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61)

 

 (지난 호에 이어)

 “아니 넌 어디서 어떻게 왔니? 누가 데려다 줬니?” 아이를 데려온 경찰은 옆에서 함박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하더니 나 잘했지? 라는 제스처를 보였다. 나는 그에게 몇 번이고 고맙다는 말을 하며 아들을 꼭 품에 안았다. 우리 이젠 갈라지지 말자!

아무도 아들을 데려다 준다고 말하지 않아서 사실 나는 정말 놀랐다. 내가 자살소동을 벌리자 경찰서에서 청소년 감호소에 가서 아들을 데려오도록 조치를 취했고 이삼일 후에 진짜로 아들이 내 품에 돌아오게 되었다.

그가 떨어져 있는지 1주일 동안의 얘기를 들어보니 꽤 괜찮게 지내긴 한 것 같았지만 매일 엄마가 보고 싶고 혼자 무섭고 두려워서 울고 지냈다고 했다. 그곳에서 태국어도 가르치고 운동도 하고 음식도 괜찮았지만 갑자기 엄마와 떨어지고 낯선 곳에 끌려가게 되니 너무 불안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는 불상도 있었는데 아들은 불상 앞에서 두 손을 모아 빌었다고 한다. “빨리 엄마를 만나게 해주세요! 엄마와 내가 한국까지 무사히 가게 해주세요!”

그의 말을 들으니 가슴이 찡해져 코끝이 시려왔다. 그렇게 나는 타국의 법에도 굴하지 않고 끝내 아들과 함께 남은 40일을 지낼 수가 있었다. 경찰서 사람들은 모두 나를 위해 기뻐해주었고 그때부터 그들은 나를 친구처럼 편하게 대했으며 또 구내식당에도 갈 수 있게 해주었다.

또 나를 불러 쇼핑하고 싶으면 갔다 오라고 경찰 한 명을 붙여주었다. 같이 있던 5명 중에 나 혼자만 나갈 수 있었는데 아마 그들이 영어가 안 돼서 그런지 그들은 못나가게 했다.

그래서 내가 다른 사람들이 필요한 물건들을 사주었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파는 쌀국수도 사먹고 밖의 시원한 공기도 마음껏 마시며 45일이 지날 때까지 그곳에서 지내야 했다. 그때 나는 태국인들이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것이 너무도 부러웠다. 나도 그들처럼 정말 영어를 잘하고 싶었고 외국인들과 마음껏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사실 태국은 그저 못사는 나라로만 생각했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낮은 수준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너무 친절했고 태국어는 기본이고 영어, 중국어가 만연하여 대부분의 태국인들은 영어를 잘했고 모두가 2개 이상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너무 대단했다.

어느 날 밤 갑자기 탈북자 행렬 10여 명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들은 방콕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다가 여권검색에 걸려서 잡혀 들어왔다. 그렇게 그들과 함께 합류하게 된 우리는 언제 방콕으로 갈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어 매일 같이 경찰들에 게 물어봐야 했다.

사실 우리가 그곳에 그토록 오래 있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내 아들이 청소년감호소에서 45일을 있어야 방콕으로 갈 수 있는 태국 법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간은 간다! 드디어 그곳을 떠나는 날이 다가왔다.

 

3. 방콕 이민국 수용소에서

 

드디어 방콕의 난민수용소에 이송된 우리는 탈북자들이 있는 곳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아들은 남자들 방으로 보내지게 되었다. 또다시 그와 갈라져야 있어야 한다니. 여자방과 남자방은 서로 마주 보는 건물에 갈라져 있었는데 서로 왕래는 절대 금지이며 오직 음식만 전달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중국에서 먼저 떠난 친한 언니네 가족과 재회하였다. 우리 모두 정말 친형제를 만난 듯이 기뻐하였다. 그곳은 여러 나라에서 들어온 불법체류자들과 난민들이 너무 많았고 국적별로 칸이 다 달랐다.

매일 1시부터 2시 사이에는 운동시간이 있었다. 그때는 방에서 나갈 수 있고 간이매점에서 간단한 것을 살 수도 있었다. 매일 운동시간이 되면 밖에 나가면서 아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한 번 만이라도 꼭 보고 싶었던 나는 어떻게 하면 아들을 만날 수가 있을까, 혼자 조용히 궁리하기 시작했다.

가족이 함께 온 여인들은 남편, 아들들과 서로 갈라져 있어야 했으며 그곳에 있는 동안은 서로가 절대 만날 수는 없었다. 법이나 규정이 그렇지만 나는 일단 부딪쳐보기로 했다.

나는 경호원에게 10살 된 아들이 아빠 없이 혼자 남자수용소에 있는데 내 아들을 데려다 줄 수 있겠느냐. 여기서 한 시간 만이라도 함께 있고 싶다고 말이다. 당연히 그는 안 된다고 머리를 저었다. 나는 다른 경찰에게 또 부탁을 했으나 또 거절당했다.

 이번에는 중년의 경찰에게 부탁했다. 그는 자기는 권한이 없다며 나를 사무실에 있는 제일 높은 사람에게 데려다 주었다. 그가 여기 제일 높은 빅보스라고 하는데 덩치가 커서 보기만 해도 위압감을 느꼈다.

그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10살 된 아들이 어른의 보호 없이 혼자 남자 수용소에 있어요. 그는 조선말도 잘 모르고 중국어만 할 줄 아는데 그곳 사람들은 중국어를 모르니 의사소통도 안 되고 돌봐 줄 사람도 없어요. 나는 정말 걱정이 되어 그러니 제발 한번 만나게 해주세요. 어떻게 지내는지 꼭 보고 싶어요.”

내 마음이 너무나 간절해서 그런지 그동안 한 번도 생각해 보지도 않은 영어 단어가 막 슬슬 튀어나왔다. 영어가 엉망이지만 떠듬떠듬 단어만 갖다 붙여 설명을 하니 그래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떡이더니 아들한테 데려다 주라고 지시했다. 정말이요? 이건 진짜 대단한 기적이다!

사실 나는 보스가 허락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규정이 있기 때문에 나를 허락해주면 다른 사람들이 무질서 하게 서로 가게 해달라고 할 것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일단 도전을 해 본 것이다. 그런데 그가 내 한마디에 쉽게 승낙을 하다니 나는 아무도 해내지 못한 기적을 이루어낸 나 자신에게 대단한 자부심을 느꼈다.

그리고 포기하지 말고 끊임없이 도전한 나의 정신력에 스스로 감탄했다. 규정이 있고 법이 있어 그냥 수긍하고 속상해하기만 했다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경찰을 따라가 보니 세상에 무슨 정치범 수용소도 아니고 감옥보다 더 감옥 같은 곳에 남자들이 꽉 차 있었다.

커다란 자물쇠를 철컥 열더니 들어가보라고 한다. 나는 들어가면서 아들 이름부터 불렀다. 난데없이 갑자기 웬 여자가 들어오게 되자 맥없이 누워있던 남자들이 모두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그들은 무슨 외계인을 보듯이 나를 희한한 눈길로 쳐다보며 어떻게 여길 다 왔냐고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ㅇㅇ이 데려가서 같이 1시간만 있으려고 왔어요.” “야!! ㅇㅇ엄마 대단한 여자네. 여기를 이렇게 막 들어오다니” “아니, ㅇㅇ엄마는 이렇게 들어오는데 왜 우리 마누라는 못 오는 거야? 여기 남편하고 아들 둘씩이나 있는데 말야.”

갑자기 그들의 부러움이 아내들에 대한 원망으로 번져갔다. 나는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는 그 속에서 아들을 찾아 데리고 밖에 나왔다. 그리고 그동안 어떻게 지내왔는지, 불편한 건 없는 지 물어보며 아이스크림이나 다른 먹을 것도 사주었다.

나를 안내해주던 경찰은 아직 여기 수용소가 생긴 이래 한번도 남자수용소에 여자가 찾아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보스가 왜 나를 허락해주었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나에게 대단하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내가 남자수용소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여자들은 아무도 몰랐다. 나는 다른 여자들이 저들도 함께 따라간다고 할까 봐 나 혼자 몰래 경찰들에게 물어보았고 또 영어로 대화를 나누니 그들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운동을 마치고 방에 돌아오니 전화기가 불이 날 지경이었다. 전화는 사용할 수 없게 되었는데 외부에서 몰래 들여온 전화기 2대를 방장이 가지고 있었으며 경찰이 밖에서 보이지 않게 이불을 뒤집어쓰거나 등 뒤에 가려서 통화를 해야 했다.

남편들이 아내들한테 전화를 하느라 전화가 수없이 걸려 왔는데 대뜸 한다는 말들이 “ㅇㅇ엄마는 아들 보러 왔다 가는데 너는 여기 남편도 있고 아들도 둘씩이나 있는데 뭐하냐.”

여자들은 남편들이 거짓말한다고 믿지를 않았다. “거기 아무도 못 가는데 무슨 소릴? 거짓말 마오.”

답답한 방에 갇혀서 하루 종일 할 일이 없으니 내가 다녀간 뒤로는 사람들이 화젯거리가 생겼다. 그렇게 되자 나는 그곳에서 갑자기 인기가 많아졌다. 중국어도 잘하네, 영어도 잘하네, 그리고 용감하고 결단성이 있네 등등 칭찬이 줄줄이 따라왔다. 나는 그들의 칭찬에 피식 웃기만 했다. 진짜 영어를 잘해 보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

그 후에는 빅 보스한테 직접 찾아가지 않고 날 데려다 준 경찰한테 부탁했더니 나를 두 번 더 데려다 주었다. 다른 여자들도 서로 경찰들 붙잡고 가게 해달라고 막무가내로 졸랐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너도나도 다 요구를 들어주다 보면 질서가 무너지고 걷잡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그곳에서 2달을 지내면서 대사관에서 나온 직원들로부터 조사를 받으며 남한으로 가는 날을 기다렸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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