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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을 먹으며

 

오늘이 까치까치 설날이란다. 그렇다면 나는 한국나이로 80살이다. 생일이 12월이니 서양 나이로는 78세인데 2살 차이는 억울하다. 어쨌거나 “해가 바뀌니 세월을 먹는다”라는 말이 실감으로 와 닿는다. 


 ‘세월’은 날의 흐름이요, ‘시간’도 때의 길이요, ‘역사’란 지나간 날에 일어난 자취인데 이들이 추상적 인식이 아니라 구체적 사실(수치)로 새삼 피부로 느껴진다는 건 달가운 증상은 아닌 듯하나 세월(나이)이 제 먼저 알고 내 심신을 앞지르니 어이 하겠는가?


무한으로 보면 일생이란 순간이지만 엄밀히 말해 무한도 시간이요 순간도 시간이다. 무한이 끝이 없는 시간이라면 순간 또한 시작과 끝이 맞물려 있는 찰나의 시간이다. 이들은 출발도 도착도 없는 ‘0’ 개념과 닮아 있다. 무한도 순간도 시간적 수치에서 벗어나 있다는 뜻이다.


분명 시작이 있다면 끝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렇다면 시작 이전은 무엇이며 끝난 그 다음은 무엇인가? 시작 전이 그리고 끝의 후가 궁금하지 않은가? 시작과 끝이 전부가 아니라 영원 속의 부분이요, 순간의 연속적 무한과정으로 보면 끝은 언제나 시작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무한에 1을 더해도 무한은 증가하지 않는다. 무한도 수이고 모든 수는 우수 아니면 기수 이나 무한에 1을 가하여도 본질엔 변함이 없다.” 라는 재미난 말을 헸다. 이 말은 무한은 수의 집합이긴 하지만 수에 지배 받지는 않는다는 말이 된다.


내가 태어나서 죽는 사이의 일생이라는 시간, 분명히 출발과 도착이라는 토막시간이 있고, 일생이라는 나이 먹는 세월과 어떻게 살았는가의 자취(역사)가 있다. 나 개체에 한정된 시작과 끝이 분명한, 그것이 비록 찰나적일지라도 영원과정 속에서의 흔적으로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역사적일 수 있는 일회적인 이 사건이 나 이전의 사건들과 나 이후의 사건들 사이에 얽혀 이어지는 새끼줄 같은 영원한 길이의 꼬임(얽힘)에 참여 된 지푸라기 한 오라기로서의 역할은 인정된다 해도, 우수도 기수도 되지 못하는 무한시간에 함몰된 독립된 나의 존재는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렇다 해도 개체로서의 나의 존재는 영원 속에 함몰이 아니라 구체적 존재로 분명히 있었다 함으로 보면 의미는 달라진다.


무한에서 찰나(순간)는 없음에 가까우나 분명 ‘0’보다는 큰 있음이다. 그러기에 ‘점(點)’의 연결이 ‘선(線)’이고, ‘선’을 모으면 ‘면(面)’이 되고 ‘면’을 쌓으면 ‘부피’가 되듯 티끌 모와 태산이요, 천리 길도 한걸음부터이며, 가랑비에 옷이 젖는 작음의 위대함이라 할까, 물질에서 가장 작은 원자운동구조는 우주운동구조와 닮아있다고 한다. 원자가 바로 우주이고 작음이 바로 큼이 아닌가.


비록 짧은 찰나를 살다 갈지라도 나의 생애가 결코 헛되고 헛된 허무가 아니란 뜻이다. 


석가, 예수, 공자, 소크라테스 그리고 우리의 세종대왕은 선사 이전의 신화적 추상의 인물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으로 유한 시간을 살다 간 구체적 역사시대의 인물이었으나 무한을 체험한 큼의 가치에서 작음의 귀한 가치를 아셨기에 석가는 비록 하잘것없는 미물의 생명일지라도 살생을 금하셨고, 예수는 눌리고 병들고 힘 없는 자를 긍휼이 여기셨으며, 공자는 하늘을 논하기 전에 땅에 관심을 두셨으며, 소크라테스는 남을 보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셨고, 우리의 세종대왕은 씨알백성을 고루 어여삐 여기신, 작음의 가치에서 영원을 보신 분이시다. 한글창시는 사대부의 글이 아니라 씨알 백성을 위한 하늘마음의 글이다.


그렇게 영원을 본 성현들은 작음의 가치에서 큼의 가치를, 큼의 가치에서 작음의 가치를 보셨다는 말인데, 그런데 나는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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