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전쟁 배경 영화(III)-"바람과 함께 사라지다"(5·끝)

 

(지난 호에 이어)

• 1939년 12월 15일 애틀랜타에서 첫 시사회가 열렸을 때, 주지사가 주공휴일로 지정했다. 티켓 가격은 보통 가격의 40배가 넘었다. 마틴 루터 킹 시니어도 초대받아 참석했으며 이때 유명한 주니어도 함께 데리고 갔다. 그런데 이 시사회에 스칼렛의 유모 역을 맡아 열연했던 흑인 여배우 해티 맥대니얼(Hattie McDaniel, 1895~1952)은 참석할 수 없었다. 같이 연기했던 클라크 게이블이 만약 그녀를 오지 못하게 한다면 자신도 참석하지 않겠다고 위협하는 일까지 있었지만, 맥대니얼의 시사회 출연은 끝내 무산되었다. 이때 애틀랜타의 흑인들은 영화관 밖에서 이 영화의 인종차별성을 비난하는 시위를 벌였다.

 

• 1940년 2월, LA의 엠버서더 호텔에서 개최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해티 맥대니얼은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하였다. 그녀는 최초의 흑인 오스카 수상자였다. 엠버서더 호텔은 흑인 출입금지를 내세우고 있었지만, 해티 맥대니얼은 특별히 허가된 흑인 손님으로 입장하였다.

 

 맥대니얼은 수상 연설에서 자신의 수상은 자신의 인종과 아울러 영화산업의 자랑거리가 되었으면 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하지만 맥대니얼의 소망과는 반대로, 80년대에 접어들 때까지 흑인 아카데미 수상자는 단 한 명이 더 나왔을 뿐이었다. 우피 골드버그가 '사랑과 영혼(The Ghost·1990)'의 '오다 메이 브라운' 역으로 두 번째로 아카데미 흑인여우조연상을 받기까지 51년이 걸렸다

 

• 남북전쟁이 선포되기 전 바베큐 장면에서 해시계에 쓰여있는 글 ― "그대는 인생을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시간이야말로 인생을 형성하는 재료이기 때문이다(Do not squander time, for that's the stuff life is made of.)" - 벤자민 프랭클린

 

• 미국영화연구소(AFI)가 2007년 선정한 '100대 영화'에서 GWTW가 6위 차지.

 

• 2015년 4월 19일 캘리포니아 베벌리 힐스에서 진행된 헤리티지 옥션에서 주연배우 비비안 리가 입었던 회색과 검은색으로 된 드레스가 13만7천 달러에 팔렸다. 또 그녀가 썼던 밀짚모자가 5만2,500달러, 레트 버틀러 역의 클라크 게이블이 입었던 정장 바지와 재킷이 5만5천 달러에 팔렸다. 그리고 비비안 리와 멜라니 윌크스 역의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가 모두 썼던 검은색 보넷은 3만 달러에 팔렸다. 이날 경매에 나온 물품들은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분장 책임자였던 제임스 텀블린(James Tumblin)의 개인 소장품이었다.

 

 그런데 비비안 리가 걸쳤던 콜세트가 18인치(46cm)로 유명한데, 그후 니콜 키드먼이 '물랑루즈(2001)'에서 입었던 것 외엔 대부분 배우들이 실패했으며, 예컨대 갈비뼈에 금이 가는 등 심한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Olivia de Havilland, 1916~2020)는 클라크 게이블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는 수상하지 못했지만 8년 뒤인 1947년 'To Each His Own'으로, 또 1950년 '사랑아 나는 통곡한다(The Heiress)'로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다.

 

 드 하빌랜드보다 한 살 아래인 여동생 조운 폰테인(Joan Fontaine, 1917~2013)도 오스카상을 탄 스타다. 그런데 둘은 어려서부터 성장해서까지 사사건건 의견대립을 보인 앙숙지간이었다. 라이벌인 둘은 지난 1942년 공교롭게도 헐리우드 사상 전무후무하게 자매가 나란히 오스카 주연상 후보에 올랐었다. 드 해빌랜드는 드라마 ‘Hold Back the Dawn(1941)’으로, 폰테인은 앨프리드 히치콕의 심리 스릴러 ‘의혹(Suspicion·1941)’으로 각기 후보에 올라 동생이 언니를 누르고 상을 받았다.

 

 둘의 라이벌 의식은 폰테인이 2013년 12월 15일 사망할 때까지 지속됐다.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는 2020년 7월 26일 프랑스 파리에서 104세로 타계했다. 그녀의 시신은 화장되었다.

 

• 비비안 리(Vivien Leigh, 1913~1967)는 GWTW에서 아카데미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1951년 일리어 카잔 감독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가족을 잃고 빈궁에 빠진 남부의 여인 블랑슈 뒤부아(Blanche DuBois) 역을 연기해 또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비비안 리는 세계적인 미인이었지만 진작 자신은 아름다움이 진정한 배우의 길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녀는 1940년 유명한 영국배우 로렌스 올리비에(Laurence Olivier, 1907~1989)와 재혼하여 1960년 이혼할 때까지 황금기를 누렸지만 극심한 조울증과 정서 불안 때문에 함께 일하기 힘들다는 평판을 얻으면서 내리막길을 걷다가 만성결핵으로 향년 53세로 타계한 비운의 영국 배우였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GWTW'의 제작자인 데이빗 O. 셀즈닉은 비비안 리를 전격적으로 캐스팅하였지만 그 후 악연(?)이 이어진다. 비비안은 '애수(Waterloo Bridge·1940)'에서 로이 역에 올리비에를 원했지만 그는 로버트 테일러로 교체했는가 하면, 올리비에 출연의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1940)'에 비비안과 공연하기를 원했으나 역시 셀즈닉에 의해 그리어 가슨으로 교체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 출연배우 중 애슐리 윌크스와 멜라니 해밀턴 사이의 외아들인 보 윌크스 역을 맡은, 당시 6세의 아역배우였던 미키 쿤(Mickey Kuhn, 1932~2022)은 1957년 은퇴한 이후, GWTW 및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출연자 중 유일한 생존자였는데 지난 11월 20일 90세로 타계했다.

 

 크레디트를 받진 못했지만 윌크스 집 바베큐 행사 때 그리고 레트 버틀러와 스칼렛 오하라가 춤을 추었던 바자회에 엑스트라로 출연했던 캐런 마쉬 돌(Caren Marsh Doll·103)과 갓난 애기 보 윌크스 역의 패트릭 커티스(Patrick Curtis·83)가 아직 생존해 있다. 커티스는 그의 삼촌인 유명 감독 빌리 와일더에 의해 캐스팅됐다.

 

 숱한 일화를 남긴 추억의 명화 GWTW는 시대적 상황에 따른 또다른 예술적 검열로 인해 바람과 함께 사라졌지만, 우리의 기억 속에는 영원한 오늘로 살아있으리라. (끝)

 

▲ 목재소에서 애슐리와 포옹하고 있는 모습을 본 미드 부인(레오나 로버츠)과 동생 수엘렌의 오해를 풀기 위해 버틀러의 등에 밀려 마지못해 애슐리의 생일 파티에 참석하는 스칼렛(비비안 리).
 


▲ 술에 취한 레트 버틀러(클라크 게이블)가 머리 속에 든 애슐리의 생각을 지우겠다며 스칼렛의 머리를 조인다.
 


▲ "우린 신사도 아니고 지킬 명예도 없어. 당신은 날 내쫓고 애슐리를 쫓아다녔어. 하지만 오늘밤엔 안 될 거야!"라며 스칼렛을 덥썩 안고 침실로 올라가는 레트 버틀러.
 


▲ 레트 버틀러와 잠자리를 같이 한 다음날 아침 스칼렛은 행복에 겨워 노래까지 부른다. 유모가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중얼거린다.
 


▲ 스칼렛은 레트가 곁을 떠나자 "타라에서 내일 그를 되찾을 어떤 방안을 생각해야지. 결국 내일은 또 다른 날이니까."라는 마지막 낙관론의 명대사를 남긴다. 그리고 영화는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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