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라 불려지는 놀이

 

2016년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 알파고의 바둑 대결이 세기의 대결로 주목받은 적이 있었다. 당연히 바둑에 문외한들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결혼한지 얼마 안 되는 새댁이 있었다. 오랜 연애기간을 거친 후에 한 결혼이라 남편에 관해서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우연히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대결 뉴스를 보다 남편에게 물었다. 자기 바둑 얼마나 둬? 바둑에 급수가 있다면서, 몇 급이야? 남편은 대답하였다. 나, 바둑 몰라. 관심도 없었고 배울 기회도 없었고, 지금도 관심 없어.

새댁은 뻥 때리는 대답에 생각해 보았다. 나는 왜 내 남편이 바둑을 잘 알고 있으라고 생각했을까? 그것도 아주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을까? 나는 얼마나 자기를 알고 있을까? 교제할 당시 음악 특히 클래식 음악을 물어보면 그는 척척박사였는데 결혼 후 그는 한번도 고전음악을 들은 적이 없어.

연애할 당시는 앙드레 지드, 꺄무 등 잘도 지껄이더니 이제는 만화 외에는 어떤 책도 안보고 있어. 내가 알고 있는 이 사람은 누구일까? 얼마나 많은 양파 껍질을 벗겨야 제 본 모습이 나타날까?

 여기 깊은 사랑에 빠져 교제하는 두 남녀가 있다. 특정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바람직스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그 소망을 이르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건전한 작업(?)이 필요하다. 그녀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면 그도 고전 음악을 팝송보다 좋아하는 것이 유리하다. 그녀가 문학을 좋아한다면 그는 언제든 문학청년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사랑에 빠진 그가 기쁨을 선사하여 주는 그녀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사랑은 연인과의 만남에 충실하여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인정을 얻어내기 위한 노력의 한 필수과정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양에 플라톤이 있다면 동양엔 공자가 있다. 두 사람 다 인간의 사유 능력을 강조하였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 하였다. 다시 말해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생각하는 사유 능력을 가졌다는 말이다. 당연히 옳은 지적이다.

분명히 인간은 많은 생각을 하며 일상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렇다 해도 우리가 항상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평상시는 무관심하게 지나치던 일들이 예상치 못했던 사건들과 부딪쳤을 때에만 발생한다는 이론이다. 새댁의 경우를 보더라도 무심코 던진 질문에 대해 남편의 예상치 못한 대답은 그녀로 하여금 왜, 라는 질문을 떠올리게 하였다.

 공자(BC 551-BC 491)는 유교의 시조이다. 춘추시대 말기에 활동한 사상가이며 제자들을 가르친 교육자이다. 서양의 플라톤이 철인사상을 피력하기 위하여 지중해 연안국가들을 두루 다녔듯이 공자도 자신의 사상을 구현시키기 위하여 천하를 주유하며 다녔다.

그러나 자신이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고향 노나라에 돌아오게 된다. 그때 그의 나이 68세였다. 위대한 성인 공자, 하나 그는 스스로 성인이라 말하지 아니했다. 오히려 자만하지 않고 늘 겸손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독립했고, 마흔 살에 현혹되지 아니했고, 쉰 살에 천명을 얻었고, 예순 살에 마음 내키는 대로 좇았고, 일흔 살에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여도 법도를 넘지 않았느니라" 하였다.

평범한 한 인간의 일생을 단계적으로 말한 것이다. 정말 이러할까? 아니다, 그렇다 하기에는 분필 냄새가 물씬 풍겨오는 너무나도 교과서적인 응답이다. 친근감은 줄 수 있지만 너무 흠집이 없다. 왜 그럴까? 그렇다, 거기에는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웃음이 들려오는 놀이가 빠져 있었다.

 놀이라는 단어를 단순히 논다는 개념보다는 정신적인 창조활동으로 설명하였던 네덜란드 출신 학자가 있었다. ‘요한 하이징어’ 생소한 이름이다. 그는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이라는 그의 책에서 놀이가 노동이 아니라 유희 즉 놀이가 되기 위해서는 자발적 행위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인간의 자유가 필수 조건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 놀이에 명령이 가해지는 순간 그 놀이는 더 이상 놀이라 할 수 없다.

술래잡기 놀이가 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술래의 구령소리에 따라 참가자들은 재빨리 움직여야 한다. 거기에는 오직 자발적인 자유 행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드라마 오징어게임처럼 명령이 가해지는 순간 그 게임은 거대한 상금을 위한 생존의 서바이벌 경기가 되어 버릴 수 있다.

놀이에 강요의 명령이 개입되면 그 게임은 결코 더 이상 놀이라 할 수 없다. 놀이의 억지 흉내일 뿐이다. 이제야 알 것 같다. 왜 ‘하이징어’가 놀이는 수단과 목적이 결합된 것이라 하였는지! 또한 왜 노동은 수단과 목적이 분리된 것이라 하였는지!

기억하자! 우리가 하는 행동이 수단이며 목적일 때 우리는 행복과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수 있는 반면 우리의 행동이 무언가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비극적인 현재를 살고 있다는 것을!

 아이 때 경험했던 놀이의 즐거움을 되돌려 받자. 그것이 행복의 지름길이다. 그래서 니체에게 있어서 어린아이는 탄생을 의미하며 곧 창조의 놀이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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