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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kang39

    강신봉 칼럼

    캐나다 加人 강신봉
    전 캐나다한인총연합회장, 전 토론토한인회장, 요크한국인학교 설립교장, 김치캐나다사장, 전 스코필드박사동상건립위원장,전 무궁화사랑모임창립회장, 토론토흥사단창립지부장, 대한민국국민훈장목련장, 역사문화원장

    캐나다 문협회원.현 GTA한카노인대학장
    http://skang3441.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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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의 역사 500년(21)-8.15 해방 , 남북 분단(1)

 

 
 

▲얄타 회담에 모인 3국 수뇌들(왼쪽부터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1945년 8월6일과 9일, 미국의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떨어졌다. 그리고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였다. 꿈에도 생각지 못한 횡재를 맞았다. 해방이 된 것이다. 사실, 이 축복은 우리 민족이 수고를 해서 해방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해방 며칠 전까지도 이러한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 내려준 특별한 축복이었다. 해방은 되었지만 나라를 되찾은 것은 아니었다. 한반도는 38도선 두 쪽으로 나뉘어 미국과 소련의 군인들이 지배하는 군정이 시작되었다. 


 해방이 된 이후 3년간 남한에서는 미국의 군정, 그리고 38선 이북에서는 소련의 군정이 실시됐다. 그러다가 1948년 남북에 각각 이념이 다른 국가가 수립된 것이다. 남한에는 그 해 8월 15일, 그리고 북한에는 9월 9일이 두 나라의 합법적인 건국일이다. 


한데 어떻게 해서 38선으로 한반도가 두 쪽으로 갈리고 남과 북에 서로 다른 국가가 들어서게 되었는가? 그 뿌리는 우리의 의지 속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자유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미국과 공산주의를 최고 이념이라고 기치를 내건 소련, 양대 이념세력 속에서 찾아 보아야 한다. 


당시 우리는 일제의 속박에서 갑자기 해방을 맞이 하였기 때문에 아무런 대처능력이 없었다. 자체적으로 미래를 가늠할 수 있는 힘이 없었던 것이다. 상해 임시정부가 있었다고 하지만 이는 형식적인 망명정부였기에 힘의 실세가 없었다. 남과 북이 갈라진 과정에는 미-영-중-소 4대 강대국들의 흥정이 있었을 뿐, 통일된 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우리 민족의 의지는 반영되지 않았다.  


세계 제2차대전이 끝나기 전에, 그 4대 강국은 전후 국제적 처리문제를 놓고 진지한 논공행상의 회담을 3차례 개최하였다. 그 최종적인 포츠담 회담에서 한반도는 38선으로 남북이 갈라지는 운명선이 결정된 것이다. 


(1)카이로 회담

 

카이로 선언(Cairo Declaration)은 1943년 11월 27일 미?영?중, 3개 연합국이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 모여 발표한 공동선언이다. 5일간에 걸친 회담에는 루스벨트?처칠?장제스가 각기 미국, 영국, 중국을 대표하여 참가했으며, 회담 결과 발표한 이 선언에서 연합국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최초로 일본에 대한 전략을 토의했다. 


또한 회담에서 연합국은 승전하더라도 자국(自國)의 영토 확장을 도모하지 않을 것이며, 일본이 제1차 세계 대전 후에 타국으로부터 약탈한 영토를 반환할 것을 요구키로 했다. 특히 한국에 대해서는 앞으로 자유독립국가로 승인할 결의를 하여, 처음으로 한국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카이로 선언의 조항은 포츠담 선언에서 재확인됐다.


카이로 선언 주요 내용 - 각 군사사절단은 일본에 대한 장래의 군사행동을 협정하였다. 3대 동맹국은 일본의 침략을 정지시키며 이를 벌하기 위하여 이번 전쟁을 속행하고 있는 것으로, 위 동맹국은 자국을 위하여 어떠한 이익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며 또 영토를 확장할 의도도 없다.


위 동맹국의 목적은 일본이 세계대전 개시 이후에 탈취 또는 점령한 태평양의 도서 일체를 박탈할 것과 만주, 대만 및 팽호도와 같이 일본이 청국으로부터 빼앗은 지역 일체를 중화민국에 반환함에 있다. 


또한 일본은 폭력과 탐욕으로 약탈한 다른 일체의 지역으로부터 축출될 것이며, 앞의 3강국은 한국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자주 독립시킬 결의를 한다. 이와 같은 목적으로 3대 동맹국은 일본과 교전 중인 여러 국가와 협조하여 일본의 무조건항복을 촉진하는데 필요한 중대하고도 장기적인 행동을 속행한다.


(2)얄타 회담


 얄타 회담(영어: Yalta Conference)은 1945년 2월 4일부터 2월 11일까지 소련 흑해 연안에 있는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미국?영국?소련의 수뇌들이 모여 나치 독일의 제2차 세계 대전의 패전과 그 관리에 대하여 의견을 나눈 회담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무렵, 주 적국 중 하나인 이탈리아가 항복을 하고 나치 독일이 패전할 기미를 보이자, 연합국의 지도자들이 나치 독일의 그 후를 논의하기 위하여 크림반도에 위치한 얄타에 모여서 회담을 하였다.


각국 수뇌는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소비에트 연방의 당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이다.


이 회담에서 3국 수뇌들은 패전 후 나치 독일을 소련?미국?프랑스?영국 이렇게 4국이 분할 점령한다는 원칙을 세웠으며, 연합국은 독일인에 대하여 최저 생계를 마련해 주는 것 이외에는 일체의 의무를 지지 않는다는 것에 대하여 합의하였다.


또 나치 독일의 군수산업을 폐쇄하거나 몰수한다고 선언하였으며, 전쟁의 주요 전범들은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열릴 국제재판에 회부하기로 합의하였고, 전후 배상금에 대한 문제는 위원회를 구성해 위임하기로 하였다.


또한 이 회담에서 폴란드에 대해서는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에서 규정한 폴란드 동부 영토 대부분을 소련 영토에 병합하고, 폴란드에게는 동독의 일부 지역을 대신 주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과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각각 폴란드 동부 영토 일부를 얻게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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