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
ON
  • knyoon

    윤경남의 기획 연재

    국제펜클럽본부회원, 한국번역문학가협회 회원 /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 <윤치호 영문일기> 번역 외에 <좌옹 윤치호 평전> 2018년에 편저 간행
    죠반니노 과레스끼의 <23인 클럽> 명예회원

    • 1
    •  
    • 19,037
    전체 글 목록

나의 비밀일기(20)

 

 

 

 

 

 

 

죠반니노 과레스끼 지음 / 유니스 윤경남 옮김

 

 

 

 

마을로 돌아와서 흠뻑 젖은 들판을 갈퀴질 하고 있는 키 작은 사나이와 이야기에 취한다. 전쟁 때 그는 프랑스에서 복무했고, 포로들이 묻혀있는 땅을 형편없는 불어로 가르쳐주더니 프랑스산 시가 담배를 달라고 청한다. 


나는 이탈리아산 보통 담배밖에 없어서 그것을 반 갑 주었더니, 자기가 피워본 프랑스 담배보다 좋지 않을 것이 뻔하다며 담배를 받았다.


“가다가 차 바퀴가 빠져버리겠어요. 우리 모두 빠져서 꼼짝 못하게 될 거에요.” 


알베르띠노는     앞쪽에 바퀴자국이 나있고 진흙탕이 된 길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가다가 차 바퀴가 빠지겠어요. 우리는 빠져서 꼼짝 못하게 될 거에요.” 알베르띠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나는 이 근방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래가 밀려서 진흙처럼 보이지만, 신발이나 바퀴에 달라붙진 않는다. 왜냐하면 그 흙은 반죽이 되자마자 부숴져 버리기 때문이다. 침묵과 울적함이 주위에 감돈다. 


커다란 얼룩 암소가 적대감이 깃든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암소는 볼품없이 큰 머리통과 트랙터처럼 큰 몸집을 하고    있다. 마치 외양간에서 나오지 않고 쿠루프 공장에서 나타난 것 같은 모습이다.


 이 작은 묘지의 분위기도 유럽 연합이라는 생각에 보조를 맞추는 변화를 겪은 듯싶다. 묘지 안에는 두 개의 돌기둥 사이에서 회전하는 정교한 철문이 아름답게 세워져 있고, 가운데 오솔길을 확장해 놓은 지점에 크고 둥근 돌항아리가 있다. 그 항아리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Unser e Verpflichtung: Friede Europas.”


“무슨 뜻인가요?” 알베르띠노가 묻는다.


“그건 이런 뜻이다 - 당신은 말하는 것을 조심하시오. 이 불쌍한 친구들한테 그들의 희생이 헛되었음을 알리지 말라. 세계는 전보다 더 혐오감이 난다. 그들이 평화롭게 쉬게 할지어다. 그들이 후세 사람들에게  지혜를 가르쳐 주었다는 환상 속에 잠들게 하라.”


“정말 그렇게  말했을까요?”     

           
“모르겠는데. 나한테는 그렇게 말한 듯이 보이니까. 그럼 됐지 뭐냐.”


알베르띠노는 내 말을 바른 대답으로 기꺼이 받아드린다. 다만 그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토록 넓은 묘지에 어째서 십자가는 이토록 작은가 하는 점이다. 나는 설명해 준다. 


우리 둘레에 보이는 저 넓은 녹색 땅은, 보는 바와 같이 파인나무 과수원이 아니고 무덤이라고.


“저 어린 나무 밑에는 총에 맞거나    발진티푸스 병으로 떼죽음 당한 사람들의 육신이 누워있는 집단 묘소가 있단다.” 


나는 알베르띠노에게 사진 찍기 좋은 곳을 찾아보라고 말하고, 무덤 사이를 홀로 거닐어 본다. 나는 나의 옛 동료 중 한 사람의 무덤을 찾아서 사진을 찍으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래서 이탈리아인 구역에 들어가 자리를 잡으며 십자가에 새겨진 이름을 자세히 들여다 본다. 


십자가가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지만 어두운 숲 속에서 그 이름을 가려내기는 힘들다.


“그건 둘째 줄에 있다네.” 내 뒤에서 어떤 음성이 말한다. 주위를 둘러보고 나는 이 외로운 곳에서 누더기 차림으로 홀로 찾아 다니는 죠반니노를 본다.


“둘째 줄 왼편에서 네 번째 십자가라네.” 그는 이어서 말한다. “왜 다른 것은 사진을 찍지 않는가, 시간은 아직 있는데? 숲은 썩어가고 초목은 계속해서 자란다. 몇 해 안 가서 이 모든 지역이 나무로 가득 차면, 이 불쌍한 친구들은 흔적도 남지 않겠구나.”


나는 그가 비통에 차있는 것 같다고 일깨워준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젓는다.


“저들은 정말 죽었다오.” 그가 설명한다.


“예를 들면, 몇 년 전 당신네 마을에서 전차에 치여 죽은 턱수염 난 ‘노인보다 더 비참한 죽음이란 말이오. 마을엔 아직도 그 노인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요. 즉 그 노인이 바퀴 밑에 깔린 것을 본 전차 운전사, 현장에서 사건 경위를 기록했던 경찰, 무슨 일이 생겼는가 보려고 멈춰선 빵집 소년 등 여러 사람들이 다 기억하고 있지. 그러나 여기 있는 이 친구들은 가족이나 동료 포로 몇 사람 말고는 누가 기억하겠소? 그들은 완전히 잊혀졌다오. 이 친구들은 모두 〈무명의 외국병사〉라고 써있을지도 모르지요. 죠반니노, 나는 1 2년 동안 그 친구들에게 말을 걸고 깨워보려 애쓰며 이곳에서 방황해왔소. 그러나 허사였소. 아마 그들은 듣질 못하는 모양이오.”


죽어버린 모든 전쟁은 금방 잊혀지는 존재와 똑같은 운명을 감수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통계만이 가장 오래 지속된다. 일차대전 때의-수십만 명, 이차대전에서 또 그‘만큼의 통계가 남듯이. 나는 이런 주장을 내놓으며 결론을 짓는다.    


“저들을 기억해 줄 사람은 이런 사람들이지요. 정신적인 친족관계자, 혹은 논쟁을 일삼기 위해서나 애국적인 이유로, 혹은 단순히 이기적인 한 인간으로 기억하려는 사람들이겠지요. 늙은 죠반니노여, 당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소. 왜냐하면 당신    일기 속에 다 적어놓았기 때문이오, ‘나는 달력에 하루가 지날  때마다  십자가를 표시한다. 전쟁이 끝나면 어떤 사람들은    빛나는 훈장을    달게되는 한편,    또 다른 사람들은 헤진 저고리에 달 핀조차 없을 것이다. 단 그들이 죽음의 나날을 표시하기 위해 연필로 그은 십자가 외에는.”


그러나 나의 누더기 친구는 고개를 흔들며 말한다. “난 이제 가야하오. 라게르 수용소에서 당신 옆에 와 주었던 어린 알베르띠노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오.”


“당신은 어디에 머물고 있소? ” 내가 묻는다.    


아, 여기 저기. 염려 말아요. 우리가 그곳에 있을 필요가 있다고 하면, 그곳에 있겠소. 안녕! 죠반니노여.”


 알베르띠노가 그새 사진을 꽤 많이 찍어가지고 돌아왔다. 그에게 왼쪽    네 번째 십자가의 둘째 줄을 가리키며 그것을 찍으라고 내가 말한다.    


“거기 누가 있는데요? ”


“잠들어 있는 사람과 똑같은 사람. Unbekanntt Ausland Soldat.''


 비젠돌프에 있는 라게르 수용소도 같은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피난민 이나 그와 비슷한 종류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옛날과 똑같이 내려 누르는 암울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


비록 TV 안테나가 지붕에 달려있지만, 벽토를 바른 막사는 천장에 고드름이 얼어붙고 쥐들이 우리 얼굴 위로 뛰어다니던 오물의 소굴을 생각나게 한다. 나는 외로운 감금 장소로 썼던 땅굴도 볼 수가 있다.


알베르띠노는 온갖 자세한 것을 다 캐묻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온갖 일들이 그 굴 속에 휩싸여 들어가 파묻혔다. 오물 같은 추억의 다발들을 파내어 햇빛에 들어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새로운 유럽연합 시민정신의 첫째는  잊어버릴 수 있다는 즐거운 능력이다.

 

5. 미스 독일이여, 안녕!


비젠돌프에서 베르겐까지는 거의 8마일이나 된다. 나는 그 길로 천천히 차를 몰고 간다. 전에 내가 어깨에 넝마를 가득 넣은 군용 배낭을 메고 누더기 옷을 입은 사람들 틈에 끼어서 걸어가던 길이다. 


우리는 1945년 4월 22일 아침 7시에 비젠돌프를 떠났다. 상황은 꽤 복잡했다. 왜냐하면 영국군이 비록 독일군을 포위하고 그들 중의 한 순찰병이 독일 방어선을 뚫고 들어와서 우리를 해방시켰다고 해도, 우리 입장에서 보면 독일군은 여전히 우리를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군들은 남쪽 영국군 진지를 향해 사격하기 위해서 철조망 울타리 밖, 막사 북쪽에 몰타르 포대를 설치했다. 그리고 동쪽의 영국군을 공격하기 위해서 서쪽에 카드링카를 배치했다. 그리고 동쪽에는 두 번째 몰타르를 쌓은 포대와 두 번째 카드링카를 설치했는데 그 목적은 하느님만이 아신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