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속의 미합중국 대통령(18)-제임스 넉스 포크(1)

 

 

영어이름: James Knox Polk

출생: 1795년 11월 2일, 노스 캐롤리나주 파인빌

사망: 1849년 6월 15일 테네시주 내쉬빌

부인: 새라 칠드레스(1803-1891)

특성: ‘서부개척은 미 정착인의 숙명이다’(Manifest Destiny)의 선구자

대통령 순위 및 임기연도: 11대, 1845-1849

역대대통령 평가순위: 12/44

소속정당: 민주당(Democrats)

업적: 1백만 평방 마일이 넘는 영토확장

인용구: 미 헌법의 궁극적인 목적은 다수가 소수의 권리를 침해하지 못하게 보호하는 것이다.

 

성장과 교육, 결혼(1795-1924)

제임스 넉스 포크는 1795년 11월 2일 노스 캐롤리나주 파인빌에서 부친 새뮤엘 포크와 모친 제인 넉스 포크 사이의 10명 자녀 중 첫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흑인노예를 거느리는 농장을 가진 부친은 1600년대에 정착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계통의 후예였다.

 

1806년 포크가족은 포크가들이 모여 사는 테네시주 머리 카운티로 이주하였다.

부친 새뮤엘은 머리 카운티의 판사직을 맞게 되었고, 제임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된 앤드류 잭슨을 포함한 유명 정객들과 친분을 맺게 되었다.

 

1813년 제임스는 시온교회학교를 거처 머프리스버로 브래들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노스 캐롤리나 대학에 입학했다. 근면하고 착실한 제임스는 재학 중 논쟁 회 회장을 맞고 연설을 읽혔으며 1816년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졸업 후 내쉬빌로 돌아와 변호사 수업을 받고 1820년 자격증을 획득한 후 머리 카운티에서 유능한 변호사로 활동했다.

 

12세의 새라 칠드리스를 처음 알게 되었다가 7년 후에 다시 만나 미모로 변한 새라에게 홀딱 반한 제임스는 1823년 구혼을 했고, 1824년 1월 1일 결혼식을 올렸다. 부농인 조을 칠드리스와 엘리자베스 위트시트의 6자녀 중 셋째 딸로 1803년 9월 4일 머프리스버로에서 태어났다.

 

새라는 1817년 윈스턴 샐림의 사립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당시 여자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교육이었다. 잭슨은 새라가 훌륭한 신부 감이라고 결혼을 부추겼다.

둘은 결혼 후 애를 갖지 못했다. 포크가 어렸을 때 담석 제거 수술 중 생식기관을 잘못 건드린 이유라고 역사학자들이 추측한다. 대신 조카를 양자로 키웠다.

 

중견정치인(1824-1843)

1824년 포크는 정치초년생으로 테네시주 대표 미 하원에 출마하여 5명의 중견 정치인들을 제치고 하원에 입성했다. 모든 일을 열성으로 하는 제임스는 선거운동을 강행하여 옆에서 내조하는 새라가 제임스의 과로를 염려할 정도였다.

 

1824년 대선에서 국민의 투표지지율이 가장 높았던 잭슨이 선거인단 투표로 낙선되는 과정을 목격한 포크는 1826년 3월 1일 하원에서 선거인단 투표제도를 국민의 다수 표로 결정하는 인기제도로 채택하자는 법안을 상정했다.

 

1827년 하원 재선에 당선된 포크는 잭슨의 연방정책을 동조하여 연방정부의 인프라 건설사업반대, 중앙은행제도 폐지 그리고 낮은 관세를 지지하였다.

 

1833년 하원 5선에 당선된 포크는 1836년 하원의장에 선출되었다. 잭슨과 밴 뷰런의 경제실책으로 1837년 장기 경제공황을 맞은 미국민의 원성이 하늘처럼 높아졌다. 같은 민주당인 포크는 차기 하원의장선출에서 겨우 13표를 받아 참패했다. 7번의 하원 재선과 2번의 의장직을 지냈던 포크는 8번째 하원출마를 포기하고 테네시 주지사선거에 출마했다.

 

민주당 표밭인 테네시주는 1835년 이후 처음으로 위그당의 뉴튼 캐논이 주지사가 되었다. 포크는 지역을 찾아 다니며 독립적인 주정부를 인정하는 민주당 정책을 재인식시키는 유세를 강행하여 1839년 5만4102표를 받아 2706표 차이로 당선되었다.

 

주지사에 당선된 포크는 부통령직을 다음 목표로 1840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부통령 공천 경선에 참가했다가 기권하고 공천 없이 밴뷰런 대통령후보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에 출마했으나 겨우 1표의 선거인단 표를 받고 탈락했다.

 

설상가상으로 해리슨의 유세에 힘입은 위그당은 1841년 제임스 존스를 테네시주지사 후보로 선정하여 존스는 포크와 300표 차이로 주지사에 당선되었다.

 

낙선된 포크는 컬럼비아로 돌아와 변호사업을 하다가 1843년 테네시주지사 선거에 재도전했으나 계속 참패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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