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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성 안보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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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사관학교졸(1967)
1990년 이민, 캐나다 한의학교졸(침술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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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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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1
명량해전, 어떻게 이겼을까?

 

 

 1. 전국 상황


 임진년, 흉흉한 소문이 조선 장안에 돌았다. 선조는 일본의 의도를 알아보려 사신을 파견했으나 보고가 엇갈리고, 선조는 “설마…”로 판단 하셨는지, 준비가 없었다.


 1592년 4월13일, 일본 각지역 다이묘에서 출발한 군선이 대마도를 거쳐 부산 앞바다에 닻을 내렸다. 500여척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00년 통일전쟁을 끝내고 팽창된 군사력을 동원, 약육강식의 이론대로 이웃나라 약탈 전쟁을 시작한다. 조선의 남해관문, 부산진 첨사 정발은 당일 병사의 훈련 삼아 절영도에 사냥을 나간 참이었다. 사냥중 급보에 접한 첨사는 “다시 확인해보라”고 했으나, 다급히 사냥을 멈추고 입성한다.


 그날 저녁, 항복을 권하는 밀사가 접근했으나 이를 물리치니, 다음날 새벽 왜군이 상륙한다. 오전 성은 함락된다. 그로부터 왜군은 북상, 20일 만에 (5월3일) 선조가 떠난 한성에 무혈입성한다. “풍전등화”. 일본의 뜻은 조선의 항복이었으나, 선조는 평양을 거쳐 의주로 패주하면서, 항전을 계속한다.


 2. 해군상황

 

 원래, 조선의 골칫거리였던 왜구의 노략질이 전라도 연안보다 경상도 연안에서 심했던 관계로 평시 경상해역 해군 세력이 전라 해역 해군의 2배가 됐다. 이에 따라 건조, 보유, 훈련하고 있어야 할 전선의 수도 2배가 됐어야 했으리라. 그런데, 왜란 2개월 전에 부임한 원균이나 그 전임자가 직무유기를 했는지, 도무지 경상해역에 준비가 없었다. 다행히 왜란 14개월 전에 전라 좌수사에 부임한 이순신 제독이 있어 왜군이 침략하리란 소문 속에 실로, 전비태세 전반에 걸쳐 만전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부산 해역 방어를 책임진 경상우수사 원균의 요청에 따라 이 제독은 예하의 판옥선 24척을 이끌고 지원 출전한다. 원균의 4척이 합류하여 28척으로 외선 26척을 분멸하는 첫 해전(옥포해전, 5월 7일)을 치른다. 그리고 8월 24일까지 4차례 출전을 통해 10전 10승, 왜란 첫해에 왜선 320척을 분멸(부수고, 태우고, 가라앉힌다)한다. 조선 전선은 한척의 손실도 없다. 조선 땅에서는 왕이 계속 패주하고 있는데, 너무나 대조되는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1. 이순신(성웅) 제독의 준비


 자고로 준비된 자가 전장(Battlefield)을 지배한다. 성경 이야기 같이 하느님 군대가 싸움을 대신해 주지 않는 한, 승리는 장비, 인원, 전술에서 준비된 자의 것이다. 조선 해군의 완승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조-일 해군을 보자.


 가) 장비


 조선의 주 전선인 판옥선은 고려시대부터 이어오던 맹선을 보강해서 임진 100여 년 전에 이미 개발됐다. 맹선에 1층을 더 올려 3층으로, 1층에 노 젖는 군사를 두고 2층, 3층에 총포, 궁수의 배치 공간을 넓혀 화력을 증강 시켰다. 선체 길이는 20-30m, 쌍돛대, 노군 100여명, 사수 20여명, 총포수 30여명(포 16문)으로 총인원 130~160명이 탑승했다. 배는 소나무로, 두께 13cm(12~17cm)가 되어, 삼나무 두께 9cm의 왜선보다 튼튼했고 주 추진 동력이 되는 노와 돛은 왜선의 좌우 16개(외돛)에 비해 판옥선은 좌우 10여개 (쌍돛)를 장착했으나 기동력이 오히려 우수했다. (왜란중 도주하는 왜선을 추적 격파하기를 42척)


나) 인원


 선상근무는 육상근무보다 힘들고, 평시에도 위험부담이 많아 선원 보충은 항시 어려웠다. 첫 출전 때도 출항전일 도망병을 잡아 목을 베어야 했다. (영국, 넬슨 시절에도 런던 밤거리에 술주정군, 불량배를 잡아 선원으로 쓰곤 했다) 그러나 전쟁 중에는 왜군을 피해 이순신 진영으로 모여드는 피난민이 많아, 선원 보충에 보탬이 되기도 했다.


다) 전술


 왜 해군은 그 뿌리가 왜구, 해적이었고 일본통일 전쟁은 육상중심이었기에 해군이 발전할 소지가 없었다. 임진년 10번의 해전을 보아도, 왜선이 조선 해안에 도착하면, 우선 상륙, 해적 행위(약탈)가 시작됐고, 이 제독은 이런 상황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왜 해군의 주 전술은 승선 육박전(칼, 조총) 이었으나 이 제독은 왜선의 접근을 허락지 않고 유효 사정거리를 유지하며 인마 살상용 편전, 불화살, 장전 등 포를 집중 사격하여 전장을 지배했다. 


 비록 500여척의 왜 해군이 참전했으나 제해권을 확보한다는 개념은 아직 없었기에 육군수송(상륙)이 끝나면 왜선은 각기 소속별로 흩어져 조선연안 해적 행위에 몰두함으로서, 이 제독은 매 접전시 왜선보다 적지 않는 척수로, 거의 무방비 상태의 왜선을 공격하는 상황이 됐고, 판옥선 1척이 왜선 1척을 분멸시키는 데는 1-2시간이면 족했을 것이다. 고로 매 전투는 2-3시간을 넘지 않았다. 제대로 해상 전술이 적용된 경우는 한산대첩시 학익진과 안골포 해전시 장사진(일렬종대) 뿐이다. 이로 보아 이 제독의 주 전술은 근접 포위 집중 사격이라 할 수 있다. 왜군은 완패를 경험한 후 조선 해군과 해전을 금지한다. 추후, 전선을 대형화, 다량화하고 야간 기습으로 판옥선 1척당 5-7척의 왜선을 배치하여 공격한다는 전술을 택한다. 그리고 그 첫 해전이 칠천량 이었고, 왜의 새벽 기습 전술이 주효했다. 

 

명량해전


 조선해군 160척이 왜군의 기습으로 파멸됐음을 이 제독은 백의종군 중 득문한다. 수군통제사의 중책을 다시 받고 이 제독은 전라우수사 배설의 전선 12척이 남았음을 하늘의 뜻으로 알고 이로서 불멸의 결전을 다짐 하셨으리라 생각된다. 왜 해군은 비록 조선 해군의 주력을 수몰시켰으나 이 제독 예하의 10여척이 있는 한 해상병참선의 안전을 기할 수 없음을 잘 아는 터여서, 끝까지 추적에 나선다. 성웅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성웅으로서는 살아남은 십여 척에 국운이 달려있음을, 그래서 추적 함대를 피해 소함대를 어떻게든 보존코자 서쪽으로, 서쪽으로 진영을 옮긴다(회령포에서 어란포, 다시 진도 벽파진으로).


 이는 열세한 함대를 보존, 결전의 때를 기다리는 현존 함대의 전략이며, 성웅의 생존 전략이고, 치밀한 계획이었다. 성웅은 다시 한번 해전에 유리한 위치를 선점코자 명랑해전 전일 함대를 벽파진에서 우돌목 서편, 전라우수영으로 옮긴다. 성웅은 십여척의 세력으로 수백의 왜선을 퇴각시킬 결전의 장을 찾아 기다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간 모든 해전은 경상도 해역에서 있었고, 왜선은 전라도 해역에 진출할 일이 없었으나 성웅을 추적하며, 전라도 지역의 육전을 지원하면서(남원성 전투에 동원) 전라도 진도에까지 이른다. 추적과 피신의 두달이었으나, 9월 16일, 성웅의 정탐선이 “많은 적선이 명량을 통과해 우리 함대로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자, 결전의 때가 온 것을 안다. 


 성웅은 “적은 숫자로 많은 적을 막기 위해서는 좁은 길목을 택해야” 하는데 그곳이 명량 우돌목 임을 이미 알고 남해의 서쪽 끝단, 진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참이다. (우돌목: 폭 300m, 길이 2Km, 조류 최대 21Km/H) 300척의 왜 추적함대는 전선(세키부네) 133척을 앞세워 우돌목으로 진입한다. 조류는 왜군에 유리했다(서향). 초기, 우세한 세력이 성웅의 선단을 포위하려는 듯 했으나 오후 1시 조류가 바뀌면서(동향) 왜선단은 조류에 밀려 협수로로 밀려들어가는 형국이 됐다. 성웅이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 조선 해군은 조류를 타면서 접근, 준비한 전술대로 왜선을 향해 비오듯 화살과 총포를 쏜다. 편전과 장전으로 사살하고, 지.자.현 총포로 격파하며, 불화살로 불질러 버렸다. 오후 2시 왜선은 31척을 잃고 퇴각한다. 이때도 왜군이 시도 하려했을 승선 육박전은 없었다. 조선 해군의 주 전술대로 근거리 집중 사격으로, 우돌목 좁은 수로에 역조로 밀려, 전열이 흐트러진 왜선을 격파했다. 명량해전은 왜군이 협수로를 등지고 배진함으로 스스로 협수로에 몰리는 우를 범했고, “이 순간을 이 장소에서” 기다린 성웅의 승리였다. 활과 포의 특성상, 다수의 전선이 좁은 간격으로 밀집해 있으면 앞에 위치한 전선에, 뒷배는 조준 사격이 불가하다. 뒷배의 조준선(Line of fire)이 앞배에 가리게 되기 때문이다.


 반면, 성웅은 비록 소수이나 일렬 횡대진형 임으로 활과 포의 직선(조준) 사격에 방해가 없다(포위 전술의 이점). 이것이 13척으로 133척을 맞서 31척을 분멸시킨 불멸의 명량해전 설명이다. –성경을 가까이 하는 사람의 눈에는 하느님이 함께 하신– 그리고 그다음 해전, 노량에서 성웅 이 제독은 전사한다.

 

 같은 조선의 수군이었으나, 지휘관에 따라 결과가 달랐다. 같은 조선 민족이었으나, 이순신 밑에서는 연승을, 육상에서는 연패를 보였다. “명량해전: 어떻게 이겼을까?“의 답을 찾고자 하니, 정답이 눈에 선명히 보인다. 그것은 “지도자론”이었다. (참조: 이순신 평전, 이민웅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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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6
다음 6.25를 피할 수 있을까?

 

 

가. 서론


 Johns Hopkins 국제대, 한국 관련학 교수(전 미 국무부 한국 담당관)는 북한이 향후 5년(2020년) 핵을 최소 20개, 최대 100개 보유할 수 있을 것이라 예측했다(2/24/2015).


 현재 북은 10-16개 정도의 핵을 보유한 것으로 예측되며, 절대로 핵을 포기하려 하지 않아 갈수록 문제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NY Times).


 북이 1차 핵실험을 하기 전, 핵시설에 대한 선제공격을 상정하고 있을 때는 대체로 영변 정도가 목표였으나, 이제는 장소도 분산되고, 지하화 되어 선제공격으로 핵시설을 제거하기에는 늦었다는 평가도 있다(케리 차관).


 나. 본론: 왜 핵인가?


 1)한반도에 핵이 배치된 것은 제법 오래 전이다(1958년). 주한 미군의 전술 핵이 포대 발사용 등으로 70년대에 상당수 배치됐다. (주: 80년대 이후, 북의 핵개발 빌미를 줄 수 있다는 견지에서 점차 철수)
 월남이 패망으로 정리되고, 미중 관계가 개선되면서 닉슨의 주한 미군을 대폭 철수하겠다는 통보가 있자 남은 자주 국방의 필요로 핵개발을 시도한다.


 2)북은 6.25 이후 공산권의 원조와 국민의 노동력 동원으로 60년대에는 남을 능가하는 경제성장을 했으나(년 10 %), 70년대 주체사상이 북의 모든 분야를 지배하자 경제는 김씨 우상화 사업, 군비 증강, 핵개발에 밀려나고, 90년대 소위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다. (주: 마침, 미소간 군비 경쟁에 소련이 어려움으로 붕괴되고(1991), 대북 무상 원조도 대폭 감소된다.)


 3)수백만의 주민이 굶어죽는 빈곤 속에 북은 왜 핵에 매달리는가? 


 80년, 90년대에는 북도 자신의 안보 확보 수준에서 핵을 인식했다. 주한 미군의 핵 배치, 남의 핵개발 시도, 이란(후세인), 시리아(카다피)의 최후를 보면서 북은 안보의 불안과 남과의 군비경쟁에서 비대칭으로 우위를 점하려는 생각에 핵이 있어야 한다고 여겼다. 


 한반도의 비핵화는 선대의 유훈이라는 말을 반복하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북의 핵개발 이유는 안보였다. 그러나 그 후 몇번의 실험을 거치는 동안 북은 핵보유가 주는 새로운 관점에 눈을 뜨게 된다.


 가)21세기, 세계사에서 특이한 3세대에 걸친 독재 왕정의 유지를 위한 내부용으로, 나)세계의 빈국으로 가진 것이 없을수록 더욱 필요해지는 국가적 자존심 보존의 외부용으로, 이제 핵은 김씨 왕조를 보위하는 포기할 수 없는 북의 자산이 되고 그들 헌법에 "핵보유국“ 임을 명시하기에 이른다.


 그간 몇번에 걸쳐 체제 보장과 북한 주민을 다 먹여 살릴 충분한 대가가 주어지는 비핵화 합의가 있었으나 북이 이를 결국 마다한 점은 핵보유의 진정한 의미가 어디에 있는 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다. 결론
 북핵 문제에 대한 미국의 국가적 입장은 전략적 침묵이다. 실무급 수준에서는 지금도 노력하고 있지만, 미국에 있어 북은 중요한 나라도 중요한 이슈도 아니다.


미국의 입장은 

1)북의 핵보유 절대 불가,

2)핵확산 방지이다. 이 원칙하에 여러 노력을 멈추지 않겠으나, 일정 한계선을 넘으면 그때 조치하겠다는 입장이다.


 즉, 1)핵이 정교화, 소량화 되어 장거리 미사일에 탑재가 확실시 될 때(미 본토에 대한 위협의 확인), 2)핵의 국외 반출이 확실히 우려될 때(terrorist, 위험 국가로 이전 확인)


 이때에도 짧은 벼랑 끝 게임은 있겠지만, 결국 다음 6.25는 피할 수 없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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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6
월맹의 구정 공세

 

 

TV에 비친 참상, 히피에게 반전 명분 

 

 

 1. 배경
 19세기 들어 영.불의 아세아 식민지 쟁탈전에서 영국이 아편전쟁을 계기로 중국에 기득권을 갖게 되자, 불란서는 18세기부터 카톨릭 신부를 파송하고 있던 월남에 군대를 파견, 식민지화를 시작한다. 그로부터 외세의 수탈, 압제는 2차 대전 중 일본이 잠시 왔다 가고, 불란서가 다시 와 계속된다.


 17도선으로 남북이 갈리고 북에 월맹이 탄생하니, 그들은 수법대로 반대 세력을 숙청하고 일당독재를 확립한다. 남은 자유민주주의 초기의 신생 국가가 그러했듯이 사회적 혼란을 계속한다.


 2차 대전 전후 복구에 힘겨워하던 불란서가 물러나고, 세계의 경찰 미국이 인도차이나 반도의 공산화를 막고자 월남에 상륙한다. 그리고 1967년, 월남에는 한.미 연합군을 위시한 130만의 군사력을 갖는다.

 

 2. 진행
 월맹군 사령관 지압은 고교 역사선생 출신으로 불란서를 몰아내고, 통일을 염원했으며, 이러한 위기의 전세를 역전시킬 구정 휴전과 그리고 대기습을 계획한다.


 라오스-캄보디아 국경에 따른 호지명 루트에 남으로 향하는 물자수송이 증가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었으나, 67년 구정 휴전 때도 기습은 있었고, 접경지의 소규모 충돌이라 그 정도려니 했다.


 승자도 패자도 불명하고, 숲속에서 치고 빠지는 지루한 전투에 7일 휴전 제의는 마다할 수가 없었다.
 남에서 활동 중인 베트콩과 월맹군이 힘을 합쳐, 후방 주요 도시 사이공의 언론시설, 한미대사관, 사령부, 대통령궁, 그리고 미 해병 케산 기지, 비행장을 기습한다. 전후방이 없는 총력전이 한달간 계속된다.

 

 3. 심리전과 히피 문화
 당시 미국은 2차 대전 후 미.소 냉전의 핵 긴장에 지쳐(전쟁 문턱까지 갔던 쿠바사태, 지구를 몇번 파괴시킬 핵 보유) 전후 베이비부머를 중심으로 반전, 평화, 인간성을 추구하는 히피(hippie) 문화가 싹트고 있었다.


 마침, 그때 등장한 TV는 역사상 처음으로 전장의 모습이 현장 중계되고, 각 가정의 안방에서 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각 가정은 장기판의 훈수꾼같이 전장에 훈수 두는 지휘관(여론)이 됐다. 


 그 첫 방영이 월남전이다. 잠시나마 미 대사관이 점령당하고, 미 해병 기지가 포위 공격받는, 적과 나의 구분 없이 길가에, 대사관 뒤뜰에 나뒹구는 시체를 보며 평화를 사랑하자는 hippie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압은 전투에서 패배했으나, 심리전으로 승리했다. 당시 미군은 500여명 사상했으나, 베트콩은 4만 명의 손실로 거의 소멸된다. 그러나 TV에 비친 몇몇 참상은 hippie에게 굳건한 반전의 명분을 주어 여론의 나라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폭격 중지와 평화협정 제의, 그리고 닉슨은 최소 개입 주의, 미군 철수의 수순을 밟는다.

 

 4. 필자 생각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미군 철수, 평화 협정, 그리고 75년 대공세, 사이공 대사관 지붕에서의 마지막 11명 해병 철수로 긴 이야기는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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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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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1
세계의 핵, 한반도의 핵

 

 

 

<서론>

 


 1910년대 초 필자가 어렸을 때 학교에서 배운 퀴리부인(폴란드)이 방사선의 존재를 밝혀 핵 이야기를 이 세상에 등장시켰다. 1930년대에 들어 서구의 물리, 화학자들은 핵분열 현상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1938년 독일 과학자가(오토한) 우라늄 핵분열 현상을 발견한다. 1940년대에 들어 이의 잠재력에 눈뜬 영국이 원자탄 개발을 시작한다. 영국은 독일에 앞서 이를 개발, 선점코자 했다. 그러나 개발에 드는 재원이 만만치 않아 이를 미국에 넘긴다. 미국은 이를 확대, 맨하탄 계획(핵폭탄 개발 프로그램)으로 원자탄을 만들고 히로시마에서 전장실험에 성공한다. 원자탄 기본 이론이 발견되고 6년만이다.

 


<본론>

 


1) 미.영.불의 핵

 


 미국은 스스로도 핵폭탄의 파괴력에 놀라 이것이 전장에서 절대무기라는 것, 핵기술이 확산되어 너도 나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점에 주목한다. 맨하탄 계획에 합류했던 영국과 프랑스는 핵이 군사력의 총화이며 이것 없이는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다는 강박감에 핵 개발에 착수한다. 핵개발에 미국의 지원이 당연히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미 의회는 핵의 독점을 선포한다(맥마흔 법). 2류 국가와 이를 공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지원을 확대하다 보면 기술정보가 소련으로 갈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미국은 초강대국으로 핵을 독점함으로 세계경영을 주도할 수 있다고 본 것이고, 영국과 프랑스는 전후 세계의 재편에 핵 없이 강대국의 대열에 합류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핵개발에 매진한다.

 


 2) 소.중의 핵

 


 1930년 후반, 소련의 과학자들은 그간 활발했던 서구과학자들의 핵연구 발표가 사라지자, 이들이 핵개발에 착수했다는 낌새를 받는다. 그러나 40년대 소련은 미국의 무기를 빌려(대여), 전쟁을 꾸려나가는 터여서, 개발에 착수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 특기를 살려, 스타린은 동생 베리아(KGB총수)를 시켜 개발정보를 수집한다. 맨하탄 계획에 심어 놓은 첩자가 설계도를 빼오기로 하지만 핵개발이 이런 정보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방대한 시설과(200여개의 실험소와 기술인력), 관련 기술력이 없으면 추진할 수가 없다. 

 


 소련은 자본주의 서구에 대항하는 동구 공산권의 종주국으로 핵보유는 두번 생각할 필요 없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무기로서 개발을 시작했고, 냉전중 무지막지하게 핵을 개발, 보유하게 된다.(4600기)

 


 중국 역시, 강대국이 되든지, 또는 강대국의 지위에 핵 없이는 불가하다는 생각에 핵개발에 뛰어든다. 소련은 중국에게 돈도 많이 들고 쉽지 않다는 점과 공산권에서 한 국가만 갖고 있어도 된다는 점을 들어 중국의 핵개발을 막고자 했으나 중의 계속된 요청에 일부 지원을 한다. 즉 수명의 과학자를 보내, 중의 과학자들에게 핵강의를 하면서 “필기하지 마라, 나중에 sample을 줄테니까” 식으로(결국 주지 않았다), 소극적 지원을 하다가 1958년 중소국경 분쟁이 일자, 그간 갖다 놨던 연구 장비를 모두 들고 철수한다. 

 


 이미 서구의 몇 나라와 소련이 핵을 갖고 있는데 중국의 영토와 인구의 크기를 생각할 때 그에 걸맞은 국력을 갖추는데 핵은 중국에게도 두 번 생각할 필요 없는 필수품이다. 1964년 핵실험에 성공한다. 인해전술의 나라 중국이 최첨단 과학기술의 핵무기(원자탄, 수소탄, 핵미사일, 핵잠수함) 개발하는데 900여 개의 연구소가 필요했다. 그만큼 연구하고 투자할 분야가 많다는 것이다.

 


 3) 한반도의 핵

 


 동양의 빈국, 북은 왜 돈도 시설도 엄청 많이 드는 이 사업에 뛰어들었을까? 그동안 여러 번의 6자회담, 북미 접촉에서 충분한 보상, 불가침제의, 체제 보장 등 손해 볼 것 같지 않은 제의를 다했으나, 아는바와 같이 북핵문제는 지금의 상태가 되었다.

 


<결론>

 


 북에게 핵은 대외적으로 자존심이며 대내적으로는 체제 유지를 가능하게 하주고, 경제적으로 핵무기 수출을 자제한다 해도 일부 관련 기술, 부품을 수출하거나, 기술자 파견 등으로 필요한 외화와 기름을 챙길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남 사업이 용이해 질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핵개발은 국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또는 국가 생존(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을 위해 시작됐고 북한 역시 이 점이 초기 목적이었겠으나, 그간 보여준 행태로 보아 지금의 비핵화 불가 목적은 다분히 남을 흔들기 위해서 인 듯하다.(주1) 이것이 사실이라면 북의 도발은 공공연하게 되고, 사사건건, 거칠게 나오며 남의 전의를 상실토록 공작할 것이다. 또 각종 평화공세가 남의 혼란을 가중시킬 것이다. 

 


 이에 고무된 남의 추종세력은 그간 숨죽이던 세력도 합세해서 “때가 성숙 했다”고 빈번히, 공공연하게, 거칠게 행동하지 않을까 한다. 세상에 핵이 소개된 후, 그리고 향후 5년쯤(주2) 한반도의 핵은 그렇게 사용되지 않을까?(주3)

 

(주1)권력(Power)은 확장하려는 속성이 있는데, 핵(또는 핵 Power)도 그러하지 않을까?
(주2)Johns Hopkins 대학은 북한이 향후 5년내 핵을 20~100개 보유할 것이라 예측했다.
(주3)1992년 소련 대통령 옐친이 방한시 비밀 해제된 6.25 관련서류를 선물했는데, 그 중 김일성-스탈린 대화: 북은 평화통일 제의를 계속 내놓을 것, 남이 이를 거부한 후 기습 공격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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