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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억 칼럼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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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들의 생애(9)-소사사 입산

 

“입다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육 년이라. 길르앗 사람 입다가 죽으매 길르앗에 있는 그의 성읍에 장사되었더라. 그 뒤를 이어 베들레헴의 입산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더라. 그가 아들 삼십 명과 딸 삼십 명을 두었더니 그가 딸들을 밖으로 시집 보냈고 아들들을 위하여는 밖에서 여자 삼십 명을 데려왔더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지 칠 년이라. 입산이 죽으매 베들레헴에 장사되었더라.”(삿 12: 7-10)

 

입다의 뒤를 이어 아홉 번째로 등장한 소사사 입산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지극히 짧다. 베들레헴 사람으로서 입다 다음에 사사가 되었으며, 그에게 아들과 딸이 30명씩 있었다는 것이 그의 인적 사항에 대한 전부다. 그가 7년 동안 사사로 있다 죽어 베들레헴에 장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그가 사사로서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하여는 언급조차 없다.

때문에 입산이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무슨 일을 했는지에 관해 알아보려면 입다가 죽고 그가 등장할 무렵의 이스라엘이 어떤 상태에 있었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입다가 길르앗 주민들을 주축으로 구성된 이스라엘 군을 이끌고 암몬 족속을 크게 물리치고 돌아오자,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몰려와서 암몬과 싸우려 갈 때 어째서 그들을 부르지 않았느냐고 따지고 들었다. 입산을 향한 그들의 항의는 잘못된 것이었다. 입다는 암몬과 전쟁을 할 때 그들을 불렀지만 그 요청에 불응한 것은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에브라임 지파는 입산이 생사가 걸린 전쟁을 할 때는 자기들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모르는 척 하다가 입산이 영광스런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자 시기심이 발동했으며, 입산의 세력이 커질 것을 견제하기 위하여 몰려와 억지를 부린 것이다.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은 기드온이 미디안을 격파했을 때도 어째서 전투가 시작될 때 그들을 부르지 않았느냐며 불만을 표출했었다(삿 8:1). 에브라임 사람들은 그들이 이스라엘을 주도하는 지파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때문에 다른 지파가 공을 세워 그들의 주도권이 약해진다고 생각되면 어김없이 불평과 불만을 토로하며 나서곤 했던 것이다.

그들이 기드온에게 어째서 자기네를 선두에 세워 싸우지 않고 요단 강변에서 퇴각하는 미디안 병사들의 퇴로를 차단하는 역할을 맡겼느냐며 항의해 오자 기드온은 너그럽게 그들의 항변을 받아들이며 그들을 설득하여 문제를 해결했다. 지파들 간에 잡음이나 분열이 없어야 이스라엘이 강해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다는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그에게 어떻게 그런 이치에 맞지 않는 항의를 하느냐며 꾸짖었으며, 그를 따르는 길르앗 사람들을 이끌고 에브라임 지파와 전투를 벌인다. 이 싸움에서 에브라임 사람들이 42,000명이나 목숨을 잃는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온 후 첫 번째로 한 인구조사에서 에브라임 지파의 장정수가 40,500명 이었다는 사실(민 1:33)을 감안하면 길르앗 지파와의 싸움에서 전사한 에브라임 사람들의 숫자는 엄청난 것이었다. 때문에 이 비극적인 내전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상처를 입었음은 물론 지파들 간의 갈등과 분열현상이 표면화 되었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기드온의 서자 아비멜렉이 이복형제 70명을 학살하고 왕이 된지 3년 만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자 이스라엘의 화합이 무너지고 지파들 사이에 불신과 적대감이 조성되었던 것과 같은 상황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시기에 등장한 사사가 입산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입산이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일은 기드온 이후에 돌라가 감당했던 역할과 비슷했으리라 생각된다.

돌라는 아비멜렉으로 인해 산산이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서로 믿고 의지하며 살 수 있도록 한 사사였다. 때문에 성경은 “돌라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삿 10:1)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입산에 관하여는 그런 언급이 전혀 없다.

그런데도 입산이 이스라엘을 7년이나 다스린 사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30명의 딸들을 다른 집안으로 출가시키고, 아들 30명을 위해서는 다른 집안에서 며느리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입산에게 자녀가 많았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았으며, 상당한 명예와 권세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입산이 60이나 되는 아들과 딸들을 다른 가문이나 지파 또는 이방인들과 결혼시켰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입산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입산이 딸들을 “밖으로 시집 보냈고, 아들들을 위해서는 밖에서 며느리를 데려온 것”은 지파간의 화목을 도모하기 위한 의도적인 정략결혼이라고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입산을 입다가 암몬의 침략을 물리친 후 그에게 항의하는 에브라임 지파를 무력으로 진압함으로 야기된 지파들 간의 반목과 갈등을 봉합하고 이스라엘의 내부적인 화합을 도모하는 것이 그가 수행해야 할 사명이라 믿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입산은 아들과 딸들을 외부 사람들과 결합시킴으로 이스라엘을 화평케 한 사사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입산이 감당한 사역을 살펴보며 오늘 날의 믿는 자들도 개인과 사회는 물론 더 나아가서 국가와 민족이 당면한 아픔과 갈등과 반목과 갈등을 해소시키기 위해 각자의 달란트와 은사를 최대로 활용해야 함을 기억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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