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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성 안보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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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사관학교졸(1967)
1990년 이민, 캐나다 한의학교졸(침술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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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7
2017-02-16
현재의 한국, 구한말 시기와 같다

 

 서론


 요즘, 한국에서 여러 사람들이 "현재의 한국 상황이 구한말 시기와 같다"고 한다. 맞는 말일까?


 1)한반도(19세기)


 우선 한반도의 지정학적 역사를 19세기부터 살펴본다. 중국에선 스스로 멸망해가는 명나라를 후금이 친다. 20만의 만주족 후금의 군대가 북경에 입성, 청을 개국한다. 


 유교를 국시로 하는 조선은 인의예지를 지켜, 비록 망했지만 옛 종주국에 대한 의리를 버리지 않고 존명배청을 천명한다.


 새로이 나라를 세운 청태종은 이를 묵과할 수 없어, 조선에 교훈을 주고자 12만의 군사를 이끌고 출병하니, 이것이 병자호란이다(1636년 인조).


 남한산성에 피신한 인조는 1만3000으로 대진했으나, 청의 포위를 견디지 못하고(45일) 항복, 추운 겨울 맨발로 한강을 가로질러 삼전도 모래밭에(현재의 잠실. 당시에는 여의도 같이 섬이었다) 무릎을 꿇고 몸을 굽혀 쿵쿵쿵 하는 소리가 나며 이마에 피가 나도록 절하는 (3번씩 3번) 수모를 당한다(1637.1.30).


 청은 군신의 관계를 맺고, 50만의 조선 아녀자를 끌고 물러간다. 청과의 이러한 관계는 그 후 청이 일에 패하고 맺은 시모노세기 조약에서 ‘조선은 독립국’ 임을 명시할 때까지 계속된다(1895 청일전쟁). 한반도의 종주국이 청에서 일로 바뀐 것이다(1910 한일합방).


 이상의 짧은 이야기가 한반도, 19세기의 지정학이다. 

 

 본론


2)태평양(20세기)


 남북전쟁으로 국내문제를 정리한 미국이 "강대국이 되려면 태평양으로 나가야"한다는 마한 제독의 권고에 따라, 태평양의 중간쯤인 하와이를 합병하고(1879), 스페인으로부터 괌, 필리핀을 빼앗아(1898), 이를 징검다리로 태평양, 아세아로 진출한다.


 지중해, 대서양은 지난 세기의 노쇠한 해역이 됐고, 지구상에 미완의 자원국이 태평양 연안에 있기 때문이다.


 한편, 쓰나미, 지진, 태풍의 연속되는 재해 속에 일본인은 일찍부터 편히 쉴 넉넉한 공간, 대륙에 대한 동경이 있어왔다. 이러한 염원 때문인지, 서구 선진국을 민첩히 모방, 근대화에 한 발 앞선 여력으로 조선을 거쳐 만주, 중국으로 자기 분수를 모르는 진출을 시도한다.


 그러나 전쟁수행의 피와 살이 되는 석유와 철은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미국으로 부터), 일은 자원을 찾아 월남, 필리핀, 말레이시아 반도로 진출한다(남방작전).


 이로서 이미 아세아에 나와있는 미와 일전은 피할 수 없게된다. 진주만, 태평양 전쟁이다(1941-1945).


 3)한반도(21세기)


 6.25, 월남전은 이미 잊힌 전쟁이 됐으나, 21세기 아세아-태평양 지정학 설명은 그로부터 시작된다. 즉, 아세아에서 공산권(중, 소)의 확장과 자유 민주 진영(미)의 대응이다.


 긴 잠에서 깨어난 중이 이제는 항모를 띄우며 신강대국 대우를 요구하며 떠오르고 있다. 잠자는 호랑이, 죽은 호랑이, 죽은 돼지(청일전쟁 당시 일 신문 표현)에서 말이다.


 일본, 동-남 중국해, 필리핀을 연결하는 제1, 제2 도련선을 그으며, 서태평양의 지역 강자가 되려한다. 지난 세기 일의 이익선과 같은 개념이다(대동아번영권).


 남중국해 산호섬을(난사군도) 메워 군사 기지를 만들고, 동중국해 산호섬을(센가꾸 열도) 자기 영토라 하고 있다(한국 이어도에도 곁눈질을 하고 있다).


 이에 미는 센가꾸 열도를 방어할 것이며(일을 위해), 난사군도에서 군사충돌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한다(트럼프).


 중은 한국의 사드배치에 급소를 찔린 듯 놀라, 과한 반응을 억제치 못하고 있는데, 옛 같으면 병자호란이 한번 더 일어났을 듯... 이는 한반도의 지정학이 가져다준 현상이다.


 한반도가 대륙과 해양세력이 맞나, 평화시에는 교류가 이루어지는 다리이며, 전시에는 군사력이 충돌하는 교두보가 되기 때문이다.

 

 결론


4)한반도(2017)


 "현재의 사태가 구한말과 같다" 함은 한반도의 지정학을 말함이다. 운명적인 한반도의 지정학적 요소는 항재적 변수로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어,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국제환경이 어떤지 하는 외적변수, 그리고 오직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국내 정치, 외교, 경제적인 대응에 따라(도전과 응전) 한반도의 희비가 엇갈린다(과거에도 그랬고 미래에도).


 병자호란, 고종의 고난, 6.25의 비극이 지난날의 예이다(앞으로 10년 내에 어떤 예를 만들려는지...).


 수일전, 미 전직 고위 관리들과 한국 국회의원 몇명의 대담이 있었다.


한 측; "사드 배치 문제는..., 중국의 보복이 심하다". "그래서...".


미 측; "그러면,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면, 중국이 한국을 도와준답니까?"


 앞에서 말한, 태평양 주변의 힘의 균형(Balance of power)이 이루어진, 외적변수가 안정적일 때 한국은 정치, 외교, 경제면에서 줄타기도, 세력균형자의 역할(Balancer)도 가능하다.


 그러나 새로운 강자가 등장, 힘의 균형이 요동칠 때, 즉, 재편을 요구하는 격동의 상황이 되면,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시대가 되어, 한국의 안보문제는 다리위에서 선택의 문제가 된다.


 한국은 분명히 행동해야 한다. 다시 한번 반복컨대 "현재의 사태가 구한말과 같다"함의 뜻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한국은 국제적 갈등 속에서, 독자적으로 행동하기에는 원천적 국력(영토, 인구의 크기)이 너무 미소하다. 동 이든, 서 든 어느 세력과 연합해야 생존할 수 있다.


 지난 1세기, 동양사는 미국이 태평양의 주 세력이 될 때 평온했다. 고종은 미 공사가 부임하자, 춤을 추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구한말, 그 시절과 현재가 같은 상황이라면, 지금의 한미동맹은 한국에 축복이다. 이것이 한반도(2017)의 답이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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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7
2017-01-09
태평양

 

 

 서론


 소련수상 푸틴은, 소련연방 해체후 침체기를 벋어나자, "옛 영광을...". 


 중국 시진핑은 치욕의 근세기를 벋어나, 이제는 "신 강대국 대우"를 요구하며, 해양굴기를 말한다.


 일 수상 아베는, 하와이를 방문하여 "부전의 맹세"를 하였다지만, 자기 선조가 침몰시킨 전함위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 옛날이여..."(?). 


 미국 트럼프는 "미국 제일"을 외치며, 매사에 "미국 우선"이라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북녘은 금년 말까지 핵을 완성하겠다고 아우성이고... 


 한국 주위의 4각 파도가 높다. 외무부 장관은 2017년이 어느때보다 "어려운 시기"가 되리라 한다.


 본론


 19세기 중엽, 서구 몇 나라가 산업혁명을 거쳐 자본주의 공업국가가 되어 해외식민지, 해외시장의 욕구가 솟구칠 무렵, "...지구의 운명인가(?)...", 역사발전의 필연인가(?). 


 마침, 찰스 다윈은 진화론으로 이들의 욕망을 정당화 시켜준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이 당연한 자연법칙이며, 제국주의 침탈 역시 탓할 일이 아니라고. 


 이에 때맞추어 마한은, "대양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며 강대국이 되려면 해외식민지와 기지를 화보해야 한다고, 막 일어나기 시작한 제국주의자들에게 갈 길을 알려주었다. 그리하여, 19세기는 강자의 폭거가 찬미되는 세대가 되었다.


 아세아에서 조금 일찍 근대화를 시작한 일본은, 섬나라를 벋어나 대륙으로 진출하고픈 미몽이 있었다. 1873년 정한론을 이야기 하다가, 생각을 돌려 다음해 대만을 침공한다.


 잠자는 조선을 밟고, 무능한 청조를 장악한다. 이미 중국은 잠자는 호랑이가 아니라, 죽은 돼지가 되어 있었으나(당시 일 신문 표현), 3천만의 인구로 4억의, 세계에서 제일 큰 나라, 중국을 점령하기가 벅찼다.


 이에 해결책은 남방작전. 즉, 필리핀, 인도네시아를 서쪽 끝단으로 하고, 동쪽으로는 하와이와 일본 중간쯤의 태평양까지를 포함하는 일본 이익선의 설정이다(대동아 번영권).


 광대한 태평양의 반을 자기 것으로 하겠다는 발칙한 발상이다. 이에 앞서, 독일이 1차 대전으로 유럽 전선에 바쁜 틈을 타, 진주만과 일본 사이쯤의 독일령 태평양 여러 섬을 점령, 이익선 안에 넣는다.(마샬, 마리아나 군도).


 당시 여러 서구 제국주의국가 중 후발주자인 미국은 남북전쟁으로 국내 문제를 정리하고, 강대국이 되려면 태평양으로 나가야 한다는, 미 해사교관 마한 대령의 권고에 따라 (나중에 제독으로 진급) 당시 섬 왕국인 하와이를 합병하고(1879), 이미 그 이전에 스페인 전쟁에서 필리핀, 괌도를 빼앗았다.


 아편전쟁 당시에는 중국과의 전쟁에는 불참했으나, 중국에 마약을 (터키에서 수입한) 밀수출하고 있어(영국의 1/3 수준), 미국은 이미 서태평양에 깊숙이 진출한 상태였다. 이것이 일의 대동아번영권과 충돌한 것이 진주만, 태평양 전쟁이다(1941).


 제정러시아 쟈르 치하 외무장관은 지정학적으로 볼때, "언젠가 러시아의 속국이 될 수밖에 없는 조선의 운명"하며, 조선의 부동항에 대한 야심을 숨기지 않고, 부동항을 찾아 시베리아에서 남진하던 중, 중국의 산동반도 여순, 대련항 해군기지를 두고 일과 다투게 되니 이것이 대마도 해전이다.


 중국은 아편전쟁으로 서구로부터, 청일전쟁으로 일본으로부터 골수에 파묻힌 수모를 당하고, 모택동, 등소평을 거쳐 시진핑은 신대국, 해양굴기를 외치며, 서태평양에 이익선을 그었는데, 이것이 일본, 대만, 월남을 잇는 제1 도련선이고, 해양력을 좀 더 키워 이를 확대, 필리핀까지를 포함하는 제2 도련선이다. 이에 따라 남중국해, 동중국해 산호섬을 메워 군사기지화 하고 있다. 


 미국은 태평양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할 것임을 잘 알고 있고, 태평양을 누구에게도 양보할 생각이 없어, 가장 큰 해군력를 배치(7함대, 3함대)하고, 해볼테면 해보자는 형태이다.


 바야흐로, 땅 따먹기 시대에 이어 바다 따먹기 시대이다. (중은 이제 항모 1척으로 힘을 과시한다지만, 1945년, 미는 항모가 100척 있었다).


 결론


 대륙의 동 끝단, 한반도는 대륙세력의 다리이며 해양 세력의 교두보이다. 피차 어느 쪽에도 양보할 수없는 명당임은 6.25에서 확인됐다. 북이 낙동강을 건너 부산을 함락했다면, 러시아는 태평양을 향한 부동항을 갖게 됐을것이고, 남이 두만강에서 정전을 맞이했다면, 미는 태평양 방어가 훨씬 용이했을 것이다.


 지중해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대서양은 지난 세기의 무대였다. 그 연안국이 이제는 별일없는 노후한 국가가 됐기 때문이다. 20세기 이후 태평양이 세계의 무대가 됐다.


 경제적으로 태평양 연안국이 지구상 남아있는 미완의 자원국이기 때문이다. 21세기는 지난 19세기 야만의 시대와 다르다고 하지만 국익 추구의 치열함에는 변함이 없고, 한반도가 세계의 길목임에도 변함이 없어, 약하면 먹히고 강하면 명당이 되는 길목이다.


 청이 예전같이 강했다면, 청일전쟁이 있었을까(?). 일이 강해서가 아니라, 청이 약해 전쟁이 시작됐다.


 조선이 스스로 독립을 지킬 힘이 있었다면 식민 36년이 있었겠는가(?). 무력함이 비극을 자초했다. 왕 며느리가 자기 나라 왕궁에서 일 자객의 칼을 맞다니...


 예나 지금이나, 다가오는 세대에도, 약육강식은 국제관계의 작동질서이다. 그래서 조선말 고종의 고난이 있었고, 6.25가 있었다. 또 미래가 걱정되는 것이다.


 약육강식의 원리는 2017년에도 변함없이 진행될 터인데, 한반도 주위의 파고가 심상치 않아, 필자의 신년사는 "내 탓이요" 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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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7
2016-12-26
이순신 프로젝트

 

 서론


 캐나다에는 6.25때 한국에 와서 한국을 위해 피흘려 싸웠다는 특이한 역사가 있다. 그들은 남을 위해서도 헌신했다는, 뜨거운 정신을 갖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겨, 이를 잊지 않고 기념해 오고 있다.


 필자가 이순신 프로젝트를 생각한지는 오래됐다. 기회를 기다리던 중, 향군에서 기회가 왔다. 현 회장이 이순신 프로젝트의 기본 아이디어를 흔쾌히 호응해 주었다.


 이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1) 카나다 한인 젊은 남녀들에게 캐나다왕립사관학교(RMC)및 현역에 입대, 입교할 기회를 늘리자.
 2) 토론토에 거주하는 한인 한국전 참전용사의 캐나다 한국전 행사참여를 적극 지원하자.
 3) 젊은이, 어린이(학생)의 한국전쟁에 대한 이해를 높이자.
 4) 상기 사업을 캐나다 전국으로 확대하자.

 

 본론


 상기 1)항을 위해서는 작년, 금년에 토론토 CFRC(Canadian Forces Recruiting Center, 캐나다군모집소)와 합동으로 캐나다군 안내 및 설명회를 가졌다.


 사관학교 입학수속도 이곳에서 대행함으로 사관학교 입교설명회도 겸했다. 내년부터는 년 2회를 했으면 한다. 


 2)항은 올해 한국전기념식(한인회관)에서 영웅휘장을 받은 참전용사는 68명 이었다. (거동이 불편하여 참석치 못한 분을 생각하면 토론토거주 참전용사는 200명쯤 된다고 한다.) 이 분들이 연로하시어 여러 캐나다 합동행사에 참여가 저조하시다.


 예를 들어 써니브룩 병원에서는 매년 10월, 친선 오찬 파티가 있는데, 캐나다향군은 작년 35명, 금년 24명 참가했다. 그러나 참전용사는 작년 1명, 금년 2명 참가하셨고, 금년 가평전투기념식(오타와, 전쟁박물관)에는 전무했다.


 가장 큰 행사라 할 수 있는 오타와 한국전 기념행사에는 작년, 금년 토론토에서 1명 참석했다. 기타, 토론토 메도베일묘지, 현충일(Remembrance Day) 합동 추모행사에도 참여가 저조하시다.


 한국전쟁이니 한인이 주빈임에도 이제 연로하셔서 오가는 일이 힘들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 교통편을 준비하고, 편의를 마련해서 용사 분들이 편히 참여하셔서 주빈의 면모를 다 하실 수 있도록 해야겠다. 그분들의 연세를 생각한다면 이도 몇 번 안 남았다.


 3)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자유와 민주주의를 몸 바쳐 지킨 숭고한 정신을 어떻게 후대에 계승시키느냐 하는 문제다. 캐나다사람도 우리와 같이 이 문제를 고민하고 있으나, 그들 나름대로 후대(청장년, 어린이)들을 초청해서 행사를 진행, 그 뜻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고국을 떠나있는 우리는 각별히 유념하지 않는 한, 몇 명의 위안부 할머니 다 돌아가시고 나면,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게 되듯, 이산가족 할아버지, 할머니 다 돌아가시고 나면 후손들은 이북에 선친 묘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게 되듯, 그나마 6.25행사를 통해 어렴풋이 한국전 이야기를 듣고 있는 차세대가 참전용사 다 돌아가시고 나면 무엇을 기억할까(?). 지난날 캐나다 젊은이가 한국에 와서 우리를 위해 싸우고 죽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될 것이다.


 방법은 상기 여러 행사에 청장년, 어린이(학생)를 참여시킴인데, 우선 토론토 메도베일 묘지 행사시, 캐나다초등학교학생 300명이 매해 참가, 두세 곡 합창하고, 학생대표가 용사에 대해 감사의 글 낭독하고, 전사자 동판에 빨간 양귀비꽃 꽂고, 직접 만든 카드를 용사에게 전한다. 필자도 받아보니 감사의 뜻이 실려 있었다.


 이에, 한인학생들도 함께 합창하고, 대표가 캐나다 어린이와 함께 감사의 말을 전하고, 하면 안될까. 캐나다 시민으로서 참여도 되고, 조국에 대한 교육도 되고, 뜻있는 사람이 나서주기 바란다.

 

 결론


 이러한 사업이 필자가 구상했던 이순신 프로젝트이다. 끝으로 향군을 떠나면서 2016년 말의 현황을 보자.


 1)항: 향군에서 잘하고 있다.
 2)항: 향군에서 시작을 구상하는 단계에 있다.
 3)항: 필자 개인 수준에서 함께 일을 추진할 분을 찾는 단계에서 중단됐다.


상기 모두 우리 공동의 일이며, 캐나다에 살면서 계속해야 할 영구 프로젝트이다.


 이는 무엇보다, 맛 가고 품위 잃은 조국 현실 속에 캐나다에 살고있는 우리의 격을 반듯하게 해놓는 일이라 하겠다. 이를 구상했고, 계속 추진하고 싶었으나 필자는 개인사정으로 실무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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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18
윌리엄 핼시 제독

 

 1942년 4월 샌프란시스코 해군기지. 미 항모에 육중한 육군 폭격기가 적재되는 모습을 본 사람은 "오늘이 만우절인가?" 했다. 처음 보는 일이다. 그러나 이는 진주만 피습 후 4개월, 미의 대일본 반격의 시작이다.


 항구를 떠나고 한참 후, 임무가 알려졌다. ‘Tokyo 공습’. 기동함대16으로 명명된 공격함대 지휘관은 윌리엄 핼시(William Halsey) 제독이다. 태평양에서 미 함대를 전멸시켰다고 연일 선전하고, 또 그렇게 믿고 있는 일본국민에게 도교공습은 참으로 황당한 사건이었다.


 적지에 들어가 적의 수도를 공습하는, 이 위험한 임무를 맡은 핼시는 부친도 해군이었고, 그의 선조는 18세기 고래잡이 집안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는 미 해사를 졸업 후, 1차대전시 구축함 함장으로 U-Boat 작전에 참가, 십자훈장을 받았다.


 유럽에 전운이 짙어가고, 일본이 참전하리라는 예측이 높아가는 가운데, 그는 미 해군에서 가장 경험이 많은 항모 함장이 된다.


 진주만 피습 당시, 그는 Wake 섬으로 전투기를 운반 중이었다. 급히 귀항하니, 뒤집어져있는 군함, 쓰러져 불타고 있는 전함, 그 속에 잠든 수많은 영혼에 복수심이 끓어올랐고, 이로 인해 그는 종전 때까지 태평양을 떠날 수가 없었다.


 핼시 제독은 그 후, 줄곧 바다에서 ‘Kill Jap’에 앞장선다. 연일 육상에서, 해상에서 승리하고 있다고 선전하는 일에 일격을 가하자는 니밋즈(태평양 사령관)의 구상에 동참, 한 번도 항모갑판에서 이륙해본 일이 없는 육군폭격기를 태우고 도교 공습에 나선다.


 도교에 폭탄을 던지고, 그대로 비행해 중국의 장개석 휘하의 비행장에 착륙할 계획이다. 모두 안전하게 이륙했고, 작전은 순조로이 끝났다. 일 해안의 감시소에서 미 항공기의 접근은 포착했지만 도무지 이것이 미 공습기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일본은 아연실색했다. 이에 남방작전에 투입 예정이던 육군 항공기를 대거, 일 본토 방위용으로 잡아두지 않을 수 없었다.


 일 수뇌부는 미의 전초기지인, 일본열도와 진주만의 중간쯤에 위치한 미드웨이의 미 육군항공대 기지와 아직 남아있는 미 항모를 추적 격침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할 계획을 세운다.(2개월 후, 일의 미드웨이 작전은 대실패로 끝났지만).


 핼시 제독은 뉴기니아, 소로몬군도 해역방어에 이어 호주, 뉴질랜드, 월남을 아우르는 남태평양 사령관에 배치된다. 1942년 남태평양에서는 육상, 해상에서 격렬한 전투가 연일 계속된다.


 그는 공훈도 혁혁하여 대장으로 진급하고, 3함대 사령관을 맡는다. 그에게 임무가 주어졌다. 일 수중에 떨어진 ‘필리핀 탈환’이다. 10월 20일 대 함대의 호송을 받으며, 미 6군단 6만 명이 상륙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맥아더의 일성 "내가 돌아왔다."(I have returned)는 이때 있었던 일이다. 일은 미의 수출금지 타격에 자원을 찾아 남방작전으로 개발한 곳이 필리핀 레이테(Leyte)섬, 말레이시아, 동인도 등이다.


 필리핀의 커다란 두 섬, 민다나오와 루손 사이에 위치한 레이테해협은 지중해의 지부랄타해협 같이 일 수송선이 지나지 않을 수 없는 길목이다.


레이테섬이 미군에 점령된다면, 일과 남방자원의 연결이 차단됨으로 이는 일의 국운이 걸린 문제이다. 이 중대한 문제에 일은 신속히 반응했다.


 일 본토의 가용 함정과 해외 작전 중인 함정을 모아 서, 남, 북 4개 방향에서 레이테섬을 공격한다.


 일 본토로부터 섬 북단으로 접근하는 오자와제독이 이끄는 함대에는 2척의 항모가 포함되어 있어, 이를 미끼로 사용(전함을 항모로 개조한 것)해 미 주력을 섬 북단으로 유인, 해상 방위가 허술해진 틈을 타 보르네오에서 출동하는 Kurita, Nishmura 함대가 미 상륙군을 함포사격해 섬멸한다는 계획이다.


 당시 일 주력함대에는 최상급 거함거포인 Yamato, Masashi 전함이 합류되어있어, 계획대로라면 상륙군에 위기의 순간이다. 상륙한지 3일 밖에 되지 않아 방어태세가 되어있지 않았고, 인원, 물자가 해안에 적체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해상전투는 4일 밤낮을 섬과 섬 사이에서, 마치 지상전의 육박전식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압도적인 미 전력에(함정: 200, 함재기: 1500) 일 함대가(함정: 60. 함재기: 300) 철수, 2차 대전 최대의 전함 대 전함 전투가 막을 내린다.(일 피해: 26척, 미 피해: 6척, 미는 당시 레이더 조준사격이어서 명중률이 높았다).


 그 후 일은 함정, 항공기 급유를 대부분을 담당하던 레이테섬을 잃고, 남방으로부터 전략물자 수송이 막힘으로서 기름을 채우지 못한 배가 출항을 못하는 등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핼시 제독은 미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일이 항복할 때까지 해상 지휘관으로서 태평양을 떠나지 않았다. 맥아더같이, 화려하게 일반에게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고지식하게 임무에 충실했던 지휘관으로 미 해군 내에서는 존경받고 있다. (참고: The Great Admirals (Richard Hough.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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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7
2016-12-13
진주만 공격...왜?

 

서론


 미국 페리 제독이 4척의 범선을 이끌고, 일본의 개항을 요구하는 대통령 친서를 전달하고(1853), 한 세기 후 일은 자기를 일깨워준 미국을 공습한다(1941.12.8).


 그 후 3년. 공격함대를 이끈 나구모 제독은 자결, 일을 전쟁으로 몰고간 도조 총리는 교수대에 달린다(1948). 이에 앞서 공습을 설계한 야마모도는 남방의 밀림에서 생을 마친다.


 이렇게 모든 주역이 사라지는 단초가 된 진주만 공습을 일은 왜 시작했을까. 금년이 진주만 공습 75주년, 현 일본 수상 아베는 하와이를 방문, 지난 일을 사과하고, 미와 우의를 다지려 한다.


 일의 무모함의 시작이 어떠했는지 알아보자.


본론


 1. 배경


 일은 임진왜란, 이순신에 패해 물러갔지만, 섬나라의 취약점을 인식, 대륙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거두지 않았다.


 16, 17세기, 풍신수길, 덕천가강의 분산된 권력 형태로는 외세를 막을 수 없다하여, 천왕을 중심으로 국가 권력을 집중시킨다(1867).


 1860년대, 영 파견대에 무너지는 청을 보고 일본도 같은 운명이 닥칠까 두려워하여, 스스로 쇄국을 버리고 부국강병의 길을 택한다. 그 길은 영국, 독일을 모방한 해군, 육군의 건설로 구현 되었다.


 유신 이후, 소외된 구식 군대, 사무라이도 달랠 겸 정한론을 생각하기도 하나(1875), 대만 원정(1874), 강화도 조약(1876)으로 동남아에서 근대화의 선두임을 확인한 일은 대륙진출에 과감해진다.


 이미 산업화 단계에 이른 일은 넓은 시장, 땅, 인력, 자원을 가진 만주를 탐한다. 당시 서구 열강들의 필독서, 마한제독의 해양력을 찬양한, 해군력 증강의 권고와 일의 안보를 위해 조선을 선점해야 한다는 독일 육군 고문관(Mackel 소령)의 권고가 일의 갈바를 알려주는 듯했다.


 사실상 일 참모부가 일을 끌고가는 상황에서, 이를 국가정책의 기본으로 삼는다.


 중국과 조선은 스스로를 지킬 수 없고, 이들을 서구세력이 선점한다면, 그 다음 목표는 필경 일이 될 것임으로, 오히려 일이 먼저 조선과 중국을 선점해야한다는 생각이다.


 기회는 곧 왔다. 동학란(1894)을 계기로, 조선에 상륙한 일은 먼저 넘어온 청을 공격해 남만주로 진격한다. 일 제국주의 팽창의 시작이다.


 이를 북쪽에서 견제하는 러시아를 대마도해전에서 물리치고(1905) 나니, 이를 남쪽에서 견제하는 미가 잠재적으로 자연히 떠오른다.


 남만주를 점령 후(1937), 제국주의 관성으로 전 중국을 석권하려 한다(1937). 비극의 시작이다.


 3000여개의 섬으로 되었다지만, 미국의 캘리포니아 크기에도 못 미치는 일이 중국 전체를 점령하려하니, 자원이 부족했다.


 일은 석유 전량 수입, 철강 부족으로 미 고철수입, 석탄도 충분치 못한 자원 결핍국이다.


 이의 확보를 위해 남방진출을 시도한다(1939). 드디어 일이 인도네시아를 공략하자(1941), 미는 전쟁수행의 척추가 되는 모든 전략 물자의 수출을 금지한다(1941).


 일은 이의 해제를 위해 미와 협상 하지만, 미는 완강했다. 중국에서 전면 철수가 미의 요구였다. 일로서는 수용할 수없는 일이다. 중국을 포기하고 다시 섬나라로 돌아가, 2류 국가가 될 수는 없었다.


 나폴레옹이 한나절만 영불 해협을 안전하게 해주면, 해협을 건너 영국을 점령할 수 있다고 기대했던 것처럼, 일은 6개월만 태평양을 확보한다면, 남방작전을 끝내고, 확보된 자원에 힘입어, 중국 점령을 마치고, 미국과 평화협정에 이르러, 중국 점령을 기정사실화 할 수 있으리라 계산했다. 그렇게 됐으면 일 입장에서야 얼마나 좋았을까. 


 2. 미, 일의 태평양 진출


 태평양을 놓고 미, 일이 격돌했지만, 태평양 진출은 미가 먼저 시작했다. 마치 영국의 독점에 독일이 도전한 것같이, 미의 태평양 진출과 일의 남방작전의 충돌은 일견 필연이었다.


 미가 태평양 철도 부설을 마치니(1869), 태평양이 앞에 펼쳐졌다. 미는 태평양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먼저, 멕시코와 전쟁에서 캘리포니아를 합병하고(1846), 러에서 알라스카를 사들이고(1867), 다음 목표는 스페인이 됐다. 스페인과 전쟁에서(1898), 쿠바, 괌, 웨이크 섬 필리핀을 영향권에 둔다.


 이에 앞서 하와이를 합병한다(1892). 당시 미 대통령 루즈벨트는 스페인과 전쟁시 해군 차관을 한 바 있는 알프레드 마한의 sea power의 숭배자였고, 다가오는 세기에는 태평양이 world power의 무대가 되리라 생각했다.


 미는 당시 영, 불, 독, 이태리, 네덜랜드, 일이 각축을 벌이고 있던 중국에 접근, 후발자의 대등한 권리를 요구한다(1899. open door 정책). 미의 태평양 세력에의 합류가 시작됐다.


 일은 광대한 중국 점령 작전에 인력, 자원의 한계를 느껴, 이의 해결 차 타이,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버마, 괌, 웨이크에 이르는 광대한 남방진출을 꾀한다(1939. 대동아 공영권).


 그 이전, 1차 대전은 일에 좋은 기회가 되었다. 유럽 전선에 몰두하고 있는 영, 불, 독의 공백을 이용, 진주만과 필리핀의 중간쯤에 위치한 독일 점령지 마살, 마리아나 섬을 점령한다. 그 이전 소왕국이었던 오키나와도 합병한다.


 드디어 일이 프랑스령 월남을 진격(1940)하고,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를 공격하자(1941), 미는 대일 수출금지를 결정한다. 일은 미가 이를 풀지 않는 한 6개월을 버틸 수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일전은 필연이 됐다.


결론


 나구모 제독의 공습함대가 12월 7일 하와이에 도착, 비행대를 선두에서 이끌고 있던 후치다 사령관은 밑을 보니, 아무런 저항도 없었다. "도라, 도라, 도라" 공격 암호를 외친다. 성공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렇게 진주만 공격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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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북한의 잠수함 위협

 

 

 다음은 며칠 전 평통이 주최한 "해외동포의 정체성, 자긍심 향상을 위한 통일 발표회"에서 필자가 발표한 내용입니다.


 서론


 오늘 발표회 주제는 해외동포 자긍심, 정체성 향상입니다. 그런데 본인 발표 내용은 안보 문제입니다. 좀 내용이 빗나간 듯합니다. 그러나 불바다, 피바다하며 적화통일 의도를 숨기지 않는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안보 불안을 느낀다면, 자긍심 이야기는 시작도 할 수 없습니다.


 한국의 안보가 무엇입니까. 전쟁이고 죽고 사는 일 아닙니까. 동포끼리 싸워, (핵으로) 남북이 거지 국가가 된다면, 국제적 웃음거리가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긍심, 정체성 이야기는 말할 처지도 못 됩니다. 안보가 튼튼하여 안심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로 남이 가장 취약한 부분인 잠수함 이야기를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론


 지난 2차대전시 독일의 칼 퇴니즈 잠수함 사령관은 히틀러에게 "잠수함 300척이면 잠수함만으로 영국을 항복시킬 수 있다."고 잠수함 건조를 건의 했으나, 거절당하고, 56척으로 전쟁을 시작합니다. (그는 1차대전시 소령, U-boat 함장으로 출전)


 그러나 전쟁 초기부터 U-boat 한 척당 평균 9척의 영 함정을 격침시키고, 영 군항에 잠입해 항내 군함을 공격하고 살아 나오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리자 이를 본 히틀러는 전쟁기간 중 1000척의 U-boat 를 건조 합니다. (그중 700척은 no return).


 이로서, 독일은 영국 해역을 봉쇄하여 오가는 선박을 많게는 년 800척씩 격침시켜, 영을 고사 직전까지 몰고 갑니다.(영은 독과 평화회담을 고려하는 상황까지 되었으나, 미가 참전해 가라않는 상선, 군함보다 더 많은 배를 공급 함). 이것이 유명한 독의 "무제한 공격"(1차대전)," 이리떼 공격"(2차대전)입니다.


 태평양 전쟁시 미는 일 전해역을 봉쇄하여 1700척을 격침, 전쟁 물자 반입을 80%나 떨어트려 일이 전쟁을 수행할 수 없게 합니다.


 중동전에서는 미 해군이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을 페르시아만에서 수 백발 발사, 개전 초기에 적 전략목표를 초토화 시킵니다.


 1982년 영국-아르헨티나 포클랜드 전쟁에서, 영 원자력잠수함이 아르헨 순양함을 격침시키자, 함정은 항구에서 나오지도 못했습니다.(아르헨 잠수함이 영 군함에 어뢰 7발을 발사 했으나 회피, 영이 이를 잡기위해 어뢰 200발을 쏘았으나 아르헨 잠수함 역시 회피).


 잘 아시는 바, 남북의 군사력 대비에서 남이 육, 해, 공 공히 우세 합니다만 잠수함에서는 열세 입니다. 척 수로만 비교하면 20:80으로 북이 우세입니다. (통상 군사학에서 적의 3배면 압도적이라 합니다. 북의 잠함 전력은 압도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김일성은 지난 6.25에서 부산항을 봉쇄치 못 했음을 후회 했습니다. 전시 인원, 물자의 90%가 부산항을 통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이를 막았다면 전세가 크게 달랐으리라 생각한 것 입니다.


 그래서, 북은 일찌기 1963년부터 잠수함을 구입, 70년대에는 소련 잠수함을 모방 제작(로미오 R급, 1800톤), 90년대부터 자체 설계 제작하여(신포급: 2000톤, 고래급: 2300톤) 보유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대륙간 핵탄도탄(SLBM) 발사 잠함으로 4000톤급을 재작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외 특수전용 350톤, 100톤급 잠함을 각각 40척, 20척 보유하고 있습니다. 지난 60년대, 90년대 북은 임진강, 삼척, 강릉으로 침투한 사례가 있습니다. 비록 갯벌에 박히고, 좌초, 어망 걸림 등으로 실패 했지만.
 그러나, 잠함 성격이 은밀한 적 해역 침투임으로, 사실 그간 얼마나 많이 남에 왔다 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에 비해, 남은 80년대에 독일에서 제작 구입(1200톤 급), 90년대 이후 자체 제작하여(1800톤급), 현재 14척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대우조선에서 3000톤급 건조를 시작(2020년까지 9척 예정) 하였고, 잠수함 사령부도 발촉했습니다(2015.2.1).


 우리는 6.25를 잘 기억하고 있지만, UN도 소련도 잠함을 파견치 않아 잠수함전은 없었고 모릅니다.


 북은 전쟁을 한다면 기습전 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고(아니면 이길 수 없다고 생각), 그래서 다음 전쟁은 38선에서 뿐만 아니라, 남의 동, 서, 남해안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기습전에는 잠수함이 최고).


 결론


 지난 전사에서 보듯이 북은 연안 시설 공격, 항만봉쇄, 선박 격침 등으로 초기에 기선을 잡고, 남의 전쟁 지속 의지를 마비시키려 할 것입니다. 한국 연안에는 많은 산업시설이 있습니다. 원전만 해도 24기, 그 외 정유시설, 석유 산업단지가 해안가에 있어, 특수요원에게 좋은 공격목표가 되고 있습니다.


 몇 달전 북 잠함 50척이 일시에 사라진 일이 있어, 긴장했습니다. 전시 잠함배치 훈련을 한 듯 합니다.


 50척이, 각기 한 개씩 공격 목표를 갖고, 연안시설을 공격해 24기 원전 중 단지 몇 개라도 폭파된다면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지난 일본 후쿠시마, 소련 체르노빌 원전사고를 생각하면, 피해의 규모를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 입니다.
 300톤급이 작다고 무시하면 안 됩니다. 1차대전시 u-boat가 300톤급 이었고, 2차대전에 가서야 700톤급이 됩니다.


 북의 350톤급은 항속거리가 5000km 이므로 한국 동, 서, 남해를 왔다 갔다 할 수 있고, 특수요원을 10여명 수송할 수 있습니다.


 북은 주한 미군만 철수하면 해볼만 하다고, 지금도 적화야욕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노무현 정부시, 핵추진잠수함 6척이면 한반도 핵 지형을 바꿀 수 있다는 검토도 있었습니다.


 무제한 물속에 숨어 있을 수 있고, 적 해역을 넘나들 수 있는 핵잠이 오늘의 한반도 군사정세에 가장 알맞는 전쟁억지 수단 입니다.


 남의 핵잠 보유를 적극 고려할 때가 됐습니다. (2000톤급 재래식 잠함 건조비: 7000억, 3000톤급 핵잠: 1조4000억).


 최근 한일간 군사정보 교환 합의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일이 갖고 있는 북 잠함 정보를 이용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미래의 잠함은 무인, 원격조정, 특수 코팅으로 음향탐지(sonar)에 잡히지 않는 스텔스 기능의, 꿈의 잠수함이 되리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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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0
헤이하치로 도고 생각

 

서론

 


 ‘The great admirals’ 이란 책을 보면 일본 도고(Togo) 제독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청일해전, 러일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제독으로 섬나라 일본이 세계의 무대에 등장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던, 한국 해군에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나의 관심은 그가 겸손한 사람이라 기억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세상에는 그보다 더 유명한 제독이 많다. 상기 책에도 Togo말고 20명이 소개된다.) 


 요즘, 시대가 하도 뒤숭숭하여, 남의 나라 제독을 다시 들쳐봤다. 미 범선 페리호가 일의 문호 개방을 요구하며 함포를 쏴대고 있을 즈음(1854년), 영국 군함이 영 상선의 피해 보상을 요구하며, 도고의 고향 가고시마 해변에 포격을 가하고 있을 때, 15살 도고는 쌍칼을 옆에 차고 그의 아버지와 두 형과 함께 해안에 버티고 서있었다.


 그러나 깊이 느낀 바가 있어 5년후 일 해군사관 학교를 거쳐, 영국 해군에 7년간 유학한다.


 그리고 50대에 이른 도고를 보고 쓴 상기 책에, ‘He is indeed noble man, His modesty struck others’(그는 신사였고, 겸손했다)라고, 그를 가까이서 본 영국 해군 무관, 신문 기자들이 칭송했다.

 

본론

 


 1895년 청일 전쟁시 풍도해전, 황해도 해전, 산동반도 해전에서 모조리 이겨 그에게는 행운이 따르는 것 같다는 풍설이 일 해군 지휘부에 있었다. 그는 일 연합함대 사령관이 되어, 러일 해전을 치르게 된다.


 중국 산동 반도에서 일에 몰리고 있던 러시아 군을 지원코자, 마지막 황제 차르의(Tsar Nicholas-2) 발틱 함대가 산둥반도로 출항한다. 러시아 지원군이 산둥반도에 상륙하고 나면 대국 러시아를 절대 이길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일은 이들을 바다에서 격침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도고 제독의 "국운이 일전에 달려있는 순간이다"는 말대로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조선 남해에 도착하니, 이미 산둥반도는 일에 점령당해 부득이 목적지를 블라디보스톡으로 변경한다.


 7개월간 발틱해로부터 아프리카를 돌아 대한해협에 이른, 긴 항해에 지친 러 함대 50여 척은, 블라디보스톡을 향해 가려면 일본을 지나야 하는데, 마침 4월의 안개 낀 날씨를 틈타, 부산과 대마도 사이를 통과하는 단거리 코스를 택한다. 짙은 안개가 안전항해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러 함대가 일 함대의 대기를 예측하고 이를 피해 아마도 대마도 외곽으로 항해할 것이라는 지휘부의 조언을 무시하고, 진해 앞바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도고 함대의 정찰선이 1905년 4월 8일, 새벽 1시30분, 안개 속에, 함내 등불을 다 끄고 북동으로 미끄러지는 러 함대를 발견한다.


 마지막 순간 행운은 55세의 도고 편이었다. 러 함대의 맨 뒤에서 따라오던 병원선의 불빛을 본 것이다(사령관의 부인이 간호 장교로 승선). 이 불빛을 못 봤다면, 대마도 해전도 없었고, 도고는 무명 제독이 됐을 뿐 아니라, 일본도 위태로워졌을 것이다.


 24시간 해전 후, 러 함대 50여 척 중 블라디보스톡에 입항은 3척뿐으로 러는 완패한다.


 기함이 피격으로 지휘불능이 되자 사령관은 구축함으로 옮겨 탔으나, 곧 항복하고 일에 끌려간다. 부상당한 비운의 사령관, 로제스트벤스키(Rozhestvensky)는 병원에 입원한다.


 도고는 병원을 찾아 그를 위로한다. 그보다 앞서, 구한말 주한 러시아 외교관(제노네불피체리)이 쓴 "청일전쟁"에서 도고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1894년, 서해 풍도에서 깨지고, 황해도 해전에서 패하자, 청 서태후의 사람 이홍장은 북양함대 사령관 정여창에게, 일과 결전을 피하고 산둥반도 위해도에 피항하라 지시한다.


 위해도는 3000만량을(청 1년 수입의 1/3)을 들여 견고히 요새화 해 피신에는 최고. 그러나 일 소형 어뢰정이 야음을 틈타 방어망을 뚫고 들어와 공격을 해대니, 무엇보다 병사들이 기가 죽어 살려달라고 항복한다.


 정여창과 도고 간에 편지가 오고 간다.(이토 제독과 정 제독의 서신. 청일전쟁 부록 F)

 


 이토 제독이 정 제독에게,


 삼가 이 편지를 각하께 전합니다. 시간의 변화무쌍함은 우리를 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는 불행한 일입니다. 하지만 전쟁중인 것은 우리의 조국일 뿐, 개인 간에 어떤 적대감도 있을 수 없습니다. (중략) 중국을 현재의 처지로 몰고 간 것은 한 개인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 책임은 오랫동안 중국을 통치해온 정부의 실패에 있습니다.


 그 뒤 몇 번의 편지에서, 정 제독은 부하의 목숨을 구하고,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하는 조건하에 항복하고 모든 군함을 양도하겠다고 한다. 이에 도고는 정에게 항복 후 일본에서 살 것을 조언한다. (왜냐하면, 앞서 황해도 해전에서 청 기함 함장은 잘 싸웠으나 결국 패해 참수 된다).


 정은 도고가 보낸 신선한 과일, 음식물 선물을 사양하고 자결한다. 도고는 정의 시신을 고향에 돌려주고자, 항복으로 양도된 청 군함 한척에 시신을 싣고 포위망을 벋어나 고향으로 가도록 한다. 일 해군은 시신이 된 패장의 항해에 도열하여 예의를 갖추었다 한다.

 

 결론

 


 전쟁이 끝나고 도고가 은퇴 한 후, 노후를 고향에서 보내고 있던 어느 날이다.


 신문 기자들에 둘려 싸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어느 기자가 사모님께, "그간 어려운 일은 없었습니까" 물으니, "생활이 어려워 내가 일을 했지요(종이우산 만들어 팔기)“ 했다. 이에 옆에서 듣고 있던 도고가 버럭 화를 내면서 "밥을 굶긴 일은 없었잖아"라고 말했다.


 사(무사), 농, 공, 상의 신분제에서 상위이며, 출세한 제독이었건만, 가난했던 모양이다(노후 준비 좀 하시지 않고...).


 일 지도층은 대체로 청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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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07
한반도의 핵 전망

 

 북의 5차 핵실험 이후, 한반도 핵 논의가 활발하다. 이미 모든 대안이 검토 되었다 할 상황이다. 이를 정리해 보자.


 1. 비핵/전술핵/핵


 이는 자주적 선택의 문제이나 핵심은 그 시점의 한반도 및 국제 상황이다. 모든 나라가 상호 긴밀히 연결되어 살아가는 글러벌 시대에 핵문제는 선택의 시점에서 국제적 고려가 중요한 요소이다. 


 1)현재의 답은 비핵이다. 북은 "남이 꿈적 하면...", 한-미는 "북이 핵을 쏘면..." 하는데 결국 누구도 먼저 핵을 쏘지 않겠다는 말이고, 실제 북은 핵을 보유하고 있으나, 핵탄을 남이나 미로 발사할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지금 단계에서는 확고한 한미동맹, 한일 협조를 통한 미의 핵우산이 답이다.


 2)전술핵 배치가 논의되고 있다. 불원간 가능한 선택이다. 남에 핵을 배치함으로, 북에 핵개발 빌미를 준다는 의견이 있으나, 북이 이미 완성단계의 개발을 한 상황에서 이 논리는 시효가 지났다. 다만 지금 시점에서도 전술핵 배치는 아직 이르다.


 북이 6차 실험을 마치고, 양산체제에 들어가 핵탄을 갖기 시작할 때(인도, 파키스탄의 경우 개발단계의 마지막 실험이 6차 실험), 구체적으로 2~5년 후에 한국은 미 전술핵을 국제적 마찰없이 배치할 수 있을 것이다.


 3)자체 핵 보유 의견이다. 미가 어떤 이유에서건 한국과 느슨한 동맹관계가 되고(과거사례, 닉슨: 아세아에서 후퇴, 신고립주의. 카터:주한 미군감축, 철수), 일, 대만, 호주가 북핵에 대비해야 하는 상황이 될 때(아시아는 아시아가...), 이들과 함께 핵을 보유하면 된다. 다만 핵 보유에 상당한 시간이 요구됨으로 충분한 시점에 준비돼야 한다.


 4)이와 같이 비핵, 전술핵, 핵으로 상황이전 되는 중 여러 상황이 상정될 수 있는데, 우선 선제공격이다.
 6차 실험을 마치고, 양산체제에 돌입할 시점, 아직 북이 핵 보복 수단을 갖추지 못한 시점(2-5년 내)에 정확히 핵시설만(북의 핵 시설은 모두 오지에 있다) 선제타격이 가능하다. 


 중국 뿐 아니라 한국의 절대적 동의가 관건이다. 또 한번의 기회는 북의 핵이 미에 실제적 위협이 되려할 때 마지막으로 더 커지기전에 미국은 선택 할 수있다. 최근 미는 이를 분명히 했다. "---핵을 가질 수 있겠지만, ---곧 죽는다"


 지난 시절, 북이 핵개발을 시작할 때, 미 클린턴 정부는 선제공격을 계획 했으나, 당시 한국(김영삼 정부)이 반대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북 전략은 경제 제재이다. 개발비용이 성공적으로 차단되면 북은 어쩌지 못한다. 이것이 현시점에서 한미가 바라는 트랙이다.


 6)그외 계산할 수는 없으나, 상기 제재 결과 더욱 궁핍해진 인민의 기아를 가슴 아파하는 부류가 있어, 돌발 사태가 있을 수 있다. 스스로 핵포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7)또 다른 논의는 비핵을 전제로 한 평화회담이다. 이는 신뢰 프로세스, 햇볕정책의 결과가 아니라 북이 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의 북의 선택이다. 극심한 북의 궁핍, 남이 북의 3배에 이르는 화력 보유가 관건이다.


 2. 핵 잠수함


 북이 핵탄을 쏠수 있는 잠수함을 갖는 일은 지상 핵 획득보다 좀더 많은 기간이 필요하다. 우선 핵탄도미사일을 쏠 수 있는 안전한 잠수함(4000톤 급) 확보와 대양 항해능력을 겸비하는 일이다.(건조 2-3년, 시험 1-2년 후).


 1인용 요트로 태평양을 횡단하는데도 상당한 준비가 필요하다. 지금의 북 능력으로 주 1-2회(재래식), 2주에 1회(개량형) 부상하는 잠수함으로 미에 위협세력으로 나가겠다는 것은 어선타고 태평양 나가는 모습이다.


 3. 국민의식과 국가의지


 북핵이 워싱턴과 뉴욕에 떨어진다면, 미가 한국을 위해 핵을 쓰겠는가? 하는 질문이다. 위기의 순간 우물주물 함이 미의 국가정신이 아니며, 우방의 약속을 단호히 지킴이 미의 국익이고 국가정신이다.


 가까운 역사를 보자. 태평양 전쟁,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는 일, 독을 철저히 응징했다. "원폭은 사과할 일이 아니다" 미와 일이 친밀함에는 의심이 없으나, 미는 이를 분명히 하고 있다.


 한반도의 핵문제는 미증유의 사례이다. 북이 한국과 미에 도전, 남과 북은 동족상잔과 유일의 분단국가에 이어 미증유의 핵공멸 국가가 되려하고 있다.


 세계사에 편재해있는 도전과 응전 속에서, 불굴의 국민정신 그리고, 국민적 지혜만이 생존과 번영을 보장해 왔다는 역사의 사례를 음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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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n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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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9
내가 왜...?

 

 작년 이맘때, 캐나다 6.25 참전용사 오찬모임 참석 후(Korean Veterans Annual Luncheon), 잠시 느낌이 있어 같은 제목으로 글을 쓴 바가 있다. 


 금년 10월 20일, 다시 보훈병원을 찾았다. 올해는 캐나다 참전용사 24명, 한국 참전용사 2명이 참가했다. 지난해에는 캐나다 참전용사 30여명이 참가 했는데, 인원이 줄어 식장이 좀 썰렁해진 듯했다.


 다행히 금년에는 한인회, 민주평통, 유공자회의 회장님이 참가했다. 감사하고, 좋은 일이다.
 

1970년 중반까지 캐나다 병사만의 행사였는데, 78년경부터 한-카 합동으로 모임을 갖고 있다고 한다. 몇 명의 인사에 이어, 성가대의 합창과 식사로 모임은 조졸하게 진행되었다.


 인생 끄트머리에 60여 년전 한국전에서 함께 뒹굴던 전우를 만나러 오는 길도 자꾸만 힘들어지는가 보다.


 오늘은 어느 분이 대포를 쏘는 자기 사진을 지갑에서 꺼내 보여 주었다. 비닐봉투에 싸여, 꾸겨진 사진은 21세때라 한다. 가평에서냐? 물으니, 서울 서북방 어디서라고 하신다.


 대포 옆 한편에는 포탄 박스가 자기 키만큼 쌓여있고, 맞은 편에는 탄피가 넓게 흐트러져 있었다.


 60년, 호주머니 속에서 사진도 이제 늙어, 할아버지 머리만큼 하얘지고, "내 년에 또 봐요" 하니 ‘누가 알겠소!’ 하듯이 어깨를 으쓱한다.


 한국 분은 금년에 두 분 참가하셨으나, 내년에는 10여분 이상 더 많은 분이 참가 하셨으면 한다.


 보훈병원 오찬모임과 오타와 6.25행사, 그리고 브램턴 현충행사에 또 가평전투 기념행사에도...


 인생의 끄트머리에 당도해서, 6.25때 생사를 함께했던 기억을 더듬어 보는 행사에 한국 참전용사가 좀더 참여하실 수 있도록 향군(회장 송승박)에서 노력하고 있다. 이제 몇 년 뿐이다. 


 필자는 이를 자칭 이순신 프로젝트라 부른다. 이 희망은 잘 이루어지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근본이 바르면, 길이 보인다"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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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30
캐나다 이야기

 

 얼마 전 일이다. 우선 좋은 이야기부터, 지난 3월 캐나다 국방부 초청으로 어느 공군 기지에 3박4일 다녀왔다(주1). ‘Visible minority influencer event’ 라는 이름으로 군 소개행사였다.


 체재비, 항공료, 기타 택시비, 잡비를 다 지불해주는 행사였다. 캐나다 공군기지내 군인생활을 보며 좋은 점도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갔다 온 다음의 이야기이다. 약속대로 영수증을 정리해 우송하니, 5개월 만에 수표가 왔다. 그런데 청구액수보다 다소 더 왔다. 웬일인가 생각하니, 우선 택시비용은 집에서 비행장까지는 집사람 차를 타고 갔으니 영수증이 없어 청구치 않고, 비행장에서 집에 오는 택시비(70달러)만 청구했더니, 편도 비용을 더해준 것 같다. 


 또 오가며 물 마시고, 커피 먹은 값은 성가셔서 청구치 않고 밥값만 제출했더니, 아마 물, 커피 값도 추정해 더해준 듯 싶다. 그렇게 생각하니 계산이 맞았다.


 다음 이야기는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이야기다. 작년 캐나다군 모집소(Canadian Forces Recruiting Centre)와 공동으로 향군은 CFRC 소개행사를 했다(주2).


 장소 임대비, 커피, 다과 등 모든 비용은 CFRC가 제공했다. 신문 광고비가 요구됐으나, 지난해에는 금년부터 지급키로 하고 타 조직의 협조를 얻어 (평통) 해결했다.


 금년에도 두 번 같은 행사를 가을쯤에 할 예정이어서, 7월부터 연락을 시도했다. 몇 번 e-mail, 전화를 했는데 불통이다. 안되겠다 싶어 회장에게 보고하니, 회장도 몇 번 시도하고, 직접 방문도 했는데 불통이다.
 다시 필자에게 알아보라고 업무가 되돌아 왔다. 일주일쯤 뜸을들인 후 mail을 보냈다.


 "몇 번 연락 했는데(several times), 답(reply)이 없다. 신사도(gentleman ship)를 지켜라(respect)", 답을 기다린다. 했더니 즉시 답이 왔다.


 "나는 필자의 mail을 처음 받는데...". 필자가 그간 연락했던 담당관(위관)은 제대해 없고, 그런 사이 일이 이렇게 된 것 같다는 차 상위자(영관)의 답신이었다.


 필자도 즉시 회신을 했다. "생각하니 당신의 말이 맞다." 그 간 담당자(위관)와만 연락을 했으니 차상위자인 당신에게 처음 e-mail 했음은 맞는 말이다. "사과 한다".


 그리고 곧 올해 일정회의를 갖게 됐고, 일은 다시 추진되는 듯하다. 광고비도 다시 상부에 요청하겠단다. 담당자가 전역하면서 생긴 일인 듯 했다(주3).

 

 주1) 초청장이 필자에게 왔다. "나는 부회장. 회장에게 초청장 보내라" 고 회신 했더니, "둘이 다 와라" 고 회신이 왔다. 마침 회장이 서울 공무 출장 계획이 있어, "사람 바꾸면 안 되겠나? "했더니, "너 혼자 와라".

 

 주2) 캐나다 군을 한인 젊은이에게 소개하고자, 우선 RMC(Royal Military Collage) 교장에게 편지를 했다(등기로). "사관학교 소개 및 입학안내 행사를 하고 싶다." 얼마 후 CFRC에서 연락이 왔다. "남, 여 군입대 및 사관생도 모집행사는 CFRC가 한다."

 

 주3) 그간 실무 합의로는 매년 소개행사를 두 번 할 예정이다. 캐나다군은 우선 봉급과 복지가 많고, 무엇보다 캐나다에 정착하면서, 주류사회 진입에 첩경이다.

 

 의사, 비행기 조종사뿐만 아니라 각종 기술 습득의 기회가 있고, 의무복무 기간도 한국보다 짧다. 예를 들어, 사관학교 졸업 후 의무복무 기간이 5년이다(한국은 10년, 필자가 군생할시 10년 후 전역은 사고를 치지 않는 한 불가, 20년 후 전역).


 우선 봉사하고, 내 앞길을 개척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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