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속의 미합중국 대통령(24)-자카리 테일러(3)

 

 

전쟁영웅(1847)

멕시코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한 뷰에나 비스타전투 승리로 일약 미국의 영웅이 된 테일러는 1847년 7월 4일 워싱턴을 중심으로 미 전쟁 영웅들의 클럽인 뉴욕 신시내티 소사이어티 명예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멕시코 전쟁의 영웅클럽인 에즈텍 클럽의 회원이 되었다.

또한, 미 의회의 최고훈장인 금메달을 세 번이나 받았다.

 

 테일러는 1847년 11월까지 만트레이에서 주둔했다가 군 임무를 마치고 만머스 증기선으로 12월 뉴 오얼린스와 루지 바톤 고향으로 돌아와 미국민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후에 북군의 영웅이 된 18대 미 대통령 율리시스 그랜트는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중위로 진급하여 테일러 장군의 예하 부대에서 테일러의 실전경험을 배웠다.

 

그랜트는 포크대통령이 멕시코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있는 테일러의 승전기회를 같은 정당의 스캇 준장에게 부여하기 위해 테일러 지휘 하에서 경험을 쌓은 노련한 장성들을 스캇에게 편입시켜 멕시코시를 함락시키게 하는 것을 목격하며 스캇군에 전근되었다.

 

그러한 불리한 조건에서도 아무 불평 없이 미군의 3배나 되는 멕시코군을 퇴각시킨 테일러의 용맹을 관찰하고 테일러 장군은 전선에서 계급장 없는 군복을 입고 그를 존경하는 부하들과 동등하게 잘 어울리고 주어진 조건으로 최선을 다해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1848년 대선(1848)

1846년 이후 에이브러햄 링컨을 포함한 위그당 지도자들은 테일러를 대선후보로 선정하였다. 민주당 지도자들도 마찬가지로 테일러를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초청하고 싶었지만 민주당 내분으로 위그당에게 기회를 주게 되었다.

 

테일러는 1848년 6월 9일 위그당 전당대회를 통해 대선후보로 지명 받았으나 무소속을 주장하는 테일러는 정중히 거절했다. 위그당 지도자들은 삼고초려 이상의 예로 계속 부탁하여 테일러의 승낙을 받았다. 테일러는 러닝메이트 밀라드 필모어 부통령후보와 함께 1848년 위그당 대선후보로 지명되었다.

 

민주당은 루이스 캐스를 민주당 대선후보로 지명하고 민주당을 탈당한 마틴 밴 뷰런은 자유 토양당을 창당하고 스스로 대선후보에 올랐다.

 

테일러는 유세에서 연방 중앙은행 재설치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인지하고 관세를 계속 내려 무역업을 활성화하고 노예제도 찬반에 의한 남북의 분쟁으로 야기되는 손실보다 미합중국의 단합으로 생기는 이득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48년 11월 7일 대선 결과에서 테일러는 290명의 선거인단 중 163표를 얻고 47.3%의 지지율로 127개의 선거인단 표를 받고 42.5%의 지지를 받은 케스를 누르고 13대 미합중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밴 뷰런은 0표의 선거인단 표에 10.1%의 지지율로 탈락하였다.

 

 테일러는 1849년 2월 24일 백악관에서 처음으로 포크를 대면하게 되었는데 포크는 군복 입은 농부처럼 보이는 테일러의 용모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대통령 자격을 의심하는 눈치를 보였다. 특히 포크는 자신의 명을 어기고 멕시코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미국의 영웅이 된 테일러에 반감을 갖고 저교육을 받은 테일러를 간접적으로 꼬집어 비난했다.

 

1849년 미국은 멕시코로부터 사들인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지역의 영토 분할, 노예제도로 인한 남북간의 분쟁으로 복잡다단한 큰 정치적 이슈를 갖고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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