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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억 칼럼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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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진 것은 무엇인가?

 

베드로와 요한은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로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이다. 예수님을 수행하기 시작했을 때 베드로는 중년이 되어가는 나이였지만 요한은 이십대 중반의 청년이었다. 나이만 차이가 난 것이 아니라 성격도 크게 달라서 베드로는 언제나 적극적이었고 즉흥적으로 행동했지만 요한은 소극적이고 매사에 조심하는 신중성을 보였다.

이밖에도 그들은 여러 면에서 상이했지만 그들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다른 어떤 제자들보다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충성을 바친 제자였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성품과 재능은 달랐지만 그들 둘은 일심동체가 되어 예수님의 사역을 위해 그네들의 모든 것을 바쳤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임한 성령의 세례를 받은 제자들에 의해 태동된 초대교회의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했다.

하지만 그들이 주축이 된 초대교회는 너무도 초라하고 미약했다. 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한 초대교회의 구성원들은 거의 전부가 사회적 인지도가 거의 없는 미천한 서민 출신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이 당시 유대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던 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인정하지 않는 천국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으니, 그들을 향한 핍박과 탄압이 얼마나 컸을 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오순절에 내린 성령으로 무장한 초대교회 성도들은 두려움 없이 천국복음을 선포했다. 그들은 그들에게 가혹한 박해를 가하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항의하거나 반항하는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증거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했다.

어느 날,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3시 기도시간에 성전으로 들어갈 때 성전 문 앞에 앉아 구걸하는 한 걸인을 보게 된다. 그들에게 손을 내미는 그 사람에게 베드로와 요한이 “우리를 바라보라.”고 하자, 그는 기대에 찬 눈으로 그들을 쳐다본다.

베드로는 “금과 은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말하고는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킨다. 그러자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그 불행한 장애인은 벌떡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을 찬양한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가 깨달아야 할 핵심적인 진리는 “믿는 자들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은 ”예수께서 주시는 능력“이라는 점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세상의 칭찬과 존경을 받을만한 학문이나 자격을 구비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께서 하는 보좌위로 올라가시면서 주시겠다고 약속한 성령으로 충만해 있었다. 때문에 베드로가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일어나 걸으라.“고 명하자,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가련한 걸인이 즉시 일어나 걸으며, 뛸 수 있게까지 된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지녔던 성령의 능력은 예루살렘 성전 문 앞에 앉아있던 한 불쌍한 걸인만을 온전한 인간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베드로와 요한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지니고 땅 끝까지 달리며 생명의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능력으로 어두움의 권세에서 벗어나 빛 가운데로 걸어가는 믿는 자들이 필수적으로 가져야 할 것은 ”성령의 능력“이다.

초라하고 미약했던 초대교회는 모진 박해와 압제를 이겨내며 천국진리를 선포하며, 어둔 세상을 밝히고 죄악으로 물든 세상을 정화시키는 빛과 소금의 직분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러나 주후 313년 로마제국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됨으로 묶여있던 쇠사슬로부터 벗어난 교회는 세속화되기 시작한다.

보잘것없었던 초대교회에 충만했던 성령이 자유를 누리며 세상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교회들 속에서는 거할 수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 비대해진 중세의 교회들은 “이제 아무도 우리에게 금과 은은 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라는 자만심에 빠져 서서히 세상 속으로 빠져 들어갔던 것이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주축이 되어 일으킨 종교개혁은 기독교가 미약했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많은 부와 권력을 등에 업고, 그 막강한 힘을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여 휘둘렸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세계인구의 30%이상이 기독교인이며, 수많은 대형교회들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군림하고 있다. 하지만 믿는 사람들을 향하여 “나도 당신들처럼 살기 위하여 교회에 나가고 싶다.”고 말하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 알고 싶다.

어디를 가든지 우뚝 서있는 교회들이 하나님의 진리등대가 되어 “성난 물결”이 설레는 험한 바다를 비추며, 죄로 더럽혀진 사람들의 마음을 흰 눈처럼 씻어주는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고 있을까?

디베라 호숫가에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내 양을 치라.”하신 예수님의 명령은 사역하는 교회를 수만 명이 모이는 대형교회로 성장시키라는 분부가 아니었다.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험한 골짜기를 헤매며, 외롭고 병든 자들을 찾아가 위로하며, 목마르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고 마시게 하며, 멸망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예수님을 닮은 선한 목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양 떼를 올바르게 먹이는 것이라 믿고 실천하는 주의 종들이 얼마나 되는지도 의문이다.

우리 구원의 대장 예수님은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운영이 계획대로 진행되며,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게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은총을 허락하셨다. 때문에 우리는 구원받은 자로서의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베드로처럼 “금과 은은 없지만 예수님이 허락하신 성령의 능력”을 지녀야 한다.

이제 우리는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가?”를 확인해야겠다. 우리가 가진 것이 돈과 명예와 사회적 지위뿐이라면 생명의 불길이 꺼지는 순간 비참한 인생의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말이다.

사족 같지만 첨부하고 싶은 말은 우리는 한민족의 후예들이며, 우리의 조국은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수많은 나라들 중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그가 주관하는 역사에 동참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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