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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kang39

    강신봉 칼럼

    캐나다 加人 강신봉
    전 캐나다한인총연합회장, 전 토론토한인회장, 요크한국인학교 설립교장, 김치캐나다사장, 전 스코필드박사동상건립위원장,전 무궁화사랑모임창립회장, 토론토흥사단창립지부장, 대한민국국민훈장목련장, 역사문화원장

    캐나다 문협회원.현 GTA한카노인대학장
    http://skang3441.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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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운(國運)은 하향길인가?(7)

 

 (7)국가의 리더십이 흔들리니 주변국들에 무시당해


 최순실 사건으로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하고 감방에 가두고 나니 속이 시원하다 할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이 얼마나 망가져 가는가를 계산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집안싸움, 이념싸움, 당파싸움으로 나라꼴이 엉망이 된 예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렇지만 임금을 쫓아내고, 위리안치 하고, 감방에 가두는 경우는 흔치 않은 경우였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러한 일을 밥먹듯이 해버린다. 민주주의를 하는 정부가 들어서서도 그러했다. 온전히 임기를 마치거나 제명에 생애를 마치거나 감방신세를 면한 대통령은 많지 않았다. 그런 스타일로 이번에는 박근혜 대통령을 단숨에 해치웠다. 그리고 벼락치기 대통령 선거를 하여 문재인을 대통령으로 뽑았다. 우파 정권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좌파 정권이 세력을 잡았다. 


 국내에서 정권이 바뀌는 것은 다반사이지만 그로 인해 국제적인 무대에서 일어나는 문제점은 무엇이며 그로 인한 미래의 방향은 어떻게 될 것인가? 또 손익계산서는 어떻게 달라지는가? 이번에 우에서 좌로 바뀌면서는 왠지 다소의 불길한 예감이 떠오른다. 왜냐하면 강대국 외세들의 움직임이 종전처럼 예사롭지가 않기 때문이다. 


 한반도에 갈라져있는 남북한 두 나라를 놓고 강대국들이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양상을 벌이고 있다. 미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과 소련이 패거리를 이루고 한반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를 넘실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정권교체에만 두 눈을 부릅뜨고, 외세 일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조선조 말엽,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135년 전, 1882년 임오군란에서 부터 1910년 한일병합에 이르기까지 28년간의 역사과정을 되새겨 보면 오늘날의 진행과정과 많은 유사성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가 이미 자의권(自意權)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에 우리의 역사는 마치 방향타 잃은 망망대해의 돛단배 같이, 아무렇게나 흔들리고 있었다. 국가의 리더십이 무너져서 마구 흔들리니 주변 강대국들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이리떼 모양 달려들어 조선을 뜯어 먹으려 했던 것이다. 


 오백년 당파정치가 썩을 대로 썩어 있었고, 드디어 시아비 대원군과 며느리 민비가 한 집안에서 싸움을 하느라 외세를 끌어 들였다. 중국과 일본세력이 들어와 한참동안 옥신각신 줄다리기를 하면서 우리의 국권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버렸다. 


 결과는 깩소리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일본에게 나라를 넘겨준 것이다. 나라를 운영하는 국권의 리더십이 무너지면 국가의 종말은 그렇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절실히 경험하였다. 차제에 500년의 조선조가 무너지는 그 과정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공부를 한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1982년 임오군란: 시대의 사조에 따라 일본의 신식 군대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일본군을 끌어 들였다. 그 때에 나라의 재정이 거의 거덜이 나있었다. 군인들에게 쌀배급을 주는데 일본식 군에게는 후대하였고 구식군에게는 배급량이 모자라니 모래를 섞어서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구식군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시아버지 대원군과 며느리 민비의 싸움 틈바구니에서 아들 고종 임금은 국가의 리더십을 상실하였다. 폭동이 일어나니 이를 진압해야 한다고 이번에는 청국군을 끌어 들였다. 서울에서 일본군과 청국군이 팽팽하게 맞서다가 일본군이 피해를 입었다. 조선정부는 그 피해액을 보상이나 해주는 멍청이가 되어 있었으니 그것이 소위 “한성조약”이다.


 1884년 갑오경장: 일본의 신식 정부, 신식제도를 받아들이자 하여 고종은 김홍집 내각을 수립하였다. 청국군의 힘을 업은 대원군 세력이 갑자기 들이 닥쳤다. 3일만에 신식 내각의 대신들은 일본군의 호위를 받아 일본으로 줄행랑을 쳐야 했다. 김홍집, 김옥균, 서재필 등의 3일천하였다. 조선의 국권이 방향을 잃고 휘청 대기 시작하였다. 


 1893–1894년 동학란: 열강의 각축전이 한창인 그 때에 민생이 어렵고 관리들의 민폐가 극심해지니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충북 음성에서 최제우 최시형, 그리고 전주에서는 전봉준의 농민군이 일어나 불같이 번져갔다. 오랑캐 외세를 몰아내고, 탐관오리(貪官汚吏)를 척결하며 민생을 살피라고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나라는 이미 평정 능력을 상실하였다. 민란을 평정해야 한다는 빌미로 민비는 청국군을 불러들였다. 청군이 몰려오니 이에 힘의 균형을 잡자고 일본군도 증원해 왔다. 조정과 백성들이 모두 방향감각을 잃었고, 평정보다는 외세만 나날이 거세졌다. 조선조는 청군과 왜군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공기돌과 같았다. 


 1894년 청일전쟁: 조선 쟁탈전을 놓고, 드디어 일본과 청국간에 전쟁이 발발하였다. 두 나라의 전쟁이 한반도에서 불이 붙어 만주와 타이완으로 까지 확대 되었다. 한반도는 이때부터 외세의 화약고요, 사격장이 되었다.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이 났고 청일간에 “톈진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선은 일본의 수중에서 겨우 목숨만 헐떡이고 있는 신세였다. 


 1895년 명성황후 암살: 당시 조선은 완전히 일본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 청일전쟁 이후, 민비는 프랑스 러시아 독일의 압력에 의해, 일본이 청일전쟁의 전리품 요동반도를 청에게 다시 토해내는 것을 보고, 이번에는 러시아를 통해 일본세력을 조선에서 몰아내려 했다. 그러자 1895년 7월, 왕후를 암살할 계획이 친일파 박영효에 의해 꾸며졌다. 하지만 박영효의 조력자 유길준이 이를 임금에게 밀고하고 이를 알아챈 박영효는 일본군의 호위를 받아 도주하였다. 


 다음의 음모는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의 일당에 의해 꾸며졌다. “명성황후의 죽음은 불만을 품은 조선 군인들이 한 짓이다”로 가장하고 황후를 죽인다는 음모이었다. 일본이 살인행위에서 발뺌을 하려한 것이다. 8월 20일, 살해 작전은 결행되었다. 왕후의 목은 낭인 오카모도 류노스케의 칼에 의해 잘리었다. 죽은 시신에 석유를 뿌려 불에 태웠다.


 세계 어느 역사에도 없는 왕후의 비참한 살해는 일본의 무도한 잔학성을 말해 준 것이다. 우리 민족이 일본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피의 역사였다. 이 때 명성왕후의 나이는 44세였다.


 1896년 아관파천: 명성황후를 잃은 고종의 마음은 허공에 떴다. 공포와 허무를 느낀 고종은 2월 11일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을 하여 생명의 위협을 피한 것이다. 일년 후, 1897년 2월 20일, 덕수궁으로 이전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하였지만 아무런 힘이 없는 껍데기 제국이 아니었던가? 이후 일본 정부는 조선과 러시아가 밀착하는 것을 경계하였으며 이는 드디어 러일전쟁으로 번진 것이다.


 1897년 독립문 건립: 조선시대에 명나라의 사신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서울 서대문 근처에 영은문(迎恩門)을 세우고, 가까이에는 사신을 맞이하는 모화관(慕華館)을 건립하였다. 영은은 은혜로운 대국의 사신을 맞이한다는 뜻이고 모화는 중국을 흠모한다는 뜻이다. 


 일본이 조선을 손아귀에 넣었으니, 더 이상 중국에게 조공을 바칠 이유가 없고 청나라의 책봉 체제에서 독립을 하게 되었다며 영은문이 독립문(獨立門)이란 이름으로 탈바꿈한다. 영은문을 헐어 버리고 1897년에 완공하였다. 


 서재필 등이 주창하여 영은문이 독립문으로 변모하였지만 과연 조선이 독립문을 세운 뜻대로 독립을 유지하였는가? 이후 조선은 일본국 병탄의 길로 걸어갔으니 독립이란 말은 거짓이었고, 어쩌면 영은문보다 더 나쁜 이미지가 들어있는 것이 독립문 아닌가? (2017.05.18)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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