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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정숙
    문협회원
    부동산캐나다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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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소리


 
 내 귀는 소라껍질
 바다의 소리를 듣는다.

 

 

 느닷없이 ‘장 콕토’의 시가 떠오른 것은 순전히 날씨 때문이었다. 잊을 만하면 다시 오고 다 갔나 싶으면 닥쳐와서 기승을 부리는 추위에 온몸을 잔뜩 움츠리고 떨고 있는 내 귀에 불현듯 남쪽 바다가 밀려 왔다. 


 나는 바닷물 속에 들어가기보다는 바라보는 걸 더 좋아한다. 물속에서는 물의 밀도에 갇힌 듯 답답하지만 시야에 거치는 것 없이 훤히 트인 바다는 내 마음 속 구석구석까지 시원하게 씻어 주어 바다만큼이나 넓어진 빈 마음공동에 온갖 소리가 고스란히 고여 왔다. 


길게 뻗은 모래사장과 솔밭 사이에 울퉁불퉁 솟은 너른 바위에 올라앉으면 하얗게 거품을 물고 쫓아오던 파도가 철석이며 부서지고, 보기만 하면 끼윽 끼윽 몰려드는 물새들이 반가웠다.


솔밭 사이를 훑으며 돌아 나온 한줄기 살랑바람이 모든 소리들을 잠재우고 고요한 바다에 노을이 지면 태양을 삼킨 바다는 시뻘겋게 끓어오르며 모든 번뇌를 쉬게 하였다. 


나는 바다의 숨소리, 바다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를 더욱 즐거워하였다. 아득한 수평선 저 너머에도 물이 있듯이 또한 바다의 소리는 흰 돛단배처럼 통통거리며 먼 날을 떠올려 주기도 하였다.


 그 해의 여름은 유별나게 더웠다. 졸업을 앞두고 실습 나온 교생들의 교무실은 이층 구석방이었는데 가뜩이나 긴장된 예비선생들은 단정한 외양을 위해 정장까지 하고 있었으니 무덥기가 한증막이었다. 지육 덕육 체육의 사범이 되는 훈련을 흐트러짐이 없이 이행하는 첫 난관이 무더위의 극복인 듯 시달렸다.


 어느 날 일찍 등교한 나는 흑판 모퉁이에 ‘장 콕토’의 시 두 줄을 써 놓았다. 교생들마다 모두 시원한 하루를 맞이하게 된 듯 기분이 상쾌해져서 환성을 질렀다. 


그런데 다음날 와 보니 한 남학생이 두 줄의 시 구에서 끝 자 한자씩을 지워 놓았다. ‘내 귀는 소라 껍. /바다의 소리를 듣는. ’ 그 다음날도 글자 지우기는 계속되어서 ‘내 귀는 소. /바다의 소리를. ’ ‘내 귀는. /바다의 소리. ’ 이렇게 되어갔다. 우리는 매일 아침 교실이 떠나가게 웃으며 더위를 날려 버렸다. 


 졸업과 함께 친구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나는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태평양을 건너기 전에 나는 인천 앞바다를 보고 싶었다. 언제 다시 보게 될지 모르는 고국산천의 한 자락을 마음에 담으려는 바램이었다. 기왕이면 섬에 가서 인천 땅을 바라보리라 생각하고 월미도로 향하였다. 


썰물에 물이 빠진 방파제는 대로같이 뻗어있어 갈 때는 바닷바람을 마시며 흥겹게 갔는데 불과 몇 시간 뒤에 시작된 밀물은 나를 당황하게 하였다. 내 달음질보다 더 빠르던 물결이 무릎까지 차 올랐을 때에야 숨이 턱에 차서 간신히 인천부두에 도착하였다. 그 무섭고 겁나던 경험은 오래 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때를 바로 알라고 늘 충고해 주었다.


 태평양과 대서양을 양쪽에 낀 캐나다 땅에서의 지난 일생은 양 대양의 파도만큼이나 거세고 바쁜 삶이었다. 세계를 한 가슴에 안을 듯 부풀었던 열정들은 부서진 포말처럼 주위를 맴돈다. 마치 시구에서 끝 자를 지워가듯 하나씩 떨어져 간 내 꿈은 말도 안 되는 서정의 흔적만 내 이마에 물결처럼 지어 놓았다.


 그때 무덥던 교무실에서 우리가 들은 바다의 소리는 이상과 도전에의 강렬한 부름이었다면 지금은 어떤 것일까? 


 ‘인생이란 다 그런 것이지. 밀물도 있고 썰물도 있는 것. 결코 서두르지 말고 좌절도 말고 언제나 한결같아야 되는 것이지.’ 


 오늘 계속 글자를 지우다 보니 ‘귀’도 ‘나’도 없어지고 ‘바다’만 남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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