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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순자 수필

    한순자

    경기도 여주 출생,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기도 광수중학교 근무, 1992년 캐나다 이민, 캐나다문인협회 수필 부문 입상, 2006년 해외동포문학상, 작품집 <인생에 실패는 없다 다만 또 다른 삶이 있을 뿐이다>, <나이만큼 행복한 여자>, <밀리언 달러 티켓 나도 한장>,<행복이라는 이름의 여행>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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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호에 이어)
 그래서 다시 또 그렇게 어우러져 살려다보니, 네가 얼마나 잘 낫느냐, 네가 얼마나 가졌느냐로 사람을 평가하려 들어 다시 또 물질을 더 모으고자 혈안이 되게 된다. 
 세상 사람들이 놀랄 만큼 우리는 짧은 기간에 빠른 경제성장을 했다. 그러나 경제가 성장하는 만큼 우리의 의식이 앞서기는커녕 경제를 따라 가지 못하니 마치도 살찐 돼지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한국의 경제가 선진국으로 가느냐 아니면 후퇴할 것이냐, 아니면 이대로 머물 것이냐 하는 기사는 읽긴 하는데 우리의 의식이 그에 뒷받침이 되고 따라 주어야 한다는 기사는 별로 읽어보지 못해 아쉽기만 하다. 


 세상은 적자생존이요, 약육강식의 법칙은 인간도 동물이기에 힘을 키우고 경제력을 높이고 함은 극히 당연한 얘기가 된다. 


 그럼 우리도 이만큼 살만해 졌으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느냐가 순서일 것이다. 네가 얼마나 잘 낫느냐, 네가 얼마나 더 가졌느냐는 ‘생명의 유한성’을 놓고 볼 때는 별 의미가 없다. 그러기에 복지정책을 두루 펴나가야 함이 여기에 있게 된다. 


 똑 같이 일하고 사는 것도 비슷하다면 그건 바람직하지도 인간이 살면서 별 재미를 느낄 수 없게 된다. 세계의 70억이 넘는 인간이 똑 같이 생긴 사람도 없고, 목소리조차도 다른 이런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세상에 살면서 어찌 그렇게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서야 되겠는가 말이다. 각기 다른 환경, 다른 소질, 재주,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며 더불어 살면 되는 것이다. 


 나 혼자 배부르고, 나 혼자 더 잘 살겠다고 하다 보면 빈곤계층이 늘어나 사회가 안정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없고 소외 받은 계층도 어느 만큼의 복지혜택을 누리고 살게 된다면 그보다 더 바람직한 일은 없을 것이요, 사회도 그만큼 안정이 되어가게 마련이다. 


 물질만능주의에서 가치관이 바로 정립이 되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게 되는 것이다. 언제까지 우리는 네가 얼마나 많이 가졌고, 얼마나 잘 낫느냐고 도토리 키 재기만 하며 살겠는가. 인간의 생명이 유한하지 않다면 문제는 또 달라진다. 그러나 어차피 유한한 인간의 수명 앞에 재물을 쫓아 살고 또 살아 왔다면, 갑자기 떠난 부모나 친지 지인의 죽음 앞에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 “죽을 때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한다”더니, 사는 동안 돈 가지고 그렇게 악착스럽게 살았더냐고 허망한 탄식도 나오게 되는 것이다. 


 배가 고픈 자가 우물을 판다는 얘기가 있다. 배도 고파 봐야 고난에 처하게 되고 역경에 처했을 때 그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려 안간힘을 쓰는 것은 본능이다. 과연 적당히 배부르고 일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고 한다면 열심히 일 하려고 할 사람이 몇 이나 될 것이며, 먹고 놀기만 하는 삶이 긴 인생을 통해 볼 때 과연 산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자손들, 후손에게 편안히 먹고 살라고 재산을 물려줄 필요가 없다는 말은, 교육을 통한, 삶의 지혜를 통해, 성취욕구로 인한 노력의 결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어차피 유한한 우리네 인생, 세상에 태어나 내가 무엇인가 수고하고 노력해서 얻어지는 즐거움으로 살아감이 바람직한 것이다. 


부동산으로 해서 부자가 된 경우는 접어 두고 요즈음은 월급이 얼마인가가 아니고 그 사람 연봉이 얼마냐 이를테면 몸값, 이름값이 얼마인가로 사람을 평가하는 그런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연봉 1억이 몸값이라 할 때, 그 이상의 재산증식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축적되는 부로 억만장자니 하는 소리를 들으며 초호화판 사치스러운 삶을 살듯이 한 세상을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 산다면 그것이 뭐 그리 의미가 있겠는가. 


어차피 이름 값, 몸값으로 부를 축적할 양이면 나 개인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좀 더 유익하게 사회를 위해, 인류를 위해, 기여하고 이바지하는 삶을 살 때 그야말로 제대로 된 ‘이름 값’이요, ‘몸값’이 되는 것이다. 


 스코틀랜드 태생의 예순을 갓 넘긴 젊은 할아버지가 있었다. 그는 이미 예순이 되기 전에 은퇴를 했으며 부인과는 헤어져 혼자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모국에서 살고 있는 여동생이 일 년이면 거의 두 차례씩, 그것도 남편과 두 아들을 데리고 몇 달을 있다가 가곤 한단다. 동생 가족이 오면 주인인 오빠가 그들 식구들 치다꺼리를 하느라 이제는 그야말로 지겨워 방을 렌트를 줘야겠다고 말을 하기도 한다. 


 그의 여동생은 상당한 재산가로 아닌 게 아니라 일하지 않고도 여행이나 하며 그야말로 쇼핑이나 하며 사는 사람이기에, 난 그의 얘기를 들으며 그녀가 이곳에 오면 무엇을 하느냐고 물어봤다. 그녀는 오빠네 집에 와서도 오빠나 자기네 식구들을 위해 음식을 하는 것이 아니고, 주인인 오빠가 음식도 다 한다. 집안 청소도 하지 않고 쇼핑만 해서 집안에 들이는 것이 일이라고 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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