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전쟁 배경 영화-‘해밀턴 부인’(Lady Hamilton)(5·끝)

 

■ 넬슨의 '트라팔가르 해전' 승리와 전사(계속)

 넬슨의 장례식은 다음해인 1806년 1월 8일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국장으로 거행했다. 32명의 제독과 100명의 함장들, 1만 명의 수병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다. 넬슨이 평소 원하던 대로 나일 해전에서 격침한 나폴레옹의 기함 오리앙(L'Orient) 호의 돛대로 만든 관에 넣어 안장되었다.

 

 • 넬슨은 귀족 출신도 아니었고 정부에 이렇다할 연줄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평민' 출신이었기에 전과에 비해서 항상 부족한 보상을 받았다. 또한 당시로서는 엠마와의 염문이 넬슨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상부는 넬슨을 그녀와 떨어뜨려놓기 위하여 바다로 내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 1843년에 영국 런던 트라팔가르 광장에 넬슨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그의 동상은 그의 기함이었던 HMS 빅토리호의 돛대 높이와 같은 55미터 높이의 기둥 위에 서서 영불 해협을 바라보고 있다.

 

 • 트라팔가르 해전 당시 그가 승선하였던 빅토리 호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해군 선박으로 영국 포츠머스 해군 기지의 왕립해군박물관(Royal Naval Museum)에 보존되어 있다. 매년 10월 21일은 '트라팔가르의 날'로써 영국 해군 기념일이 되었다.

 

 • 그를 죽게 한 탄환은 윈저 성(Windsor Castle)에, 그가 당시 입었던 옷은 피탄자국이 선명한 상태로 그리니치의 국립해양박물관(National Maritime Museum)에 전시되어 있다.

 

 • 2002년 영국의 BBC가 100만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 투표에서 무려 9위를 차지했다. 이 순위는 장군, 제독으로 한정하면 1위.

 

■ 엠마 해밀턴 부인의 말년

 1803년 4월 남편 해밀턴 경이 사망하고, 1805년 10월에 연인 넬슨 제독을 잃고, 국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 참가조차 허락받지 못한 엠마는 그나마 영원한 후원자였던 어머니 카도건 부인, 즉 메리 키드마저 1810년 67세로 사망하여 슬픔과 실의에 찬 나날을 보낸다.

 

 그 후 넬슨의 본부인 프란시스 넬슨으로부터 푸대접을 받았다. 특히 넬슨의 형 윌리엄 넬슨(William Nelson, 1757~1835)은 동생의 전사로 인한 모든 영예와 부를 챙겼음에도 불구하고 유언을 따르기는커녕 해밀턴 부인과 딸 호레이샤를 문전박대했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얼마 되지 않은 재산마저 가로챈 못돼 먹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전성기 때의 낭비벽이 심한 라이프 스타일을 바꾸지 못한 엠마는 도박과 사치 생활에 빠져 빚더미에 앉아 채무자 감옥에 투옥되기도 했고, 세상의 무관심 속에서 음주로 방황하다 1815년 1월 15일 영국을 떠난지 6개월만에 프랑스의 칼레(Calais)에서 49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호레이샤 넬슨은 엠마 사망 후 영국으로 돌아왔는데, 넬슨의 누나들이 아주 예뻐하며 잘 키워주었다고 한다. [註: 호레이샤 넬슨은 어머니 엠마로부터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및 독일어를 배우고 스스로 스페인어도 공부하여 우아하고 훌륭한 숙녀로 성장했다. 엠마는 호레이샤를 상류사회에 등극시켰으나 14살 때 빚만 남기고 사망함으로써 무산되었다.]

 

 호레이샤는 북(北) 노포크 교구의 목사 필립 워드(Philip Ward, 1795~1859)와 21살 때인 1822년 2월 19일 결혼하여 7남3녀의 자녀를 낳고 조용히 살았다.

 

 그런데 호레이샤는 1845년 전기작가 니콜라스 해리스 경에 의해 부친이 넬슨임을 알았으나, 죽을 때까지 엠마를 자신의 어머니로 인정하지 않았고 다만 넬슨 제독이 입양한 고아 양녀인 자신의 '보호자(guardian)'이었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14살까지 엄마와 같이 살았다는 걸 고려하면, 엠마가 남긴 빚이 너무 많아서 그걸 피하기 위해서 부인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그녀의 비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넬슨 제독의 사랑하는 딸이며 필립 워드 목사의 미망인 호레이샤 넬슨, 1881년 3월 6일 80세로 여기 잠들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엠마의 과거 회상 이야기를 듣고 있던 창녀 메리 스미스가 엠마에게 넬슨 사망 후의 얘기가 궁금해 묻는다. '다음은요?'

 엠마가 반문한다. 다음이 뭐라고?

 메리: 그 후 어떻게 됐냐고요?

 엠마: 다음도 없고, 그 후도 없다네. (There is no then. There is no after.")

 

■ 맺음말

 하층민 출신의 쇼걸에서 귀족 대사 부인이 되고, 전쟁 영웅 넬슨 제독의 정부가 된 여인! 그녀가 정치적 중재로 위기의 나폴리 왕국을 구한 공적과 첩보활동 등은 남편 윌리엄 해밀턴 경이 자기의 공과만 부풀리고 한 줄도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 정부의 연금 대상이 되지도 못했던 불행한 여인! 넬슨과의 관계가 불륜이었기 때문에 본인과 자식이 제대로 된 정부의 혜택을 받지 못한 여인!

 

 다만 시대가 귀족과 남성지배체계의 시대였기에 주어진 운명과 절망적으로 대치하다가 부실(不實)의 꽃으로 아름답고 슬프게 지고 말았다는 게 변명 아닌 변명이 될 것이다.

 

 엠마 해밀턴을 연구한 역사학자 제이슨 M. 켈리는 그의 저서 '유혹과 저명인사 - 엠마 해밀턴 부인의 화려한 삶(Seduction and Celebrity: The Spectacular Life of Emma Hamilton)'에서 "귀족과 남자들의 권위로 가득한 세상이 신분이 천하고, 여자라는 이유로 그녀를 옭아매었다."고 귀결지었다.

 

 로렌스 올리비에는 이보다 앞선 1937년에 '영광의 결전(Fire over England)'에서 비비안 리와 공연한 바 있는데, '해밀턴 부인'에서는 다소 주눅든 듯한 연기라 좀 실망스럽기도 하다. 또한 '해밀턴 부인'은 어쩌면 비비안 리의 비극적인 말년과 닿아있는 것 같아 좀 서글픈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끝)

 


▲ 다시 전장으로 떠나가는 넬슨. 이때가 1799년 말이고 새 세기의 1800년 새벽이 밝을 때라 송구영신의 벨이 각각 8번 울리고 배경음악 'Danny Boy'가 흐른다. 그들의 키스는 두 세기에 걸친 꿈같은 이별의 키스였다.
 


▲ 넬슨이 트라팔가르 전투 직전에 깃발신호로 "잉글랜드는 귀관 전원이 각자의 의무를 다할 것을 기대한다."(England expect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는 말을 남긴 것은 유명하다. 그리고 배경음악으로 'Heart of Oak'가 흐른다.
 


▲ 왼쪽이 넬슨 제독의 기함 HMS 빅토리호. 오른쪽은 횡대가 아닌 종대 2열로 연합함대를 공격하는 영국함대. 빅토리호는 영국 포츠머스 왕립해군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 넬슨은 교전 중 프랑스측 총탄에 저격됐으며, 결국 다음의 말을 남기고 절명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나는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그를 죽게 한 탄환은 윈저 성에, 그가 당시 입었던 옷은 피탄자국이 선명한 상태로 그리니치 국립해양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하디 함장(헨리 윌콜슨)이 '16대를 나포했다'고 하자 '충분치 않다'며 '20대!'를 명령하는 넬슨 제독. 잠시 후 '18대'라고 보고하자 웃음지으며 운명하는 넬슨 제독.



▲ 뜨게질을 하며 넬슨의 안전을 기원하던 엠마에게 하디 함장이 찾아와 눈물을 흘리자 그의 죽음을 안 그녀는 쓰러진다.


▲ 영화의 마지막 장면. 회상 얘기가 끝나자 메리 스미스가 더 궁금해 물어보자 엠마는 "다음도 없고, 그 후도 없다"고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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