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속의 미합중국 대통령(29)-프랭클린 피어스(1)

 


영어이름: Franklin Pierce

출생: 1804년 11월 23일 뉴 햄프셔주 힐스보로

사망: 1869년 10월 8일 뉴 햄프셔주 콩코드

부인: 제인 애플턴(1806-1863), 1834년 결혼

부친: 벤자민 피어스 뉴 햄프셔 주지사

특성: 전투경험 없이 정치적으로 준장 승격

대통령 순위 및 임기연도: 14대, 1853년 3월 4일 – 1857년 3월 4일

역대 대통령 평가순위: 40/44

소속정당: 민주당

임기 중 인구 증가: 2591만명에서 2929만명

 GDP 증가: $33억1100만에서 $41억 8천만

 1인당 GDP 증가: $1,277에서 $1,427

업적: 메실라 조약으로 게스든 지역 구입(76,845 평방 KM)

인용구: 시간이 돈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성장기간(1804-1827)

프랭클린 피어스는 1804년 뉴 햄프셔주 힐스보로에서 부친 벤자민 피어스와 모친 애나 케드릭 피어스 사이 7자녀 중 4번째로 태어났다. 뉴 햄프셔 주지사를 지낸 부친은 아들의 교육을 중요시하고 프랭클린이 12살 때 지방학교 기숙사에 보냈다.

집이 그리워진 프랭클린은 어느 일요일 12마일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아들을 저녁까지 잘 차려주고 역마차에 태워 학교 기숙사까지 6마일 떨어진 곳에 내려놓고 천둥 번개 치는 저녁날씨에 학교로 걸어가라고 했다. 프랭클린은 후에 부친으로부터 받은 생교육에 자신이 성공하게 되었다고 진술했다.

1824년 프랭클린은 메인주 브런스윅에 위치한 보든대학을 졸업하고 노스 햄프턴 법대에서 법을 공부하여 1827년 뉴 햄프셔 변호사 자격증을 따고 변호사 사무실을 차렸다.

 

정치입문(1828-1833)

프랭클린은 1824년부터 변호사업을 하며 정치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여 힐스보로 타운 의원직을 겸했고 1828년 뉴 헴프셔주 하원의원이 되었다.

1831년 27세의 나이에 프랭클린은 앤드루 잭슨의 정책을 강조하여 주지사에 재임하는 부친 벤자민과 함께 뉴 햄프셔의 민주당 스타가 되었다.

1832년 대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잭슨의 영향으로 프랭클린은 28세의 나이에 미 하원에 등극하게 되었다.

 

결혼(1834)

1827년 제인 민스 애플턴은 교수의 소개로 프랭클린을 만났으나 제인의 모친은 술을 좋아하고, 교파가 다르고, 노예제도를 추종하는 프랭클린을 받아드리지 않았다.

사실 둘의 성격과 습관은 서로 공통점이 없었다. 그러나 아랑곳없이 둘은 7년간 연애를 하다 프랭클린이 힐스보로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차린 후 1834년 11월 19일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제인은 절실한 기독교신자로 금주를 지향했다. 또한 정치적으로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위그당을 지지했다. 수줍어하는 성격에 결핵을 앓게 되어 몸이 쇠약했고 남편의 정치활동을 싫어했다. 게다가 첫째 아들은 갓난애기 때 죽고, 둘째 아들은 4살 때 디프테리아로 병사했고, 막내 아들은 11살 때 기차사고로 사망하여 제인은 비운의 국모로 알려졌다

 

중견 정치인(1833-1842)

피어스는 1833년부터 1836년까지 미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노예해방반대, 중앙은행 폐쇄, 연방정부의 인프라 사업반대 등 잭슨의 민주당 정책을 고수했다.

그리고 1836년에 미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어 1837년부터 1842년까지 6년간 상원직을 맡게 되었다. 1837년 경제공황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민주당 대변인이 되는 것 외에는 별로 없었다.

1840년 대선 때 그는 밴 뷰런을 밀어줬지만 효과는 미미하게 끝을 맺었다. 그는 1841년 상원의원을 사임하고, 1842년 초 부인과 두 아들이 거주하는 콩코드로 돌아왔다. 다시 변호사업을 번창시키고 부인과 시간을 함께 지냈다.

 

멕시코 전쟁(1846-1848)

포크스 대통령의 검찰총장 임명요구를 피하여 피어스는 1846년 멕시코 전쟁에 자원하여 윈필드 스캇 소장 예하부대에 대령으로 참전하게 되었고, 1847년 준장으로 진급되었다.

미 역사상 민병대 소집 외에는 전투경험 없이 자신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정치적으로 별을 딴 유일한 장군이 되어 8월초 2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3주간 행군하여 8월 19일 콘테라스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피어스는 운이 좋지 않아 타던 말이 날뛰게 되어 안장이 사타구니에 충격을 주어 낙마하는 순간 말에 무릎이 깔리어 일어나지 못하자 장병들은 그가 혼절한 줄 알고 나약한 사단장이라고 떠들었다. 다음날 부축을 받으며 전장에 나왔을 때 전투는 이미 미군의 승리로 끝났다.

8월 20일 추루버스코 전투가 시작되면서 피어스는 진두를 맡았으나 전에 받은 부상으로 고통이 심해 혼절하였다. 전투에 승리한 미군은 멕시코시를 포위하고 3개월간 협상 중 피어스는 주로 야전병원 텐트에서 시간을 보냈다.

12월 말 콩코드로 돌아온 피어스는 1848년 전역하였고, 뉴 햄프셔주에서 승전장군으로 환호를 받았지만 그의 실제 전투경험은 조롱거리가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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