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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우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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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곡(思母曲) 불현듯 생각나는 어머니

 

-살아생전에 할 도리 다할걸

 어머니와 아버지가 누워 계신 대청호반 기슭

 

‘盤中(반중) 早紅(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나다/柚子(유자) 아니라도 품엄즉도 하다마는/품어 가 반길 이 없으니 그를 설워 하노라.’ -박인로 조홍시가(早紅?歌)

 

 나는 치아 관리에 꽤 신경을 쓰는 편이다. 이가 그리 튼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식사가 끝나면 바로 이를 닦는 습관이 있다.

 

 예로부터 치아 건강이 오복 중 하나라고 강조하지 않는가. 사실이 그렇지는 않지만 오복 중 하나인 ‘강녕(康寧)’에 치아 건강까지 포함되는 것으로 해석된다.

 

0…가끔씩 이가 아플 때마다 돌아가신 어머니 모습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살아생전에 치아로 무척 고생하셨다. 그러고 보면 치아건강도 집안 내력인가 한다.

 

 연세 40이 넘어 막내인 나를 낳으신 어머니는 내가 열살 무렵부터 거의 매일 치통으로 고통을  받으셨다. 그야말로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으시던 모습이 아른거린다.

 

 그때만 해도 치과라는 곳이 도회지에나 몇 군데 있어 우리처럼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이가 아파도 치과에 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웬만하면 그냥 참아내고 말았다.

 

0…어머니는 밥상에 고기가 오를 때면 당신께서는 이가 아파 못 먹으니 너희들이나 먹으라며 고깃점을 자식들 그릇에 담아주곤 하셨다. 그러다 고기가 몇 점 남으면 시원찮은 치아로 오물거리며 씹느라 애를 쓰시던 모습이 선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시골동네를 돌아다니며 ‘야매’로 틀니를 해주는 어느 돌팔이 아저씨에게 돈 몇푼을 주고 틀니를 해넣으셨다. 그런데 싼게 비지떡이라고, 이것이 덧나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렀고 결국 도회지 치과를 찾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어머니는 그곳에서 아픈 이를 모두 빼고 새 틀니를 해넣으셨는데, 틀니를 닦으려고 입에서 빼내면 어머니의 입은 완전히 합죽이가 돼버렸다. 젊으실 땐 선녀처럼 고우시던 어머니가 치아로 고통받는 동안 이내 할머니로 변해버리신 것이다.      

 

0…어머니가 고생하신 것이 또하나 있으니 해소기침이었다. 자나깨나 기침을 달고 사셨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 면담을 위해 가끔 학교에 오시는 날도 어머니는 예외없이 교실 한쪽에서 얼굴이 벌겋도록 기침을 해댔다.

 

 그러면 어린 나는 어머니의 고통보다도 친구들에게 창피한 생각만 들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특히 다른 친구들 엄마는 대부분 젊은데 우리 어머니만 얼굴이 쭈글쭈글한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젊은 친구들을 은근히 부러워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가 그처럼 늙어 보이셨던 것은 이런저런 지병으로 고생하셨기 때문이었다.

 

0…세월히 흘러 이제는 내가 어머니와 비슷한 처지가 됐다. 40살에 늦둥이 딸자식을 두었으니 얘도 친구들 앞에서 “우리 아빠만 늙었다”고 할 것 아닌가.

 

 그나마 특별한 질환은 없으니 이 정도의 건강체질이라도 유지할 수 있게 낳아주신 어머니 아버지께 감사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사실 나는 여섯살 때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아버지라는 호칭 자체에 익숙하지 못하다. ‘아버지’를 불러본 기억이 별로 없다. 그러니 성년이 되도록 오로지 ‘엄마’만 부르며 지내다 막상 엄마가 돌아가시니 천애(天涯)의 고아가 된 기분이었다.

 

0…어머니를 대청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선영에 묻던 날, 호숫가에서 유품을 태우는데 내가 군에 있을 때 보내드린 손편지가 곱게 보자기에 쌓여 있었다. 어머니가 구식 한글표기로 써보내신 편지에 대한 답신이었다.

 그 편지들을 보는 순간 나는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0…어려서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등을 잇달아 잃은 내 가슴 한켠엔 나도 모르게 허무주의가 싹터 갔던 것 같다. 지금도 내가 즐겨 쓰는 문구 중 하나는 “인생은 한갓 뜬구름 같으니 모든게 부질 없다”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이별을 겪어본 사람은 대개 이런 허무주의 경향에 빠지는가 싶다. 어머니가 세상을 뜨신 후부터 나는 노래를 불러도 꼭 ‘사의 찬미’ ‘추억의 소야곡’ 같은 청승맞은 곡을 선택하게 됐다.  

               

0…지난주 어머니날을 보내며, 예전 어머니를 생각하노라니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다. 기일(忌日)도 바로 이즈음이다. 어머님이 누워계신 대청호반의 산소엔 지금쯤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었을 것이다.

 

 10여년 전 한국에 갔을 때 선영을 찾으니 봄가뭄에 호수는 허리를 반쯤 드러내고 주인없는 나룻배만 물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이 못난 막내에게 ‘그 무슨 영화(榮華)를 보겠다고 그 먼곳까지 가서 고생이냐’고 말씀하시는 듯했다.

 

 큰절 두번 올리고 눈을 들어 앞을 보니 호수는 그대로인데 사람만 변해가고 있었다. 나도 언젠가는 고향 선산에 묻힐지, 아니면 낯선 타국땅에 묻힐지…

 

0…아직 부모님이 살아계신 사람은 그 자체를 행복으로 알고 살아생전 잘해드릴 일이다. 돌아가신 후 제삿날에 드시지도 못하는 술잔을 올리며 훌쩍거린들 소용이 없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한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 해도/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심순덕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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