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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정숙
    문협회원
    부동산캐나다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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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과 미스 킴 라일락

 

 지난 4월, LA의 데칸소 정원(Descanso Garden)으로 동백꽃 구경을 갔다. 데칸소 식물생태정원은 삼만 오천 그루 이상의 동백꽃나무숲으로 유명하다. 원예 종 동백(Camellia)이 주종이지만 빽빽한 동백나무숲을 비집고 다니노라면 한국토종 홑겹동백꽃도 만나게 된다. 외국에 살면서 고국에서 즐겨보던 꽃을 만나면 어떤 꽃을 막론하고 반갑기 한이 없지만, 그 중에서도 무궁화와 동백꽃은 마치 친정처럼 포근한 마음의 안식처를 준다.

 

무궁화가 위엄을 갖춘 나라꽃으로 한민족의 사랑과 애국심을 일깨워준다면 동백꽃은 조선여인의 절개와 법도를 펴내는 지순한 꽃이라 할 수 있다. 사금을 입힌 듯 반짝이는 짙푸른 나뭇잎들 사이에 얼굴만 살짝살짝 내보이는 검붉은 토종 동백은 언제나 머리에 동백기름을 발라 앞가르마를 반듯하니 참빗으로 빗어 옥비녀를 꽂은 절도 높은 규방여인을 연상시킨다.

 

이에 비하면 원예 종 동백꽃은 크기도 두 손바닥 만한데다 겹겹으로 치장한 서양무희들의 치맛자락처럼 화려하고 펄럭대서 그만큼 경박스러워 보이고 정이 덜 간다. 한 겨우내 하얀 눈 속에서 안으로 정열을 불태우는 토종 동백과는 달리 원예 종은 또 낙엽수이고 일찍 꽃이 진다.

 

동백꽃은 해홍화 산다화라 부르며 물에 빠져 죽음으로 정절을 지켰다는 어부의 아내를 기리는 여심화란 이름도 있다. 이미 동백꽃의 절정기는 지났지만 늦게 피는 꽃이라도 있을 거라는 기대감으로 정원으로 들어서는 데 난데없이 라일락 향기가 진동하며 몰려들었다. 코로 스며들어 온몸으로 퍼져가는 듯 모세혈관을 자극한 꽃향기가 눈을 아리게 했다. 햇빛이 반짝해서 봄이오나 보다 하면 한 순간에 바람이 불고 눈까지 퍼부으며 변덕을 부리는 캐나다의 더딘 봄이 짜증스러워 멀리까지 찾아 온 공원이었는데 가슴 깊이 안겨 드는 라일락향기가 두꺼운 더께를 산뜻이 씻어주었다.

 

향기를 따라가는 벌, 나비처럼 발걸음은 저절로 그리로 끌려갔다. 해마다 튤립축제와 함께 라일락향기가 온 도시를 휘감는 ‘오타와’는 물론이고 캐나다의 어느 곳도 라일락꽃 순을 내기는 아직 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LA의 날씨도 제법 차다며 라일락동산에 들어서는데 'Miss Kim Korean Lilac'(미스 킴 한국 라일락)이라 쓴 표지판이 턱 하니 앞을 막아 섰다.

 

한국 라일락이라니 깜짝 놀랐다. 작은 꽃망울들이 뭉텅이로 모여 있는 진 보라색 꽃송이들 옆에는 분홍색, 흰색 꽃 덩어리가 한데 어우러져 저마다 향기를 한껏 내뿜는 중이었다. 잎이 나기 전에 꽃이 먼저 피는 라일락동산은 색색으로 피어나는 뭉게구름이 쏟아놓은 듯 온몸은 금새 풀솜마냥 라일락 꽃 냄새에 흠씬 젖어 들었다.

 

미스 킴 라일락은 두꺼운 식물도감에 버젓이 학명 Syringa Patula Miss Kim(시링가 파툴라 미스 킴) 이라 올라있고, 북미주 제일의 라일락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쓰여 있었다. 1947년 미국군정청 소속 식물채집가 ‘미러’가 남한의 어느 산속에서 정향나무(털게 회나무) 종자를 미국으로 가지고 가서 육종 개량하여 만들어낸 라일락으로 자신의 연구를 도와주던 여성 ‘미스 킴’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보다 더 추운 기후에서 잘 자라며 아름답고 향기가 강열하고, 추위와 더위를 잘 견디며 병충해와 공해에 강하다고 줄줄이 덕목이 적혀있었다. 4월에 라일락꽃향기를 맡을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 추위에 잘 견디는 체질개선 때문이었던 것이다.

 

한국소녀가 ‘미스유니버스’에라도 당선된 듯 덩달아 어깨가 으쓱해지며 대견하였다. 하지만 육종개량과정을 읽어보니 ‘미스 킴 라일락’이 되기 위하여 토양과 추위를 견디고 싹이 나서 첫 꽃을 피울 때까지 십여 년의 시간을 실험실에서, 냉방에서 혹독한 단련을 겪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꽃이 거쳤을 온갖 고난을 떠올리니 청운의 꿈을 이루기 위해 갖은 고통과 시련을 겪은 초기 이민자들의 모습과 겹쳐지며 흐릿한 영상들이 어른거렸다.

 

백여 종족의 민족들과 경쟁하며 삶의 터전을 일구어야 하는 대부분의 한인은 언어장애와 성과부진으로 좌절하고, 이질문화에서 오는 사회적 불안이나 대인관계로 곤욕을 치렀다.

 

인종차별의 공포에 시달리고 이루지 못한 꿈에 절망하여 삶마저 포기하는 극한의 소식도 드물지 않게 들렸다. 그러나 오늘, 전 미주에는 이런 1세대들의 눈물이 거름이 되어 정계에서 학계에서 그리고 전자과학 분야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한인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마치 수수알갱이처럼 한데 뭉쳐서 향기를 발하는 라일락 꽃송이처럼 서로 협동하며 보다 활기차고 명랑한 사회를 이루어 가고 있다.

 

옹기종기 붙어있는 꽃송이를 살며시 어루만져보았다. 손끝에 스치는 꽃송이들이 뭉치라, 힘을 내라, 참고 승리하여 향기를 발하라고 뜨거운 입김을 토해내고 있었다. 수륙만리 이역 땅에서 외로움을 견디며 안으로 자신을 가꾸어 온 강인한 한국 여인상을 만난 듯 절로 우리의 발걸음엔 탄탄대로를 밟는 무게와 힘이 솟구쳤다.

 

품위 있고 심지가 곧은 규방여인의 은은한 표상이 동백꽃이라면 지성과 아름다움을 연마하여 현대여인의 재색을 고루 갖춘 청순한 꽃은 단연 ‘미스 킴 라일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정원 울타리 안에 마주하고 서서 향기로 들숨날숨 속내를 주고받으니 멀리 떠난 외로움은 바람결처럼 날아가 버리고 깨끗이 비워진 마음그릇엔 단단히 영근 지혜와 절도 높은 심성으로 가득 차고 넘친다.

 

새 삶을 열기 위해, 한 시름 짊어지고 그 그늘 찾는 나그네 있거든 보일 듯 말듯 살풋한 미소에 향기 담뿍 담아 새 소망과 힘을 얹어줄 우리의 여인 꽃들이 한없이 자랑스러웠다. 다시는 더디 오는 봄을 불평하지 말아야지. 돌아 나오는 내 몸에서 라일락꽃향기가 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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