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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호 칼럼

Hwangkyu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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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사학과(대우증권, 씨티은행 근무/ 2009년 캐나다 이민)
2014년 문협 신춘문예(소설) 가작/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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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ngkyuho
Hwangkyu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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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16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와 합리화

 

 세계 최고의 부자, 최대의 기부자, ‘오마하의 현인’ 워렌버핏. 그가 전 세계 투자자들로부터 ‘가장 현명한 투자가’로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의 답은 아주 의외다. 그의 ‘일관성’ 있는 태도가 선정의 이유였으니 말이다. 


 여기서 ‘일관성’이란 실수나 투자 방식에 있어서 모르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는 그의 태도를 의미 한다고 한다. 주식투자는 불확실성과의 무한한 싸움이다. 다시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되풀이 되는 게 다반사다. 


 워렌 버핏을 추종하는 가치 투자자(value investor)들은 주가의 하락보다는 기업의 가치 훼손에 주목한다. 그들은 자신이 그 기업에 투자한 이유인 기업 가치는 줄어들지 않았는데 주식가격이 하락한 것이라면 매도할 이유가 없다는 투자의견을 낸다. 오히려 추가로 매수한다. 저평가된 주식을 좋은 가격에 쓸어 담을 수 있는 기회로 보기 때문이다. 


 이런 투자의 달인들이 투자자들에게 전하는 금과옥조 같은 메시지는 "자신만의 분명한 매매 원칙을 세우고, 이를 반드시 지키라"라는 ‘일관성’이다. 투자판단의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수나 모르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는 버핏의 모습, 이런 워렌버핏의 자세가 그를 세계적인 주식투자가, ‘오마하의 현인’으로 만들었다.


 증권 투자 기법 중에 손절매라는 것이 있다. 영어로는 Loss cut. 손해(損)를 끊어(絶)버리는 매매(賣)라는 뜻이다. 주식을 매입 후 예상과 달리 하락 시 미리 정해진 한도의 손해를 감수하고 그 주식을 매도하는 것을 말한다. 투자 전략이 비교적 자유로운 헤지펀드 매니저들이 이런 손절매를 구사한다. 


 반면에 개인투자자로서는 손해를 확정하는 손절매는 실행하기 무척 힘들다. 손절매는 자기 뼈와 살을 깎는 것 같이 아프다. 이론적으론 손절을 해야 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음에도 실제로는 실천 못하는 주식 투자자들이 대다수다. 


 떨어질 만큼 다 떨어졌으니 곧 바닥을 찍고 반등할 거야 등의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 자신이 듣고 싶은 정보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주가에 불리한 정보는 외면한다. 이런 심리상태는 주식 시장 참여자 사이에 만연해 있다. 손절매를 못하면 발톱만 자르면 될 것을 다리까지 잘라야 하는 사태, 즉 이른 바 ‘쪽박’을 차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고수와 하수의 매매 성공률의 편차는 생각보다 그렇게 크지 않은 편이다. 월가의 유명한 펀드매니저와 원숭이의 투자 수익률 게임에서 원숭이가 이겼다는 이야기는 너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자산을 관리하는 방법에서는 그 차이가 극명해진다. 그 결정적인 차이는 자금 관리에서 드러난다. 최고의 시기를 위해서 최악의 시기에도 생존해야 한다. 돈 버는 기술보다 잃지 않는 기술을 최우선적으로 익히라는 것이다. 


 대박이라는 최고의 투자 적기를 찾을 때까지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 곧 자금 관리이며, 물론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그 핵심 요체가 바로 손절매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손절매 기법은 기계적이며 ‘일관성’ 있는 실행이 성공의 관건이다.


 그러나 ‘일관성’이 항상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일관성’이 있는 사람을 본받으려고 한다. ‘한결같다’는 말은 대개 칭찬할 때 쓰는 말이다. 반대로 한결같지 않은 사람은 남들이 낮추어 본다. 이렇듯 자신의 믿음, 태도, 행동 등에 있어 ‘일관성’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이론화한 것이 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Leon Festinger)의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 1954) 이론이다. 


 그는 종말론에 빠져든 사람들 틈에 신자로 위장 잠입하여 이 연구를 진행했다. 그는 이 연구에서 인지부조화를 겪는 사람들은 자신의 태도나 행동이 가치관과 일치하지 않을 때 ‘합리화 메커니즘’이 작동한다는 사실을 포착해낸다. 


 여기서 인지부조화란 두 가지 이상의 반대되는 믿음, 생각, 가치를 동시에 지닐 때, 또는 기존 정보와 반대되는 새로운 정보를 접했을 때 개인이 받는 정신적 스트레스나 긴장 상태 및 불편한 경험 등을 말한다. 


 이런 인지부조화를 겪을 때 일반적으로 공격적, 합리화, 퇴행, 고착, 체념과 같은 증상을 보인다고 알려져 있다. 사람이 하나의 머릿속에 서로 상반되는 믿음과 사실을 동시에 지니고 살아간다면 아마 정신분열증에 걸리고 말 것이다. 따라서 이 인지부조화는 어떤 식으로든 해결되어야 한다. 


 레온 페스팅거의 연구에 의하면 지구에 대홍수가 임박했고 자신들을 외계 우주선이 구원해 줄 것이라 믿었던 UFO 우주선 숭배 교도들 중 일부의 신도들은, 교주의 예언 당일에 대재앙이 닥치지 않자 실망해서 배교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굳은 믿음 덕분에 지구가 대재앙을 피했다고 주장하며 이전보다 더 독실한 광신도들이 되었다고 한다.


 이는 인지상의 부조화를 ‘합리화 메커니즘’을 작동시켜서 부조화를 없애거나 줄여 기존의 믿음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이는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이미 제시한 방어기제 중의 하나인 합리화와 동일하다. 


 이런 합리화 과정에서는 잘못을 인정하는 대신 현실과 자신의 기억마저 왜곡된다. 비상식적이고 터무니없는 말을 꾸미기도 하고, 자기가 원하는 정보만 선택적으로 지각하고 받아들이며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을 찾는다. 전체 여론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 못하고 귀머거리가 되어 몰상식한 ‘집단 극단화’의 함정에 빠진다.


 자신들의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이른바 ‘대안적 사실들’을 창작해내고 유포시킨다. 이런 인지부조화는 개인의 사소한 결정에서 나라의 중대한 결정까지 적용된다.


 일본의 뇌 전문가인 요로 다케시(養老猛司)는 그의 저서 <바보의 벽>에서 인간의 뇌에는 자신이 원하는 정보만 받아들이고, 원치 않는 정보에 대해서는 차단해 버리는 '바보의 벽'이 있다고 했다. ‘바보의 벽’은 고정관념과 편견과 탐욕과 이기심이란 재료로 되어있다. 


 그리고 현실과 괴리된 인지부조화를 해소하기 위해 자신을 합리화 시킨다. 반성이나 깨달음이란 단어를 알지 못한다. 스스로 쌓아 올린 ‘바보의 벽’ 속에서 자신의 삶이 부조리하지 않다고 스스로 설득하고 세뇌 시키면서 생을 보낸다. 자신의 안위와 실질적인 이득 외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어떻게 해야 그 공고한 벽을 허물 수 있을까? 저자는 이 ‘바보의 벽’은 오로지 각자가 그 벽을 인식하고, 스스로 그 벽을 허물기 위해 노력해야만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소통은 결국 자기 자신의 문제라는 것이다. “내가 틀렸어”라고 고백하고 기존 생각을 ‘변경’하거나 아예 ‘포기’할 줄 아는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알메르 카뮈의 말처럼 정녕 ‘인간은 자신의 삶이 부조리하지 않다고 스스로 설득하면서 생을 보내는 동물’인 것인가?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Hwangkyu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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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8
보수화에 대한 단상

 

 401 도로에 진입하여 자동차를 운전하다 보면 어느새 땀이 손에 배고 나도 모르게 가슴이 쿵쾅거리며 요동을 치게 되는 것을 느낀다. 더군다나 뒤 차량이 바짝 다가와 간혹 경적이라도 울리는 경우에는 모골이 송연해지고 심박 수가 주체할 수 없이 빨라진다. 


 아직도 마음은 혈기가 방장한 중년이지만 젊었을 때의 운전 스타일하고 너무나 달라져 가는 나의 모습에 적이 놀라곤 한다. 나도 이렇게 나이가 들어가는 것일까? 너무 심약하게 변해가는 것은 아닐까? 매사를 도모함에 있어서 안전이 최고의 덕목일 수 있지만, 너무 보수적인 관점으로 안전에만 치중해서 혹시라도 남에게 불편을 끼치며 살아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물론 운전속도와 운전습관이 딱히 보수화와 상관이 있는 것이 아닐지언정 나는 극히 개인적인 측면에서 보수화에 대해 이런저런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젊은이들은 나이 든 사람들에 비해 무모하며, 적은 보상에도 위험을 감수하려고 든다. 만 30세를 기준으로 그 이상일 때 자동차 보험료가 감소하는 것 또한 20대 운전자의 사고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최근 보수화의 생리적 요인에 관한 연구를 진행한 롭 러틀리지(Rob Rutledge) 영국 유니버시티 컬리지 런던 박사팀이 ‘도파민 호르몬’ 연구 결과를 발표하며 덧붙인 말이다. 이 연구팀은 “고연령층이 저연령층에 비해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며, 그 까닭은 사람이 어떠한 선택을 했을 때 쾌감을 느끼도록 하는 ‘도파민 호르몬’의 감소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와 유사한 보수화에 관한 또 다른 연구로 미국, 영국 등의 뇌 과학자와 경제학자 그리고 심리학자로 구성된 국제 공동연구진이 진행한 것이 있다. 이 연구에서는 뇌 스캔과 기능성 자기공명영상(fMRI) 촬영이 활용되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보수화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사회 구조적 요인 외에 사람의 뇌 구조 변화에 따른 생체적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실험적으로 증명한 연구였다.


 이 연구진은 사람들이 의사 결정을 할 때 오른쪽 후두정엽의 회백질 양이 적은 사람일수록 보수적이고 위험 부담이 적은 결정을 내린다는 사실과 우측 후두정엽 회백질의 양은 나이가 들수록 감소하는 경향이 있다는 분석 결과를 내놓았다.


 이상과 같은 생리적 신체적 요인 외에 이른바 ‘연령 효과’ 이론은 보수화의 대표적인 이론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사람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신체적•정신적 대응 능력이 감퇴되고 기대수명이 줄어들어 방어기제가 작동하게 되는데, 규범 지향적 성향과 지배성이 증가하여 자신이 이룬 것을 지키려는 마음이 강해지고 익숙한 대상을 고수하려는 성향과 자신의 삶에 최적화된 선에 만족하는 경향성을 보인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정서적 보수화가 정치적 보수화로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럼 한국 사회의 보수화 어떤 모습일까? 한국은 생리적인 요인 및 연령 효과 외에 여러 다른 복합적 요인으로 인하여 보수화가 상당히 빠르게 진행된다고 보인다. 특히 대표적 민주화 세대인 386세대(1960년대생)와 베이비붐 세대(1955~1959년생)의 보수화가 한국을 급격하게 보수화 시키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기서 나는 한국 사회 보수화의 복합적 요인들을 이해하는데 사회학자 장신기의 견해가 주목할 만하다고 본다. <사람들은 왜 진보는 무능하고 보수는 유능하다고 생각하는가?>를 쓴 그는 “노년층의 보수화는 생애주기에 따른 필연적인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한국 사회의 급격한 변동 과정에서 형성된 ‘복합적 소외감’을 극복하기 위해 나타난 명백한 사회적 현상이다.”라고 주장하며 ‘새로운 역사를 살아가는 세대와의 괴리감’이 한국 노년층의 보수화 원인 중의 하나라고 분석해낸다. 


 “부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뭔가 공통된 정서가 있는데 이들 세대가 느끼는 정치•사회적 소외감은 ‘분절’과 ‘단절’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50~60대의 생애 흐름을 보면 그들은 짧은 시간 동안 축적된 역사를 경험했다. 새로운 역사를 살아가는 세대와의 괴리감이 여기서 비롯된다고 본다.”고 그는 말한다. 


 즉, 보수화한 노년층이 ‘뭘 모르고’ 신앙적, 종교적으로 보수를 지지한다는 편견과 그들을 ‘말아먹는 세대’로 도식화해서 보는 다른 세대들의 왜곡된 시각들이 노년층을 더욱 ‘정치 사회적으로 소외’ 시킴과 동시에 ‘새로운 역사를 살아가는 세대와의 괴리감’을 크게 부추겨 그들의 보수화가 더욱 가속화된다는 의견이다. 


 따라서 이제는 노년층의 보수화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봐야 하는 필요성이 절실해진다고 말한다. 즉, 보수화되는 각 세대의 역사를 개별화해서 보고 그들 안에 있는 진실을 파고들 필요가 있으며 그렇게 할 때 비로소 보수주의자의 진심 속에 들어있는 보수의 여러 결이 보일 것 같다고 그는 조언한다. 


 조사에 의하면 한국에서 민주화 이후 30년간 대선이 있는 해 2월을 기준으로 보수 후보 지지율의 합이 15% 선에도 못 미쳤던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고 한다. 이 결과는 현재 한국 보수세력이 처한 황망한 처지를 상징한다. 


 요즘 ‘진정한 보수’ ‘진짜 보수’ ‘진보적인 보수주의자’ 라는 말이 회자된다. 국가중심주의, 세계화 개방론, 선진화 담론에 의지해 버텨 왔던 보수세력은 오늘날 처량한 고목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보수가 어떻게 이 지경이 되었는가? 라는 질문을 받으면 어떤 답을 할 것인가? 


 이제 보수는 새롭게 출발할 수 있어야 한다. 본질을 보아야 한다. 보수의 핵심가치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다. 그동안 보수는 겉으론 시장을 옹호하는 것 같지만 핵심가치를 애써 외면하면서 정경유착에 무감각하거나 눈을 감으며 그런 구조로부터 사익 추구의 극대화에 눈이 멀어 ‘수구 보수’로 오해되기에 알맞은 행태를 보여 온 것도 사실이다. 


 소외된 자들에게 손을 내밀기를 주저하며 적자생존 상황을 공고히 하고 주류 권력에 기생하여 나만 생존해 나가는 전략과 태도를 견지해왔다. 작금의 한국 정치 상황이 그로부터 연유한 결과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보수층은 ‘새로운 역사를 살아가는 세대’들을 자신들의 소신을 가르치려고만 하지 말고 다른 세대와 소통하고 ‘괴리감’을 줄여 나가는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보수의 가치는 결코 폄훼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보수는 나쁜 게 아니며 소중한 가치를 담고 있다. 지금 한국사회는 좋은 보수주의자가 절실히 필요하다. 


 누군가 말했다. “영국에서 보수는 가진 사람이 가난한 자에게 더 베풀려는 진실된 노력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의 노여움을 살 테니까요.”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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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염치

 

 더 센 자가 무조건 이기는 싸움 기술을 넘어 하나의 ‘도(道)’로 승화시켜 국제적인 무술이 된 우리의 태권도에는 5대 정신이 있다. ‘예의, 염치, 인내, 극기, 백절불굴’이 그것이다. 요즘은 잘 모르지만, 과거에 내가 10대 때부터 20대 후반까지 다녔던 도장에서는 수련자들이 매일 큰 소리로 복창했다. 나는 그중에서 ‘염치’가 매우 인상 깊었다. 염치라는 단어가 무술에는 적용하기에 너무 생뚱맞다고 여겨져서 그랬다. 염치의 사전적 의미는 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논어 헌문편에는 ‘염치’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제자 헌이 공자에게 부끄러움에 관해 물었다. 이에 공자는 “나라에 도가 없는데 국록을 받아먹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며, 나라에 도가 없는데 부하고 귀하게 사는 게 부끄러운 일”이라고 답했다. 공자는 부끄러움의 주관적인 작용을 사회적 언어로 변환시켜 부끄러움을 정치가의 기본 덕목으로 제시했고, 맹자는 부끄러움을 아는 데서 의가 시작된다고 했다. 순자는 예의를 중시하지 않고 먹고 마시는 것만 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처음으로 염치란 말을 정치사상의 개념어로 만들었다.


 이를 더욱 구체화하여 국가를 유지하는 4가지 덕목(사유四維)으로 예, 의, 염, 치를 정리하여 이를 국가적인 정치윤리로 견인한 것은 관자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은 일상과 인간 실존의 남루함과 추레함을 잘 드러내는 명대사들로 넘쳐난다. 그중 유명한 것은 영화 <생활의 발견, 2002>에 나온 대사다. "사람 되는 거 참 힘들어. 하지만 괴물은 되지 말고 살자"라는 대사가 그것이다. 그가 말하는 사람과 괴물의 기준은 부끄러움을 아는 능력 즉, '염치'의 유무일 것이다.


 과거 우리 역사를 보면, 굶주렸던 우리나라의 민초들에게 지상의 절대명령이며 삶의 유일한 목표는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었다. 그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대개 필연적으로 보수주의자가 되었다. 하루하루 생존 자체를 걱정해야 하는 각박한 삶 속에서 마음 편하게 온전한 사람으로서 주어진 생명을 잘 누릴 수 있는, 소위 ‘염치가 살아있는 좋은 사회’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논의와 시도들은 철없고 위험한 것으로 매도되었다.


 일제 식민통치, 강대국에 의한 분단, 6.25, 군사 독재, 월남 파병, IMF 외환위기 등의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모든 것을 초월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생존 그 자체였다. 거기에 ‘염치’는 낄 자리가 없었다.


 흥남 철수 때 월남한 주인공 ‘덕수’의 삶을 그린 영화 <국제시장>은 전쟁세대가 그 가족을 지켜 내기 위해 겪어내야만 했던 신산고초의 생활을 극명하게 잘 보여준다. 아버지의 사진을 보며 “이만하면 괜찮게 살았지 예?”라는 덕수의 말은 그 시대를 온몸으로 견뎌냈던 이들의 긍지와 눈물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것은 배고픔과 죽음의 공포를 철저히 몸으로 사상적으로 내면화한 보수적인 전쟁세대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가 된다. 그러나 이제는 한 켠으로 밀쳐 뒀던 ‘염치’에 대해 되짚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천지지간 만물지중 인간이 가장 귀한 이유가 뭔지 아느냐? 염치를 알기 때문이다. 염치는 제 것과 남의 것을 분별하는 데서 생긴다. 염치, 이 두 글자를 평생의 문자로 숭상하여라. 그러면 너는 어디를 가든 사람답게 살 수 있다.’ (성석제 소설 <투명인간> 중). 소설<투명인간>에 나오는 ‘염치’라는 키워드를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와는 다른 세대인, 생산증대와 수출 그리고 건설의 시대에 반공방첩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살아온 50대 베이비 붐 세대인 ‘김만수’. 그는 할아버지의 가훈 ‘염치’를 지키며 사느라 결국 이 사회에서 투명인간이 되지 않았는가? 염치가 만수를 파멸로 이끄는 근원이 된다. 이것은 생존만을 지상명령으로 살아온 이전 세대들이 구축해 놓은 업보를 다음 세대가 고스란히 떠안아 받은 것이 아닐까? 


 염치는 약자에게만 요구되고, 강한 자는 종종 염치를 지키지 않는 것이 우리 현실의 비극이다. 목하 더욱 한탄스러운 것은, 파렴치와 몰염치는 빠른 속도로 전염되기 마련이어서 이제는 파렴치와 몰염치가 더 이상 부끄러움이 아니고 자랑처럼 여겨질 정도다.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사죄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모두 남 탓을 하거나 억울해한다. 가해자들이 오히려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 염치가 없어서 벌어지는 해괴한 일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화 <부산행>에서 희망을 봤다. 공포상황에서, 살려고 염치를 버린 군중과 그래도 염치를 지키려는 사람들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너는 과연 어느 쪽인가"라는 화두를 던진다. 영화 속 임산부와 어린 아이는 사회적 약자지만 희망의 불씨다. 그런데 극한 공포의 좀비 아수라에서 이 두 약자들이 보여주는 ‘염치'는 놀랍다. 


 약자가 약자에게 공감하듯, 남편에게 어린 아이를 살리라고 악다구니를 쓰는 임산부, 아빠에게 노숙자를 데리고 가야 한다고 애원하는 어린 아이, 남편과 아빠가 이 난국을 타개하는 선봉장으로 각성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비록 약자였지만 염치에 바탕을 둔 소시민 그녀들의 일관된 공동체적 의식 때문이었다. 


 우리는 누구나 보수주의자가 된다. 특히 생존 자체가 지상의 절대명령이 된 가난한 사회에서는 그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그런 사회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나이를 더 많이 먹었다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부디 염치를 아는 사람이 되자. 


 이제 생존 자체를 걱정해야 하는 사회를 넘어 모두가 온전한 한 사람으로서 주어진 생명을 잘 누릴 수 있는 좋은 사회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논의로 확장되지 않으면 우리의 삶과 사회는 건강해질 수 없고 “잘 먹고 잘 살았더라”라는 식의 현대판 통속적인 신파극만이 계속 이어지는 삶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가 의를 압도하는 배금주의적 천민자본주의화가 진행된 까닭으로 그동안 보다 좋은 세상으로 이끌려는 이상적 의미의 정치적 노력들이 많이 부족했다. 먹고 사는 데 급급해 좋은 정치보다는 개발 독재를 용인하고 경제성장이 우선시 되면서 염치는 헌신짝처럼 버려져 갔다. 염치의 부재는 사회를 사익의 각축장으로 만들었고 이것을 국가 경영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결탁하여 현재 한국의 난맥상을 만들어냈다. 염치의 회복만이 참된 길이다. 나는 촛불에서 그 희망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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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ngkyu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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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2
싸이코패스 이거나 혹은 쏘시오패스

 

 “남이 들으면 오히려 이해 안 가는 일이지만, 그건 사체를 훼손하는 와중에 아들 녀석에게 전화가 온 순간이었어요. 전화벨 소리에 놀란 게 아니라, 당황해하는 내 목소리를 듣고 아들이 ‘감기 아직 안 나았어. 아빠?’ 하며 물어보는 말이 ‘아빠, 난 다 알고 있어. 그러지 마’ 그러는 것 같아 등골이 오싹했어요."


 20명을 살해한 살인마 유영철이 한 말이다. 과연 그는 자신의 엽기적인 범죄에 대한 죄책감을 지니고 있을까? 시인 권성훈 씨는 '유영철 글쓰기에 나타난 사이코패스 성격 연구'라는 글에서 유영철의 살인 행각에서 사이코패스의 전형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권씨가 말한 유영철이 반사회적 성격을 가진 살인마로서 절정을 보여준다는 장면은 이렇다. 유영철이 아들의 전화에 긴장한 나머지 사체 정리도 못 하고 '라면' 대신 '밥'을 해 먹었다는 대목에서 살인마가 일시적으로 죄책감을 느꼈다고 봤지만, ‘밥을 먹는 행위’로 잠시 당황한 상황을 곧바로 모면하는 행태를 보였을 때가 바로 유영철이 싸이코패스의 전형임을 잘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즉, 그 장면은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전환할 수 없는 '공감의 무능력자'라는 사실과 '후회 혹은 죄책감 결여' 등 싸이코패스로서 유영철을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살인마는 끝내 자신의 범죄를 미화시키고 참회를 하지 않았다고 단언했다.


 액트 오브 킬링(The Act of Killing/조슈아 오펜하이머/2012)은 1965년 인도네시아, 쿠데타 당시에 군이 ‘반공’을 명분으로 100만 명이 넘는 공산주의자, 지식인, 중국인들을 비밀리에 살해했던 대학살을 주도한, '판차실라 청년단'이라는 극우세력 암살단의 주범 '안와르 콩고’와 그 동료를 다룬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다. 


 이 영화는 기존 다큐멘터리의 방식과는 정반대로 피해자의 시각에서가 아닌 가해자 입장에서 연출하였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대학살의 리더 안와르 콩고와 그의 친구들은 들뜬 맘으로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기도 하며 자랑스럽게 살인의 재연에 열중한다. 


 영화 초반 장면의 묘사는 이렇다. 한 남자가 어느 건물의 옥상에서 천연덕스럽게 웃으면서 철삿줄로 다른 남자의 목을 감아 조르는 시늉을 하고 있다. "칼이나 낫으로 찌르면 피비린내가 너무 심하게 나서" 철사로 목을 졸라 사람을 신속하게 죽였다며 이를 '효율적인 처리법'이라 부른다고 했다. 모든 재연 과정을 즐기는 듯한 그의 모습에 소름이 돋는다. 


 젊은 시절 극장 앞에서 암표를 팔던 청년 안와르 콩고는 혼자서 1,000명 넘게 살해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집에서는 손자들에게 자상한 할아버지로 살아가는 안와르 콩고. 한나 아렌트가 주장했던 악의 평범성을 보여주는 한 예 같기도 한데, 너무 천연덕스럽게 일상 속에 사는 50년 전 학살자 그들은 지극히 평범하다. 


 하지만 촬영이 진행되면서 학살의 기억은 그들에게 낯선 공포와 악몽에 시달리게 한다. 그리고 영화는 예기치 못한 반전을 맞는다. 촬영 초기 기고만장하여 춤까지 추며 천연덕스럽게 웃고 떠들며 영화 씬들을 찍다가, 후반으로 가면서 점점 말수가 적어지고 웃음기가 사라지고 굳은 얼굴이 되어간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다시 옥상으로 올라간 안와르 콩고. 


 그는 자신의 '업적'이자 인도네시아의 찬란한 '역사'를 표현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피해자 역할까지 맡는다. 촬영 후 안와르 콩고는 자신이 목을 졸리는 상황을 연기한 모습을 모니터로 보고는 “정말 저 때 많은 감정을 느꼈다”면서 “내가 죽였던 사람들도 이런 걸 비슷하게 느꼈을 것으로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고 눈물을 흘린다. 


 이때 감독이 놓치지 않고 “그때 고문당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죽을 걸 알고 있었으니 훨씬 더 무서웠겠죠?”라고 그를 채근한다. 그때 비로소 안와르 콩고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 후 가장 처음에 자신이 감독에게 사람을 죽이는 걸 재연했던 옥상에서 다시 그것을 재연하다가, 끝내 구토를 한다. 그러다가도 금세 입을 닦고, 비장한 표정으로 "(당시에) 양심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며 합리화를 시도하는 그의 모습.


 “더 이상은 못하겠어.” “내가 정말 죄를 지은 건가요?” 과연 그는 진정으로 공감하고 뉘우치고 속죄한 것일까?


 사이코패스는 전문측 전두피질과 측두극의 회백질이 정상인보다 적어서 타인에 대한 감정이입이 어려운 것은 물론이고, 죄책감이나 수치심 등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한 마디로 ‘공감 결여’, 인간이 지닌 가장 뛰어난 사회능력은 공감능력이다. 피상적으로 남의 불행에 대해 '불쌍하다.' ‘가슴이 아프다.’ '유감이다.' '송구하다.' 정도의 말로 끝낼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현대 민주정치의 비극은 국민과 정치인 간의 불통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인은 항상 입버릇처럼 소통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소통을 내세운 정권이 거의 예외 없이 불통의 늪에 빠지고 마는 게 정치의 현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끝이 아니다. 불통 정치가 소위 사이코패스 정치로 옮겨갈 치명적인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이코패스로 낙인찍히는 것은 정치인과 정권에 대한 최고의 모욕이 아닐까 싶다. 사이코패스 성향의 정치인이 힘을 얻고 위세를 떨치게 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무섭다.


 정치인과 사이코패스의 유사성에 관한 연구 결과가 있다. 대개 사이코패스 하면 무조건 연쇄살인범을 떠올리는 경향이 많지만,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는 유형도 많다고 했다. 2009년에 연쇄살인범 사이코패스와 정치인의 특성을 분석한 전미 경찰청장협회 짐 코리 부회장의 논문을 보자. 그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치인들이 이런 사이코패스의 특성을 그대로 드러내기도 한다”고 그의 논문에서 주장했다.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사이코패스 정치 지도자 히틀러와 스탈린이 그렇고 세계 각국 독재자 중에 사이코패스가 다수 건재하고 있다. 


 공감 능력이 없는 후안무치 뻔뻔함이 사이코패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한다. 우리는 뇌물을 받아먹고 줄줄이 감옥에 가고 있는 인사들이 혐의를 뻔뻔하게 부인하고 모르쇠와 기억나지 않는다는 거짓말로 국민을 우롱하는 모습을 헤아릴 수 없이 지켜보고 있다. 


 수 조 원의 손실을 내고도 해외로 이민 가서 잘살고 있는 자, 천문학적인 돈을 횡령하거나 무모한 투자로 기업•은행을 망하게 한 자, 사익을 위해 공익을 저버리는 자, 자국민 수 백여 명이 바다에 빠져 죽어 가는데 무슨 까닭인지 모습을 보이지 않는 채 제시간에 맞춰 두끼의 식사를 챙겨 먹으면서 머리를 다듬는데 90분(혹은 20분)이라는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던 자, 그리고 진심어린 위로도 할 줄 모르는 자. 사이코패스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우리는 이미 사이코패스가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의 정치인에 대한 누적된 불신으로 인해 이제는 그들이 제발 사이코패스가 아니기를 바라야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슬프고 안타까운 현실이다. 싸이코패스나 쏘시오패스는 정신질환이다. 신속한 대처와 치료가 최우선이다.

 

(본 칼럼은 본보 편집방향과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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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4
라스푸틴과 진령군, 그리고 2016년 대한민국(하)

 

(지난 호에 이어)
 황후는 모든 문제에 대해 무당에게 조언과 자문을 받아 결정하는 등 진령군의 말이라면 무조건 받아들였고 이로 인해 고종과 명성황후는 정치적 악수를 계속 두게 됐다. 명성황후를 손아귀에 넣고 있는 무식하고 간사한 무당이 득세하는 조정은 기강이 문란해지고 나라는 혼란하게 되어버렸다. 무당의 권력에 그 누구 아무도 대적할 자가 없었다. 


 권력 그 자체였던 명성황후에게 접근하려면 진령군을 통해야만 했기 때문에 벼슬길에 오르거나 승진하려면 진령군의 북묘를 찾는 것이 지름길이었다. 진령군의 말 한마디로 수많은 사람이 벼슬을 얻어 벼락출세 하거나 하루아침에 파직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진령군 거처 북묘 앞에는 벼슬을 구하는 자들이 보낸 뇌물을 실은 수레가 끊이지 않았다.


 진령군과 남매를 맺거나 심지어 수양아들이 되기도 하는 고위 관리들, 웃지 못 할 일들이 빚어졌다. 특히 진령군과 어머니와 아들로 의를 맺고 지낸 법부대신 이유인이라는 자는 원래 시정의 무뢰배였으나 사기 귀신 놀음으로 진령군을 속여 환심을 얻은 뒤 양주 목사, 현재의 경찰청장격인 경무사 등으로 승승장구했다.


 구한말의 대표적 지식인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이유인이 ‘진령군을 수양 어머니로 삼고 북묘에서 기거를 함께 했으므로 추한 소문이 돌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다 보니 조정에도 ‘진령군파’가 생겨 진령군이 국정을 농단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당시 조선이 동서열강의 각축장이 되어 내외적으로 어려운 정치 상황에 처해있었음에도 이런 가당치 않은 인사들이 무당의 입김으로 발탁되어 국정을 이끌어갔으니 조선이 망국이 되어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러나 하늘을 찌르던 진령군의 위세도 결국 종지부를 찍는 날이 왔으니, 고종 31년(1894) 갑오경장으로 진령군과 그 추종세력들은 모조리 구속되고 진령군은 모아 놓은 수많은 재산을 모두 몰수당하게 된다. 북묘인 관우 사당에서도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 삼청골 오막살이에서 근근이 살다가 1895년 을미사변 때 일본의 사주에 의해 명성황후가 무참히 시해되자 그 충격인지 얼마 후 따라 죽었다. 


 이로써 12년 동안 명성황후의 수호신으로 자처하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전횡을 일삼던 진령군의 권세도 황후의 죽음과 함께 이렇게 끝이 났다. 그러나 조정에서 '진령군파'가 실질적으로 축출된 건 1907년 이후의 일이니 그 폐해가 얼마나 심했던 것인지 알 수 있겠다. 


 이 진령군의 이야기는 무당의 혹세무민에 홀린 명성황후가 나라를 거덜 낸 뼈아픈 본보기로 국정을 책임지는 자나 국민이 깊이 경계하고 교훈으로 삼아야 할 일이 분명하다. 신영복 선생이 말하길, 역사란 과거의 일을 현대에 빗대어 맞추어 보고 재해석해서 미래에 대한 안내길을 끌어내는 것이라고 했다. 


 E.H.Carr는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과거에 비추어 현재를 배운다는 것은 또한 현재에 비추어 과거를 배우는 것이기도 하다. 역사의 기능은 과거와 현재의 상호관계를 통해 양자를 더 깊이 이해시키려는 데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신영복 선생의 역사에 대한 해석과 거의 일치해 보인다.


 명성황후를 등에 업은 진령군의 국정 농단의 역사는 120-130년 전 나라가 망해가던 시절의 너무나 황당하고 어이없는 야만의 역사인데, 그 일이 옛날얘기 같지 않은 2016년 요즘이다. 최순실 게이트는 결코 21세기 첨단 과학 문명의 시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이른바 야만의 ‘무당 통치’의 산물이다. 즉 반문명적인 ‘무당 통치’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헌정을 유린한 사건이다.


 누군가 최첨단 IT와 인공지능의 시대에 ‘야만의 갈라파고스가 돼 버린 한국’이라고 갈파했듯이 우리의 초라하고 적나라한 민얼굴을 그대로 만천하에 드러내는 일대 사건이다. 고위 공직자들이 모두 앞을 다투어 줄을 대고 머리를 조아렸고, 반발하던 공무원들이 한직으로 좌천되거나 쫓겨났고, 대그룹 재벌들은 천문학적인 돈을 뜯겼다. 대학 부정입학이 이뤄졌고 각종 이권에 개입했다.


 북핵 문제, 세월호, 위안부 협상, 사드 배치 등 국민의 생명과 국가 안보 등과 직접 관련된 중차대한 현안들이 어떻게 농락되었는지 아직은 알 길이 없다. 무엇보다도 대통령이라는 헌법기관 자체가 무당에 의해 무력화되었고 대통령이 무당에게 의지하고 국정을 운영해 왔다는 이 괴상망측한 사건이 문명화된 21세기 한국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에 온 국민은 망연자실 분노하고 있다.


 어느 누군가는 대충 덮고 가자고 말한다.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자연 발생하는 혼란이 우려된다는 논리다. 그러나 혼란은 문제를 해결 과정에서 언제나 생겨나는 피할 수 없는 필연이다. 혼란스럽고 복잡하니까 그냥 편하게 가자고 하면 언젠가 다시 제2, 제3의 유사한 일이 반드시 다시 일어날 것이다. 


 일시적인 사회 혼란이 두려워 피흘려 지켜낸 소중한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는 것을 미루거나 불의를 심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민주주의로 위장한 민주주의의 적들이 가장 바라고 기뻐할, 우리의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 대한 그들의 가장 무서운 복수가 될 것이다. 문명은 야만의 종식에서 시작된다는 말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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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6
라스푸틴과 진령군, 그리고 2016년 대한민국(상)

 

 제정 러시아 말기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에는 무능한 황제 니콜라이 2세와 신경질적이고 편협한 알렉산드라 황후, 혈우병에 시달린 병약한 황태자 알렉세이 그리고 요승 라스푸틴이 있었듯이 구한말 대한제국 이씨 왕조에는 고종 황제와 명성황후, 병약한 순종 그리고 무당 진령군이 있었다. 


 그리고 최면술, 요승, 무당, 황후의 총애, 막후 실력자, 비선 실세, 국정 농단, 그 외 추잡한 행실들. 2016년 지금, 목하 대한민국에서 자행되고 있는 일들이, 또다시 시공을 초월하여 어찌 이다지도 앞의 두 사건과 닮았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구한말 1866년 계모와 단둘이 여주에서 살던 가난한 처녀가 왕비로 간택된다. 고종의 왕비 명성황후의 이야기다.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조실부모한 까닭에 외척 발호의 병폐는 만들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왕비로 선택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명성황후가 요직에 앉혀 놓은 민씨 일족들에 의해 정권은 곧 부패해졌고, 그 결과 국민의 불만이 높아져 갔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풍수와 미신에 관심이 많았던 명성황후는 첫째 왕자가 항문이 없이 태어나 죽자 후사를 위해 무당을 가까이하게 되더니 세자로 책봉된 외아들 순종이 자폐증에 걸리는 불행이 겹치자 금강산 1만2천봉과 전국 명산마다 쌀과 비단과 돈을 바치며 치성을 드리는 등 점점 국고를 고갈시켜 나갔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이유인이란 무당은 점 한 번에 비단 백필과 만냥을 받았다고 하고, 한 맹인 무당은 정이품 대우를 받는 세자 전담 무당으로 고용돼 처첩들을 거느리며 살았다고 하니 그 실상이 어떠했는지 미루어 짐작된다. 


 게다가 명성황후는 풍수사상에도 지나치게 광적으로 집착했는데 1866년부터 1894년까지 28년 동안 친정아버지의 무덤을 무려 네 번이나 이장했다고 한다. 명성황후는 국가와 국민보다 오로지 자기 소생으로 왕위를 이으려는 생각에만 몰두해 있었다고 보인다.


 이에 나라꼴은 차츰 엉망이 되어갔고 결국 고종 19년(1882)에는 국고가 탕진되어 대궐을 지키는 군인들의 급료를 13개월씩이나 밀리게 되었다. 그나마 다급히 지급한 쌀에는 모래와 겨가 섞여있었을 뿐더러 그 양도 절반이나 떼먹은 후 지급하자 임오군란이 발생한다. 위정척사파와 명성황후에게 밀려난 대원군 세력이 폭동을 일으킨 구식 군인의 세력을 업고 쿠데타를 감행한 사건이었다.


 이때 분노한 군인들이 명성황후를 죽이려 경복궁으로 들이닥치자 상궁으로 위장해 시위 무관 홍계훈 등에 업혀 탈출하여 장호원 충주 목사 민응식의 집으로 도망가서 불안과 초조 속에서 지내게 된다.


 이렇듯 장호원에 숨어있던 명성황후가 날마다 생명에 위협을 느껴 불안하고 초조하게 지낼 뿐 아니라 고독에 몸서리친다는 것을 알아챈 여인이 있었으니, 그녀는 바로 나중에 진령군이 된 이성녀라는 무당이었다. 진령군은 원래 한양 천민 출신으로 충주에 사는 농부 김씨에게 시집을 갔으나 일찍 과부가 되자 생활이 어려워져 무당이 되어 점을 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무당 이씨의 외모는 피부색이 희고 덕이 있어 보이는 인상에 성격이 원만하고 부드러워 상대방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어느 날 갑자기 무당 이씨가 국망산 아래 나무꾼의 집에 은신해 있는 명성황후를 찾아가 마마라고 부르니 황후는 기겁했다. 


 놀란 황후가 어찌 내가 마마인 것을 아느냐 묻자 무당 이씨는 자기는 ‘관운장의 신령을 받아 천리를 내다보고 백년을 넘겨보는 영감을 가졌다’면서 자신의 꿈에 신령님이 나타나 중전이 장호원에 있다고 알려주어 찾아왔다고 대답하며 예언하기를, 팔월 보름께 황후를 모시러 사자가 올 것이고 환궁할 것이라 하였다.


 실력인지 우연인지 몰라도 정말로 권력을 장악했던 흥선 대원군이 위안스카이의 모략으로 청국에 납치되어 베이징으로 끌려가자 무당 이씨의 말대로 숨어 지내던 명성황후는 화려하게 한양으로 환궁하게 되었다. 


 황후는 죽음의 공포와 절망 그리고 고독 속에서 자신이 힘들게 지낼 때 점을 쳐 주었던 무당 이씨를 불러들여 지금의 성균관대학교 북쪽에 큰 당집을 지어 주고 정2품의 벼슬인 ‘진짜 영험한 무당’이라는 뜻의 진령군(眞靈君)이라는 호칭까지 내려주었다. 군봉은 특별한 공로가 있는 신하나 왕의 장인에게만 내리는 호칭으로 이는 무당이 봉군을 받은 조선 최초 사례가 되었다. 


 이제부터 바야흐로 진령군의 12년 무당 정치가 시작됐다. 진령군은 명성황후의 수호신임을 자처하고 세도정치의 중심인물로 거침없이 국정을 전횡하고 농단하였다. 왕후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진령군을 궁궐로 불러들였고, 무당 진령군은 아무 때나 궁궐을 무상출입하여 고종과 황후를 만났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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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12
우리는 지난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그는 엄청난 성욕의 소유자로 유명해서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그 주변에는 항상 여자들로 붐볐으며, 왕후가 그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둘 사이에 모종의 로맨스가 있다는 사실을 짐작해 볼 수 있다고 한다…’ 


 백과사전에 기술되어 있는, 어떤 역사적인 인물에 대해 설명한 부분을 일부 요약해본 것이다. 대개 권력이나 왕조의 패망 뒤에는 으레 드라마틱한 전설이 있게 마련이다. 중국에서는 한말의 환관들이 그랬었고, 신라시대 진성여왕의 주변이 그러했고, 고려 왕조 말의 신돈이라는 요승이 그랬다. 


 역사는 소위 그 ‘악마’들에게 왕조 몰락이라는 감당하기 어려운 거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떠넘긴다. 그럼으로써 모든 파국의 끝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유혈 참극의 짐을 훌렁 벗어던져 버리고 오랜 기간을 추종하며 기생했던 권력에 대한 배은망덕의 죄의식도 전가해버린다. 


 러시아 마지막 제정 로마노프 왕조에게는 왕조를 망하게 한 바로 그 ‘악마’가 그리고리 예피모비치 라스푸틴(Grigori Rasputin)이라 할 수 있다. 한 나라의 황실과 많은 귀족 여성들을 농락했던 그는, 300여년 제정러시아 말기 로마노프 왕조의 막바지에 등장하여 제정러시아의 운명을 재촉한 것으로 알려진 악명 높은 요승(妖僧)이요 ‘악마의 수도사’이다. 


 그는 신비적인 편신교(鞭身敎)의 일파에 가입해 각지를 떠돌며 환자를 고치고 미래 예언하는 능력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많은 농민들에게 영적 지도자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 1903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간 그는 비범한 치료 능력으로 인해 당시 궁정 사교계에 유행하는 신비주의 분위기에 영합되어 크게 환영을 받았다. 


 그러던 중 1908년 러시아 로마노프가의 황태자 알렉세이가 혈우병 출혈로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최면술 등으로 치료해줌으로써 대가 아주 셌던 황후 알렉산드라와 대가 약한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마음을 동시에 사로잡게 된다. 특히 황후에게 신처럼 떠받들어졌다. 극심한 신경쇠약에 시달리던 알렉산드라 황후는 라스푸틴 없이는 하루도 견디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라스푸틴은 이를 빌미로 황제 니콜라이 2세를 사실상 허수아비로 만들며 폭정을 일삼았다. 


 제정 말기에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수탈과 압제가 가혹했고 특히 유대인 등 소수민족 박해와 언론 및 사상 통제가 극심했는데, 이 정책의 지휘자는 무능했던 허수아비 황제가 아니라 사실상 라스푸틴이었다고 알려진다. 또 급료 인상을 요구하는 20만 명의 노동자를 총칼로 유혈 진압하여 짓밟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1917년 10월혁명)의 도화선이 된 1905년 1월 ‘피의 일요일’의 배후도 라스푸틴이라는 설이 있다. 


 한편, 그는 황제 앞에서 보인 겸손하고 신성한 농부의 모습과 달리 궁정 밖에서는 끝없는 방탕한 행각에 탐닉했다. 자신과 육체적으로 접촉하면 정화와 치료의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설교하며 정부들과 많은 여자들을 유혹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추문들이 니콜라이의 귀에 들어갔을 때 황제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비난한 사람들을 러시아의 오지로 좌천시키거나 자리에서 완전히 쫓아냈다. 


 1911년에는 총리 P.A. 스톨리핀이 황제에게 라스푸틴의 추문과 비행에 관한 보고서를 올려 일시적으로 그를 추방했으나, 황후 알렉산드라는 몇 달 후에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화내는 신경쇠약의 아내와 혈우병 아들이 걱정된 황제는 이제 라스푸틴을 비난하는 말들에 귀를 닫아 버리고 무시하기로 한 것이다.


 황후의 비호를 받은 라스푸틴의 권력은 1915년 이후 절정에 이른다. 특히 그는 1915년 정치적으로 무능했던 황제 니콜라이 2세를 부추겨 황제가 제1차 세계대전에 직접 참전하게 했고, 직접 군대 지휘를 맡아 전방 부대로 떠나는 황제가 황후에게 러시아의 내정을 맡기자 라스푸틴은 그녀의 개인 고문역을 맡았다. 이제 러시아는 완전히 라스푸틴의 천하가 된 것이다. 


 라스푸틴의 폭정은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만큼 엄청난 수준이었다. 황후는 라스푸틴의 말이라면 무조건 신봉했고, 황후의 비호 아래 러시아의 내정과 외교를 자기 마음대로 전횡했다. 교회 성직자의 임명에서부터 각료 선출, 군사문제에 이르기까지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전제정치나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숙청을 자행했다.


 라스푸틴은 절대적인 권력을 바탕으로 귀족여성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종국에는 황후 알렉산드라도 그의 정부라는 소문까지 났다. 거리에는 황후와 라스푸틴의 내연관계를 조롱하는 벽보가 나붙었다. 온 나라에 혁명의 기운이 무섭게 일어나게 되자 이에 두려움을 느낀 일부 황실과 귀족들은 라스푸틴에 의해 실각했던 니콜라이 대공을 옹립하려고 했고 라스푸틴을 암살해 제거하는 계획을 수립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결국 라스푸틴은 1916년 12월에 황제의 조카사위 등에 의해 처참하게 암살당한다. 그러나 그 죽음이 끝이 아니었다. 이 암살사건은 황후 알렉산드라에게 전제정치 원칙을 고수하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건하게 했지만 라스푸틴이 숨진 지 석달 뒤 혁명이 발발했고, 제정러시아는 전복된다. 10월 혁명으로 레닌 볼셰비키 사회주의공화국이 수립된 것이다. 


 그로부터 1년 남짓 후 황제와 황후, 그들의 자녀는 1918년 7월 볼셰비키 손에 총살 처형되었고 로마노프 왕가는 몰락하게 된다. 


 역사를 보면 대개의 경우 나라가 무너질 때는 여러가지 징후나 조짐이 나타나는 법이다. 1차대전 동안 러시아에도 숱한 망하는 징조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경제파탄과 민심이반이 진행 중임에도 불구하고, 자본가와 그들과 결탁된 정치인들은 국가의 혼란을 틈타 엄청난 이득을 챙기는 ‘조국 방위의 성전’으로 국민을 내몰고 있었다. 황제는 대가 약하고 유약했고 그의 뒤에는 드세고 신경쇠약에 시달리던 편협한 황후 알렉산드라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는 그녀가 절대 신처럼 떠받드는 괴승 라스푸틴이 있었다. 황제와 황후는 모든 우군세력마저도 저버린 채 갈수록 라스푸틴에게 의존했고 그는 국정을 마음대로 농단하고 인사를 좌우하여 기회주의자들을 등용하였고 결국 300년 제국의 패망이라는 파국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2016년 지금, 죽은 지 100년이 되는 제정 러시아의 요승 라스푸틴을 연상시키는 이야기들이 최근 몇 년 사이에 여기저기서 심심치 않게 떠돈다. 그렇지 않기를 진심으로 소망해보지만 한편 걱정되는 일은, 소위 ‘비선(秘線)’ 인물들에 관한 소문들과 더불어 경제계뿐만 아니라 정치권의 최고 관심 사안에도 역술인 혹은 무속인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비선 실세’, ‘무속인’ 같은 말이나 주변 정황에서 왠지 ‘라스푸틴의 냄새’가 풍겨 나와 나라를 사랑하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불안하다. 만에 하나라도 그렇다면 ‘현대판 라스푸틴’으로 불릴 만하지 않을까? 요설이 난무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곧 뭔가 국가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정상적으로 정치권한을 수행하고 행사해야 할 자리에 가당치도 않은 인물이 개입한다면 그때엔 제정러시아 왕조의 운명처럼 바람 앞의 등불일 뿐이라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E.H 카의 말을 적어본다. 그는 <역사란 무엇인가>란 책에서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 또는 ‘과거 사실과 현재의 역사가의 대화’라고 말했다. 


 “과거에 비추어 현재를 배운다는 것은 또한 현재에 비추어 과거를 배우는 것이기도 하다. 역사의 기능은 과거와 현재의 상호관계를 통해 양자를 더 깊이 이해시키려는 데 있는 것이다. 위대한 역사란 분명히 과거에 대한 역사가의 전망이 현재의 문제에 대한 통찰에 의해 조명되는 바로 그때 쓰인다.” - E.H 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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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ngkyu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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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02
멋진 스승, 좋은 제자

 

 성우제 작가의 신간 <딸깍‘ 열어주다(멋진 스승들)>를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해지고 이름 모를 화가 몽글몽글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나는 느꼈다. 왜 일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책장을 덮고 또 생각을 해보았으나, 그 불편함과 화남에 대한 일말의 단서는 잡히는 듯 했지만 개운하게 전체 윤곽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작가는 책에서 말한다. “스승이 부재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잊어버린 것이고 또 찾지 않았을 뿐”이라고. 


 과연 나에게는 '스승'이 있는가? 그리고 작가의 말처럼 '잊고 있는 스승'이나마 있는가? 그러나 그다지 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잊은 선생님'은 많이 계신다. 한국에서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마쳤으니 당연하게 고등학교까지 열두 분 그리고 대학까지 합하면 못해도 이십여 분의 선생님이 계신다. 


 여태껏 인사를 제대로 드리지 못하고 살아가니 ‘잊은 선생님’이 많은 것은 사실이나, 과연 나에게 ‘잊은 스승’은 있는가? 참으로 마음의 심란함이 무겁게 나를 짓누른다. 화가 나서 책을 더 읽어 나가기 힘들다. 


 조선 중종 때 지어진 최세진의 한자 학습서 <훈몽자회>에는 스승의 유래에 대한 대목이 있다. '스승'은 중을 높여 부른 말로 '사승(師僧)'에서 온 것이라고 적고 있다. 불교가 흥했던 고려시대부터 그렇게 불렸던 듯싶다. 여기서 말하는 스승은 선생과 달리 지식은 물론이고 삶의 지혜와 도덕적인 것까지 다 아우르는 의미로 사용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옛말에 “경사(經師)는 많으나 인사(人師)는 찾기 어렵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경사는 경전을 읽고 가르쳐주는 선생이고, 인사는 사람을 가르치는 스승을 의미한다. 사마광도 역시 비슷한 말을 했다. "선생은 만나기 쉬워도 스승은 만나기가 어렵다"고. 


 요새도 이런 풍조는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 온통 세상은 소위 ‘선생님’들 천지다. 이 선생님, 김 선생님, 은행에 가도 선생님, 가게에 가도 선생님, 모두가 선생님이다. 그러나 모두들 ‘스승’은 참으로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탄스러워 한다. 사실 남을 가르친다고 해서 누구나 다 스승이 되는 것이 아니며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배운다고 해서 그 사람이 다 제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나에게는 왜 스승이 없을까? 생각해본다. 사주 명리학에는 '상관(傷官)'이라는 용어가 있다. 이 상관의 의미를 한마디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대체적으로 이 기질을 가진 자는 다소 재주가 있고 기존의 것을 응용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제도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강한 야성의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강한 고집과 직언 직설을 잘해 상급자가 싫어하는 사람의 전형이 되기 쉽다고 명리학에서는 성품을 풀이한다. 


 따라서 이런 기질의 사람에게는 상사나 윗사람이 좀처럼 없게 되는 경향을 보인다. 좋게 표현하면 소신과 솔직함이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달리 표현하면 독선적인 성격의 소유자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당나라 사람 유빈이 자신의 자녀를 교육하기 위해 지었다는 다섯 가지 계명이 전해진다. 거기에는 승기자염지(勝己者厭之)란 말이 나오는데, 이는 사람들은 대개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싫어한다는 의미의 말이다. 
 사주 명리학에 빗대어 설명한다는 것이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이지만 나에게는 전술한 이런 상관의 기질과 승기자염지하는 마음이 다분하다. 그런 연유에서 그런지 나는 우선 쉽게 남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경향이 은연 중 마음속에 많이 자리잡고 있음을 솔직히 인정한다. 


 어떤 이의 스승이 되고, 제자가 되는 것은 그 개개인 각자의 극히 개인적인 선택의 과정이 필수적으로 요함이 자명하다. 즉, 우리는 여러 선생님들 중에서 자신의 기준에 따라 자신과 소통이 잘 될 것 같고 진심으로 마음에 드는 한 두 분을 선택해서 스승으로 모시게 되고, 또 스승은 수많은 학생들 가운데 몇 명의 학생을 선택해서 고를 때 제자가 된다. 


 예로부터 군사부일체라 했지만, 사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무조건적이어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와 많이 다르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 맺음은 부모 자식 사이에서 보이는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어서 철저히 각자의 주체적인 선택에 기반을 둔다고 할 수 있다. 


 불교의 초기 경전인 <맛지마니까야>에는 이른바 ‘바른 스승’을 검증하고 수행하는 방법이 나오는데, 부처가 스승을 검증하는 방법은 너무나도 엄정하고도 단호하다고 한다. 우선, 스승의 말과 행동을 근거로 스승의 마음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추론해 그 스승의 마음이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상태인지를 본 후에야 비로소 스승으로 모신다고 한다. 


 그러나 일단 스승으로 삼은 후에라도 혹시 그 스승이 청정함을 잃어버리면 하시라도 그 스승을 떠나라고 말한다. 부처도 두 분의 스승을 만나 가르침을 받다가 스승의 부족함을 알자 바로 그 스승을 떠나 혼자서 수행했다고 알려졌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동안 나는 수행하는 불자도 능력이 탁월한 학인도 못되면서 이런 저런 그럴싸한 이유를 들어 스스로 스승의 기준을 높게 만들었고, 스승을 지고한 자리에 상정해 놓고서는 그에 합당한 스승을 찾는 시건방을 떨고 있었다. 어찌 성인 반열에 오르지 않고서야 인간이 그렇게 청정하여 무결점의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나는 정진하는 수행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태껏 스승을 모시지 못한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 상관의 기질과 승기자염지하는 교만한 마음이 결정적인 이유인 듯싶다. 


 따라서 이 책 <딸깍‘ 열어주다(멋진 스승들)>가 이런 나의 불치의 병을 서서히 들추어내자 나는 점점 불편해졌고 화가 난 것이리라. 이런 면에서 이 책이 독자들로 하여금 ‘자기 스승을 느끼고 발견하도록 하는데 작은 자극이나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작가의 바람은 이미 완벽하게 성공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작가에게 깊이 감사의 마음을 보낸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더 깊이 깨달은 한 가지가 있다. 겸손함이다. 내가 보기에 모든 스승들과 제자들의 공통적인 미덕 중에 하나가 바로 겸손함 이었다. 구도자 혜가(慧可)는 달마대사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자신의 팔까지 잘랐다는 일화에서 볼 수 있듯이, 스승을 찾고자 하는 겸손하고 간절한 마음을 엿보게 해준다.


 ‘좋은 제자’가 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새삼 알겠다. 성실하고 겸허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좋은 제자가 되기란 참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어진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인간 사회의 관계 맺음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가치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멋진 스승을 모신다는 것과 좋은 제자가 된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도 무한한 축복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 <딸깍‘ 열어주다(멋진 스승들)>의 저자가 정말 많이 부럽다. 참된 스승이 존재 하지도, 찾아 볼 수도 없다고 푸념하면서도 오늘도 애타게 스승을 찾는 우리 모두가 꼭 읽어 볼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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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2
스시와 김밥, 그리고 세계화

 

 “한국에서는 기껏해야 이 삼 천원이면 먹을 수 있는 김밥이 왜 이렇게 비싸요?” 


 시내 외곽의 조그마한 한국 음식점. 한 손님이 간절히 부탁해서 메뉴에도 없는 김밥을 어렵게 만들어 줬더니, 맛있게 먹고 난 후 식당 주인에게 툴툴거리며 불평하더라는 이 에피소드는 이민 초기에 들었던 우리의 한국 김밥이 서글픔으로 다가오는 일화다. 


 "음식은 추억의 예술이다. 추억 속 음식에는 함께 먹던 사람들의 훈훈한 정과 아득한 세월의 아쉬움이 얽히고설킨 맛이 있다"는 '성석제의 음식론'에 가장 맞아떨어지는 한국 음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김밥을 꼽지 않을까 싶다. 


 김밥은 소풍, 운동회 등 유년 시절의 추억과 성년이 된 후에도 야식, 여행 등 여러 기억들과 섞여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김밥이 주는 설렘을 하나씩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김밥의 주재료인 김을 우리 선조들은 언제부터 먹기 시작했을까? ‘김’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김을 최초로 양식했고 그 양식 법을 널리 보급시켰다고 알려진, 인조 때 광양 태인도 사람 김여익의 성을 따서 '김’이라고 정했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서 김에 관한 최초의 문헌 기록으로는 고려의 일연 스님이 편찬한 <삼국유사>가 있다. 다른 기록으로는 명나라의 <본초강목>이 있고, <경상도 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는 지역의 토산품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럼, 일본의 김 역사는 어떨까? 오후사쓰요이 박사의 <바다 채소>라는 책에는 에도시대 교호 초기부터 김을 먹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고 쓰여 있고 <각반부류>라는 1,802년 문헌에 현재 김밥과 비슷한 김밥의 원형에 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8세기 초, 중반 이후부터 김을 취급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우리는 한국의 경우 신라시대부터 혹은 늦어도 조선 초기인 1,400년경부터 그리고 일본은 18세기 초, 중반부터 김을 식단에 올리기 시작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항상 궁금했다. 정월 대보름에는 비록 단순한 형태지만 오곡밥과 나물을 김에 싸서 먹으면 눈이 밝아진다는 풍습에서 나온 ‘복쌈’이라는 풍속 음식이 있었던 것 등 한국이 일본보다 김을 이용한 음식 문화에서 훨씬 더 오래된 전통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스시는 세계적인 음식이 되었는데 김밥은 왜 못 되는가? 


 집에서 일식 스시롤의 대표격인 캘리포니아롤을 만들어 보았다. 식초에 소금과 설탕을 섞어 밥을 비빈 후 통깨 몇 알 뿌리고 고명으로 오이와 맛살 그리고 아보카도 세 가지가 그 내용물의 전부다. 


 고명의 종류나 재료의 단가 면에서 한국의 김밥보다 별반 나은 점이 없는 것 같은데 왜 일본의 스시는 고급화와 세계화에 성공했고, 김밥은 저가의 음식에만 머물러 있는가? 


 그 이유를 찾아보는 방법으로 일본의 스시가 세계화되는 과정을 되짚어 보는 것도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 여겨진다.


 스시가 일본에서 대중화가 된 계기는 도쿄 대화재(1,657년)였다. 세계 역사상 3대 화재에 속하는 이 대화재 이후 도시 재건 과정에서 값싸고 손쉬운 서민 먹거리로 발달된 음식이 바로 스시였는데, 1960년대까지만 해도 스시는 일본인만 먹는 지역 음식이었다. 


 그러다가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전후해서 일본은 국가적 차원의 대대적인 홍보와 지원을 시작했고, 일본의 경제가 성장하면서 스시는 서양에서 고급 음식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미국 내에서도 다이어트가 사회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이 스시의 세계화를 더욱 촉진시켰다.


 그러나 1980년대 영화 '월스트리트’에서 마틴 쉰이 일식 초밥, 스시를 들고 냄새를 킁킁 맡는 장면에서 볼 수 있듯이 스시는 밥 위에 날 생선을 올린 다는 것 때문에 서양인들에게 혐오감을 주는 기피되는 음식이었다.


 저널리스트 사샤 아이센버그가 집필한 책 '스시 이코노미'에 따르면 스시의 미국 연착륙은 퓨전 스시 캘리포니아롤에 의해 비로소 이뤄졌고, 영화배우 로버트 드니로와 레스토랑 ‘노부’를 공동 경영한 스시 쉐프 '노부 마츠히사'에 의해 스시의 세계화는 완성되었다고 한다. 


 또 노부 레스토랑의 수석 주방장 출신으로 '아이언 쉐프’라는 요리 대결 TV프로를 통해 일본 요리가 얼마나 수준 높은 음식인지 인상 깊게 각인시킨 일식 요리사 ‘'마사하루 모리모토’도 스시의 세계화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공로자다.


 이런 노력과 성과들을 기반으로 아름다운 접시를 활용한 일본 특유의 미의식과 엄격한 식사 예절이 더해지면서 스시는 상류층이 즐기는 신비로운 동양의 고급 음식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헐리우드 영화에도 이런 트렌드가 속속 반영되어 고급 파티나 상류층의 식사 장소 또는 전문직 종사자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스시 레스토랑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게 된다. 이제 값싼 서민 음식이었던 스시는 일본의 전통적인 고급문화라는 이미지메이킹에 성공하며 명실상부하게 세계적인 미식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상에서 본 스시의 세계화 과정을 요약해 보면, 일본 정부의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지원정책, 일본의 전통문화와 접목한 마케팅, 만화나 영화 등 대중문화를 통한 자연스러운 음식 문화 전파, 음식 및 조리 과정의 표준화와 규격화, 유명한 외국인을 활용, 외국인의 입맛에 맞는 소스 및 퓨전 요리 개발, 스타 쉐프의 발굴과 육성, 고급 요리와 건강식으로의 포지셔닝 성공 등 통상 우리가 알고 있는 요인들이 스시의 세계화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분석과 전략은 현재 우리 한식의 세계화 방안으로 지속적으로 제시되어 적용하고 있는 것들로 단기적인 반짝 효과만을 바라고 진행해서는 안 되는 장기적이고 지속적으로 추진되어야 하는 중요한 방안이라는 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나는 이것들에 앞서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한국인들의 우리 문화와 음식에 대한 깊은 애정과 소비, 이른바 문화 향유의 문제를 거론해 보고자 한다. 


 ‘이탈리아 구두를 명품으로 만든 건 이탈리아 여성의 높은 안목이다’ ‘물을 마시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문화의 소비자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표현한 말이다. 


 이탈리아 국민들의 구두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에, 파리 시민들의 와인에 대한 강한 집착이 있었기에 이태리 구두가 명품이 될 수 있었고 프랑스 와인이 세계적인 와인이 될 수 있었다는 말이다. 


 도쿄 시민들의 스시에 대한 열정은 보는 이의 혀를 내두르게 한다고 한다. 맛을 보기 위해 몇 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리는 열정이 일식을 세계적인 음식으로 만든 것이다. 


 처음에 스시는 캘리포니아의 일본인 정착촌 ‘리틀 도쿄’에 출장 온 일본 비즈니스맨의 열렬한 애호로 미국에서 조금씩 선호되기 시작했고, 미국인들이 먹기 시작하자 세계적인 음식이 되었다. 


 이렇듯 자국 국민들의 열정적인 문화 향유 저력이 한 문화를 전 세계로 확산될 수 있게 하는 힘의 원천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한국 음식 문화의 세계화를 논하기 전에 이탈리아, 프랑스,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자신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우리 음식을 즐기고 발전시켜 세계화 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는가를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런 측면에서 얼마 전 한국의 국정을 책임지는 분들이 모여 ‘관광산업 경쟁력 강화 방안’을 논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나왔다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게 한다.


 "김밥 한 줄에 만 원씩 받는 식이면 (관광객이) 더 오는 게 아니라 관광객을 쫓아내는 것이다." 


 김밥은 정녕 만원 이하의 싸구려 음식으로 영원히 머물러 있어야 하는가? 고급스럽고 비싼 음식이 되면 안 되는 것인가? 우리는 왜 스스로 김밥을 값싼 음식으로만 평가절하하고 가격을 책정해서 팔아야만 하는가? 


 일반 국민부터 국정을 책임지는 사람까지 우리는 김밥의 고급화 및 세계화를 시작도 하기도 전에 이미 자포자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 김밥을 새롭게 포지셔닝 해야할 때라 생각한다. 


 전 세계 각지에서 김밥을 말면서 뱉어낼 시름 깊은 한숨소리와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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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ngkyu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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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08
또 다른 한강을 고대하며

 

 “한강 책 있어요?“ 나는 서점으로 들어서면서 주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예, 여기 있습니다.” 웃는 얼굴로 활기차게 대답하고서는 서점 주인이 성큼성큼 나를 이끌고 간 곳은 대하소설 <한강>이 꽂혀있는 서가였다. 


 “아… 그게 아니고… 한강 작가의 책이요.” 서점 주인과 나 사이에 잠시 어색하고 겸연쩍은 정적이 흘렀다.


 얼마 전 누군가의 글에서, 인터넷 검색창에 ‘한강’이란 단어를 치면 한강의 야경이 먼저 나온다고 하기에 실소를 했었는데, 내가 며칠 전 경험한 서점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은 에피소드였다. 


 사실 이것은 일반적인 경우 지금껏 전혀 이상치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요 며칠 사이에 상당히 우스운 사례가 되어버린 것은, 바로 작가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 때문이다.


 해마다 한국인들이 그렇게나 열망하는 노벨상이 결정될 즈음이면 한국은 매번 몸살을 앓곤 하는데, 특히 노벨 문학상 수상이 거론되는 저명 작가의 경우는 여러 가지 이유로 그 기간이 되면 아예 한국에 머물지 않고 외국에 나가 있기도 한다. 그런데 그 상에 버금간다는, 프랑스의 콩쿠르상과 더불어 세계 3대 문학상에 해당하는 영국의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그다지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한국의 40대 작가가 탔다고 하니, 속된 말로 한국은 난리가 난 듯 야단법석이 되었다. 


 맨부커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작가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의 판매 속도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1분에 10권이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는데 최근 15년간 가장 빠른 속도라고 한다. 어떻든 매우 기쁜 일이니 우선 한강 작가의 맨부커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요사이 느꼈던 단상을 몇 자 적어 보고자 한다.


 우선, 왜 뜬금없이 출판된 지가 9년이나 지난 한강의 <채식주의자> 일까? 나는 이 점이 매우 궁금했다. 한강은 시인으로 데뷔했지만 '폭력과 자유'라는 주제로 소설 창작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끈질기게 폭력을 해부해 왔다. 서사를 다루는 담백하고 짧은 그녀의 시적인 문장에는 판타지와 그로테스크가 현실주의와 함께 잘 녹아있다고 평가된다. 


 특히 1970년 광주에서 출생한 그녀는 13세 때 아버지 한승원 작가가 보여준 5.18광주민주화운동 사진집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작가가 된 후 소설을 통해 국가폭력에 의해 살육을 당한 영혼들, 그리고 육식과 남성적 폭력으로 상처입은 자들의 신음을 대신 외쳐왔다. 


 사진집을 본 후 ‘인간은 왜 이렇게 폭력적이며, 인간은 폭력을 거부할 수는 없는 존재인가?’라는 의문이 생겼고, 그 계기로 <채식주의자>를 쓰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인간은 폭력적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왜 폭력 앞에서 뭔가 하려고 나서는지 그 이유가 다시 궁금해졌다고 한다. 


 즉, 한나 아렌트가 유대인 학살자 아이히만에게서 본 ‘악의 평범성’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은 아우슈비츠 대학살을 저지를 수 있는 존재인 동시에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아이를 구하려고 자기의 목숨도 던지는, 모순에 찬 이상한 존재로 여겨졌다고 한다. 이 두 가지 의문을 돌파하지 못하면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겠다는 생각 끝에 나온 작품이 <소년이 온다>라고 작가 한강은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러나 그녀는 베스트셀러 작가도 아니었고, 꾸준히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해온 작가가 왜 갑자기 그리고 어떻게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것일까? 이 질문은 한강 이후에 나올 또 다른 한국의 세계적인 작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마음에서 나온 의문이다. 나는 그 의문의 해답을 이번 수상의 최대의 공로자인 28세의 젊은 번역자 데보라 스미스의 지난 3월 인터뷰에서 찾아보았다. 


 스미스는 번역할 때 어디에 중점을 두느냐는 질문에 '무엇을 말하느냐'보다는 '어떻게 말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 번역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문학적 감수성’이라고도 했다.

데보라 스미스의 이런 생각은 맨부커상 심사위원장 보이드 톤킨이 <채식주의자>에 대해 ‘잊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하고 독창적’인 작품이라고 말한 작품평과 그 맥이 닿아있다고 여겨진다. 


 문학 작품을 고르는 이런 시각과 태도는 데보라 스미스가 작가 한강 다음으로 현재 주목하고 있는 한국 작가들이 배수아, 이인성, 박상륭 등이라는 사실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거명된 이 작가들은 기성의 예술 관념과 형식을 벗어나 한국문학의 거듭된 미학적 갱신을 추구하는, 새롭고 혁신적인 작품을 쓰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젊은 아방가르드 작가들이다. 


 그러나 사실 이 작가들의 면면을 보면 그들의 이름은 일반 독자에게 매우 낯설다. 베스트셀러 작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소위 잘나가는 유명 작가들도 아니다. 50만 부 이상이 팔린 베스트셀러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시인 최영미가 최근 빈곤층에게 주는 생활보조금 신청 대상자가 되는 한국에서, 문학하는 사람들이 아사해가는 슬픈 현실에서, 이 작가들을 알고 있는 한국 독자들은 분명 대단한 한국문학 애호가임에 틀림없다. 


 여기서 한국과 세계가 어떻게 문학을 다르게 바라보는지, 그 시각 차이를 극명하게 볼 수 있지 않을까? 한국 사람들이 자주하는 말 중에 ‘내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 소설이 몇 권’이라는 말이 상징하듯, 한국인들의 과거와 현재의 굴곡진 삶의 모습들은 복잡다단하며 또한 너무나 극적이면서도 다이내믹하다. 게다가 매우 극단적이기도 해서 수많은 한국소설들의 중요한 소재거리가 되었고 탁월한 작품들이 많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문학 작품 속에 나타난 그 서사 구조나 이야기의 탁월함은 단지 우리 한국인에게만 탁월한 것이지 인류 전체 공통의 정서나 관념 그리고 수시로 새롭게 시도되고 변화되는 세계문학의 형식과 기법에서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는 ‘우리들만의 것’ 이지 않았나 여겨진다. 


 그런 점에서 번역자 데보라 스미스의 다음과 같은 조언은 매우 귀중하다. ”사람들이 문학에서 원하는 것은 새롭고 흥미로운 것이죠. 그런 면에서 한국문학은 보물창고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개개인의 작가와 작품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컨대 ‘한국 작품’이라는 사실로 승부하려 한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죠. 아직 한국이나 한국문학에 대한 흥미만으로 책을 사는 팬층은 없으니까요.” 


 사실, 한국 문단이나 평단에서는 2014년에 나온 한강의 다른 작품 <소년이 온다>가 <채식주의자>보다 훨씬 더 좋은 평을 받아왔고,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을 받은 이후에도 마찬가지로 <소년이 온다>가 한강의 최고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그런데 왜 20대의 젊은 외국인 번역자의 파란 눈에는 <채식주의자>가 더 강렬하게 각인되어 선택되었을까? 그리고 결국에는 맨부커상을 수상하는 소위 ‘한강의 기적이 일어났을까? 


 물론 <소년이 온다>가 <채식주의자>보다 못하다거나 국제적인 경쟁력이 부족하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단지 그동안 한국문학의 국제 문학상 수상 실패 원인으로 여러 가지 이유들이 거론되었지만, 특히 세계적 조류에 부응하지 못했던 점과 리얼리즘 서사에 갇혀있다는 등의 비판이 줄곧 있어왔는데, 이 점을 이야기해보고자 예를 든 것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항상 높은 대중적 관심과 함께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의 작품 속에서 확보하고 있는, 이른 바 ‘세계성’이 어디서 연유하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성은 그가 일본문학의 전통과 울타리에만 안주하지 않고 세계문학, 특히 그가 좋아하는 미국문학의 흐름과 지속적인 유대 및 소통을 맺어왔기 때문이라고 말해진다. 


 이제 한국 작가들도 한국 문학작품에만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 외국 문학작품을 통해 외국 작가들의 고민과 새롭게 시도되는 내용과 형식 그리고 기법 등을 배워서 우리 문학에 발전적으로 적용해보는 작업을 지속해 나가야 할 것이다. 나를 남에게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남을 아는 것이 더 필요한 시점이다. 


 작가는 자신이 관찰하고 경험한 것이 비록 유유히 흐르는 거대한 삶 속의 작은 단면에 지나지 않더라도, 인간의 내면 깊숙이 파고 들어가 사고한 후에 문학이라는 형식을 통해 독창적인 자기만의 스타일로 인류 전체에게 유의미한 메시지를 던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떤 작가의 작품이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에서 평가되고 점하는 위치는 그 작가만의 유니크한 스타일의 존재 유무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한강은 묵묵히 그것을 해냈고 한강문학의 ‘세계성’을 당당히 인정받은 것이다. 다시 한 번 맨부커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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