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과 푸틴

 

 1950년 6월 25일, 조용한 아침의 나라 한국의 아침은 밝아오고 있었다. 군인들은 주말 외출을 나갔었고 종교인들은 교회로, 젊은이들은 교외로 외출준비를 하는 한가로운 주말 여름의 문턱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전선은 북한군의 일방적인 기습 공격으로 불바다가 된다.

 

 그 해 1월 12일,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과소평가한 미국의 국무장관 애치슨이 한반도를 방위선에서 제외한다는 “애치슨라인”을 발표한지 5개월 15일 만이다. 대한민국은 더 이상 "조용한 아침의 나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된다.

 

 그 후 한국문제는 전쟁이 터짐으로써 동서 냉전의 최대의 이슈로 등장하게 된다. 당연히 2차 대전 후 세계의 평화와 번영과 자유의 깃발 하에 뭉쳐진 유엔의 첫 번째 과제가 된다.

 

 그 유엔의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회"가 있다. 1945년 유엔 헌장을 통해 자격을 부여 받은 미국, 영국,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 중국이다. 그들은 모두 제 2차 세계대전 연합국이자 승전국이며 모두 핵무기 보유 국가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임이사회 다섯 국가 중 한 국가라도 거부권을 행사하면 안건이 통과가 안 된다.

 

 실질적으로 러시아는 이 거부권을 72년 전 한국전에서 사용할 수 있었다. 당시는 러시아의 전신인 소비에트 연방으로서 스탈린이 전권을 좌지우지 하던 시대였다. 그는 김일성을 조정하여 남한을 침략하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지배하는 소련은 미국이 요구한 안전보장이사회의 요구에 불참을 한 전대미문의 불가사의한 일이 발생하게 된다.

 

 소련은 거부권을 가지고 있어 거부권을 행사하였다면 어떠한 결의안도 통과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스탈린이 노린 한국전의 효과는 하나의 부수적인 수단이었으며 궁극적인 목표는 모택동의 중공을 전쟁으로 끌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견해가 성립된다.

 

 미국이 한국전 승리를 목표로 압록강까지 진격하게 되면 국경에 위협을 느낀 모택동의 공산당 정권이 자연히 참전하리라는 계산을 하였을 것이라는 견해이다. 목적은 물론 두 나라의 국력을 뒤흔들어 놓으려는 치밀한 계산아래에서 둔 신의 한 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는 세계를 적화시키려는 그의 권모술수가 잘못된 판단이었으며 아이러니컬하게도 전쟁을 야기 시킨 장본인인 스탈린 스스로가 휴전의 제의를 하게한다. (하지만 그는 한국 전쟁 휴전 전인 1953년 3월 5일 74세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게 된다.)

 

 모택동과 스탈린은 표면적으로는 공산주의의 깃발 하에 우방처럼 보였지만 그들 사이에는 눈에 안 보이는 알력이 있었다 한다. (이에 관해서는 차후 기회가 되면 심도 있게 다룰 예정이다.)

 

 어쨌거나, 스탈린은 미국의 힘을 빌려 모택동의 세력을 무너뜨리기를 바랐다. 반면 미국은 70세의 노병 맥아더의 조언을 받아들여 한국 전쟁을 승리로 끝내기보다는 군인출신 정치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안이한 평화의 길인 휴전을 택하게 된다.

 한국전은 1953년 7월 27일, 휴전으로 일단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참 피해자가 있었다. 대한민국 국민이다.

 

 70여 년이 흘렀다. 구 소련은 해체되었고 러시아의 푸틴이 세계 정치무대에 등장하게 된다. 그의 야심은 구 소련의 소비에트연방 부활이다. 스탈린은 북한을 부추기어 대리전쟁을 하게 하였지만 그는 스스로 상임이사회의 일원인 러시아가 직접 침략으로 우크라이나전쟁이 일어나게 한다.

 

 세계평화를 유지하는 데에 책임이 있는 거부권을 가진 상임이사국에 의한 유엔 헌장의 위반이다. 이 점을 놓칠 리 없는 미국 대통령 바이든은 푸틴을 강력히 비난하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재검토를 제안하게 된다.

 

 7개월 전 2월 24일, 러시아의 푸틴은 신속한 침략 작전으로 우크라이나를 점령해 4천4백만의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에 병합시키려는 야망을 갖고 전쟁을 도발하였다. 그의 꿈은 러시아를 다시 세계 최상의 반석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야심은 젤린스키 대통령이 이끄는 우크라이나의 강력한 저항을 받게 되며 궁지에 빠지게 된다.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30만에 달하는 예비군 소집명령 또한 내외의 강력한 비난을 면치 못하며 때아닌 신판 “엑소더스"가 발생하게 된다.

 

 무리수는 무리수를 쓴다 하였는가. 위기를 느낀 푸틴은 4지역의 점령지를 형식적인 주민투표를 통해 합병조약에 서명하게 한다. 그에게 있어 병합된 지역은 러시아 영토로써 핵무기를 포함한 모든 수단을 이용하여 방어하여야 할 러시아의 국토라는 억지 명분이 필요하였다.

 

 동장군이라는 말을 기억하는가? 정확한 어원은 밝혀진 바가 없지만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패배하는 것을 보고 영국과 미국 신문이 “General Frost” 혹은 ”General Winter”라는 형용사적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일본사람들이 동장군이라 번역하였다 한다.

 

 어떻든, 영국을 제외한 유럽 전 지역을 장악하였던 나폴레옹도, 나치의 히틀러도, 혹독한 러시아의 겨울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던 러시아의 비장의 무기이다. 잊지 말라, 그 배후에는 러시아 국민 특유의 협조하는 애국심이 있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 대한 푸틴의 도박은 계산착오였고 자국 내에서도 명분을 잃고 있다. 푸틴에게는 전환점이 필요한 시기이다. 점령지인 새 합병지역인 4개 지역은 화약고일수도 있고 어불성설이지만 자신의 영토를 침략하는 경우 핵무기를 포함한 어떤 대가를 각오하라는 경고도 될 수 있다.

 

 지난 2월 24일 러시아의 침략 당시 그 누구도 러시아가 이런 군사적인 곤경에 빠지리라곤 예상치 않았다. 푸틴 대통령의 4지역의 합병 조약식 연설에서 우크라이나에 군사행동을 중지하고 대화 테이블로 돌아올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점령지에서 침략자를 축출하고 우크라이나를 강화하는 길만이 평화의 길이라 천명하며 투쟁의 의지를 표명하였다.

 

 우크라이나의 선택은 이제 그들만의 선택의 경계선을 넘어섰다. 미국을 포함한 서방세력 모두의 과제이다. 물론 캐나다도 여기에 포함 되어있다. 캐나다의 트뤼도 수상은 말하였다. “I repeat; Ukraine's Territory will remain Ukraine’s”(되풀이 강조하지만 우크라이나의 영토는 우크라이나인의 영토로 남을 것입니다")

 

 *후기: 9월 30일(금) 푸틴의 합병선언 그 다음날 토요일인 10월 1일 우크라이나 군은 합병지역 일부분인 리멘(Lyman)시를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202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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