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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13)

 

테라디요스-엘 부르고 라네로(18일차/24 km)
미소가 고왔던 알베르게 주인장들

 

 

 

 


 불현듯 잠에서 깨어 시계를 보니 새벽 다섯 시다. 산뜻한 기분에 비해 온몸이 묵직하다. 십 여명의 사람들이 깊은 잠에 빠진 시간, 일출을 기다리며 뒤척였다. 이를 눈치 챈 남편이 짐 챙겨 나가자는 신호를 보내왔다.


 숙소를 벗어나니 거센 바람을 동반한 매서운 날씨가 맹공해 왔다. 차라리 자리 보전하며 기다리는 편이 좋았을 걸 하는, 때늦은 후회가 치밀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어이 없는 웃음이 또 웬일인가. 큼직한 배낭을 맨 남녀가 희뿌연 달빛을 받으며 황급히 걸어가는 야반도주자 행색이 말초신경을 자극했음 이리라. 


 판쵸 우의로 바람과 추위를 가려가며 신 새벽 산악 길을 제법 걸었다. 동녘 하늘을 빨갛게 물들이며 여명이 밝아오자 앞서 걷는 사람들이 띄엄띄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둠과 추위를 가르며 의지를 불태운 그들의 뒷모습이 처연하면서도 동료애가 느껴져 위안이 되었다. 


 잔뜩 껴입은 옷가지를 한 겹 두 겹 벗어가며 상쾌한 행보를 이어갈 즈음, 같은 숙소에 유숙했던 사람들이 교차로 부근에서 갑자기 나타났다. 반가워하는 우리와 달리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은 길을 재촉해 갔다. 


나는 그들이 가고 있는 곧게 뻗은 차도와 끝을 알 수 없는 꼬불꼬불한 산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순례가 끝나는 날 환하게 웃을 수 있는 길, 노란 화살표 따라 산길로 접어 들었다. 


 모라레스 마을을 지나 사하군 도심으로 들어서자 갑자기 허기가 밀려왔다. 새벽 길 나서느라 아침을 간식으로 때웠더니 온 몸이 반란을 일으켰다. 급한 대로 마켓에서 샌드위치를 구입하여 위기는 넘겼으나 피곤함은 점점 더 가중되어 일정을 단축해야만 했다. 앞으론 체력에 각별히 신경을 쓰면서 일정을 짜야 할 것 같았다. 


 '엘 부르고 라네로' 마을의 공립 알베르게에서 둥지를 틀었다. 삼 십 여명의 순례자들이 식당에 모여 다채로운 저녁 시간을 가졌다. 돌아가면서 자기 소개와 길 위에서 느낀 소감을 풀어놓기도 하고 기타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정성 어린 식사는 물론 진심을 다해 순례객들을 보살펴 주던, 시카고 카톨릭 교단에서 파견 나온 미셜 님과 스페인 교구 소속 요셉 님의 헌신적인 봉사는 내내 여운으로 남아 험한 길 넘는데 힘이 되었다.

 

 

엘 부르고 라네로-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19일차 / 28 km)
거센 자연에 맞서다.

 

 

 

 


 엊저녁 함께 한 멤버들이 간헐적으로 모여 커피와 토스트로 아침을 해결하고 다시 그들의 세상으로 나아갔다. 빽빽하게 채워졌던 숙소가 헐거워지며 뒤쳐진 우리도 짐을 꾸려 나섰다. 짬짬이 일손을 도우면서 서로 정이 든 미셜과 요셉의 표정이 못내 섭섭해 하는 눈치다. 헤어짐이 아쉬운 모두의 마음을 담아 기념 촬영을 한 다음 어려운 발길을 돌렸다. 


 우중충한 하늘이 내내 위협적이더니 얼마 못 가서 비바람이 몰아쳤다. 오늘은 비교적 완만한 코스라 안심했는데 시작부터 노란 불이 깜박거렸다. 다행히 근 거리의 터널로 까미노가 이어져 비도 피할 겸 쉬어가기로 했다. 


터널 벽면 빼곡히 씌어진 각국의 응원 메시지가 일어나라 외치건만 몰려오는 졸음에 눈 앞이 가물거렸다. 배낭에 기대어 잠깐 졸고나니 몸이 한결 가벼워 큰 무리 없이 다음 일정을 소화해 낼 수 있었다. 


 오전 내내 우박까지 동반한 악천후를 견디며 조그만 마을 레리에고스에 닿았다. 동네가 좀 노후 되긴 해도 주민들의 왕래가 눈에 띄어 여간 반갑지 않았다. 한 주민에게 레스토랑 위치를 물었더니 까마득하게 보이는 7km 전방의 만시야를 가리켰다. 


일요일이라 동네 마켓도 철시한 상태여서 어렵지만 선 걸음에 이동 할 수 밖에 없었다. 비척거리며 마을 길을 내려가다 보니, 아까 그 주민이 오렌지 바구니를 우리에게 내밀었다. 사람 사는 동네, 나눔의 향기가 오렌지 향기보다 더 싱그러웠다.


 갖은 고초 끝에 육중한 돌 성곽이 이채로운 만시야에 도착했다. 한차례 거센 폭우가 지나간 도심은, 고풍스러움에 깔끔함을 더한 격조 있는 분위기로 생쥐 꼴이 된 순례자를 주눅들게 했다. 건축물이며 분위기가 중세에 머문 듯한 뒷골목에 숙소를 정하고 샤워와 빨래 등 장대비 뒷설거지로 한참을 동동거렸다. 


 사람들의 훈기가 그득한 바에서 늦은 점심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따끈한 난롯가에 앉아서 온종일 비에 젖어 고생한 마음을 무한정 말렸다. 매일매일 새로운 기록에 도전하는 나날들, 내일은 또 어떤 기록에 도전하게 될지 새삼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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