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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선의 천천히 열리는 사진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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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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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6
스페인, 알람브라 헤네랄리페

 

2015-03-13

스페인, 알람브라 헤네랄리페

 

 일반적으로 궁전 관람의 마지막 코스는 사이프러스 나무로 둘러싸인 "헤네랄리페 정원 (Generalife Gardens)"이다. 쓰여 있는 대로 영어로 읽으면 제네랄라이프(Generalife), 즉 "일반적인 생활" 비슷한데 실제로는 헤네랄리페라고 읽으며 뜻은 아랍어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살고 있는 정원이라고 한다. 결국 만인지상인 왕이 살고 있는 곳이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어떤 설명에는 "여름궁전"이라고도 하였지만 건물들의 규모로 보나 위치로 볼 때, 그리고 정설에 가까운 자료에 의하면 여름동안 피서를 위하여 머무는 곳이 아니라, 슐탄이 궁에서의 일상에서 벗어나 산책을 하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그러나 유사시에는 즉시 환궁할 수 있도록 나스르궁전에서 지척에 조성된 아름다운 정원이다. 


 네바다산맥에서부터 수로를 이용하여 끌어 온 물이 쉬임없이 솟아나 "알람브라에는 고인 물이 없다!"고 하도록 궁전 안의 곳곳으로 계속 흐르면서 여름에는 더위를 식혀 주고, 기도시간에는 세정을 하게 하는 다목적 수로의 시발점이기도 한 Spanish-Muslim Garden이다.


 키가 큰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잘 조경되어 담장을 이루기도 하고, 아치형 문을 만들기도 하며 이어지는 커다란 정원 안에는 많은 분수와 연못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주 건축물 앞에 아름다운 분수가 연못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는 "아세키야 정원"(Patio de los Acequia)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이 정원에서 분수의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타레가가 "알람브라의 추억"을 작곡하였다고 한다. 스페인 낭만주의 음악의 꽃이라고 평가받으며, 타레가가 발전시킨 독특한 "트레몰로 주법"이 자아내는 신비로움과 서정적인 선율의 애절함이 마치 줄지어 영롱하게 떨어지는 물방울소리처럼 일품인 기타곡이다.


 알알이 가득 담긴 사연들마저 떨어지는 대로 부서지며 물에 흩어지는 물방울 소리를 들으며 사랑하는, 그러나 신분의 차이로 이룰 수 없는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을 그리며 애잔하게 연주되는 알람브라의 추억!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어찌 타레가만이 느끼었던 감정이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하는데… 그리고 즐겨 듣는 음률인데…


 물이 귀한 땅, 아프리카, 중동에서 살아온 이슬람교도들의 오아시스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을까? 물이 풍부한 스페인과 만나면서 아라베스크 무늬의 조각과 물 그리고 꽃이 어우러져 이국적 향취가 가득하게 조성한 알람브라궁전! 

 

 

 


 꼬불꼬불 돌아 나온 길이 엄청 긴 길이지만 놀램과 탄성으로 이어진 길이기에 피곤한 다리에도 불구하고 나간다는 아쉬움이 더 큰 아름다운 "알람브라"였다. 언제 다시한번 와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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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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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6
스페인, 알람브라 알카사바

 

2015-03-06

스페인, 알람브라 알카사바

 

 
 "붉은 성"이라는 뜻의 요새 알카사바(Alcazaba). 


 이슬람들이 장악하였던 이베리아반도에서 레콩키스타(그리스도교의 국토회복운동)에 의해 스페인 전역의 영역을 잃어가다가 마지막 남은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의 그라나다를 한눈으로 바라보는 구릉 위에 세운 붉은 요새다.


 그러나 결국은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5세 부부 왕에 의하여 1492년 그 운명을 다한 채 지금은 스페인 사람들이 당시의 승리를 기념한 종이 그 종탑에 걸려있게 되었다. 이 종이 울리면서부터 이베리아반도에 남겨진 아랍인의 유물과 문화는 기독교 문화로 덧칠하여지게 된다. 

 

 


 현재의 스페인 지역에 있었던 서고트왕국이 711년 이슬람 옴미아드왕조의 침입을 받아 붕괴된 후 이슬람 세력은 피레네산맥을 넘어 프랑크왕국까지도 노렸으나 732년의 "투르 푸아티에" 싸움에서 패배한 이후 이베리아반도로 물러나 정착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8세기 동안 피레네산맥 북쪽의 서유럽을 능가하였던 이슬람의 문화와 과학기술은 이베리아반도의 문화와 산업을 크게 발전시키어 많은 사람들을 모여들게 하였다. 


 이미 10세기에 코르도바 도서관은 60만 권의 서적을 소장하며 그리스철학을 연구하고 있었고, 11세기에 종이를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톨레도에서는 아라비아에서 시작한 연금술의 발전으로 질 좋은 칼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모든 권력과 문명에는 흥망성쇠가 있음"을 기록하여 주고 있으니 이제 우리는 그 자취를 보며 그때를 회상할 수밖에…


 알카사바는 지정학적으로도 높은 언덕위에 세워진 견고한 난공불락의 성채였으나 이슬람세력이 약해져 그 명운을 다한 것을 알게 된 마지막 왕, 나스르 왕조의 보아브딜은 이 성에서 수성하며 항전하기 보다는 아름다운 궁전을 파괴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궁전 아래 계곡 건너편의 작은 산인 사크로몬테 지역에서 최후의 항전을 한다. 보아브딜은 격렬하게 저항하다 결국 항복을 하게 되었으니 이 알카사바는 아름다운 궁전을 품고있다는 이유로 성으로서의 본분을 다하지는 못한 셈이 되나보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과 기독교 세력의 마지막 싸움터였던 그라나다! 그 싸움에 패한 이슬람이 떠난 후, 잠시 스페인의 왕궁으로 쓰이다가 방치되면서 폐허가 되어가는 오랜 세월동안, 집시들이 모여 살며 퍼트리는 무어 왕들의 이야기와 신비스러운 건축들이 어우러져 있으니 신화와 전설이 가득할 수밖에...


 미국의 작가 워싱턴 어빙이 폐허가 된 궁전에 머물며 이야기들을 모아 알람브라 이야기를 집필했다. 1832년 그의 소설이 발간되자 큰 인기를 끌며 알람브라가 주목받기 시작했고, 에스파냐 정부에서 궁전을 복원했다. 덕분에 그라나다의 상징이자 하이라이트인 알람브라궁전을 우리 같은 여행객이 체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성터는 우리에게 어떤 역사적 교훈을 주고 있을까? 아직도 그 싸움은 중동에서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데…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번영했던 이슬람 도시 그라나다. 무슬림 왕조의 지배는 1492년 기독교 세력에 함락되면서 과거가 됐지만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은 현재도 유럽에 세워진 아랍 최고의 유적으로 칭송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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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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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6
스페인, 알람브라 파르탈정원

 

 

2015-02-27

스페인, 알람브라 파르탈정원

 

 

 궁전이 아기자기하게 만들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여행하면서 본 중국이나 유럽의 궁전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특히 프랑스 파리의 베르세이유나 오스트리아 빈의 쉔부른 궁전은 넓은 부지에 위압적인 건물 내부를 수많은 그림과 거울들, 그리고 조각상들로 장식하며 절대권력의 부와 권위를 보여주었다면, 알람브라는 규모면에서 서민적이라 할 정도로 작고 현란한 채색의 그림들이나 조각상들도 없으면서 벽면과 천정을 가득 메운 단순한 기하학적인 문양의 흐름과 정교한 석회몰딩으로 탄성을 자아내도록 하는 아름다움의 연속이었다.


 왕들이 즐기던 증기탕들과 여러 부속 건물을 지나 나오면 알람브라에서도 특이한 역사를 갖고 있는 "파르탈정원"을 만나게 된다. 시간에 쫒기는 많은 사람들은 그저 먼발치에서 보며 지나가지만 이에 얽힌 역사를 한번 들여다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2층으로 보이는 것이 Las Damas(The Tower of Ladies), 즉 여인들의 탑이다. 이 건물은 무하메드 3세 통치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어, 알람브라의 모든 건물들보다도 더 오래된 건물이지만 나자리(Nazari)왕조 때에는 궁의 일부가 아닌 성 밖의 건물이었다. 정작 알람브라성 안에 들어선 것은 불과 100년 밖에는 안 된다.  


 당시 파르탈을 소유한 "아더 본 거위너(Arthur von Gwinner)" 씨가 1891년 3월에 스페인 정부에 기증한 이후에 알람브라에 합류 되었는데, 지금처럼 아름다운 궁전이라기보다는 평범하고 오래 된 집과 몇 그루의 나무만이 낙후된 벽과 천정을 가린채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 천정에 있었던 아름다운 조각은 마지막 소유자가 떼어내어 베를린에 있는 페르가몬 박물관에 기증, 지금까지도 그 곳에 전시되어 있단다. 1930년대부터 스페인 정부는 많은 역사학자, 고고학자 그리고 예술인들의 고증을 바탕으로 뺏긴 유적들을 사들이기도 하고, 발굴하며 대대적인 조경공사를 거쳐 알람브라에 편입시킨 결과 오늘에는 많은 사람들이 알람브라에 들어오면서 그 섬세한 조각으로 꾸며진 아름다움에 놀라고, 혹은 나가면서 시원한 그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곳이 되었다.

 

 "알람브라의 옥의 티"라고 하는 카를로스 5세의 별 볼품없는 궁전이지만 한번 둘러보자. 카를로스 5세 궁전(Palacio de Chrlos V)은 알람브라의 다른 건물들과는 아주 대조적인 유럽의 르네상스 시대를 반영한 로마풍의 건물이다.


1543년, 카를로스 5세가 이곳에 궁전을 짓게 된 배경에는 그의 조부모인 이사벨여왕과 페르난도왕이 당시 이슬람교도들인 무어인이 최후까지 버티던 그라나다에서 항복을 받은 그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비적인 제스처로 이슬람이 피운 꽃인 알람브라에 새 궁전을 지어 위세를 떨치려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1568년, 이곳에 남아 있던 무어족들의 반란으로 15년간 건축이 중단되었다가 반란이 진압 된 후 재개되었으나 1637년, 재정부족으로 지붕이 설치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기한 공사가 연기 되었다.


 결국 아직까지도 미완인 채로 1층은 알람브라 박물관이 들어서 있고, 중앙의 원형광장은 가끔 공연장으로 사용이 되기도 한다. 매년 여름 그라나다 국제음악무용제가 열리며, 수년전에는 성악가 조수미씨도 이곳에서 공연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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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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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6
스페인, 알람브라의 꽃 나스르궁(2)

 

 

2015-02-20

스페인, 알람브라의 꽃 나스르궁(2)

 

 메수아르궁을 돌아 코마레스궁에 있는 대사의 방을 빠져 나오면 나스르궁전 중에서도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코마레스 궁의 안뜰인 "아라야네스 정원(Patio de Arrayanes)"이 나온다. 가운데엔 이슬람 건축물이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연못이 자리잡고 있다. 


 알람브라궁 안에서도 큰 연못에 해당하는 직사각형의 연못 주변에 천상의 꽃이라는 "아라야네스"가 심어져 있어 이렇게 불리는데 아직은 꽃이 필 때가 아니어서인지 그 천상의 꽃은 볼 수 없고, 하늘과 궁전이 반사되어 천상과 지상을 합쳐 주는 듯 황홀한 전경을 만들어 준다.


 어떤 안내서에서는 인도의 유명한 타지마할도 여기에서 착상을 하였다고 하는데… 허긴 이곳보다 약 300년 늦게 지어진 타지마할이고 보면 그동안 누군가가 와서 보고 차용하였을 수도 있었겠지만 아직 타지마할을 직접 보지 못하였고, 그 건축에 얽힌 이야기조차 생소한 나에게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건축가들의 정점이 어쩌면 서로 닮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조금 더 앞선다.


 고여 있는 듯 잔잔한 수면에 시간에 따라 변하는 코마레스궁과 그 대칭에 있는 코마레스탑의 반영이 보는 사람의 넋을 앗아가지만 실은 항상 흘러 움직이는 이 물이 궁전 곳곳을 돌면서 한여름 열기를 식히고 사람들의 마음과 몸을 정화한다고 한다.  


 발코니 뒤로 이 아름다운 정원의 스카이라인을 망치는 건물이 "알람브라의 옥의 티"라고 하는 카를로스 5세의 별 볼품없는 궁전 지붕이다. 


 이 건물 왼쪽으로 들어가면 4명의 왕후와 후궁들의 거처가 있는 사자의 중정(Patio de los Leones)으로 연결이 된다.

 

 

 

정확히 좌우대칭인 아라야네스정원의 다른 쪽에서 보는 코마레스 탑과 그 반영이다. 아라야네스를 양쪽에 두고 직사각형의 수로를 만들어 보는 곳에 따라서 서로 다른 반영이 수면에 나타나게 설계되었다. 거대한 연못에 비치는 그 반영이 너무 아름다워 "그라나다는 물 위에 궁전을 지었다"는 격찬을 받는다. 

 

 

 


 라이온궁 중정에 12사자가 받치고 있는 분수반이 있어 물줄기를 품어내지만, 내가 갔을 때에는 분수 대신에 사자의 입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옛날에는 어느 입에서 물이 나오는가가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구실을 하였다고 한다. 


 다른 정교한 몰딩 조각에 비해 사자상의 조각은 수준미달인 것 같은 느낌이 드나, 동물이나 사람의 형상을 조각하지 않는 이슬람의 전통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돌아가면서 지어진 왕족들, 특히 후궁들의 방 가운데 정원에 사자상이 있다는 것이 좀 의외였다. 


 하긴 솔로몬의 궁전에도 안채에는 그 많은 부인들이 들고 온 이방신상들이 있었다니까… 부인이 하겠다는 것을 어느 남자가 막을 수 있겠는가? ㅎㅎㅎ


 사자의 중정을 에워싸는 몇 개의 방과 시설은 왕의 사적 공간, 즉 왕 이외의 남자들은 출입이 금지된 할렘이다. 알람브라의 내전인 셈이다. 중정은 124개의 대리석 기둥으로 에워싸여 있으며, 기둥머리를 아치로 연결한 모든 벽면에는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 만들었을 것 같지 않은 정교하고 유려한 석회 세공이 빈틈없이 입혀져 있다. 

 

 

 


 124개의 기둥마다에 새겨진 조각들의 문양이 유럽의 다른 어떤 곳에서도 볼 수 없는 화려하고 여성적인 섬세함을 느끼게 한다. 


 궁 안으로 들어가 위를 쳐다보면 또 한번 놀라게 된다. 정교한 모카라베(Mocarabes) 양식의 천정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사자분수 주변의 방들 중에는 아름답기로 유명한 "아벤세라헤스의 방"과 "두자매의 방"이 있다. 그런데 이 방에는 슬픈 전설이 있다.


 "아벤세라헤스"는 그라나다의 왕 보아브딜과 대립했던 강력한 북아프리카 왕족의 이름인데 이 가문의 한 젊은이가 보아브딜의 후궁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단다. 이 사실을 안 왕이 연회를 핑계로 아벤세라헤스 가문의 젊은이 36명을 이방으로 불러, 연회 중에 모두 다 참수하였다는 슬픈 이야기이다.


 순식간에 그 아름다운 방은 피로 물들었고 그 핏물이 정원의 사자 입으로도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벌집형상의 그 천정은 정말로 현란하여 보는 이의 넋을 놓게 만들었다.

 

 

 


 두 자매는 두 여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두개의 똑같은 대리석이 있어 붙여진 왕비의 방이다. 왕비의 무릎을 베고 누워 달콤한 이야기를 들으며 별이 쏟아지는 듯 한 저 천정을 바라보는 왕의 기분은 어떠하였을까? 
 라이온분수를 중심으로 주위로 만들어진 많은 방들마다 가득한 이슬람 조각의 최고봉을 보여주는 정교한 모카라베(Mocarabes) 양식의 천정을 보노라니 그 옛날의 시간 속으로 공상의 나래를 펴게 한다. "천일야화", 즉 "아라비안나이트"의 이야기들이...

 

 모카라베(Mocarabes) 양식: 이슬람 전승에 의하면 마호멧(Mahomet)이 추격자들을 피해 광야로 도망 다니다 히라(Hira)라는 동굴에 숨어 있을 때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코란을 받았다고 한다. 이 동굴의 천정에 많은 종유석들이 천사의 광채에 빛났었다고 하여 후일 이슬람성지가 되었는데 여기에서 종유석 모양을 벌집형태로 만들어 천정을 장식하는 방법을 모카라베양식이라고 한다.


 여기서 잠깐 혼동을 정리하자. 지난 호(83회)에서 "카를로스 1세"라고 했다가 여기서는 "카를로스 5세"라고 하였으니 당연히 무언가 하나는 틀렸다고 생각이 될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같은 사람인데,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가 신성로마제국인 유럽의 "카를로스 5세"가 되도록 그 당시의 정치권이 혼미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안내서를 쓰는 사람이 어느 관점에서 쓰는가에 따라서 1세가 되기도 하고 5세가 되기도 한다. (여행지에서 들은 이름과 집에 와서 책을 보며 보완하다 보니 두 곳에서 다른 표기를 하게 된 것 같아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카를로스는 영어로는 Charles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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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6
스페인, 알람브라의 꽃 나스르궁(1)

 

 

2015-02-13

스페인, 알람브라의 꽃 나스르궁(1)

 

 

 나스르궁전의 입장은 관람시간이 정해져 판매된다. 이 시간 안에 못 들어가면 애써 비싸게 산 입장권이 무효가 된다. 하루에 입장할 수 있는 사람의 수가 6,800명으로 정해져 있으니.


 이 시간 안에 둘러보려면 대개는 기도실과 대사의 방 등이 있는 메수아르궁(Sala del Mexuar)에서 시작해 아라야네스 중정이 있는 코마레스궁을 거쳐 왕비들의 거처가 있는 사자의 중정을 지나 두 자매의 방을 본 후 파르탈정원을 거쳐 나오게 되는 바쁜 순서다. 


 이 모두가 하나의 흐름으로 구성돼 있어 가이드북을 보면서 하나하나 살피지 않으면 지금 어디에 와있는지 구분이 어렵다. 


 메수아르궁에는 왕의 집무실과 접견실, 그리고 기도실 등이 세라믹타일과 석회석 몰딩으로 온 벽을 빈틈없이 장식하였고, 천정은 주로 나무목각을 짜 맞추어 장식되어 있다.


 창으로는 과거 이슬람 거주지이자 최후의 항전을 벌였던 알바이신과 사크로몬테 언덕이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에서 알라에게 기도하며 평안과 편안 그리고 부귀영화를 간구하며 또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부와 권위를 내세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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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6
스페인에 핀 이슬람의 꽃 알람브라 궁전(1)

 

2015-02-06

스페인에 핀 이슬람의 꽃 알람브라 궁전(1)

 

 

 

 "스페인 땅은 안 아까운데 알람브라 궁전을 빼앗긴 게 아깝다"

 


 이슬람세력의 마지막 왕, 나스르 왕조의 보아브딜이 북아프리카로 퇴거할 때 눈물을 흘리며 한 말이다.

 

 알람브라(Alhambra)는 아랍어 그대로 "붉다"라는 뜻을 지닌 궁전과 성곽의 복합단지이다. 1238년부터 1358년 사이에 지어진 스페인 남부, 그라나다 지역에 머물던 아랍 군주의 저택이었던 곳이다. 1492년 탈환 후 많은 사람들이 "옥의 티"라고 하는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이 카를로스 1세 때 추가되었지만 현재에는 이슬람 건축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한국어로는 알함브라 궁전이라고 쓰는 경우가 많지만 영문 식으로 그냥 읽는 경우이고, 아랍어가 스페인어로 굳어져서 쓰이고 있는 Alhambra라는 이름은 스페인어에서 "h"가 묵음이므로 "알람브라"라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많은 책들이 그냥 "알함브라"라고 사용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알람브라"로 쓰기로 하며 2~3회에 걸쳐 함께 둘러보기로 하자.


 스페인어로 석류는 "그라나다(Granada)"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영어로 수류탄을 그리네이드(grenade)라고 하는데 그 안과 밖이 너무나도 석류와 닮았다는 것이다.


 이런 이름을 가진 도시, 그라나다는 스페인의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에 있는 고대도시로 기원전 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711년부터 시작된 이슬람교도들의 정착에서부터 시작되어 1238년부터 건축되기 시작한 알람브라 궁전에서 화려함의 절정을 이루게 된다.


 왕궁이 완공된 후 150년 정도가 흐른 1492년, 이슬람세력의 마지막 보루였던 그라나다에서 이슬람과 가톨릭 세력이 최후의 전투를 치르게 된다. 이사벨여왕과 페르난도왕의 연합군을 이끈 곤잘로 데 코르도바가 이끈 "레콩키스타(Reconquista)"의 마지막 전쟁에서 이슬람세력이 패색이 짙어지자 알람브라 궁전을 내주고 궁전 아래 계곡 건너편의 작은 산인 사크로몬테 지역에서 최후의 항전을 하여 사크로몬테 언덕을 피로 물들이며 장렬하게 죽어갔다. 결국 항복한 왕족을 위시하여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북아프리카로 돌아갈 수가 있었다. 


 이렇게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스페인에서 축출한 1492년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면서 스페인 ‘대항해 시대’의 막을 연 기념비적인 해이기도 하다. 


 승자의 전리품이 된 알람브라 궁전은 한때 스페인 왕궁으로 사용하기도 했으나, 17세기 이후 스페인 왕조가 몰락하면서 시작된 사회의 불안과 내전 등으로 인하여 세인들의 관심에서 사라지고 주변은 집시들의 서식처가 되어 황폐해졌다. 


 1832년, 미국의 작가이자 당시 미국 공사관으로 마드리드에 머물던 워싱턴 어빙(Washington Irving: 1783-1859)이 이곳을 여행하며 수집한 전설과 야사들에 기초하여 집필한 ’알람브라의 전설’이 인기를 끌면서, 19세기 들어 늘어난 여행자들과 유럽 역사학자들에 의해 그 아름다움과 역사적 가치가 입증되고 복원됐다.


 스페인의 기타 연주가 및 후기 낭만파 작곡가,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 타레가(1852년 11월21일~1909년 12월15일)는 그의 제자이자 유부녀인 콘차 부인을 사랑하게 되어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였으나, 그녀는 타레가의 사랑을 거부하였다. 요즈음 같았으면 교수와 여제자의 불륜으로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겠지만 실의에 빠진 타레가는 스페인의 이곳저곳을 여행하다가 그라나다에 위치한 알람브라 궁전을 방문하게 된다. 그는 이 궁전의 분수에서 자신의 사랑을 반추하며 클래식 기타음악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지는 "알람브라의 추억"이라는 기타곡을 쓰게 되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아직까지도 클래식 기타 매니아라면 이 곡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인지도를 자랑한다.


 결국 스페인을 점령하였던 이슬람의 건축 중 가장 화려한 그라나다의 "알람브라"가 미국의 소설가와 스페인의 음악가에 의해 재발견되어 오늘날까지 스페인을 관광대국으로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알람브라는 하루에 6,800명만 입장이 가능하기에 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면 이곳까지 와서도 못보고 갈수 있는 스페인의 대표관광지다. 


 이슬람 건축의 특징은 아라비아의 사막에서 시작된 이슬람세력이 점차 커지면서 페르시아에서는 편자(말발굽)모양의 아치와 도자기 장식, 그리고 벽토를 이용한 몰딩장식을 가져왔고, 비잔티움이라 불리던 동로마의 이스탄불에서부터는 둥근 반구형의 돔 지붕구조를 가져 왔다. 아프리카의 이집트를 거쳐 이베리아 반도까지 장악하는 동안 이집트 건축에서는 여러 기둥들이 바치고 있는 큰 공간을 차용하여 형상과 조형의 극치를 이룬 것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종교적으로 사람의 형상을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10세기경에 동로마를 휩쓴 성상파괴운동하고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때부터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로 분리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풀 모양, 그리고 기하학적인 선과 아랍어를 형상화한 문양만으로 그 큰 사원을 아름답게 치장할 수가 있었다. 아라베스크(Arabesque)라고 불리는 이 문양이 당나라를 거쳐 한국에까지 전파되어 우리가 말하는 "당초무늬"가 된 것으로, 오늘에도 알람브라 궁전에서 우리의 "매듭양식"을 볼 수 있는 이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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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6
역사의 숨결을 간직한 스페인 코르도바

 

2015-01-30

역사의 숨결을 간직한 스페인 코르도바

 

 

"메스키다". 스페인어로 "땅에 이마를 대고 기도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즉 이슬람교도들의 예배 모습이다.


 이슬람이 전성을 이룬 8-10세기 80만명이 살던 서유럽 제일의 도시, 코르도바는 20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하는 동안 여러 민족들의 침략에 의해 주인이 바뀌다보니 자연히 건축과 문화에 일가견을 가진 로마인과 이슬람인들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 도시가 되었다. 


 그리하여 오늘에도 스페인의 곳곳에 산재해 있는 성당들은 대개가 로마인들이 지은 성당의 터전 위에 이슬람사원이었던 것을 다시 성당으로 개축한 것들이다. 그래서인지 많은 성당들이 아랍의 건축양식과 유럽의 건축양식이 혼합되어 이베리아 반도 밖의 유럽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하고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되었다.

 

 


 남북으로 180m, 동서로 130m에 이르는 "메스키다" 또한 이슬람이 이곳을 지배하기 전 로마시대에 지어진 성당자리 위에 화강암, 대리석, 백옥으로 된  1,000개의 원주가 천장을 받치고 있는 엄청난 규모다. 카를로스 5세 때 "알론소 말라께" 대주교가 모스크의 중앙에 있는 150여개의 기둥을 허물고 성당으로 개조를 하였지만, 사원 전체로 볼 때에는 극히 작은 부분이 되어서 오늘날까지 이슬람의 자취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유럽 최대의 모스크이자 세계에서 3번째로 큰 회교사원으로 남게 된 것이다.


 후일, 세비야에서 포르트갈 공주 이사벨과 결혼식을 올리고 이곳을 방문한 카를로스 5세가 대주교에게 "이렇게 위대한 것인 줄 알았더라면 당신들이 파괴하도록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요. 왜냐하면 당신들은 다른 곳에 적용할 수 있는 공사를 세계에서 하나뿐인 장소에 적용시켰기 때문이오!"라고 하였을 정도로 아름답고 특이하게 지어진 사원이었다.

 

 


 이슬람이 이곳을 지배하던 785년에 짓기 시작하여 사원이 완성되었으나 계속 늘어나는 인구들을 감당하기 위하여 848년에 일차로 증축하고, 962년에 2차로 증축을 해야만 하였는데 한 면이 성벽이다 보니 그쪽으로는 더 늘일 수가 없게 되어 원래의 대칭적인 구조를 유지 할 수 없게 되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특이한 구조를 이루게 된 것 같다. 


 전기가 없던 그 시대이기에 증축을 하면서 채광을 위해 고심한 흔적들은, 많은 기둥들을 옥 혹은 빛을 통과시킬 수 있는 대리석으로 만들어 기둥 자체가 빛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헌에 의하면 150여개의 다른 모양과 크기의 램프들이 황동, 은, 구리 등으로 만들어져 내부를 밝혔다고 한다. 


 지금도 성당 중앙의 제대 위에 걸려있는 램프는 지름이 182cm에 무게가 200kg이나 되는, 은으로 만든 예술품이지만 램프들이 몇 개 안 남은 요즈음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받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상당히 어두운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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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6
스페인, 마하스-안다루시아의 에센스

 

2015-01-23

스페인, 마하스-안다루시아의 에센스

 

 

 스페인의 남부, 지중해 연안에 길게 이어진 휴양지를 "코스타 델 솔(태양의 해변)"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스페인, 포르트갈 여행에는 아프리카 북단에 위치한 모로코가 끼어 있어, 가는 길이던 돌아오는 길에 꼭 통과하는 곳이 코스타 델 솔의 중심이며, 피카소의 고향인 말라가이다. 인구 50만 명의 비교적 대도시다. 


 페니키아인에 의해 만들어지고 로마, 서고트족,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지배되었던 역사 깊은 곳이지만 워낙 짧은 시간에 관광해야 할 곳이 많은 스페인이다 보니 많은 여행 안내자들이 이곳을 그냥 거쳐, 꼬르도바로 가는 길목에 있는 작은 마을, 마하스에서 잠시 쉬어 간다.


 마치 동화나라처럼 아름다운 경치로 옛날부터 안달루시아의 에센스라고 불리었다. 언덕길로 이어지는 마을을 당나귀가 끄는 마차를 타고 한 바퀴 돌며 보는 하얀 집들과 저 아래로 보이는 파란 지중해는 환상, 그 자체로 정말로 동화의 나라에 들어 온 느낌을 가지게 하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옛날 해적의 약탈로 부터 피하기 위해 바다에서 잘 안 보이는 산 중턱에 집을 짓고 산 것이 마을의 기원이 되었지만 말라가 해변이 안달루시아 지방의 휴양지로 각광을 받게 되자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하여 마을을 아름답게 가꾸고 백색으로 칠하여 파란 지중해의 아름다운 전경을 가진 백색 마을이 된 것이다.


 하얀 벽을 유지하기 위해 시에서 1년에 한 번씩 칠을 하며 관광객 유치를 위해 애를 쓴다하니 조상이 물려준 유산이 비록 볼품없더라도 후손들이 잘 가꿔 유지하면 훌륭한 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생히 보여 주는 마을이다. 


 이 마을의 상징은 당나귀다. 그래서 마을의 중심 마요르 광장에 당나귀동상을 만들어 놓곤, 이 위에 앉으면 남은 여행을 무사히 끝나게 하여 준다나…?


모두 당나귀에 앉아 기념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한다.


 그 옆으로 지중해를 향한 절벽 위에 마리아 동굴 성당이 있고 마을 곳곳에 예쁜 선물가게들이 즐비하다. 이곳에 성모님이 발현하였다는 전설에 따라 동굴을 파서 작고 아담하게 지은 암굴성당은 다른 여러 성당에서 보아온 웅장하고 화려함보다는 아주 작고 소박한, 마치 밧모섬에서 보았던 요한 계시동굴을 연상케 하였다.
 바다를 향한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이는 지중해까지도 같은 느낌을 주는 아름다운 정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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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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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6
유대인의 역사와 은행의 탄생

 

2015-01-16

유대인의 역사와 은행의 탄생

 

 스페인의 큰 도시들을 다니다 보면 관광코스 중에 어김없이 만나는 좁은 골목길이 있다. 좁지만 아름답게 가꾸어진 유대인 거리다. 보존이 잘 되어 고색창연한 유대인 거리를 걸으면서 현재 전 세계에 펴져서 음으로 양으로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유대인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하여 본다. 


 까마득한 옛날, 성경의 창세기는 하나님으로부터 축복받은 아브라함의 적자 가문인 야곱의 후손들이 살던 땅에 기근이 들어 애급으로 이주하여 400여년을 사는 동안 큰 무리를 이루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 동안에도 야곱의 쌍둥이 형은 장자의 축복을 빼앗긴 채로 가나안땅 에돔에 거하며 그들대로 큰 부족을 이루었다. 그 당시 지중해 연안의 가나안땅에는 노아의 맏아들 셈계의 해양민족인 "필리스(Philiscines 구약에서는 블레셋)가 거주하고 있었던 곳이었다.


 이 후 우리가 "십계"라는 영화로 잘 아는 유대민족의 이집트로부터의 대 탈주가 시작되면서 하나님이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을 되찾기 위한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출애급 시기가 전개된다. 이후 유대인들은 BC 1050년경에 사울, 다윗,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왕정시대 전성기를 이루며 이 지역을 유대지방이라고 불렀다. 


 그 후 유대 나라는 남.북으로 분열 되었다가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였지만 선민의식이 투철한 유대인들은 이 지역을 유대지방이라 하며 자기네들이 뭉치는 구심점으로 삼아 "오시는 메시야"를 기다리는 시기로 구약성경이 끝을 맺는다.


 신약성경이 시작되는 시기, 기원전에서 기원후로 바뀌는 예수님이 오시는 시절에 이 땅은 로마의 속국이었다. 그러나 워낙이 변방이었고, 또 다스리기가 쉽지 않은 유대민족이기에 로마에서는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며 이네들에게 많은 자율권을 허락하며 통치하여 왔었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당시 유대에서는 독립을 외치는 세력들이 일어나고, 로마에서는 티토장군이 이끄는 대군단이 평정을 와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돌 위에 돌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성전은 파괴되고 예루살렘과 그 백성들은 유린되었다. 


 그 후 60년이 지나며 좀 조용해지는가 싶을 때 별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 코크바를 중심으로 하여 로마에 대한 반란이 다시 시작되었다. 로마가 또 가만히 있었겠는가! 3여년에 걸친 처참한 정복전쟁 끝에 그 유명한 "마사다의 최후"를 맞게 된다.


 로마의 하드리안 황제는 지금까지 유다로 부르던 속국의 이름을 "시리아- 팔레스티나"로 바꾸며 유대인들을 다 축출하였다. 더 이상 유대인이 이 땅에 대한 애착을 갖지 못하도록 한 조치였다. 이후로 이 땅은 이스라엘이나 유대가 아니라 팔레스타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때부터 야곱의 후손들, 즉 유대민족들의 디아스포라가 시작 되었던 것이다. 


 이때에도 에서의 후손들, 그리고 셈의 후손들은 그냥 이 땅에 남아 정착하였기에 자연히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된 것이다.


 결국 유대인들은 남의 땅 이집트에서 400년을 살다가 탈출하여 가나안인들 로부터 탈취한 유대 땅에서 1,000여년을 살다가 다시 그 땅을 떠나 2,000년 가까이 세계를 유랑하게 된 것이다.


 그때 고향을 등진 많은 유대인들이 로마를 통하여 유럽으로 흘러들어 갔지만 핍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 당시 유럽에서는 "게토"라고 하여 유대인 밀집지역을 만들어 놓고는 그 안에서만 생활하도록 하였었다니까. 그러나 좀 더 서쪽으로, 그 당시의 땅 끝인 이베리아반도에서는 그래도 조금은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가 있었기에 많은 유대인들이 그곳으로 몰리게 되었다.


 당시 이베리아반도에는 450년경에 이곳을 정복한 서고트인들이 살고 있었지만 711년 7월 베르베르족이 해협을 건너 침공, 수도 톨레도를 비롯하여 포르투갈 등을 차례로 정복하고, 스페인의 거의 모든 지역에 지배권을 확립했던 시기였다. 그동안 아랍인들은 끊임없이 이주해왔지만 전 국토를 식민지화  하기에는 너무 소수였기 때문에 그들은 행정적•군사적 조직을 구축하고 서고트인들에게 봉토를 나누어 주며 체제를 유지해 나갔다. 


 당시 이베리아반도에 산재한 여러 제후국들의 인민들은 세 계급중의 하나였다. 정복자들로 구성된 귀족 아니면 승려(사제) 그도 아니면 토착 원주민인 농민이었다.


 이런 시기에 이곳으로 유입한 유대인들은 지역의 권력자들이자, 자기네들의 종교와 같은 야훼를 믿는 이슬람교도의 열렬한 동맹자가 되어 박해를 피할 수 있게 되었고, 어느 정도 자유를 얻을 수가 있었다. 


 가톨릭 세력권에 있던 유럽 대륙에서 항상 쫓겨 다니던 유대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틈새를 파고들어 장사를 하는 일이었다. 장사가 무엇인가? 유통이 아닌가? 유통을 할 수 있는 기준은? 돈이다.


 귀족이나 승려, 농민들까지도 살다보면 필요한 것이 돈이다. 돈이 필요는 한데 주머니에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빌려야하지 않겠는가! 돈을 가진 사람들은 유대인. 그래서 돈이 필요한 귀족이 유대인을 부르면 유대인은 달려와 감히 귀족집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문 앞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주인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였던 것이 그 당시의 관습이었다. 그러면 귀족이 나와서 벤치에 앉아 지불 날자와 이자를 상의한 후 계약서를 쓰고 유대인은 돈을 빌려주는, 즉 거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Bench가 스페인어로는 Benco며 여기서 Bank가 유래 되었다.


 계약서를 쓰려니 유대인들은 자연히 공부를 많이 하게 되었고, 남의 땅에 와서 서러움 속에 사는 유대인들이기에 악착같은 심성은 결국 "샤일록" 같은 인물을 만들게 되어 가슴살 한 파운드를 담보로 하게까지 되었나 보다.


 귀족들이라고 꾸었던 돈들을 다 제 때에 갚을 수가 있었을까? 이를 제대로 갚을 수 없었던 귀족들은 자신의 영지 속에 살고 있는 농민들을 부추겨서 유대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아니면 정치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유대인들을 억압하게 되는 일들이 자주 벌어지게 되니 유대인들은 항시 야반도주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만 하였다. 


 야반도주할 때 가장 챙기기 쉬운 물건들이 귀중품, 즉 금과 돈이었기에 이네들은 악착같이 부를 축적하면서 정치에 슬그머니 개입을 하여 정치적인 방어망을 만든 것이다.


 어느 정도 생존권을 보장 받은, 돈이 있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학문의 세계, 예술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이겠지. 그래서 많은 유대인들의 거리는 그 당시 시내의 중심부에 화려하게, 그러나 지나치게 크지는 않게 형성되었던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영국에 많은 경제적 협조를 하였던 유대인들이 얻어낸 결과는 그 옛날, 2,000년 전에 쫓겨 나왔던 그 곳, 즉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계속 거주하여 오던 지중해변가의 땅에 이스라엘을 세우는 것이었다.


 3,000년 전에 여호수아가 힘겹게 싸워 얻었던 그 땅을 지금 다시 힘겹게 싸워 얻으려고 하는 것이 요즈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들의 땅 다툼인 것이니 참으로 질긴 세월의 투쟁인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싸워야 평화롭게 공존할 수가 있을까? 아마도 이 힘겨운 싸움을 미리 아시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가나안에 들어갈 때 가나안인들을 다 진멸하라고 명하신 모양이다. 그런데… 인간적인 욕심으로 그러지 않은 응보를 지금 받는 것일까? 아니면 지금 그 말씀을 이루려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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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6
스페인, 콜럼버스의 무덤

 

세비야 대성당 안에는 그 당시 스페인을 대표하던 카스티야, 아라곤, 레온, 나바라의 왕들인 4명에 의해 떠메어진 채 아직도 허공에 떠있는 콜럼버스의 관이 있다. 앞의 두 왕은 콜럼버스를 지원해 준 카스티야, 아라곤 왕이라 고개를 들고 있고, 뒤의 두 왕은 콜럼버스의 계획을 거절한 왕이라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이라 한다. 왜 그의 관은 허공에 떠있는 것일까?


 지동설을 주장하던 사람들이 화형을 당하던 1480년대에 "저 바다 끝으로 나가면 그 비싼 향신료의 원산지이며 금.은.보화가 가득한 인도로 갈 수 있다."며 배를 달라는 콜럼버스의 주장은 미친 광인의 외침에 가까워 아무도 그를 도우려 하지 않았었다.


 더구나 그의 고향인 도시국가 제노아에서는 그가 원하는 배를 만들 수 있는 조선술조차 없었기에 1484년, 그 당시 해양 강국이던 포르투갈에 가서 포르투갈의 왕 주앙 2세에게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희망봉 루트를 준비 중이던 왕이 허락하지 않자, 에스파냐로 갔다. 


 당시 에스파냐는 카스티야와 아라곤, 레온, 나바라로 구분되어 있었고, 이중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가 카스티야를 공동 통치하고, 페르난도가 아라곤을 단독 통치하는 상태였다. 정치, 지리, 종교적 통일을 이룩하고 국가의 비상을 꾀하며 해외 진출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이사벨과 페르난도 부부는 1486년 1월, 콜럼버스를 만나 그가 요구하는 사항들을 듣게 되었다.


 콜럼버스는 1.기사와 제독 작위, 2.발견한 땅을 다스리는 총독의 지위, 3.얻은 총 수익의 10분의 1 이라는 조건을 제시하자 포르투갈에서와 마찬가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집과 집념이 대단한 독설가이기도 한 콜럼버스가 여왕 앞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한 말, "여왕님은 그래도 나이보다 젊어 보이십니다."


 이 한마디의 말 때문 이어서였던지, 아니면 당시 포르투갈 교회에 대한 경쟁의식으로 더 넓은 선교지가 필요했던 스페인 교회의 성직자들이 여왕을 설득했던 이유에서인지 결국 이사벨이 콜럼버스를 등용하였다.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를 해군 제독에 임명하였고, 그가 발견하는 것의 10%를 콜럼버스의 소유로 한다는 조건하에 선박 2척(핀타호와 니나호)을 내주고 과거에 죄를 지은 자들은 면죄해 준다는 조건으로 승무원 모집에도 협력해 주었다. 또한 팔로스항(Palos)에 사는 핀손이라는 선장이 자기 소유의 선박인 산타마리아호가 함께 참가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페르난도 왕과 이사벨 여왕은 이슬람 세력의 최후 보루인 그라나다 공략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을 때였으므로 콜럼버스의 계획에 대한 최종결정은 그 후로 미루어질 수밖에 없어, 실질적인 항해는 6년이나 지난 1492년 8월 3일에야 세비야에서 제1회 항해의 출범을 할 수가 있었다. 


 같은 해 10월 12일에 현재의 바하마 제도(Bahamas)에서 과나하니 섬(추정)에 도달했고, 이곳을 인도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 콜럼버스는 신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기 위하여 산살바도르(San Salvador, 구세주의 섬)이라 칭하였다. 이어서 그는 쿠바와 히스파니올라(오늘의 아이티와 도미니칸 공화국)에 도달하여, 이곳 원주민을 인디언이라 칭하였다. 


 완전한 성공이라고 판단된 첫 번째 항해 덕분에 두 번째 항해(1493. 9. 25 출발)때는 17척의 배에 1,500명에 달하는 승무원이 경쟁적으로 승선했다. 그러나 히스파니올라 섬에 도착하자마자 일행의 희망과 기대는 실망과 불만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금광채굴에 징발되었던 원주민의 반란도 만성화되어 있었다. 콜럼버스는 황금과 향료 대신 반란을 일으킨 원주민들을 노예로 본국에 송환했으나(1495) 이사벨 여왕의 분노만 사고 말았다. 


 이같이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세 번째 항해(1498. 5. 30 출발)에 나서 향료가 나는 섬을 찾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아무 성과가 없게 되자 1500년 8월 그의 통치능력을 심사하기 위해 섬을 방문한 시찰관 보바딜리야에 의해 콜럼버스는 족쇄가 채워진 채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이렇게 해서 콜럼버스의 시대는 사실상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1502년 니콜라스 데 오반도가 새로운 총독으로 임명된 뒤 마지막인 4번째 항해(1502. 5. 9 출발)를 하여 파나마 지협 일대를 배회했지만 아무런 수확도 없이 귀국했다(1504. 11. 7). 


 결국 약속대로 이사벨 여왕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신대륙의 지배자로 군림하며 많은 금과 노예들을 유럽으로 데려오게 되나 그를 후원하던 이사벨 여왕이 죽자 대신들은 콜럼버스를 처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그 뒤를 이은 페르디난드 2세는 그의 재산을 몰수하는 등 콜럼버스는 궁지에 몰린 상황이 되었다.


 이에 콜럼버스는 자신의 아들에게 "내 시신을 신대륙에 묻어 달라"며 "죽어서도 절대 관에서조차 스페인 땅을 밟고 싶지 않다"고 유언을 했다. 콜럼버스는 1506년 5월 21일 스페인의 바야돌리드에서 죽었다. 이미 몰락한 가문이 된 그의 시신은 처음에는 스페인 세비야에 묻혔으나, 후손들에 의해 1542년 히스파니올라(현재의 도미니칸 공화국)의 산토도밍고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 후에 스페인이 이 섬을 빼앗기게 되자 그 시신을 다시 스페인으로 옮겨가 세비야 대성당에 안치하게 된 것이다.


 얼마 전 산토 도밍고 성당에서 콜럼버스의 유골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견되었다는 신문 보도가 있었듯이 여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상기한 설이 지금까지는 가장 정설로 여겨진다. 


 일반적으로 "미대륙 발견"은 백인들의 시각에서는 1492년의 콜럼버스의 중남미 제도의 발견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다른 설로는 1421년 명나라 정화가 미 대륙을 발견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서쪽으로 간 바이킹의 한 갈래가 아이슬란드를 거쳐 그린란드를 발견하고, 캐나다 북동부에 상륙하여 콜럼버스보다 500여 년 전에 신대륙을 발견했음을 고고학자 안네 스티네 부부가 입증하였다. 오슬로에 있는 바이킹 박물관 앞에 그들의 흉상이 전시돼 있다. 그러나 바이킹은 이곳을 식민지화 하지 않은 채 돌아갔지만 유럽인들은 미 대륙에 상주하며 약탈하고 자신들의 부로 이용하였기에 콜럼버스가 발견하였다고 하는 모양이다.  


 그들이 유럽으로 가져간 금은보화와 진귀한 식물, 감자, 담배, 그리고 많은 노예들이 결국에는 유럽의 근대화를 이루어 주었고, 풍족한 살림살이는 문예부흥을 주도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남아메리카에 있었던 잉카와 마야의 문명은 몰락을 하고 말았다. 


 진정 ‘발견’이라는 말은, 그리고 ‘발전’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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