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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칼럼

kimjinky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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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규(장로,토론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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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inkyu
김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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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6
복음과 사역과 기도(55)

(지난 호에 이어)

크리스천들은 우리를 비난할 기회를 찾는 자들에게 꼬리를 잡히지 않도록 하라. 그리고 우리 가운데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 우리 크리스천은 때때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여야 한다.

또한 우리는 부끄러움이 없는 직업을 갖고 수고하며 신앙생활을 하여야만 된다. 우리는 항상 주 예수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행20:35)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역설적인 진리가 담겨 있다. 즉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더 복이 있다.

가난하여서 남의 도움을 받는 것보다 부유하여 남을 돕는 것이 더 복된 삶이다. 갖고 있는 것이 많든 적든 간에 선을 행하는 것은 더욱 복된 삶이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기쁨을 준다. 그러나 감사할 줄 모르는 자에게 선을 행하는 것은 더욱 명예로운 일이 됨을 알자! 왜냐하면 그들 대신 주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만한 지식보다 사랑의 우월성을 알자. 사랑은 최대의 유익을 가져오는 것이다(고전8:1). 그러나 지식이나 그 자랑은 우리들 자신에게 무익하고 이웃에게 상처를 준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과 따뜻한 공동체 안의 형제에 대한 배려는 형제의 유익과 덕을 위한다.

참 지식이 있는 사람은 자기의 무지와 인간 지식의 불완전함을 안다. 즉 사랑의 사람이 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사도<바울>은 형제의 영혼을 그토록 사랑하였기 때문에 자기의 자유를 포기하고 먹고 싶은 음식을 금하고 형제의 죄와 걸림을 피하기를 원했다.

크리스천들은 그 자체가 무죄하더라도 형제에게 걸림이 되는 일은 주의하자! 자유는 가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형제의 연약함 때문에 그것을 포기해야 할 때도 종종 있음을 알자. 우리는 형제의 영혼의 파멸을 초래하면서 우리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사용해서는 안 된다. 남의 죄를 우리가 주의해야 한다면 우리 자신의 죄는 얼마나 주의 해야 하겠는가!

주님을 믿고 선을 행하는 사람에겐 빵(식량)이 주어지는 것이다. 즉, 정직하게 계약된 자기의 의무를 성실하고, 정직하게 수행하고 자기가 해를 입어도 결정된 바를 변경하지 않는 인격체의 성도들은 그들의 법칙은 대접 받은 대로가 아니라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행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미래의 영원한 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해서 자선과 경건한 일에 우리의 부를 열심과 근면으로 사용하는 것이 정말 지혜있는 태도이다. 우리가 우리의 <기도>로 서로 도우면 기도의 응답 때문에 주 하나님께 감사할 기회가 생긴다.

우리는 기도로 서로 도와야 하며 찬양과 감사로써 받은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우리는 양심으로 우리 자신을 판단해야 하며 이런 저런 행동으로 우리 자신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복음>은 주 하나님에게서 와서 하나님을 향한 주 하나님의 은혜가 <원리>이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할 때에 우리의 마음과 행동은 잘 처리 되는 것이다. 즉 공동체 안에서 목사와 교인들이 서로 즐거워 할 때에 행복한 교회가 된다.

우리가 언약의 말씀(복음)을 듣고 그것을 토대로 하는 <믿음의 기도>는 절대로 허사로 돌아가지 않는다. 아니, 그 기도는 “평안한 대답”을 받을 뿐 아니라 존귀한 응답을 받게 된다.

크리스천은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있는 체 말라 – 롬12:16>. 여기서 서로 마음을 같이 하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서로간에 같은 일을 생각하라”는 의미이다. 즉 아낌없이 사랑을 베풀라는 것이다.

우리 각자가 상대방의 느낌과 욕구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그와 더불어 한 마음이 될 수 있다. 즉 서로간에 같은 정신을 품는 것이라고 생각 된다.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획일성이 아니라 <만장일치>를 뜻한다. 또 본문 말씀 속에서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라는 말은 <분수에 넘치는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낮은 데 처한 자들이란 말은 자신에 대해 겸허한 입장을 취하고 자신의 도량이 형편없음을 통감하고 자기 비하와 겸손함으로 자신들의 도량이 부족함을 깊이 통감하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격체들을 말한다.

즉 크리스천은 마땅히 낮은 데 처할 줄 알아야 한다. `스스로 지혜있는 체 말라`는 말씀은 자신의 마음을 속이는 자들이 되지 말라는 뜻이며, 우리가 정상적으로 판단하는 것과 다른 사람의 판단을 나름대로 공평하게 평가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러나 사람은 솔직한 마음을 요구한다. 그것 없이는 <서로에 대해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이 불가능하다. <사랑>은 주님이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는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주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

축복의 하나님이 영원한 빛이며, 그로부터 오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역시 세상의 빛인 것처럼, 성도들은 우리의 주위에 나타나 온 세상을 두루 비치는 큰 발광체가 되어야 한다.

믿음과 행실이 일치된 생활은 주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렇게 행하는 자들은 이미 그들이 주 하나님을 알았고 <성령>을 받았으며 그들의 심령에 거룩한 <표>나 형상이 찍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시고 흘리신 피가 우리의 모든 원죄나 범죄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셨음을 알자! (잠3:13, 14).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kimjinkyu
김진규
75113
10790
2019-08-21
복음과 사역과 기도(50)

 

 

(지난 호에 이어)
모든 선한 크리스천들은 거룩한 제사장들이다(벧전2:9). 즉 그들은 모두 선택된 사람들이요, 주하나님 앞에 선별된 자들이며,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고 거룩한 은사와 은총을 부여 받았으며 하나님께 선하게 쓰여질 수 있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 크리스천들이 드려야 할 영적인 희생 재물은 그들의 몸, 영혼, 애정, 기도, 찬양, 긍휼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의무들이다. 주님께서는 교회의 머리로 우리의 <산돌>이시고 영적인 건축물에 놓여진 크나큰 모퉁이 <돌>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진실된 믿음은 인간의 극심한 혼란을 방지하는 유일한 <길>이다. 즉 <믿음>은 실망과 죄와 심판을 방지하기 위한 치료제를 가지고 있다. 고로 <주님>은 믿는자들의 면류관이며 영광이시다. 


신실한 사역자의 임무는 일반적인 진리를 교인들에게 특수한 조건과 상태에 적용하는 것이다. 만일 유대인들이 복음의 제정(메시아의 재림)을 수락했다면 그들은 이방인들과 똑같은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전반적으로 거부하고 모든 연령층의 무리들이 주님을 경멸하는 것을 보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실망을 줄 수는 없다. 이는 이미 선지자들에 의하여 오래 전에 예언된 바이기 때문이다. 


우리 성도들은 “택하신 족속이요, 하나님의 백성인”(벧전2:9) 선량한 사람들일지라도 죄악을 제어하기 위한 <권고>가 필요하다. 우리들의 의무는 우선 육적인 정욕의 경향과 발동을 제어하고 억누르는 일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본성의 부패에 기인하고 있으며 육욕을 만족시키고 있다. 


크리스천들은 악한 것들을 기피하는 까닭은 주하나님과 선한 사람들에게 대해서 존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천들은 사랑하는 자 들이다.” 죄가 인간에게 행하는 가장 큰 불행은 “영혼을 거슬려 싸우는 것”이다. 


죄의 모든 것 중 <육체의 정욕>보다 영혼에 더 큰 상처를 입히는 것은 없다. 육체적 정욕, 음탕 등은 주하나님께 추악한 것이며, 인간의 영혼에 대해서는 극히 파괴적이다. 


<사도 베드로>는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깨끗한 행실로 그들의 고백을 진실하게 하라고 <권고>한다. 모든 기회와 모든 경우에 있어서 신자들의 행실과 행위는 정결하여야 한다. 이것은 선하고, 사랑스럽고, 향기가 나며, 호감을 주는 것이며, 비난 받을 것이 없는 것이다. 


즉 <성도>들은 결백하고, 의롭고, 선하고, 정직한 행실로 살아가야 된다. 우리는 선한 일을 행함으로 불신자 들에게 우리들 자신을 변호하는 이것이 그들에게 <확신> 시키는 방법이다. 


크리스천들의 훌륭한 행실로 인하여 주하나님을 찬양하며 모본을 보일 때 <복음>이 그들(불신자)에게 이르고, 그리고 효력을 거둘 때 좋은 그들의 행위를 고무하게 할 것이다. 


크리스천의 신앙고백(빌립보서4:8)은 정결한 행실을 수반해야 한다. 악한 사람들에 의하여 비방을 받는 것은 선량한 크리스천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공통된 운명이다. 


주하나님의 자비로운 <권고>아래 있는 자들은 선한 사람들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즉시로 바꾸며, 주하나님을 찬양하고 전에 악을 행하는 자들이라 비행을 받던 자들을 칭찬하게 한다. 


“돌아왔느니라”(벧전2:25) -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여기서 우리가 중생 (거듭남)함으로 이러한 상태에서 회복을 얻는다는 것을 말한다. 죄인이 돌아오는 것은 주하나님의 은총의 결과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주님>은 죄인들의 모든 실수와 방황에서 그의 양떼들을 사랑하시며 그들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참된 목자이시며 부지런한 목자요, 감독이요, 그들의 영혼을 보살피는 주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다. 중생하기 이전의 죄인들은 항상 길을 잃고 방황하는 자들이다. 그들의 삶은 과오와 실수로 일관된 삶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그의 양떼와 함께 거하며 그들을 돌보는 <영혼의 목자장>이며 감독이시다. 이 절대적인 목자의 사랑과 보호를 기대하는 자들은 주님께 돌아와야만 하며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며 살아야만 한다. 


우리는 또한 사도 <베드로>가 우리에게 교훈한 것을 보면 “악은 악으로, 욕은 욕으로” 갚지 말라고 경고하고 교훈하였다. 즉 <악을 악으로 갚고 욕을 욕으로 갚는 것>은 옳지 못한 비기독교적 행실이다. 


그런고로 사역자(목사)들의 신랄하게 꾸짖고 사악한 세대를 향한 열심있는 설교는 <욕>이 아니다. 모든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이런 일을 행했던 사람들이다(사56:10, 행20:29). 크리스천들은 선을 행하도록 힘쓰며, 선으로써 악을 이기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며, 그 화평이 여러분에게 떠났을 지라도 그 화평을 계속 추구하라.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여러분들에게 선한 말을 하도록 하며 여러분과 함께 화목하게 살도록 하는 최선의 방법이 될 것이다. 


사역자(목사)들은 오직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을 위한 사랑, 온유, 그리고 친절로써 주하나님께 속해있는 성도들을 대하여야 한다. 사역자(목사)가 성도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성도들 가운데서 가장 훌륭한 태도로 그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며, 동시에 그들에게 계속적으로 끈기를 가지고 훌륭한 모범을 보여 주는 <사역>이다.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 (벧전5:4)을 받게 될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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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inkyu
김진규
75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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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9
복음과 사역과 기도(49)

 

(지난 호에 이어)
 <기도>는 자연스런 신앙의 가장 중요한 규칙 중의 하나이다. “주여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눅11:1). 우리는 성경에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배웠다(눅11:1-13). 우리는 다른 사람이 받은 은사와 은혜를 보고 그와 같은 것을 받기 위해서 열렬하게 시기할 정도로 사모해야 한다. 그들의 열성을 보고 우리는 거룩한 모방과 경쟁심을 가져야 한다.


기도를 잘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주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는 주여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를 지시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기도할 수 있는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가 기도할 때 적당한 말로 기도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시고 기도할 수 있는 일과 지혜를 주시옵소서! 라고 간구하여야 된다. 


<기도>할 때 우리는 어린 아이가 아버지께 가는 것처럼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하여 간구할 때에 주하나님의 능력과 선을 믿고 겸손히 확신을 갖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또한 우리가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바로 그 시간에 우리는 주하나님의 모든 피조물과 우리의 이웃을, 모든 인간들을 생각하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보편적인 자비와 기독교적인 성화된 인간성의 기본 교리를 병행시켜야 한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우리 자신을 고무시켜주고 지배해야 하는 하늘 나라의 심성을 확증시키기 위해서 예배 때마다 <신앙의 눈>을 가지고 하늘나라를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가 현실적인 축복을 얻기 위해서 기도 할 때는 우리의 소원을 적당하게 간구해야 하며 격에 맞게 제한해야 한다.


<죄>는 우리가 매일매일 지고 있는 빚(debts)이다. 그러므로 용서 받기 위해서 매일매일, 순간순간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매일 의무(기도)를 생략함으로 빚을 갚지 않고 있으며, 또한 매일 잘못된 행위로 말미암아 율법의 형벌을 초래 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매일 우리의 죄는 더욱 더 쌓여간다. 그럼에도 <우리가 매일 매일의 허물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 기도할 용기를 갖게 되는 것은 자비의 기적>이다. 주하나님께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보다 더 많은 <용서>를 해 주신다. 


만일 우리가 진실(정직)하지 못한다면 주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리라고 기대할 수도 없고 확신을 갖고 기도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참된 크리스천적인 사랑의 원리에 따라서 우리는 우리를 비난하고 해롭게 했던 자들을 <용서>해야 한다. 


우리가 입으로는 이처럼 기도를 하나님께 드린다고 해도 만일 우리 마음의 생각이 우리의 형제, 자매에 대한 악의와 복수심으로 채워져 있다면 우리는 <용서>받을 수도 없고 평화의 <응답>을 받을 수도 없다. 


우리는 죄에 대한 유혹을 죄로 인한 멸망만큼이나 두려워해야 하고 그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죄의 권세를 깨뜨리는 일은 범죄를 멀리하는 일만큼이나 우리의 관심사와 <기도>제목이 되어야 한다. 즉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열심히 간구해야 한다. 


주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에 <강청>과 <열심>과 <끈기>를 가져야 된다고 하셨다. 우리는 절친한 친구에게 대접함과 절친한 이웃집에 가서 대접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주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자기의 벗들을 위하여 기도했을 때 <그를 용서 하셨다> (욥42:10). 우리가 선을 베풀고 많은 사람들을 도와 주고 찾아온 자들을 대접하며 인도해 줄 수 있는 은혜를 간구하기 위해서 주하나님께 나아가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우리는 자신의 어리석음과 부주의로 인한 어려움이 아니라 주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주신 곤경에 처해있다면 더욱 더,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가도 좋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염려는 기꺼이 하나님께 되돌려 드려야 한다. 항상 우리는 즉시 기도해야 함과 동시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주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강청(Strong demand)에 대해서 화를 내시지 않으시며 받아 주신다. 특히 우리가 강청하는 것이 영적인 축복을 위한 것이라면 더욱 더 받아 주신다.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당장에 응답해 주시지 않지만 쉬지 않고 <기도>한다면 합당한 때에 <응답>해 주실 것이다. 우리는 구할 뿐만 아니라 찾아야 한다. 우리는 노력으로 우리의 기도한 것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구하고 찾으면서 재촉하고 계속 똑같은 <문>을 두드릴 때 마침내 우리의 기도가 합력하여 이루어지게 된다. 


아무리 미약한 성도라고 해도 믿음으로 구하면 <받게>된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우리는 우리가 필요한 것뿐만 아니라 <성령>을 구해야 한다. 성령이 영적 생활을 만들어 주며 영원한 생명을 위해 열심을 주기 때문이다. 


성령의 은사는 우리 모두가 열심으로 계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야 할 <은사>이다. <성령>은 생명의 주관자 즉, 영혼, 생명의 창조주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때때로 당하는 우리의 고난에 낙담하거나 세상의 슬픔에 너무 빠지거나 해서는 안 되고 우리의 고통 중에서도 주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기쁨을 가져야 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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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inkyu
김진규
74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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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8
복음과 사역과 기도(48)

 

 

(지난 호에 이어)
우리 크리스천들은 참으로 얼마나 주하나님을 사랑하며 영혼의 구원을 갈망하는가? 그리스도의 제자들(성도들), 특히 그의 사역자들은 충성과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하고 어떠한 반대와 곤경에 부닥쳐도 복음에 합당한 주님의 본을 받아서 주님의 뜻과 교훈을 수행해야 한다. 


모든 사역자들은 그들의 양떼 앞에 본을 받도록 생활해야 한다. 그들은 입으로뿐만 아니라 생활로 교인들을 지도해야 하며 단지 지적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교인들 앞에서 솔선해서 천국으로 나가야 한다. 


사역자들은 본을 보이고 교인들은 본을 받아야 한다. 신앙과 실행으로 주님을 따르는 한에 있어서 사역자들을 따라야 한다.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잊어버리기 쉬워 그들의 기억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되풀이하여 가르치는 <진리>가 새로운 빛을 주지는 않더라도 새로운 감명을 줄 수가 있다. 주님의 <진리>는 변화가 없다. 크리스천들이 다르게 이해하더라도 기독교의 진리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 하시다”(히13:8). 


영적 형제 자매는 공통점과 함께 애정을 가져야 한다. 사람의 마음에 주는 영향이 신령한지 보는 것은 설교자의 교리를 판단하는 좋은 길이다. 주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하나님과 같은 것을 만들어 내고 경건과 덕을 넓히며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그들의 생활 태도를 고치는 것이다. 


공동체 내에서는 짓궂은 사람들은 엄하게 다루어야 한다. 가정에서나 크리스천 공동체에서나 부모의 동정심과 온정은 때때로 <매-Whip>를 사용하여야 한다. 그러나 권위를 사용하는 것보다 아버지의 심정으로 가기를 원한다. 


정당한 권위를 유지하면서 사랑과 온유의 정신을 가지는 것은 사역자의 좋은 <사역-기질>임을 명심하자! 참다운 목회자는 자신에게 칭찬과 인기를 많이 가져오는 것보다 인간의 영혼에게 적은 유익이 되는 것을 귀중히 여긴다. 이것이 위대하고 고상한 정신이다. 이것이 바로 사역자의 인격이요, 그리스도의 <종>인 증거이다. 


사역자는 교만과 허영의 종이 아니다. 결국 모든 크리스천은 간교와 악의가 없는, 해나 공격이 없는 어린 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무르익고 성숙한 지혜와 지식도 가져야 한다. 크리스천은 의의 말씀에 있어서는 서툴러서는 안되며(히5:13), 악한 행동에 있어서는 재치가 없어도 된다. 


권고하는 자들은 권고받는 사람들을 진실로 사랑하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 주어야 한다. 통렬한 말이나 어법은 어떤 사람도 설득하거나 권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권고 하는 사람들의 바른 원칙과 규칙적인 행실은 맹렬한 시련 중에도 시금석으로 남게 된다.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고 공동체 안에서 믿음생활을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해야지 나무나 풀 또는 짚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전3:12)”. 만일 저질의 비금속을 섞는다면 아무리 우리가 순수한 자리에 처해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손상을 입게 된다. 


또한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을지라도 대부분 우리들의 역사(복음, 사역, 기도)는 소멸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성령으로 기도하며”, 즉 <기도>는 믿음의 유모(乳母)다.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는 길은 <끊임없는 기도를> 계속하는 일이다(롬12:12).


즉 성령 안에서 기도 할 때에 우리의 기도는 가장 큰 효험을 얻게 된다. <성령 안에서의 기도>라 함은 그의 인도와 지도 아래 그의 말씀을 따라 믿음과 열심과 계속적인 인내로 간청함을 뜻한다. 이러한 <기도>가 성령으로 하는 <기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방법은 주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다시 말해서 무한히 지혜로우신 주 여호와의 가장 탁월한 섭리에서 나온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들을 구원하는 이 방법을 창안하신 분은 바로 주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이 <복음서>에 나타나 있으며,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전능하신 <주하나님>이시다. 죄인들을 그의 죄와 그 죄의 허물에서부터 구해 줄 수 있다. 즉 <복음>의 깊은 뜻은 주님의 재림을 가르쳐 주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복음서는 가장 알맞고도 평이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주님의 재림이 있음으로 해서 <복음>의 사역자들은 주님께서 주하나님의 영광 중에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재림하실 때 그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라는 사실 역시 확실히 알려주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영원한 <복음>에 의거하여 정당하게 심판하며, 선악 간에 우리가 육체로 행한 바에 따라서 우리를 보응해 주시기 위해 오실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복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집중하라는 것인데, 이는 우리들이 그 예언의 말씀으로 다시 지음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복음>은 우리들이 힘써 지켜야 할 교훈의 본이며(롬6:17), 우리의 모든 행실을 조정해야 하는 “지식의 바탕” 이다(롬2:20). 우리는 성서의 말씀에 대해 복음은 온 세상의 표면을 뒤덮고 있는 어두움을 몰아내기 위해, 주하나님께서 보내신 <빛>이시기에 그 빛을 영원토록 활용해야 한다. 


<복음>은 그 말씀을 바르게 사용하는 사람들의 발의 등불이 된다. 인간이 구원을 얻을 만큼 지혜로워지는 것은 주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의 마음속에 빛을 비추어 주기 때문이다. <복음>은 우리의 영혼을 점점 더 밝게 하여주고 점점 더 증진시켜 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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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inkyu
김진규
74816
10790
2019-07-30
복음과 사역과 기도(47)

 

 

(지난 호에 이어)
우리는 <에스라>서의 역사에서 70년이 지나면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리라고 했던 <예레미아>의 예언의 성취 기록을 알 수 있다. 우리 조국은 해방(1945년)된지 70년이 지나고 있다. 주하나님께서는 어느 때나 우리 조국 통일을 안겨 주실는지! 


<에스라>는 그의 이름이 조력자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당시 위대한 혁명에 관한 기록을 <에스라>서에 보존하여 그 기록을 교회에 전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름 그대로 그는 백성에게 <조력자>가 되었던 것이다. 


복음의 교회가 신약의 바벨론에서 구원 받을 것을 예언해 주고 있는 <요한 계시록> 예언의 성취를 미리 보여주는 한 모형이기도 하다. <에스라>는 대제사장 <아론>의 16대 손이며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로서 여호와의 도우심을 크게 입은 자이다(에스라7:5-6). 


주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선한 도구로 택하셨다. 그리하여 그는 제사장의 직분을 영예롭게 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시어 <기도>하게 하시고 우리를 축복해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은, 우리로 하여금 이보다 더욱 담대히 은총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준다.


즉 우리는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하고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이해하시는 하나님께 그 마음을 아뢰어야 한다. “여호와여, 제게 지혜로운 입을 주소서, 그리하여 주 여호와여, 이 사람 입에서 은혜를 입히게 하옵소서.” 라고 경건한 절규를 하나님께 올리는 것은 좋은 일이며, 절규와 엄숙한(형식을 갖춘) <기도>는 우리들 상호간을 보완하게 된다. 


결국은 우리 주하나님의 선한 손이 우리를 돕게 된다. 은총을 입는 영혼을 지닌 자들은 그들에게 베풀어지는 모든 은혜로운 일 속에서 주하나님의 손, 곧 그의 선하신 손을 깨닫는다. “이것은 여호와의 행하심”이므로 배나 더욱 기쁨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죄악을 슬퍼해야 하며, 그들이 하나님의 영예와 인간의 영혼을 침해한 것을 가슴 아파할 줄 알아야 한다. 즉 죄에 대해서는 지극히 애통해야 한다. 


의로운 자들은 이런 것을 보면 놀라게 된다. 주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것은 선한 사람들의 특성이다. 그들은 그 계율의 권능과 엄격함과 진노의 의로우심을 두려워한다. 즉 주하나님은 이러한 자들을 “권고하실 것이다”(사66:2).


모든 선한 크리스천들은, 악과 불경함을 대적하는 주하나님의 뜻을 위해 일어나 행하는 자들(동성애 자들을 대적하는 교회)을 지원해 주고 그들의 편이 되며, 그들의 손을 강하게 해줄 수 있는 일을 행해야 한다. 


즉 온 교회들이 통성으로 주 앞에 엎드려, 우리가 범죄하였으매 우리를 주의 긍휼에 맡기나이다, 라고 기도 해야만 된다. 우리가 참회하고 회개하면 용서받으리라는 소망이 우리를 또한 격려해준다는 것을 알자. 진실로 참회하는 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게 된다. 


그러나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할 것이다.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어리석게 행했습니다. 주하나님께서 이 죄인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호세아14:2), 라고 말해야 한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부모가 없는 자들에게 친구를 만들어 주시는 주하나님의 은총에 감사를 드리자! <에스더>의 후견인 혹은 양부가 된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자기 친딸처럼 자상하게 보살폈다(에스더2:11).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친척들을 돌보아야 하는 자들은 그들에게 친절한 사랑을 가지고 세심한 배려를 기울이도록 하자! 훗날 왕후로 승진한 <에스더>는 여전히 그녀의 후견인을 존경하고 항상 그를 염두에 두었다. 


이것은 그녀가 겸손하고 감사하는 성품을 가졌음을 입증하는 것이요, <에스더>가 그의 옛 친절을 잊지 않고 있으며, 그의 <지혜>를 계속 쫓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출세한 자들이 옛 은인을 기억하고, 그들이 받은 훌륭한 교육에 대한 감명을 계속 지니고 있어 스스로 겸손하게 충고를 받아들이며 그것을 감사하게 여기는 것은, 그들의 광채를 더하게 하는 것이며 더욱 많은 칭송을 얻게 되는 길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배웠다. <모르드개>의 사랑에 찬 주님의 심경과 사랑의 실천으로 모르드개는 축복을 받았고, <하만>은 저주를 받았다. 항상 종교적인 잔치는 세속적인 축제로 변했음을 알 수 있다. 


거룩한 기쁨보다 더 마음을 성결케 하고 믿음을 빛내주는 것은 없다. 가장 <선한 것>이 부패하면 가장 <악>한 것이 됨을 알자! <모르드개>는 선하였다. 매우 선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선>을 행했기 때문이다. 그의 선함이 그를 정말 존귀케 만들었고, 그의 존귀함은 그가 더욱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는 그 자신의 이익이나 그의 가족을 위한 재산을 구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관직에서 높은 지위에 올랐을 때 추구하는 주된 목표이다. 


여기서 우리는 선하게 행하고, 관대하고 겸손하게 행했던 <모르드개>에게 접근하기가 쉬웠음을 알 수 있고, 그의 품위는 항상 정중했음을 알 수 있다.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은 부귀와 권세를 지닌 자들이 행해야 할 가장 훌륭하고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선한 말을 하는 것 또한 권장 받을 만한 일로서 그 선행을 더욱 기뻐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우리는 주하나님께서 “거룩함과 올바름”과 “사랑 속에서 조용하고 화평한 삶을 살도록” 허락해 주셨음을 감사하자! 


우리는 기도하자! 선하고 정직하고 진실한 사역자(목회자)들과 위정자들이 조국 금수강산에 밀물처럼 넘치도록! 주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 모든 진실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칭찬과 인정과 상급을 얻기 위해 <주하나님>앞에 서게 될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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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inkyu
김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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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7
복음과 사역과 기도(46)

 

(지난 호에 이어)
 사악해진 세상이 파멸되고, 불신앙을 고집했던 유대교와 주 예수님을 거역하는 이스라엘 민족과, 성경적 바벨론인 로마교황청이 황폐해질 때, 비로서 복음의 교회가 완성되고 지상에 창대하며 번영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거룩한 길로> 행하는 자들이 될 것인가! 세상과 교회내의 부정한 것과 포악한 것을 스스로 떠남으로써 이 패역하고 사악한 세대에서 우리들 자신을 구원해야 한다. 


<구원>받은 자에게 속하고 싶은 자들은 “구속 받은 자들이 걷는 길”로 가야 한다. <복음>은 우리에게 강하게 해주는 생각들을 제공해 주며, 우리를 위한 힘이 어디에 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참된 크리스천들 가운데에도 약한 손과 떨리는 무릎을 갖고 있는 자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 아기에 지나지 않는 자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 형제들을 굳게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므로, 우리는 연약한 자들에게 참(Patience)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견고케 해야 한다(롬15:1; 살전5:14).


우리는 끊임없이 주하나님을 향하여 거룩한 소망을 품어야 한다. 즉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뜻이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는 간청할 수 있고 현세에 세상의 많은 징조(경제의 몰락, 천재지변, 재앙, 부도덕 등등)앞에서 주하나님의 심판이 오래 계속 될지라도, 그것이 심판의 길이기에 계속 기다리는 일만큼은 실증을 내서는 안 된다.

 
우리의 고통이 아무리 심할지라도, 결코 신앙에 대한 생각에서 멀어지거나 주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서는 안 된다. 사악한 세상에서도 그리고 밤에, 가장 어둡고 긴 환란의 밤에도 <우리 영혼은 주를 사모해야 한다>. 


주하나님께로 향한 우리의 소망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 열렬하고 진지한 것이라야 한다. 우리의 영혼으로 그를 사모해야 하고 나의 영혼으로 그를 갈급히 찾아야 하며(시42:1), 나의 중심으로 곧 가장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생각과, 가장 간절한 마음으로 주하나님을 구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신앙을 고백하든, 그 신앙을 마음으로 하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무익한 것이 된다. 가장 어두운 고통의 밤에도 우리의 소망은, 우리의 태양이며 방패이신 주하나님을 향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다루시든지 우리는 결코 그에 대해 나쁘게 생각하거나 그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식어져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소망이 진정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를 발견하기를 원하고 그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자들처럼 그를 구함으로써 그것에 대한 증거를 보여야 한다. 


우리들에게 환란이 닥치는 것은 우리에게 <의>를 가르쳐 주기 위한 것임을 명심하자! 하나님께서 친히 징벌하시며 가르쳐 주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시94:12). 


우리가 여호와의 긍휼을 받았을 때에도 우리는 계속 <여호와의 위엄과 그 선하심>을 돌아 보아야 한다. 주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에게 경고를 주시고, <회개와 기도>를 통하여 우리가 다시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도록 그의 손을 드신다. 


죄책과 진노에 대한 가장 명료한 가책에 대하여 눈을 감아 버리는 자들, 주하나님의 견책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우연이나 운명으로 돌려버리는 자들, 그런 자들처럼 눈먼 자들은 아무도 없다. 


주하나님은 마침내 그들을 심히 엄하게 다루실 것이다. 하나님은 심판하실 심판의 <주-LORD>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환란의 필요성은 <기도>를 자극하는 데에 아주 필요한 것임을 알자. 


“여호와여 백성이 환난 중에 주를 앙모하였사오며 주의 징벌이 그들에게 임할 때에 그들이 간절히 주께 기도하였나이다.” (이사야26:16). 


즉 우리는 세상의 험악한 환란 속에 임하였고, 임하고 있기에 더욱 더 <기도>를 쏟아 놓아야 한다(간절히 기도함). 더욱 더 주하나님을 앙모하여야 한다. 이제는 증류기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샘에서 솟는 물처럼 <기도>가 나와야 한다.


즉 <은밀한 말>을 쏟아 놓게 되어야 한다. <기도>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언어이기 때문에 은밀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기도>가 아니다. 그런고로 환란은 우리를 은밀한 기도로 이끌어야 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공개적으로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자유롭고 더 상세하게 주하나님께 아뢸(기도)수 있는 것이다. 이전에는 주하나님을 구하는 일에 게을렀던 자들이 고난을 받을 때에는 그를 간절히 구할 것이다(호5:15). 


<고난>은 사람으로 하여금 열렬하고 간절히 <기도>하게 만들 것이다. 의로운 사유(思惟)라면 기도와 노력에 의해 주하나님과 사람에게 강력하게 호소할 수 있다. 그러나 얼마 동안은 구름 속에 가리워져 의도한 바를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기억하자! 


주여! 교회와 교회의 권세가 속히 회복되어야 할 때가 오게 하옵소서! 우리를 <기도>의 밀실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으라(마6:6).


주하나님과 은밀히 사귀라.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너 자신을 살피고 네 자신의 마음과 교제하며 기도하라. 그리고 주하나님 앞에서 네 자신을 겸손케 하라. 즉 우리는 우리를 숨기실 수 있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맡겨야 한다.


교만을 꺾으려는 주하나님의 섭리 아래서도 마음을 겸손히 하지 않는 자들은 자기들의 멸망을 재촉하는 것이다. 사역의 충성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자비 때문임을 알자!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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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inkyu
김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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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0
복음과 사역과 기도(45)

 

(지난 호에 이어)
 기독교 교리를 신령한 것으로 받고 성령에 의하여 조명을 받아 그 지혜(복음)를 잘 상고한 사람들은 그 안에서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사도들은 그들의 지혜를 세상의 현자나 그들 자신의 연구나 창작에서가 아니고 <성령>으로부터 받았다. 그들은 그 지혜에 인간의 옷을 입히지도 않았다. 


또한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교리를 평범하게 선언하고 <성령>으로 가르쳤다.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고전2:13). 즉 한 계시로 다른 계시를 알고, 복음의 계시로 유대인의 계시를 알고, 신약의 발견으로 구약의 징조와 예언을 알게 된다. 


인간의 마음이 인간과 하나인 것같이 <성령>은 주하나님과 하나이다. 성령은 하나님과 하나이기 때문에 주하나님의 일을 안다. <육>의 사람은 <영>의 일을 모르는 것과 같이 영의 사람도 모른다. 그는 신령한 생활의 원리나 즐거움이나 활동을 모르고 영적 사람을 파악할 수 없다. 


성령에 의하여 그들에게 계시된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하는 것은 크리스천의 위대한 특권이다. 영적이 아니고 신령한 영감(afflatus)을 받지 않은 사람은 그리고 그의 신앙을 신령한 계시 위에 세우지 않는 사람은 무엇이 신령한지 판단할 수 없다. 


간단히 말해서 학문과 이성의 빛 위에 선 사람은 계시의 진위를 판단할 능력이 없다. 참된 크리스천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주하나님의 <마음>이다. <복음>안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이나 그리스도안에 있는 주하나님의 마음이 충분히 우리에게 <계시> 되었다. 


하나님이 부여하신 모든 <은사>는 선을 행하도록 함이고, 주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은 그의 영광과 이웃의 이익을 위하여 이용되어야 한다.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유익과 기독교의 전파를 위하여 부여 되었다. 


자랑하도록 주어지지 않고 <봉사>하도록 주어졌다. 자존심을 위함이 아니고 덕을 세우기 위함이며,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성령의 은사는 개인의 명예나 유익이 아니라 공공의 유익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덕을 위하도록 목표가 서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의 <동정심>은 하나의 의무이다. 형제의 고통을 무시하지 말고 같이 고통을 당하며 은밀한 골방에서 그들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고 형제의 명예를 시기하지 말고 같이 기뻐하고 영광을 누려야 한다. 


신앙에 대한 경쟁과 싸움은 육적인 증거이다. (고전3:4). 참다운 신앙은 화평하게 되고 싸우지 않는다. 교회 내에서 당을 짓는 사역은 신앙의 원리가 아니고 인간의 원리다. 그들은 자신의 교만과 정열로 인도되고 크리스천의 정신으로 인도되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의 수준보다 높게 살아야 할 크리스천들이 세상 사람들과 너무나 같게 살며 행동하는 것은 한심한 일이다. 그리스도의 모든 충실한 <사역자>들은 사역의 위대성과 의향에 있어서 하나이다. 


적은 일에 있어서 감정의 차이가 있을 수도 있고, 토론과 경쟁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참다운 기독교를 전파하며 주하나님을 경외하고 영혼을 구하는 일에 있어서는 충심으로 일치하고 있다. 


크리스천 교회의 사역자들은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그들의 주는 하나이시나 이 선하시고 은혜로우신 주하나님은 그들의 <봉사-vocation)>에 따라서 다르게 <보답>하신다.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주하나님의 밭에 내리는 신령한 축복이며, 크리스천은 <천직>이 거룩한 것이다. 즉 <마음>과 <교제>가 <순결>해야 한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을 가지고 안심하지 말고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을 믿고 안심하여 방심할 때에 가장 잘 넘어진다. 자신을 불신하고 경계하고, 주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이 <죄>를 막는 가장 안전한 길이다. 


주하나님의 보호는 우리 자신의 <주의>를 먼저 필요로 하고, 많은 사람에게 성공하지 못하여도 진실한 뜻과 <정직한 수고>를 용납하신다. 사역자들은 그들의 성공에 의하지 않고 그들의 충성에 의하여 인정받고 보상 받는다. 


누구든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우리가 행하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신앙 활동이 하나님에게서 와서 하나님에게 상달되지 않는다. 우리는 성경 말씀 속에서 “사도 바울의 양심이 바울의 충성을 증거함(고후2:17)”을 배웠다.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자기의 생각을 혼합하지 않았고 주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않았다. 오늘날 사악한 무리들의 죄(동성애를 추종하는 크리스천)에 참여한 자들은 무서운 주하나님의 <진노의 재앙>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즉 사람들의 죄가 하늘에 사무치게 될 때 주하나님의 진노가 땅에 임하게 됨을 알자! 주 하나님은 미지근한 교회들의 죄와 교만 그리고 방심의 분량에 따라 죄인들에게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 가증한 죄는 무서운 멸망을 받아 마땅한 것임을 알게 하옵소서! 


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교회의 평화가 회복되며 우상을 섬기는 잔인한 원수들과 바벨론(거짓 크리스천 교회)위에 임할 주 하나님의 진노를 보기까지 살다가 죽는 사람은 복이 있는 자들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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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inkyu
김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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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9
복음과 사역과 기도(44)

 

 

(지난 호에 이어)
백발의 연로한 크리스천들은 백발의 영화로운 면류관을 얻고, 그의 의로운 길, 곧 신앙의 길에서 얻게 되는(잠16:31)것을 일대 관심사로 삼아야 한다. 의로운 길은 곧 신앙의 길이요, 주하나님(Lord) 을 따라 성실하고 경건하게 사는 길이다. 


주하나님이나 사람이나 다 의로운 길에서 노인을 만나려고 찾을 것이다. 주님 안에서 성숙하게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는, 나이가 많은 분은 선한 자이며 많은 연륜은 그들에게 최선의 지혜를 가르쳐 주었을 것이라고 예상될 것이다. 


그러므로 노인을 그 의로운 길에서 찾아 볼 수 있어야 한다. 죽음이 올 것이며 심판하시는 이가 오고 계신다. <주가 가까우시느라>, “주 앞에서 평강 가운데 나타나게” 되려면 (벧후3:14) 나이 많은 분들은 “의로운 길에서” 발견되기 위하여는 발 들여 놓은 지 오래된 그 길에서 끝까지 머물도록 해야 할 것이다. 


백발들(노년의 크리스천)이 “의로운 길에서 얻게” 된다면 그들의 나이는 곧 영광이 될 것이다. 고령은 그 자체만 해도 영예롭고 존경을 받을 만하다(“너희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라”(레 19:32). 


그러나 흰 머리라도 악한 길에서 발견되는 경우에는 그것의 존귀가 상실되고 면류관이 욕을 입으며 티끌에 놓이게 된다(사65:20). 그러므로 노인들이 자기의 명예를 보존하고 싶으면 계속하여 자신의 성실성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 그러면 그들의 백발이 진정 자신의 <면류관>이 될 것이다. 


그런 자는 “배나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자이다. <노년>의 “영화”는 <은혜>인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지상에서의 삶이 긴가 짧은 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도>의 생활을 하는가, <죄인>의 삶을 사는가에 있다. 


또한 연륜이 많은 크리스천은 온유한 성질의 유익함을 알고 특히 “백발”이 된 자에게는 더욱 잘 어울릴 것이다. 온유함의 성질은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며 쉽사리 화를 내거나 도발에 곧잘 발끈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온유한 자이면 우리 격정을 폭발시키기 전에 곰곰이 생각해보는 시간적 여유를 가짐으로써, 화를 냄으로 인해 정당한 영역을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고 노(怒)를 향한 행동을 더디게 하여 빨리 화를 멈추거나 진정시킬 수 있게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 정욕이나 애착심, 우리의 모든 취향을 지배하는 것이다. 특히 우리의 성품이 분노를 지배하여 신앙과 올바른 이성의 지시와 억제와 엄한 규제 아래 두고, 지키는 자가 <온유한 자>이다. 


우리는 주하나님이 그러하신 것같이(나훔1:3) 분노의 주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너희 격정을 다스리라> 우리 자신이나 우리 자신의 다루기 힘든 격정(Passion)을 정복하는 데는 적군에 대한 승리를 얻는 것보다 더욱 참한 지혜가 필요하며 보다 꾸준하고 항구적이며 규칙적인 관리가 요구 된다.

 
또한 복음은 내 자신을 아는 길을 가르쳐 주고 있다. “물에 비취이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취느니라(잠27:19).” 이 말씀 속에서 우리 자신을 알게 되는 길은, 물은 반사에 의해 우리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거울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을 사람에게 즉 자신에게 밝혀 주는 거울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늘 자신의 양심과 생각과 애정과 의도를 살피도록 하자! 주 하나님의 “법의 거울에 자기의 생긴 얼굴”을 비춰 보자(약1:23). 그러면 자기가 어떤 종류의 인간이며 자기의 진정한 개성은 어떠한 지를 식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사람이 자기의 바른 모습을 아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우리를 통해 서로를 아는 길은 사람의 얼굴과 물에 비친 형상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듯이, 한 사람의 마음과 딴 사람의 마음에는 유사함이 있다. 


주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같게 만드신 것이다. 다수의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자신을 통해서 남을 판단할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원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규칙의 근거가 된다. 


우리 모두는 주하나님의 말씀에 경청하고 기도로써 하나님께 부지런히 고하며 이 기도에 대한 화평의 응답을 고대해야 한다. (잠28:9)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복음)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 하니라.” 


바로 주하나님과의 교제를 유지시켜 주는 것은 <말씀>과 <기도>이다. 영광의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듣거나 경청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도도 주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주하나님께 가증한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도 그가 부를 때 듣지 아니하시는 것이다(잠1:24,28). 


주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온갖 이해력을 얻는 비결이다. 주하나님의 영광을 자기의 목표로 설정해 두고 그의 은총을 행복으로, 그의 <말씀>을 규칙으로 삼으며, 모든 경우에 <기도>로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들이 곧 주하나님(LORD)을 찾는 자이다. 


그러한 자들에게 지혜의 <영>을 주실 것이다. 사람이 주님의 뜻을 행하면 그의 가르침도 알 것이다(요7:17). “한 지체 안에 있는 우리 성도들은 동일한 형제요 그리스도의 종이다.” 


이 세상에는 아직도 음탕과 잔인함의 모체요 보금자리이며 유모(乳母)가 되어 왔고, 되고 있는 바벨론(로마황제, 교회를 핍박하는 세상권세)의 멸망을 위해서 바른 신앙을 사수하며 “아멘 할렐루야”를 외쳐야 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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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inkyu
김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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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1
복음과 사역과 기도(43)

 

 

(지난 호에 이어)
우리는 세상을 살아갈 동안 “다툼을 멀리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거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잠20:3)”는 말씀은 분쟁을 일으키는 인간의 과오를 교정하기 위한 의도를 지니고 있다. 


인간들은 때때로 다툼에 개입하는 것이 지혜롭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최대의 어리석음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모욕을 당하면 왈칵 분을 내고 내자신의 영역을 엄정히 지키고 서서 명예와 권리를 한치도 양보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에게 명령을 내리고 강요하며 지배하는, 자기자신을 현명한 자로 여기는 우(어리석음)을 범하기 일수다.

 
그러나 이처럼 사사건건 간섭하는 자는 불필요한 고민거리를 부지기수로 자초하는 우매자이다. 인간들은 분쟁에 말려들었을 때 한 발 물러나서 무기를 놓는 것을 치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은 그 반대여서 “다툼을 멀리 하는 것(그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며”, 전투를 철회하고 논쟁을 중단하며 권리 침해를 용서 해주고 우리와 불화했던 자와 우호를 맺는 것이 영광이다. 


더 훌륭한 사람이었던 아브라함(창13:8) 처럼 화평을 위해 <다툼을 멀리하고> 항복하며 굴종하고 자기의 정당한 요구로부터 물러섬으로써 자신을 제어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인다는 것은 곧 사람의 영광이며, 지혜롭고 <영혼>이 살아있는 자의 영광이 된다. 


또한 우리는 게으른 자의 굴레에서 탈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 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잠20:4).” 


이 말씀 속에서 나태함과 안일에 대한 애착의 폐단을 살펴 볼 수 있다. 나태한 자는 게으름 때문에 제철에 밭 갈고 씨 뿌려야 하는 극히 필요한 일조차 못한다. 비록 밭 가는 시기가 한 겨울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겨울의 문턱에 있는 가을에도 밖에 나가 일하기에는 너무 추운 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생의 황혼 길에 임하고 있는 우리 노년의 크리스천들은 일을 하는 과정에서 밭가는 정도의 작은 수고(공동체 안의 봉사)와 찬바람을 쐬는 것과 같은 작은 어려움을 겪을 마음도 없는 자들은 형편없이 게으른 자들이 아닐까! 


이와 마찬가지로 <자기 영혼의 일>에도 무관심한 자들이 부지기수이다. 그러나 선한 군사들(성도)은 어려움을 이겨 나가야만 된다. 즉 파종기에 “밭 갈지 않는” 자는 추수기에 수확을 기대할 수 없다. 


이와 같이 밭가는 수고를 감수하지 않으려는 자는 구걸의 수치를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 가을에 접어들고 겨울을 지나는 크리스천은 열 처녀 비유(마25;1-12)에서, 등잔에 기름을 예비해 두지 않았던 처녀들은 신랑이 왔을 때 기름을 구하였으나 거절을 당하지 않았던가를 상고하자!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25:13)>. 


또한 우리 성도들은 “지나친 칭찬의 폐해”를 알고 처세를 하여야 한다. <이른 아침에 큰소리로 그 이웃을 축복(칭찬)하면 도리어 저주 같이 여기게 되리라 (잠27:14)>. 


비록 가장 친한 친구나 따뜻이 대해주는 후원자라 하더라도 그들에게 칭찬을 남발한다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짓이다. 각 사람에게 합당한 칭찬을 해주고, 지식이나 미덕이나 유용성이 뛰어난 자들에게 갈채를 보내며 우리가 받은 친절에 대해서는 감사함으로 사례하는 것이 우리의 당연하고 온당한 도리이다. 


그러나 이것도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하는 정도가 되면 지나치다고 할 수 있다. 어느 모임에서든지, 심지어 그 친구의 면전에서까지 시종 같은 투로 되풀이하고 일찍 일어나 행하는 일처럼 열심히 이 짓을 행하며, 그 친구의 장점을 터무니 없이 확대하고 과장한다면 그것은 비위에 거슬리고 구역질 나는 일이 되며 위선과 흉계인듯한 냄새마저 풍기게 된다.


사람들이 행한 일에 대해 지나치게 칭찬한다는 것은 그들에게서 더욱 많은 것을 얻어 내려는 데 불과하다. 우리는 주하나님께만 돌려야 할 이런 찬양과 찬사를 우리 친구들에게 적용해서는 안 된다. 


혹자가 생각하듯 축복하기 위해 “이른 아침에” 일어난다는 데에는 주하나님께 대한 도리가 암시 되어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침에 찬양 받아야 할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을 칭찬하는 일에 너무 성급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능력과 업적에 대해 너무 일찍부터 추켜 세워서는 안되며, 일단 사귐과 시험을 해 보아야 하는데, 이는 그들로 자만심에 들떠서 게으른 잠을 자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칭찬 받는 일을 지나치게 좋아한다는 것은 더욱 어리석은 짓이다. 온당한 칭찬은 그 칭찬에 보탬이 될 것들을 끌어오지만, 무절제하고 무례한 칭찬은 오히려 그 가치를 떨어뜨리기 쉬우며 지나친 칭찬을 듣는 자라는 비난을 면할 길 없게 만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위험은 그 칭찬이 교만에 이르게 하기 쉽다는 점이다. 지나친 평가를 받을까 봐 두려워한 <사도바울>은 얼마나 주의 깊고 복된 분인지를 보라!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 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고후12:6). 


또한 크리스천은 교제의 유익함을 알고 살아가자!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27:17).” 즉 우리는 교제를 통해 남과 자신을 아울러 향상시킬 수 있어야 하며, 시간을 낭비하거나 서로 지나친 농담으로 시종일관 하지 말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서로를 더욱 지혜롭고 선한 자로 만들어야 한다(히10:24). 


우리 형제에게 허리를 굽히며 그들에게 대한 존경심을 계속 품는 일 또한 우리에게 매우 큰 이익이 됨을 알자! 이런 것들은 주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사진이고 거울인 복음(Gospel)을 통해서, 또한 지식의 보고를 열어주는 황금 열쇠인 꾸준한 <기도>를 통해서 얻어지는 “열매”가 되는 것이다. 


<기도>는 모든 아픔의 고약(膏藥)이요, 모든 질병의 약이 된다. <기도>는 주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요구의 제시이며 또한 우리의 소원을 주님에게 알리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감정의 불안을 없애 주며 내적 만족을 부여할 것이며, 우리를 평온하고 침착하게 해줄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심지(心志)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실 것이다> (사26:3, 시편112:7).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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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inkyu
김진규
74409
10790
2019-06-25
복음과 사역과 기도(42)

 

 

(지난 호에 이어)
복음을 터득하고 순종하는 법을 배운 사람이 가장 적합한 지도자이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일반적으로 여러가지 것에 대하여 조금씩이라도 공부하지만 복음(Gospel, Good News)을 공부하는 데는 거의 혹은 전혀 시간을 할애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성서는 확실히 다른 어떠한 책보다 인류 역사에 깊은 영향을 주어 왔으며 서구문화를 형성, 구축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모든 북미인들의 일상생활에 만일 성서가 없었다면 현재와 아주 판이하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 국가들이, 기독교의 본질을 외면하고 주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즉 크리스천의 수효가 매년 줄어들고 있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크리스천교회들이 복음의 가르침을 소홀이 여기는 탓인 줄 안다. 


즉 성경(복음)이 가르치는 크리스천의 신앙에 대한 체계적인 공부를 하는데 효과적인 방법을 제시하도록 고안되어 있지 못한 교회들의 미흡한 성경지식의 결여 때문인 줄 믿는다. 


즉 복음(Gospel)을 철저히 가르침으로 인해 성경지식이 더해질 것이어야 한다. <최소한의 성경(복음)지식이라도 없이는 어떠한 사람도 크리스천이 될 수 없고 어떠한 크리스천도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진리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수 많은 크리스천이 좌절과 실망과 비참한 삶을 사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단지 성서(복음)에 대한 무지 때문인 것이다. 


시편기자 다윗은 (시편119장: 130절) <주의 말씀을 열면 우둔한 자에게 비치어 깨닫게 하나이다> 라고 말했고, 주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고 가르치셨다. 


우리는 나의 크리스천 생활을 환경과 혼동될 때 즉 환경에 푹 빠져 있는 채로 주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려면, 주하나님께 무릎 꿇고 나의 환경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주하나님께서는 교회를 그 분의 구속의 대행자로 만드셨다. 그분은 교회에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 즉 하나님은 교회의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를 통해서 주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을 이루어 나가라고 성도들을 각 교회에 <사역자>로 두셨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에베소서4:15-16). 


우리들은 우리 성도들 서로간에 경건한 교제를 하고 있지 않으면서 주하나님과 교제한다고 할 수 없다. 우리가 알다시피 교회는 신자들의 생명력 넘치는 충만한 사귐이요 교제이다(코이노니아- Koinonia ). 친밀한 교제란 친밀한 사랑의 관계이다 (요일1:1-7).


 <코이노니아>는 주하나님과 나, 그리고 나와 다른 신자들과의 동역자 관계와 교제의 절정이라는 의미로 사용 되어야 할 것이다. 만일 내가 주하나님과의 관계(기도)가 깨어지면 나는 그분과 더 이상 교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다른 크리스천 형제, 자매들과도 교제를 계속 할 수 없고 <불신앙자>가 되고 만다.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할 사실은 이스라엘 민족은 많은 기사와 이적을 거쳐 <애굽>에서 나오게 되었다. 그들은 주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의 땅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다. 즉 이 <불신앙>때문에 그들은 40년을 광야에서 헤매다 죽어가는 신세가 되었다. 


시편(81:10-16)은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생각을 따르지 않고 주하나님의 방법에 순종했다면 하나님께서 훨씬 더 빨리 그들의 대적들을 정복해 주셨을 것이라는 점을 깨우쳤을 것이다. 우리 조국(남북한)은 광복 70년이 되었다. 왜 우리민족은 70년을 광야에서 헤매고 있는지 우리 크리스천들과 역대 위정자들은 각성, 통회, 자복하고 모든 교회들이 통일을 위한 <기도>가 계속 이어져야 만 한다. 


때때로 공동체 안에서 소수의 양떼들, 즉 침묵하는 소집단은 다른 모임보다 뛰어나지는 않지만 그들은 오히려 주하나님 앞에 정의롭고, 겸손하고, 가난하다. <성령님>은 항상 이러한 모임 중에 우리들이 배운 성경지식을 머리로부터 가슴으로, 가슴으로부터 생활로 옮겨 실제로 체험하게 하는 데에 시간이 소요되고 참 <크리스천>으로 성장 시키게 한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사역(Vocation – ministry)은 봉사라는 진리를 망각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성심으로 그리고 믿음 속에서 <기도>한다면, 또한 입술의 말로 기도 할뿐만이 아닌 우리의 깊은 묵상에서 나온 <기도>이어야 할 때도 있다. 


<묵상>이 기도를 위한 가장 훌륭한 준비인 것과 같이, <기도>는 묵상의 가장 훌륭한 결과이다. 즉 묵상과 기도는 병행되어야 한다. (시19: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이렇게 드린 <기도>는 주하나님께서 합당한 때에 은혜로우신 화평의 대답을 주실 것이다. 다윗의 기도는 “부르짖음”의 기도였다(시5:2). 우리는 격렬한 감정과 끈질긴 요구를 시사하는 표현으로, 때로는 실질적이고, 구원받은 성도의 강렬한 <기도>는 매우 유용하여 놀라운 일들을 행하게 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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