐놓고 가야하니 오늘 스케줄을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릿속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난 분만실엔 들어가지 못하는 줄 알고 아기를 낳거든 가야지 하다가 전화를 걸어 물어 보았더니 분만실에 들어 갈 수가 있다고 하니 아기를 낳기 전에 ‘장미꽃’이라도 사 들고 가야 할 것 같아 서둘렀다. 


 60평생을 살면서 누구에겐가 주려 장미꽃을 사 본 기억은 없는 것 같다. 꽃이 비싸기도, 그럴만한 일이 없기도 했나보다. 그런데 첫 번째 맞는 ‘손녀’한테는 화사한 꽃다발이라도 안고 가서 맞이하고 싶었다. 이미 딸임을 알고 있는 상황이어서 딸일까 아들일까 설레며 기다리는 마음은 없었다.


 작은 딸과 집에서 가까운 슈퍼마켓엘 들르니 살만한 꽃이 없어 일단은 그냥 가기로 했다. 병원에 당도해서 난 예전의 나를 상기하며 딸아이는 잔뜩 아프다고 고통을 호소하며 세환이(사위)의 손과 팔을 힘차게 쥐고 있겠지 상상하며 분만실에 들어서니, 아이의 심장박동 소리는 힘차게 들리는데 딸아이는 ‘무통분만’ 주사를 맞았다는데 별다른 진통도 없이 일반 환자처럼 편하게 누워 있었다.


 무통분만, 우리 때는 들어 보지도 못했던 말인 것 같다. 예전엔 자연분만을 하는 여자들은 극히 정상이고 제왕절개 수술을 하는 여자들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 딸아이를 보니 통증도 없이 이렇게 아기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하고, 그래도 세상에 새 생명이 탄생 하는 것인데 진통은 겪으면서 아이를 낳는 게 더 나은 것 아냐 하다가도, 아프지 않고도 아기를 낳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굳이 고생을 하면서 아기를 낳겠다 할 여자가 있을까 잡다한 생각들이 오갔다. 


 우리가 그곳에 당도하고 나서도 간호사 의사가 번갈아 드나들며 두 시간이 되어 오는데 바로 낳을 기미가 없어 우린 나중에 다시 오기로 하고 그곳을 나왔다. 난 우선 꽃이든 꽃 화분이라도 사야 할 것 같아 다시 다른 슈퍼마켓엘 들렀다. 마침 마음에 드는 화분이 있어 똑 같은 것으로 두 개를 샀다. 


 꽃 이름이 ‘azalea’는 한국말로 진달래였다. 꽃빛깔이 영락없는 진달래로 이곳에서는 산에서는 볼 수 없으나 꽃집에서도 드물게 만날 수 있는 이 꽃은 어릴 적 소풍 길에 보았던 그 꽃을 만난 듯 반갑기 이를 데 없었다. 


 아기는 오후 다섯 시에 낳았다고 한다. 일을 끝내고 남편과 같이 꽃 화분을 들고 아밀리아와의 첫상봉을 하기 위해 회복실로 들어섰다. 난 아기와 같이 꽃 화분을 놓고 기념사진이라도 찍고 싶었다. 그래서 아이가 커가며 그 순간을 상기하며 아이와 많은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남편은 꽃가루 때문에 아이에게 좋지 않을 수도 있다며 그냥 지켜 보기만하라고 애한테 당부하듯 해서 설레고 부풀었던 마음을 접어야 했다. 


 딸아이가 안고 있는 아기는 마치도 ‘예쁜 인형’처럼 그렇게 보였다. 딸들을 낳았을 때의 모습은 기억도 희미하니 손녀의 모습만큼은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작은 인형은 얼굴을 찡그리기도 미소 짓기도 입을 삐죽이며 우는 시늉을 하기도 꿈을 꾸는 듯 얼굴표정이 바뀐다. 


 얼굴도 자그마한 아기, 예쁘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아기, 점차 커가면서 모녀의 재잘거림이, 개 세 마리까지 데리고 아밀리아가 환하게 웃으며 그들의 즐거운 나들이가 눈에 보이는 듯하다. 


 딸아이가 퇴원을 하면서 병원에서 찍은 사진을 갖고 왔다. 그 사진들을 보는 동안 ‘바구니 안에 담긴’ 살아 있는 인형을 보며 감탄이 절로 나왔다. 우리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 그런 사진이 나올 리 없었다. 평생 간직하게 될 소중하고 값진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딸아이들을 키울 때는 직장생활도 하지 않았건만 살림하며 아이들 키우는 것이 너무 힘이 들었다. 그랬기에 예쁜지도 모르고 키운 것 같다. 게다가 난 아이와 ‘같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해 본 것이 거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딸아이는 가급적이면 모녀가 함께 할 수 있는 것을 고려한다.


 나를 실현해 보고 싶은 욕구가 많은 것보다는, 너무 욕심내지 않고 즐겁게, 또 즐기며 사는 딸이 키워 낼 손녀는, 앞으로 아밀리아가 결혼을 할 때쯤이면 어떤 모습으로 성장해 있을까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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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7
심통이와 화돌이 부부의 애정표현

 

 때로는 부부 사이에 평소에 하지 않던 지나친 ‘애정표현’을 할 것 같으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보다는 TV를 많이 본 모양이라든지, 닭살 돋는다, 불편하니 평소에 하던 대로 하라고 한다. 그렇다. 예전에 우리 부모 세대만해도 애정표현은 물론이요, 남들은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사는지 궁금하다고도 했다. 남들은 어떻게 사는지, 애정표현을 어떻게 하는지 흉내도 내 볼 수 없었다면, 오늘날은 대중매체를 통해 남들은 어떻게 하고 사는지 너무도 잘 알고 남음에도 어디까지나 그건 남들이고 나, 우린 흉내조차도 내 보기 쑥스러우니 말해 무엇 할까. 


 언젠가 TV를 보다보니 첫 키스를 언제, 어디서 했느냐, 프러포즈는 누가 먼저, 어디에서 했느냐, 남편은 무슨 색깔을, 어떤 꽃을 좋아 하느냐는 등의 남들 살아가는 모습의 일부분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 부부는 어떻게 사랑을 하며 애정표현은 어떻게 하며 살아 왔나 더듬어 본다. 그러고 보니 난 애교는 고사하고 남편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게다가 남편이 무슨 색깔, 어떤 꽃을 좋아 하는지도 모르고 살아 왔는가 보다. 


 지난번 대선 후보 부인들 인터뷰 중에서 남편에게 하는 나만의 애정표현이 있다, 없다, 하는 질문 중에 있다고 하는 후보 부인을 보며 나 나름대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난 나만의 애정표현을 남편에게 해봤나, 내가 남편에게 사랑한다, 사랑하자고 할 때는 어떻게 했었나 등등을 곰곰 되짚어 봐도 없네, 하지 못하고 살아 왔네 싶은 생각이 먼저 들었다. 


 참 무미건조하게 살았나? 만약 내가 다른 남자를 만났다면 좀 더 재미있고 진하게 애정표현도 해 보며 살았을까 생각도 해 보지만 역시 그런 면에서는 별로 다르지 않겠나 싶은 생각이 든다. 프러포즈를 받은 장소는 기억이 나는데 뭐라고 했는지도 모르겠고 첫 키스는 어디서 했는지 어떤 감정이었는지도 희미하다. 


 결혼 전에 볼 수 있었던 사랑하는 눈빛 질투하는 듯한 표정은 생각나는 것이 있다. 6년 연애하고 결혼생활 40년이 되고 보니 세월만큼 애정은 깊어지는가 싶은데, 연륜만큼 애정표현은 엷어지기만 하는 것 같다. 대학교 3학년인지 4학년 때였는지 둘이 만나기로 했는데 그날은 내가 약속 시간보다 더 늦게 나갔던가 보다. 그즈음 약속을 하면 주로 남편이 늦곤 했는데 그 날은 내가 더 늦었기에 그런 일이 있었지 않았나 싶다.


 그즈음 우리 과원 중에 강의시간에 제대로 나올 수 없어 친구가 대신 나오는 남학생이 있었다. 그런데 그가 오면 주로 내 뒤에 앉아 있다가 내게 시나 편지를 써서 주기도 했는데 그날도 그 남자로 인해 남편과의 약속시간에 늦어 진 것 같았다. 남편은 내게서 자초지종을 다 듣기도 전에 구둣발로 내 정강이를 차는 바람에 아파서 한참을 절절 맸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마주 바라보고 앉는 것이 아니고 옆에 나란히 같이 앉는다고 하더니 우리도 언제 그렇게 다정하게 앉아 본 적이 있는가 싶은데 얼핏 데이트 하던 순간이 떠오른다. 그날은 약간 궂은 날씨였는데 핑크색 원피스를 입고 만나기로 한 낙원상가의 맥주 집으로 갔다. 그날은 내 모습이 예쁘게 보이기도 했는지 뒤미처 들어 온 남편의 호기심에 찬 즐거움이 가득했던 그 눈빛이 잊혀 지지 않는다.


 그래도 이민을 오기 전엔 우리는 다정한 부부, 사랑하는 부부, 행복한 부부, 애정표현도 제법 할 줄 안다 싶었건만 이민 생활의 해를 더할수록 새삼 돌아보니 우리도 언제 그렇게 살았던 적이 있었는가 싶다.


 이민을 오기 전엔 휴일이나 주말 쉬는 날이면 식구들이 늦게까지 뒹굴며 TV를 보다가 다시 먹을 거라도 준비하려 일어서면 그냥 옆에 있으라며 붙잡아 앉히기도, 밥을 먹을 때는 음식을 먹여 달라고 어린애 보채듯 하기도, 소파에 앉으면 으레 두 다리를 내 무릎에 올려 놓기가 예사요, 내 무릎을 베고 누워 머리를 안마하듯 긁어 달라고 하기도 했다. 그런 모두가 애정표현의 일환이요, 또 그런 식으로라도 애정을 확인하며 또 유지시켜 나가고 싶기도 했나보다. 


 그런데 내게 더 잘해 주고 싶어 이민을 왔다던 남자가 우리가 언제 그렇게도 살아 본적이 있었느냐 싶게 멀게만 느껴 질 때가 많다. 둘이 같이 잠자리에 들 때엔 팔베개를 하고 있다가 잠이 들면서 편한 자세로 잠들기도 하였다. 자면서 팔베개는 하지 않아도 밤새 뒤척이며 다리를 올려놓거나 다리로 허리를 휘감듯 해도 편하게 잠만 잘 잤다. 그런데 이젠 나이 탓인가 잠결에 다리를 잠시만 올려놔도 무거워서 그 상태로는 잘 수 없어 치우라고 하면 예전엔 다리를 올려놔도 잠만 잘 자더니 이젠 애정이 식어 버린 것 아니냐며 허전한 모양이다.


 ‘심통이’는 교제하던 시절 남편이 내게 붙여준 애칭이다. 대학교 3학 년 때 만나서 결혼까지 하기엔 6년이란 시간이 소요되었다. 대학을 졸업 하고 보니 나는 결혼할 나이가 되었으나 남편은 군대도 갔다 와야 하고 직장 문제도 해결해야했으니, 난 프러포즈도 받지 못하고 있다 보니 그 사이 맞선을 열 한 번이나 보기도 했다. 그래도 우린 연분이었는지 결혼을 했다. 


 6년 교제하는 사이, 내가 변덕이 심해서 그랬을까, 아니면 남편이 나 외에 다른 여자들한테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아 그랬을까, 과원들이 과 단합대회나 답사를 간다든지 하면 다른 남학생들은 가만히 있는데, 이 남자만 여학생들 앞에 나서서 분위기를 잡아 가려는 그런 태도가 제일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우리 3학년 때는 신입생으로 들어 온 어떤 여학생이 남편을 노골적으로 따라 다니기도 했지만 난 그런저런 문제로 한 번도 다툰 것 같지 않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는 내게 그 여학생을 만나서 따끔하게 충고라도 한 마디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나를 부추기기도 했다. 하지만 난 그런 문제로 질투 한 번 하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은 여자가 나설 문제가 아니고, 남자가 그녀든 나든 선택할 문제라 싶었고, 내가 매달리는 그런 교제는 하고 싶지 않았기에 후배 여학생 만나는 문제는 생각해 본 바도 없다.


 그렇긴 했어도 쓸데없이 여자들 앞에 나서는 것이 못마땅하다 싶으면 그런데서 내 마음이 불편해지니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래도 견딜 수 없다 싶으면 온다간다 말 할 필요도 없이 뽀로통해서 집으로 와 버리곤 했다. 그런 상황이 몇 번 반복되다보니 심통이란 별명도 그래서 붙여 진 것이 아닐까 싶다. 


 열렬하게 사랑하던 부부들도 세월 따라 변하기도 사랑이 퇴색되어 가기도 하지만 젊은이들의 애정표현방식이 있듯 나이든 우리세대야 애정표현을 굳이 하지 않아도, 연륜만큼 서로를 ‘소중한 존재’로 알기에 부디 아프지만 말고 살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더 크게 자리 잡는다. 잘 모르긴 해도 교제하던 시절엔 심통이가 불편했던 마음보다는, 화돌이(남편 별명) 마음고생이 더 컸을 텐데, 살면서도 내게 크게 잘못하지도 않았건만 심통으로 평생 굳어졌는지, 사랑한다 말도 못하면서 쑥스러워 ‘여보’라고 다정다감하게 불러 보지도 못함은 못내 아쉬움으로 남을 것 같다. 


 화돌이는 대학 4학년 때 과원들끼리 답사를 갔을 때 식사 당번은 나와 현숙이가, 불은 남편이 봐 주었기에 그때 붙여진 별명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심통이와 화돌이는 천생연분이기도 했나보다. 결혼 전에 나를 심통나게 했던 부분들이나, 결혼 후에 작은 시누이로 인해 살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하는 심적인 갈등을 겪기도 할 때 문득 깨달아 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 남편의 자식인 딸을 둘씩이나 낳고 살다가 헤어진다면, 그 후 어떤 삶이 살아질지 알 수 없기도 하지만, 딸들을 위해서나 나 자신을 위해서도 자식까지 낳고 사는 사람과 ‘평생’ 사는 길이 그래도 최선의 삶을 사는 것이리라 싶었다. 그랬기에 그 후론 살면서 불만이 좀 있긴 했어도 별다른 갈등 없이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 


 심통이는 애정표현은 잘 하지 못해도 아내의 자리는 확실하게 지켰기에 오늘 우리 가족이 있네 싶어 바른 판단해 준 나 자신에게 칭찬이라도 해 주고 싶다. 그리고 지금껏 남편, 아빠의 자리 지켜줘서 고맙고 ‘화부의 책무’를 다 하리라 성의를 다 했음을 알기에 새삼 고마운 마음 잔잔하게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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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1
돌아보는 여고시절 3년

 

친구는 끼리끼리


 고등학교를 서울로 진학을 하고 보니 공부도 그렇지만 학교생활도 긴장이 되었는데 게다가 친구 문제도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나 같이 지방에서 올라 온 아이들이나 타교에서 온 아이들도 별로 없었고, 같은 중학교에서 ‘그대로’ 올라 온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친구관계도 이미 거의 형성이 되어 있어 서울도 아닌 지방에서 진학한 나 같은 아이는 ‘외톨이’가 되기 십상이었다. 


 처음 얼마동안은 촌뜨기인 내가 서울생활에 적응하는 것도 두려운데 친구관계도 낯설어 그것도 내심으론 작은 불안이었다. 그런 와중에 내게 관심을 가져 주는 몇몇의 아이들이 있긴 했지만, 나 역시 사귀고 싶은 친구가 있었다. 그녀도 내게 관심이 있어 우린 서로 친해 보고 싶었으나, 그녀의 다른 두 친구는 은근히 나와 친해지는 것을 경계하는 눈치까지 보였다. 그들은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지간으로 지내왔으니 새삼 이방인인 내가 달가울 리 없었을 것이다. 


 분위기가 그렇다보니 내가 정작 친해 보고 싶은 친구는 단짝으로 사귈 수 도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 넷이서 친구하기를 원치 않는 눈치였다. 나도 다른 두 아이들과는 성격이 맞지 않아 별로 사귀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니 그녀와의 친구관계도 적극적으로 만들어 가려 애쓰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내가 사귀고 싶어 했던 친구는 결혼을 일찍 하기도 해서 난 그녀의 신혼집까지 가보기도 했는데 더 긴밀한 사이로 만날 수 없었기에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그 친구는 늘 아쉬운 부분으로 남는다. 


 친한 친구사이는 반이 서로 바뀌어도 쉬는 시간이나 하교 길에는 잠깐씩이라도 보려 친구가 있는 반을 찾아다니기도 한다. 고 2때는 병란이가 옆 반이기도, 쉬는 시간이면 찾아와 주어 지금 생각해도 고맙다. 그 친구와는 우연히 대학을 들어가서도 만날 수 있어 병란이가 결혼을 한 후에도 내가 몇 번 찾아 가기도 했었는데 어떻게 연락이 두절되었는지 그 후 소식조차 듣지 못하고 있다.


 하교 시간이 되면 친한 친구끼리 둘이서, 아니면 삼삼오오 재잘거리며 교실을 나서니 그 순간이 난 거의 언제나 어설프고 신경이 쓰이는 시간이었다. 이제 학교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갈 시간이 되었다고 버스 정류장까지도 누구와 같이 갈까 찾아다닐 친구도 별로 없었다. 확실하게 친한 친구도 만들어 놓지 못하고 고 3을 맞게 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반에서 가깝게 지낼 수 있는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점심을 가져 오면 으레 반은 김까지 싸서 내 몫이라고 내놓던 친구가 언제부터인지 태도가 싹 바뀌어 찬바람이 휙휙 도는 것이었다. 그런 것을 참아내며 한 달 내내 얼굴을 대하기란 쉽지도 않고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때도 고 3은 학교에서 과외공부를 했었는데 난 그 친구를 보는 것이 심적으로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담임선생님께 학교에 나오지 않고 시골집에 내려가서 절에 가서 공부해도 좋다는 허락을 얻어 시골집으로 내려갔다.

 

왕따는 예전에도 있었네.


 돌아보면 ‘왕따’는 오늘날에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그만큼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대부분 친구도 끼리끼리 만나기도 하지만, 그 끼리끼리의 부류에 들면 그나마 학교생활도 덜 외롭고 학교생활을 하기가 수월해진다. 그러나 같은 반에서 누구와도 가깝게 지낼 수 없다면 누가 따 돌려서가 아니고, 스스로 ‘소외’되어 학교생활하기가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우리 세대만해도 같이 놀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났지만, 오늘날은 나와 우리가 아닌 타인과는 친하게 지내는 것은 말고라도 ‘괴롭힘’을 주니 그것이 학교 문제를 넘어서서 점차 사회문제로까지 퍼져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내가 고 3때 그 친구와도 잘 지내고 다른 친구들과도 잘 어울릴 수 있었다면 아마 난 서울에 남아 과외공부를 하며 학교에 다녔을 것이다. 어쨌든 난 친구와의 불편한 관계가 싫어 방학을 하면서 이내 시골로 내려갔다.

 

그 여름의 추억


 집에서 8킬로미터나 떨어진 엄마가 다니던 쇳두리 절에 가서 공부하기로 했다. 다행히 한동네 사는 후배가 있어 무사히 절까지 갈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저녁나절에 누구인가 자전거에 웬 자루 하나를 싣고 올라오는 것이었다. 가까이 왔을 때 보니 중학교 한해 선배 되는 남학생이었다. 그 선배도 그곳에 있으려고 왔다는 것이었다. 공부를 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요양을 하기 위해 왔었는지는 지금 생각해도 알 수 없다.


 어느 날 마루에 앉아 점심을 먹는데 그 선배는 스님과 나는 보살과 겸상을 해서 먹는다. 그런데 밥을 먹는 동안 냉수를 수도 없이 들이켜는 것이었다. 어떻게 밥을 먹는 도중에 냉수를 아마도 5,6내지는 6,7대접을 마시는가 싶었다.


 샘물은 마루에서 일어 나 댓돌을 내려서서 바로 눈에 보이는 곳에 있었다. 하지만 밥을 먹기 전에 미리 물까지 떠다 놓건만, 그 선배의 ‘또 물’ 주문에 보살님은 몇 번씩 일어나야 했는데도 갈증이 채워지지 않는지 선배는 미안하고 머쓱해서 물 대접을 내어 미는 손길이 마치도 자라 목 움츠러드는 그런 모습이었다.


 난난 너무 우스워 도대체 웃음이 멈추지를 않아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난 지금껏 딸꾹질 때문에 애를 먹는 경우는 봤어도 웃음이 멈추지 않아 어찌되었다는 얘기는 들어 본 기억도 없는 것 같은데, 배를 쥐고 데굴데굴 구르듯 웃어 보기는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왜 그렇게 냉수를 많이 들이켰을까.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기만 하다. 바람 한 점 없는 더운 날씨에 매미 풀벌레 소리만이 정적을 울리는데, 공부하다가 잠이 오든지 아니면 좀 쉬려 절 뒤로 조금 올라가면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에 넓은 바위가 있어 이따금씩 올라가 발도 씻고 쉬다가 오곤 하였다. 


 어느 날인가 난 양산을 받치고 발은 물에 담그고 앉아 있었는데 그 선배는 옆에서 애꿎은 검정 고무신만 빡빡 닦고 있었다. 아마도 내게 좋아 한다는 말을 꺼내기 어려워 그리 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난 남녀 공학을 다닌 덕분인지 누구를 만나든 선이 분명하게 그어진다. 


 나는 그에게 선배 이상의 감정은 느낄 수 없었다. 새삼 남자가 검정 고무신을 신었던 시절이면 분명 여자들도 검정 고무신 아니면 흰 고무신을 신었을 터인데 난 무엇을 신었었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여름의 보름을 그렇게 보내고 서울에 와서 몇 번 만난 기억은 있는데 지금은 까마득한 옛날 얘기이건만 바람에 실려 오나 여름만 되면 생각이 난다.


 아침에 일어나 댓돌을 내려서면 상큼한 풀냄새와 싱그러운 공기 하루 종일 고요로움 속에 아침저녁 예불 드리는 소리와, 밤새도록 울어대던 소쩍새의 울음소리는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는 듯하다.


 흔히들 꿈 많던 ‘여고시절’이라고들 하는데 난 사실 고등학교 3년을 돌아보면 꿈은커녕 추억도 많지 않고 참 밋밋하게 보냈네 싶긴 해도, 고등학교 때 만난 몇몇의 친구들은 지금껏 연락이 되는 친구가 있어 그나마 참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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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9
그리웠던 초딩이들과의 만남

 

 10년 만에 서울을 나가게 되었다. 그동안은 물론이고 지난 번 서울을 나갔을 때에도 친구들을 만나지 못했다. 오랫동안 지니고 있었던 전화수첩을 잃어버려 안타깝게도 만나지 못하는 친구가 몇 된다. 이번엔 ‘초등학교’ 동창들은 ‘꼭’ 만나고 들어오리라 작정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동창 중 한 명이 그의 누나가 토론토에 살고 있어 어렵사리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그가 시골에 살고 있기는 하지만 동창들의 전화번호는 알고 있을 것 같아 몇 번의 시도 끝에 그와 통화를 하고 보니 드디어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 도착해서 몇몇 동창들과 통화를 하게 되었다. 내가 서울에 도착하기를 6월 초 수요일이었는데, 마침 토요일 날 동창들 모임이 시골에서 있다고 하여 서울에서 갈 수 있는 몇 명과 지하철역에서 만나 같이 가기로 했다. 


 약속한 장소에 도착하니 그들은 이미 나와 있었다. 남학생 두 명은 이름을 대니 기억은 나건만 얼굴은 생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중학교 졸업 이후 처음 보는 얼굴들이니 거의 50년 가까이 되었으니 얼굴을 기억하지 못함은 당연했다. 


 여자가 나까지 네 명, 남자가 네 명, 같은 차를 타고 약속 장소로 달리기 시작했다. 50년이란 ‘세월의 강’을 넘어 만났건만 어제 만났던 듯 거리감도 느낄 수 없었고 “아 정말 좋다, 반갑다. 너무 좋다”는 말밖엔 할 수가 없었다. 


 차가 출발을 하자 운전대를 잡은 호경이가 평소 즐겨 들었던 흘러간 가요를 트니 다시 또 옛날로 돌아간 듯 가슴속에서 달콤한 향수까지 감미롭기만 했다. 


 만남의 장소로 향하는 도중 전화가 몇 번 왔다. 만나기로 한 장소까지 가는 동안 장소를 몰라 묻고 답하는 내용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얘기의 꽃을 피우는 동안 어느 사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곳은 재영이가 전원생활을 하고자 몇 년 전부터 내려가 집을 짓고 텃밭을 가꾸며 아내와 아이들은 서울에 있고 주로 그가 혼자 지내고 있다고 한다. 길옆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들어가는 입구 한 옆은 도랑을 끼고 있는 텃밭엔 각종 꽃을, 길 사이 텃밭엔 채소를 종류 별로 심어 놓고 가장자리엔 꽃밭으로 가꾸어져 있었고 수돗가엔 뽕나무까지 심어져 있었다. 그의 말을 빌면 꽃을 좋아해서 꽃을 심기도 했지만, 여러 종류를 심었음은 꽃마다 피고 지는 시기가 달라 그렇게 해놓으니 사계절 꽃을 볼 수 있어 좋다고 했다. 


 그날 모이는 인원은 30명 가량은 된다는데 친구들의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동네 부녀회원 두 분이서 수돗가에서 음식을 장만하고 있었다. 가마솥에 여러 가지 잡곡을 넣고 장작을 때서 밥을, 풋고추 상추 깻잎을 소쿠리에 담고 있었다. 난 그런 광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유년시절 내 고향집 그곳에 가 있었다. 


 미리 와서 있던 몇몇의 친구들과 서로 인사를 하고 있는 사이, 점심준비를 하는 동안 관광버스를 타고 여주 강에 건설해 놓은 보를 관광하러 간다며 어서 차를 타라고 부추겼다. 그곳에 모인 여러 명의 동창들이 대기하고 있던 관광버스에 올라탔다. 그 관광버스는 OB맥주 전용차량으로 종훈 이가 배려를 했다고 한다. 


 버스가 아닌 말 그대로 ‘관광버스’에 올라 타 출발을 하자 전문 관광버스처럼 이미 손님들의 취향에 맞게 준비를 했다는 듯 뽕짝이 흘러나오자 다시 또 좋다 너무 좋다 싶은 생각이 샘물처럼 솟구쳤다. 이민사회에선 느낄 수 없었던 흥취, 늘 갈망하던 가슴속의 흥겨움이 넘쳐흘렀다. 차가 출발을 하자 이내 드링크, 과일 떡  등 입을 즐겁게 해 줄 ‘맛난이’들이 이미 누구인가 준비하며 즐거웠을 그 몫까지 얹어 전해지고 있었다. 


 여주 강을 향해 가는 내내 바깥 풍경은 우리의 고향 내 고국의 고향 산천은 언제나 그곳에 그렇게 있었다는 듯 감회가 새롭기만 했다. 


 전망대가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보를 건너기 시작했다. 주차장 보 옆으로는 노란 참외가 한 바구니씩 소담하게 담겨 있고 옛날 우리네가 흔히 먹었던 술 빵이 양은솥에 올려져 김을 내며 우리를 유혹했다. 한 친구가 얘기했다. 4대강에 대해 찬반 여론도 많지만 보 주변 사람들은 많은 혜택을 입고 있어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모른다고 했다. 


 거의가 그렇듯이 득을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손해를 보는, 절대적인 피해를 보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그런 중에 희생양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지만 그것이야말로 누가 알고 장담할 수 있더란 말인가. 


 여주 강 주변을 초딩이들과 관광하듯 한바퀴 돌고 만남의 장소로 향하던 중 윤중 이가 잠시 차를 세우더니 길가에서 팔고 있던 참외를 한 박스 샀다. 그것은 친구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그냥 지나칠 수 없었나보다. 난 윤중이의 그런 마음씀이 고맙기도 하거니와 뭔가 나 나름대로 간직하고도 싶어 즐겨 듣는 테이프나 CD라도 달라고 해 받아가지고 왔다. 


 지금도 그 애가 준 CD를 듣노라면 그들을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 자주 볼 수 없음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친구들과의 짧은 관광? 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어느 사이 우리를 위한 점심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반찬은 김치, 상추, 오이, 풋고추, 삼겹살에 오리고기, 햄 등 골고루 준비를 해준 재영이가 새삼 고맙기만 했다. 연이어 드링크도 종류별로 많이도 준비를 해 동창들의 인심에 넉넉한 마음까지 더없이 푸근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그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있듯 내 가슴 속의 그들도 영원할 것이다. 친구들 모두 사는 동안 건강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해진다.


 어느덧 한 해의 끝자락에 와 있다. 나름대로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모임 몇 개씩은 있기도 하겠지만, 만나고 싶어, 가고 싶어 가는, 아니면 형식적으로 얼굴이나 내미는 등 모임의 성격에 따라 내 마음의 비중도 달라진다. 고국에서는 초등학교 동창들 모임은 매달 있다던데, 이렇게 멀리 있어 만날 수 없음에 이 계절엔 그들이 참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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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패밀리 파트지요

 

 한국에서는 밖에 나가게 되면 엄마나 할머니가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거나, 또 돌보아 주는 구나 보여 질 때가 많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부모가 아이들을 데리고 밖에 나와 다니는 모습보다는 강아지나 개들을 데리고 나와 산책 하는 것을 더 많이 보곤 한다. 


 개들을 이렇게 키우기 전에는 개에 대해서 별로 생각지도 않았기에 몰랐겠지만 강아지나 개는 얼굴이 대부분 비슷하겠지 하고 생각했었는데, 요즈음 주의 깊게 살펴보니 사람 얼굴만큼이나 다르네 싶은데, 개의 종류도 많고, 사람마다 취향이 달라서인지 자기가 좋아하는 종자가 다르다는 것 또한 재미있기도 하다. 


 게다가 개도 주인을 닮는다더니 주인을 보고 개의 모습을 보면 어쩌면 저렇게 생김이나 분위기가 비슷하게 닮았을까 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것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내 생김과 비슷한 동물을 찾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언젠가는 개와 같이 산책하는 모습을 살펴보니 걸음걸이까지 주인의 모습과 비슷함을 보고는 너무 재미있게 지켜보기도 하였다. 


 어느 날 공원에 개 세 마리를 데리고 나온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개를 운동 시키듯, 훈련시키듯 같이 놀고 있는 듯 보여 졌다. 


 주인이 공을 힘을 다해 던지니 세 마리가 먼저 잡으려고 막 달리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셋 중에 한 놈이 입에 물고 달려오게 마련이었다. 몇 번씩 반복되는 놀이를 보며 아이들과 똑 같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이들도 성격이 모두 달라 매사에 적극적이고 활동적이며 누구에게든 떨어지기 싫어 열심히 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적당히 꾀나 부리고 하다 말다 하기도 또 아예 해 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아이들도 있다. 가만히 살펴보니 공을 던질 때마다 열심히 달려가는 놈은 늘 한 두 놈이고, 한 놈은 처음엔 조금 달리는 듯하다가 저보다 앞서 가는 한두 놈이 있음을 알고는 ‘나 안 해’하고 아예 포기하고 달려 보지도 않고 주저 물러앉는 놈은 번번이 그놈이지 싶으니, 어쩌면 저렇게 아이들과 같을까 싶어 재미있게 지켜보았었다.


 어느 날 지하철을 탔다. 그런데 웬 여자가 까맣고 커다란 개를 한 마리 데리고 탔다. 탈 때부터 보니 침낭을 하나 들고 비닐봉지를 들고 탔다. 타자마자 좌석이 2개 붙어 있는 곳에 침낭을 깔아 주니 개가 얼른 올라가서 턱을 괴고 앉는 것이었다. 개는 크게 생겼어도 얼마나 눈이 선하게 생겼는지 연실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몇 번씩 개와 시선을 주고받더니 비닐봉지에서 우리네 빈대떡 같이 생긴 것을 꺼내어 한 두 입 먹더니 개에게 주는 것이었다. 개는 넙죽넙죽 받아먹으며 맛이 있는 듯 입맛까지 다셔가며 다 먹고는 주인을 쳐다보기도 또 밖을 보기도 한다. 


 몇 정거장을 가더니 내릴 때가 되었는지 일어서며 침낭을 다시 걷어 안고 나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단지 말만 할 수 없다는 것 뿐 사람과 무엇이 다른가 싶어 내릴 때까지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안녕하고 손이라도 흔들어 주며 눈인사라도 하고 싶었건만 아쉽게도 바라보기만 했다. 


 자식은 크면 서서히 부모 곁을 떠나게 되지만 개는 한 번 키우기 시작하면 개가 먼저 내 곁을 떠나는 일은 없다. 개가 생명을 다하는 날까지 동고동락을 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떠나가는 자식보다 늘 내 곁에 머물러 주고 함께 해 주는 개에게 애정이 더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기에 언젠가 타임지에 보도되었던 재산상속을 개에게 하였다는 내용을 보며 그동안 그들과 얼마나 많은 대화를 하며 위로를 받으며 살았을까 싶기도, 그들을 두고 먼저 가야하는 슬프고도 아픈 마음이 느껴져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가족이란 자칫 고맙고 위로 받기보다는 상처 받기 쉽고 그 상처 또한 오래도록 남아 있기 십상인데, 이기주의가 팽배하다는 이 사회에서는 이미 애완견은 자식 이상일 수도 있는데, 한국에서도 애완견을 키우는 인구가 천 만을 넘어서고 있으며, 요즈음 젊은이들은 아예 결혼도 않고 애완견, 반려동물하고만 사는 이들도 많아 가족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게 된다. 


 우리 세대만 해도 핵가족, 즉 부부와 미혼자녀만으로 이루어진 가족이 많았는데, 요즈음은 2인 가구에서 나 홀로 족이 늘어나는 추세이다. 그러니 결혼도 않고, 못하고 사는 사람이 많아지고, 설령 결혼을 했다 해도 자식을 낳지 않고 사는 이들도 많아지니 앞으로는 애완동물과 함께 사는 사람이 더 늘어날 것이다. 


 그나마 애완동물하고 같이 사는 사람들은 보기에도 그렇게 외롭거나 쓸쓸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평생 가족도 가져 보지 못하고, 혼자 살다가 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많아질테니 저출산국가에서 몇 십 년 후엔 한국이란 나라가 아예 없어질 것이란 섬뜩한 보도가 나오기도 한다. 


 가게에 자주 오는 손님이 있다. 그는 개 두 마리와 같이 살고 있는데, 개들이 슬픈 얼굴을 하고 있어 그에게 그렇게 얘기를 했더니, 자기가 그렇게 예뻐하는데도 왜 그런지 모르겠다며 데리고 들어 온 개들을 보듬듯이 하고 나간다. 


 나는 그가 나서는 모습을 볼 때면 가슴이 따뜻하면서도 싸한 아픔이 동시에 느껴진다. 그것은 반려견은 키우던 사람이 마지막을 거두어 주겠지만, 가족도 없이 반려견마저 보내고 난 다음에 어떤 모습으로 죽음을 맞고, 보내게 되려나 난 그것이 늘 마음이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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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4
속사랑 겉 사랑

 
 누구인가 사랑을 하게 되면 앉으나 서나 다른 사람과 같이 있더라도 머릿속은 온통 사랑하는 사람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안다. 몸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고 사랑도 함께 하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을 때가 너무 많다. 


 그런 것을 알면서도 때로는 부모가 되어 자식이 원치 않는 짝을 만나 사랑을 해서 결혼을 하겠다 하면, 보지 않고 떨어져 몸이 멀어지면 잊게 되어 있다면서 강제로 떼어 놓는, 이를테면 생이별을 시키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러나 몸이 멀리 있다 하여 사랑하는 마음, 사랑하는 감정까지 멀어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떨어져 있다 보니 만날 수 없어 마음에서는 이미 반 체념을 하게 되어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만나고 싶은 마음은 어느 만큼은 자제는 할 수 있으니, 본인 스스로가 상대방을 어느 만큼 사랑했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냥 잊고 싶고 떨쳐 버리려 해도 이미 가슴속을 가득 채우고 떠나지 않으면서 ‘보고 싶은’ 그런 상태를 일컬어 사랑이라 말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몸이 떨어져 있다 하여 어느 사이 다른 남자, 다른 여자를 만날 수는 있어도, 그러다 보면 오히려 내가 누구를 더 사랑하는지 확실하게 알게 되기도 한다. 


 그런데 아무리 내가 누구를 사랑하는지, 어느 만큼 사랑하는지 안다고 해도 연인끼리, 약혼한 남녀가, 부부끼리 헤어져 살아야하는 피치 못할 사정도 너무나 많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산가족, 북에다 아내를 두고 온 남자야말로 돌아 갈 수 없는 현실 때문에 남쪽에서 다시 결혼을 해서 산다고는 하지만 북에다 두고 온 아내를 못 잊어 평생을 가슴앓이를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런 경우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나는 저 양반의 ‘껍데기’만 붙들고 살았지 속마음은 늘 북에 두고 온 아내를 잊지 못해 하고 있다며 투정을 넘어서 한이 서린 말을 듣기도 한다. 


 그런데 사람이란 한 여자 한 남자에게 만족을 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곁에다 아내를 두고, 남편과 함께 살면서도, 때로는, 혹자는 다른 여자, 실체도 없는 그 무엇, 누구인가를 눈으로 찾고, 가슴 속에서 찾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결혼을 해서 살며 권태기가 주기적으로 온다고 하는데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얘기인지 모른다. 결혼생활이 연륜을 더해 가며 늘 같은 일상생활이 지루하고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적당히 게을러진 상대에 대해서 새로움을 느낄 수 없으니 내가 도대체 무엇에 반해서 결혼을 했었나 의구심이 일기도 한다. 


 예전에 외간 남녀를 쉽게 만날 수 없었던 시절엔 아내를 두고 가슴속으로 또 다른 누구인가를 찾는다 해도 상대를 만나기가 쉽지 않았는데 오늘날은 아내 외에, 남편 외에, 여자, 남자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많다. 


 그렇다면 상대에게 순간 다른 감정, 야릇한 감정을 느꼈다 해서 그것이 다 사랑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결혼을 해서 자녀를 두고 있으면서 한 가정이란 틀을 가지고 있어 그것을 쉽게 무시하고 깨고 싶지 않기에 순간 느낀 감정, 가슴 속 싹터 오는 사랑을 함부로 내어 보이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기에 아내를 두고, 남편을 두고, 또 다른 상대를, 사랑하는 이를테면 ‘정신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도 의외로 적지 않을까 생각된다. 


 예전에 남자들이나 아내를 두고 바람을 피우거나 첩을 들이기도 하였지만, 시대가 변한만큼 여자들도 가슴속 일고 있는 감정을 굳이 숨기고, 삭이고 살려고만 하지 않아 부부로 살면서 형식적인, 현실적인 사랑을 ‘겉 사랑’이라 표현해 본다면, 아내 외에, 남편 외에, 나도 모르게 자꾸 다른 상대에게 마음이 끌리는 이미 빼앗겨 버리는 사랑을 난 ‘속사랑’이라 표현 해 보고 싶다. 


 어떤 친구가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알고는 추궁을 하니 난 절대 바람은 피우지 않았노라고 하더란다. 


 그 얘기를 그대로 믿는다 해도, 아내 외에, 육체적인 사랑 한 두 번 한 것이 크게 문제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아내 외에, 다른 여자가 늘 가슴 속을 차지하고 있어, 아무리 떨쳐버리려 해도, 잊고자 해도 나도 모르는 사이 바람처럼 연기처럼 이미 머릿속 가슴 속을 차지하고 있음에야 그 또한 ‘정신적인 사랑’의 범주에 속할 것이다. 


 내가 그 친구에게 부부가 함께 산다할지라도 정신적인 사랑, 정신적인 모든 것 까지 소유할 수 없는 것 아니냐고 웬만큼은 인정을 해 주고, 남편에게 마음을 좀 비워보라고 하였더니 그럼 난 남편의 ‘껍데기’만 붙들고 살아야하며, 그럼 난 무엇이냐며 분기를 참지 못해하는 그녀 역시 보는 것도 편치 않았다. 


 속사랑, 겉 사랑 다 누리며 차지하고 사는 사람의 일생이야 더 이상 바랄 것이 있을까마는, 인간이기에 그것을 누가 알 것이며, 누가 감히 나는 결백하다고 말할 것이며, 겉 사랑만 하고 산다며 가슴을 친다 해도, 속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 자신조차도 모르고 사는 사람도 많을 것이며, 아무리 속사랑을 받고 산다 해도 보고 싶은 얼굴, 사랑하는 사람도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데 그 또한 행복하다 할 수 없으니, 안타깝기는 속사랑을 받고 사는 사람이나 겉 사랑만 하고 사는 사람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한다. 


 요즈음은 사랑도 잘 하고 헤어지기도 잘 하며 사는 것 같아도, 평생 결혼 한 번 해 보지 않고 사는 사람도 많으니, 그래도 결혼이라도 해서 부부가 함께 하는 삶이라면 한 세상 헛살았다는 얘기는 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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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3
날벼락

 

 컴퓨터를 처음 배우기 시작해서 겨우 원고를 칠 수 있을 때였다. 익숙하지 않다 보니 시간이 많이 소요됨은 말할 것도 없다. 원고를 빨리 치지 못하는 것이야 신경 쓸 일이 아니다. 그러나 원고나 겨우 치는 수준이다 보니 다른 기능을 다양하게 쓸 수 없음에 당황했던 적이 몇 번 있다. 그러다 보니 그때 놀랐던 가슴이 지금까지도 컴퓨터 앞에 앉으면 놀란 가슴을 지워 버릴 수가 없을 때가 있다. 


 땀을 빼듯 겨우 몇 편 쳐 놓고 어느 날 컴퓨터를 여니 그 전에 열심히 쳐 놓았던 원고가 온 데 간 데 없었다. 놀라고 다급해져서 딸아이를 불러 확인 해 본 결과 내가 컴퓨터를 뭔가 잘못 눌러서 원고가 다 날라 갔다는 것이다. 다행히 초고는 노트에 써 놓았기에 다시 쳐서 다듬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책 1권을 내면서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 3권을 준비하면서 먼저 준비 해 두었던 글을 다른 디스켓에 옮기는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던 모양이다. 


 다른 디스켓에 저장하는 것은 익숙해졌다 싶어 원고가 날라 갈까 두려워하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저장을 하고 다시 불러오기를 했는데, 그 동안 써서 저장해 두었던 30편 가까이 되는 다른 글들도 불러오기를 해도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순간 난 가슴이 철렁하며 무슨 폭격이라도 맞은 듯 깜깜했다. 한 두 편도 아니고 30편 가까이 되는 원고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머릿속은 하얗고 손이 마구 떨리기 시작했다. 


 모두 날라가 버렸다면 초고가 공책에 있으니 원고를 다시 치면 된다지만 그동안 다듬어 왔던 내용은 기억해 낼 것 같지 않으니 보통 일이 아닌 것이다. 그 날은 너무 놀라고 가슴이 뛰어 컴퓨터를 끄고 그 다음 날 하기로 했다. 컴퓨터도 오류를 범하는 경우도 있으려나 두근거리고 놀란 가슴을 진정하기로 했다. 그 순간 딸아이는 한밤중이니 깨울 수도 없어 그 다음 날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다음 날 아이에게 그 동안의 상황 설명을 해 주고 도움을 청했다. 지난번에도 다 날아가 버린 줄만 알았던 원고를 찾아서 복원해 주었기에 이번에도 꼭 다시 찾을 수 있어 그대로 해 주리라 간절히 바라고 기대를 하면서. 


 딸아이가 디스켓을 아이가 쓰는 컴퓨터로 가져가서 해 보겠다고 들고 가더니 내가 그동안 애써 다듬어 오던 글이 모두 다 날라 가 버렸다는 것이었다. 난 순간 ‘날벼락’을 맞은 기분, 청천 벽력같은 사실에 앞이 캄캄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있나를 정신 나간 여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도 컴퓨터 어디 엔 가 남아서 몇 편쯤은 건질 수 있겠지 기대를 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보긴 했지만,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드니 어떻게, 어찌, 그런 글을 다시 쓸 수 있을까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때로는 어차피 내가 살아 온 삶이요, 시간인데 그 글을 쓸 때면 생각이 나겠지 하고 안이하게 생각을 할 때도 있는데 그것은 착각이었다. 한 두 시간도 지나기 전에 이미 다 잊어 버리는 데도, 금방 메모하는 것을 게을리 하다가 그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잃어버린 글 찾기에 모두 다 쓸려 나간 듯 허전한 가슴속을 안절부절 하며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특히 그런 경우는 음악을 들으며 운전을 하다가 그 내용에 가장 적합한 내용이다 싶어 신바람이 났다가는 그 글을 끄집어내어 다듬을 때 운전 중에 떠올랐던 절묘한 생각이란 것이 이게 아니야, 이런 것이 아니었어 싶을 때가 여러 번 있었으니, 한 두 편도 아니고 30편 가까이 되는 글이 모두 사라졌으니 이런 날벼락이 어디 있더란 말인가. 


 최소한 그 원고를 찾아 다듬어 놓았던 상태까지 복원을 하는데도 얼마나 많은 시일이 소요 될 지, 신경 소모, 집중을 해야 하려나 싶으니 허탈감과 함께 피로감이 겹겹이 밀려 왔다. 


 딸아이가 원고 찾기를 몇 번 시도 해 보다가 안 되어 친구에게 구원 요청을 하기로 했다기에 그냥 기다려 보기로 했다. 딸아이 남자 친구도 처음엔 하나도 찾을 수가 없다고 하기에 그게 도대체 어디로 다 날아가 버린 것이냐고 다시 치겠다며 잊어버리겠다고 했더니 다시 또 시도를 해 보겠다고 하더니, 다는 아니지만 어느 만큼은 복구를 할 수 있을 것이란 얘기를 듣고 몇 편이 되던 그것만으로도 참 다행이라며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디스켓이 브로큰’ 되었다기에 깨지긴 디스켓이 말짱한데 무슨 소리냐고 했더니 내용이 뒤엉켜 버렸음을 일컫는 말이었다. 디스켓 안에서 내용이 실타래 엉키듯 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하나하나 풀어서 연결이 되는 것은 복원을 할 수 있겠다고 해서 그것만으로도 머릿속 가슴속까지 개운해지는 듯 했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원고가 없어졌다 함은 ‘날벼락’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 할 길이 없다. ‘생각들의 모음’ 그것이 산산 조각이 났으니 그것을 어찌, 어디 가서 다시 다 주워 담을 수 있더란 말인가. 날벼락을 맞은 원고를 내 솜씨라면 하나도 건질 수 없었을 것인데 컴퓨터를 전공했던 딸아이 친구가 있었기에 몇 편 빼놓고는 건질 수 있어 그나마 마음을 가다듬어 끝을 낼 수 있었다. 그때 큰딸 남자 친구가 지금의 큰사위다. 


 글이란 생각들의 편린이기도, 또는 머릿속의 떠다니는 부유물 이라는 생각이 든다. 분명 떠올랐던 생각, 짧은 순간 스쳤던 단상이 때때로 목 타게, 애타게, 보일 듯 말 듯, 잡힐 듯 말 듯해서 안타까울 때가 많은데 다른 원고에 덮어쓰기를 하는 바람에 먼저 원고가 온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으니 놀라고 기가 막혀 가슴속은 빡빡 하는 통증까지 왔다.


 3권을 다듬는 과정에서 그런 일이 몇 번 있고 보니 이미 컴퓨터 앞에 앉기도 전에 가슴부터 떨리고 두려움마저 든다. 애쓰고 애써 다듬어 놓은 글이 어디로 달아나 버리지나 않을까, 숨어 버리지나 않을까, 지레 겁을 먹기도 늘 마음이 쓰인다. 때때로 잡을 듯 하던 실체, 포획물을 놓치고 났을 때의 허탈감은 다시는 그 무엇으로도 복구될 것 같지 않은 안타까움에 지칠 때도 있다. 


 그동안은 잃어버린 재물에 대해 몇 번은 안타깝고 아쉬워했던 적은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때 뿐 이내 잊어버리는데, 잃어버린 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가슴앓이를 했다. 그것은 지금도 똑 같은 제목을 주고 쓰라고 하면 하나도 쓸 수가 없기에 그래서 더 소중하게 생각이 된다. 


 가버린 세월을 누가 되돌릴 수 있을까. 난 글을 쓴다는 생각 보다는, 지나온 순간, 시간에 머물러 반추해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겐 참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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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0
내게 있어 가을은

 

 누가 내게 어느 계절을 가장 좋아 하느냐고 묻는다면 난 선뜻 가을이라고 말을 못하고 장황하게 늘어놓을 것이다. 한 마디 단어로 설명하기엔 너무나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와 조리 있게 설명하기보다는 늘 이럴 때면 그렇듯 말은 빨라지고 줄줄이 사설을 늘어놓기 때문이다. 


 여름 피서철이 끝나갈 즈음부터 마음에선 이미 가을 맞을 채비하기에 바빠진다. 열심히 돌아다니며 가을 냄새, 가을을 만끽하려 기웃거린다. 


 이민 오기 전 언젠가 반포 꽃 상가엘 갔다가 샛노랗고 큼직한 송이의 싱싱한 대국 다발을 보고는 누구에게라도 안겨 주고픈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 정도에 오천 원이면 꽤 괜찮은 가격이다 싶어 벼르고 별러 추석이 지나기가 무섭게 달려갔더니, 그때엔 값이 배나 뛰어 있어 겨우 한 다발을 가슴에 안고 왔던 가슴 싸한 아쉬움도 있다. 가을 정취에 취해서 흔히 얘기하는 외롭다 고독하다는 표현 별로 해 보지 않고 미리부터 가을을 맞고 어느 사이 가을을 보내곤 했던 것이다. 


 중학교 때는 추수하는 날 구수한 밥과 반찬이 좋아 일하는 날은 엄마한테 부탁을 해서 점심을 초등학교에 다니는 동생이 학교까지 가져오게 하였다. 일 년에 몇 번 밖에 없는 따뜻하고 마음 가득 풍요함을 가져다주는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추수를 하는 날엔 떡까지 곁들이니 난 마음까지 부풀어 있게 마련이고 추수가 끝난 다음 창고로 한 섬 한 섬 쌓여 들어가는 볏섬을 보며 가을의 풍성함을 만끽하곤 했다. 고사떡을 하는 날은 신바람이 나서 동네방네 떡을 다 돌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사시는 담임선생님께도 들고 가곤 했다. 


 추수가 다 끝이 나고 나면 마당 한 옆에 볏짚으로 낟가리처럼 만들어 두었던 것은 그 다음 해에 쓸 볍씨를 그곳에 저장하지 않았었나 생각된다. 그것 또한 추수가 끝이 나고 난 다음에나 볼 수 있는 것이어서 잊혀 지지 않는다. 건넌방 윗목에 고구마를 수수깡으로 집을 만들어 그 속에 넣어 두었다가 겨우내 꺼내어 구워 먹고 쪄 먹었던 맛, 고구마를 쪄서 말려 쫀득쫀득할 때 먹는 맛 또한 일품이었고 호박범벅을 해서 장독대에 두고 차갑게 해서 새참으로 먹던 맛을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 


 이렇듯 내겐 어릴 적 가을에 대한 애틋한 마음 아직도 남아 가을만 되면 으레 시루떡을 한 두 번 사 보곤 했는데 요즈음은 시루떡 호박범벅은 내가 직접 만들곤 한다. 그때의 그 기억들이 그냥 지나치지 않기 때문이다. 


 캐나다에 이민 오기 전 아파트 엄마들과의 헤어짐이 아쉬워 시루떡을 한 시루 맞춰서 집집마다 나누어주고 온 일이 있다. 


 그야말로 떡 햇고구마 햇밤만 봐도 좋아하는 친구나 이웃과 나누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간절해지는 계절이 가을이다. 이민 오기 전 어느 가을 날 친구들과 가을 단풍을 보기 위해 광릉을 찾았다가 오가는 길목에서 마셨던 따끈한 커피 한 잔의 맛, 제일 친한 친구와 서울대공원 미술관을 찾았던 기억이나 남편과 데이트 할 때 통일로의 양쪽 길가에 끝없이 핀 코스모스의 추억은 이 가을도 외롭지 않게 지켜주는 흘러간 추억의 한 장면 장면이다. 


 몇 년 전 한국에 나갔을 때 대학 친구와 2박 3일로 설악산을 갔었던 기억이 어제인 양 다가온다. 그 동안 설악산은 몇 번 가보긴 했지만 가을엔 한 번도 가보지 못해 설악산 단풍은 꼭 한 번 보리라 다짐하고 있었는데, 11월 중순이 되어서야 설악산을 갈 수 있었다. 단풍 구경하기엔 좀 늦기도 했겠지만 서울이 아닌 다른 도시도 한 번씩 둘러보리라 마음먹고 있었기에 친구와 같이 떠나 보기로 했다. 


 제일 친했던 대학 친구와 여행을 꼭 한 번하리라 벼르고 있었는데 그 친구는 연락이 되지 않아 다른 친구와 둘이서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속초 가는 직행 버스를 타고 출발을 했다. 차안엔 승객도 많지 않았고 우린 오랜만에 아니 친구와 여행을 떠나기는 그 때가 처음이었다.


 결혼 전에는 친구들과 여름 피서 여행을 해마다 다니곤 했지만 결혼을 한 이후론 친구와 같이 여행을 떠나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한국에 가면 꼭 하리라 벼르던 휴게소에서의 자판기 커피 마시기, 호두과자 사먹기, 뻥 튀기 사먹기 휴게소에서 CD도 두 개 샀다. 그 CD는 요즈음도 차를 타고 다니며 때론 침대에 누워 즐겨 듣곤 한다.


 낙산해수욕장을 바라보는 곳에 숙소를 정해 놓고 밖에 나와서 저녁을 먹고 숙소로 들었건만 우린 쉽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얘기를 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어도 이미 서로가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며 얘기하면서 호흡이 맞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얘기는 계속 되었다. 


 우리가 하룻밤을 유했던 곳이 낙산비치가 있는 곳이어서 그 다음 날은 해변 가도 걸어 보고 낙산사에 올라가 구경을 하고 버스를 타고 설악산으로 갔다. 설악산엔 철 늦은 관광버스들도 꽤 여러 대가 들어 와 있었다. 산행은 할 수가 없어 케이블카만 타고 설악산 산장에서 하룻밤을 더 유하고 그 다음 날 서울로 올라 왔다. 


 관광을 한다는 것은 날씨는 말할 것도 없지만 계절과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냐하는 것도 느낌이 전혀 다름을 보게 된다. 그동안은 봄여름에 왔었던 지라 따뜻하고 생동감이 감도는 그런 기분이었다면 철늦은 가을의 설악산은 썰렁하게만 느껴졌다. 


 지금까지도 아름답고 고운 추억만으로도 외롭다 생각지 않고 포근하고 따뜻하게 보낼 수 있었는데, 앞으로 더 나이가 들어 늘 가을이 되어도 마음속에서 행여 찬바람이 일지 않도록 가슴에 담을 추억 만들어 마음속 갈피갈피 넣어 두었다가 따뜻하게 음미하며 살아 보련다. 


 내게 있어 가을은, 고향집의 저녁연기가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꽃향기 그득한 친구의 집 마당에서 맛난 얘기의 꽃을 피우던 그 때가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고사떡 찌는 냄새 집안 가득해 동네로 퍼져 나갈 때 동네방네 들고 나갈 즐거움에 젖어 들었던 그런 계절이다. 


 가설극장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 가사에 취해 외롭지 않은 그런 계절이었다. 


 어릴 적 친구들이 아련하게 그리워지는 그런 계절이다.

 
 더 나이가 들면 어떤 감상에 젖어들려나 조금은 궁금해지는 그런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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