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파란 하늘 아래 하얀 캔버스 천으로 만든 여러 폭의 돛이 펄럭이는 갑판 위에서 맛있는 해물 스파게티 요리를 먹었다. 가을의 요정인 노란빛, 자줏빛 쑥부쟁이 꽃들이 작은 화분에 담뿍 담겨 있었고.
이곳은 크루즈의 갑판 식당이 아니라, 버라드 부둣가에 있는 밴쿠버 팬 패시픽 호텔 테라스인데 마치 돛단배에 타고 있는 것 같았다.
지난 9월 우리 부부가 굳이 이 호텔에 간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윤치호 선생님이 한국인 최초로 1893년 10월 14일 캐나다 밴쿠버에 도착하여 묵었다는 그랜빌 호텔을 찾아보기 위해서. 또 하나는 십여 년 전에 큰아들네와 딸네 식구와 함께 밴쿠버를 방문하던 날, 이 호텔 로비에 우뚝 서 있던 웅장한 토템폴 사진을 선명하게 다시 찍으러 오리라 마음먹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본 토템폴은 지금도 아래층 홀에서 4층까지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옆으로 천장까지 높이 솟아 있다. 분홍빛 나는 대리석 바닥엔 수잔 포인트가 도안한 ‘달님의 여행’이라는 조각작품이 둥글게 조각되어 있고. 그 원형 한 가운데 또 하나의 작은 보름달이 그려져 있다. 갈가마귀 머리와 입부리 모양의 네 마리 고래가 꼬리와 등지느러미를 그 작은 보름달을 향해 늘어뜨리고 그 둘레를 춤 추며 여행하고 있다. 마치 사람들이 장삼 소매를 들어 올리며 보름달 주위를 맴도는 강강수월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120년 전에 윤치호 선생님이 묵었던 그랜빌호텔은 지금의 밴쿠버 호텔일 가능성이 높지만, 배러드 간척지역과 스탠리공원에 인접해 있는 이 팬 패시픽 호텔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찾아간 것이다.
바다곰과 수달과 고래를 단풍나무에 조각해 넣은 이 토템상은 원래 북미 인디언들이 집 앞이나 동구 밖에 수호신처럼 세워놓았던 것이다. 키가 큰 토템상 받침틀엔 작은 토템들이 키 큰 토템들을 보호하려는 듯 독수리과의 비버와 개구리상과 험한 돌고래상이 양 옆에 지키고 서 있다.
키 큰 토템상은 1900년경에 Yakuglas가 조각해서 스탠리 공원에 기증한 것을 그 후 1987년에 이 호텔이 사들였다. 위로 높이 올라갈수록 바다 생물의 모습을 인간의 얼굴로 아이러니하게 표현한 것을 보면, 하위동물 세계에서 인류애라는 숭고한 경지에 이르고 싶은 기원이 담긴 듯하다.
호텔과 아주 가까이 있는 스탠리공원의 토템 폴들은 조금 다르다. 그들은 대부분이 사람 얼굴에 독수리 날개를 달거나, 원주민들이 좋아하는 4방위로 팔을 뻗치고 서 있다.
해안가에 사는 북미 인디언들이 해상무역을 하게 되고 돈을 벌어들이면서 그들의 배와 남편들이 무사히 귀가하기를 기원하려고 1900년대부터 집 앞에 토템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독교 국가인 영국과 미국이 우상이며 미신이라고 박대하자, 기묘하게 예술조각품으로 전환했다. 무역이나 왕래가 없던 시대에, 태평양을 가로질러 사는 동양사람들의 풍습과 마음이 같았다는 것은 집단 무의식의 재미있는 현상이다.
우리나라에도 예부터 동네마다 집 앞이나 동구 밖에 남녀장승이 짝을 이루어 서 있었다. 마을의 안전을 기원하고 악귀를 막으려는 것이 먼 북미 인디언의 풍습을 닮았다. 기독교의 전파로 개명세계가 되었지만, 마음 속에 도사린 인간본능의 기원은 같은가 보다.
캐나다로 이주한 김의생 조각가는 2003년에 해밀턴에서 서양의 토템 폴과 비슷한 장승들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그의 작업장인 에버그린 장승공원이 문을 여는 날 토론토에서 하태윤 총영사를 비롯해 조각가, 화가 등 관심 있는 이들이 많이 참여해서 민속축제 한마당이 벌어졌다. 하 총영사의 권유로 나도 작품으로 완성된 장승의 입에 축배를 올렸다.
한국의 장승은 캐나다의 토템상처럼 희극적인 얼굴을 하고 있는 점은 같은데, 장대 위에 새나 오리 조각품을 올려놓은 솟대는 한국이 더 많다. 장승 위에 혹은 장대 위의 새나 오리는 하늘과 가장 가까이 날아갈 수도 있고 땅으로 내려 앉을 수도 있는 영물로, 말하자면 우리들의 기원을 하늘과 땅 어느 곳에나 전달해 주는 메신저 역할을 상징한다.
고조선시대에 소도(蘇塗)라고 하는 성역(聖域)에서 신에 대한 제사가 비롯되었다고 한다.(구포 출신의 민속학자 손진태의 <조선민족문화의 연구> 중 ‘소도고(蘇塗考)=솟대고’에서) 소도(蘇塗)신앙, 즉 솟대 신앙은 하느님(神=天神)과 태양숭배, 수목숭배, 조류 숭배 사상이다. 그 신앙은 법이나 정치 같은 것이 없었던 그 당시에 정신적 중심체가 되어 사회질서의 안녕과 유지에 큰 몫을 하며 역사적 사회적으로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솟대 사상은 오히려 근대에 와서 샤머니즘으로 몰렸다가 민간신앙으로, 그리고 다시 예술로 승화시키고 있는 셈이다.
토론토한인회관 앞에는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다정하게 서 있기에, 토론토 한국총영사관 앞에도 한국 민속문화의 상징으로 장승이나 솟대를 세우면 어떤가 건의한 적이 있으나 귀를 기울이는 이가 없다.
그런데 개인의 정원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한상훈 회장 댁 정원뿐이었다. 귀신도 웃길 만큼 재미있게 조각한 김의생 작품인 장승 한 쌍이 넓은 숲속에서 밤에도 자지 않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지켜주리라.
토론토 숲속의 장승들과 스탠리 공원에 모여 서 있는 토템 폴들도 밤이면 바다에서 들려오는 파도소리와 바람소리를 반주로, 세상 모든 주인의 주님을 찾는 헨델의 ‘할렐루야!’ 합창곡을 들려줄 것만 같다.
“예수는 만왕의 왕~, 모든 주인의 주님~”(디모데 전서6:15)하면서.
윤치호 선생님도 그 당시 6년 밖에 안된 아름다운 신흥 항구도시 밴쿠버를 떠나는 Empress India 여객선의 갑판 위에서, 스탠리 공원의 토템 폴들이 부르는 그 합창소리를 들으셨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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