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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자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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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자

경기도 여주 출생,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기도 광수중학교 근무, 1992년 캐나다 이민, 캐나다문인협회 수필 부문 입상, 2006년 해외동포문학상, 작품집 <인생에 실패는 없다 다만 또 다른 삶이 있을 뿐이다>, <나이만큼 행복한 여자>, <밀리언 달러 티켓 나도 한장>,<행복이라는 이름의 여행>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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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oonja
한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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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0
세상에 종말은 없다(1)

 
 
다만 내 삶을 다하는 날이 
끝이며, 또 다른 시작일 뿐이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을 노는 동안 아버지가 중풍을 맞으셨다. 심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반쪽의 마비 증세와 말씀을 잘 못하게 되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실 형편도 못되었고 이따금 침이나 맞는 정도였는데, 어느 날 누구인가의 소개로 손끝에 피만 약간 뽑고 머리를 만져 병을 고친다는 얘기를 듣고 엄마 아버지가 다녀오신 며칠 후 아버지는 그 여자한테 홀딱 빠지셨던 것이다. 


 아버지처럼 대가 곧고 올 차신 분이 그 병을 고친다는, 일테면 ‘성주’라 칭하는 여자에게 완전히 심취해서 그 다음날로 우리 큰 동생과 같이 쌀 한 가마니를 가지고 가셨다.


 발단은 그 때부터 시작이 되어 있는 재산을 야금야금 팔아서 대기 시작했다. 하긴 아버지가 그 동안 종교를 가지셨던 분도 아니고, 식견이 넓어서 이런저런 상황을 아실 처지도 아니고, 아버지의 병환 때문에 그 자체를 고치기 위해 이곳저곳 찾다가 그쪽으로 쏠리게 되셨던 것이다. 


 며칠 다니시고는 여자인 성주라는 사람도 저렇게 자기 일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불우한 사람을 돕겠다고 애쓰는데 나도 좋은 일 좀 해봐야 되겠다 싶어 자꾸 빠지셨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소위 얘기하는 ‘사이비 종교’였던 것이다. 아버지하고 깊은 속사정 얘기야 해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미루어 짐작컨대 아버지 몸도 성치 않고 7남매 중 맏딸 하나만 결혼을 하였으니 아이들마저 교육시키고 결혼시킬 일이 크게 걱정스러우셨으리라. 그러던 차에 집만 팔아서 갖다 대면 생활은 그쪽에서 책임진다 했을 테니 그 방향으로 마음이 기우셨을 것이다. 


 그래서 살고 있던 왕십리 집을 팔고 시골에 있던 땅의 일부를 팔아 화양리에 있는 대지 72평 건평 68평짜리 이층집을 구입하게 되었다. 우리 식구는 아래층을 쓰고 그 사람들은 이층을 쓰게 되었는데, 그때 이미 꽤 여러 가구의 병을 고치고자 해서 온 사람들이 있어 이층에서 한 세대가 방 1, 2개씩 쓰며 공동으로 생활하는 형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층은 방이 여러 개 있어 4가구를 따로 세를 주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 그 많은 식구들 밥을 아래층 부엌에서 하게 되었으니 아마도 몇 십 명분은 되었지 싶다. 얼마 동안은 아버지가 그 생활비를 다 대시는 듯했다. 그러면서 그 와중에 나는 그 집에서 결혼을 해서 그 집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 즈음 유일하게 언니와 형부만 그 사람들이 사이비 종교요, 사기꾼들이니 모두 집에서 내쫓아 버리라고 아우성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아버지가 발을 빼기에는 너무나 많은 액수가 투자되어 있어 그 돈이 아까워서도 그들이 얘기하는 대로 그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듯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시골에 있던 땅을 마저 팔아서 갖다 바치셨으니 이래저래 단념할 수도 없었다. 


 나도 결혼하기 전 1, 2년은 그곳에서 공주님 아닌 장차 큰일을 할 사람으로 대접을 받고 있었으니 알게 모르게 그쪽에 흡수가 되어 있는 꼴이었다. 그 식구 많은 중에 나만 햇빛 비치는 창문이 달린 방에 침대까지 들여놓아 주어 그것을 쓰다가 결혼하면서 그 침대를 가져가게 되었다. 


 그 침대는 처음부터 나를 주기 위해서 산 것이 아니고 ‘천지 공사’를 하느라 샀다고 한다. 그 즈음 성주가 무슨 물건 하나를 사더라도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천지 공사를 하며 하나씩 사는 듯 했다. 말은 천지 공사를 한다고 하지만 자세하게 모르는 나는 돈을 쓰기 위한 명분을 내세우기 위한 수단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중에 대표적이고 내 기억에 있는 것은 침대와 까만 비로도 원피스에 손가락처럼 생긴 빨간 액세서리가 있었다. 까만 비로드는 사람의 내부, 내장을 뜻하는 것이고, 그 빨간 액세서리는 손을 뜻하는 것으로 법문을 띄워 천지 공사를 하고 나면, 그 동안 발달하지 못한 의술로 해서 고치지 못했던 병까지 고친다고 한다.  


 그 까만 비로도 원피스 또한 미혼 시절 즐겨 입었던 옷 중에 하나였다. 대부분 천지 공사를 한다는 명분으로 물건을 사서 일이 다 끝이 나고 나면 물건을 하나씩 나누어주곤 하는데 그 중에서 내가 받았던 것은 침대, 비로도 원피스, 분홍색 홈드레스, 사파이어 반지 등이었다. 


 또 성주가 주로 쓰고 사무실 겸 쓰는 방은 길이가 좀 긴 방이었는데 벽면 하나가 다 차도록 수족관을 설치해 놓고는 거기다 열대어나 잉어를 사다 넣곤 했는데 그 고기 또한 천지 공사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 천지 공사를 할 때면 어떤 때는 며칠씩 일어나지도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다 시피해서 나중에 나올 때면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밥상을 차려 가면 밥상에도 귀신들이 득실거려 무슨 주문을 외워야 귀신들이 다 물러간다고 들었다. 귀신은 밥상뿐이 아닌 길거리에도 귀신들로 가득 차 발길에 차인다고 한다. 


 또 한 가지 기억 중에 잊을 수 없는 것은 여자들이(10명 안팎) 단체로 파란색 한복을 맞춰 입고는 거기 식구들 모두 관광차를 대절해서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런데 또 돌아보면 그때 그런 일을 어떻게 했지, 결혼도 하기 전, 내 나이 20대 중반이었는데 부끄럽기도, 용기가 대단 했네 싶기도 하다. 그것은 단체로 맞춘 한복을 입고는 집집마다 다니며 쌀이나 돈을 얻어 오기도 하였는데, 어느 날 하루는 나와 상조 엄마, 승현 엄마가 청와대까지 갔다가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되돌아 온 적도 있었다. 청와대를 갔었던 것은 성주가 그 날은 우리 셋이서 그 쪽으로 가라고 해서 가게된 것이었다. 


 성주가 얘기하기는 그것 또한 천지 공사의 일환이라고 하지만 내가 생각키엔 식구들이 많다보니 식량 조달을 그런 식으로 하려는 것이 아니었나 생각도 해보았지만 몇 번 다니다가는 더는 할 수 없어 그만 두고 말았다. 


 언젠가는 내가 나갔다가 들어오며 딸기 껌을 한 통 사다가 드렸었다. 그랬더니 그런 것 모두가 내 자의로 하는 것이 아니고 성주가 무슨 법문을 띄워 내가 그런 것을 가져오므로 해서 그것으로 통일을 위한 공사를 한다고 지나는 소리로 하니 자세하게 물어 볼 수도 없었다. 


 또 하나 잊히지 않는 것은 그때 그곳에서 언제부터인지 나보고 글을 써 보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난 글을 쓸 줄도 모른다고 했더니 걱정하지 말라면서 성주가 법문을 띄워 내게 메시지를 주면 생각나는 대로 그냥 쓰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몇 번은 글을 써서 회의 시간에 읽곤 하였는데 어떤 때는 내가 쓴 글을 다 읽고 난 다음 돌아앉아 담배를 피우며 법문을 써서 그 자리에서 태우고 나서 나보고 다시 글을 써 보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먼저 쓴 글을 조금 수정해서 주면 읽고 나서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하였다. 그 순간에도 무슨 법문씩이나 띄워 메시지를 주는 글이 그런 정도 밖에 되지 않는가 싶어 믿어지지가 않았었다.


 나뿐이 아니고 우리 아버지 역시 장차 국무총리가 될 것이며, 그때가 되면 아버지는 명필 이상일 것이라고 하니 아버지는 설레면서도 기대가 가장 크지 않았을까 싶다. 


 문제는 뭐가 된다 된다, 그 중 하나, 세상이 바뀌면 내일 집 앞에 사람들로 꽉 찰 것이며 성주를 모셔 감은 물론이요 우리 아버지나 다른 사람들도 중요 요직을 맡게 될 것인데 그런 능력 또한 전지전능하신 성주가 다 할 수 있게 할 것이니 하나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말 그대로 언제 종말이 올 것이며, 세상이 바뀌어 어찌어찌 되리라 해서 그때가 지나기를 거듭거듭 하는 동안 꽤 많은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달이 바뀌고, 해가 바뀌어도 아무런 변화, 아무것도 달라지거나 바뀌는 것이 없고, 이미 아버지 수중엔 돈이 다 떨어져 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생전에 남의 돈 한번 써보지 않았고 빚이라는 것을 모르고 사시던 분이었던지라 집을 살 때 잔금까지 다 갖고 계셨는데 그 사람들이 잔금을 치르지 않고 은행 융자로 대신했던 모양이다. 그 후에 땅을 팔아 온 돈도 그 융자받은 돈을 갚은 것이 아니고 다 써버리고도 이제는 그 작은 집단생활도 계속할 수가 없게 되었다. 


 물론 우리 말고 병을 고치겠다고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일부는 직장까지 그만두고, 어떤 이는 집까지 팔아 갖다 바치고, 또 어떤 이는 치료비 조로 얼마간만 내는 듯했으나 우리 아버지의 피해가 제일 많았다. 


 나중에는 보다 못해 형부가 그 사람들을 다 내쫓다시피 해버렸다. 그들 말대로 그렇게 나쁜 짓을 해서 천벌을 받을 일이라면 내가 십자가를 지겠다고 형부가 들고일어난 것이었다. 


 그러니 그때는 아버지 병환은 웬만큼 좋아졌지만 무슨 일을 할 수도 없었고, 게다가 그들이 집값으로 치러야 할 돈까지 다 쓰고 융자금까지 고스란히 안고 있었으니 그 집을 팔 수 밖에 없었다. 


 그 후에 이따금 듣게 되는 언니의 비난은 내가 받아야 할 몫이기도 하였다. 엄마나 아버지는 배우지 못해서 그런 사이비 종교에 빠질 수 있다지만, 대학까지 나온 너까지 동조를 했으니 그 책임은 거의 나한테 있다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삼우제를 지내는 날도 나는 언니하고 대판 싸움을 벌여야만 했다. 나는 “출가외인인 네가 친정 재산 한 푼도 차지할 수 없이 되니 그러느냐, 왜 그렇게 난리를 치느냐. 엄마, 우리 집 장남도 아무 소리 없는데 왜 너만 나를 끝까지 걸고 넘어 지느냐”며 울며불며 싸움을 벌였다. 그 얘기는 그 후에도 몇 번을 더 언니한테 들어야만 했다. 


 그즈음 이따금 회의라는 것을 하였다. 식구 모두 모여 성주가 전달할 사항이 있다든지, 식구 중에 자기를 불신한다든지, 비협조적인 사람이 있다 싶을 때에 깨달을 수 있도록 간접적인 방식으로 얘기를 했다. 


 몇 번들을 수 있었던 “난(성주) 겉모습만 사람이지 신의 사신으로 세상에 내려 와 세상을 살기 좋게 하려 ‘천지 공사’를 하는 사람인데 어찌 이렇게 모르고 의심을 하느냐”며 안타까워하던 모습이 지금껏 생생하다. 


 분위기가 그렇다 보니 회의를 하는 그 순간에도 각자의 마음까지 꿰뚫고 있는 듯해서 마음이 편치 않을 때가 많았다. 때때로 바깥에 나가서 하는 행동 하나하나까지 다 알고 있어 절대로 성주를 배신하는 행위나 말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며,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으려면 성주가 하는 대로, 하라는 대로, 따라야 하는 것이었다. 


 몇 번 그런 분위기를 감지하다 보니 어디를 가나오나 성경이란 거울이 앞뒤를 비추고 있고, 신적인 존재, 성주가 머리 위에서 마음까지 샅샅이 읽어 내고 있어 길을 걸을 때도 뭐가 휘휘 감기는 것 같고, 감시를 받고 있다 싶은 생각이 들어 자꾸 오그라들고 조여 오는 느낌은 마음까지도 생기를 잃어 가는 것처럼 편치가 않았다. 아마도 이 때 내가 경험한 그런 마음상태가 싫어 그 후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적극적으로 하지 못하고 겉돌게 하는 것 같다. 


 소위 사이비 교주들이 하는 얘기나 종교단체에서 하는 얘기는 크게 다르지 않다. 교회에서나 성당에서는 그들처럼 무모하게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마음이 동하게 되면 얼마든지 하늘나라에 공덕을 쌓아, 죽어 영원히 하느님 나라에서 편히 살 수 있는 ‘천당 티켓’이라도 따 놓으려는 듯 물심양면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여유 있어 하는 경우엔 그 모두가 나보다 못한 이웃과, 더 좋은 일을 위해 쓰일 수 있기에 결코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하기야 돈을 많이, 헌금을 많이 내는 사람을 그에 맞게 대접해야 함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더러는 돈으로 못하니까 봉사를 한다고 대신하는 경우도 있고, 소위 ‘십일조’ 내는 만큼 복락을 주시리라 하는 얘기와, 헌금을 많이 하지 못해 불편해 하는 경우도 의외로 많은 것이다. 


 사람의 욕심이란 많이 해서 그 이상의 복락을 누리고 싶음이 인지상정일 터인데, 많이 못하고 보니 복도 많이 받지 못할 것이요, 사람대접 제대로 못 받나 싶어 마음에선 늘 목구멍에 가시일 수밖에 없다. 


 나중에 죽어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히 잘 살기를 바라기보다는, 지금 내가 처해 있는 ‘현실’을 제대로, 살아있는 동안 세상살이, 세상구경 열심히, 진실하게 살아감이 제대로 사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전쟁이 날까봐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고, 게다가 예언자들이 얘기하는 지구의 종말론을 굳이 들먹일 필요가 없다. 종말이 오는 것이 확실하다고 해도 내 현실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더 잘 먹고, 마시고, 있는 대로 흥청망청 쓰고, 즐겨야 하는가? 아닌 것이다. 일 년 후, 이 년 후에 지구에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내 ‘현실’을, 내 일상생활을 그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내일 지구에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어야 하고, 심을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현실을 성실하고, 착실하게, 바르게, 착하게 사는 길만이 내가 죽어 하늘나라에 간다 해도, 내가 행하고, 쌓은 것만큼 받을 수 있을 것이며, 다시 태어난다는 윤회설이나 환생을 믿는다 해도 또 역시 그대로 살면 되는 것이다.


 지구의 종말론을 믿고 싶어 하고 은근히 바라는 이들은 대부분 현실에 불만족하거나 이렇게 밖에 살 수 없느냐는 울분, 심하게는 한이 쌓인 사람일수록 또 다른 커다란 변화, ‘종말론’같은 것을 믿고 싶고 의지하고 싶은 ‘기대 심리’ 같은 것이라고 본다. 


 믿는 이들은 죽은 다음이나, 혹은 지구에 종말이 온다 해도 하느님 나라에 가기를 원하며, 영원히 그곳에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크기에, 지상의 것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의 것에 마음을 두라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중 문제인 것이다. 


 이승에서의 삶이 순간, 찰나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어디 두 번 다시 살아 볼 수 있더란 말인가. 그러기에 때로는 살아 있음만도 가슴까지 벅차오를 때가 있는가 하면, 살아감이, 더더구나 더 나이 들어서도 살아야함은 두렵기도, 무서움증이 엄습해 올 때도 있다. 


 어쨌든 절대적인 것은 살아 있는 동안은 살아야 하며, 살아 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기상의 이변이나 천재지변은 있을 수 있으나 세상에 종말은 없다. 다만 그날그날 바르고 충실하게 살면 되고 내가 생을 마감하는 날이 끝이며, 또 다른 시작일 뿐이다. 


 경험에는 직접경험과 간접경험이 있다. 경험을 통해 우리의 삶이 쌓여가고, 사고의 깊이나 가닥이 잡혀가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행동에 옮길 때는 간접경험을 통해 얻은 정보나 지식보다는, 내가 겪고 살아온, 직접 경험한 것들로 많은 부분 우리의 의식이 차지하고 있어 그것이 바탕이 되어 결정하고 행동함을 볼 수 있다. 


 난 이미 20대 중반에 사이비 교주한테 많은 부분 기울어 있었기에 그것이 내 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기인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민 오기 전 천주교에서 영세를 받기도, 또 가끔은 교회에도 나갔었다. 그런데 몇 번은 목사님 설교에 감동 받아 나도 작정헌금을 해야지 내 마음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음을 보고는, 이내 아니지. 그동안 아버지와 같이 잃어버린 재산이 얼마인데 아직도 이렇게 현혹이 되다니 하고 나를 일깨운 적도 있었다. 


 그뿐이 아니고 성당이나 교회를 가면 절박하고도 간절한 상황에서도, 기도가 되지 않는 거였다. 도대체 누구한테, 어디에 대고 소원성취를 빌고 있는 것인가 싶으니 나 자신이 민망스러워 기도조차도 하지 않게 된다.


 역이민을 하겠다고 서울엘 나갔다가, 그곳에서도 살 수 없겠네 싶어 다시 캐나다로 들어와야 하는가 너무도 막막한 상황에 처해있을 때, 전도사로 있던 친구가 새벽기도를 가자며 나를 데리고 갔다. 친구 생각엔 기도하는 가운데 앞으로의 진로를 잡았으면 하고 데리고 갔을 것이다. 그렇게도 절박한 상황인데도 기도는커녕 눈물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기도 시간이 되니 그 많은 사람들이 무슨 고민, 사연이 그렇게 많은지 조용하게 앉아 있는 사람은 나뿐인 듯 했다. 모두 목소리를 내어 기도를 하기도, 울며 호소하듯 하기도 하였다. 그것이 바로 통성기도인 듯한데 난 기도의 응답은커녕 맨송맨송 아무 생각도 못하고 있다가 나오고 말았다. 


 상황이 그리 되다보니 교회나 성당에도 나가게 되지를 않는다. 그야말로 정신적으로 자유스럽지 않아 교회도 성당에도 나간 지 오래 되었다.


 믿는 이들은 주일날이 기다려지기도, 그 날은 만사 제쳐놓고 교회나 성당엘 다녀와야 마음 편하게 하루를 시작한다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주일날 나가는 것이 심적으로 부담이 된다. 집에서 쉬고 싶다는 마음이 더 크다. 그러기에 아직은 심적인 불편함, 부담보다는 내 마음이 편한 쪽으로 그렇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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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oonja
한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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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3
복중의 복

 
 
 자식도 ‘품안’에 있을 때 자식이란 말을 한다. 이는 자식이 커갈수록 부모 뜻대로 되지 않을 때 흔히 쓰는 말이다. 이런 자식이든, 저런 자식이든 그래도 부모자식지간에 자주, 가까이서 볼 수 있으면 그래도 행운이란 생각이 든다. 


 이민 오기 전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민을 가게 되었노라고 하며, 난 ‘이민’을 가는 것이 아니고 아이들 데리고 ‘유학’을 가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했더니, 한 친구가 유학을 왜 보내느냐며 서울대학을 보낼 것이라고 했다.


 난 서울대학을 보내는 것도 좋지만 외국으로, 그것도 예전엔 꿈도 꾸지 못했던 유학의 꿈을 아이들만 보낼 형편이 되지 않으니 나도 가고 싶다고 했다. 


 남의 나라, 남의 땅에 가서 먹고 살 것을 고민하고 걱정하는 것이 아니고, 외국 사람들, 내가 가서 살게 될 캐나다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런 것들이 더 궁금했다. 그래서 처음엔 영어교실(ELS)에서 영어를 배우면서 외국 사람들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가 더 컸다. 


 처음에 만나게 된 영어교실 선생님은 존이라는, 지금 생각하니 나보다는 좀 어리게 보였으니 사십 전으로 보면 될 것 같다. 그때 반에는 각국 사람들이 다 모였네 싶었다. 내 옆에 앉았던 스리랑카에서 왔다는 내 또래의 여자, 대만에서 온 여자 둘, 중국에서 온 여자, 일본에서 온 여자,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 등 20명은 넘는 것 같았다.


 공부는 아침 10시에 시작해서 중간에 브레이크 타임이라고 있었다. 처음엔 내 커피와 선생님 것만 준비를 해 가지고 갔다. 그랬더니 선생님이 불편해 하며 같이 하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우린 그게 좋겠다며 찬성을 했고, 그래서 몇 명이서 돈을 조금씩 거둬 커피와 쿠키를 곁들여 브레이크 타임을 가졌다. 분위기가 그렇게 되다보니 수업 분위기도 그렇고 교실 분위기가 한결 훈훈해 졌었다. 


 한 학기가 끝나고 각자 음식 한 가지씩 만들어 와서 갖게 된 종강파티에 난 김밥, 다른 한국인 엄마는 초밥을 만들어 와서 너무 맛있게 먹었기에 잊을 수 없는데, 이란에서 왔다는 젊은 아가씨는 댄스 파티시간에 그들 특유의 복장을 입고 맨발로 춤을 얼마나 신바람 나게 추든지 아직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학기가 끝이 나고 난 선생님을 집으로 초대해서 갈비 잡채 등을 준비해서 좋은 시간을 가졌다. 


 그 후 대만 친구들과 선생님을 모시고 중국 레스토랑에서 같이 식사를 했다. 그랬더니 선생님이 초콜릿을 선물로 줘서 잊지 못한다. 캐나다 땅에 와서 일 년은 남의 인생살이 엿보려 그렇게 타국 사람들과 함께 하며 흘러갔다. 그때 대만에서 왔다는 사람은 아들이 대만에 있다고 했다. 


 그 다음엔 도넛 가게를 하게 되면서 남편이 내게 집에만 있으라고 했건만 난 궁금해서 밤에 나가서 일을 배워 손님에게 서빙을 하며 그렇게 캐나다 생활을 시작했었다.


 내가 하고자 했던 유학은 무슨 공부를 별도로 하는 것이 아니고, 외국 사람들 사는 모습을 보는 것, 그것이 내겐 유학을 온 목적이 되었다. 게다가 식구들과 같이 왔으니 기러기 가족이 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4년 후 한국으로 다시 가야하나 기로에 섰을 때, 어떤 친구는 남편이 한국엘 갈 사정이면 아이들은 이곳에 두고 남편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난 딸들 곁에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딸들이 그때까지 미성년자였으니 난 당연히 딸들을 보살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때까지도 딸들과 한 번도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큰딸이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 나가서 영어 강사를 할 때였다. 딸이 나가있기는 했어도 떨어져있다는 생각을 할 짬도 없이 바쁘기도 해 서울에 있는 큰딸이 잘 있겠지 하고 전화 한 통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즈음 딸애 친구도 서울에 나가 있었는데 그 친구 엄마는 딸과 수시로 전화 통화를 한다며, 너희 엄마는 딸이 그렇게 나와 있는데 전화 한 번 하지 않느냐고 했던 말을 이제야 곱씹어본다.


 큰딸이 결혼을 해서 첫딸을 낳고 돌을 앞두고 시댁 어른이 있는 서울엘 4주간 다녀왔다. 그런데 평소엔 무심히 지났는데, 명절이 되니 한국에 있는 시댁 어른들이 손녀딸을 얼마나 보고 싶을까 싶어지니, 딸들을 곁에 두고 보고 싶을 때 자주 볼 수 있음은 ‘복 중의 복’이란 생각이 솟구쳤다. 


 큰딸은 이곳 기후에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서울엘 나가면 몸에 반점이 생기는 등 피부에 문제가 생겨 이곳을 더 좋아한다. 하지만 시댁 어른이 그곳에 계시기도 해서 언젠가는 나가서 살 마음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작은 딸 역시 시부모님이 한국에 살고 계시기는 하나 딸과 사위는 나가서 살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사돈어른이 상견례 자리에서도 아들자식 잘 키워 처가에 ‘상납’한다는 말로 현재의 심정, 앞으로 아들 며느리를 자주 볼 수 없을 것임을 대변했다. 


 자식을 조기유학 보내기도, 어학연수 차, 근무여건상, 부부, 부모자식지간에 떨어져 살아야 하는 기러기 가족이 얼마나 많은데, 난 딸들과 같은 도시에서 살고 있으니 그야말로 복 중의 대복이구나 싶다. 


 이산가족으로 인해 평생 보고 싶어 가슴앓이를 하는 이들도 아직도 많은데, 딸자식 아들자식 잘 키워놨더니 멀리 떨어져 살아야 하는 이들도 너무나 많고, 이민이란 형식으로 부모형제 등지고 살며 자칭 불효자식이란 꼬리표를 달고 사는 이들도 있고 보면, 글로벌 시대에 자식을 곁에 두고 사는 것도 말년에 ‘대복’이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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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oonja
한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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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02
2017-07-07
남편이 내게 준 선물

 

 선물은 받는 즐거움도 크지만 주는 기쁨 또한 그보다 더 크지 않을까 싶다. 나는 남편에게서 받은 선물 가운데 몇 가지 잊지 못할 것들이 있다. 그것은 교제할 때 우연히 명동의 양화점을 구경하다 마음에 쏙 드는 구두가 눈에 들어 왔다. 그 구두는 보기만 해도 마음이 즐겁고 자꾸 시선이 가는 굽이 높은 빨간 슬리퍼 종류였다. 그 구두가 마음에 들어 너무 예쁘다 너무 예쁘다를 연발했다. 집에 들어와서도 그 구두가 눈에 삼삼했다. 며칠이 지나 남편이 만나자고 해서 나갔더니 그 구두를 사 주는 것이었다. 


 내 지금 기억으로는 구천 원 인가하였는데 둘이 놀고 있는 처지였기에 그 돈은 그리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흔히 구두 선물은 하지 않는다는데 내가 너무 마음에 들어 하니까 남편은 내게 그 구두를 사 주었고, 우리는 오래지 않아 결혼을 하게 되었다. 


 40년이 넘는 지금까지 그 구두는 선명하게 내 기억 속에 그 때의 고맙고 즐거웠던 기분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결혼 후 어느 날도 동방 플라자가 새로 오픈을 했다고 해서 같이 갔다가 그 날도 빨간 단화를 하나 사 주었는데 그 구두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그 후로도 구두는 몇 번 사 주기도 했는데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하나 더 사라고 부추기기도 한다. 


 교제하던 시절엔 나도 남편에게 선물을 이것저것 해준 기억은 있는데 오히려 결혼을 해서는 내가 남편에게 해준 기억보다는 받은 기억만 더 많다. 주로 서울엘 나갔다가 들어오는 길에 내 옷이나 핸드백 기내에서 화장품이나 어느 해엔 구찌시계를 하나 사 왔다. 


 결혼을 해서 살면서 나는 남편에게 별로 선물을 해본 것 같지 않은데 남편은 내게 잊지 않고 때마다 챙겨주었지 싶다. 그 중에서도 대리점 대표라는 직함과 함께 하얀 승용차를 선물해 주었던 것은 오래도록 고맙고 마음에 새기며 산다. 


 결혼해 살면서 늘 무엇인가 해 보고 싶어 하는걸 아는 남편이 대리점을 하나 더 하게 되면서 나를 대표로 해 주어 그때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아이들 둘 낳고 키우면서 집에만 있다가 매일 출근이라고 하려다 보니 머리회전도 빠르지 않은데다가 옷차림도 어색하고 어설프기는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남편하고 따로 출퇴근을 해야 하니 난 주로 버스를 타야했다. 


 그런데 그 즈음 밍크코트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내가 코트가 사고 싶다고 하니 밍크코트를 입고 버스를 타고 다닐 거냐며 옷은 아무렇게나 입어도 차는 타고 다녀야 한다고 그래서 조그만 승용차를 하나 사 주었다. 오래지 않아 밍크보다는 여우 털 코트가 낫겠다고 여우 털 코트도 그때 하나 구입하게 되었으나 지금까지 몇 번이나 입어 봤을까. 


 돈이 있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하고 싶고, 주고 싶어야 하는 것이 선물이다. 그즈음 듣는 얘기 가운데 차 한 대를 쓰는 경우 아내에게 키를 주기는커녕 만지지도 못하게 한다는 얘기도 듣곤 하였다. 그런 친구를 만날 때면 더더욱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또 한 가지 남편에게서 골프 신발과 골프채를 선물 받은 일이다. 이민 오기 전 남편이 캐나다에 들어왔다가 나오는 길에 내 골프 신발을 사 가지고 왔다. 그것도 내 발에 꼭 맞는 것으로 말이다. 골프채는 비싼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도 사서 내 키에 맞게 손을 봐온 것이라고 했다. 


 웬만해서는 남자들이 자기 것이나 하기 쉽지 아내에게까지 신경 쓰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골프 회원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둘이 골프를 즐길 만큼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니 더더욱 그렇다. 


 그러고 보니 나는 남편의 구두 사이즈를 모른다. 내가 가서 사 보지도 않았지만, 들어도 이내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이랴. 와이셔츠 목 사이즈나 바지허리 사이즈도 모른다. 그것은 남편의 옷은 속옷까지 자기가 직접 다 사다보니 내가 무관심해지기도 해서 그리 되기도 했다. 게다가 가끔은 큰맘 먹고 옷이라도 사다 주면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니 그래서도 우린 그런 분위기로 살아 왔다. 


 살면서 어찌 아프고 서운한 기억이 없을까마는, 고마웠고, 내가 받은 선물과 함께 그 마음을 떠올리다 보면 어느 사이 맺혔던 마음들은 저만큼 밀려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내가 별로 원하지 않았어도 내게 베풀어준, 배려해준 마음 씀, 선물이 고마웠는가 하면 이젠 진정 받고 싶은 선물 아닌 선물이 있다. 살아 있는 동안 남편이 건강만 해준다면 그 이상의 선물은 없을 것 같다. 


 지금까지는 너는 내 아내니까, 아이들의 엄마요, 며느리라는 굴레에서 알게 모르게 나를 구속하고 억압했던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같이 있으되, 내 시간은, 내 임의대로, 쓸 수 있게 배려해 주었으면 한다. 


 젊었을 때야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건만 해를 거듭할수록 건강 이상의 축복, 또 그 이상의 선물도 없을 것 같다. 자칫 둘 중에 누구 한 사람 건강에 문제가 있을 시는 앞으로 남은 시간들을 그로 인해 침해당하고 빼앗겨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강하기만 하다면 체력과 여건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아낌없이 살고 싶은 욕심 때문에 말이다. 


 내게 더 잘 해주고 싶어 이민을 왔다는 남자였는데, 남편은 내게 무엇을 그렇게 잘 해주고 싶었던 것일까. 남편은 내게서 받는 즐거움보다 주는 즐거움이 더 좋았는가 보다. 그런데, 내가 무엇을 더 원하고 좋아 하는지 알고 주었더라면 아쉬움은 한결 덜했을 텐데, 너무도 일찍 나만의 자유 시간을 ‘듬뿍’ 선물 받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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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29
남편의 사랑

 

 이민 오고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서울엘 나갔었다. 옷정리를 하던 중 남편의 양복주머니가 유난히 불룩해서 슬쩍 들여다봤더니 항공봉투가 들어 있었다. 무심히 빼어보니 내가 남편에게 보낸 편지였다. 날자가 92년인 것을 보니 우리가 캐나다에 오던 해 남편이 서울에 나가 있는 동안 쓴 듯한데 내용을 읽어 내려가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가 남편을 그만큼이나 사랑했었나 싶은 것이 그동안 다 바래지고 엷어진 줄 알았던 우리의 사랑이 몇가지 남편의 따뜻한 배려에 다시 느껴지며 물안개가 솔솔 피어나듯 교제하던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대학교 3학년 때 남편을 만나서 난 이미 남편에게 푹 빠져 있었는가 보다. 제 눈에 안경이라더니 친구들을 만나면 내가 너무 신나게 얘기를 했는지 한 친구가 나중에 하는 얘기가 신성일씨 쯤은 생긴 줄 알았다며 실망하는 것이었다. 


 금방 만나고 들어와서도 미쳐 못다한 얘기가 남았는가 싶어 거울에 붙어 서서 혼자 얘기하고 대답하고 시간 가는 줄 몰랐던 때도 있었다. 그즈음 어느날 집에 찾아갔더니 춘천엘 갔다는 것이다. 대강 시간계산을 해보니 잘하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청량리에 가서 열차를 탔다. 


 춘천역에서 내려 막 개찰구를 빠져나가는데 저만치서 곤색 양복을 입은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지며 그가 바로 그임을 알고는 서로 놀라움과 반가워 어쩔 줄 몰라했다. 


 그 후 결혼을 해서 난 남편이 필요 이상으로 자상하다 싶을 때면 고맙고 사랑이라 여기기보다는 귀찮아 하며 짜증을 낼 때가 더 많았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런 저런 것들이 사랑의 표현방식이 아니었나 싶다. 


 처음 운전을 배워 보름 정도 연수를 받고는 차를 좀 쓰겠다고 하니 안심이 되지 않는다며 남편이 옆자리에 앉으며 나보고 운전을 해보라고 했다. 난 자신 있게 운전대를 잡고는 차선을 바꿔야 하는 지점에서 인도로 올라가고 말았다. 그렇게 경미한 사고가 있고난 다음부터는 운전대를 잡기도 두려워 한동안 운전을 할 수 없었다. 


 그 후 난 이따금씩 생각해봤다. 남편이 그때 나보고 운전을 해보라고 하지 않고, 이내 차를 내주었다면 별일이 없었을까. 내가 차를 좀 쓰려고 했던 것은 그때 내가 작은 딸 유치원 자모회장을 맡고 있었기에 봄소풍을 가면서 그래서 차를 쓰려고 했던 거였다. 그것도 가까운 곳도 아니고 서울에서 과천까지 운전을 하고 가려 했으니 말이다. 그때 남편이 내게 그런 자상한 배려가 없었다면 소풍을 무사히 다녀올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등골이 다 오싹해진다. 


 다시 시내연수를 받고는 거의 2주 정도를 때로는 앞에서, 때로는 뒤에서, 내가 안전하게 차선을 바꿀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건만 잔소리 한다고 짜증이나 냈지 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기억된다. 


 그뿐인가. 처음 안경을 쓰기 얼마 전부터 신문 보는데 지장이 없느냐고 물어볼 때마다 아직 괜찮다며 큰소리를 쳤는데, 언제부터인지 눈만 비벼대고 글씨가 고물고물해서 신문을 앞으로 당겼다 밀었다 조절을 해봐도 헛일이었다. 아니, 벌써 안경을 써야 할 나이가 되었나 싶어지며 퍼뜩 안경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남편이 안경을 스탠드 옆에 놓아둔 것 같았는데 하고 찾아보니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안경을 쓰고 책을 들여다 봤더니 너무 잘 보이는 것이었다. 아, 이 남자가 이제 내가 안경이 필요할 것을 알고 이렇게 미리 준비해 두었구나 싶어 콧등이 시큰했었다. 


 캐나다에 와서 3번째 이사를 하면서 서로 심기가 불편해 있었는데, “식탁보 사러가자” 하기에 시큰둥하니 대답도 않고 따라나서지 않았더니 혼자 나가서 색깔별로 4개와 식탁 유리까지 맞춰 놓고 한국을 나갔다. 그것은 캐나다에 와서 그런 환경 밖에 만들어주지 못해 미안하긴 해도, 그래도 분위기 있게 차도 마시고, 글도 써보고, 자기생각도 잊지 않고 하라는 남편의 마음이었음을 뒤늦게 알고는 이렇게 둔하고 무심한 여자가 또 있을까 미안하기까지 했다. 


 서울에 나가 있으면서 어쩌다 전화해서 보고 싶지 않느냐고 물으면 보고 싶긴 뭐가 보고 싶으냐며 건강해요? 나 아이들과 잘 있으니 걱정말고 일이나 열심히 하라고 퉁명이나 떠니, 지금 생각해도 장작개비가 따로 없네 싶어 미안한 마음이 든다.


 연애 6년 하고 결혼해 사는 동안, 난 남편의 마음, 심정을 얼마나 알고 이해를 하고 있었을까. 새삼 돌아보면, 캐나다에서의 삶은 친구들을 만나지 못하는 외로움보다 딸들이나 내게 좀더 잘해줄 수 없음이 더 큰 외로움 아니었을까 싶다. 


 입이 쑥스러워 미안해요. 고마워요, 라는 말 잘하지 못하는 심통에게(연애할 때 내게 붙여진 별명) 그나마 글이라도 있어 이 마음 전할 수 있음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남편의 건강과 함께 신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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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22
남편의 전화(하)

 

 (지난 호에 이어)
 그런데 그 불편하다는 것이 그동안 어느 만큼의 형편에서, 얼마동안이나 익숙해져 있었느냐에 따라서 다르기도 할 것이며, 생활 형편을 낮추고, 맞춰 가는 과정이 부부간이나 아이들과의 갈등이나 마찰을 겪게 되는 동안이라고 봐야한다. 


 그 동안을 잘 맞추고 견디며 이겨내는 가정은 그런 대로 가정이란 이름을 그대로 유지해 나갈 수 있으나, 서로 맞추지 못하고 이겨내지 못하게 되면 더러는 이혼을 하는 부부도, 아이들이 가출을 하거나 잘못된 길로 빠지게 되는 경우도 있다.


 물질이란 가정생활을 영위해 가는 데 필수적인 것이어서 그 물질이 적당할 때에 가정생활 또한 원만하게 꾸려갈 수 있다. 그 물질이 너무 부족할 때엔 기계에 기름칠을 해주어야 잘 돌아가고 그렇지 않을 때엔 고장이 잦거나 멈추기는 것과도 같다. 


 반면에 물질이 많아 넘칠 때엔 윤택한 살림은 꾸려갈 수 있으나 부모와 자식 형제간에도 오히려 그 넘쳐나는 물질로 해서 반목하거나 사이를 벌어지게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이는 농사를 지으면서 물이나 햇빛이 적당해야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물이 너무 부족할 때엔 가물어서, 너무 많으면 홍수로 농사를 망칠 수밖에 없다.


 그렇듯이 가정에서는 주부의 인내나 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예전과는 달리 주부가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남편과 같이 벌이를 할 때에는 그래도 큰 문제는 없다.


 그런데 여자가 살림을 하고, 남자가 밖에 나가서 돈벌이를 할 때에는 남자들은 여자를, 심지어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처자식을 벌어 먹여야 한다고 실제로 극한 상황에서는 그리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그럼에도 내가 왜 처자식을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며 푸념이나 한탄은 하지 않는다. 


 돌이켜 보면 여자가, 아내가 돈을 벌어 오지 못한다든지, 살림을 잘하지 못해서 남자 쪽에서 먼저 이혼을 요구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 그러나 남자가 집에서 놀고, 여자가 나가서 살림을 꾸려갈 때에는 대부분의 여자들이 내가 왜? 남자, 남편을 벌어 먹여야 하느냐며 그 자체만으로도 불만이 가슴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여자는 모성애가 강해서 자식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고, 하겠다는 각오는 되어 있으나 남자, 남편에게서는 오히려 보호받고, 그런 상황에 길들여지고, 그러기를 원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인지, 남자가 집에 있으면서 여자만큼 살림을 잘하지 못하기 때문인지, 집에서 놀고 있는 남편을 냉대, 하대하기 십상이니 여자들만의 또 다른 이기심을 보는 듯하다.


 물론 요즈음은 여자가 직장을 다닐 경우 남자가 집에서 살림을 하는 남자도 점차 늘어가지만 우리 세대만 해도 가부장적 사고, 의식에 젖은 탓인지 그런 경우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남편이 직장에서 밀려나 일자리를 잡지 못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면 점차 기가 죽고 열등의식까지 사로잡히게 되어 집안 분위기는 말이 아니다. 그런 분위기가 너무 오랫동안 지속이 되다 보면 남편은 자신이 아무런 쓸모도 없는 사람처럼 생각이 들고, 더러는 아내 자신이 돈을 벌게 되니 돈벌이도 못하면서 성격도 점점 나빠지는 남편에게 점차 정이 떨어지게 되며 멀어지게 되니 차라리 그럴 바엔 헤어지는 것이 낫겠다며 이혼을 하는 부부들도 늘어나게 된다.


 자식이 학교에서 공부를 잘해 주면 좋겠지만, 부모의 욕심만큼 해주지 못한다 해도 부모와 자식관계가 그대로 있듯, 남편과 아내도 그런 사이였으면 한다. 아이들이 어릴 때엔 자식을 생각해서 살게 될 때가 많다. 그러나 시대가 급변하면서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팽배해지다 보니 이젠 자식을 위해서 참고 살기보다는 과감하게 헤어지고자 하는 부부들이 늘어 감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냉철하게 생각해본다면 자식이 내 인생을 살아주는 것이 아니고, 내가 자식으로 인해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내 삶에서 남편과 아이들을 빼고 나면 세상에 나 하나밖에 없음을 절감하게 된다. 그 때가서는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가 무슨 소용이며, 혼자서 물질적인 풍족함 속에서 산다한들 그게 뭐 그리 의미가 있겠는가 싶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좋은 일만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괴롭고 힘에 겨운 일만 있는 것도 아니다. 남편과 자식으로 인해 고통 받고 부딪친다하여 남편과 헤어지게 되면 얼마 동안은 편하고 홀가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살다보면 생각하고 걱정이라도 할 수 있는 자식이 있고, 또 같이 의논하고 염려할 수 있는 남편이 옆에 있는 것만도 너무 고맙고 다행스러울 때가 있으리라. 그것은 나이 들수록 외로워서 혼자서는 살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미 아이들이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 산다고는 하나 부부가 이혼을 하게 된 경우엔 그 아이들이 부모가 생각나고 보고 싶을 때엔 어디로 가야 한다는 말인가. 물론 상황에 따라서 엄마 아빠를 따로 만날 수도 있겠으나 그리되면 때때로 보고 싶어지는 손자들도 마음 놓고 볼 수 없게 되니 그런 저런 점을 감안해도 결국엔 남편과 이혼을 하게 됨이 오히려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많다.


 예전엔 미처 몰랐던 것을 나이가 들었음인지 난 남편의 그늘 안에서만이 가장 편안하고 행복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으니, 그 동안 잊고 묻혀 살았던 남편의 존재, 의미가 무엇인지 전화 두 통의 “사랑 한다”는 말로 돌이켜 보고,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내게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긴 여운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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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5
남편의 전화(상)

 

 남편이 서울에 나가 있던 어느 날, 화사한 햇살이 실어다 주는 감미로움에 도취되어 있을 때 따르릉 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 아이들 전화려니 하며 수화기를 드니 내 목소리임을 알자 남편이 “나야” 하며 아이들과 별일 없느냐며 길지 않은 통화를 끝내고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난 이미 먼 옛날의 추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대학교 3학년 때 남편을 만나 한동안은 우리집 전화로 통화를 할 수 있었는데 우리들 등록금 때문에 전화를 팔게 되어 언제부터인지 남편의 전화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 당시엔 일반 전화는 꽤나 비싼 편이어서 웬만한 재산 목록쯤에 들어갈 정도였다. 나는 생각다 못해 옆집의 아저씨에게 부탁을 해서 우리 집에 벨을 하나 달아 놓게 되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저씨네 집 전화로 남편에게서 연락을 받기 위한 수단이었다. 


 강의가 끝나고 교문까지 나오는 동안 친구, 선배, 후배, 아는 사람도 많아 어떤 때는 만나는 곳을 정해 놓고 먼저 가서 기다리라고 해놓고는, 한두 시간 늦는 것은 예사여서 기다리다 지치면 그냥 집으로 오곤 하였다. 지금도 기억나는 왕십리의 광심 다방이 그 중에 하나였다. 


 집으로 돌아 온 난 웅크리고 누워 귀는 나발 통처럼 잔뜩 키워 놓고 설레며 감미롭게 기다리곤 하다가 찌-익 울리는 벨소리에 뛰어가서 받으면 “여보세요”와 동시에 “나야”하는 목소리는 너무 반갑고 행복했던 목소리였다. 


 그만큼 사랑한다 싶어 결혼을 했음에도 처음 몇 년은 살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많은 갈등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느 한순간 두 딸들을 위해서라도 헤어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다짐을 하였다. 


 그 후로는 사랑을 하면 어떻고, 설령 사랑하는 감정이 식어 버렸다 해도 그런 감정이야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며 별로 남편과의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 본 것 같지 않다. 


 그런데 서울을 가기 몇 달 전에 남편이 가게로 전화를 해서 “나 당신 사랑해”하며 나는 어떠하냐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그 순간 책장을 휙휙 넘기듯 내 마음속을 재빠르게 살펴봐도 사랑이란 감정은 남아 있는 것 같지 않기에 지금 무슨 소리하느냐며 바빠서 전화 끊는다며 수화기를 놓고 말았다.


 아무리 얼굴을 보지 않고 하는 얘기라 해도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후 생각이 날 때마다 내가 남편을 사랑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다면 왜 그런지를 곰곰 되새겨 보았다. 


 미혼 시절엔 사랑한다는 감정이 그렇게 복잡하지도, 조건이 까다롭지도 않아 웬만큼 마음에 와서 닿고 좋으면 무조건 좋아질 수도 있다. 그러나 결혼을 해서 해를 거듭할수록 남편의 경제적인 능력이나, 아내에 대한 마음이나 태도, 생활에 임하는 자세, 성실성, 아이들에게 자상한 보살핌 등등이 좋은 감정으로 느껴질 때 사랑인가 싶은 것이지, 그렇지 않을 때엔 상황이나 정도에 따라 무관심이나 미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런 저런 점을 감안해 볼 때 이민생활 하는 동안 남편의 태도에서는 사랑이라는 감정보다는 실망스러울 때가 더 많았으니 증오의 대상이 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싶었으며 사랑한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 후 남편과 같이 서울에 나갔을 때 대학 친구 두 명을 만나게 되었다. 한 친구가 얘기하는 도중 남편이 출근을 할 때면 당신은 ‘귀하신 몸’이니 몸조심하라며 얘기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남편의 월급이 얼마냐고 물었더니 ‘연봉 1억은 넘지’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 얘기를 듣고 있다가 “그 정도 능력 있는 남자라면 ‘귀하신 몸’ 대접을 받고도 남지” 하였다. 꽤 오래 전 얘기이니 그때 연봉을 그 정도 받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뒤미처 똑같은 남자이건만 연봉 1억 이상을 받을 때와, 그 동안 모아 놓은 재산도 많지 않고, 명예퇴직을 해서 집에서 놀고 있어도 귀하신 몸이라 대접할 수 있겠느냐고 묻고 싶은 것을 그냥 삼켜 버리고 말았다. 물어 보나마나 한 것을 무엇 때문에 묻겠느냐며 말이다.  


 두 달 넘게 서울에 같이 있다가 내가 캐나다로 들어오고 연말에 남편이 전화를 해서는 “나 당신 사랑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나도 사랑해요”하고 말해 놓고는 쑥스러워 그만 전화 끊는다며 수화기를 놓았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간사해서 남편이 직장을 제대로 다니고, 그야말로 월급봉투라도 넉넉하게 갖다가 줄 때에는 남편 대접 또한 소홀히 할 수 없더니, 그렇지 않을 때엔 남편을 대하는 태도부터가 달라져 생각만 해도 민망스럽다. 


 그렇긴 해도 때로는 남편의 수입, 경제적인 능력이 사랑인 양 착각하기도  하고 또 그와 비례하는 듯 보임은, 살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엔 부대끼는 일이 별로 없어 부부간에 다툰다든지 싸울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림이 궁핍해지기 시작하면 마음의 여유가 없어져 불편해지는 심기를 자주 들어내게 되어 부부간에도 다투는 일이 잦아지니, 과연 우리 부부가 사랑을 하는지, 사랑하고 있었는지 조차도 회의에 빠지게 된다.


 남편의 경제적인 능력이 좀 나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생활하면서 조금 불편하다는 것 뿐이지 큰 차이는 없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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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08
거리의 남자(7.끝)

 

 (지난 호에 이어)
 다음날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다. 여자가 그 나이 먹도록 어찌 그렇게 한심하냐고 하며 아침에 가방을 찾으러 가니 숙박은 하지 않았어도 그 가방 때문에 다른 손님을 받지 못했으니 숙박료를 내야한다기에 언쟁을 벌였단다. 


 요금의 반만 물겠다고 하니 안 된다고 완강하게 나오기에 구청 위생과에 위생 문제, 숙박인 명부에 기재하지 않은 것 등 고발 조치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고 한다. 나중에는 파출소에서 순찰대원까지 나와 난리 법석을 피웠다며 어째 그런 것까지 그렇게 몰라서 피곤하게 하느냐고 닦달하는 것이었다. 


 잘 몰라서 그랬다고 사과를 하며 우리 부부는 때로는 너무 호흡이 맞지 않고 의견차이가 많아 피곤하구나 싶어 생각하는 것조차 지쳐 그만 덮어버리고 잊고 싶었다.  


 아침에 눈을 떠 어찌어찌 하루해는 보낸다 해도 저녁이면 갈 곳이 없어 배회를 해야 하니 50이 넘은 중년의 내외가 거리의 미아가 된 셈이었다. 그 후 고시원이라는 곳도 찾아가 보고 어디 월세 방이라도 얻어 볼까 골몰을 하는 내게 조금만 기다려서 몇 천 만원만 더 내고 70평짜리 아파트로 가면된다는 것이다. 


 그때마다 그럼 그동안은 어디로 가서 있느냐고 어처구니없어 물으면 그 대답엔 있는 대로 성질을 내니 그때마다 싸움도 되지 않는 언쟁을 하다가 피투성이가 된 싸움닭처럼 지쳐 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계획하고 있는 일과 연관이 있는 지방 공장 근처로 내려가 보고는, 시골은 도저히 가지 않을 것이란 평소 소신을 접고 남편이 내가 시골이라도 내려가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면 그럴 것이라며 같이 가자고 했다. 


 시골에 내려가니 생각보다는 원룸이라고 하는 것도 꽤 넓고 싱크대며 온수까지 쓸 수 있는 욕실도 제법 쓸만했다. 우린 그 다음날로 동생의 봉고차를 빌려 시골로 내려갔다. 


 거의 9개월 가까이 있는 동안 짐도 제법 늘어 봉고 차에 가득 싣고도 남았다. 그렇게 해서 시골까지 내려가서 우리 숙소라고 정하고 나니 서러움보다는 우선은 남편 밥이라도 해줄 수 있으려니 싶으니 마음이 안정이 되는 듯 했다. 


 거처는 시골로 정했다지만 대부분 볼일은 서울에 가서 봐야하기에 어떤 때는 1주일에 2, 3번은 서울을 오르내려야 했다. 한번 오가는데 기름값, 고속도로 통행료까지 합하면 5, 6만원은 들어야했다. 게다가 당일로 내려오지 못하는 날은 다시 또 서울에서 숙박료를 별도로 지출해야 했다. 


 그 즈음 남편은 자주 오르내리는 곳 주변에 휴게텔이라고 하는 숙박료 1만2천원한다는 곳에서 묵고, 이따금 나도 서울을 따라서 올라가면 친구네 가서 신세를 지며 오고가기를 거의 한 달이 되어오고 있었다. 


 신의 가호가 있었네


 남편은 여권 만기일도 가까워 오고해서 캐나다를 들어가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일정하게 갈 곳도 없이 차를 타고 거리를 헤매었을 남편은 캐나다로 떠났다.


 캐나다에서 남편과 아이들이 이따금씩 어떻게 지내느냐며 전화를 했다. 워낙 전화는 잘하는 사람인데 일주일 넘게 전화가 없어 궁금했는데 전화가 왔다. 큰 아이와 어디를 가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물리치료를 받으러 다닌단다. 그것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로. 


 난 그 전화를 받는 순간 ‘신의 가호’를 받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서울에서 만취가 되어 운전을 하며 극도의 정서, 정신 불안 증세까지 있었는데 어찌 그 때는 아무 사고 없이 그 시간을 넘기게 되더니, 엉뚱하게 캐나다로 들어가서 가해자가 아니고 피해자가 되어 얼마간의 피해 보상금까지 받게 돼 이건 필시 사람의 힘으로는 되는 일이 아니지 싶었다. 


 남편과 같이 광란하듯 운전을 할 때 사고가 났더라면 음주 운전이니 당연히 어떤 상황이 되었건 남편이 불리한 입장이었을 것이고, 우리 아이들은 물론이요 동생까지 고통스런 삶을 살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칠 때면 경기라도 일으킬 듯 자지러지곤 했었다.


 그런데 서울이 아닌 캐나다에 가서 그런 일이 있었다 싶으니 이젠 숨조차 몰아쉬게 하던 거칠고 사나운 태풍은 잠잠해지고 잔잔한 파도타기만 하면 목적지에 도달할 것 같은 안도감이 든다. 


 그 후 캐나다에 다시 들어와 살면서, 문득문득 그때 서울에서 무사히 돌아 올 수 있었기에 오늘 우리의 삶이 있는 것이지 싶어 참으로 감사할 때가 많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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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oon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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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02
거리의 남자(6)

 

 (지난 호에 이어)
 며칠 지나고 나니 큰아이가 얘기 좀 하자며 마주 앉았다. 그 다음날로 나가라고 할 때엔 나보고 죽으러 가라는 말이냐며 지금은 가지 않을 것이라고 단호히 얘기했었다.  


 며칠 쉬고 나니 아빠 혼자 거리 귀신 만들 것이냐며 6월 초에 다시 나가라며 울먹이며 얘기하는 것이었다.

아이의 그런 마음이나 표정을 보니 자식이 좋기는 좋구나, 핏줄은 무서운 것인가 보다며 가슴이 뭉클했다.


 엄마가 나가서 너무 힘이 들어 견딜 수 없으면 다시 들어오더라도 일단은 나가서 정 안되겠다 싶으면 아빠를 모시고 그냥 들어오라는 것이다. 


 캐나다를 떠나기 하루 이틀 전 친정 올케가 서울에 다시 나올 것이냐며 전화를 했다. 그래서 그렇다고 했더니 또 고모부와 부딪치며 어떻게 하려고 나오느냐고 하기에 아이들이 간곡히 원하기도 하지만 죽기 아니면 살기 아니겠느냐며 통화를 간단히 하고 끊었다. 


 친정 올케와 전화를 끝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전화를 했다. 남편 얘기로는 친정 올케가 전화를 해서 고모가 서울을 나오면 어디 가서 있을 것이냐며 이제 우리 집엔 고3도 있고 하니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얘기를 하더란다. 남편은 그 전화를 받고 너무도 울화가 치밀어 술을 몇 잔 먹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넘어져서 얼굴과 손등을 다쳤다고 얘기하는 것이었다. 


 난 순간 이럴 수가 있나. 이번엔 나가면 친정집엔 가지도 않으려고 했는데 그동안 애쓰고 수고한 것을 그 말 한마디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상처로 남겨 놓고 말겠구나 싶어 가슴 저미는 아픔과, 나는 그렇다 해도 그런 대접밖에 받지 못하는 남편이 더 할 수 없이 측은하고 불쌍해서 망연히 앉아 있었다. 


 큰 아이는 아무 걱정 말고 이번엔 나가면 방부터 하나 얻어 아빠한테 잡수실 거라도 제대로 해드리라며 앞으로는 외갓집 식구들은 보지 않을 것이라고 이를 앙 다무는 것이었다.

 

 다시 서울행 비행기를 타다.


 그래서 6월 7일 날 거의 열흘 만에 서울로 다시 나가게 되었다. 공항엔 남편이 나와 있었다. 이번엔 웬일로 청바지에 남방차림이어서 오히려 그런 모습이 보기 좋았다. 오른 쪽 눈썹 위엔 바셀린을 번들번들하게 바르고, 오른손 손등도 많이 까져 있었다. 


 아무리 미우네 고우네 해도 내 남편이요, 아이들의 아빠인 그가 저토록 마음고생, 남들이 옆에 올까 겁이 나는 사람이 되었나 싶어 가슴이 찌르르 아파왔다. 


 공항에서 곧 바로 친구네 집으로 가고 싶다고 하니 오늘만은 같이 있고 싶다고 하기에 어디 아침을 먹을 만한 곳을 찾으니 이른 시간이어서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하고 그나마도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비행기는 새벽 여섯시에 도착하는 것이어서 짐을 찾아 나온다고 해도 아침 8시전이니 그런 시간엔 음식점에 가서 먹을 만한 곳이 없었다. 그 날 밤도 다시 우리 내외는 갈 곳을 정하지 못하고 몇 번 찾아갔던 모텔로 짐 가방을 끌고 찾아 들었다. 


 딸아이는 아빠한테 밥이라도 따뜻하게 해 드리라고 하지만, 어디 손잡고 들어가서 밥이라도 끓일 수 있는 방 한 칸이 있어야 가능한 얘기가 아니더냐고 기가 막히고 비참해서 주저앉고 싶었다. 


 못난 사람, 어찌 그렇게 못났느냐고 마구 퍼부어 대고 싶었다. 크고 좋은 차, 넓은 평수가 뭐 그리 대단하며, 무엇이든 순서가 있고, 때가 있고, 분수가 있는 것이지, 하루아침에 배가 부를 것이며, 천리길을 100걸음, 200걸음 먼저 갈 수가 있더냐고 따져주고 싶었다. 


 그 밤, 그 다음 아침도 해결할 수 없는,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을 놓고 다시 또 대화도 되지 않는 언쟁을 벌이다가 휑하니 먼저 나가 버리고 말았다. 그 좁고 낯선, 창문도 열 수 없는 모텔 방에서 하루를 지낼 일도 끔찍했고, 커다란 이민 가방을 들고 어디 나설 수도 없었다.


 궁리 끝에, 어차피 남편은 저녁에 숙소를 찾아야하니 그리로 오면 되겠지 싶어 모텔 사무실에 가서 얘기를 했다. 짐을 좀 맡아 줄 수가 있겠느냐고 하니 문단속을 잘하고 가라기에 가방을 넣어둔 채 방문을 잠그고 명함 한 장을 받아들고 그곳을 나왔다. 


 난 친구네로 가서 그 밤을 그곳에서 자기로 하고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가방을 그곳에 두고 나왔다고 하니 순순히 가방을 맡아 주더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했더니 알았다고 하기에 어디서 잘 것이냐고 묻지 않았다. 으레 가방이 있는 그 곳으로 가서 잠을 자겠지 했기에.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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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5
거리의 남자(5)

 

 (지난 호에 이어)
 공항에 도착해서 출발 한 시간 전쯤이니 이쯤에서는 설령 남편이 내가 공항에 있는 것을 안다 해도 날아오지 않고는 올 수 없겠지 얼마만큼 안심을 하고는 친구들한테 전화를 했다. 


 다른 친구들은 물론이고 며칠 전 레미 엄마한테 전화가 왔을 때도 27일날 캐나다 간다는 얘기를 할 수 없었다. 혹시 남편과 통화를 하다가 멋모르고 얘기가 나오면 큰 낭패이지 싶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친구 두 명과 레미 엄마한테 전화를 했으나 아무와도 통화조차 못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딸애한테 전화를 해야 할 것 같아 전화하니 집에 없어 직접 통화는 못하고 메시지만 남겼다. 왠지 탑승 수속을 하면서 내내 불안했다. 누구에겐가 덜미를 잡힐 것 같고, 비행기를 탈 수 없게 끌어내릴 것만 같아 한시가 급하게 비행기를 타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불안에 조마조마하고 있는데 서울에서 토론토까지 가시는 손님 중에 최순희 씨가 있으면 급히 안내실로 와달라는 방송을 하고 있었다. ‘최순’까지 나오는 순간 내 이름인가 싶어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순희라고 하기에 천만다행이라며 종종걸음으로 앞으로 가서 탑승 수속을 하며 비행기까지 타야만 안심할 수가 있을 것 같은 불안에 휩싸였다. 드디어 탑승을 해서 내 좌석을 찾아 앉고서야 휴우 한숨을 내쉬었다. 


 밥은 밖에서 대충 먹는다 해도 밤이면 찾아 들 수 있는 방 한 칸 없이 어디로 갈까 차를 타고 거리거리 방황하고 있을 남편, 이제는 그 독설도, 푸념도, 갈가리 찢어지는 고통도, 외로움도, 털어놓을 수 있는 아내마저 없다는 사실에 얼마나 허망하고, 죽이고 싶도록 미워 치를 떨고 있을까 생각하니 나 또한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어쩌다 우리 내외가 이리되었는지,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어 이리 되었는지, 어디서부터 무엇을 바로 잡아야 모두 제 자리를 잡고 살아갈 수가 있는지 깜깜하기만 하였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다고 애써 변명을 해 본다. 끝까지 방이 아니라 70평짜리 아파트를 외치다가 둘이 같이 내 방이라고 쉬어 들 수 있는 곳이 없어 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내 쉴 곳, 편히 다리 뻗고 잠 잘수 있는 곳으로 날아가는 것이라고. 애써 변명하며 위로를 해봐도 비록 그토록 내게 퍼부어 대던 남편이건만 불쌍해서 가슴이 미어지고 측은해서 가슴 아파해야 했다. 


 의지할 데 없는 젖먹이, 올 데 갈 데 없는 어린애, 가지 말라고 치맛자락 붙들며 울며불며 매달리는 아이를, 매정하게 칼바람 일으키듯 뿌리치는 비정한 에미 같아 가슴은 절절이 녹아내리는 듯 했다. 그러나 이젠 비행기까지 탔으니 어쩔 수 없다며 마음을 편히 가지려 애써 보았다. 


 드디어 앵커리지 국제공항에 도착해서 탑승권을 받아 들고 화장실을 다녀 온 후 면세점을 한 바퀴 돌아오고 있는데 방송을 통해 내 이름이 들려오고 있었다. 순간 겁이 더럭 나서 가서 물어보니 최순자가 맞느냐며 남편이 서울에서 친구와 같이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지금 병원에 있다며 급하게 연락을 해달란다는 것이다.


 다시 또 머리를 무슨 둔기로 맞은 듯 아찔해지며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무슨 일일까? 남편이 술에 만취해서 운전을 하다가 크게 다쳤는지, 혹은 사경을 헤매고 있는지, 더럭더럭 겁은 났지만, 그렇다고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한다는 말이냐며 서울로 전화를 해야 할지, 서울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잠시 머리를 식히며 진정하고 있는 사이 그대로 토론토로 가야할 것 같았다. 내일 다시 서울행 비행기를 타는 한이 있어도 남편이 찾는 전화도 무섭고, 남편이 있는 서울 하늘이 두려워 몸과 마음만이라도 하루라도 쉬고 싶었다. 승무원이 어떻게 할 것이냐며 묻기에 일단은 토론토로 가야겠다고 얘기하고는 대체 무슨 사고가 어떻게 났다는 것인지 나나 남편이 죽을 운을 넘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토론토 공항에 도착하니 두 딸들이 나와 있었다. 서울에서의 상황은 잘 모르고 3주 만에 돌아 온 엄마가 못마땅하기만 한 모양이었다. 우리 삼 모녀는 차안에서 별 얘기 없이 집까지 와서 자초지종을 알 수 있었다. 


 내가 공항에서 집으로 메시지를 남긴 것을 큰 아이가 듣자마자 아빠한테 전화를 해서 남편은 내가 김포공항을 이륙하기 전에 비행기 탑승을 하지 못하도록 전화를 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순자를 순희로 잘못 방송을 하게 되어 그냥 가게 되었다며 앵커리지 국제공항에서도 남편이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을 터인데 어떻게 전화 한 통 없이 갈 수가 있었느냐며 매정하고 무서운 여자라며 치를 떠는 것이었다. 


 남편은 내일이라도 당장 비행기 표가 예약되는 대로 나오라고 성화였지만 다시 또 개 끌려가듯 나간다 해도 소름끼치는 전화 목소리도 무섭고, 대책도 없고, 끝도 보이지 않고, 편히 쉴 수 있는 방 한 칸 없는 서울엔 당분간이라도 가고 싶지 않았다. 


 며칠을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고 자고 또 자고 했다. 그렇게 편하고 깊은 잠은 난생 처음인 듯 너무도 편하고 깊게 잤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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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9
거리의 남자(4)

 

 (지난 호에 이어)
 그렇게 해서 통화를 끝내고 나면 왜 아이들한테 그런 식으로 밖에 얘기를 하지 못하느냐며 전보다 더 심하게 차를 몰다가 지나가는 차가 운전을 못되게 한다며 잘하면 차를 들이박을 듯 하니 그럴 때마다 갖가지 상상을 다하며 앞이 캄캄 아찔아찔해서 숨이 턱턱 막히는 듯 했다. 


 어디인지도 모르고 시내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어느 노래방으로 들어갔다. 남편은 이젠 헤어지는 일만 남은 사람처럼 이별의 노래만을 골라 악을 쓰듯 부르는 노래는 천 길 낭떠러지에서 울부짖는 그런 처절한 통곡의 노래처럼 들렸다. 나보고도 무슨 노래든 하라며 다그치듯 하지만 그런 분위기에서 무슨 노래를 할 것이며, 아무 말도,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고 점점 더 멍청이가 되어 가는 듯 머릿속에서는 아무 생각도 없이 윙윙 소리만 나는 듯 했다. 


 피를 토하듯 한 시간 넘게 노래를 부르다가, 멀거니 앉아 있다가 밖으로 나오니 어디로 들어가서 눕고 싶었다. 그러나 그날따라 가지고 있는 돈도 얼마 없어 숙박료도 모자라 차에서 웅크리고 몇 시간을 잤다. 자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진정이 되는가 싶었다. 이젠 어디든 가서 아침 겸 점심을 먹어야 했다.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 볼 수도 없이 가는 대로 따라서 가며 눈여겨보니 예전에 아이들과 같이 갔던 설렁탕집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곳에 가서 설렁탕을 시켜 놓고는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기에 무엇 때문에 지금 전화를 하느냐며 밥이나 먹거든 전화를 하라고 하는 얘기는 아랑 곳 않는다. 남편이 작은 딸과 통화를 하는 것을 듣고 보니 그 날이 작은 딸 생일이었다. 잊지 않고 있다가 아이들 생각, 예전에 아파트 살 때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이곳으로 온 모양이구나 싶으니 마음은 다시 또 착잡하고 서글프기 이를 데 없었다. 


 남편은 아이에게 선물을 사서 보내 주겠다며 무엇이 좋으냐고 물어보는 모양이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엄마 옆에 있다며 바꿔 주는데 아이들에게 이런 상황, 사정 얘기를 어찌 할 것이며 그냥 잘 지내고 있다며 울먹이기만 했다. 


 아마도 내겐 ‘너 때문에’란 말로 힐책하며 원망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너 때문에 캐나다까지 갔기에 오늘에 이르렀으며, 내게, 아이들에게 무엇 하나 떳떳하고, 넉넉하게 해주지 못하는 자신이 죽고 싶을 만큼 비참했을 것이다. 


 남편은 일정하게 숙소가 없으니 어떤 옷은 작은 고모네, 양복과 속옷, 양말, 와이셔츠는 차에 싣고 다녔다. 나와 같이 숙소에 든 날은 양말과 와이셔츠를 자기 전에 빨거나 엄마네 집으러 가져가서 빨아 오기도 하였다. 남편은 다리미를 차에 갖고 다니며 바지며 와이셔츠는 말끔히 다려 입고 다녔으니 그런 남편이 측은하기보다는 점점 더 정나미가 떨어졌다.

 

 걸음아, 날 살려라


 난 더 이상 친정 올케 눈치보고 싶지도 않고, 견딜 수 없어 비행기 표를 6월 19일자로 예약을 해 놓았으나 그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어 다시 공항에 전화를 했다. 마침 5월 27일자에 자리가 하나 있다기에 예약을 해놓고는 남편한테는 일체 비밀에 붙여놓고 있었다. 


 내 그런 상황에서 비행기를 탄다하면 곱게 보내줄 것 같지 않아 몰래 떠나기로 작정을 하였다. 더 있다가는 나까지 머리가 돌아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두렵기도 하고 하루라도 빨리 남편 곁을 떠나고 싶었다.


 떠나기 전날도 남편이 불러내어 밤에 나가 몇 번 갔던 모텔로 가게 되었다. 그 밤을 거기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 그만 집으로 가고 싶다고 하니 집에 가 봐야 할 일도 없을 터인데 뭐 하러 일찍 가느냐며 강남에 설렁탕 잘하는 집이 있다면서 그리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난 내심 초조했으나 늦어도 오후 3시까지만 집에 도착해도 공항 터미널까지 가는 데는 큰 무리가 없을 것이라며 안심하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났는데도 집으로 가라는 소리가 없고 누구를 만난다며 시내 빌딩 주차장으로 가는 것이었다.


 남편이 자리를 비운 사이 나 배도 아프고 변비가 심해져서 집으로 먼저 들어간다는 메모를 차에 남겨 놓고 핸드폰은 차 뒷좌석에 놓고는 꽁지가 빠져라 택시를 잡아타고 엄마네 집에 도착하니 2시가 다 되어 있었다. 급하게 시장에 들러 몇 가지 필요한 것을 사서 짐을 꾸려 도망치듯 공항 터미널로 향하게 되었다. 


 올 데 갈 데 없는 남편, 정서적으로는 물론이요 정신적으로 좀 이상이 있다 싶은 남편을 그 동안 제대로 잠도, 먹지도 못해 10Kg가까이 빠져 있는 남편, 가지고 있는 돈도 얼마 없어 병원비도 내지 못하고 독촉을 받고 있는 남편을 남겨 두고 가야했다. 


 나만 살겠다는 것이었는지, 아이들이라도 내가 살려야겠다는 것이었는지, 남편은 죽든 살든 이젠 내 영역 권에서는 벗어났다는 것인지, 아니, 그런 무능하고, 바보스럽고, 행패나 부리는 남편은 이제 내 남편도 아니요 난 더 이상 그의 곁에 있을 수 없어 떠나는 것이라고 애써 변명을 해 봤다. 


 더 이상 같이 있다가는 나까지 병원으로 실려 가야만 할 것 같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행여 남편이 귀신처럼 낚아채기라도 할까봐 도망치듯 공항까지 갈 수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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