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뒷배

 

1990년대 말, 한국보수야당에는 대권을 꿈꾸는 이른 바 ‘잠룡’들이 많았다. 8룡이니, 9룡이니 경쟁하며 유권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 가운데는 한국에서 가장 어렵다는 시험에 모조리 합격하고, 법조인 등으로 화려한 경력을 쌓은 정치인도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꼬리표처럼 약점 한 가지가 따라다녔는데, 당적을 수 차례 옮겼다는 비판이다.

어느 날 기자가 그에게 물었다. 지나치게 오락가락하는 행보를 한 것 아니냐고. 그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자신은 한 번도 정치적 입장을 바꾸지 않았으며, 항상 같은 자리를 지켰다는 것이다. 다만 혼탁한 상황 때문에 정치지형이 자주 바뀌다 보니 마치 자신이 이리저리 옮겨 다닌 것처럼 보여 억울하다고 오히려 하소연했다.

정치인이 무슨 소리를 못 하겠는가. 곤란한 질문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것도 중요한 기술이다.

그럼에도 정치인이 자신을 중심에 놓고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 ‘정치적 천동설’은 어딘가 위험하다. 다수 유권자들의 공감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보수야당의 그 잠룡은 결국 대권실패는 물론 서울시장 등에도 잇따라 낙선하면서 정치적으로 큰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 6개월을 맞아 방송사들이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긍정 지지층은 30% 언저리, 부정평가는 60% 안팎이었다. 그가 대선 때 얻었던 50% 가까운 득표율을 생각하면 취임 이후 지지율을 꾸준히 까먹고 있는 것이다. 6개월간 사건사고나 인사, 정책논란이 많이 불거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원인은 국민이 아닌 자신과 특정세력을 중심에 놓고 정치를 펼치고 있다는 데서 찾아야 한다. 말하자면 검찰 만능주의다.

예견됐던 부분이다. 2013년 10월21일 검찰에 대한 국정감사가 열렸다. 당시 새누리당 정갑윤 의원이 윤석열 여주지청장에게 “사람에게 충성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윤석열은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앞서 윤석열은 채동욱 검찰총장의 지시로 이명박 정부의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수사를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혼외자 논란이 불거진 채총장이 낙마했으나 이후에도 윤석열은 수사를 강행하며 "외압이 있었다"고 폭로했다. 이른바 항명파동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나온 윤석열의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발언은 그에게 ‘강골 검사’의 이미지를 씌웠다.

그러나 눈여겨볼 대목은 따로 있었다. 정갑윤 의원은 당시 윤 지청장에게 “조직을 사랑하느냐”고 먼저 물었고, 윤은 “대단히 사랑한다”고 답했다. ‘대단히’라는 단어 속에서 검찰에 대한 그의 애착, 정확히 말하면 검찰 특수부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게 드러난다.

어쩌면 대통령 자리에까지 오른 윤석열의 이후 행보를 푸는 열쇠는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 신념이 아니라 ‘검찰을 사랑하는 마음’에 있다. 그것이 자신을 서울지검장과 검찰총장 등 검찰요직에 앉힌 문재인 정부를 향해 반기를 든 배경이기도 하다.

그는 검찰총장 재직 시절 조국 전 법무부장관에 대한 수사를 지휘했다. 이 수사를 두고, 검찰개혁에 대한 반발이라는 지적이 나왔지만, 윤석열은 “검사가 정치적으로 편향됐다면 이는 부패한 것과 같다”는 말로 맞받았다. 그는 박근혜 전 대통령 수사 등 여야를 가리지 않고 칼을 겨눴다는 의미로 자신의 정치적 편향성을 부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윤석열의 행보는 그의 신념과 거꾸로 가고 있다. 자신이 도륙했던 보수 정치권의 대표로 변신하더니, 대통령 취임 이후에는 검찰 출신 몇몇 인사들이 정부 요직을 모조리 장악했다. 국민들은 윤 대통령 자신을 둘러싼 주변인들과 야당 대표를 향한 검찰 수사의 형평성에 강한 의문을 제기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자칭 ‘헌법주의자’다. 그런 면에서 그의 대통령직 수행은 철저하게 헌법정신에 따른 것이어야 맞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취임 이후 광복절 기념사와 유엔 연설 등 공식행사에서 ‘자유’라는 단어를 300번 가까이 들먹였지만 헌법이 보장하는 언론의 취재 자유조차 허락되지 않고 있다.

오로지, 윤석열만이 누리는 자유의 원천은 그가 사랑하는 검찰이다. 노무현을 비롯해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 모두 검찰 수사를 받았다. 그러나 윤석열은 검찰, 그것도 특수부 출신이다. 검찰이 수사하지 않고, 기소하지 않으면 있는 죄도 없게 되는 것이 대한민국이다.

윤 대통령이 "여론조사 신경쓰지 않는다. 지지율 의미 없다"고 함부로 말할 수 있는 든든한 뒷배가 검찰인 것이다. "대통령 처음 해봐서"라는, 지지자들과 국민들을 무시하는 발언을 아무 생각없이 아무 때나 내뱉을 수 있는 것도 검찰을 믿기 때문이다. 검찰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대한민국의 핵심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문학의 천동설이 한 순간에 무너졌듯, 자신을 세상의 중심이라고 착각하는 '정치적 천동설'도 언젠가 깨지기 마련이다. 안기부(국정원) 보안사(기무사) 경찰 등 한때 대한민국을 쥐락펴락하던 권력의 중추들은 민주화 과정에서 차례로 권력을 내놓았다. 그것이 역사다.

그런 면에서 국민들의 비판적 여론은 물론 평소 강조하던 헌법적 가치 등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를 누리겠다는 윤 대통령의 행보가 언제, 어디까지 지속될지 지켜보는 것도 꽤 흥미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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