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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나는 오늘 교통법규를 어긴 죄(속도위반)로 법정이란 델 섰다. 죄를 지었으면 벌받아 마땅한데 억울하면 재판을 받으라 해서 밑져야 본전이란 배짱으로 찜찜해 하며 긴장으로 떨며 판사 앞에 섰다. 죄질 것이 아니구나 후회가 막심하다.


하지만 엄숙한 분위기와는 달리 부드러운 판사의 논고로 예상외의 결과를 얻어낸 것만으로도 만족한 수확인데다 앞으론 조심 또 조심 차를 몰아야겠다는 다짐을 들게 했으니 재판의 효과는 만점인 셈이다. 


재수 없이(?) 속도위반에 걸린 것 가지고 거창하게 “죄와 벌”이라는 제목을 붙여 호들갑을 떨고 있네 할는지 모르지만, 내겐 법이라는 말 자체가 천근 무게로 느껴지고, 죄라는 말에 오금을 주리며 살아온 소시민으로 경찰서 같은 관공서 나들이를 꺼려했을 뿐 아니라 초등학교 땐 교무실에 가는 것조차 싫어했는데 어쩌다 판사 앞에 서보니 고양이 앞에 쥐마냥 내가 그렇게 작아보일 수가 없다.


죄와 벌이란 게 도대체 뭔가 하는, 만감이 교차되어 집에 오자마자 서재에 꽂힌 법에 관한 책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 서재에 꽂힌 많은(?) 책 중엔 법이란 글자가 적힌 책은 단 한 권도 없다. 


법을 몰라도 한참 모르게 살아 왔구나 싶은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법 없이도 살만한 삶을 살아온 소시민이란 뜻도 되니 위안도 된다.


제목에서부터 거창하게 죄와 벌이라 무게를 잡고 보니 내가 감당할 문제가 아니지 싶으면서도 죄와 벌에 대한 나의 그간의 의식이 얼마나 유치했었나를 느끼게 되자 그 무지의 편견을 고백하는 심정으로 이 글을 쓰게 된다.


나는 그간 “벌은 죄의 대가이며, 법은 벌을 주기위한 올가미”라 생각 했었다. 스스로 착하게 살고있는, 이성적 판단이 바른 사람들에게는 필요 없는, 괜히 겁주기 위한 폭력이라고까지 여길 정도로 법망을 멀리하고 겁을 내며 주눅들어 살았었다. 


그런데 판검사 앞에 서 보니, 그 논고가 내게 유리하게 판결이 나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법은, 적어도 캐나다 법은, 처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채벌이 목적이 아닌 예방을 목적으로 한 장치임을 보았다고 하면 과장된 아첨일까? 


규정된 채벌의 최저치에 적용 판결하려는 고심을 엿볼 수 있었다. 모든 예외적 상황을 고려한 판결은 인도적이라기보다 같은 잘못의 예방적 차원을 고려한 법 해석에 고심을 하는 것 같았다.


누가 말했던가? 법은 신호등 같은 것이라고, 신호등은 채벌을 주기 위해 겁 주려고 세워 논 것이 아니라 교통사고가 안 나게 하기위한 예방적 장치란 걸 알게 됐다. 


솔직히 나는 그 동안 법은 내 자유를 묶는 올가미쯤으로 부담스러워 했었다. 그렇다. 법을 올가미로 여기는 자에게는 법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신호등이 거추장스럽고, 세금이, 선거가, 줄서기가 거추장스럽다. 경찰의 눈이 괜히 걸리고, 판검사는 보기만해도 주눅이 든다.


그래서 독재자가 하는 짓이 무엇인가? 이 모든 거추장스러운 장치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부터 서둘러 마련한다. 모든 법에서 자기 혼자만이 벗어나는 일이다. 우선 줄을 서지 않는다. 세금을 내지 않는다. 선거를 하지 않는다. 경찰, 판검사는 자기 수족이 되고, 법까지도 자기 수족인 줄 착각한다. 심지어 “짐이 곧 법”이 되고 자기가 신이 돼버린다.


우리속담에 “법 밑에 법 모른다”란 말도 같은 맥락이다. 법을 지켜야 할 법 기관(경찰, 판검사, 국회위원 등)에서 위법이 많다는 뜻인데, 부패한 나라가 증명해주고 있다.
반대로 철인은 법을 신성시한다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며 “국법에 복종하지 않으면 부정을 범하는 자다” 해서 기꺼이 사약을 마신다. 그래서 “법은 엄격하데 법 시행은 관대해야 한다”는 중국 속담은 진리다. 


불경죄로 잡혀온 ‘진’이라는 사내를 ‘위’의 ‘문제(文帝)’가 물었다. “왜 그대는 법을 어겼는가?” 


‘진’의 대답이 걸작이다. “소인이 멍청했기 때문이고, 그리고 폐하의 그물(법)의 구멍이 좁아서 그랬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성경에 원죄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 대목에선 자꾸 갸우뚱 해진다. 내 스스로 지은 죄가 아니라 태어나기 전부터 가지고 있는 죄란다. 이브라는 최초의 여인이 뱀의 꾀임에 빠져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먹음직스러운 실과를 따먹은 죄 값이 원죄란다. 이런 억울한 죄 값이 있나?


탐스러운 실과를 달아놓지를 말든지,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하지를 말든지, 전능하신 이의 의중을 피조물인 내가 감히 어떻다 말할 처지는 못되지 만서도 죄를 짓게 한 원인제공도 하나님이요, 죄를 준 것도 하나님이라면 모순일 것 같아 하는 투정이다. 


어쨌거나, 이번 법정경험은 죄는 안 짓는 것이 상책이라는 착한 마음을 들게 했으니 크나큰 수확이다. 범법이 당장엔 이익 같으나 마지막 날에 하늘을 우러러 결산해보면 복리로 불어 눈감기가 힘들 것만 같은 생각, 요즘 한국의 청문회뉴스를 보면서 더욱 그러하다. (20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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