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의 일탈

 

 그것은 말 그대로 일탈이었다. 해를 벗어나다니 과감한 탈출 아니, 이해가 안 되는 무리수였다. 일탈(逸脫)은 국어사전에서, "정해진 영역 또는 본디의 목적이나 길, 사상, 규범, 조직 따위로부터 빠져 벗어남"으로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본 어느 날 해바라기의 일탈은 해(日) 벗어남(脫)의 의미로 먼저 다가왔다. 사진을 찍을 때만 해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황홀한 꽃에 취해 태양의 존재는 잠시 잊었다. 집에 와서 하나하나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비로소 내 눈이 휘둥그래졌다. 세상에, 해바라기가 해를 등지고 있다니!

 해바라기를 그동안 수없이 많이 봐왔고 사진에 담기 위해 동네 거리를 일부러 돌아서 오가기도 했건만, 등진 태양을 배경 삼은 광경은 아이러니 그 자체였다. 오죽하면 해바라기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한글 만이 아니다. 금방 생각나는 영어도 그렇다. 중국어, 일본어, 스페인어, 독일어 등에서도 태양이라는 뜻을 지닌 형태소가 포함된 복합어로 나타난다고 한다.

다만 터키어에서는 '달꽃'이라고 한다니 해가 아닌 달에 비유되는 점이 특이하다. 마치 우리나라의 '달맞이꽃'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그러니까 반드시 태양과 연관되어 이름 지어진 식물은 아니겠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그래도 해바라기는 해를 바라보리라는 믿음이 강했다.

 다음날 다시, 해바라기를 찾아갔다. 혹시 사진이 잘못 찍힌 건 아닐까. 그랬기를 바라면서 그 장소에 갔다. 나의 실망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이 해바라기는 해를 뒤에 두고,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태양을 향해 있어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이 흔들리며 한동안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나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사회적 통념은 어떻게 할 것인가. 지구상에 퍼져있는 오해를 사람들은 알고도 모른 척하는 걸까. 아니면, 요즈음 들어 심각해지고 있는 기후 변화나 환경 오염 탓일까?

해를 등진 모습은 꼿꼿한 오만함의 표출이었다. 젊은 날의 내가 보였다. 자라면서 그렇게도 부모의 은혜를 많이 받았지만, 다 커서는 제 혼자 이룬 듯이 의기양양했다. 자신감 넘쳐나는 강건함보다는 불손한 내면이 부끄러웠다. 산을 넘고 바다 멀리 부모를 떠나와서 제대로 모시지도 못하며 살고 있다. 자식들이 부모의 해바라기이거늘, 나는 그 역할을 일체 못하고 있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아버지 홀로 계시니 미어지는 가슴은 늘 그리움으로 아리다. 해바라기를 바라보며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나의 삼중 영상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갔다. 내 가족의 모습이 겹치며 사중 화면이 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모두 해바라기다. 햇빛은 성숙의 밑거름이다.

 해바라기뿐만 아니라 일반 식물 모두가 광합성 기능을 갖추고 있다. 자라면서 해를 바라보며 자양분을 취한다. 캘리포니아 대학 연구진에 따르면 태양을 향하는 것은 해바라기 꽃이 아니라, 꽃이 피기 전의 줄기 윗부분이다. 해바라기는 24시간 태양 시계의 리듬에 맞춰, 체내에 함유된 성장 호르몬인 옥신의 농도를 조절함으로써 줄기의 방향을 바꾼다고 한다. 밤에는 줄기를 동쪽으로, 낮에는 점차 서쪽으로 향하게 한다.

그러니까 성장할 때만 해를 향하고 꽃이 피면 동쪽을 바라보는 격이 된다. 자라는 동안 온종일 태양을 따라 고개를 움직이던 해바라기가, 성장이 끝나면 마침내 스스로 태양과 같은 모습으로 꽃을 피워 그 자리를 비춘다. 해바라기가 해로 변한 것이다. 찬란한 태양의 꽃, 그대 이름은 해바라기! 아낌 없이 주는 태양은 이제 꽃 뒤로 물러나 있다. 꽃의 영광을 위하여 지금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메시지를 온몸으로 전한다.

자식바라기가 된 입장에서 우리 아이들에게 내가 바라는 꿈도 마찬가지다. 각자가 소망스럽게 피어나길 축원한다. 해바라기는 '해' 와 '바라' 그리고 '-기'에서 왔다고 한다. 옛말 '바라'는 '바라다'와 '바라보다'의 뜻을 다 지녔다고 하니, '바라다'의 의미로 보면 해가 뒤에 있는 이유로도 작용할 것이다.

호기심으로 시작된 궁금증은 풀렸으나 어떻게 된 영문이지 개운하지 않다. 해바라기는 언제나 해를 향해 움직인다는 애초의 잘못된 상식이 차라리 진실이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변함 없는 일편단심의 의지를 그렇게라도 긍정 삼고 싶은 마음일까.

 지난 3년간 일탈은 언감생심 사치였다. 세기적 감염병 유행 자체가 이미 총체적 일탈이었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새삼 그 소중함을 체득하고 너나 할 것 없이 일상을 동경했었다. 이제라도 일상으로 점차 복귀하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런 즈음에 해바라기 일탈과 마주친 것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일상과 일탈은 이처럼 유기적 연동체였는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해바라기의 일탈은 그들로서의 일탈이라기보다는 나 자신의 고정관념 일탈을 위한 발로가 아니었나 싶다. 때로 지난한 삶과 맞부딪친다 할지라도 용기를 잃지 말라는 위로 소리가 들린다. 나란히 도열하여 나를 맞이하는 해바라기 물결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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