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6.25 전쟁과 나

 

신복실

(전 민주평통자문위원)

 


2022년 6월 16일 나이아가라에서 열린 6.25 참전용사 추모비 제막식에서

 

1951년 일월 초, 복옥 언니와 형부가 친정집에 나들이 온 날이었다. 불행하게도 그날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일이 생겼다. 어머님이 저녁 준비를 하고 계셨는데, 고등학교 학생이었던 큰오빠가 헐레벌떡 들어와서 학생들 단체(10명)로 2명의 선생님과 함께 피난을 간다는 것이었다.

믿을 수가 없는 사실에 모두가 놀라고 의아했다. 우리 부모님은 큰오빠가 떠나지 못하게 달랬다. 그러나 큰오빠는 일주일 후면 돌아올 것이라는 말만 남기고 문밖을 나섰다. 어머니는 대문 밖까지 배웅하며, 만일의 경우 사태가 악화되어 우리 모두 떠나게 될 경우, 서울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큰오빠를 떠나 보냈다.

그때가 오후 5시쯤이었다. 북에서 내려오는 피난민들, 그리고 폭탄 터지는 소리가 더욱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불행히도 중공군 백만 명이 인해전술로 내려오고, 아군이 후퇴하고 있다는 소식이다(1.4 후퇴).

큰오빠가 떠나고, 3시간 후에 우리도 서둘러 집을 떠나야만 하는 급박한 일이 생기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 가족과 그날 친정에 나들이 온 언니식구가 아무 준비도 없이 사리원 기차정거장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피난을 가야만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언니와 형부는 아비규환 속에서 다행히 기차에 올랐다. 그러나 아버님은, 지금 우리가 집을 떠나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니,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 얼마 동안 지탱할 식량 및 필수품들을 챙겨 갖고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우리식구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에 큰언니 식구 3명, 이모네 식구 3명 그리고 우리 식구 4명 총 10명이 소달구지를 구입하여, 식량 및 필요한 짐들과 어린이들을 태우고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런데 우리 아버님은 집을 지키며 남겠다고 고집하셨다. 막내딸인 내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며 아버지가 함께 떠나지 않으면 나도 안 떠나겠다고 울움을 터뜨리는 통에 아버님이 마음이 변하셔 함께 떠나시게 되었다.

막내딸 고집으로 아버님이 함께 떠나게 된 순간적인 결정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던가! 어언간 황해도 사리원 집을 떠난지 70여 년이 지났다. 우리가족은 70여년간 소식도 모르고, 아버님을 애타게 그리워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북으로부터 자유를 향한 피난민 대열은 끝이 없었고, 폭탄 터지는 소리는 계속되었다. 정세는 시시각각 달라졌다. 우리가족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향 땅을 떠나, 자유의 땅을 향해 피난길에 나섰던 것이다. 매섭게 추운 날 아침, 중공군은 뒤에서 따라오고, 하늘에서는 비행기 소리가 요란히 들리는 가운데 드디어 임진강에 도착했다. 자유를 향해 임진강을 건너려는 피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한 사람씩 간격을 두고 줄을 지어 얼음 위를 조심스럽게 건너야만 했다. 한편 아이들을 실은 소달구지는 강물이 얕은 곳으로 한참 찾아 내려가서 건너야만 했다. 우리 어머니는 어린 손자를 등에 업었기 때문에 더욱 위험했고, 나는 어머니 뒤를 따라서 조심스럽게 강을 건넜으나 우리 뒤를 따라오던 남자가 얼음 속에 빠졌다.

그를 건지려던 친척도 물에 빠졌다. 얼음 속에서 살려달라고 호소하는 두 사람. 발을 동동 구르며 가족들은 누군가 그들을 구해주기를 호소했다. 다행히 우리 형부와 이모부가 잽싸게 소달구지에 짐을 묶었던 밧줄을 풀어서 그들에게 던졌다. 그리하여 두 생명을 구사일생으로 구해주었다.

피난 길에서 보람된 일을 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보람된 선행을 했으나 그 당시는 형부나 이모부가 그런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던 것 같다. 모두가 뒤를 돌아볼 여유도 없이 남쪽을 향해 자유를 찾아 발걸음을 재촉해야만 했다. 피난민 대열에 껴서 온종일 걷다가 해가 지면 빈집에 들어가서 머물렀다.

모두가 피곤에 지쳐서 코를 골며 자고 있는데 나는 밤이 되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온종일 걷는 동안 인민군 시체를 보는 날에는 더욱 잠을 이루지 못하곤 했다. 나는 깊이 잠든 어머니를 꼬집어서 깨우기도 했다. 그러나 낮에는 피난민 대열에 껴서 부모님께 배고프다, 다리 아프다는 불평도 못하고 계속 남쪽을 향해 걸어야만 했다.

우리는 충청북도 서정리에 도착하여 얼마 동안 머물고 있을 때, 남북 정전 협상 소식(1951년 6월)을 들었다. 그리하여 북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피난민 대열에서 길화 오빠가 사라졌다. 어머니는 해가 질 무렵까지 나타나지 않는 아들이 걱정되어 기다리려고 하셨지만, 형부와 이모부는 어서 서둘러 빨리 가기를 재촉하셨다.

어머니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우시면서 아들을 찾을 때까지 가지 않겠다고 하시고, 형부나 이모부는 날이 어둡기 전에 머물 곳을 찾아야 된다고 고집하셨다. 어머니는 아들을 잃어버리고 더 이상 갈 수는 없다는 고집으로 인해, 형부와 이모 부로부터 미움을 사게 되었다.

다행히 어두워질 무렵 산꼭대기에서 희미하게 어떤 사람이 보였다. 길화 오빠이기를 바랐는데, 정말 오빠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너무도 감격스러웠다! 어쩌면 길화 오빠를 잃어버릴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우리 일행이 수원시 외각에 있는 으슥한 절간 근처에 군인들 죽은 시체가 길가에 쌓인 곳을 통과해야만 했다.

그날 밤 나는 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토록 처참한 전쟁이 어디서나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랬다. 불행하게도 우크라이나 시민들이 러시아의 침공을 피해 피난길에 올랐다는 소식이 너무 충격적이고 슬프다. 러시아는 유럽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려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민주주의: 자유) 시도를 반대하는 것이 전쟁의 주원인이라고 한다.

전쟁으로 인해 징집대상인 성인 남성들은 아내와 아이들만 기차에 태워 보내야 한다. 그들의 애타는 심정 감히 짐작이 간다. “우크라이나를 피해 폴란드 국경지대에 이른 한 여성이 어린이를 달래며 흐느끼는 모습, 전쟁으로 인해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과 슬픔, 70여 년 전 한국 6.25전쟁(1950년) 당시 겪었던 우리의 고통과 슬픔을 연상케 한다.

근래 들어 우크라이나 전쟁 뉴스를 접할 때마다 마음이 저리다. 하루속히 그 처참한 전쟁이 끝나기를 바라건만 조기 종전 가능성이 희미하다. 그러나 나는 고통 당하고 있는 그곳 시민들과 어린이들의 자유를 위해 계속 기도한다. 어린 나이(그 당시 10살)에 고향을 떠나 임진강을 건너 피난민 대열에 끼어 부모님을 놓칠세라 공포에 휩싸였던 나의 전쟁의 악몽들이 지금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곳 캐나다 한인 지역사회가 과거 한국 6.25전쟁의 쓰라린 경험을 가졌기에, 우크라이나 시민들을 돕는 손길이 뜨겁게 계속되어 깊은 감동을 느낀다. 아울러 한국전쟁에 헌신한 UN참전용사들에게 감사함이 더욱 새로워진다.

2021년 11월 5일에 한국 6.25전쟁에 참전한 캐나다 용사들과 가족들에게 점심을 대접하는 해밀턴 보훈오찬회(김후정 준비위원장)가 있었고, 2022년 6월 16일, 나이아가라시(Niagara Falls City) 페어뷰 공동묘지에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한국 6.25 전쟁에 헌신한 참전용사와 가족들을 기리고 이를 추모하기 위한 기념비 제막식이 있었다.

나는 보훈행사에 참석할 때마다 다시는 그토록 처참한 전쟁이 없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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