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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가장 용기있는 결정, Oh! 캐나다 -“바다를 건널 수 있는 자는, 용감한 사람이다”

      

 

 

 

(지난 호에 이어)
그리고 우리 가족 모두는 당신을 사랑하고 존중합니다. 조금은 쑥스럽지만 그래도 글로써 하는 것이니 훨씬 나은 듯 합니다. 사실상 캐나다에 도착한 이래로 잠시도 쉬지 않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해 오직 가족과 가정의 안정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해 왔기에, 우리 가족은 각자 맡은 바 자기 역할을 보다 성실하게 수행 할 수 있었다 생각되오. 실제로 당신이 보여준 헌신과 낮은 자세는, 본인에게도 어떠한 궂은 일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었고 또 헤쳐나갈 수 있는 자신감으로 승화된 듯 하오. 때문에 조금은 무모한 듯 끊임없이 일하고 도전했던 모습은 아이들 한데도 영향을 끼쳐, 스스로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무언의 암시로 전해진 듯하오. 여하튼 오늘이 있기까지의 모든 긍정적 메시지 전달의 근저에는, 변함없는 당신의 희생이 따랐기에 가능한 것이었소. 가장으로서 다시 한번 감사의 말과 함께 가족 모두를 대표해 당신께 사랑한단 말 전하오.” 


이 글을 접하는 장래 이민 예비 후보자님들! 조금 낯뜨겁고 부끄러운 개인적 고백을 양해해 주시고, 향후 캐나다 이민 생활을 어떻게 임해야 할 것인가, 가족 간에는 어떤 마음의 자세와 소통이 소중하며, 무엇이 서로를 지탱해 주는 본질적 요소인가를 생각하는데 작은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5. 과연 믿을까? “2자녀 대학 졸업까지 ‘교육비 제로’”


사실상 캐나다건 한국이건 자녀들이 대학을 졸업하려면, 많은 비용이 소요됨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닌 둘씩이나 졸업시켜야 한다면 얼마를 벌어야 감당할 수 있나 지레 겁먹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본인이 살고 있는 온타리오 주는 “오삽”(OSAP: Ontario Student Assistance program)이란 학자금 대출 제도가 있어, 부모에게 부담 주지 않고 졸업 후, 취업하여 본인이 갚아나가는 것이 일반적 현실이다. 


캐나다로 이민 온, 이민 1세대로서, 처음엔 어떻게 하면 중-고교 학업을 마치고 대학에 진학할 수 있을까를 걱정하던 단계에서 대학4년 전액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그 수혜 자격을 졸업할 때까지 지킬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공부에 큰 애착을 보여주지 않았던 아들의 경우도 결국 사관학교를 선택했지만, 워털루 공대를 주장하던 아내와는 이견이 있기도 했다. 또한 어떤 이들은 정보 부족으로 사관학교 제도 자체를 잘 모르는 경우와 그런데 응시를 하더라도 꼼꼼한 선발 과정을 미리 대비하지 않고는 쉽게 통과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또 막상 입교가 되었다 해도 엄격한 규칙과 군사 훈련에 대한 부적응 또는 학과 점수 미달로 탈락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이다. 다행히 아들은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고 무사히 졸업과 임관을 거쳐, 현재 전자 장비를 탑재한 군수 운송 장비를 유지 보수하는 장교로 근무 중이다.


그래서 재학 중 당연히 학비는 면제일 뿐만 아니라, 되레 봉급을 받으면서 학위와 직업을 동시에 취득한 셈이다. 딸의 경우 대학 선택시 오타와 대학 4년 전액 장학금 결정을 한 것은 평생을 좌우한 솔로몬의 지혜 같은 것이었다.


만일 명성을 따라 일년 장학금만 받고 맥길을 택했다면 일차적으로 ‘교육비 제로’란 명제는 불가능 했을 것이며, 또한 캐나다 전국에서 모인 우수한 인재들과 경합하며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와 부담감을 갖고 학교 생활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또한 장래 도전할지 모르는 로스쿨 등을 감안하면, 학부 성적은 늘 상위권에 있어야만 입학도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생각이 깊은 합리적 결정이 중요한 것이다.


한가지 유의해야 할 것은 캐나다도 요즘 변호사 공급 과잉이란 사실이다. 이렇듯 모두가 빠르게 변하니 정보와 추세를 감안해서 진로 선택도 해야 하는 듯 하다. 어쩌면 아이들은 시행착오를 최소화 하면서 각자의 꿈을 일궈낸 듯 하다.


언제 이런 날이 오리라고 상상이나 했던가? 꿈에나 가능하리라 생각하던 일이 현실로 다가왔고 그로 인해 난 너무도 감사하다는 말로 대신한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고 살기 좋은 나라가 캐나다라고 서슴지 않고 말하고 싶다.


초기 이민 생활의 고난과 어려움은 오히려 우리 가족에게 선물이었던 것이다. 즉 고통은 초기, 우리를 힘들게 하였지만 이를 인내하는 동안 어느 듯 용기와 자신감으로 승화된 듯 희망을 불어넣어준 것이다.


그 얼마나 벅찬 순간이었던지 가슴 뭉클하고 감동에 젖었던 순간들이 새록새록 기억에 새롭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정말 그랬었나 싶을 정도로 세월이 빠르게 흘러갔고 이젠 잘 믿기지 않는 옛 추억이 돼버렸다.

 

제2절 캐나다를 선진국이라 하는 이유

 

1. 평등을 지향하는 수평사회 - 고매한 인간미 


누가 나를 꼭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고, 현재 자신의 사회적 신분이 높거나 과거에 높았다 하더라도 깍듯한 대접이나 특별한 예우를 바라지 않는 사회, 반대로 다소 평범한 삶을 살아왔다 하더라도 지극히 동등한 인격체로 자연스레 서로를 대하는 사회가 이곳 캐나다가 아닐까 생각된다.


새삼 이민자의 입장에서, 소위 사회 지도층이란 사람들과의 우연한 만남에서 그들의 몸에 밴 행동을 소개하는 바이다. 이민 초기, 다운타운에서 가게를 운영할 당시,같은 빌딩의 로펌 대표가 보여 주었던 너무도 인간적이고 겸손한 태도에 깊은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그는 사무실에 일을 돕는 2명의 비서가 있음에도 직접 세탁물을 들고 내려와서 본인이 찾아가는 순수한 모습을 보여 주었고 언제나 웃음 띤 인자한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또 다른 사례는 건물내 치과에 치료를 받으러 온 손님으로서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 가게로 들렀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우연히 그 분의 직업을 알게 되었는데 그저 인상 좋고 기품 있는 부인이 아니라 온타리오주 고등법원의 현직 판사였다는 사실에 놀랐던 경험도 감명을 받기 충분하였다.


대부분 고압적 태도와 권위로 일관하는 것이 일반적인 한국의 전문직 법률가들의 모습인데 반해, 이곳 캐나다에서는 전혀 다른 평범한 모습으로 다가와 서민적 감성을 불러 일으켜준 이색적 경험이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가장 극적이었던 것은 캐나다 현직 외무 장관과의 만남이었다. 어느 주말 오후, 시큐리티 근무 중 VIP의 방문이 있을 것이란 정보가 있었고, 마침 그 분이 도착했을 때 본인은 무의식적으로 거수 경례로 인사하며 아주 정중히 맞이 했는데, 그것은 군시절에 단련된 반사적 행동이었지 싶다.


그런데 VIP 도착 후 몇 시간이 지난 시점, 모임 후 기분이 아주 좋았던지, 여하튼 행사가 끝나고 건물을 나서기 전, VIP가 내게로 다가와 경례를 하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서 만류하며 맞이 했는데, 출신국이 어딘지, 언제 캐나다에 왔는지 등을 물었다. 


 2년 전에 한국에서 이민 왔다고 하니, 본인도 한국을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다며 더욱 반기며 친근하게 대해 주었던 것이다. 기억을 더듬으며 그분에 대한 기록을 검색해 보니, 2004년부터 3년간 캐나다 외무장관으로 재직했던 것이다.

 

방문 당시, 현직 외무장관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절로 고개가 숙여지며 따스한 존경심이 일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 숙인다는 격언을 비로소 캐나다에 이민 와 실생활 중에 경험한 바가 되었고, 또한 직위가 높을수록 오히려 군림하기보다는 평등을 실천하는 것 같아 인상적이었다.


한국에서 이민 와 캐나다에 살고 있는 나 자신을 되돌아 보니 시민을 배려하는 좋은 나라에 살고 있다는 마음이 들었다.

 

2. 국방부내 카페에서 장군도 사병도 똑같이 line-up


시큐리티 업무에 종사한지 3년 만에, 일반 시큐리티 업체에서 연방정부 청사의 안전을 주로 담당하는 ‘커미셔너’(Commissionaire, Ottawa)로 새 직장을 얻었다.


상당히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어 감사했고, 특히 직장 의료 혜택으로 전 가족이 첫 치과 진료를 받았을 때의 감동은 여전히 가슴 벅찬 기억으로 남아있다.


여하튼 이민 초기시절에 캐나다 군복무를 마친 예비역들을 중심으로 이뤄진, “커미셔너”에 입사 후, 연방정부의 각기 다른 부서의 청사에 근무한 적도 있지만 특히 국방부(National Defence)에 배속되어, 다운타운에 있는 본부 청사에서 근무할 때다.


오전 근무 후, 아내가 싸준 김밥으로 간단히 점심을 마치고 커피를 사러 카페에 들렀다. 청사 내에 있는 대형 카페에는 국방부에 근무하는 수 많은 현역 군인과 군무원이 진열대에서 물건을 골라 직접 계산하기도 하고, 어떤 품목은 줄을 서서 기다렸다 지불하는 방식이었다.


본인도 별 생각 없이 군인들과 군무원들 사이에서 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한국의 전방 부대에서 군생활을 경험한 본인의 입장에서 아주 놀라웠던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즉 병사들과 함께 조용히 한 줄로 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메이플 2개(소장) 현역 장성이 그들 틈에 서있었던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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