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도마에 오르다

 

 2013 5월 26일.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경기가 로저스센터에서 열렸다. 경기 후 그날의 수훈선수와의 인터뷰 시간이었다. 9회말에 결승타를 날려 팀을 승리로 이끈 선수는 동양선수였다. 그는 아나운서의 질문에 유니폼 주머니를 뒤져 조그마한 종이를 꺼내 읽기 시작하였다.

 "대단히 고맙습니다. 저의 이름은 뮤네오리 가와사키이고 일본에서 왔으며 일본인입니다. 저의 동료들이 저에게 기회를 주었고, 그래서 저는 그것을 보답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습니다“. (Thank you very much. My name is Munenori Kawasaki, I come from Japan, I am Japanese. My teammates gave me an opportunity, so I wanted to do something about it.)

 가와사키는 그날의 수훈선수에게 주어지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인상적인 발언으로 그 해의 최고상을 받게 된다. (솔직히 말해 나는 그런 상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내 첫째아들의 이름은 필립이고, 둘째는 헨리이다. 한문으로 필할 필, 세울 립. 그리고 현명한 아이라는 뜻의 현 대신 영어로 Henry라 지었다.

 하루는 작은애가 “아버지는 R자를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면서 왜 내 이름을 Henry로 지었냐”고 물어온다. 큰 아들 이름 Philip은 ph가 F로 발음이 되어 그럭저럭 발음을 할 수 있는데 R자가 들어가 있는 헨리는 아무리 혓바닥을 굴려도 헨니가 된다.

 청과업을 하였던 적이 있는데 상호명이 “Larry Young Fruit Market”이었다. 그 ”Larry”라는 이름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내니”가 된다. 경제가 경상도 발음으로 갱제가 되는 순간이다. 그래서 아예 청과도매상에 가서 주문을 할 경우에는 상호명 대신 주소인 1999 Yonge St.로 대신한 적이 있다. 굼벵이도 기는 재주가 있다는 말은 아마 이럴 때 쓰라고 나온 순수한 한국말이라고 생각하였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의 두 아들은 물론 한국계가 아닌 두 며느리와 내가 만난 어느 본토박이 캐나다인도 나의 강한 한국 액센트를 문제 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내가 전혀 영어가 필요없는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태어난 한국사람이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캐나다에 1974년 이민 온 이래 한국에서 이곳에 이주해온 많은 한국사람으로부터 영어에 얽힌 무용담(?)을 들어왔다. 이민 초창기라 할 수 있는 70년대 초 많은 한인들이 "베커"나 "맥스 밀크"라는 상호를 가진 프랜차이즈 컨비니언스 매니저로 둥지를 틀은 적이 있었다. 아직 이곳의 생활습관이나 풍습을 익히기도 전에 실전에 투입된 것이다.

 계산대를 지키면서 가져온 상품을 캐시 레지스터에 입력하여 얼마를 요구하는 정도는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데, 상품 이름만 갖고 묻는 경우 사단이 생기기 시작한다. 회화가 안 되는 벙어리 상태에서 기지를 발휘하여 "솔드 아웃”(sold out)이라 하였다 한다. 그 후에도 여러 번 온 그 손님은 나중에는 물어보는 대신 스스로 상품을 찾아오며 자신이 찾는 상품이 이것이라고 말하였다 한다.

 나와 처는 1997년부터 2014년까지 17년간 나이아가라지역인 웰란드라는 곳에서 커피숍을 운영하였던 적이 있었다. 다운타운에 위치하여 있던 지방 작은 도시의 전형적인 커피숍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경양식을 겸비한 우리 커피전문 가게도 단골 위주의 고객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친교를 겸한 사교 장소로 이용되고는 하였었다.

 많은 고객들의 하루의 일과는 ‘토론토스타’에 나오는 크로스 워드(crossword)를 한 손님이 말하면 합동작전으로 문제를 풀어가면서 서로 농담과 잡담을 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그런데 그들이 풀기 어려운 문제, 옛날 영화배우 이름이나 세계적인 상식 문제가 나오면 나에게까지도 그 바통이 넘어온다. 그들에게 나는 한국에서 온 세계 상식 박사였다. 물론 영어나 캐나다, 미국에 관한 지식과 상식은 우리보다 우월할 수 있지만 비록 주입식 교육 위주였다 할지라도 세계 역사를 포함한 다양한 교육을 받은 우리 한국 사람보다 상식 면에서는 빈약한 그들이었다.

 2014년 은퇴하여 토론토에 돌아왔다. 한편으로는 주로 소규모의 개인 비즈니스 운영이었지만 그간 고객들과 익혀왔던 알량한 영어회화 실력마저 퇴화할 것 같은 우려에 어쩌다 현지 캐나다인을 만나면 쉴새 없이 떠들어대었다.

 하루는 내 처가 “자기 은퇴하더니 젊은 백인 여자만 보면 엄청 수다 떨더라. 침을 질질 흘려가면서, 제 주제는 생각 안하고, 그렇게 좋으면 짜샤! 아주 짐 싸서 나가라고!”

 “여인이여, 어찌 참새가 봉황의 깊은 속을 알리요."

 나는 한국에는 회화 위주의 영어보다는 독해력 중심의 문법 위주인 영어가 필요하다고 보는 덜 세련된 골통이다. 그 이유는, 몇 달 전에도 한국을 방문하였지만 한국에서 살기에는 전혀 영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는 나라이다. 제 아무리 간판이나 상호명이 영어로 되어 있다 해도 단지 영어가 필요할 때는 원서를 해독할 때뿐이며, 그 능력을 가늠하는 시험 볼 때뿐이라 생각하고 있다.

 영어회화를 잘한다 해도 영어 작문에 서툴거나 원서를 해독할 능력이 안 된다면 그냥 수박 겉핥기일 뿐이다. 하지만 캐나다에 살기로 작정하고 이민을 온 경우는 다르다 할 수 있다. 이곳에 둥지를 틀었으니 영어를 하는 것은 기본이다. 그리고 노력을 해야 한다. 그렇다 해도 노력을 하기까지 과정을 거치다 보면 모국어와 외국어 사이의 한계점을 발견하게 된다.

 유창하게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인간의 능력은 제한되어 있다. 평상시에는 말을 잘하던 사람도 대중 앞에 서면 작아지는 사람이 있다. 연습경기에는 잘하는데 실전에 투입되면 못하는 선수도 있다.

 영어를 잘하느냐 못하느냐 가늠의 기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있겠지만 여기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기 전에는 대개가 거기서 거기 “도토리 키 재기”이다.

 캐나다는 한국이나 유럽과 같은 역사적인 유물을 갖고 있지 않은 나라이다. 따라서 건국의 역사가 매우 짧은 나라이다. 이곳에 1970년대에 온 한국 이민자들은 50여 년이라는 긴 세월을 캐나다를 그들의 최종 정착지가 되게 하기 위하여 노력한 이민 1세들이다. 교민사회의 기간도 그들이 흘린 땀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70대 후반을 넘어서서 80대에 들어서는 그들은 이민역사의 산 증인들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흘린 땀과 노고를 배워야 한다. 캐나다에서 영어는 기본이지만 세련되게 못한다 해서 절대 수치는 아니다.

 영어에 자신이 없으면 종이에 써서 그냥 이렇게 말해야 되겠다. “죄송하지만 저는 당신만큼 영어를 유창하게 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한국말만은 당신보다 더 잘할 수 있습니다.” (I am sorry, I don’t speak English very well like you but I can speak Korean better than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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