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38)

 

(지난 호에 이어)

 북한에서 고생하는 식구들이 모습이 떠오르며 목이 메어왔다. 나는 밥 한 그릇을 단숨에 먹어버리고 눈치가 보여 머뭇거리는데 다리가 불편해 잘 걷지를 못하는 아줌마가 아들을 시켜 나에게 밥을 더 가져다주게 했다. 그날 나는 그들과 함께 오두막에서 잤다. 내가 끝에 눕고 내 옆에 아줌마가 누웠는데 구들장이 얼마나 따듯한지 배부르고 등이 따뜻하니 초저녁부터 나는 곯아 떨어졌다.

 새벽에 잠을 일찍 깨고 나니 산속에는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촉촉한 이슬이 내린 이른 아침의 산풍경은 정말 평온하고 아름다웠다. 누렇게 익어가고 있는 넓은 옥수수밭과 평화롭게 풀을 뜯어먹고 있는 소들, 양떼들, 염소들이 널려 있는 이곳이 정말 지상낙원이 아닐까? 우리는 먹을 걱정 없고 일만 열심히 하면 얼마든지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나라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는 동안에 오두막 식구들이 모두 깨어나 소를 끌고 일하러 나갈 채비를 하였다. 해가 중천에 떠오르자 나는 주인아저씨가 이끄는 대로 등성이너머 북한 아줌마가 있다는 오두막에 다시 찾아가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곳에 없었다. 쇠가마솥이 하나 걸려 있었는데 차가웠다. 아저씨는 그녀가 분명 잡혀갔다며 중얼거렸다.

 밥하느라 불을 때면 연기가 나는데 아마도 연기를 보고 발견한 것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그만 가슴이 철렁했다. 나도 오늘 밤이면 여기를 떠야겠다고 생각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여기에 결코 오래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또 바로 옆에서 압록강 물소리가 들리는 것도 싫었고 동북3성을 벗어나 될수록 멀리 안전한 곳으로 가고 싶었다.

 점심까지 배불리 먹고 나는 설거지를 정성껏 해놓았다. 태양이 중천에 떠오르고 나지막한 언덕 위에 혼자 앉아 저 너머로 보이는 북한땅을 바라보니 열흘 남짓한 사이에 내가 겪었던 믿을 수 없는 역경들이 주마등처럼 하나씩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지고 슬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짜 현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내가 정말 조국을 떠나왔구나. 정말 집이 너무 그립고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부모 형제들이 너무 보고 싶다. 그리고 나의 행방을 알 길이 없어 안타까워 할 식구들의 모습이 벌써 눈앞에 선히 떠올라 그들에게 걱정을 끼쳤다는 죄책감에 가슴이 너무 무거워졌다.

 북한 땅을 바라보니 한산하기 그지없는 혜산시가 한눈에 다 바라보였고 압록강 물은 굽이굽이 무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바라보이는 저 너머에 내 탯줄이 묻어 있고 내 부모형제가 사는 나라. 나는 다시는 밟지 않으리라 저 땅을. 그리고 내 아들과 나의 모든 것을 모두 빼앗아 가버린 죽음의 강, 원한의 압록강을 다시는 넘지 않으리라.

 이렇게 마음을 굳게 먹으니 그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갑자기 “고향의 봄”이라는 동요가 느닷없이 떠올라 혼자 소리를 내어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동네 새 동네 나의 옛 고향 하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시안확인용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이 얼마나 지금 내 심정에 꼭 맞는 노래이란 말인가? 한 번도 2절까지 불러본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가사가 다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혼자 노래를 부르는 동안에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고 입안에 흘러 들어오는 쓰디쓴 눈물을 삼키며 가슴에 콕콕 박히 는 가사 하나 하나에 내 심정을 담아서 끝까지 불렀다.

나라 잃 은 일제시기에 만들어진 이 동요를 지금 내가 이토록 절절하게 부르게 될 줄이야. 그렇다. 나는 나라를 잃었다. 나에게 북조선 은 더 이상 내 나라가 아니다. 아니, 나라가 우리를, 백성들을 버렸다.

“엄마, 아버지, 제발 저를 용서해 주세요. 집에 돌아갈 수 없는 이 못난 딸을, 내 꿈도, 가정도, 아들도 모든 것을 무참히 잃게

 

 

만든 조선 땅을 다시는 밟지 않을 겁니다.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만날 때까지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꼭 돈을 벌어서 부모님들 도와 드릴게요.”

비록 아무도 나의 가슴속 외침을 들을 수 없지만 그렇게 나는 혼자 산천을 향해 마음속으로 다졌다. 어렸을 적에는 즐겁고 신 나게 불렀던 동요를 지금은 그 가사 하나 하나가 나의 가슴을 울리면서 이렇게 슬픈 심정으로 부르게 될 줄은 상상이나 했던 가? 그리고 다시는 내 부모님들을 만날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눈물이 얼굴을 타고 끝없이 흘러내리고 감정이 북받쳐 목이 꽉 메어왔다.

시안확인용정녕 내가 다시 돌아갈 수 없을까? 과연 나는 앞으로 어떻게 이 낯선 땅에서 살아가게 될까?

도대체 나는 어찌하여 부모님과 이별 아닌 이별을 하고 갓 태어 난 아이까지 잃고 낯선 중국 땅에서 이렇게 정처 없이 헤매면서 있는 것인가? 과연 나 혼자 살겠다고 탈북을 한 것이 과연 잘 한 것인가? 나는 끊임없는 질문들을 나에게 던지고 또 던졌다.

 

조금 후에 주인아줌마는 자기 옷가지들을 몇 개 꺼내 주면서 얼른 갈아입으라고 했다.

내 옷차림은 누가 봐도 바로 신고할 것이니 빨리 중국인 옷을 갈아입으라고 말이다.’ 그리고 예쁜 신발도 하나 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산전막에 이웃집 영감이 찾아왔다. 같은 동네 한족 영감인데 바로 옆 산에 자기 산전막이 있어 놀러 왔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홀아비라고 한다

그리고 나보고 자기네 산전막에도 놀러 오라고 한다. 나를 바라 보는 그의 눈길은 왠지 모르게 심상치 않았고 나는 아주 불쾌한 느낌을 받았다. 옷을 말끔히 갈아입은 나는 차마 떠나겠다는 말 을 못하고 산등성이에 올라갔다 오겠노라고 말해 놓고 그곳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오늘 밤은 혼자서 강행군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시안확인용낮에 보았던 큰길로 밤새 걸으면 조금이라도 더 안전한 곳을 갈 수 있을 것이다. 마침 암탉이 알을 낳고 꼬꼬댁거렸는데 나 는 혹시 저녁을 못 먹고 밤을 새야 할지도 몰라 따뜻한 생계란 2알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인사도 못 하고 길을 떠났다. 그리고 도로가 바로 보이는 숲속에 숨어서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렸 다.

도로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산에 앉아 있었지만 울창하고 빼곡 한 장백산의 큰 소나무들은 대낮에 햇빛이 들지 않을 정도였고 발목까지 쌓여 푹신거리는 솔잎들을 보니 땔 것이 없어 솔잎을 긁으러 다녔던 때가 떠올랐고 추운 겨울 나무하러 깊은 산 속에 서 고생하던 기억들도 떠올랐다.

지옥과 천국을 눈앞에서 경험하면서 통제와 억압에 눌려 배고 픔에 시달리며 살아온 내가, 아니 북한사람들이 얼마나 불행한 지 또 우리가 얼마나 그동안 속아서 살아왔는지 정말 분통이 터 질 일이었다.

 

 

  1. 밤새워 100리길을 나홀로

 

산속에서 짐승 울음소리와 바람소리만이 들릴 뿐 아무도 없는 곳에 나는 홀로 앉아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거의 10시간 정도 기다렸다.

드디어 날이 어두워지자 나는 산을 내려와 도로를 걷기 시작했 다. 여태 산길만 걷다가 오랜만에 평길을 걷게 되니 한결 쉬웠 고 빨랐다. 굽이굽이 뻗은 길은 걷고 또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 았고 길 왼쪽은 바로 낭떠러지인 데다 그 아래에는 압록강 물이 소리치면서 흐르고 있었다.

시안확인용나는 발을 잘못 디뎌 낭떠러지에 굴러 떨어지는 환각이 갑자기 떠올라 몸서리를 치며 산 쪽으로 바싹 붙어 걸었다. 그러다 차 가 지나가면 길옆에 납작 엎드려 숨었다가 다시 길을 걸었다. 그동안 마을을 벌써 몇 개나 지났는지 모른다. 13도구를 향해 가는데 18도구를 떠나 17, 16, 15도구를 지나고 있었다. 사람 하나 차 한 대도 다니지 않는 깊은 밤이 되자 그때야 나는 맘 편하게 걸을 수 있었다. 그렇게 쉬지 않고 밤을 새워 걸으니 벌 써 희미하게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날이 더 환하게 밝기 전에 빨리 이 동네를 지나가야겠다는 조바심을 안고 걷던 나는 그만 깜빡 졸았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CA
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