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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억 칼럼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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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설교-올바른 구제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1-4)


 산상수훈은 믿는 자들이 지녀야 할 인품과 자질로부터 시작하여 그들이 세상에 미쳐야 할 영향으로 이어진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아야 할 “의”에 관해 들려주신다. 예수님은 믿는 자들이 보여야 할 순결, 정직, 사랑은 그 동기와 목적이 순수해야 하며, 여기까지라는 “한계”를 두지 말라고 일러주신다. 그래야만 믿는 자의 “의”가 의도적이며 계산적인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의 위선적인 “의”와 달리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신 것이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믿는 자의 “도덕적인 의” 아닌 “종교적인 의”인 구제와 기도와 금식에 관해 말씀하신다.

유대인들은 구제, 기도, 금식은 생략해선 안될 “종교적인 의”로 간주하고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하지만 그들이 이 삼대의무를 이행한 동기와 목적에 문제가 있었다. 구제는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미는 행위이며, 구제의 근본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유대인들은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다는 목적보다는 자신들을 부각시켜 사람들의 찬사와 인정을 받기 위해 구제행각에 나서곤 했다.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께 자신의 간절한 생각을 아뢰는 것인데 자신이 경건한 신앙인임을 사람들에게 입증하기 위하여 기도하는 척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금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의 기본욕구이며 생존을 위한 필수요건인 식용을 억제함으로 자신을 통제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해질 수 있는 것이 금식을 통해서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들의 경건함을 보여주기 위한 방편으로 금식하는 이들이 상당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들을 잘 알고 계시기에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의”를 행하지 말라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너희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어 너희 착한 행실을 보이라.”(마 5:16) 하신 말씀과 상반된다. 무슨 까닭일까? 우선 “너희 착한 행실을 사람들에게 보이라.”는 “그렇게 실시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이다. 사람들은 마땅히 해야 할 옳고, 선하고, 정의로운 일인 줄 알면서도 다른 사람들 특별히 힘과 권력 있는 이들의 비위를 상하게 할까 두려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할 때가 많다. 예수님은 믿는 자들은 이 같은 비겁함에서 벗어나 해야 할 일이면 두려워 말고 실천해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말라.”는 자신의 경건함을 세상에 과시하기 위하여 선한척 해서는 안 된다는 금지령이다. 


 요약하면, 예수님은 “하라”와 “하지 말라”라는 상반된 명령을 통해 믿는 자들이 보여야 할 것을 “숨기는 죄”와 나타내지 말아야 할 것을 “들어내는 죄”를 범해선 안 된다고 일러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 아닌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상을 받지 못한다고 경고하신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상은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믿는 자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상은 영생의 기쁨을 누리며(요 6:47) 하루하루를 보람되고 만족하게 살다 예수께서 먼저 가셔서 준비하신 영원한 고향집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질에 얽매이고, 명예와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겐 별다른 가치도 매력도 없는 상일지 모른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겐 반드시 받아야 할 귀하고 소중한 상이다. 따라서 믿는 자들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처럼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받기 위한 위선적인 “의”를 행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구제는 자비와 긍휼이 여기는 마음의 외적인 표현이다. 그러기에 악인과 선인 모두에게 햇빛을 비추시고, 의로운 자와 불의한 사람 모두에게 비를 내리시며(마 5:44),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사람에게도 자비하고 인자하신 하나님(눅 6:35-36)의 자녀 된 믿는 자들은 끊임없이 구제의 손길을 펼쳐야 한다. 


 “살인하지 말라.”와 “간음하지 말라.”는 두 계명에 관해 말씀하시며 예수님은 마음의 살인과 간음도(마 5:21-28) 실제적인 살인과 간음으로 간주하신다고 언급하신 바 있다. 구제에 있어서도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무엇을 행하느냐?”와 마찬가지로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이 구제를 하는 동기를 보통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로, 사람들에게 자신을 과시하여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이고, 둘째는 익명으로 거금을 증정하면서 혼자만의 보람과 만족을 느끼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세상은 몰라도 하나님은 그의 순수한 동기와 목적을 아신다는 기쁨에 충만하여 구제함에 손을 넣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의 경우에는 자기네가 목적하는 바를 얻기 위해 하는 것이 그들 구제의 동기와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너희는 사람에게는 서로 칭찬을 받으려 하면서도 하나님에게서는 칭찬을 받지 않으려고 한다.”(요 5:44)고 책망하였으며, 사도 요한은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보다 세상의 영광을 더 사랑한다.”(요 12;43)라 기록하고 있다. 


 바리새인들은 구제할 때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려고 나팔 부는 사람들을 앞세우고 회당으로 향했다. 종교 개혁자 칼빈은 “그들은 가난한 자들을 돕는다는 구실을 내걸고 사람들의 박수와 찬사를 원하는 무리”라 평한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의 구제행위는 하나님을 슬프게 할 뿐임을 지적하신 것이다. 


 “위선”(Hypocrisy)이란 단어의 원래 의미는 “웅변가” 혹은 “배우”다. 따라서 위선자는 그가 선 곳을 무대삼아 “연기”를 하는 사람을 의미했다. 그러기에 위선자가 어떤 악역을 담당하더라도 관객들은 그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러나 종교적인 위선자들의 경우엔 문제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세상의 환심을 사고, 인기를 얻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속이는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금하신 것은 그들과 같은 위선적인 구제였던 것이다. 그런 목적을 위한 구제헌금은 아무리 그 액수가 클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상급은 최후의 심판 날에 위선에 대한 유죄판결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경고를 예수님은 잊지 않으셨다.


 사람들은 숱한 선량한 이들을 우롱하고 기만한 바리새인들을 비난하며 분개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는 그들도 바리새인들처럼 나팔수들을 고용하지는 않더라도 때와 장소에 적절한 모든 방법들을 동원하여 그들의 구제행위를 세상에 널리 알리려는 시도를 계속해오고 있다. 이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참으로 비통하실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참된 제자로 살기 원한다면 바리새인들이 행한 위선의 연기를 되풀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위선적인 구제행위를 금하신 예수님은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믿는 자는 그의 구제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음은 물론 자신까지도 모르게 하라는 것이다. 그대로 실행하기 힘든 분부시다. 얼마인지도 모르는 현금을 남의 손에 쥐어 줄 수도 없거니와 수표인 경우에도 백지수표를 발행하지 않는 한 액수를 모르는 채 서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기도 모르게 구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한 마디로 구제행위가 끝나고 나면 기억 조차하지 말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이다. 


 행한 일을 공포하는 것은 허영심을 만족시키려는 교만과 위선의 죄요, 마음에 계속 담아두면 자만감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높이는 죄악이기에 구제는 행위가 끝나는 즉시 잊어버려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인 것이다. 결코 실행하기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난 이들은 해낼 수 있어야 한다. 


 독일 신학자 본훼프가 “자신도 모르게 구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을 알기 전의 자신을 장례지내라는 의미라”고 말한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칼빈은 오른손과 왼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구제의 증인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심을 지적하신 것이라 설명한다. 아무도 하나님이 모르시는 비밀을 간직할 수는 없기에 하나님만이 언제나 우리의 확실하고 충실한 중인이시란 의미다. 


 우리의 구제로 굶주린 이들이 배를 채울 수 있고, 헐벗은 사람들이 옷을 입을 수 있으며, 병든 자들이 나을 수 있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되며, 길 잃고 방황하던 인생들이 제 길을 찾을 수 있게 되기를 하나님은 원하신다. 그런 구제는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행할 수 있으며, 그런 구제만이 하나님께 모든 영광이 돌아가는 진정한 구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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