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전쟁 배경 영화-'해밀턴 부인'(Lady Hamilton)(3)

 

윌리엄 해밀턴 경의 부인이 되다(계속)

 엠마는 곧 다시 찾으러 오겠다는 그레빌의 말만 믿고 1785년 떠밀리다시피 어머니와 함께 여행자로써 나폴리로 왔지만 결국 그녀의 '구세주'였던 그레빌의 배신을 알게 된다. 하지만 점차 윌리엄 경의 사치스런 환경과 매력적인 새로운 삶에 적응해 나간다.

 

 한편 윌리엄 경은 가정교사를 고용하여 그녀에게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 역사, 그림, 무용, 노래 등을 가르치며 영국이 나폴레옹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킨 이유 등을 설명해주면서 엠마에게 자상하게 대했고 엠마는 윌리엄 경에게 존경심을 갖는다.

 

 반면 윌리엄 경은 부유하고 영향력있는 귀족 명사들이 참석하는 만찬이나 이벤트에 엠마가 등장하여 노래부르고 춤추며 손님들과 지적인 대화를 나누며 접대하는 모습에 만족한다. 더욱이 조각이나 그림에서나 볼 수 있는 다양한 캐릭터를 엠마가 활인화(活人畵, tableaux vivants)하는, 이른바 '엠마의 자태(Emma's Attitudes)'에 매료된다.

 

 점차 서로를 이해하게 된 윌리엄 경은 영국 국왕의 허락을 받고 1791년 9월 6일 정식으로 결혼하였다. 당시 26세인 엠마는 60살의 해밀턴 경의 두 번째 부인으로 합법적인 '엠마 해밀턴 부인(Emma, Lady Hamilton)'이 된 것이다.

 

■ 넬슨의 '나일 해전' 승리와 엠마와의 운명적 만남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은 정치 권력이 절대 왕정에서 시민 자본가 계급으로 옮겨지는,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대혁명이었다.

 

 이후 혁명을 지키려는 프랑스가 절대왕정의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 구체제)의 회복을 갈구하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전쟁을 하게 됐고, 산업혁명이 한창 진행 중이던 영국에 대해서도 1793년에 선전포고를 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1769~1821)가 1798년 7월 25일 이집트 카이로를 정복한 지 불과 1주일 후인 8월1일에 영국 호레이쇼 넬슨 제독(Admiral Horatio Nelson, 1758~1805)이 이끄는 지중해 함대가 아부키르 만(Aboukir Bay)을 지키고 있던 프랑스 함대를 섬멸하여 프랑스군의 보급과 퇴로를 끊고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1798년 9월 22일, '나일 해전(Battle of the Nile)'에서 승리한 살아있는 전설 넬슨 제독이 18살의 의붓아들 조사이아 니스베트(Josiah Nisbet, 1780~1830)와 함께 나폴리를 방문한다. 조사이아는 1787년 3월 11일 넬슨이 결혼한 프란시스 '패니' 니스베트(Frances 'Fanny' Nisbet, 1758~1831)의 전 남편 소생으로 넬슨 함대에 근무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독재에 항거하는 넬슨을 존경하여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던 엠마와 해밀턴 경은 넬슨을 그들의 저택이 있는 팔라조 세싸(Palazzo Sessa)로 영접한다.

 

 마침 9월 29일이 넬슨의 40세 생일이라 무려 1,800명의 손님을 초대하여 축하파티를 열던 중 넬슨이 쓰러진다. 당시 넬슨은 오른팔이 없고 치아도 거의 빠진 데다 기침으로 고생하고 극도의 피로에 지쳤기 때문이었다. 엠마는 넬슨을 그녀의 침실로 데려가 9일간 지극정성으로 보살핀다.

 

■ 넬슨과 엠마 해밀턴 부인의 염문

 이후 엠마는 공공연한 넬슨의 비서이자 통역관 및 정치적 중개자가 된다. 신사(Gentry)들의 정부로 그들이 열던 파티의 쇼걸이었던 하층민 출신 엠마가 귀족에다 유럽의 명사·예술가로 변신하여 영국 전사(戰史)의 영웅인 호레이쇼 넬슨의 정부가 된 유부녀와 유부남의 스캔들은 영국 신문에 실리면서 당시 세기의 가십의 정점에 섰다.

 

 그런데 이즈음 프랑스 혁명의 영향이 나폴리에도 불어닥치자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비 마리아 카롤리나(Maria Carolina, 1752~1814)를 비롯한 왕당파 귀족들은 시칠리아의 팔레르모(Palermo)로 피신한다. 해밀턴 경과 엠마 그리고 넬슨도 함께 갔다. [註: 카롤리나 왕비는 합스부르크 왕가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의 13번째 딸이자, 프랑스 루이 16세에게 시집갔다가 38살 생일을 2주 앞두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마리 앙투와네트(Marie Antoinette, 1755~1793)의 친언니이다. 그리고 그녀의 오빠가 1765~1790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계몽주의 절대왕정의 3대 계몽군주 중 한 명으로 유명한 요제프 2세(Joseph II, 1741~1790)이다.]

 

 1799년 7월, 이때 왕비와 절친한 친구이자 중요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엠마가 아일랜드 반란으로 정신 없던 영국 본토의 지원을 받지 못하던 넬슨과 카롤리나 왕비 사이의 중개역할을 했다. 그 결과 넬슨이 러시아 해군제독 우샤코프(Fyodor Ushakov, 1745~1817)와 함께 나폴리 탈환에 참여, 반왕당파 반란을 진압해 나폴리 왕가를 구출함으로써 나폴리 왕으로부터 브론테 공작(Duke of Bronte)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이보다 앞선 6월 30일에 혁명을 주장하는 공화파인 나폴리 제독 프란체스코 카라치올로(Francesco Caracciolo, 1752~1799)를 군사재판에서 반대파의 일방적인 모함에 의해 변론의 기회도 주지않고 처형하는 정치적인 오점을 남겼다.

 

 카롤리나는 원래 내약돼 있던 언니 요제파가 갑자기 천연두로 죽는 바람에 대신 1768년 16살에 나폴리로 시집가서 총 17명의 자녀를 낳았고(이 중 8명만 생존), 무능한 남편 페르디난도 1세를 대신해 나폴리·시칠리아 왕국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하여 친(親)영국-오스트리아적인 외교정책을 수립하고 전면적인 개혁을 단행하여 낙후된 나폴리의 내정을 튼튼히 했던 여장부다. 어머니 테레지아를 빼닮았다.

 

 그러나 나폴레옹에 의해 왕위를 잃고 1806년 친정인 오스트리아로 망명하여 1814년 9월 8일 62세의 나이로 비엔나에서 사망했다. (다음 호에 계속)

 

▲ 해밀턴 경과 넬슨 제독과의 대화에 끼어들어 남성들의 전유물인 전쟁얘기를 듣고 있는 엠마 해밀턴. 그러나 나폴리 왕비 카롤리나를 접촉한 엠마가 정치적 문제를 해결한다.

 

▲ 나폴리·시칠리아 왕 페르디난도 1세(루이스 알베르니)와 마리아 카롤리나 왕비(노르마 드루리). 그들 사이에 17명의 자녀를 낳았다.

 

쓰러진 넬슨 제독(로렌스 올리비에)을 자기 침실에서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엠마 해밀턴 부인(비비안 리). 이들의 스캔들은 세기의 화제가 되었다.

 

▲ 산 카를로 왕립 극장의 로열박스에서 오페라를 감상하는 (좌로부터) 해밀턴 경, 카롤리나 왕비, 페르디난도 1세, 엠마 해밀턴, 넬슨 제독.

 


▲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허술한 선술집에서 정겨운 대화를 나누는 엠마 해밀턴과 호레이쇼 넬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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