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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정숙
    문협회원
    부동산캐나다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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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의 여유

 

 B.C주(브리티시컬럼비아 주)에서 발생한 눈사태는 대단한 참사였다. 폭설에 강풍까지 몰아치며 천하 만상을 얼어붙게 했다. 티브이에서는 통제구역 주민들이 멀리서 바라만 보면서 한숨을 들이쉬는 애타는 모습이 계속 실시간으로 방영되고 있었다.

마침 나는 게일 앤더슨 다 가츠(Gail Anderson Dargatz)의 ‘터틀 벨리’(Turtle Valley. 거북이 골짜기)라는 책을 막 읽고 난 참이었다.

1998년 브리티시컬럼비아의 사몬 암(Salmon Arm)에서 발생한 산불을 배경으로 불길을 피해 대피하는 며칠간의 긴박한 사태와 심리를 그린 소설의 이야기가 화면과 겹치면서 마치 불길과 얼음이 힘을 겨루듯 대비하며 피부에 닿듯 생생하게 전해졌다.

 긴급대피령을 발할 때는 대개 10분의 여유가 주어진다고 한다. 저자는 “만약 당신에게 10분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가지고 가겠습니까” 묻는다.

흥미로운 것은 전 25장 단위의 글 첫 페이지에 암시하듯 흑백사진이 하나씩 들어 있는데 상식적으로 이해가 잘 안 되는 것들이었다.

이 빠진 찻잔, 고물 잉크병과 펜, 옛날 사진기, 하모니카, 라디오, 안경집 속에 든 안경, 그림이 바닥에 그려진 대접, 봉제 인형, 심지어 쓰던 칫솔, 플라스틱 장난감 등 골동품의 가치도 없는 물건들이 끼어있는 것이다.

무엇을 가지고 갈 것인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두고 갈 것이었다는 그의 독백은 내 머릿속에 꽉 차서 곤혹스럽게 하던 지난 생각들을 한꺼번에 몰고 왔다. 나는 아직도 다 정리하지 못한 이삿짐을 둘러보았다.

1/6로 팍 줄이기로 큰 결심을 하였지만 5개월이라는 시간 내내 무엇을 쌀 것인가로 고심하였었다. 상식적으로 안 쓰는 것(새것), 낡은 것을 버리면 간단한데 결과는 정반대였다.

안 쓰는 것, 새것들은 선물로 받았거나 아끼느라 모셔둔 것들이니 버린다는 것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기회에 오래된 것, 낡은 것을 새것으로 교체하면 되지 않을까. 그러나 내 몸의 일부나 가족같이 된 정든 것들을 보내기는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재봉틀과 씨름하며 지어준 아이들 옷들, 털실로 짠 장갑 목도리. 이것들을 버릴 것인가? 커다란 상자에 봉제 인형들을 전부 담아 문 앞에 내놓고 보니 곰, 다람쥐 눈망울들이 어린 내 아이들의 품에 안겨 버림받는 슬픔에 젖어있는 듯 했다. 불쌍하여 전부 이삿짐에 도로 넣었다. 언젠가는 다 버리고 갈 것들인데 서두를 필요가 있을까. 전부 싸버린 것이다.

지금 열어보면 필요한 건 다 버리고 덜 필요한 것은 가져온 꼴이다.

게일 앤더슨 다 가쯔는 그의 남편과 네 아이가 살던 집 근처에서 일어나 삶의 터전을 전부 삼켜버린 산불에서 영감을 얻어 소설을 썼다고 한다. 긴급한 상황에서 불타는 집을 단념하고 대피한 사람들, 특히 불타는 집에서 10분 안에 가져갈 물건을 정하기엔 너무도 시간이 짧다는 수많은 사람을 인터뷰하였다.

무엇을 가지고 갈 것인가. 25개의 사진을 선택하여 찍는 데 1년이 걸렸다고 하였다. 무엇을 가지고 갈 것인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두고 갈 것인가 이었다는 그의 결론은 실제로 그런 상황에 당면하였을 때 인간은 깊은 내부에 숨겨져 있는 잠재적 나약함을 여실히 증명한다고 하였다.

가끔 사람들은 어떤 물건을 중고품 시장에 가지고 가기도 하지만 갑자기 그것이 보배같이 느껴지는 때가 있다. 그것들은 우리의 연약한 기억(추억)들이 때때로 우리 주위의 사라져가는 물건들에 의하여 새로운 힘을 불어넣는 불씨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우리는 자기가 보관하려고 선택한 물건들과 기억하려고 선택한 물건에 대해 선택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숨겨진 기억, 혹은 기념할 추억의 조각들이 어떤 형태로든 거기 숨겨져 있지만 우리 자신이 방아쇠를 당겨야만 한다는 이치이다. 그 방아쇠가 바로 낡은 집기, 사진, 혹은 기억될 만한 사건의 조각이라는 것이다.

나는 10분의 시간 안에 무엇을 들고 나올 것인가. 생각해 본다. 나 역시 골동품에도 미치지 못할 고물들을 들고 나올 것 같다. 그 고물들엔 내 시간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물품이라면 언제나 새것 더 기능적인 것으로 교체할 수 있겠으나 삶의 현장, 고뇌하며 투쟁하던 열띤 입김이 고스란히 스며있는 시간의 흔적은 다시 교체 할 수 없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시간의 흔적조차도 기억할 필요가 없을 때 나는 아무것도 들고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깨에 두를 한 벌 따뜻한 겉옷이면 족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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