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의 건국국부들(29)-제임스 먼로(3)

 

(지난 호에 이어)

 

대통령 재임(1817-1825)

국내정책

1817년 먼로는 8년간 탐킨스 부통령 잔 쿠인시 애담스 국무장관 윌리엄 크라프트 재무장관을 중심으로 내각을 형성하였다. 앤두루 잭슨의 사양으로 잔 캘훈을 국방장관에 임명하였다.

1812년 전쟁 후 국민을 안심시키기 위해 먼로는 두 번에 걸친 장거리 여행으로 미 각주를 방문하며 미 국민과 연방정부의 신뢰를 쌓고 평화의 기쁨을 나누었다.

먼로는 재임시 미시시피주(1817), 일리노이주(1818), 앨러바마주(1819), 매인주 (1820), 미저리주(1821)를 미연방에 편입시켰다

 

미저리 타협(MISSOURI COMPROMISE 1819)

1819년 노예해방법을 반대하는 미저리 주민들의 반발로 먼로는 1820년 1월 26일 매인주를 완전 노예해방주로 미저리주를 노예허용주로 선정하고 위도 36.6도 이상의 주는 노예제한지역으로 결정하는 미저리 타협을 맺었다.

 

1820 대선(1820)

국민의 화합정책으로 먼로는 1820년 12월 1일 두 번째 대선출마에서 선거인단 232명중 231명의 다수 득표로 99.5%의 지지를 받고 대통령 재임을 하게 되었다.

 

1819경제공황(1819-1821)

1812년 전쟁 발발 이후 미국은 유럽과 무역으로 호황시기를 만나 중앙은행이 돈을 계속 풀어 서부개척으로 인한 토지투기가 성행하였다. 그러나 전후 유럽국가는 농산품과 공산품을 유럽자국에서 생산하여 미국의 수입품을 급감시켰다.

이에 미 중앙은행은 융자를 제한하여 시중에 돈이 돌지 않아 모기지를 낼 수 없는 토지투기가들의 파산이 급증하고 실업자가 증가하여 미국은 건국 후 처음으로 1819년 경제공황을 맞게 되었다.

먼로는 운하개척 등 인프라투자정책과 수입세 인상을 고려했으나 연방정부의 권한이 제한되어 공황에 대한 경제정책에 속수무책이었다. 1821년까지 계속된 경제공황 중 두 배로 늘어난 시중은행들이 거의 모두 파산되고 12,000명 이상의 실업자들은 후에 텍사스주로 편입된 멕시코계의 텍사스공화국으로 이주하였다.

 

국제정책

1817년부터 2년간 먼로는 영국과 화친을 맺고 5대호를 중심으로 캐나다와 국경을 확실시하고 양국의 해군증강을 제한 하였다. 1824년에 먼로는 러시아와 알라스카를 중심으로 국경선을 그었다.

 

플로리다 영입(1819)

1818년 스페인은 중남미 식민지국들의 독립전쟁과 나폴레온 전쟁으로 국력이 쇠약해진 상태에서 플로리다거주 미 국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세미놀 원주민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먼로는 잭슨을 보내 세미놀 원주민을 격퇴시켰다. 잭슨은 계속 스페인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잭슨의 스페인 지역 점령은 스페인과 전쟁을 벌이는 것과 같다는 미상원의 반발로 먼로는 애덤스를 보내 스페인과 협상을 하게 하였다. 애덤스는 1819년 스페인과 애덤스-오니스협상을 통해 무일푼으로 서부 플로리다와 플로리다를 영입하였다.

명목상으로는 플로리다 거주 미 국민이 스페인에게 반란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발생한 플로리다 거주 미국민의 손실을 5백만 달러에 보상해 준다는 조건이었다.

 

먼로 독트린(MONRO DOCTRINE 1821)

1822년 먼로는 스페인으로부터 아르헨티나, 페루, 컬럼비아, 칠레, 멕시코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이는 미국이 중남미의 해방된 식민지국가들과 경제교류와 외교를 통해 그들의 확고한 독립을 유럽강국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나폴레온 전쟁에 승리한 러시아의 알렉샌더 1세는 1821년 영국을 제외한 유럽강국들과 홀리 얼라이언스를 창시하고 알래스카를 통해 북미를 침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 기구에 참가하지 않은 영국은 먼로와 손을 잡고 앵글로색슨족만 미주를 통치해야 한다는 결의에 동조했다.

먼로는 1821년 12월 2일 영국의 지지를 받고 독자적으로 미국은 유럽분쟁에 동참하지 않고 유럽제국은 중남미를 포함한 미주에 식민지정책을 포기하라는 먼로 독트린(MONRO DOCTRINE)을 선포했다.

 

은퇴(1825-1831)

1825년 3월 먼로는 먼로 힐에 돌아와 버지니아대학의 명예이사가 되었고 동년 8월 아담스 6대 대통령을 초청하여 미국을 방문하는 라파이엣트를 접대하였다. 먼로는 대통령 재임시 진 빚을 농장을 정리하여 갚았지만 항상 빚에 쪼들리며 조촐한 은퇴생활을 했다.

1830년 부인 엘리자베스가 사망한 후 먼로는 뉴욕시로 거주지를 옮기고 1831년 7월 4일 사망하였다. 그의 시신은 버지니아주 헐리우드 장지에 안장되어있다. 독립선언문을 같이 만든 토마스 제퍼슨과 잔 애담스가 1826년 미 독립 50주년 기념일 5시간 차이로 세상을 떠난 5년 후 먼로는 미 독립기년일에 사망한 세 명의 미합중국 건국국부들 중 마지막이 되어 미국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의 영적인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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